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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수수밭 옆에 남편과 아이를 묻고 돌아오는 길은 멀었다. 돌아갈 곳이 없었으므로 그녀는 몇번이고 익숙한 길을 헤매야만 했다.

유난히 그 해의 수수꽃은 색이 붉었다. 그 색이 꼭 남편과 아이가 흘렸던 피를 보는 것 같아서 와파린은 꽃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붉은 수수꽃은 그 해에 붉었고, 그 다음 해에도 붉었으며 그 다다음 해에도 붉었다.

와파린은 끝끝내 붉은 수수꽃을 마주할 수 없었다. 선혈과도 같은 꽃잎을 볼 때마다 남편과 아이의 죽음이 눈 앞에 그려졌다.

그녀는 세번의 제사를 연거푸 포기했다. 네번째 수수꽃은 다시 제 색을 되찾았지만 와파린은 여전히 꽃잎을 마주할 수 없었다.

시체처럼 스러져가는 폐가를 불살랐다. 그 날 이후 집 안엔 사람이 없었으므로 집은 집이 아니라 폐가가 되었다.

의사 가운을 상복처럼 두른 채 와파린은 폐가를 나섰다. 유골은 챙기지 않았다. 죽은 사람을 챙기는 것은 산 사람의 몫이었으니까.

마지막 사랑을 다시 가슴에 묻고 그녀는 의사로서의 일을 시작했다. 전장에서 흘린 피를 병원에서 거둔 피로 씻어내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여기까지 왔다. 혈액학 박사 학위를 따고, 로도스 아일랜드에 탑승해 오퍼레이터들을 치료했다.

언젠가는 이 모든 갈등의 원인인 광석병을 뿌리뽑으리라. 가슴에 묻어둔 사랑을 거름삼아 와파린은 새로운 목표를 가지고 다시 제 삶을 기워냈다.

그리고, 박사를 만났다.

다시 깨어난 박사는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예전과 비교한다면 영 어리버리한 느낌이었으나 마주하기에는 보다 수월했다.

박사의 정액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았다. 잘하면 그녀의 새 목표를 이루어 줄 수도 있는, 기적과도 같은 가능성이었다.

그 가능성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여성의 몸이 필요했다. 와파린은 기꺼이 자신의 몸을 제공했다.

오래 전 묻어둔 남편과 자식의 잔재가 마음 한 구석을 괴롭혔지만 애써 무시했다. 그 날 이후 가족을 잃은 아내는 3년 간의 괴로움 끝에 죽어버렸으니까.

남편을 위해 쌓아올린 성기술을 사용해 박사를 사정시켰다. 자식에게 물렸던 젖가슴을 그에게 물렸고,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던 혓바닥으로 그의 성기를 빨았다.

'다 내던졌다고 생각했는데.'

다 지워버린줄로만 알았다. 박사가 발기한 몽둥이로 그녀의 사타구니 사이를 비비기 전까지는.

뜨겁고 커다란 그의 페니스가 수없이 그녀의 배꼽 위를 지나쳤을 때, 그녀는 깨달았다.

'아, 아직 남아있었구나.'

여전히 그녀의 심장 어딘가에 남편의 흔적이 남아있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저 두껍고 거대한 창이 자신의 안을 파고든다면, 그래서 자신의 남편이 미처 도달하지 못했던 그 장소마저 박사의 색으로 물들어버린다면,

자신에게 남아있던 남편의 잔재조차 영영 사라져 버릴 것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가비알을 보냈다. 절대 삽입은 하지말라는 경고를 단단히 준 채로.

만약 가비알이 연구를 위해 자신의 순결마저 내버린다면 그녀를 보낸 와파린 자신도 그 정도의 희생을 치뤄야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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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파린, 괜찮아?"

눈 앞이 뿌옇다. 아무리 나이가 많기로서니 이제와서 백내장이라도 걸린 건 아닐텐데.

그새 정액이라도 튀었나. 손을 들어 닦아보니 말간 액체만 묻어나온다. 딱히 슬프지도 않은데 왠 눈물이람.

박사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 안심하라는 듯 미소를 지어보이자 오히려 얼굴에 불안이 더해진다.

"괜찮아.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나서."

다시 얼굴을 무표정하게 굳힌다. 어조는 무뚝뚝하게, 허나 약간의 물기가 묻어나오는 것은 어쩔수가 없다.

"수고했어. 박사. 피곤할테니 이제 그만 가봐."

"괜찮겠어? 아까는 내가 미안..."

탁, 뻗어오는 손을 팔을 들어 쳐낸다. 순식간에 얼어붙은 공기. 아, 하고 새어나오는 짧은 탄식.

"괜찮아. 가 봐."

단호한 축객령에 박사는 옷을 주워입었다. 방 밖을 나서는 모습이 약간은 처량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