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타 기사단 또는 로도스 기사단이라고 불리는 구호기사단(Knights Hospitaller)의 정식 명칭은 "성 요한의 예루살렘과 로도스와 몰타의 주권 군사 병원 기사단"으로, 600년 예루살렘에서 순례자를 위한 병원에서 유래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기사단임


여기에 선생들이 있다면 구호기사단이라는 명칭이 아주 익숙할거임

블루 아카이브에 나오는 세리나, 하나에, 미네가 속해있는 동아리 구호기사단도 이름을 여기서 따왔음

물론 이쪽은 영어명칭이 Remedial Knights로 차이는 있음


아무튼 구호기사단의 근본은 위에서 말한대로 600년대 예루살렘의 병원에서 시작됨

1차 십자군 전쟁 당시 십자군에게 예루살렘이 포위당했을 때도 이들은 의료 봉사를 계속 했고, 1113년엔 교황의 명령으로 기사단으로 개편되어 예루살렘 방어부터 순례자 호위 등의 임무를 수행하며 점점 세력이 커졌고, 당시 이슬람 장기 왕조의 누르 앗 딘(누라딘)과 살라흐 앗 딘(살라딘)을 상대로 요새 크라크 데 슈발리에를 지켜낸 유명한 기록이 있음


아무튼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구호기사단은 1291년 십자군의 거점이었던 아크레가 함락되고 예루살렘 왕국이 모든 영토를 상실하고 키프로스로 밀려나면서 함께 밀려났고, 구호기사단은 새로운 거점으로 삼기 위해 당시 동로마 제국의 영토였던 로도스 섬을 침공해 점령했음

이때 십자군 전쟁이 끝나면서 프랑스에서 고리대금업을 하며 재산을 축적하던 성전기사단이 프랑스 왕의 공작으로 악마숭배 누명을 쓰고 기사단장이 화형, 기사단이 완전히 공중분해되면서 이들의 재산 대부분이 구호기사단으로 흡수됐고, 그 덕분에 구호기사단은 유럽 곳곳에 지부를 설치하며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음


하지만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의 삼중 성벽을 기어이 뚫고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면서 비잔티움 제국이 멸망했고, 서유럽의 성전에 대한 열정도 사그라들면서 순례자의 수도 줄어들었음

순례자 호위와 서유럽의 후원금이 주요 수입원이었던 구호기사단은 사실상 망하기 일보 직전이었고, 로도스 섬의 위치 상


(빨간 별이 로도스 섬, 그 위에 튀르키예가 당시 오스만 제국, 로도스 섬 아래가 지중해)

오스만 제국 바로 옆에 있었기 때문에 희망은 없는 것처럼 보였음


근데 여기서 구호기사단은 이 위치를 보고 기가 막힌 생각을 함


오스만 제국에서 지중해를 건너서 무역을 하기 위해 당연히 지중해 쪽으로 항구를 지어놨는데, 호기사단은 이 항구와 오스만 제국의 선박을 상대로 무차별적인 해적질을 시작함

당시엔 "카톨릭교도가 이교도에게 행하는 죄악은 죄가 아니다"라는 것이 통념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이들의 행동은 카톨릭교도의 관점에서 아무 문제가 없었고(참고로 이슬람교도 마찬가지여서 서로 노략질을 하고 지랄발광을 하던 시절임) 구호기사단은 오스만 제국의 상선 약탈, 무슬림을 납치하여 서유럽에 노예로 팔아먹는 식의 인신매매로 자금을 충당했음


구호기사단이라는 이름 달고 해적질을 하는 미친 놈들을 보며 오스만 제국은 어이가 털렸고, 이들을 당장 족치고 싶었지만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에서 상당한 손실을 입었던 오스만 제국은 당장 쓸 병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은 해적은 모든 해상 무역 국가의 공공의 적이기 때문에 베네치아 등의 해상 무역 국가들이 반응할 것이라고 생각했음

근데 이 해상 무역 국가들은 구호해적단에게 피해를 입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구호해적단이 "구호기사단은 카톨릭 교도를 공격하지 않는다!"라는 논리를 내세워서 카톨릭 국가들의 선박은 일체 공격하지 않았기 때문임


그래서 당시 술탄이자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켰던 메흐메트 2세가 통치 말년인 1480년 로도스 섬을 공략하기 위해 공격에 나섰는데, 콘스탄티노플 삼중 성벽이 대포 맞고 개박살이 나는걸 지켜봤던 구호기사단은 로도스 섬에 대포로도 뚫지 못할 존나 튼튼한 요새를 만들어놔서 대포 16대로 존나 쏴대도 끄떡 없었음

