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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님, 맡기신 거 다 끝났어요."


그날도 평소하고 다를바없이 서류더미에 파묻혀서 하나하나, 생각과 무지성을 섞어가면서 하나하나 손수 정리하고 있었다. 몇 개는 상황 봐 가면서 비서 오퍼레이터에게 넘겨주고, 점심시간 조금 더 지나서 아미야가 일거리를 더 가져오고, 에어컨이 돌아가고 있음에도 한여름의 기 빨리는 온도와 습도에 소리없는 탄식을 몇 번이나 거치고서 보니 벌써 퇴근시간을 앞두고 있다. 


"고마워. 제때 다 끝내서 줬네. 이건 내가 확인해서 문제없으면 켈시한테 갖다줄게."


딸기크림을 뒤집어쓴 듯한 핑크색 꼬리가 가만히 살랑거리고, 다음 일을 달라는 듯 손을 내민다.

시간이 이런 시간인데 더 시키기는 미안한 일이다. 사실 이거 말고도 일이 있는 사람인데.


오늘 비서 오퍼레이터는 캐스터 오퍼레이터이자, 로도스 아일랜드 선내에서 미용실을 운영하고 있는 필라인족 여성인 골든글로우다.

원래는 빅토리아에서, 감염자의 몸으로 몇 년 동안 어렵게 모은 돈으로 오랜 꿈이었던 자기 미용실을 열었던 사람이라던가. 다만 로도스 아일랜드의 오퍼레이터가 엮인 불의의 사고로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고, 이러저런 일들을 겪고서는 로도스 아일랜드에 들어와서 광석병 치료 겸 살고 있다.


다행히 로도스 아일랜드에 들어와서 아츠 제어도 점차 익숙해지고 있는 데다 자기 꿈을 이루면서 살고 있어서, 지금은 그래도 즐겁게 사는 모양이다.


"됐어. 퇴근 시간이잖아. 한 15분 정도 남았나. 지금 뭘 더 시킬 수도 없으니 오늘은 이쯤 하고 들어가. 미용실 열어야지."


"오늘 비서 오퍼레이터라 미용실 안 열었거든요. 일 조금 더 해도 괜찮아요. 박사님 매일 늦게까지 하고 계시잖아요."


"됐다니까. 미용실 안 열었으면 모처럼이니 일찍 들어가서 쉬면 되잖아."


"그러면....마침 박사님 머리 자르실 때 되셨네요. 잘라드릴까요?"


새삼 머리카락을 만져보니 꽤나 길어져 있다. 마침 눈앞에 우수한 미용사도 있으니 신경써준 거, 이것까지 밀어낼 수는 없겠지.


그 생각에 반사적으로 승낙하려던 그때 안젤리나가 떠올랐다. 생각해 보면 꽤 오랜 시간 안젤리나에게 이발을 맡겼고, 요 최근에 와서는 점점 더 잘 하고 있었지. 물론 전문가인 골든글로우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같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 보니, 같이 시간을 보낼 겸 안젤리나에게 맡기는 게 일상이 되어 있었다.


"뭐....아직은."


안젤리나가 잘라준다고는 말하기는 힘드니 애매하게 주워섬겼다.


"아....생각해 보니 박사님 매번 누가 머리를 잘라주는 거에요? 저한테도 안 오시고, 생활부 직원 분도 궁금해하시더라구요. 박사님이 계속 그분한테 머리를 맡기셨는데, 요즘은 안 오시는데도 머리가 다듬어져 있다구요. 저도 지나가면서 보다보면 어느샌가 박사님 머리카락이 정리되어 있으시구요. 박사님 스스로 자르는 건 아니신 것 같구요."


어....어? 이거 이야기해도 되나? 

머리 잘라주는 정도로 혹시 관계를 알게 된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그, 서포터 오퍼레이터. 안젤리나가 잘라주고 있는데."


"아아, 그 아이요. 종종 제 미용실에 와요. 머리 자르는 거 연습한다구요. 올 때마다 점점 잘 하게 되더라구요. 가위질에 주저하는 것도 많이 줄어들어서 가르쳐주는 보람이 있어요. 그렇구나. 안젤리나가 잘라주고 있었군요."


그 아이....라. 안젤리나가 살짝 키가 크다지만 이쪽이 나이가 많았지.

