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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화까지 계속 10페이지 가깝게 나오네... 분량 실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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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으… 허리야."

짧으면서도 긴 휴가가 끝나고, 로도스엔 다시 시끌벅적한 활기가 되찾아왔다. 각지에 갔다 온 대원들이 기념품을 사 왔다며 이것저것 들고 온 덕에, 사무실이 온갖 종이가방으로 도배된 상태다. 다행히 오전엔 업무도 없겠다. 욱신거리는 허리를 툭툭 두드리면서 기념품을 열어보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박사는 허리가 시린가 보네. 난 머리가 시린데."
"어, 어서 와… 푸흡?!"

얄미우면서도 오랜만에 들으니 반가운 녀석의 얼굴을 보기 위해 고개를 들었더니 웬 중세 시대 라테라노 수도승들이 할 법한 헤어스타일을 한 듀오가 보였다. 빨간색 브릿지만 남기고 삭발이 된 한 놈과 아예 민머리가 되버린 또 다른 놈. 보기만 해도 웃음이 터져 나올 거 같아 급하게 손으로 얼굴을 틀어막았다. 별로 효과는 없는 거 같지만.

"뭐야… 크큭… 너희 머리 왜 그래… 크크크큭…"
"웃지 마! 결과적으로 너 때문이니까!"
"네가 내기를 걸었으니 결과적으론 네 책임 아닌가?"
"입 닥쳐 쏜즈."

대체 뭐가 내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저 바보 듀오가 나에 대해 무슨 내기라도 한 게 분명하다. 보나 마나 나와 그녀의 관계에 관한 내용이겠지. 잠깐만, 생각해 보니 저 녀석들도 시에스타에 갔을 테니, 어쩌면 나와 그녀가 걸어 다니는 걸 봤을지도 모르겠다. 

"우와. 기념품이 몇 개야. 박사는 역시 플레이보이라니까."
"크큭… 그냥 부하가… 크크크큭… 상사한테 선물하는 거 뿐이잖아… 크크큭"
"...그냥 참지 말고 웃어. 억지로 참으려 하니까 더 짜증 나네." 

엘리시움 녀석의 배려를 받아 한동안 있는 힘껏 웃었다. 너무 웃은 탓에 복부가 아프긴 했지만, 이런 광경을 보고 웃음을 참으란 말인가. 1분쯤 그치지 않고 웃을 때쯤, 슬슬 저 면상이 익숙해져 와서 흘러넘치던 웃음기도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제 됐냐?"
"어… 크크큭… 슬슬 진정되는 거 같다. 아직 좀 웃기지만. 큭큭."
"아무튼, 켈시 선생님이 너 찾으시던데. 빨리 가봐."

그 크레이지 워커홀릭이 갑자기? 어디 출장이라도 가라는 건가? 벌써부터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그래도 일이니 가긴 가야겠지.

"혹시 말하는데, 내 기념품 열지 마라?"
"우릴 뭐로 보는 거야. 당연히 안 열지. 그저 보안상 확인을 할 뿐이야."
"그걸 여는 거라고 하지 않…"
"입 닥쳐 쏜즈!"

오늘따라 엘리시움 녀석, 입이 험하다. 하긴, 그리 길게 기르던 머리카락이 증발했으니 흥분할 만하지. 부디 저 녀석이 앞으로 무리한 내기를 안 하길. 여전히 쑤시는 허리를 이리저리 돌리며 스트레칭을 한 후, 그런 생각을 하며 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박사. 허리 다쳤어? 무슨 운동이라도… 헉. 설마…!"

그런 내 행동이 이상하다는 듯이, 그리고 즉시 무언가 알아차렸듯이, 엘리시움은 질문을 던져왔다. 평소라면 아니라고 쩔쩔 맸겠지만, 이제는 아니다. 당당하게 웃으면서, 시선을 맞추면서 대답할 수 있다. 그것도 그럴 게, 이제 숨길 것이 없으니까.

"네가 생각하는 그거 맞을걸."

뒤에서 고함을 지르는 저 리베리 남성을 뒤로 한 채 사무실을 나왔다. 간만에 저 얄미운 리베리 녀석에게 제대로 한 방 먹인 거 같아, 기분이 상쾌했다.



"그런 일이 있었어."
"흠~ 그렇구나."

