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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지 씨. 박사입니다. 잠깐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


그날 저녁, 나는 제압되었던 수지 씨가 진정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수지 씨의 병실로 가 보았다.

그때하곤 다르게 취조 쪽 면담이 아니니, 이번 일은 수지 씨가 더더욱 협조할 생각이 들어야 한다.

 

"수지 씨. 박사입니다. 안에 계신가요?"


"...."


이야기할 생각이 없으려나, 하고 돌아가려던 그때 문 너머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조심스럽게 문이 열리고, 경계하는 듯한 호박색 눈이 문틈 너머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몸은 좀 괜찮으세요?"


"...."


"잠깐 이야기를 좀 하고 싶습니다."


"...."


대답 없이 수지 씨가 문을 열었다. 땋고 다니던 머리는 풀려 있는 데다 여기저기 삐쳐 서 있다. 

거기에 이제껏 봐 왔던 평상복이 아닌 환자복을 입고 있는 수지 씨는 조금 전 그 일 때문인지 수척해 보였다.


"....왜? 나 쫓아낸대? 그거 이야기하러 로도스 아일랜드의 수뇌부가 직접 올 정도로 큰 일이야?"


"전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누가 그렇게 말하던가요?"


"...."


대답하지 않고 수지 씨는 병실 안으로 들어왔고, 나가라거나, 그렇다고 들어오라는 말도 하진 않았지만 허락으로 알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오자 수지 씨는 갈라진 목소리로, 이쪽을 보지 않고 이야기했다.


"날 쫓아내기 전에 그건 들어줘. 나 때문에 그 사람이랑 다른 단원들을 쫓아내진 말아줘. 내가 잘못했어. 하지만 그 여자를 보고,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어."


"무슨 일이 있었던 건 맞나 보네요. 가게....이야기를 하셨던 것 같은데."


수지 씨가 한숨을 쉬었다.

어쩌면 이 이야기, 누구에게도 하지 않은 걸까. 아니면 레드 씨는 사정을 알고 있으려나?


다만 레드 씨가 안다 해도 그 사람에게 이야기를 듣는 것도 실례다.


"이유 없이 그렇게 하진 않으셨을 거라 전 생각합니다. 그건 다른 수뇌부 사람들도 마찬가지구요. 다른 단원 분들이 직접 잘못한 것도 아니니 쫓아낼 이유도 없죠. 그래서 그 이야기를 들으러 왔습니다. 참작을 해 드릴 테니, 이야기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


돌아서서 고개를 든 수지 씨가 나를 똑바로 보고, 착잡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 여자 때문에 내 가게가 불타버렸어."


그 이야기는 어제 수지 씨의 입에서 나온 그대로다.


"난 있잖아, 박사. 아버지 뒤를 이어서 미용사가 되고 싶었어. 감염자이지만, 감염자들이어도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그래서 난 내 가게를 열고 싶었어. 그냥 미용실은 감염자를 받지 않으니까. 정말 감염자를 위한, 제대로 된 미용실 말이야...."


소박한 꿈이었다.

어쩌면 더 오래 전부터 수지 씨는 감염자였을지도 모른다. 꿈도, 극단적으론 삶까지도 포기하는 감염자가 많지만, 수지 씨는 그런 삶임에도 꿈을 가지고 있었다.


"박사. 빅토리아 돈으로 6500파운드야. 내가 그걸 모으는 데 5년 하고도 절반이 걸렸어. 근데 그건 그냥 6500파운드가 아니야." 


가게 하나를 세울 수 있을 돈일 테니 적은 돈일 리가 없다.

단순히 '6500파운드'라는 숫자와 문자로 표현할 수 있을 리도 없다.


"그걸 모으려고 낮에는 공장에서 평생 찰 일이 없을 손목시계 부품을 만드는 일을 했고, 눈 침침하고 허리 아픈 걸 추스를 틈도 없이 밤에는 술집에서 서빙을 해야 했어. 술에 취한 남자 손님들이 만지거나 껴안으려 했을 때는, 이렇게까지 해 가면서 돈을 벌어야 하나 싶었지만...."


