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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연속으로 a4 10쪽 나왔네... 분량 실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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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이른 아침에 일어나 하루종일 거리를 걸어 다녀서 가뜩이나 피곤한데, 저녁이 되자마자 스펙터에게 이끌려 로도스로 돌아왔다. 그렇게 12시간을 넘게 눈을 떠 있으니, 슬슬 눈이 저릿거리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정말로 만사가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급하게 로도스로 돌아오게 만든 원인인 에기르 여성은 말했다. '지금이면 괜찮을 거 같아서'라고. 대체 뭐가 괜찮은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차량에 타고 로도스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그로 인해 호텔에 놓고 간 짐은 어찌해야 하나 싶었다. 마침 시에스타에 갔다고 한 엘리시움 녀석에게 좀 가져와 달라고 부탁했더니, 돌아온 건 *이베리아 쌍욕*이었다. 욕까지 들어야 할 수준인가 싶어 기분이 팍 상하면서도, 같이 간 쏜즈 녀석이 가져다준다고 했으니,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으으… 살 거 같다."

목욕탕을 나오니 에어컨이 하루 종일 코팅한 복도의 차가운 공기가 나를 반겼다. 여전히 피로는 상당했지만, 그래도 로도스에 도착했을 당시에 비하면 훨씬 기분이 괜찮아졌다. 샤워 끝나는대로 마시려고 가져온 차가운 에너지 드링크도 원샷. 이걸로 몇 시간 정도는 더 버틸 수 있겠지.

몸을 이리저리 돌리며 욱신거리는 관절들을 위로했다. 이제 그 변덕쟁이 에기르 여성이 좀 쉬고 자기 방으로 오라고 했으니, 천천히 발걸음을 옮길 때다.



세탁물을 세탁기에 돌리고 계단을 내려와서 텅 빈 복도를 몇 분 정도 걸었더니, 어느새 스펙터의 방 앞에 도착했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지만, 들어가기 전에 머리카락이 뜨지 않았는지 손으로 몇 번 훑고, 입고 있는 옷이 심하게 구겨지지 않았는지 체크했다. 내 기준으로 단정한 게 과연 옳은 건진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든 최악의 상태는 아닌 거 같다.

"스펙터, 들어간… 어라, 열려 있네."

노크하려고 문을 두들기려 할 때, 문을 자세히 보니 자동문에 틈이 벌어져 있는 걸 발견했다. 안쪽에서 수동으로 전환해둔 건가. 편하게 들어오라는 그녀 나름의 배려라 생각해, 문틈에 손을 집어넣어 옆으로 밀었다. 

"스펙터…? 어디 간 거지?"

방 안에서 산들바람이 날 맞이해 왔다. 어두워서 옆에 있는 스위치를 켰더니, 은은한 조명 아래로 보이는 정면의 원형 창문이 열려있는 것이 보였다. 창문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살랑이는 반투명한 커튼. 그 아래에 있는 여러 조각칼과 음반이 비치된 테이블. 옆으로 돌아보니 깔끔하게 정돈된 있는 침대. 고개를 좀 더 돌리면 보이는 화장실에도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사람을 불러놓곤 정작 본인은 없다니. 참 곤란한 에기르 아가씨다.

"어라, 이건 뭐지?"

올 때까지 기다려야겠다 싶어 의자쪽으로 발걸음을 옮길 때, 무언가가 내 발에 부딪혔다. 고개를 숙이니 보이는 건 길이 60cm 정도의 정사각형 나무판. 주워서 유심히 보니, 구멍이 몇 개 뚫려 있었다. 스펙터가 조각하다가 중단한 건가? 

나무판이 있던 곳 주위로, 나무토막 몇 개가 널려 있었다. 처음엔 쓰고 남은 재료인가 싶었는데, 어느 한쪽엔 구멍이 파여 있고 다른 한쪽은 나사 같이 좁고 날카롭게 파여 있는 게, 어떠한 의도가 있어 만든 것이 분명했다.

