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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됐습니다. 죄송합니다…"
"흐음~"

내 사과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듯, 눈앞에 있는 은발의 여성은 자신이 하는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작은 나무토막을 이리저리 돌리며 조각칼로 다듬고 있는 모습은, 마치 한 분야에 수십 년을 바친 장인과도 같은 진중함. 겉모습은 젊은 아가씨라는 게 작은 반전일 수도 있겠다.

"덕분에 운동 좀 했겠네. 당신은 평소에 한 곳에서 틀어박히면 안 움직이잖아."
"근육통은 확실히 오고 있긴 하지…"

오전에 있던 그 바보 이베리아 듀오와의 술래잡기의 결과는 내 전신에 경련을 선물했다. 그렇게 미치도록 달렸던 게 얼마 만일까. 덕분에 지금 얼굴 빼고 전신에 파스를 덕지덕지 붙인 상태다. 내일 과연 일어날 수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내 몸은 실시간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다.

"그렇게 했는데도 결국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그들을 저지하는 데 실패했다. 전장을 누비는 베테랑 오퍼레이터들이 확성기까지 들고 고성방가하는데, 일반인인 내가 따라잡을 수 있을 리가 없잖은가. 덕분에 로도스 함선 전체에 내가 뭘 했는지가 떠벌려졌다. 

그로 인해 오전부터 퇴근 시간까지 온갖 오퍼레이터들이 내 사무실에 쳐들어와서 진짜냐고 물어보는 것만 해도 100건이 넘었다. 순수하게 축하해주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는 게 다행이려나. 

물론 중간중간에 비꼬는 듯 놀리려고 오거나, 진지한 얼굴로 사실을 확인하러 온 대원들도 있었다. 특히 눈빛이 죽은 상태로 나한테 물어보러 온 대원의 경우 등골이 오싹해지는 게, 오늘 죽는 날인가 싶은 기분이 드는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대체 왜 그런 살기를 보였는지 모르겠지만, 파고들면 귀찮아질 거 같으니 생각하기를 그만두기로 했다. 

그래서 그 바보 이베리아 듀오는 어떻게 됐냐고? 맨티코어와 레드한테 부탁해서 체포한 후 선수 마스트에 매달아놨다. 하루 정도 매달아두면 정신 좀 차리겠지. 가는 길에 모래폭풍이 올 예정이지만 알 게 뭐람.

아무튼 해당 사건 때문에, 퇴근하고 이 방의 주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함과 동시에 민폐를 끼치게 될 것에 대해 사과하고 있는 상황이다. 내가 좀 더 신중했으면 이럴 일도 없었을 텐데. 사람의 입은 죄를 만드는 곳이라는 옛 속담이 괜히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오늘따라 유독 마음에 와닿는다.

후, 하고 조각하고 있던 나무토막에 입김을 불어 먼지를 털어내며, 내 눈앞에 있는 여성, 스펙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고 있던 앞치마를 대충 의자에 걸치더니, 그녀는 옆에 있는 냉장고로 시선을 옮겼다.

"아까부터 계속 미안하다고 말하길래 뭔가 했더니, 그런 거였어?"

휙, 하고 생수병 하나가 날아왔다. 화들짝 놀라 허둥지둥 몸을 비틀어 어찌어찌 양손으로 잡았다. 방금까지 냉장고에 들어가 있었던만큼, 병이 품은 냉기가 장갑을 뚫고 피부 너머로 느껴졌다. 마침 목도 말랐겠다. 즉시 뚜껑을 열고 목 너머의 청량감을 채울 때, 스펙터 역시 다른 생수병 하나를 꺼내서 본인의 갈증을 해소하고 있었다.

꿀꺽꿀꺽 물을 삼킬 때마다 움직이는 그녀의 길고 가느다란 목. 그리고 그에 맞춰 시스루인 상의 너머로 미세하게 흔들리는 풍만한 두 개의 곡선. 거기에 더해, 생수병에서 입으로 가는 동안 그 틈새 사이로 새어 턱으로 흐르는 몇 방울이 툭툭 떨어지는 것이 묘한 에로스를 자극했다. 일반적으로 그 물방울의 행선지는 바닥 직행이겠지만, 저 물방울들의 행선지는 저 웅장한 살결의 계곡 사이였다. 

덕분에 물을 마신 김에, 침도 꿀꺽 삼켰다. 급하게나마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렸지만, 너무 자극적인 장면인 나머지 감긴 눈 너머로도 그 장면이 계속 비치는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오후에 몇몇 사람들이 내 방에 왔어. 소문이 사실인지 확인하려고."
"벌써…? 그래서 어떻게 했어?"
"별다른 말은 안 했어. 말할 가치도 못 느꼈고. 어차피 인간이란 건 원하는 걸 믿고 싶은 생물이잖아? 그냥 웃어주기만 했더니 알아서 나가더라."