그 무덤덤한, 어쩌면 자조하는 듯한 말에 저도 모르게 수지 씨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이고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아니, 오히려 수지 씨가 나쁜 일을 떠올리듯 괴로워하지 않아서 더 세차게 와닿았는지도 모르겠다.


6500파운드를 모으는 데에 5년 반. 아마 감염자라서 약값이 빠진다는 명목으로 절반의 급여를 받아야 했을 터. 

더 빨리 가게를 열고자 했다면 밤낮으로 일해야 했겠지.


몸이 아플 수도 없었을 것이다. 

마음이 지쳐도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었을 것이다.


새어나오려는 한숨을 억누르고 다시 수지 씨의 얼굴을 보자, 오히려 괜찮냐는 표정으로 나를 보더니 말을 잇듯 물었다.


"박사는 그 돈이 얼마나 큰 돈인지 알아?"


"....감은 잘 오지 않지만, 감염자인데도 그걸 다 모으셨다는 게 대단하다고는 생각했습니다."


먹고 싶은 것도 참고, 젊은 나이에 즐기고 싶은 것도 참으면서.

감염자에게 던져지는 수모도, 술집에서 일을 하면서 있던 불미스러운 서러움도 눌러참으면서.


수지 씨의 6500파운드는 그렇게 만들어졌겠지.

빅토리아에서 한 끼 간단하게 먹으려고 하면....얼마였더라.


"그 돈은 거울 한 장 한 장이 되었고, 의자 하나하나가 되었고, 작은 세면대가 됐고, 한 장 한 장 쌓여서 벽돌과 지붕이 됐고, 간판이 됐어. 당신은....아니, 아마 누구도 모를 거야. 눈앞에서 그게 하나하나 모여서, 내가 원하는 가게가 점점 완성되어 갈 때 얼마나 가슴 벅찬지...."


씁쓸하게 웃으면서, 만들어지고 있던 가게의 모습을 떠올리듯 수지 씨는 멍하니 말을 이어나갔다.


"가게가 다 만들어졌을 땐 5년 반의 고생이 보답받는 것 같은 기분이 꿈은 아닌지 몇 번이나 의심했어. 그 전부터는 얼마나 꿈을 많이 꾸었는지 몰라. 내 가게에서 일하는 내 모습이랑, 찾아온 손님들이 기뻐하는 꿈 말이야. 근처 거주구에 사는, 아는 감염자 분들에게는 미용실을 열 거니까 언제든 내키면 찾아와 달라고 발로 직접 뛰며 홍보도 했어....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그 가게가.


"그런데 그 가게가 채 영업도 시작하기 전에, 그 여자가 내 가게를 완전히 불태워버렸어. 처음으로 일하는 날이라 얼마나 기대를 많이 하고 잠도 제대로 못 잤는데....나는 내 가게에 발도 제대로 못 들여보고, 가위질 한 번 해보지도 못하고....5년 반의 고생이 잿더미가 되고, 그 여자는 누군가에게 쫓기면서 도망치는 걸 바라보기만 해야 했어."


우는 것처럼, 또 다시 수지 씨의 머리카락이 불안한 춤을 추고 있다.


"뭔가 사정이 있었겠지....그래....아까 그 여자가....뭔가 사과하려는 것 같은 말은 들었던 것 같아....그런데도 용서할 수가 없었어. 내 5년 반의 고생을, 더 오랜 시간 동안 안고 있던 꿈을 하루 아침에 잿더미로 만들어 버린 여자였으니까."


괴로운 일을 씹어삼키듯, 하지만 목을 울리며 몇 번이고 넘어오려는 것처럼.

어쩌면 그 일은 지금까지도 수지 씨를 괴롭히고 있을지도 모른다.


"....전말은 그게 다야. 모아놓은 돈도 가지고 있던 돈도 전부 그 잿더미에 때려넣었고, 미용실을 하겠다고 일하던 공장이랑 술집도 그만뒀더니 자리가 없었고....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거리에 주저앉아 있던 나를 그 사람이 구해줬고, 그렇게 리유니온에서 1년 동안 있었어."