높이 1미터 정도 되는 목각을 이리저리 능숙하게 깎으며, 눈앞에 있는 은발의 여성은 내가 하는 이야기를 반쯤 흘려듣고 있었다. 이 장면을 보는 것도 얼추 세 달이 되어가지만, 매번 볼 때마다 신선하다. 특히 오늘은 평소에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한 방향으로 묶어서, 자주 볼 일이 없는 새하얀 목덜미에서 묘한 에로스가 느껴졌다.

에기르 아가씨가 조각하고 있는 건 어떤 남자의 상반신이었다. 로도스의 제식 코트를 입고, 후드를 쓰고, 평소에 쓰는 헬멧을 허리에 걸치고 있는 모습이었다. 쉽게 말해서, 나였다. 다만…

"그… 스펙터… 아니, 로렌티나."
"왜 그래? 박사?"
"그… 너무 미화된 거 아니야?"

어째 후드 아래로 묘사되고 있는 내 얼굴이 이상하다. 이게 진짜 내 얼굴인가 싶어, 옆에 있는 거울이랑 조각을 이리저리 둘러보았지만, 아무리 봐도 이상하다. 이렇게 머리카락이 잘 정돈되지도 않았을뿐더러, 눈매가 이렇게 짙지도 않고, 코랑 턱이 이 정도로 샤프하지도 않다. 하물며 있지도 않은 선명한 근육이 흉부와 복부에 묘사되어 있다. 아무리 봐도 고대 명화에 나올 법한 미남의 형상. 대체 누굴 조각하고 있는 걸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무슨 소리야. 오히려 열화된 수준인데."

조각을 잠시 멈추고, 로렌티나는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답했다. 열화? 이게? 내가 알고 있는 열화가 알고 보니 잘못된 뜻이었나? 상식을 의심하고 있던 그 때, 앞치마를 벗어 던지며 그녀는 내게 가까이 다가와서, 살며시 한 손으로 내 턱을 붙잡았다.

"사랑스러운 당신을 완벽하게 묘사하고 싶은데, 생각대로 잘 안 그어지는 거 있지. 이럴 때 보면 나의 실력이 아직 반푼이라는 게 느껴진다니까."
"반푼이의 레벨이 그리 높았어…?"

단국의 관용어 중엔 콩깍지라는 말이 있다는 듯하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심리적인 필터가 작용하어 뭐든지 미화되는 현상이라고 하는데, 어쩌면 눈앞의 이 아가씨도 그 상태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다. 지금 당장 나도 내 눈앞에 있는 그녀의 모든 행동이 사랑스러워 미치겠는데, 그녀라고 오죽하겠는가. 

다만… 그녀의 경우 그 필터가 좀 과하게 쓰인 거 같다. 지금 저 아가씨가 깎고 있는 조각을 뒤로, 커튼 주변에 열 개는 넘는 조각상들이 비치되어 있다. 복장으로 보아 하나같이 나지만, 어째선지 전부 다 심하게 미화되어 있다. 저런 외모에 저런 근육이었으면, 제약회사에서 일하지 않고 모델 일로 수천만 용문폐는 벌지 않았을까? 

"그래서, 나에게 할 말은 그거뿐이야?"
"아, 켈시 녀석으로부터 전할 말도 있어. 증세가 많이 좋아졌으니 이제 다시 전선에 합류해도 된대."

체내 오리지늄 융합률 14.2%. 혈중 오리지늄 밀도 0.33u/L. 지난 검사 결과인 체내 오리지늄 융합률 14.8%, 혈중 오리지늄 밀도 0.4u/L에 비해 확연히 수치가 감소했다. 광석병 증세를 지연시키는 게 아닌, 확연한 호전. 현 광석병 연구에서 유례가 없던 최초 사례다. 원인을 굳이 추정하자면, 이 에기르 아가씨가 가진 특수한 체질과, 나도 모르는 내 신체의 특성이 융합하여 만들어진 결과겠지. 

이런 정보가 외부로 유출된다면, 그다음에 벌어질 일은 안 봐도 뻔하다. 다행히 켈시 녀석의 정보 통제로 이 의료 자료는 나와 그 녹색 필라인, 그리고 환자 본인만 열람할 수 있도록 해두었으니, 외부에서 이 정보를 알긴 어려울 거다. 원래부터 어비설 헌터스에 대한 정보는 극히 제한되었던 만큼, 이번에도 다행히 정보 통제가 쉽게 진행된 것이다. 광석병에 대한 모든 것이 해결될 때까지는, 이건 세 사람만이 공유하는 비밀로 해둬야겠지.