골든글로우가 미용실을 열겠다고 긴 시간 고생을 했는데도 꽤 동안인 탓인지 안젤리나보다 나이가 많다고 느껴지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런데 골든글로우의 이야기를 보면 안젤리나는 일부러 내 머리를 잘라준다는 이야기는 안 한 모양이다. 안젤리나가 머리를 잘라주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언가 있으려나 싶은 반응을 하는 것도 아니고.

음....딱히 상관은 없으려나. 누구 머리를 잘라준다거나 하는 건 굳이 남에게 이야기할 거리도 아닐 테고.


"뭐, 어쩌다 보니까. 그 애가 좀 덜 익숙할 때부터 연습 상대가 될 겸 해서 맡겼거든. 그래도 점점 안젤리나 실력이 좋아진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전문가가 그렇다고 하면 정말 그런 거겠지."


"나중에 미용사가 되어도 좋을 것 같은데 말이죠. 되고 싶다고 하면 잘 가르쳐줄 자신도 있는데."


이러나저러나 후배가 생기면 좋겠다는 생각에 들떴는지, 앞으로 누워 있던 귀가 살짝 펴지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

미용사가 된 안젤리나인가. 잘 할 것 같은데.


"미용사....에 국한될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하고 싶은 게 많은 아이라서. 앞으로 어떻게 될지 정한 것도 아닌 것 같고. 감염자다 보니 좀 그런 면에서 방황하는 게 아닐까 싶어."


"그럴 수 있어요. 저야 아버지가 미용사셨으니까 그걸 따라 미용사가 되고 싶다고 어렸을 때부터 생각했는데, 지금 안젤리나 나이대인 애들 중에 앞으로 자기가 뭘 하고 살지 못 정하는 애들도 많은 모양이구요. 우르수스 학생자치회 애들도 그렇고, 우타게랑 키라라도 딱히 안 정한 모양이구요."


우르수스 학생자치회 오퍼레이터들은 비감염자라곤 해도 전후 트라우마 문제 때문에 아직 이렇다하게 정할 여유가 없는 걸로 알고 있다. 그래도 이스티나랑 굼은 달리 잘 하는 게 있고, 로사는 전방으로 나가기 전에 인사부에서 일했으니 그쪽으로 진로를 잡을 수도 있으려나. 우타게는 적당적당, 능글능글 넘기는 느낌이고 키라라는 게임할 수만 있으면 아무튼 좋은 모양이니.


저 둘에 안젤리나는 물론 감염자다 보니 할 수 있는 게 제한되어있기도 하겠지만.


"뭐, 어쨌든 안젤리나한테 맡기시겠다니 굳이 제가 해 드리겠다고 할 필요는 없겠네요. 더 오래 있으면 박사님 일하시는 데 방해될 테니, 먼저 들어가 볼게요."


"응. 고생 많았어. 고마워."


골든글로우가 퇴근하고, 나도 저녁 식사를 하러 식당에 갔다가, 마실 게 하나 더 있으면 좋겠다 싶어 매점에 다녀왔더니,


"안녕, 박사."


비서 오퍼레이터가 퇴근했음에도 사무실에 누군가가 먼저 와서 소파에 앉아 있었다. 이야기한 참이었는데 마침 찾아왔다니.


"오늘은 일찍 왔네, 안젤리나. 저녁은 먹었어?"


일 끝나고 바로 온 건지 배달할 때 입는 일상복 차림에 가방도 들고 있고, 내가 생일날 선물해 주었던 목걸이도 가슴께에 얹어져 형광등의 빛을 받아 반짝거리고 있다.


"아직. 금방 온 참이야. 오늘 저녁 맛있어?"


"우르수스식 저녁이었어. 나는 괜찮았던 것 같아. 빨리 안 가면 식당 닫을 거니까 여기 있으려면 저녁부터 먹고 와."


"알겠어. 고마워, 박사."


문 쪽으로 걸어와서 나를 지나쳐가는 건가 하던 그때 발을 멈추고, 발돋움을 하더니 내게 매달리며 입술을 맞대왔다. 안젤리나의 향기에 실려온, 온 테라가 품어왔던 재와 먼지, 오리지늄의 냄새에 오늘 배달은 미노스였는지 그쪽의 꽃향기가 다녀왔다고 인사를 한다. 살짝 안젤리나의 허리를 팔로 감싸 넘어지지 않게 해 주고, 짧은 입맞춤 끝에 안젤리나가 다시 한 번 싱긋 웃으며 내 머리카락을 매만진다.