"음? 어디 보자…"

내가 들고 있는 이 나무판에 뚫린 구멍이랑, 나무토막의 날카로운 부분의 두께가 비슷해 보였다. 별 생각 없이 접합시켰더니, 매우 정확하게 들어갔다. 아무래도 이 나무판에 연결하는 파츠였나 보다. 남은 나무토막도 마저 나무판에 이리저리 붙여보았으나, 어찌 된 건지 다 붙여놔도 형상이 완성되지 않았다. 맨 위쪽에 구멍이 많은 걸 보니, 아무래도 접합시켜야 할 파츠가 많이 남은 거 같다.

"...잠깐, 설마."

혹시나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뛰쳐나왔다. 위층에 있는 사무실로 황급히 달려가, 내 책상에 있는 서랍을 열었다. 서랍 안에 있는 건 스펙터가 만날 때마다 내게 줬던, 두 달간 모인 수십 개의 나무토막들. 급히 옆에 있는 비닐봉지에 나무토막들을 집어넣고, 다시 스펙터가 있는 병동으로 향했다.

스펙터의 방에 들어왔지만, 아직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어딜 갔길래 왜 이리 안 오나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 그것보단 내 호기심을 채우는 게 우선이었다. 비닐봉지를 뒤집어 나무토막들을 바닥에 나열했다. 나무토막들의 구멍이나 날카로운 부분을 자세히 보니, 그 부근에 숫자가 새겨져 있었고, 몇몇 개가 이 나무판 맨 위쪽에 위치한 나무토막의 구멍 옆에 써진 숫자가 똑같았다. 설마, 맞추는 순서를 알려주는 매뉴얼 같은 건가?

"로도스로 돌아가자고 한 이유가 설마… 이건가?"

설마 했던 3차원 형태의 퍼즐이라니. 갑자기 이런 깜짝 선물을 준비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이런 퍼즐을 혼자서 만들다니. 머릿속으로 생각해 둔 완성본을 수십 개의 파츠로 나누고, 그리고 그걸 또 순서를 고려해 조각한 거다. 그것도 조각하기 어렵다는 곡선 형태로 말이다. 거기에 이 나무토막을 건네준 시기를 생각하면, 제작 시간은 길어봤자 두 달이다. 그 짧은 시간에 이런 굉장한 걸 설계하다니, 스펙터라는 여성이 가진 천재성에 소름이 끼칠 정도로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어떤 형상이 나올까 기대하며 나무토막에 새겨진 숫자의 순서대로 나무토막을 접합했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른 채, 왼손으로 나무토막을 집어 들고 오른손으로 나무판을 잡고 있는 걸 반복했다. 체감상 10분 정도 지난 거 같은데, 완성할 때쯤엔 손목시계가 30분이 넘었다고 알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완성된 퍼즐의 형상에, 입을 벌린 채 멍하니 볼 수밖에 없었다.

나무판에서 이어진 나무토막들은 서서히 사람 상반신의 형태를 잡으며 올라갔다. 한쪽은 굴곡진 여성의 신체를, 다른 한쪽은 평평한 남성의 신체를 묘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위로 올라가 두 사람의 턱이 마주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무판에서 턱까지의 빈 공간의 형태가 절묘하게, 하트 모양을 연상시킨 건 덤이다. 턱에서 위로 올라가면 보이는, 이마를 맞대고 있는 두 남녀의 얼굴. 꽤 데포르메가 들어간 얼굴이지만, 누구인지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이건… 나와, 스펙터…?"

이마 위로 그녀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수 있는 뾰족한 모자와, 나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후드와 헬멧까지. 이건 다른 사람으로 착각할 수도 없었다. 마치 다정한 연인과도 같이, 나무로 조각된 우리의 모습이었다. 

"정.답."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던가. 뒤에서 이 퍼즐을 만든 사람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화들짝 놀라 옆으로 몸을 구르니, 에기르 여성은 재밌다는 듯이 날 보며 쿡쿡 웃고 있었다.