다만 지금 들은 이야기로는, 수지 씨가 로도스 아일랜드를, 정확히는 나를 그렇게나 경계했던 이유가 되지 않는다.


헤이즈는 로도스 아일랜드에 들어오고선 혼자 빅토리아에 가거나 한 적이 없다.

그러니 지금 이야기는 헤이즈가 로도스 아일랜드에 입사하기 전의 이야기일 것이다.


"로도스 아일랜드....랑 혹시 그 화재가 관련이 있었습니까? 로도스 아일랜드 오퍼레이터가 그 불을 냈다거나."


"아니. 원래는 로도스 아일랜드가 갖고 있던 건물이라고 했었어. 어떤 직원이 쓰고 있었는데, 생각한 것보다 싸게 그 건물을 넘겨받았던 기억은 나. 아마 그것 덕분에....가게 내부를 좀 더 다듬을 수 있었다고 생각해."


장부를 조사해 보면 그 당시에 수지 씨에게서 들어온 돈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알겠습니다. 괴로운 기억일 텐데, 이야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로도스 아일랜드하고 작게나마 연관이 되어 있으니, 배상할 방법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걸 왜 당신들이 배상해? 그 건물은 나한테 넘어온 시점에서 당신들하곤 상관없어졌잖아?"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묻는 수지 씨의 말대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 사정을 들은 이상, 가벼이 넘길 수는 없었다.


어쨌든 감염자인 사람이 자기 꿈을 송두리째 잃어버렸으니, 로도스 아일랜드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다.


"그게 로도스 아일랜드니까요."


그 이상 대답하자니 주저리주저리가 될 것 같아서, 짧게 대답하고 수지 씨의 병실을 나섰다.

아연한 표정으로 이쪽을 보는 시선에, 차마 눈을 맞추지 못하고 문을 닫아버렸다.



다음 날 아침.

이번에는 헤이즈가 정신을 차렸다는 소식을 듣고 사무실에 출근할 겨를도 없이 바로 병실로 갔다.


"좀 어떠냐, 헤이즈."


"....아, 박사. 뭐하러 왔어. 귀찮은 건 사양인데."


입으로는 별일 아니라는 듯, 평소처럼 툭 던지는 말투였지만 그 표정은 수지 씨 못지 않게 무거웠다.

그러면서도 캐비닛을 뒤적거리더니 비스킷 같은 무언가를 꺼내 내게 건네준다.


"내가 뭐가 된다고 로도스 아일랜드 수뇌부나 되는 사람이 찾아오는데. 그렇게나 한가해? 출근했어야 될 시간 아냐?"


"뭐, 이것도 일 아니겠냐. 좀 확인하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그 여자 이야기지? 이야기 들었구나?"


내가 찾아온 시점에서 예상한 것처럼, 헤이즈는 쓰게 웃었다.

수지 씨의 쓴웃음은 허탈감이라면, 헤이즈는 죄책감....일까.


"네가 불 지른 건 아니지?"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왠지 모르게."


적당히 얼버무렸다.

수지 씨의 말대로라면 헤이즈는 무언가에 쫓기듯 도망가고 있었다고 했으니.


"그 여자가 나한테 그 정도로까지 화낸 걸 보면 그게 아니라는 거 알잖아. 나 때문에 그 여자는 자기 가게를 잃었는걸."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남의 가게에 불 지르는 사람이 죄책감을 느끼진 않았을 거라 생각하는데."


방금 헤이즈는 '나 때문에'라고 말했다. 

물론 자기가 불을 질렀고 지금은 그걸 반성하고 있다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헤이즈는 내 대답에 복잡미묘한 표정을 짓더니 흥 하고 비웃었다.


"범죄자의 말을 너무 쉽게 믿는 거 아냐, 박사?"


"안 믿으면 뭐 어떻게 하겠냐. 무슨 일 있었던 거 맞지?"