"후후, 머리 자를 때 됐네. 이따가 와서 잘라줄까 하는데 시간 괜찮아?"


"네가 머리 잘라준다는데, 비워 놔야지. 배고프겠다. 얼른 갔다 와."


안젤리나가 다시 한 번 내 뺨에 입을 맞추고, 기분 좋은 듯 꼬리를 살랑이고 콧노래를 부르며 이번에야말로 사무실을 나섰다.


생일날 놀이공원에 다녀온 이후로 안젤리나가 적극적으로 달라붙는 횟수가 늘어난 게 확실히 보인다. 

일하고 있으면 다가와서 뒤나 옆에서 껴안는다던지, 뺨을 비비면서 귀여운 소리를 낸다던지, 틈만 보이면 이런 식으로 뺨이나 입술에 키스하려 한다던지. 


당연히 어른 이전에 평범한 남성이고, 이렇게 미인인 여자애가 좋다면서 달라붙는 걸 싫어할 리가 없으니 밀어내지 않고 있다. 물론 다른 사람이 있는 데서까지 그러지 않아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니, 둘만 있을 때는 마음껏 그러게 내버려두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안젤리나가 그렇게 하기만을 기다리진 않고 나도 그만큼 안젤리나에게 답해주고 있다. 나름대로의 만날 때의 루틴이 되었다고 해야 할까. 안젤리나가 더 자주 할 뿐.


놀이공원에 다녀온 게 기폭제겠지. 그날 이끌리듯 키스를 해버렸으니, 안젤리나도 이 정도까지는 괜찮은가보다 하고 허락된 선 안에서 마음껏 어필하는 느낌이다. 


다행이라면 다행인지, 안젤리나도 나름 바깥 생활을 하며 눈치가 생겨서인지 다른 사람이 다가오는 기색이 느껴진다거나 하면 껴안고 있다가도 떨어져 서기도 한다. 덕분에 일하고 있을 때나 잠깐 쉬면서 안젤리나랑 같이 있을 때 경보기 같지 않냐는 생각도 든다.


그러니까 문제는 역시, 안젤리나랑 신체적으로 접촉하는 일이 늘어나다 보니 이성이 빨간불을 외치는 일도 늘어났다는 거다. 이런 여자애가 수시로 달라붙으면서 애교를 부리고 있으니. 영원히 녹일 수도 없고, 깨물어 부술 수도 없고, 목구멍을 울려 삼킬 수도 없는 사탕에 입만 갖다대고 맛도 못 보는 판이다. 


하지만 거기서 내가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허들을 낮춰버리면 안젤리나는 그 허락된 선 안에서 더 달콤한 유혹을 해올 테고, 더 참기 힘들어지다 못해 선을 넘어버릴 것 같아 두려워진다. 내 스스로도 정신 나갈 것 같지만 안젤리나에게도 너무 미안하다. 이렇게까지 스킨십을 좋아하는데 안젤리나도 나름 억눌려 있을 테니. 


지금 상태만으로도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안젤리나하고 보낼 것 같은 끈적한 시간을 상상해 버리니 잠도 잘 못 이루고, 꿈에서는 그 상상이 그대로 이루어지니 미칠 듯이 행복하면서도 깨어나면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닫고 한숨을 내쉬고 만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래도 되는 사이라 할지라도 어른이 아직 나이도 안 찬 어린애를 욕망한다니. 그런 대외적 시선도 있을 수 있다 보니 최대한 안젤리나가 스무 살이 될 때까지는 참아 보자고 스스로 다잡고 있다.


"왜 그래? 멍 때리고 있고. 아직 일 남은 거 아니었어?"


이런저런 생각에 시간 가는 줄도 몰랐던 건지, 이번에는 뒤에서 가느다란 두 팔이 뻗어나와 휘감아오고, 등에 따스하고 부드러운 기운이 와닿는 게 느껴진다. 깜짝 놀라며 문이 닫혀 있는 걸 확인하고서, 안긴 채로 돌아서서 안젤리나를 보듬어 주자 또 다시 만족스러운 웃음소리를 내고, 갖고 있던 불안감마저 누그러진다. 이러니 도저히 안젤리나를 밀어낼 수가 없다. 이렇게나 사랑스러운데.


