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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무언가 슬픈 일이 일어난 것 같다.

오늘 밤의 무언가가 아니라, 어쩌면 더 기나긴 시간이 켜켜이 쌓아온 것.


내가 모르는 것들.

하지만 어쩌면 알았어야 했던 걸지도 모른다.


어....무슨 일이 있었지?

머리가 아직도 짓눌리는 것 같다. 어디 부딪혔는지 한 군데가 유난히 아프고.


무언가 웅웅 울리는 것 같은 소리도 들린다.

크진 않지만 몸 안쪽이, 그리고 누워 있는 바닥이 울리는 것 같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가슴께에서 느껴지는 익숙하면서 생소한 감각.


눈을 떠야 할 것 같은데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눈 자체가 떠지질 않는다.

그러는 와중에도 가슴께에 오는 감각은 끊어지질 않는다. 손을 뻗어 잡아보려 하지만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다.


불규칙하게, 하지만 규칙적인 길이로. 누군가의 목소리다.


눈을 떠.

움직이라고.


얼마간 스스로를 재촉하니 무엇인지 알 것 같다.


가슴을 통해 축축하게 몸 안에 흘러들어오는 무형의 무언가.

끊임없이, 그리고 점점 명확하게 들리는 이름. 아까하고는 느낌이 달라졌다.


작전을 지휘하다 들이닥친 위기.

그리고 그 사이에서 잠깐 보인 기회.


ㅡ박사, 박사?


천천히, 겨우겨우 눈을 뜨자 시야가 밝은 듯하면서 어둡다.


축축하게 흘러들어오던 무언가가 끊어지고, 더 따스한 무언가가 나를 맞이한다.

무거운 무언가에 짓눌려 숨이 탁 막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 느낌이야말로 어쩌면.


ㅡ박사!


"박사!"


시커멓고, 온몸을 안에서부터 찢어버릴 것 같았던 먼지가 전부 흩어져 사라진다.

먼지가 쌓여 있던 그 공간을, 그야말로 한가운데에서 전부 밀어내 버리는 것처럼.


"뭐....뭐라도 말해봐, 박사. 내가 누군지 알겠어?"


뿌옇게 밝아지는 눈앞에 드러난 것은 붉은색 띤 갈색의 폭포.

흘러들어오던 것 대신 가슴께에 얹어진 것은 익숙한 무게감과 온기.

양쪽 귀 안쪽에서, 머리를 향해 직접 울리는 소리는 어쩌면 그 긴 시간 동안 다양한 감정을 노래하던 목소리.


"...."


아지무 안젤리나.

그때까지도, 지금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


"다행이다....못 일어나는 줄 알았어....나 때문에....나 때문에...."


"...."


입을 열어서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목이 메여서인지, 아니면 정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아직도 몸이 마음먹은 대로는 말을 듣지는 않는다.

계속 이어지는 사과에 대답하지도 못하고, 나를 부여잡은 가녀린 몸을 보듬어 주지도 못하고. 


일단은 시간을 보내는 게 좋을 것 같다.


◆ 


"좀 괜찮아, 박사?" 


"....정말 괜찮다니까. 벌써 다섯 번째야."


안젤리나가 진정할 즈음이 되니 나도 몸이 원래대로 돌아온 것 같다.

어디 한 군데 세게 부딪혀서 기절했지만 후유증이 있는 것도 아닌 모양이고. 


그 사이에 안젤리나는 어디 불편한 데 없냐고, 괜찮냐고 물어본 게 벌써 다섯 번째다.

뭐, 아까 내게 언성을 높인 것도 있고, 그 전에 아츠를 써서 덮치려고도 했던 것까지 해서 자기가 잘못했단 걸 깨달았으니 그럴 수 있다. 


냉장고에 넣어둔 음료수가 있기에 안젤리나의 몫도 가져오게 해서 같이 하나씩 천천히 마시면서 숨을 돌리고 있다.


"정말 이상하다 싶으면 의료부 갈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안젤리나가 내 손에 얹고 있던 손을 힘주어 잡으면서 정말 괜찮다는 걸 어필하니 그제야 씁쓸하게 웃는다. 그러면서도 나하고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다. 


"혹시 모르니까 그래도 내일 바로 의료부 가야 돼. 괜찮겠지 하고 미루지 말고." 


"아무튼 고마워. 그렇게 할게." 