"놀랐잖아. 언제부터 있었어?"
"후후. 어찌나 집중하고 있는지 바로 뒤에 있는데도 못 알아차리더라?"
"왔으면 그냥 왔다고 말해… 심장에 안 좋아."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노 코멘트인가. 혹시 내가 오기 전부터 숨어있기라도 한 건가. 가볍게 투덜거리며 바닥에서 일어나 완성한 퍼즐을 조심히 들었다. 나무로 만들어서인지 꽤 묵직한 중량이 양손에서 느껴졌다. 들어서 살며시 테이블에 올려두니, 스펙터는 내 옆으로 고개를 들이밀며 질문을 던져 왔다.

"어땠으려나? 나의 선물이."
"정말 놀라웠어. 그만큼 재밌었고."
"후후. 당신이 마음에 들었다니, 공들여 조각한 보람이 있네."

대단히 만족스러워하는 웃음소리. 그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운 모습에, 무심코 침을 꿀꺽 삼켰다. 저 완성된 퍼즐의 형태도 그렇고, 해변에서 내 뺨에 입을 맞춰 오던 그 해프닝도 그렇고, 오전에 우리 둘의 관계를 오해받던 그 상황도 그렇고. 여러 요소가 겹쳐지며, 심장이 고삐를 풀려는 맹마처럼 날뛰고 있었다.

"...이거 때문에 로도스에 빨리 돌아오자고 한 거야?"

가슴팍을 쓱쓱 문지르며, 아무렇지 않은 척 던진 질문에 스펙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에 대해 더욱 알게 된 지금이야말로, 말하기 제일 적합한 순간이라 생각했거든."
"말하다니…?"

등 뒤의 창문에서 다시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은 내 등을 스쳐 지나가, 내 앞에 있는 여성에게 다가갔다. 베일처럼 바람에 나풀거리는, 달빛과 방의 조명에 반사되는 은빛의 머리카락. 무언가를 회상하듯이 반쯤 감은 루비색 눈동자. 포근하고 자애로워 보이는 미소. 마치 시라쿠사의 화가가 공을 들여 그린 명화 한 폭을 눈앞에서 보는 것만 같았다.

"박사. 기억해? 예전에 당신이 내게 말한, '함부로 죽는다는 말 하지 마라'라는 거."
"아… 기억하지."

갑자기 이전의 부끄러운 기억을 끄집어내다니. 덕분에 얼굴이 화끈거리는 게 느껴졌다. 잊고 싶으면서도, 잊고 싶지 않은 모순적인 기억. 휘몰아치는 과거와 감정의 혼합물에 감정을 터뜨렸지만, 그 덕분에 그녀에게 내 진심을 부딪칠 수 있던 그 순간을,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잖은가.

"당신이 그리 말해준 덕분에 그 후로 여러 번 생각해 봤어. 삶에 대해. 죽음에 대해. 그 중요성에 대해."

오퍼레이터 스펙터는 삶과 죽음에 대한 관점이 일반인이랑 확연히 다르다. 그녀는 죽음을 그저 언젠가 다가올 운명으로 생각하고, 그걸 두려워하지 않는다. 인생을 고통의 연속이라 생각하면서, 그 고통 속에 예술이 피어나기에 모든 사람의 삶이 가치 있고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염세적이고, 어떻게 보면 낙관적이다. 그것이 그녀의 특징이었다. 

"그리 해봤는데도, 역시 내 생각은 변하지 않더라. 아마 앞으로도 같을거고. 이 점에 대해선 당신에겐 유감을 표할 수밖에 없겠네."
"스펙터…"

하지만, 난 그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살 수 있는 만큼 있는 힘껏 살고, 그 삶에서 가질 수 있는 행복을 갈망하고 영위하는 것이 생명이 당연히 가져야 할 권리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내 눈앞에 있는 에기르 아가씨에게 내 생각을 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녀에게 그리 와닿지 않았던 거 같다. 살짝 울컥한 기분이 들면서 말이 한마디 나오려 했지만, 그녀가 나보다 한 템포 빠르게, 할 말을 계속했다.

"하지만 말이야. 그것과는 별개로, 이곳에 파도가 일렁였어."

