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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일. 1년하고도 140일. 

나에겐 의미 있는 두 번의 시간. 

그대와 함께한 시간이 500일. 

그대를 떠난 보낸 것도, 500일. 



10월 중순.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우리 둘은 애인이 되었다. 

애인이 되어서 특별하게 무언가가 바뀐 건 아니었다. 한 명은 제약회사의 임원으로서, 다른 한 명은 용문 고위경찰이자 대재벌의 영애로서. 각자 자기 일에 충실했다. 

굳이 있다면, 떨어져 있을 땐 단말기로 자기 전에 매우 길게 전화하는 게 일상에 추가되었다는 정도일까. 

[박사. 카시미어에 갔다 왔다며? 이번 기사 스포츠, 상당히 화끈하던 거 같던데. 빛의 기사의 귀환 소식도 있었고. 다음번에 시간 맞으면 같이 거기로 여행 갈까?]

사귀게 된 직후. 카시미어로 출장을 가게 되었을 땐 거의 매일 저녁 연락했던 거 같다. 일상적인 대화만이었지만, 외지에서 그만큼 포근한 것도 없었다.

[이번에 준국장으로 진급하게 되었어. 국장 바로 다음 단계의 직급이라니. 내가 생각해도 꿈만 같아. 무엇보다, 당신과 이렇게 기쁨을 나눌 수 있어서 행복해.]

카시미어에서 돌아오고 좀 더 시간이 지나 12월 중순. 로도스에서 만나 실내 데이트를 했을 때. 그녀는 그동안의 공로를 인정받아 준국장으로 진급했다는 서프라이즈를 알려줬다. 두 사람이서 밤새도록 오순도순 대화를 나눈 탓에, 다음날에 대원들에게 일에 집중 좀 하라고 핀잔을 들은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번 데이트, 정말 즐거웠어! 그리고... 고마웠어. 빅토리아에서 그런 고난을 겪고 왔을텐데. 나 바쁘다고 용문까지 와주고.]

어느새 사귄지 100일이 되고 당시 춘절. 그녀가 준국장이 되고 나서 업무가 한 층 더 바빠진 데다가, 용문 고위층과의 미팅 등 각종 행사를 참여한 탓에 밖으로 나가는 게 어려워 보여서, 내가 용문으로 향했다. 

빅토리아에서의 결전이 끝나고 즉시 용문으로 달려간 탓에 피로가 상당했지만, 사랑스러운 그녀의 미소를 보자마자 그 피로가 사르르 녹는 것만 같았다. 이것 또한 사랑이라는 감정이 만들어내는 힘이겠지.

하지만.

[요즘 업무가 많아졌어. 직급이 올라간 만큼 내가 책임질 것도 늘어났다는 뜻이겠지. 아, 걱정 안 해도 돼! 당신과 만날 스케줄이 생긴다면 그게 1순위니까!] 

준국장이 된 이후로, 천천히 그녀가 먼저 연락해 오는 빈도가 줄어들었다. 원래는 나랑 그녀가 5:5의 비중이었다면, 춘절 이후로는 6:4 정도, 아니, 7:3 정도가 맞으려나. 그마저도 점차 줄어들어 갔으니, 비율을 세는 게 의미가 없겠지만.

[이 직위가 되니 현장도 자주 못 나가니까 살이 찔 거 같은 거 있지? 수영복 모습을 보고 싶다 말해도... 이번 여름은 입을 기회가 없을 거 같아. 내년엔 꼭 가자. 응?]

사르곤에 다녀온 이후론 일이 더 바빠졌는지, 매일 하던 통화도 점차 그 빈도가 줄어들었다. 이틀에 한 번. 사흘에 한 번. 점점 그 기간이 늘어나더니 어느 순간엔 일주일에 한 번인 경우도 허다했다.

[미안해...! 도중에 자버려서... 나도 칠칠치 못하게...!]

몇 달이 지나 10월 중순. 사귄지도 어느새 1년이 된 날이었다. 겨우 시간을 잡아 데이트를 하던 도중, 그녀가 카페에서 기절하듯이 잠들어버린 적이 있었다. 순간적으론 얼마 없는 데이트 시간에 잠들어버렸다는 게 속상했지만, 그녀가 가진 부담감을 생각하면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실례였다. 

오히려 내 앞에선 긴장이 풀리고 편하게 있다는 생각이 들어, 어깨에 기댄 채 새근새근 잠드는 그 모습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그저 이렇게 보기만 해도 행복한 건데, 당시 일어나 당황하며 내게 연신 사과하는 그녀가 안쓰러웠다.