그러고서는 서로 눈앞에서 문을 닫아버리듯, 이야기가 끊어져 버렸다.

손도 놓고, 시선도 맞출 수가 없다.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지?

안젤리나한테 앞으론 그러지 말라고 하는 정도면 될까? 어느 정도로 이야기해야 지나치지 않으면서도 지금 안젤리나의 행동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 안젤리나도 자기가 악의는 갖진 않았지만 잘못했다는 건 어찌저찌 알게 된 것 같은데. 


안젤리나는 지금도 연신 시선을 맞추려다 떨구고, 초조한 듯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스웨터에 손을 문질러 닦고 있다. 입술이 달싹거려서 무언가 말할까, 싶었지만 금새 또 걸어잠겨진다. 


자녀가 있다고 할 때 훈육을 한다면 이런 느낌이려나. 안젤리나하고 최대한 시선을 맞추려고 노력했다는 생각은 들지만 잘 되었는가 하면 그건 아닌 것 같다. 


그래도 지난번 일이 있으니, 방법을 조금만 바꾸면 안젤리나도 조금 누그러질지도 모르겠다. 안젤리나가 어디까지 그런 마음이었는지는 나도 장담할 수는 없지만 아츠를 써서 덮쳤다거나, 직접 내게 말했을 정도면 정말 오랫동안 꾹꾹 눌러온 감정이었겠지. 


안젤리나를 품고 싶었던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지만, 지금까지 말하지 못했던 만큼 말을 꺼내기 어렵다.

아니,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행동으로 보여주는 게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서로 원하고, 서로 좋은 거 아니겠는가. 화해할 겸 안젤리나하고 몸을 섞는 것도 좋을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잠깐 들었다. 아츠를 쓸 정도로까지 안젤리나가 행동을 가리지 않았다면 안젤리나도 한계였을 건데.


그래도 말해야 한다.

이건 그 한 번의 행동으로 뭉갤 수 없다.


"안젤리나." 


"....응?" 


깜짝 놀란 듯, 피하고 있던 시선이 갑자기 이쪽을 향한다. 그리고는 발갛게 달은 듯, 어쩌면 하얗게 질린 듯 복잡한 얼굴로 쉴새없이 묻는다. 


"왜 그래? 역시 어디 불편해? 부딪힌 데가 아파? 의료부로 데려다 줄까?" 


"아니. 아직 괜찮아. 정말 안 되겠다 싶으면 이야기할 거니까." 


....그래도 지금 건, 말하자니 조금 낯간지럽다. 

아니, 생각해 보면 안젤리나도 그만큼 말을 꺼내기 힘든데도, 비록 억하심정이라지만 먼저 이야기해 주었다. 


우리 둘 다 서로 터놓고 말하지 못해서 여기까지 곪아버린 상황이다. 약을 바르든, 얇게 도려내든 해서 이 병소에 필요한 조치를 해야 한다.

늦게나마라도 더 곪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다시는 같은 이유로 다른 쪽이 상하지 않기 위해서다. 


"네가 오늘 한 행동이라던가....잘못했다고 생각은 하지만 이해가 안 가진 않아. 나도 사실 한참 동안 너하고 그렇게 되고 싶다고 생각했었으니까." 


"...." 


무언가 말하려다가 말고 안젤리나는 살짝 얼굴을 붉히고선 다음을 재촉하듯 나를 똑바로 보기 시작했다. 반대로 안젤리나가 이렇게 보고 있으니 내가 안젤리나를 바라보기 힘들어졌다. 그래도 최대한 눈을 맞추면서 다시금 이야기를 이어간다. 


"우리 둘이 이렇게 만나고 있고, 데이트도 하고, 이야기하면서 웃고 떠들고, 달라붙어 있고 서로 만지고 하고 있었잖아. 나도 네가 키스한다거나 해서 달라붙으면 깜짝 놀라면서도 좋았었고. 나라고 너하고 그 이상 더 가까워지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건 아니야. 어쩌면 매일같이 그런 생각을 했을지도 몰라." 


지금 내 말에 안젤리나는 더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꼬여버린 끈다발에서 겨우 풀어냈다 싶었는데 더 엉켜버리고, 그 다음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얼굴이다. 