"미안. 좀 생각할 게 있었다 보니까."


"일이 그만큼 많으니 생각도 많겠지. 괜찮아, 박사. 한 번씩은 그렇게 멍하니 있는 것도 좋더라고. 쉬고 있는 김에 머리 잘라줄게. 준비하고 있을 테니 앉아서 쉬고 있어."


안젤리나의 팔에서 풀려나는 것에 아쉬움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끼면서, 소파에 앉아 안젤리나가 가방을 내려놓고 머리 잘라줄 준비를 하는 것을 보고 있는다. 이제 몇 번이나 되는데다 골든글로우의 미용실에서 일을 도와주기까지 해서인지 준비하는 폼까지도 점점 초보 티를 벗는 것 같아 기특하다.


"다 됐어, 박사. 이리 와서 앉아."


평소 그러던 것처럼 안젤리나가 만들어준 자리에 앉고, 뒤에서부터 이발용 천이 몸에 둘러져 목에 감긴다.


"매번 잘라주던 것처럼 해 줄까?"


"응."


항상 물어보는 질문도 대답도 같지만, 혹시 요청이 바뀔까 하는 생각인지 매번 물어봐 주고 있다. 마침 한여름이고, 짧게 해줬으면 할까 하고도 있었겠지.

뭐, 그게 기본이라지만 그 마음씀씀이가 항상 너무도 기특하다.


사각사각 하는 소리가 예전과 비교하면 정말 거침없어지고, 손길과 가위질도 훨씬 안정감있다. 배달 일을 하다가 일어났던 재밌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손은 쉬지 않고 내가 주문한 대로의 머리 형태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리저리 당황하다가 결국 확 짧게 잘라버렸던 그때가 거짓말인 것처럼, 이제는 보고 있지 않아도 안젤리나가 훨씬 여유로워졌다는 게 느껴진다. 


정말로 골든글로우가 말한 것처럼 미용사가 되어도 좋을 것 같다. 혹시 배달 말고 다른 일도 할 생각이 있다고 하면 넌지시 물어볼까.


"다 됐어."


"벌써?"


안젤리나가 작은 거울을 건네주고, 자기도 내 뒤에서 거울을 들어보여서 뒤쪽 머리도 확인시켜 준다. 언젠가부터 내가 주문했던 머리 그대로 이번에도 가지런히 잘라주었다.


"매번 너무 고마워, 안젤리나."


"박사가 해 주는 거에 비하면 별거 아닌걸. 나도 하면서 재밌으니까 신경 안 써도 돼."


거울을 받은 안젤리나가 목과 뒷덜미에 붙은 머리카락을 털어주고, 이어 이발용 천까지도 몸에서 걷어진다. 생각해 보면 예전에는 이발용 천이나 작은 거울 정도나 있었지, 이런저런 소품까진 없었는데. 이것들도 골든글로우랑 일하면서 하나쯤 챙기면 좋겠다 싶었던 걸까.


"정말 많이 늘은 것 같아. 골든글로우랑 일하면서 많이 배웠구나."


"음?....박사가 그걸 어떻게 알아?"


"아, 그....오늘 비서가 골든글로우였었거든. 네가 한 번씩 도와주러 온다고 이야기했었어."


어쨌든 안젤리나가 잘 한 거고, 그걸 알려준 사람이 골든글로우이니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그렇구나."


안젤리나가 수긍하고선, 이렇다할 말 없이 뒷정리를 시작했다. 

미용천에 쌓인 머리카락을 한데 모아서 바닥에 떨어뜨리고, 미용천을 개키고.


"수지 언니가 머리 잘라줄까 물어도 봤어? 내가 머리 잘라줄 때라고 알았으니까 수지 언니도 그렇게 말했겠네."


수지가 누구였던가 했다. 


수지, 안젤리나가 수지라고 부를 사람이고 머리 잘라줄까 물어봤던 사람이면....

아, 그래. 골든글로우의 이름이 수지 글리터였지. 안젤리나는 오퍼레이터들의 본명을 알고 있으면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으니.


"....그렇, 지."


"...."


내 대답을 듣고도 안젤리나는 말없이 계속 뒷정리를 했다. 