침묵은 곧 긍정이라고 생각한 건가. 어찌 되었든 간에 벌써 일이 벌어졌다는 게 문제다. 안 그래도 스펙터는 최근 있던 전투로 인해 안정을 취해야 하는 상황이다. 주변에서 계속 집요하게 물어보려고 온다는 건 스트레스로 이어질 수 있고, 그녀가 품고 있는 광석병에 악영향이 주어질 수도 있다.

"그… 정말 미안. 민폐를 끼쳐서."
"아까부터 이해 못 할 소리만 하네, 박사?"

생수병을 다시 냉장고에 넣더니, 스펙터는 성큼성큼 내 앞으로 다가왔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했던가. 별다른 것도 아닌데 오늘 있던 일 때문인지 몸이 흠칫거리며 무심코 발걸음이 뒤로 움직였다.

"민폐라는 단어는 대상에게 불이익이 있을 때 사용하는 말 아니던가?"
"그야… 나 때문에 너한테도 여러모로 귀찮은 일이 붙어버렸잖아. 가뜩이나 안정을 취해야 하는데…"
"귀찮은 일이라니. 오히려 재밌는 걸? 그렇게 조마조마한 얼굴로 제발 아니라고 말해달라는 듯이 보고 있는데 재밌지 않을 수가 없잖아? 거기에…"

듣는 귀를 의심할 만한 새디스틱한 발언과 함께, 스펙터는 단숨에 나와의 거리를 좁혀 왔다. 움직이며 살랑이는 비단결과도 같은 은빛 머리카락. 그리고 그 너머로 보이는 그녀의 루비색 눈동자. '사냥'을 할 때의 날카롭고 냉철한 모습이 아닌, 평소엔 볼 수 없던 자애로움으로 가득한 포근함이 느껴졌다.

"그만큼 느껴지는걸. 당신이 여러 사람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게."

사랑받는다. 좀 낯간지럽지만, 듣기엔 기분 좋은 말이었다. 이성으로서의 의미가 아닌, 사람 대 사람으로서의 의미겠지만, 그만큼 로도스의 많은 동료에게 신뢰와 관심을 받고 있다는 뜻이겠지. 더할 나위 없이 기쁘긴 하지만, 이런 것까지 공유 당하는 건 좀 그렇지 않나 싶다. 물론 원인은 그 빌어먹을 두 이베리아 놈들 때문이지만.

"그리고, 박사. 어제 프로포즈를 한 건 사실이잖아? 그냥 인정해버리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여차하면 나도 거들어줄게."
"너까지 놀리는 거냐…"
"어머. 놀리다니? 실례인걸."

스펙터는 쿡쿡 웃으면서 내 주위를 빙빙 돌아다녔다. 뭔가를 생각하듯 허공을 보며 두 바퀴쯤 걷더니, 다시금 내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녀의 붉은색 눈동자 너머로 얼빠진 내 모습이 선명히 보일 정도로.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은은한 과일의 향기가 느껴질 정도로. 

그녀의 선홍빛 입술이 조금만 다가가면 닿을 정도로.

내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들켜버릴 정도로.

그녀는 매우 가까이서 날 응시했다.

"난, '진심'인데?"
"뭐…"

굳이 강조하듯이, 한층 억센 톤으로 그녀가 말한 '진심'이란 단어. 가까이서 들리면서 귀를 간지럽히는 듯한 사근사근하면서도 요염한 목소리. 잠시 심장이 멎는 기분이 들면서, 전신이 철사로 고정되는 것 같이 뻣뻣해졌다. 무엇이 진심이라는 걸까. 답은 뻔하지만, 전후 사정이 있다 보니 괜히 다른 의미로 해석해버릴 거 같다. 

잠시 멈췄던 가슴이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하고, 무심코 들고 있는 생수병에 힘을 쥐게 만든다. 무슨 의미로 말한 거냐고 물어볼까 싶으면서도, 괜한 망신을 당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간신히 이성이 돌아온 덕에, 혀끝까지 다다랐던 말은 다시 목구멍으로 들어가버렸다. 

"후후. 박사. 얼굴이 새빨간데?"
"...이렇게나 가깝게 다가오면 누구나 그런다고."
"어머. 그래? 당신한테만 이랬던지라 몰랐었네."
"또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미녀가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저런 소리를 하면 이성을 유지할 남자가 몇이나 있을까. 여러모로 심장에 안 좋다. 특히나 그러고 그런 일이 있는 게 바로 어제인지라 더더욱 오해해버릴 거 같다. 아니면, 설마…

"에잇."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기나 할까? 스펙터는 갑자기 손을 뻗어 무언가를 내 가슴에 밀쳐 넣었다. 뭔가 싶어 고개를 숙여 보니, 조금 전까지 그녀가 깎고 있던 나무토막이 코트 주머니에 들어가 있었다. 꺼내서 이리저리 돌려봐도 형태를 유추할 수 없는 각도와 모양. 굳이 특이점이 있다면 몇 개의 부분에 구멍이 파져 있다는 정도. 이게 요즘 말하는 현대미술이라던가 그런 건가? 예술 쪽에 문외한이다 보니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스펙터. 이건…"
"소중히 간직해. 언젠간 쓸 일이 올 거니까."