"고백받을 때만 해도, 네가 마냥 아이 같았는데 어른이 되어가고 있구나 싶었고. 키스하고서부터는 더더욱 네가 어른이 되어가고 있고, 그런 만큼 너하고 하고 싶어졌고. 그럼 나는 지금까지처럼, 좀 어린 애인 정도로 너를 봐도 되는 걸까. 혹시라도 네가 싫어하면 어떻게 하지? 하고." 


이리저리 뒤엉킨 매듭더미에서 겨우 하나 찾아서 조심조심 풀어내는 듯, 안젤리나의 입술이 짤막한 말을 뽑아낸다. 


"....박사도....똑같았구나." 


"우리 둘 다 쓸데없는 고민이었을지도 모르지. 사실 둘 다 서로 몸을 섞고 싶었는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거였으니까. 그래서 네가, 수영복을 입었던 일 이후로 계속 그 생각이 났어. 술김이었다지만 덮쳤을 때 당황하면서도 고마웠고, 내심 좋았었고. 안젤리나도 그러고 싶었구나, 했어."


내 말에 안젤리나가 얼굴을 붉히면서 내 손을 힘주어 잡았다. 


"그런데도 너한테 이 이상 손댈 수 없다고 생각해서 의도치 않게 밀어낸 것처럼 보였다면....미안해. 지난번처럼, 좀 더 기다려달라고 말하면 네가 또 실망할 것 같아서 말하지 못했는데, 더 실망시키기도 했고, 내가 너를 몰아붙인 모양이야." 


"박사....그게 아니라...." 


말을 자르듯 나를 부르던 안젤리나를 제지시켰다. 평소대로면 그러지 않았겠지만 말을 멈출 수가 없었다. 두서없이, 그저 마음에 담아두었던 말을, 안젤리나에게 전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미안한 마음도, 안젤리나가 내게 있어 얼마나 각별한 사람인지도. 


"그래도 이야기를 같이 했어야 했는데. 그랬으면 네가 오해하지도 않았을 거고, 불안해하지도 않았을 거니까. 관계를 더 오래 이어가고 싶다는 생각에, 우리 둘에게 다가온 의견 차이를 모른 척 했어. 조금 더 솔직히 터놓고 말하지 못한 것도 정말 미안해."


문득, 아까 잡고 있었던 안젤리나의 손을 다시 보니 손끝이 검푸르게 부어 있다. 

아마 긴 시간 동안 나를 깨우겠다고 치료 아츠를 무리해서 돌린 탓이겠지.


그걸 보니 안쓰럽고, 내가 터놓고 말하지 못한 탓에 여기까지 온 거구나 싶었다.


"그래도 이건 믿어줘. 너 외에 누군가에게 눈길 준 적은 정말로 없어. 기억을 아직 못 찾은 지금....나한테 있어서 너는 가장 가까이 있고, 가장 중요한 사람이야. 네가 없는 일상이 이제 어땠는지 기억도 안 나고, 상상도 하기 싫어." 


만약 안젤리나가 내일이라도 광석병이 악화되어서 나하고 같이 있을 수 없게 된다면. 


나는 그 어떤 방법도 동원하지 못하고, 미련만 남기고 안젤리나를 보낼 수밖에 없는 걸까.

아름다움을 품고서 한껏 피어날 날을 손꼽아 기다렸을 터. 그 시간이 무색하게, 시퍼런 칼날에 찢겨 죽어가는 꽃을 하염없이 바라만 봐야 했겠지. 


그렇게 된다면 아마 나는 안젤리나가 어른이 되면 몸을 섞으려는 결심을 죽을 때까지 후회할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설령 한 번 더 내게 기회가 주어진다 하더라도. 

만약 안젤리나가 어른이 되기 전에 병마에 먹히고, 검게 타들어가며 나를 깊숙히 원망할 걸 알고서 시간을 되돌린다 하더라도. 


안젤리나가 어른이 될 때까지 기다릴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지금 사이를 더 길게 이어가고 싶었어. 아직 어른이 아닌 너를 더 소중히 여기고 싶어서 그러고 싶었는데도 말하지도 못했고. 그래서 네가 그렇게나 용기내 준 게 더 대단하다고 생각해. 너도 정말 큰 마음 먹고, 몇 번이고 고민하고서 용기냈을 텐데, 내가 밀어낸 것 같았을 거야."


"박사...."


"미안해, 안젤리나. 말하지 못 해서....그리고 너한테 이야기를 꺼내지도 못하고, 내 생각만 해서...."