개킨 미용천을 가방에 넣고, 중력 아츠로 바닥에 떨어뜨려놓았던 머리카락을 한 군데 모아서 쓰레기봉투에 담고.


"도와줄까?"


"....괜찮아. 매번 그렇지만 치우는 것까지도 머리 잘라준 사람이 할 일인걸."


사용했던 도구들을 상자에 넣고, 상자를 가방에 넣어 가방을 닫기까지.


"...."


"...."


무언가 밀어내는 듯한 느낌에 황급히 스툴에서 일어나서 스툴만이라도 제자리에 갖다놓았다.

매번 뒷정리를 해줄까 물어도 거절했었는데, 오늘은 뭔가 느낌이 달라진 것 같다.


"....차라도 내줄까?"


"...."


안젤리나는 조용히 있다가 살짝 나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소파에 앉아 있으라고 하고는 아이스티를 준비하려 탕비실로 들어갔다.


....왜지? 왜 안젤리나의 태도가 확 바뀐 거지?

분명 나는 안젤리나가 머리를 잘 자르게 된 거랑, 이런저런 준비를 한 걸 칭찬할 생각이었을 텐데. 지금 밖에 앉아 있는 안젤리나 주변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가시덤불이 무성히 둘러싸고 있는 느낌이다. 뿐만 아니라 온몸도 왠지 모르게 따끔따끔거려서, 차를 준비하는 내내 몇 번이나 반대쪽 팔을 문질렀다.


생각해 보면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분명 머리 자르기 전까지만 해도 적극적으로 달라붙고 애교도 부리고 했었는데. 그뿐만 아니다. 머리를 자르면서도 평범하게 웃고 떠들었다. 머리도 잘 잘라주었고.


ㅡ그 아이요. 종종 제 미용실에 와요. 머리 자르는 거 연습한다구요. 올 때마다 점점 잘 하게 되더라구요.


ㅡ정말 많이 늘은 것 같아. 골든글로우랑 일하면서 많이 배웠구나.


ㅡ수지 언니가 머리 잘라줄까 물어도 봤어?


골든글로우.

'수지 언니'.


ㅡ수지 언니가 머리 잘라줄까 물어도 봤어?


'수지 언니'ㅡ골든글로우.

그 이야기가 나오면서부터?


잠깐만. 설마 안젤리나는 내가 골든글로우의 이야기를 했다는 거에 기분이 나빴던 게 아닐까?

나는 안젤리나가 자랑스러워서 골든글로우가 칭찬했다는 말을 한 건데, 그 칭찬이 문제였던 게 아니라 골든글로우를 내가 입에 올려서?


아니, 아무리 그래도 골든글로우는 머리 자를 때가 되었다는 걸 인지하고서 머리를 잘라줄지 물어봤을 뿐이다. 그 사람이 내게 호감을 보인 것도 아니고, 내가 골든글로우를 좋게만 이야기했던 건 아니다. 안젤리나랑 둘이 있을 때 골든글로우가 나에 대해 어떻게 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니지. 그런 반대쪽 생각은 아무래도 좋다. 안젤리나가 만약 '내 머리를 잘라주는 것'을 자기 일로 여기고 있다면, 골든글로우가 머리를 잘라줄지 물어봤다고 내가 말한 것만으로도 자기 일을 빼앗기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안젤리나의 기분을 의도치 않게라도 상하게 했다면 지금에라도 사과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전에 안젤리나가 이렇게 이야기한 적이 있었으니.

'실수를 했다면 바로잡기 가장 좋은 순간은 지금'이라고.


어쩌면 안젤리나가 내게 차를 준비할 시간을 준 것도, 그 시간동안 정말 차를 준비하라는 게 아니라 뭘 잘못했는지 생각해 볼 시간을 준 거겠지.

만약 틀렸다면 어쩔 수 없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하고, 틀렸다는 것도 같이 사과해야겠지.


아이스티를 준비해서 쟁반에 얹고 사무실로 나가니 안젤리나가 소파에 앉아 응접테이블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안젤리나."


"응? 왜 그래....?"


벌써부터 땀을 흘리고 있는 찻잔 하나를 안젤리나 앞에 내려놓고, 그 맞은편에도 찻잔을 내려놓고서 안젤리나의 앞에 앉았다.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꾸미거나 이리저리 돌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번에야말로 솔직한 게 좋겠지.