"....있었으면 뭐? 그 여자 가게가 돌아와?"


그 말을 기점으로 비웃는 어조도 애써 웃던 표정도 싹 사라졌다.

막혀 있던 게 터져나오는 것처럼, 한숨에 이은 하소연이 쉼없이 쏟아져나왔다.


"그때 그냥 난 숨어들 곳이 필요했고, 그런 날 노리고 소이탄이 날아왔어. 말이 된다고 생각해? 그냥 좀도둑을 잡겠다고 소이탄을 던질 줄 나도 몰랐어. 근데 억울해도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 나 때문에 그 여자가 자기 가게를 잃은 건 사실이잖아. 찾으면 날 죽이고 싶었겠지. 나라도 그랬을 거야."


"...."


무엇 때문에 쫓기고 있었는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될 것이다.


악명 높은 탈옥수라면 노리는 사람은 많았을 것이다.

군경이었을 수도 있고 현상금 사냥꾼일 수도 있었겠지.


"그러니까 이 악물고 참을 수밖에 없었어. 그래도 싸니까. 그 여자가 나를 죽였어도 나는 받아들였을 거야. 결국 나 때문에 그 여자는 자기 가게를 잃었잖아. 그 여자가 얼마나 고생해서 자기 손으로 일궈낸 가게인지, 나는 평생 모르겠지. 그러니까 내 잘못이야. 아마 평생 일해도, 아니 어떤 도둑질을 해도 갚을 수 없을 거야. 그 가게는 절대 돌아오지 않을 거니까."


"너...."


헤이즈는 답답하다는 듯 가슴 옷깃을 부여잡고 고개를 숙였다.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몇 번이나 어깨를 들썩거리다가 내뱉지 못하기에 아무 말 없이 기다렸다.


"그래도....그래도 속죄하고 싶어. 아무리 좀도둑으로 살았지만....내가 잘못한 건 잘못했다고 인정할 수 있어. 그 여자가 날 용서 못 해도....아니 솔직히 말하면 다시 보자마자 죽일 것처럼 달려들 것 같아서 무서워. 그래도 속죄하고 싶어....무슨 수를 써서든...."


"....노력해 볼게."


수지 씨도 헤이즈에게 홧김에 아츠를 전개한 것에 대해 잘못이라 말했고, 헤이즈도 자신이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자기 때문에 소이탄이 수지 씨의 가게를 태웠으니 잘못이라고 했다.


둘이 좀 더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으면, 하고 생각하며 헤이즈를 두고 밖으로 나왔다.

조금 진정하면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고 싶었다.



헤이즈의 면담이 끝났으니 사무실로 가야 했지만 나는 매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제 분명 레드 씨는 망설이지 않고, 수지 씨의 전기장에 내가 휘말리지 않게 해 주었지.


목숨을 구해준 보답이라기엔 초라하고 이 사람이 뭘 좋아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캔커피랑 담배라도 사서 감사 표시라도 할까. 그때 담배 이야기를 얼핏 했었고.


"어? 박사가 별일이네. 담배를 다 사고."


평소 마시는 캔 커피와, 로도스 아일랜드에서 흡연자 오퍼레이터들이 곧잘 피우는 담배 한 갑을 사서 클로저한테 내밀었더니 신기한 듯한 반응이다.


"요즘 일 많이 힘든가봐? 담배 생각이 다 나?"


"아니."


"애도 아닌데 담배 피우는 거 숨길 거 있어?"


"아니라고. 계산이나 해 줘."


참견이 참 많은 사람이다.


그러면....레드 씨는 병실에 있으려나.

그렇게 생각하며 매점을 나서던 그때.


"엇."


"윽...."


어째선지 매점 쪽으로 오던 레드 씨와 눈이 마주쳤다.

마침 또 필요한 타이밍에 이렇게 만나다니. 찾을 수고를 덜었다.


"뭐 살 거 있어서 오셨습니까, 레드 씨?"


"뭐....신경쓸 거 없잖아."