[무리해서 안 와도 된다니... 박사. 말이 좀 너무한 거 아니야? 겨우 스케줄을 내서 박사를 보러 와준 건데, 그렇게 말하면 난 뭐가 돼?!]

그녀의 바쁜 상황을 이해했기에, 무리할 필요 없고, 시간이 날 때만 와도 된다고 말했다. 위로하는 목적으로 말한 거였지만, 아쉽게도 그게 그녀에겐 다르게 들렸다. 사귀고 나서 처음으로 말다툼한 게 그때였을까?

[미안해. 원래 직접 만나서 말해야 됐는데... 내가 그때 너무 예민했어. 당신에게 화낼 게 아니었는데. 당신은 그저 날 배려해서 말해준 거였는데... 정말 미안해...]

말다툼하고 며칠 후 들려온 전화. 그때 울먹이며 전화하는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미안할 필요가 없는데 왜 그녀가 사과해야한단 말인가. 보고싶어도 달려갈 수 없는 내가 오히려 미안해야 하는 게 맞을 텐데. 

[보고 싶어... 정말로 보고 싶어... 박사...]

이때였다. 이대로 가선 안 되겠다고 생각한 게. 무슨 일인지 말해주지도 않고, 그저 날 갈구하는 그녀의 사라져가는 목소리에, 분명 무슨 일이 있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힘내달라고. 아무 의미 없는 위로밖에 없었다.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녀가 무리하지 않고, 나도 언제든 그녀에게 갈 수 있는 방법을. 그리고 서로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 방안을.

그래서 결론 지은 것이, 로도스 아일랜드 용문 지부로의 전근이었다. 여전히 로도스의 일원으로서 감염자 구제에 힘을 쏟으면서도, 그녀와 이전보다 더욱 편하게 만날 수 있는, 그야말로 이상적인 해결안이었다.

'무슨 생각인지 뻔히 보이는데 해주겠냐.' 
'떠나게 되면 로도스 본부의 전술 지휘관이 사라져서 곤란하다.'

켈시와 아미야를 비롯한 상층부의 반대가 심했다. 예상은 했었다. 그들이 절대 날 놔주지 않을 거라는 걸. 

하지만 내 사랑하는 그 사람을 위해서, 포기하지 않고 몇 번이고 설득했다. 그리고 마침내 성공했다. 2달 가까이 쉬지 않고 이야기하니, 그들도 날 막을 수 없다는 걸 느낀 거였겠지. 

서류 절차만 밟으면, 모든 게 해결된다. 이 사실을 그녀에게 알려주면 그녀가 얼마나 기뻐할까? 소식을 알려주기 위해 단말기에 손을 뻗었을 때였다. 그때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나 자신에게 말했을 것이다.

ㅡ왜 좀 더 빨리 결정짓지 못 했냐고.
ㅡ왜 처음부터 그러지 않았냐고.

처음으로, 마음속에 균열이 벌어지는 것 같은 감정이 느껴졌다. 

단말기에 송부된 그녀의 짧은 음성 메시지. 나는 그걸 듣자마자 몇 번이고 전화했지만, 돌아오는 건 부재중 메시지뿐이었다. 이윽고, 내 시야와 정신은 음성 메시지만 무한히 반복되는 칠흑에 삼켜졌다.

[이쯤에서 끝내자. 우리의 관계.]
[잘 있어.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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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복 많이 받아라 명붕이들아. 뱃사람 배붕이 도쿄 접안해서 호다닥 글 가져와 올린다.


1097년 여름 푸른 불꽃의 마음

1097년 여름 10월 중순 스와이어편 1~13편

1097년 10월 24일~11월17일 니어 라이트

1098년 1월 메인 스토리 2부

1098년 1월 말 스와이어편 14편

1098년 7월 위대한 족장 가비알

1099년 3월 중순 스와이어편 14+2편 마지막 내용

1099년 9월 화산의 꿈

1100년 7월 스와이어편 14+1편 시작


작중 시간대는 위와 같이 상정하고 작성했음. 1편 후로 간략히 묘사된 과거편인데, 처음엔 디테일하게 쓸까도 고민했음. 근데 그러면 분량이 상당히 커질 게 뻔해서 최대한 압축하기로 함.


접안했는데 또 좀 있으면 출항이다. 담주에 또 글 가지고 올게. 


P.S. 피드백과 감상은 언제나 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