안젤리나가 무언가 말하려는 듯, 하지만 쉽게 골라서 표현하지 못하는 듯 나를 보면서 입을 벙긋거렸다.

안젤리나도 정말 많은 생각을 해 왔을 테고, 내가 밀어낸 것 때문에 고민 걱정이 많았을 텐데. 어쩌면 아까 안젤리나의 돌발행동은 그 편린이겠지.


결국 그 모든 시도가 무색하게, 손을 잡은 채로 고개를 숙여버렸다. 그래도 대답을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내가 이 이야기를 하겠다고 결심을 내린 것도 시간이 걸렸다.

못해도 안젤리나에게도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하겠지.


"....빼앗기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었어." 


한참 다시 조용히 있던 안젤리나가 나직이 말했다. 

정말 긴 시간 동안 억눌러온 말과 감정이었는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도 조심스러워 보였다. 


"빼앗기다니....?"


안젤리나는 이미 감염자가 되면서 많은 것을 잃었다.

나는 그래서 안젤리나의 옆에 있으면서, 되찾아주지는 못해도 새로운 것으로 채워주고 싶었는데.


"처음 박사에게 고백했을 때....아니, 내가 박사를 좋아하고 있었단 걸 알았을 때부터도 그런 생각이었어. 나는 감염자고, 어린아이니까 박사 눈에 차지 않을 거라고. 박사는 주변에 좋게 보는 사람도 많고, 그 중에는 비감염자인 언니들도 있을 거니까."


"...."


십대 여자아이라면 충분히 가질 수 있는, 이성에 대한 관심. 마음에 드는 이성과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

하지만 감염자라는 꼬리표가 그것마저도 앗아가 버렸다니. 한편으로는 그 꼬리표가 없는 사람에게 밀린다는 자격지심도 덤으로 얹어버린 모양이다.


"그래서 박사가 내 마음 받아주었을 때 정말 고마웠고, 또 많이 놀랐어. 그런데도 계속 불안했어. 어쨌든 난 감염자니까 결국 우리 사이가 오래 못 갈 거라고 생각했고, 나 자신도 오랫동안 박사랑 같이 있을 수 없을 테니 박사가 금방 나한테 정이 떨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


안젤리나가 나를 믿지 못해서가 아닐 것이다. 그랬다면 아마 시도조차 안 했겠지. 

정말로 마음 깊이 '어차피 이 사람은 금방 나를 떠날 거다'라고 생각했으면 짤막하게 만나고 헤어졌을 터다. 


안젤리나가 나를 위해서 이런저런 준비를 많이 해 주고, 같이 데이트를 하고 싶다는 이유로 휴일에 자신의 체력과 아츠를 써 가면서 멀리까지 나간 게 몇 번이었던가. 그뿐만 아니라 일이 끝나면 사무실에 와서 같이 시간을 보내기도 했고. 그 시간 동안 우리가 조금 마찰은 있었어도, 그래도 함께 있는 시간은 서로 즐거웠는데.


"그래서 박사랑 만나는 동안 더 많은 걸 같이 하고 싶었어. 같이 보내는 시간이 적다면 그만큼 우리 추억을 만들지 못할 테니까. 박사가 일 때문에 나하고 시간을 많이 못 보내는 게 아쉽고 서운했던 마음도 없잖아 있었어." 


하지만 거기서, 내내 불안해하던 말투가 누그러지고 안도하는 것처럼 안젤리나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그래도 나하고 있을 때만큼은 박사가 나한테 온 신경을 쏟아주었으니까 괜찮았어. 아니, 정말 고마웠어. 그뿐만 아니라 박사가 이것저것 준비도 해 주었고, 내 어리광이랑 넋두리도 받아주었으니까. 이 사람이 그래도 나를 감염자로만 보고 있지는 않구나, 하고. 알고는 있었고, 그래서 고백했지만 가까이 있어보니 정말 그런 사람이었구나, 싶었어."


그때 문득 떠오른 이야기가 있었다. 우타게가 말했던 거였나.


ㅡ안젤리나 성격이랑, 사정이 있으니 막 엄청 실망하고 그러진 않을 거야. 박사가 뭘 준비해 주면 엄청 황송해할지도 모르고.


안젤리나가 생각하기에 내 주변에 사람이 많으니까, 자기보다 더 괜찮은 사람, 그러니까 아까 말했던 것처럼 아이가 아니면서 비감염자인 사람을 자기 대신 만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겠지. 수수로 말대로 연애는 생각보다 만나고 헤어지는 게 가벼울 사이라고도 하고.