그러면서 레드 씨는 혀를 차고, 초조한 듯 손가락을 비볐다.

생각해 보면 이 사람 제조소에서 일 시작했더라도 돈이 나오진 않았을 건데. 제조소는 주급으로 임금이 나오고, 오늘은 아직 주급날이 아닐 테니 말이다. 


아니, 애초에 레드 씨가 여기에 있다는 건 아직 제조소에 일하러 가지 않았다는 거겠지.


역시 담배 생각....이 나서 그런 건가.


"잠깐 이야기 괜찮습니까."


그렇게 물으며 레드 씨에게 조금 전 산 담배를 내밀었다.


진짜 나한테 주는 거냐고 묻는 듯한 표정에서, 왠지 모르게 좋아하는 막대사탕을 눈앞에 둔 어린아이가 떠올랐다.

아니, 담배를 주면서 떠올릴 건 아닌가?


....


초조한 걸음으로 갑판에 나온 레드 씨는 손가락을 튕겨 담배에 불을 당겼다. 이어 담배를 한 모금 들이마시더니, 안도하는 것처럼....일단 담배 연기를 내게서 먼 방향으로 내뿜었다.


"후우....제대로 된 담배 피우는 게 몇 달만인지."


"수지 씨한텐 비밀로 해 드릴 테니 적당히 피우세요."


"비밀로 해도 귀신같이 알더라."


뭐, 일단 필라인이니 담배 냄새에 민감하겠지.

그보다 이쪽을 향하지 않았는데도 담배 냄새에 숨이 탁 막히는 것 같았다.


한 모금 더 담배를 당기던 레드 씨가 문득 떠올랐다는 듯 내게 담배갑을 내밀었다.

하나 피우라는 듯, 열린 담배갑 밖으로 한 개피가 튀어나와 있다.


"넌 안 피우냐?"


"비흡연자라서요. 그거 한 갑 다 레드 씨가 피우셔도 됩니다."


"비흡연자가 일부러 담배 사기 쉽지 않을 건데."


아쉽다는 듯 담배갑을 휘릭 돌린 레드 씨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담배를 입에 물고선 캔커피도 따서, 담뱃대를 들고 한 모금 하는 걸 보니 전형적인 직장인이 떠오른다.


나도 흡연자였으면 좀 이런 모습이었으려나.


"레드 씨."


"뭔데."


"그날....수지 씨가 헤이즈한테 화냈던 날 제가 휘말리지 않게 해 주셨죠."


"?"


담배를 한 모금 또 당기고선, 모르는 척인지 기억이 안 나는 건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랬던가?"


"네. 제가 헤이즈를 구하든, 수지 씨를 말리든 하려고 다가가려 했을 때도 저를 잡았구요."


"내가 그랬다고?"


"네."


"...."


내 대답에 레드 씨는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일단 눈앞의 상황에 몸이 이끄는 대로 행동한 건가. 그게 그 일 있기 닷새쯤 전에 적대적으로 대했던 사람인데도.


"내가 왜 그랬지?"


"어쨌든 감사드립니다."


"감사....까지야.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레드 씨 자신도 모르겠지만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나도 사실 모르겠다.


아마 레드 씨는 로도스 아일랜드에서 잠깐 일하고 수지 씨와 같이 떠날 생각이었을 텐데.

레드 씨한테 있어 나는 딱히 죽어도 상관없을 사람이었을 건데.


그래도 여느 리유니온 사람들처럼, 천성까지 나쁜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쨌든 누군가를 주저없이 구해주었으니.


"생각 이상으로 좋은 분일지도 모르겠네요. 로도스 아일랜드에 계신 분들 못지않게요."


"개뿔이. 범죄자라고. 나나 그 녀석이나."


"천성부터 범죄자였진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감염되기 전에는 어딘가의 견실한 일꾼이셨을 수도 있죠. 수지 씨가 그랬던 것처럼요."


"흥."


레드 씨는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는 듯 코웃음을 쳤지만, 그 반응에서 불쾌감이 느껴지진 않았다.