"어머. 그것도 좋은 소식이네. 그런데…"

더욱. 더욱더 가까이. 조금만 움직이면 입술이 맞닿을 거리까지 다가오며, 로렌티나는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한 쌍의 루비에서 보내오는, 진하고 농밀한 신호. 무엇을 뜻하는지 내 본능이 알아챘다.

"사랑하는 사람의 방에 왔는데, 제일 우선적으로 해줘야할 게 있지 않아?"
"...그렇네."

그녀의 허리에 손을 얹고, 살며시 고개를 숙여 입술을 맞췄다. 그녀가 연하게 바른 립스틱에서 살짝 느껴진 과일 향이 근처를 맴돌았고, 말초신경을 하나하나 곤두세우는 거 같은 짜릿함이 전신에 퍼지는 것만 같았다. 몇 번의 가벼운 입맞춤을 가진 후 입술을 떼려 했지만, 그녀는 놓치지 않겠다는 것처럼 다시금 거리를 좁혀 나의 입술을 탐해왔다. 10초. 30초. 1분. 그제야 만족했다는 듯이, 그녀는 만족했다는 듯이 나에게서 살며시 멀어졌다. 끈적하게 붙어온 탓에 하반신도 가열될 거 같았지만, 지금은 자제해야겠지.

"그래서, 나에게 뭘 주려고 그리 안절부절못하는 거야?"
"그렇게 티가 났어?"
"계속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만지고 있는 소리가 들렸거든."

역시 헌터의 오감은 무섭다. 나름 내색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난 포커페이스에 약한 법인가 보다. 옅은 한숨을 푹 내쉬며, 주머니에 들어가 있는 상자를 꺼냈다. 

원래대로였다면, 오늘을 기념하는 김에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겠다는 각오로 선물하려고 준비해 둔 거였다. 하지만 그러기도 전에 이런 관계가 되어버려서 명목이 좀 심심해졌다. 상대에게 너무 부담스럽지 않으려나. 내가 원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면 어떡하나. 이걸 준비할 때 온갖 걸로 생각하던 그때가 떠올라서, 피식 웃음이 나올 거 같았다. 그런 기억을 뒤로 한 채, 상자를 건넸다.

"생일 축하해. 로렌티나."

오늘은 7월 27일. 나의 사랑하는 사람의 생일이다. 생일인 본인 성격상 신경 쓰지도 않을 테지만, 이 날이 있었기에 지금 이렇게 둘이 함께 있을 수 있는 거다. 어찌 축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 선물에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이, 에기르 아가씨는 눈을 두 번 깜빡였다. 양손으로 받은 내 선물을 잠시 멍하니 보더니, 이윽고 뭔가 알아차렸다는 듯이 옅은 신음을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내 생일이었지. 잊고 있었어."
"너라면 그럴 거 같았어."

삶과 죽음에 대해 그다지 큰 관심을 두지 않는 그녀다. 생일 역시 그리 깊이 생각하지 않았을 테지. 

"그것도 그럴게, 생일이라는 건 결국 1년이 지났다는 거잖아? 그건 곧 1년 동안 온갖 고통을 겪어왔다는 뜻일테고, 다음 1년도 똑같은 걸 되풀이한다는 예고장이나 마찬가지니까. 그런데…"
"그런데?"
"당신에게 축하를 받으니, 뭔가 사뭇 다른 느낌인걸. 묘하면서도 행복한 기분이야. 이런 기분이면… 매년 축하받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네."

자신의 감정을 춤으로 표현하는 무용수와도 같이, 상자를 끌어안으며 빙글빙글 천천히 제자리에서 돌더니, 그녀는 고맙게 받겠다는 말과 함께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 들어있는 건, 루비로 조각한 꽃 모양의 목걸이. 빅토리아에 있는 유명한 보석 세공사 기업에 주문해 둔 오더 메이드 목걸이다. 달리 말하자면 이 세상에 이 목걸이를 가지고 있는 건, 내 눈앞의 사랑스러운 그녀밖에 없다는 증명이기도 하다.