하지만 정말로 안젤리나가 마음 깊이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렇게까지 하지도 않았을 거다.

오히려 이만큼 나를 믿었기 때문에, 온몸을 던져 나를 사랑하면서도 자신의 처지를 더더욱 나쁘게 본 것에 가깝다.


"근데 그런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나니까 더더욱 빼앗기고 싶지 않아졌어. 그러는 중에 박사가 어느 정도 이상 다가오질 않으니까, 정말로 박사가 이쯤에서 정리하려고 선을 긋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고. 더구나 지금은 안정세라지만 광석병이 언제 나빠질지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안젤리나가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오랫동안 쌓여 있던 감정이 또 다른 방향으로 터져나오려는 것처럼.

어떻게든 말을 계속하려는지 숨을 고르는 소리가 몇 번이고 들렸지만 목 울리는 소리, 거기서 또 다시 짓눌린 숨소리만 나올 뿐이었다.


"박사가 우리 사이를 싫어하지 않고....나하고 같이 보내는 시간을 좋게 생각해 주고....넋두리도 어리광도 다 받아주고....그것만 해도 박사가 나한테 정말 많은 걸 해 주고 있었잖아. 그래서, 그래서 박사가....박사가 언제 갑자기 나한테 그만 만나자고 해도 붙잡기 미안한데....그렇게 헤어지기는 또 싫었어서...."


결국 억지로 쥐어짜듯 나온 목소리에, 사랑니를 빼낸 것처럼 고통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 한구석이 가볍게 내려앉는 것 같았다.


손을 잡힌 채 안젤리나에게 가까이 다가가 가지런히 묶은 머리를 부드럽게 당겼다. 머뭇거리면서도 기대어 오는 무게감에, 등을 손으로 천천히 쓸어주자 서서히 발갛게 타오르는 감정에 온몸이, 마음까지도 물들어갔다.


스무 살도 안 된 아이가 감당하기 힘들어했던 그 감정은 잡힌 손으로, 껴안겨온 무게감으로 전해져왔다.

이어서 정말 오랫동안 쌓아왔던 감정들이 터져나오듯, 안젤리나가 어깨를 들썩이면서 숨죽여 울기 시작했다.


안젤리나인지 내 쪽인지, 손에 땀이 차는 모양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좀 더 단단히 손을 잡고 있는 느낌이 든다. 못했던 말과 함께 마음을 주고받는 것처럼.


안젤리나가 진정할 때까지 등을 쓸어주며 기다렸다.


"그게 불안했었구나. 정말 미안해. 이것도 어쩌면 내가 너한테 내 나름대로 생각한 걸 말하지 않아서 일어난 일일 거야....아까 이야기했던 스무 살이 되면, 하는 이야기도 내가 변명하는 것처럼 보였을 거야. 지난번에도 내가 스무 살 이야기를 하면서 미루려 했으니까. 어쩌면 그 이야기도 내가 먼저 너하고 했어야 했을지도."


조금은 진정이 됐는지 안젤리나의 축축한 숨소리가 잦아드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게 불안하다 하더라도 사람을 아츠를 써서 덮치지는 말아줘. 전에 말했지? 나 때문에 선을 넘지 말아달라고. 가지고 있는 걸 올바르게 써줬으면 좋겠어."


함께 있을 때 안젤리나의 아츠는 모르는 곳에 우리를 데려다 주는 기대감을, 그리고 보호받고 있다는 편안함을 선사해 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게 나쁜 쪽으로 물드는 것은 안젤리나를 잃는 것과도 비할 정도로 무서웠다.


"절박한 것도 이해해. 광석병이 네 하루하루를 갉아먹고 있는 느낌일 테니 너도 불안했을 거야. 그렇다고 무언가을 강제로 자신의 것으로 하지는 말아줘. 부탁할게, 안젤리나.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나는 네 옆에 있을 거야."


"....정말 미안해, 박사....내가 잘못했어. 정말 미안해...."


잘못했다는 걸 충분히 인지한 모양이고, 아까 자신의 행동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눈으로 직접 보았다.

이 이상 이 잘못에 대해 말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나한테 어떻게 하면 잘 보일지 고민하는 것도 내겐 정말 고마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네가 '로도스 아일랜드 박사의 누군가'로만 있길 바라지 않았으면 좋겠어." 