결국 1차 공략전은 실패로 끝나고, 술탄의 군대를 막아낸 구호기사단의 명성은 크게 올라갔음


하지만 1522년 쉴레이만 1세가 로도스 섬 2차 공략전을 준비하는데, 메흐메트 2세도 못뚫었던 로도스의 방어를 뚫기 위해 쉴레이만 1세가 생각한 방법은 바로 총력전이었음

쉴레이만 1세는 2차 공략전을 위해 무려 10만이라는 엄청난 수의 군대(어느 기록에는 22만으로 나오기도 함)와 300척의 함선을 이끌고 로도스 섬으로 출격했고, 이때 로도스 섬을 지킬 방어 병력은 겨우 7천 7백명, 그 중 7천명은 로도스 섬의 주민이라 사실상 기사 7백명이 전부였음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에 투입했던 병사가 15만이었던걸 감안하면 섬 하나를 점령하려고 투입하기엔 정말 터무니 없는 숫자임


좆됐음을 감지한 구호기사단은 신성 로마 제국, 스페인, 프랑스 등의 카톨릭 국가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스페인은 대서양 항로 개척에 바쁜 시절이었고 쉴레이만 1세가 데려온 엄청난 물량 때문에 전쟁의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도와주지 않았고, 프랑스는 왕권 강화를 위해 신경을 쏟아붓느라 나라 안 문제가 더 바빴으며, 베네치아는 오스만과 일시 휴전 상태였기 때문에 결국 구호기사단은 1년치의 식량을 요새에 비축해두고 홀로 공방전을 시작하게 됨


이때 구호기사단의 기사들은 고된 훈련과 노하우로 단련된 최정예 병사들이었으며, 여러 무기들, 심지어 총까지 수준급으로 다룰 수 있었기에 구호기사단은 그 엄청난 숫자의 군대를 상대로 무려 6개월을 버티는데 성공함

이때 쉴레이만의 군대 사상자는 약 1.5만~4.5만명으로 추정됨

하지만 쉴레이만 1세는 손실에도 눈 하나 깜짝 안하고 병력을 퍼부었고, 결국 요새의 외성을 함락시키는데 성공함

이때 쉴레이만 1세는 내성으로 도망친 구호기사단에게 "지금 항복하면 모든 무기와 갑옷을 가지고 섬을 떠날 수 있게 해주겠으며, 섬에 남은 주민들도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하겠다"라는 엄청나게 관대한 조건의 제안을 함

이때 쉴레이만 1세가 이런 제안을 한 이유로는 쉴레이만 1세가 2차 로도스 공략전에서 엄청난 수의 예니체리(술탄의 호위대로 오스만 최정예 부대)를 잃어 이 이상으로 손실이 발생한다면 정치적 입장에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우세함


이 당시 기사들은 이교도에게 항복할 순 없다며 결사항전을 주장했으나 로도스 섬의 주민들은 목숨이 더 중요했고, 무엇보다 위에서 말했듯이 로도스 섬은 원래 동로마 제국의 영토였고 주민들 또한 카톨릭 교도가 아니라 그리스 정교의 교도였기 때문에 카톨릭교도인 구호기사단을 위해서 싸울 이유가 없었음

결국 주민들의 압박으로 구호기사단은 성문을 열어 항복했고, 쉴레이만 1세는 약속을 지켜서 주민들의 안전을 보장하고 선박 50척을 제공해 구호기사단이 장비를 유지한 채로 섬을 떠날 수 있게 해줬음


목숨은 건졌지만 거점이 없어서 더 이상 해적질도 못하는 구호기사단은 방랑 생활을 하게 됐음

자금 부족 및 목적 상실로 해체가 눈앞에 온 순간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카를 5세의 배려로 이탈리아 반도 밑에 있는 몰타 섬을 받아서 그 곳에 다시 거점을 차림

이때 카를 5세는 일단 형식적으로는 계약을 한거라서 구호기사단에게 매년 조공을 받기로 했는데, 조공 물품이 매년 몰타산 매 한마리가 끝, 사실상 공짜로 준거나 다름 없는 계약이었음


다만 몰타 섬은 로도스 섬보다 훨씬 작고(크기 비교를 하면 로도스는 제주도의 3/4 정도, 몰타 섬은 서울의 절반 정도임) 바위 섬이라서 농사가 힘들어 자급자족이 거의 불가능한 섬이었음

대신 대부분이 절벽으로 이루어진 섬이라서 공격자 입장에선 항구로 쓸만한 곳이 없어 상륙하기가 매우 힘들고, 근처에 섬이 없어서 보급기지를 세울 수도 없으며, 땅이 좁으니 한번에 투입 가능한 병력도 적어서 사실상 천연의 요새였음

또한 세력을 넓힌 오스만 제국의 선박들은 유럽 국가의 공격을 피해 서지중해 해협을 안전하게 통과하기 위해서 몰타 섬과 튀니지 사이의 해협을 지나가야만 했는데, 구호기사단은 다시 부업인 해적질을 시작해서 이곳을 지나가는 오스만 제국의 선박들을 신나게 약탈함