"어머. 꽃 모양이네. 제라늄?"
"금방 알아보네."
"예술가에게 이 정도 교양은 기본인걸."

에기르 아가씨는 목걸이를 꺼내 살며시 자기 목에 걸었다. 조명 아래에서 반짝이는 선명하게 붉은 빛이, 마치 그녀의 눈동자와도 같은 아름다움을 어필하고 있었다.

"어때?"
"잘 어울려."
"그것뿐이야?"
"뭔가 더 좋은 말이 있을 거 같은데… 너무 예쁜 나머지 머리가 굳어버려서…"
"후후. 그럼 그걸로 만족할게."

임기응변으로 던진 말인데 다행히 성공인 거 같다. 서포터 오퍼레이터 이스티나가 사무실에 놓고 간 연애 관련 책자에서 나온 내용을 적절하게 버무려서 말한 거지만, 굳이 초를 칠 필요가 없으니 말하지 않는 게 낫겠지.

"아아… 박사님. 지금 전 너무 슬프네요오…"

깜짝 놀랄만한 톤의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양손이 내 허리를 감싸왔다. 살며시 옆으로 고개를 돌리니, 에기르 아가씨와 똑같은 모습을 한 수녀복을 입은 여성이 날 끌어안고 있는 게 아닌가? 깊은 심연을 바라보는 듯한 탁한 붉은색 눈동자. 로도스에 처음 왔을 당시의 '스펙터'였다. 

"당신의 '스펙터'를 위해 줄 선물은 없는 걸까요…? 이러면 저, 너무 서글퍼져서… 우후후…"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스펙터'에게선 기괴한 웃음소리만이 흘러나왔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과 태도. 섬뜩함조차 느껴지는 광기와 살기. 예전이었다면 달랐을 테지만, 이제 와선 저런 모습도 꽤 귀엽게 느껴졌다. 눈빛을 잃고 행동이 기괴하며 미쳐 있어도, 그 근원은 나를 사랑한다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라는 걸, 이젠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이다.

"후후. 당신. '나'를 너무 냉대하는 거 아닐까? 저렇게 슬퍼하니 나도 눈물이 나올 거 같은데?"
"걱정 마. 제대로 챙겨왔으니까. '스펙터'도, 생일 축하해."

반대쪽 주머니에서 다른 하나의 상자를 꺼냈다. 상자 안에 고이 잠들어 있는 다른 하나의 루비 목걸이를 꺼내, 살며시 '스펙터'의 얇은 목에 달아주었다. 똑같은 제라늄의 형태로 깎았지만, 좀 더 옅은 색상의 루비로 제작했다는 게 차이점이다.

"아아… 이게… 당신이 저에게 주는 축복…! 후후… 우후후…!"

순수하게 기쁘듯이 분홍빛의 목걸이를 매만지며, '스펙터'는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이런 행동까지 그녀와 똑같을 줄이야. 같은 몸에서 분리된 거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건가. 

"우후후… 실례했습니다아… 좋은 하루 되시길…!"

고개를 꾸벅 숙인 채, '스펙터'의 형상은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며 방에서 사라져갔다. 사라지는 모습이 마치 성불하는 유령 같았다고 말하면 역시 실례겠지. 아니. 더 신경 쓰이는 건 다른 거다. 내가 건네준 목걸이도 같이 사라지다니, 손길이 닿고 있는 건 전부 같이 사라지는 메커니즘인 건가? 나중에 별도로 연구할 가치가 있는 내용이군.

"당신의 센스가 마음에 들었나 봐. '나'도 엄청 기뻐하는 게 느껴져."
"마음에 들어 한다니 다행이네."

'스펙터'가 있던 곳을 뒤로 한 채, 잠시 시선을 테이블로 옮겼다. 테이블의 가장자리에는 그 목재 조각상이 보였다. 나의 사랑스러운 그녀, 로렌티나와 지금의 관계가 되어준, 맹세의 증표와도 같은 특별한 조각상. 요즘 하루하루가 꿈만 같은 기분이 들면서도, 이 조각상의 존재가 이곳이 현실임을 일깨워 주는 요소가 되었다. 그걸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가슴이 확 조여오면서도, 그와 동시에 청량해지는 감각이 내 한숨과 함께 전신에 흐르는 거 같았다.