하지만 안젤리나가 그런 불안감을 계속 가지고 있는 건, 역시 오랜 시간 동안 광석병 감염자로 지내면서 쌓여있던 낮은 자존감도 한몫했을 것이다. 

안젤리나 스스로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면 결국 다른 일로 주저앉고 말 테니.


"'내 애인'이라는 이름만이 아니야. 하고 싶은 것도 많았고, 나름대로 내 앞에서 결심한 것도 있었잖아. 그게 너를 위한 거였으면 싶어. 이 이야기도 했었지? 우리가 서로만을 보고 있으면 결국 못 보게 될 거라고."


안젤리나는 무언가 마음을 굳힌 듯 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상처에 소독약을 바르면 쓰리고 더 아프기 마련이지만, 앞으로의 자신을 위해서인지, 어쩌면 더 나아가 우리 둘을 위해서인지 묵묵히 손길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정말 감사한 일이었다.


"우리 관계를 유지하려면 스스로에게도 충실한 게 좋아. 그리고 나도 그걸 위해 노력하는 네가 좋았고."


안젤리나 나름대로의 노력을 부정하는 게 아니다.

안젤리나가 조금 더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가졌으면 하는 생각이다. 좀 더 자신을 위해서.


"안젤리나. 그렇게까지 걱정하지 않아도 나는 너를 믿어. 너하고 보내는 시간이 너무 즐거워. 어떻게 하면 네가 나한테 해주는 만큼 내가 너한테도 해줄 수 있을까, 항상 고민하게 돼. 그래서 내가 너한테 같이 자고 싶다고 말하지 못한 것도 맞아. 잘못 말해서 우리 사이가 틀어지면 어떻게 하지, 하면서 나도 무서웠고."


그러니, 나도 조금 더 마음을 터놓고서 사랑하는 이 사람과 솔직하게 이야기를 하는 게 좋겠지.

자잘자잘하게 다투는 일은 있을지 몰라도, 그만큼 오늘처럼 크게 사고가 터지는 일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걸로 안젤리나뿐만 아니라 나도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게 있다면 고칠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러면 나도 안젤리나하고 같이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앞으로 우리, 물론 지금도 많이 이야기하고 있지만 조금만 더 많이 이야기하자. 마음에 담아놓지 말고. 화내도 괜찮고, 다투어도 괜찮아. 아직 우리가 서로에 대해 몰랐던 걸 알아가는 거라고 생각하자."


"응....알겠어. 노력할게....아니, 꼭 그럴게...."


"그리고....1년 동안 곁에 있어주어서 고마워. 여기저기 데려다 주어서 고맙고, 같이 시간을 보내주어서 고맙고. 나하고 같이 시간을 보내려고 많은 준비를 해준 것도 고맙고, 애정표현해 줘서 고마워. 그리고 지금까지 계속 살아주어서 고마워."


안젤리나가 1년 전에 겨우 용기내어서 마음을 전해주었던 고백처럼.

나도 이제서야 겨우 용기를 내어서 안젤리나에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새삼스럽게 알고 있지만, 말로 표현하는 것은 정말로 어려웠다.


"아직 부족한 사람이겠지만, 이런 쪽에 아직도 어두워서 답답할지 모르겠지만. 앞으로도 잘 부탁할게. 사랑해, 안젤리나."


안젤리나가 내 말에, 대답 없이 수척한 얼굴로 배시시 웃었다.

이제야 겨우, 조금 그늘은 져 있지만 평소처럼 사랑스러운 사람의 얼굴이 되었다. 광석병 고민은 내려놓고, 내일을 상상하며 하루하루를 즐겁게 사는....어른을 한 걸음 앞에 둔 아이의 모습이. 어른이 되면 이 얼굴은 과연 무엇을 기다릴지 나도 기대된다.


"박사도....그럼 말한 건 지켜야 돼? 내가 스무 살이 되면, 같이 자는 거야."


"약속할게. 우리 사이에 대해서도 더 이상 숨기지 않을 거고."


이 말도 했었으니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고 싶었다.


"그리고 나 스무 살이 될 때....다른 거는 안 바랄 테니까, 딱 하나만 더 들어 줘."


안젤리나니까 터무니없는 걸 바라진 않을 거라 생각하면서도, 어떤 부탁을 할까 하는 생각에 손을 한 번 더 맞잡으면서 말없이 물었다.