내게 천천히 다가오며, 스펙터는 살며시 자신의 가슴에 오른손을 살며시 얹었다. 그 행위 자체는 분명 평범하다. 하지만 시스루인 사복 너머의 검은색 레이스 속옷으로 가리고 있는, 저 지방덩어리 한 쌍의 볼륨을 어필하는 거 같아서, 침을 꿀꺽 삼키게 만들만한 색기가 느껴졌다.

"당신이 나에게 보인 눈물. 당신이 나에게 들려준 심장 소리. 당신이 나에게 전한 프로포즈. 그때의 모든 것이 나의 캔버스에 스며들어서, 색이 당신이라는 이름의 물감으로 물들기 시작했어. 내가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따뜻하고, 영롱하며, 포근한 색깔로."

다섯 걸음. 세 걸음. 한 걸음. 점차 거리를 좁혀 오며, 그녀는 계속 내 눈을 정면으로 응시해 왔다. 매우 가까이 다가온 그녀의 한 쌍의 눈동자엔,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는 내 모습이 선명히 비쳤다.

"이런 상냥하면서도 정열적인 색을 주는 당신은 누굴까? 알 수 없는 고양감과 영감을 주는 당신은 누굴까? 나를 이렇게 미치도록 기쁘게 만들어 주는 당신은, 대체 누굴까? 그런 생각이 그때부터 머릿속에 맴돌고, 심장으로부터 속삭여 와. 지금도, 이렇게…"

스펙터는 내 오른손을 붙잡아 자신의 가슴 정중앙에 갖다 댔다. 손 좌우에서 느껴지는, 속옷의 딱딱한 질감과 그 틈으로 살며시 어필하는 살결의 촉감. 그와 동시에, 손바닥 너머로 생명이 고요히 요동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왜일까? 평소라면 화들짝 놀라 온갖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보였을텐데, 지금은 자연스러운 행동인 것처럼, 본능과 이성이 조용히 그녀의 감촉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박사… 있잖아, 박사. 나의 사랑스러운 박사. 난 지금 너무나도 안타까워. 그러면서 고민하고 있어. 당신에게 이 기분을 나누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표현할 수 있을까? 나의 파도를. 나의 바다를. 나의 모든 것을. 당신이라는 이름의 캔버스에 한가득 물들이고 싶은데. 당신이랑 모든 걸 나누고 싶은데…! 지금 당장 어떤 말로 치장해도 표현할 수가 없어."

손바닥 너머의 수면에 물결이 일렁였다. 점차 높게, 그리고 거세게 치솟아 오르는 노도(怒濤)는, 확실하게 나의 손에, 나의 가슴에, 나의 머리에 각인되었다. 격렬한 파도는 나의 심상에 들이닥쳐 이성의 족쇄를 부러트리고, 잠재웠던 본능을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내가 가진 생각과는 별개로, 이 삶을 조금 더 영위하고 하고 싶어졌어. 우리가 서로를 완전히 알게 되는 그날이 오면, 그때 어떤 풍경이 펼쳐질지 보고 싶어졌어. 그러니까..."

위성을 잡아당기는 행성처럼, 내 몸이 앞쪽으로 당겨졌다. 그리고 곧바로 시간이 멈췄다. 아니, 정확히는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겠지. 

감으면서 보이는 그녀의 짙은 속눈썹이 선명하게 보여서? 

비단결 같은 부드러운 은발의 감촉이 얼굴을 스쳐서? 

형용할 수 없는 좋은 향기가 나를 자극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 더욱 단순한 이유였다.

이번엔 뺨이 아니라, 입술에서 그녀의 온기가 느껴졌으니까. 

1초. 3초. 5초. 10초쯤 지났을까. 온기가 멀어지며 입가에 다시 산들바람이 불어왔다. 밤의 찬 공기에 녹아든 꽃과 소금의 향기가, 더욱더 나의 이성을 흐리게 만들 거만 같았다. 바닥이 스펀지처럼 부드러워지는 거 같고, 새가 되어 날아갈 거 같은 황홀감. 어떠한 것과도 비교할 수가 없는 지고의 쾌락이었다.