어쩌면 정말 오랜만에 듣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고맙다는 이야기도, 좋은 사람일 거라는 이야기도.


초조한 듯 남은 담배를 한 모금에 당긴 레드 씨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꽁초에 또 불을 붙여서 태워버리고, 조금 전 주머니에 넣었던 담배갑을 꺼내려다가 내 눈치를 슥 보았다. 


괜찮다는 제스쳐로 손짓을 하자, 또 한 개피를 꺼내 아까와 같은 동작으로 불을 붙였다.


"그 녀석은 어떻게 되냐? 로도스 아일랜드에 승선한 사람한테 해코지를 했으니, 쫓겨나는 건가?"


"아뇨. 뭐, 당분간 지켜보기야 하겠지만 쫓아낼 생각은 없습니다. 레드 씨랑 마찬가지로 수지 씨도 광석병을 관찰 중이니까요. 헤이즈에게 그랬던 것도, 이유가 있었구요. 참작 범위 내라고 생각합니다." 


수지 씨에게 그런 사정을 들었기도 하니 쫓아내기도 미안하다.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으니 참작해 주고 싶고.

로도스 아일랜드에 들어오기 전에 낸 사고라지만, 될 수 있는 대로 보상을 해 주고 싶기도 하고.


헤이즈도 방법이 있다면 온 힘을 다해서 책임지고 싶다고 이야기했으니.


"다만....그거랑 별개로 아츠 제어 교육을 조금 받게 되실 겁니다."


감정 상태에 따라 정전기 혹은 전기 아츠가 날뛰는 듯하니 말이다.

레드 씨가 담배를 문 채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네. 그 녀석이 쫓겨나야 한다면 혼자 둘 수가 없었는데."


"수지 씨도 천성은 선한 사람이었을 것 같은데, 레드 씨가 저보단 더 오래 보셨으니 아시려나요?"


"뭐, 리유니온에 들어가기 전에는 사람 사는 거 다 비슷비슷했지 않겠냐."


그 후론 아무 말 없이, 레드 씨는 담배를 태우고, 이따금 커피를 깔짝거리며 멍하니 먼 곳을 바라보았다.

한편 나는 앞으로 수지 씨에게 어떻게 배상하는 게 좋을지 생각하고 있었다.


남은 담배를 다 태운 레드 씨가 빈 캔을 들고 가볍게 흔들어 보이고는 갑판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지금까지하고는 다르게 발걸음이 가벼워 보였다.


"담배랑 커피 고맙다. 맛있네."


"입맛에 맞으셨다니 다행입니다."


캔을 갑판에 내버리려던 레드 씨는 뒤로 한 번 고개를 돌려 내 눈치를 슥 보고는, 불만스럽다는 듯 혀를 차며 캔을 고쳐 들고 선실로 들어갔다.


아직 4월 하순일 터인데 바람은 벌써 더워지는 것 같다.



그날 오후, 수지 씨는 사흘 간 근신 처분을 받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는 것과, 스스로 잘못했다는 걸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그건 그거고, 뭐가 되든 수지 씨의 미용실을 배상할 방법이 필요하다.

어떻게....어떻게 해야 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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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 및 오류 지적, 피드백 환영

오리지널 설정도 있을 수 있음.



오랜만에 한 편 짤막하게 갖고옴.

수지가 돈을 모은 거 이야기는 위키 찾아보니 참고할 만한 글이 있어서 그걸 좀 떠올리면서 썻음.


요 얼마간 면접 준비하고 면접 보러 다니고 있었다. 글 쓸 시간이 없네.

사는 데 근처에 회사가 잘 없다 보니 어어어 하다보면 기차 타고 면접보러 가고 있음.

보러 가는데는 서너 시간인데 면접 30분 이러면 이게 맞나 싶기도 하지만 일본 가기 전에 봤던 면접 중에 더 골때리는 일도 하나 있었어서 그러려니 하고 있다

먹고 살아야 글도 쓰지



오늘도 시간 내서 읽으러 와 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