"어라? 이건…"

시선을 좀 더 옆으로 돌리니, 예전에 본 적이 없는 형형색색의 꽃이 들어간 화분이 있었다. 모양으로 보아 분명 식물도감에서 본 달리아라는 꽃. 분명 이 꽃의 꽃말이…

"박.사."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허리에서 기분 좋은 무게감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몸이 잠시 허공에 뜨더니, 등 뒤로 푹신한 감촉이 느껴졌다. 무엇인가 싶어 고개를 살짝 돌리니, 어느새 침대 위로 던져져 있는 게 아닌가? 설마, 하는 마음으로 재빨리 다시 고개를 정면으로 향하니, 내 위로 다가와서 곧바로 허리 위에 살며시 앉는 로렌티나의 모습이 보였다. 조금 전까지 묶고 있던 머리도 풀어버린 건 덤이다.

비단결처럼 부드럽게 내려온 로렌티나의 은빛 머리칼은 내 코를 간지럽혀 왔다. 조명을 뒤로 하고 있음에도 반짝이는 그녀의 루비색 눈동자와, 그것에 공명하듯이 반짝이는 제라늄 모양의 루비 목걸이. 상아를 연상시키는 매우 흰 피부. 그 피부를 가리면서도 안 가리고 있는 시스루 형태의 상의 너머로 보이는, 검은색의 속옷이 강조하는 살결의 음영. 

자기 얼굴을 봐달라는 것처럼 로렌티나는 가녀린 양손으로 내 뺨을 붙잡았다. 이윽고 입술을 겹쳐오면서, 그녀는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내 안 속을 탐해왔다.

거대한 전함조차 침몰시킬 노도와도 같이. 생명을 품는 잔물결과도 같이. 

사냥감을 물어뜯으려는 포식자와도 같이. 새끼를 돌보는 어미와도 같이.

과격함과 상냥함이 질척거리며, 우리 둘의 혀끝에서 녹아내렸다.

"... 아직 이른 저녁인데?"
"싫어?"
"싫을 리가."

이미 나의 하반신은 시동이 걸려 족쇄가 풀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 감촉을 느꼈는지, 그녀는 나의 허벅지를 손으로 스윽 훑더니, 입맛을 다시듯이 자기 입주위를 핥짝였다. 그 욕망을 추후의 메인 디쉬로, 우선 에피타이저를 가지려는 것처럼, 그녀는 다시 입을 맞춰 왔다. 나의 안쪽을 구석구석까지 맛보겠다는 그녀의 욕정 어린 움직임을 받아들이며, 나 역시 정욕이 담긴 손길을 그녀의 목덜미에서, 등으로 향해, 부드러운 골반까지 살며시 훑어갔다.

"박사. 그거 알아?"

입술의 감촉이 멀어지고, 은빛의 실타래가 장력을 잃으며 허공에 사라졌다. 어느새 속옷 차림이 된 에기르 아가씨는 나의 한손을 붙잡아서, 그대로 본인의 아랫배에 살며시 갖다 댔다. 부드러운 살결 너머로 느껴지는 단단한 근육의 존재가, 그녀가 헌터임을 다시 한번 자각하게 해주었다.

"상어는, 이곳이 두 개 존재한대."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으면서도, 본능은 그것을 알아차렸는지 하반신이 저릿저릿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나름 유지하고 있던 이성도 흐물흐물 녹기 시작했다. 직전까지 욱신거렸던 허리도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이미 흔들 준비가 되었다고 신호를 보내오고 있었다. 

"그러니, 평소보다 두 배로 날 '사랑'해 줄 수 있겠어?"
"...기꺼이."

로도스의 지도자도, 심해의 괴물을 학살하는 헌터도 이제 이 방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테이블에 있는 달리아의 꽃말처럼, 인생이라는 캔버스에 서로의 색을 덧칠하고 싶은 남녀 한 쌍만이 있을 뿐이다.

그렇게 난, 스스로 마지막 이성이라는 이름의 팔레트를 내려놓고, 본능이라는 이름의 붓을 붙잡았다.

파도는 조개나 돌멩이를 비롯한 수많은 것들을 들고 와서 해변의 모래를 긁고 나간다. 하지만 긁혀나간 모래는 새로운 파도가 살며시 다가와 그 흔적을 메꿔준다. 과거가 남기고 간 상흔을 현재가 덮어주고, 미래가 새로이 새겨준다. 어찌 보면 인생은 파도와 해변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걸어온 상처투성이의 과거. 지금 그녀와 함께하며 메꿔가는 현재. 그리고 새로이 새겨나갈 미래. 