나랑 같은 기분이었던 걸까? 눈앞 여성의 양쪽 뺨에는 분홍색의 제라늄 꽃이 만개했다. 조금 전까지의 조각상과도 같은 아름다움과는 다른, 사랑에 빠진 아가씨와도 같은 사랑스러움이 느껴졌다. 

조금 전에 맞닿은, 그녀의 윤기나는 입술이 움직였다. 쌓아온 그녀의 감정이 응축된, 언어의 피날레를 장식하기 위해.

"둘이 이 삶이라는 무도회를 춤추자. 박사."

그런 사랑스러운 그녀를 향해, 난 조금의 주저도 없이 양손을 뻗었다. 우리 둘의 심장 소리가 공명하는 것이 들릴 정도로. 숨이 막힐 수준으로. 내 눈앞에 있는 여성의 온기와 감촉을 탐하는 것처럼. 헌터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가녀린 여성의 허리를 껴안았다. 그런 나를 받아들이듯이, 그녀도 내 등에 양손을 얹었다.

"스펙터…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눈가가 촉촉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코와 목이 턱 막혀왔다. 심장이 지금 당장이라도 터질 거 같다. 내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의 마음을 알게 되어서 다가오는 기쁨을 촉매로, 내 마음속 깊이 묵혀둔 기억과 감정이 족쇄가 풀렸다. 분명히 예전에 전부 쏟아부었다고 생각했는데, 큰 착각이었다. 그때 터뜨린 감정의 질량은, 아무래도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던 거 같다.

"난 어쩌면, 널 제대로 보고 있지 않았을지도 몰라."

나 때문에 희생당한 그들이. 내 앞에서 죽은 동료가. 내가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꿈과 현실을 교차하면서 내 시야에 신기루처럼 비쳐왔고, 지금도 내 오감을 간섭해 오고 있다. 그들이 만들어낸,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은 족쇄는 내 목을 옥죄여 왔다. 그럼에도 내가 짊어져야 할 속죄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무렇지 않은 척 지금까지 살아왔다. 

"되돌릴 수 없는 과거를 후회해서. 떠나버린 사람들을 그리워해서. 무력했던 나를 부정하고 싶어서. 도피처를 찾고 싶어서. 그만큼 너에게 삶의 가치를 알려주고 싶었어. 네가 살아있다는 것만으로, 네가 삶의 이유를 찾을 수 있는 것만으로, 그들에게 속죄하고,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그래서…!"

목소리가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지금의 난 대체 얼마나 꼴사나운 모습을 하고 있을까. 그건 지금 날 안고 있는 여성만이 알겠지. 하지만 이런 내 모습도 품겠다는 듯이, 그녀는 상냥하게 내 등을 토닥여 주었다. 마치 우는 아이를 달래는 어머니와도 같이. 수많은 생명을 품는 바다 같이, 자애로움이라는 단어 그 자체였다. 덕분에 감정을 추스르고, 마저 할 말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래서 너에게 매달렸을지도 몰라. 하지만…"

세월에 녹슨 족쇄가 바다에 스며들어 천천히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계속 몸을 짓누르고 끌어내리던 무게추가 사라지는 기분이 들어, 지금 당장이라도 날아오를 거 같이 몸이 가벼워졌다.

"하지만, 지금 깨달았어. 이건 죄책감 같은 게 아니야. 자기만족 같은 것도 아니야. 결코, '과거'에 얽매인 '저주'가 만든 게 아니야. 너와 함께하며 같이 걸어온 '현재'가 일구어낸… '축복'인 거야."

심호흡을 한 번 하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허리에 얹은 손에 살며시 힘을 준 채, 꼴사나운 모습을 하고 있을 나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반짝거리는 루비색 눈동자에 시선을 맞추었다. 진심을 부딪쳐 온 그녀처럼, 나도 내가 한 말들의 끝맺음을 장식하기 위해서였다.