쉴레이만 1세는 당연히 이걸 좆같아했지만 로도스 섬과는 달리 몰타 섬은 너무 멀리 있었고, 몰타 섬을 공략하기 위해 병사를 보내다가 스페인 함대와 부딪힐 수 있었기 때문에 쉴레이만 1세는 몰타 섬에 관심을 두지 않았었음

하지만 오스만 황실의 선박이 이 몰타를 지나가다 구호해적단에게 나포되는 치욕을 겪으면서 다시 어그로를 끌게 됨


오스만 제국이 제르바 해전에서 대승을 거두며 카톨릭교도 군대를 몰아내자 1565년 오스만 제국은 몰타 섬 공략을 준비함

하지만 제르바 해전 직후여서 군대가 많이 없었던 오스만이 준비한 군대는 겨우 4만이었고, 이때 구호기사단의 기사단장이었던 장 파리소 드 라 발레트의 준비성이 매우 빛을 발했음

발레트는 기사 시절 2차 로도스 공략전에서 결사항전을 주장했던 기사 중 한명이었고, 다시는 이슬람교도에게 패배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다지며 몰타 섬 전체를 요새로 도배해놓고 오스만 제국의 수도였던 코스탄티니예의 황궁에 첩자들을 심어 오스만 제국의 공격을 미리 파악하고 유럽에 나가있던 기사들을 소집, 9천명의 병력과 무기, 식량을 미리 비축해놓고 만반의 준비를 갖췄음

심지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도움을 약속하며 카톨릭 국가들의 지원 또한 준비된 상태였음


몰타 원정군의 총사령관 랄라 무스타파 파샤가 이끄는 군대가 몰타 섬에 도착했을 때, 랄라 무스타파 파샤는 로도스 섬 때처럼 항복을 요구했으나 발레트는 코웃음치며 몰타 섬에 예니체리의 시체가 가득차면 항복하겠다는 답을 전함

기사들과 주민들의 의견이 맞지 않았던 로도스 섬과는 달리 몰타 섬의 주민들은 대대로 이슬람 해적에게 시달려왔으며 전원 카톨릭교도라서 기사단에게 이슬람의 군대와 맞서겠다며 병력으로 투입해줄 것을 요청할 정도였음


몰타 섬 공략 당시 구호기사단과 오스만의 군대 모두 약점을 하나씩 쥐고 있었음

구호기사단은 몰타 섬의 지형 때문에 요새 하나에 병력을 결집시켜서 싸우는 방식을 쓸 수 없었고, 많은 요새에 안그래도 숫적으로 밀리는 병력을 분산시켜서 방어해야한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음

오스만의 군대는 몰타 섬이 당시 스페인의 영토였던 시칠리아 섬과 가까웠기에, 위협을 느낀 스페인이 오스만의 해상 봉쇄를 뚫고 지원 병력을 보내면 스페인과 몰타 양쪽으로 쌈싸먹혀 군대가 괴멸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앞으로는 몰타 섬, 뒤로는 스페인의 함대 감시를 하느라 해군과 육군이 분산되었고 병력의 피로도 또한 엄청났음


오스만 군은 일단 항구를 점령하기 위해 항구를 방어하는 작은 요새인 생 엘모 요새를 공격해 순식간에 요새 외곽을 함락시켰음

하지만 오스만 군의 해군은 위에서 말한대로 스페인 군대 감시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구호기사단 본부에서 야간에 해상으로 지원 병력을 보내줄 수 있었으며, 결국 한달에 걸쳐서 싸운 끝에 구호기사단이 패배해 요새가 점령당했지만 오스만 군은 무려 이 전투로 6천명의 사상자를 냈음

랄라 무스타파 파샤는 이 전투가 끝나고 "알라여, 이 작은 요새에도 이렇게 많은 희생을 치렀는데, 더 큰 요새에선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러야합니까?"라며 탄식하기도 했음


아무튼 항구를 점령하는데 성공한 오스만 군은 요새를 향해 엄청난 포격과 총격을 가했고, 아예 땅굴을 파서 폭약을 심어 성벽을 무너뜨리려는 전략까지 사용하면서 기사단을 밀어붙혔음

기사단은 이러한 시도를 막아내긴 했지만 숫적 열세로 점점 밀리기 시작했으며, 사기가 떨어져 투항한 기사 몇 명이 준 정보로 오스만 군이 성벽의 일부를 돌파하는데 성공했음