앞으로 있을 길이 얼마나 힘들지 모르더라도, 부디 계속 그녀와 함께 헤쳐 나갈 수 있기를. 

그리고 그 길의 끝에서, 다시 한번 우리 둘이 서로를 축복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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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라늄의 꽃말은 그대와 함께하는 행복(공통), 그대가 있어 사랑이 있네(빨강), 그대를 사랑합니다(빨강), 그대로 인한 행복(장미색). 그와 동시에 스펙터의 탄생화(7월27일)임.

- 달리아의 꽃말은 친절이 감사합니다(흰색), 당신의 마음을 알게 되어 기쁩니다(장미색), 당신의 사랑이 나를 행복하게 합니다(빨강색).

- 제라늄의 경우 박사가 스펙터를 향한 감정의 표현이자, 삶과 죽음에 연연하지 않는 스펙터를 향해 '삶의 중요성'을 다시금 알려주는 박사의 의지를 표현했고, 달리아의 경우 스펙터가 박사를 향해 가지는 감정으로 표현했음.


벌써 5월 중순이다. 잘 지내니 명붕이들아. 한국 접안하고 이렇게 호다닥 마지막 화를 들고 왔다.


11월에 시작한 1화에서(단편일 경우 훨씬 전) 시작해 5월에 16화를 끝으로 스펙터편이 완결됐다. 6개월 정도네. 중간에 휴식기도 가진 것도 있었지만, 어찌되었든 길고 긴 연재였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지금까지 쓴 신뢰도 300 시리즈 중 제일 만족스럽게 쓴 화였다고 생각함. 지금까지 쓴 에피소드들은 삭제하거나 변경된 에피소드도 많았고, 그로 인해 완결해도 씁쓸한 기분이 적지 않게 들었거든. 대표적으로 모스티마 편이 건강이나 학업 이슈로 거의 절반 가까이의 분량을 삭제해서 진짜 씁쓸했음. 


근데 이번 스펙터 편은 거의 100% 원하는 내용을 전부 집어넣어서 ㄹㅇ 만족스러웠다. 스토리의 완성도를 떠나서, 내가 제일 마음에 들어하고, 제일 후회없이 썼던 히로인 에피소드라고 생각함. 그 증거?라고 하긴 애매하지만 모스티마편이 가지고 있던 에피소드 최장 기록을 갱신했음. 헤으응 로렌티나 눈나 나 주거...


전 화에서도 말했지만, 연재되지 않은 분량까지 합해서 이 시리즈가 100화를 넘겼다. 이 편이 101화임. 한섭 서비스 시작부터 꾸준히 써왔고 어느새 세 자릿수에 도달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물론 앞으로도 계속 쓸거임.


암튼 100화를 넘긴만큼 이번에도 100화 기념 단편 예정. 히로인은 아직 미정이지만 기념 단편에 어울리는 히로인을 골라야겠지. 조만간 써서 올리겠음.


이번 시즌 다음 히로인은 우리의 별눈나 아스테시아. 스펙터를 비롯해 이번 시즌으로 쓸 히로인 3명의 주제는 '감염자'인지라 그리 밝지 않을 내용을 갈 예정임. 스펙터 편의 경우 스펙터 특유의 성격으로 라이트하게 갔지만, 진중한 성격의 별눈나의 경우 꽤 어두운 전개로 갈 예정. 그만큼 명붕이들도 읽고 나서 이전이랑 분위기가 많이 달라 위화감을 느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 혹시 나중에 읽고 마음에 안 든다면 아쉬울 따름임. 


현재 플롯은 거의 작성 완료했는데, 예상 플롯이 거의 스펙터편의 두 배라는 게 함정... 이거 언제 다 쓰지...


완결을 기념하여 이리저리 많은 이야기를 했네. 직장일이 바쁜지라 바로 다음 거 쓸 수는 없겠지만, 가능한 빨리 돌아올게. 


길고 긴 스펙터편을 읽어준 모든 명붕이들 진심으로 고맙고, 별눈나 에피소드도 기대해주면 고맙겠음. 


피드백은 언제나 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