"계속 너와 함께할게, 스펙터… 아니…"

말을 끝내기 직전에, 기억의 파편이 머릿속으로 난입했다. 매우 오래전에, 어쩌면 우리 둘의 관계의 시발점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그녀가 던진 한 마디.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지키지 못했던, 단 하나의 약속.

[나중에 내가 일어나게 된다면, 그때는 이름으로 한번 불러줄래?]

그것을 지금, 이곳에서 지켜야겠지. 그녀와 함께 인생을 춤추겠다는 내 각오를 보이기 위해선.

"...로렌티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입술은 다시 부드러운 감촉과 온기에 틀어막혔다. 허나 이번엔 접촉한 것으로 끝나지 않고, 촉촉한 무언가가 입안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나의 몸은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며, 입속으로 들어온 무언가를 겹치고, 포개며, 섞어냈다. 

"맹세할게. 박사." 

서로의 입술이 떨어지면서 처음 보이는 건, 서로를 향한 갈망이 끈적하게 뒤섞인 은빛의 실타래. 그리고 옷을 한 겹씩 천천히 벗어가는 그녀의 모습이었다.

"어떠한 파도가 우리 둘에게 닥쳐와도, 난 당신 곁을 지켜낼 거야. 우린 이제, 길고 고된 여행길의 동반자니까."

스펙터, 아니, 로렌티나는 한 겹 남은 옷조차 벗어 던지며, 어느새 누워 있는 내 위에 올라탔다. 달빛에 더욱 강조되는 백옥 같은 피부. 앞머리가 가려주지 못할 정도로 봉긋하게 솟아오른, 모성의 결정체 한 쌍. 그 아래로 보이는, 매끈하면서도 부드러운 살집을 과시하는 하반신. 그야말로 신화 속의 여신조차 질투할 완벽한 프로포션이었다.

"그러니 그 증표로, 나의 안을 전부, 당신의 것으로 하나하나 조각해 줘."

내 귀에 가까이 속삭여 오는 그녀의 달콤하고 선정적인 목소리에, 최후의 이성은 유유히 바톤을 본능에게 넘겼다. 

이제 이 방을 채우는 건, 리비도가 지휘하는 두 사람만의 앙상블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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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자료 1: 박사님...... 저를 이리도 미치도록 기쁘게 해 주시다니...... 당신은 대체 어떤 분이신가요......(원본 스펙터 신뢰도 터치 대사)


참조 자료 2: 내 노래가 듣고 싶어? 물론 괜찮아. 하지만 아쉬운 건, 당신은 우리의 일원이 아니다 보니 노래가 우리한테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는지 느끼지 못한다는 거지. 박사, 박사, 난 정말 고민돼. 당신과 공유하고 싶은 게 엄청 많은데 어떻게 해야 전달할 수 있을까? (이격 스펙터 신뢰도 3 대사, 중섭 및 일섭 기준)


단어 설명: 리비도 - 성적 충동


2연속 a4 10페이지 실화냐? 가슴이 웅장해진다... 내 멘탈은 옹졸해진다...

한국은 지금 어버이날이겠네. 해외에서 글 올리는 중인 명붕이... 다들 공휴일 잘 보내고 있냐? 뱃사람은 휴일이란 게 없어서 지금도 일하는 중이다...

드디어 클라이맥스 편에 온 스펙터 편이다. 이 화를 쓸 걸 계속 기대해왔는데 드디어 쓰네. 스펙터의 두 번째 오퍼레이터 레코드가 나오고 보면서 '아, 이런 장면 꼭 써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드디어 쓰게 되서 기쁠 따름임. 다만 아직 에필로그가 남았으므로 여기서 기뻐하기엔 아직 조금 이른?듯.

다음화는 드디어 에필로그. 마지막까지 따라와 주시면 감사하겠음. 후기도 올리고 다음 히로인도 누군지 미리 말해두려고. 


피드백은 언제나 대환영.


p.s. 여담으로 이 화가 챈에 안 올린 연재 분량 합해서 100화째임. 특별 단편이라도 하나 쓸까 생각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