"그....어떻게 오해한 걸지도 모르고, 지금 왠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착각한 걸 수도 있어. 변명일 수도 있고." 


"오해....? 박사가 뭐....뭘 잘못했....어?"


정말 인지하지 못했던 건지 아니면 나름대로 뭘 잘못했냐고 다그치는 대신 부드럽게 돌려서 묻는 건지 모르겠지만.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한 걸 이야기하면 되겠지.


"일단 골든글로우가 머리를 잘라주겠다고 한 건 맞지만, 네가 잘라줄 거라고 말하면서 거절했어. 그랬더니 골든글로우가, 네가 머리 만지는 걸 더 잘 하게 되었다고 칭찬해 주더라고. 어쨌든 골든글로우가 미용 쪽에선 전문가니까, 그런 사람에게 네가 칭찬받은 게 자랑스러워서....이야기했던 거야."


"...."


"다른 의도 없이 칭찬할 생각으로 그렇게 이야기한 건데,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 그래도 머리 잘라주는 거 잘 하게 됐다고 생각한 건 정말이야. 그건 믿어주라."


"아....아니, 아니야. 박사가 그럴 생각이었던 거라면 내가 미안한 거지. 박사가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럴 리가 없다니, 싶었지만 물어보진 않기로 했다.

만약 안젤리나가 뭔가 오해를 단단히 했고, 그걸 내게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면 내가 사과하는 선에서 끝내면 될 거다.


"괜찮아, 박사. 내가 뭔가 착각을 해서 놀라게 했지. 미안."


그렇게 서로 연신 사과를 하다가, 이렇게 계속 사과하면 끝이 없겠다고 안젤리나가 애써 웃으면서 마무리를 지었다.


그래도 좀 평소하고는 다르게 조용한 분위기에서 차를 마시고, 어쨌든 일이 아직 남아있으니 안젤리나를 돌려보냈다. 안젤리나가 남아서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퇴근한지 얼마 안 된데다 내 머리까지 잘라주었으니 이 이상 손을 벌릴 수는 없었다. 조금 더 같이 있었으면 싶었지만 분위기도 어색해진 것 같고, 


다시 생각하면 오늘 일은 어쨌든 안젤리나를 칭찬할 생각이었지만 그럼에도 안젤리나의 기분이 나빠질 요소가 있을 수 있다는 걸 안 기회인 것 같다.

이러나저러나 안젤리나가 내게 많이 맞춰주고 있고, 머리도 오늘 일부러 시간 내서 잘라주러 왔는데. 무언가 내가 유의미하게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안젤리나의 마음은 살폈어야 했을 텐데.


그렇지만 안젤리나가 내게 뭘 잘못했다고 한 거고, 무엇을 착각해서 자기도 미안하다고 한 건지는 모르겠다.

물론 굳이 그게 뭔지 물어볼 생각은 없다. 괜히 어떻게든 봉합한 일을 일부러 손대서 뜯어버릴 이유도 없으니.



다만 내가 생각했던 게 착각이었는지, 그 다음날부터도 안젤리나는 평소와 다를바 없이 나를 대해주었다.

조금 나도 안젤리나가 정말 괜찮을까 싶었지만 변함없이 폭 밀착해 오면서 애교를 부리고 있었어서, 일단 그 일은 마음에서 놓아두기로 했다.


만약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한 걸 안젤리나가 용서했다면, 그리고 안젤리나가 나름대로 무언가 잘못했는데 내가 뭔지도 모른 채로 그냥 있다고 하면 나중에 곪아서 터져버릴 수도 있겠지. 그래도 일단은 우리 서로 겨우 약을 발라서 아물게 하고 있으니, 기다리는 게 낫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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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 및 오류, 피드백 환영

오리지널 설정도 있을 수 있음.


안젤리나는 안젤리나의 특성이 있다보니 이런 식으로 둘 중 한 명이나 둘 다 감정이 상하는 장면에서 떠올릴 수 있는 무언가가 있어서 글 쓰는 입장에서 특이한 경험인 것 같음.


이번주는 출장 안간다







오늘도 기다려주고 시간내서 찾아와주고, 읽어주어서 너무 고마워

기다렸다가 도로시 ex밀러가자 독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