언젠간, 이라니. 대체 어디에 쓸 거란 말인가? 계속 뚫어져라 쳐다봐도 알 수가 없었다. 간직하라고 하니 일단 가지고는 있겠지만, 대체 무슨 의도인 거지?

"배고픈데 저녁 먹으러 가자. 당신도 따라올 거지?"
"또 매점 가게? 건강 상한다."
"당신보다는 건강한 거 같으니 괜찮지 않을까?"

너무나도 맞는 말에 차마 반박할 수 없어서, 조용히 스펙터를 따라 방을 나왔다. 이미 모두가 잠자리에 들 심야인 만큼, 복도는 비상등을 제외하고 남색의 그림자로 덧씌워져 있었다. 어째 데자뷰가 느껴지는 광경이지만, 기분 탓이겠지.

사뿐사뿐 걸어가는 스펙터의 뒷모습을 보며, 문득 오늘 있었던 일들이 생각났다. 그 망할 이베리아 듀오가 놀리러 왔을 때. 대원들의 질문 공세를 전부 받을 수가 없어 우왕좌왕했던 그 때. 그리고 조금 전에, 스펙터가 던진 말에 온몸이 굳었을 때. 

만약에 대화 주제가 다른 것이었다면, 과연 나는 오늘처럼 행동했을까,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만큼 나 자신이 봐도 오늘 내가 한 행동은 너무나도 평소와 달랐다. 장난스럽게 넘어가도 될 일들이. 노코멘트로 일관해도 될 일들이. 단순히 아니오, 라고 말하면 될 일들이. 전부 부정하지를 못하고, 변명하며, 회피하고 있다. 어째서라고 나 자신에게 물어도, 마치 깊은 구덩이에 돌멩이를 떨어트리고 답을 기다리는 것처럼, 명확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심란하다는 말이 이런 때 사용하기 좋은 단어일 거다. 마치 혈관에 둑을 쌓아둔 것처럼 짜증이 확 밀려온다.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손끝이 조금씩 떨리는 거 같다. 특히, 내 눈앞에 있는 저 여성을 볼수록, 어제 내가 했던 짓이 떠올라 버려서, 잊을만하면 다시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한다.

아니. 어제뿐이 아닐 것이다. 며칠 전의 위기협약 때의 활약하는 그 모습을 봤을 때도. 그 전에 훈련했을 때의 모습을 봤을 때도. 

더욱 전에, 내 곁에 쓰러져 노래를 부르며 잠들었을 때도. 어쩌면, 그보다 훨씬 전의 모습에도. 

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똑같은 감각이 맴돌았던 거 같다. 

똑같은 대상. 똑같은 증상. 정상적이지 않은 현상.

의학적인 접근을 할 수 없는 무언가. 즉, 이건 아마도, 질병이라 부를 수가 없는 무언가.

그렇다는 건, 이것은…

"그리고 박사."
"...어? 왜?"

한창 나 자신과의 싸움을 하고 있던 중, 스펙터는 가까이 다가왔다. 거리가 가까워질 때마다 마치 가슴을 둔기로 때린 것 같이, 일정한 템포로 심장이 짓눌리는 것 같았다. 그런 내 반응을 즐기는 걸까? 그녀는 날 몇 초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씨익 웃더니, 살며시 입을 열었다.

"아까부터 시선이 열정적이던데. 남자는 그렇게 여자의 굴곡진 부분이 좋은 거야?"

변. 태. 

짧고 굵직한 두 마디의 단어를 귀에 속삭이듯이 말하고는, 스펙터는 다시 여유롭게 앞으로 걸어갔다. 잠시 멈췄던 이성이 원래대로 돌아왔을 땐, 이미 그녀와 나의 거리는 10m는 넘게 벌어져 있었고, 그녀는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날 지켜보고 있었다.

"박사~ 안 오면 두고 간다?"

내 심장은 오늘도, 상어가 헤엄치며 만들어낸 물결에 휩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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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저찌 입항 스케줄이랑 맞아서 올린 10화. 2화랑 비교해보면서 상어눈나의 태도나 말투가 어찌 바뀌었는지 확인해보는 것두 재밌을 거라고 생각함. 


지금 항로가 2주에 1번씩 한국 들어오는데, 중간중간 외국 항구에도 들어가는지라 잘 하믄 1주일에 1번씩 글 올리는 게 가능할지도 몰?루


피드백은 언제나 환영.


p.s. 도로시 눈나 뽑고 싶은데 돌이 없다... 재료도 없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