조금 부끄러운 듯, 그러면서도 기대한다는 듯. 사랑스러운 불포 여자아이....아니, 불포 아가씨는 대답했다.


"나 생일날에는 하루 종일 나랑 같이 있는 거야. 날짜 바뀌는 그때부터, 날짜 바뀔 때까지. 한시도 떨어지지 말고."


"그래야지."


하루 더 휴가 내고, 그 전에 그랬던 것처럼 저날 일을 앞뒤로 당기면 되겠지.

한 번 해 봤으니 한 번 더 못 하리라는 법도 없다.


"그리고....그리고 하나만 더 들어줄 수 있어?"


"물론."


조금 전 했던 솔직한 대화도, 아츠를 써서 나를 덮치고, 언성을 높이고, 결국 나를 밀어냈던 그 모든 게 헛것인가 싶을 정도로.

내 손을 놓은 안젤리나는 내게 꼭 안겨오면서 어리광을 부려왔다.


그 사랑스러운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나오는 것 같다. 잃어버릴까, 없어질까 무서웠던 그게 어쩌면 가장 소중한 일상이었을지도 모른다.


"화해의 키스....해 주지 않을래?"


대답할 필요도 망설일 이유도 없었다. 내 어깨에 얼굴을 얹고 있던 안젤리나를 살짝 물리고, 금방 거리를 좁혔다.

눈물에 젖어 있던 입술에서 짭쪼름한 맛이, 그 너머에서 흘러나오는 코랄색의 포근한 달콤함에 정말 마음이 가라앉는 것이 느껴진다.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길게, 짤막하게, 가끔 바라보면서 서로 웃고.

맞닿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워하면서 기뻐하는 풋풋함 가득한 입맞춤 소리가 몇십 번이고 속삭이듯 우리 둘을 둘러싼다.




정말 많은 일이 있던 오늘 하루였다.

어쩌면 같이 컬럼비아에 놀러갔을 때보다도 더더욱.


그때보다 안젤리나에 대해 더 알게 되었고, 같이 있으면서 우리 둘의 사이기에 피할 수 없던 것들을 마주해서일 것이다.


안젤리나는 이제 아쉬워하거나 두려워하면서도, 조심스럽게 앞으로 한 발을 내딛고 있었다.


이 뒤로도 함께할 나날을 향해서.

기억은 없지만 앞서서 걸어갔던 나와 보폭을 맞추면서.


그리고 이제 뒤에서 나만을 보고 있는 게 아니라, 나와 같은 선상에서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

앞으로도 이렇게 같이 가 주었으면 하고 있다. 


이 앞길은 우리가 바라는 것처럼 순탄치만은 않을 것이다. 

그럴 일은 없었으면 하고, 없겠지만 안젤리나가 나이 많은 나보다 더 먼저 이 길의 종착점에 다다를지도 모른다. 그게 나보다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 순간에 같이 있어서 행복했다고 생각해 주었으면.

그러려면 나도 안젤리나하고 보내는 시간을, 지금 이상으로 더더욱 소중히 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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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 및 오류 지적, 피드백 환영

오리지널 설정도 있을 수 있음.



오랜만이야. 특사스 이벤트랑 헤드헌팅은 잘 되고 있는가.

헤드헌팅은 오늘에서 내일로 날짜 바뀌면서 끝나니까 막차탈 사람은 지금에라도 타러가


갈등 부분이랑 갈등 해소 부분은 글을 아무리 써도 어려운 것 같다. 

그 뭐였더라? 모자 색상에 따라서 한 토픽에 대해 사고를 특정 방향으로만 해야 되는거

아니면 특정 주제를 갖고 대립할 때 나는 찬성 의견을 가지고 있지만 반대 의견으로 상대를 설득해야 하는 거라던가.

그런 거라도 좀 해 봐야 되려나 싶다


그거랑 별개로 글이 또 길어지네

이거만 벌써 퍼퓨머 본편 분량을 넘어서버렸어....


그래도 이 글도 이제 슬슬 끝자락이다.

힘내서 남은 내용도 잘 끝내볼게.





오늘도 기다려주고, 귀한 시간 내서 찾아와서 읽어줘서 너무 고마워.




포탈 전부 열어놨음
근데 퍼퓨머 글 초반부는 너무 오래전 거라 그런지 수정이 안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