하지만 이때 므디나 요새의 기병대가 오스만 군 후방의 본진 백도어를 시전, 본진을 약탈하고 막사 등 건물에 불을 지르고 탈출함

전방에 나가있던 오스만 병사들은 후방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고 스페인 군의 지원이 온 것으로 착각해 황급히 퇴각했으며, 기습인 것을 알게 된 오스만 군이 분노하여 므디나 요새로 진격했으나 므디나에선 모든 병력과 여성, 아이까지 병사로 위장시켜 성벽에 세워놔 병사가 많은 것처럼 보이게 하는 심리전을 걸어서 오스만 군이 점령을 포기하게 만드는데 성공함


공방전이 길어지며 가을이 찾아오고, 오스만 군은 공방전이 길어질 것으로 예상하고 겨울 준비를 해야했으며 쉴레이만 1세도 증원을 명령함

문제는 위에서 말한대로 몰타 섬은 바위섬이라서 자급자족이 불가능했으며, 구호기사단은 미리 모든 식량을 요새 내부로 옮겨놓은 뒤였고, 그나마 가까운 보급기지였던 튀니지는 보급 능력에 한계가 있었으며, 오스만 해군은 스페인 군대를 감시하느라 보급에 신경을 쓸 수도 없었기 때문에 보급 물자가 바닥을 치며 사기가 크게 떨어졌음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구호기사단은 축일에 잔치를 벌이는 모습을 일부러 보여줬고, 오스만 군도 밤에 몰래 배를 띄웠다가 아침에 다시 불러들이는 식으로 지원군이 온 것처럼 환대하는 연기를 하는 등 심리전이 이어졌음


구호기사단도 카톨릭 국가에 병력을 요청했으나 몰타 공략전 전에 있었던 제르바 해전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던 카톨릭 국가들은 보내줄 병사가 없었고, 그나마 공방전이 길어지며 병력을 회복한 시칠리아 섬의 부왕이자 스페인 왕 펠리페의 신하였던 가르시아가 8천의 지원군을 보냄

사실 가르시아는 공방전이 시작하기 전에 미리 와서 지원군을 약속하며 그 증거로 몰타 섬에 자신의 아들을 두고 왔으나, 제르바 해전으로 함대를 크게 잃은 펠리페 왕이 더 이상의 선박을 잃지 말라는 명령을 내린 상태라서 지원군을 보내는 시점이 많이 늦어졌음

지원군이 도착했을 때 가르시아의 아들은 이미 전사한 상태였다고 함


아무튼 오스만 군은 시칠리아의 지원군을 보자마자 스페인의 지원군이 왔다며 퇴각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지원군이 도착했을 때 지원군의 탈영병이 오스만 군에 "지원군은 기강도 보급도 없어서 사기가 바닥을 친다"라는 정보를 흘렸음

이대로 돌아가면 술탄의 분노에 모가지가 날아갈 오스만 군 지휘부는 그 정보에 마지막 도박으로 총력전을 걸었음


하지만 지원군은 구호기사단의 물자를 받아서 보급이 완료된 상태였으며 기강이 잡히지 않은 지원군은 지휘관의 명령을 무시하고 돌진하여 지칠대로 지친 오스만 군에 궤멸적인 피해를 주었으며 오스만 군은 마지막으로 투입했던 3만 5천의 군사가 사실상 전멸하여 겨우 목숨만 건져 배를 타고 탈출했음

술탄 쉴레이만 1세는 당연히 분노해서 내년엔 내가 가겠다며 노발대발했으나 이듬해에 병으로 사망해 결국 몰타 섬 공략은 실패로 끝남


한편 약 4개월에 걸친 공방전을 승리로 이끈 구호기사단의 기사단장 발레트는 서유럽 카톨릭 국가에서 영웅으로 칭송받았으며, 그 와중에도 생 엘모 요새의 방어적 허점을 인지하고 원래 산 위에 있었던 요새를 다시 지어 그냥 산 자체를 요새로 만들어버림

발레트는 3년 후 심장마비로 사망했는데, 주민들은 그를 기려 이 요새의 이름을 발레타로 지었고, 현재 발레타는 몰타 공화국의 수도


한편 남겨진 구호기사단은 레판토 해전 이후 오스만의 위협이 사라짐에 따라 다시 부업으로 돌아가 해적질을 시작했으며 정신이 나간건지 몇몇 기사단원이 카톨릭 국가의 선박도 건드리기 시작해서 결국 버려져서 고립됨


이후 구호기사단은 1789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집트 원정의 일부로 몰타 섬을 점령하러 왔을 때 "구호기사단은 카톨릭 교도를 공격하지 않는다!"라는 이유를 다시 내세워 항복하며 해체됐음


이후에 교황 비오 7세가 다시 구호기사단을 만들어서 현재에 이르긴 하는데 지금은 이름만 이어지고 군사적 업무는 안하고 의료봉사만 하고있음



결론은 로도스가 사실상 용병기업이며 위기협약이나 섬멸전 같은 임무에 오퍼레이터를 투입하는건 구호해적단의 행적과 부분 일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