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중섭 방송에서 설정집 출시 예고를 했었고, 최근에 발송이 시작돼서 중국 유저들이 설정집 내용을 비리비리 같은 사이트에 공유하고 있는데 이건 그 내용을 번역한 거임.

설정집은 빅토리아의 역사학자 E.E. Erikson과 켈시가 공동집필한 설정으로, 테라 전역의 역사와 문화를 포함한 광법위한 설정을 담고 있음.

다른 지역은 올리면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내용도 있긴 한데 동국은 스토리 자체가 없었어서 스포일러 같은 건 없으니까 그냥 이런 설정이 있구나 하고 마음 편히 봐도 됨.

다만 스포일러랑은 별개로 내용이 무겁고 텍스트 압박이 존나 심한데, 설정집 자체가 400페이지 정도 되고 동국 내용이 그나마 짧은 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8페이지 정도는 되니까 만만한 분량은 아님.

그럼 재밌게 읽어





원고를 쓰면서, 나는 내가 이미 백 세에 가까운 노인임을 거듭 뼈저리게 깨달았다:

내 다리가 이젠 늙은 필라인을 데리고 사방을 돌아다니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에게 자기들을 돌봐달라고 하고 있으며, 더욱이 내 친구들 뿐 아니라 심지어는 나보다 훨씬 어린 친구들 마저도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떴기 때문이다.

내가 이 글을 쓰기 얼마 전에 다카가와 도모히코(高川知彦) 씨의 미망인 다카가와 하노리코(高川葉紀子) 여사께서 답장을 보내왔다.

그녀의 빅토리아어 문체는 부드럽고 간결하며 절제되어 고인이 된 남편분과는 정 반대였다.

다카가와 하노리코 여사께서는 내 뒤늦은 조의에 정중히 감사의 뜻을 표하며, 내가 다카가와 도모히코 씨와 지난 수십 년 간 주고받은 서신을 이 글에 인용하는 데 동의해 주셨다.


내겐 대지 반대편 극동의 나라를 방문할 기회가 없었다.

설령 내 신념이 젊었을 적과 같이 확고하다 하더라도, 동국으로의 긴 여행은 지병을 재발시키기에 충분할 것이며——별 다른 이변이 없다면 염국으로의 방문은 내 최후의 동방 방문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20여년 전 동국에서 온 절친한 친우를 사귈 수 있었던 행운아라는 사실을 지금까지 부정한 적은 없다.

1072년, 극동의 전운이 바람을 타고 서쪽으로 전해졌고, 빅토리아 또한 거의 동시에 한바탕의 피바람을 겪였다. 남북 정권을 모두 대표하는 연합 사절단이 이런 불안정한 시기에 런디니움을 방문했다.

당시 내가 빅토리아 국립 대학에서 다카가와 씨를 만났을 때, 그의 직함은 "문화교류 특사"였다——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역할의, 분노를 참고 있는 피디아 한 사람.

그에 비해 나는 거의 서른 살이나 젊고 두 눈이 빛나며 건장하고 긴 꼬리를 가졌었으며, 우리가 절친한 사이가 되기까지 반의 반 시간도 걸리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카가와 씨는 사절단과 런디니움 모두의 관료주의에 지쳐, 가슴 속에 열정을 가득 담은 채 왔음에도 모든 공식 회담에서 제외된 상태였다.

와중에 우리 둘 다 그 이유에 대해선 이해했지만, 그럼에도 다카가와 씨는 나 이외에 그 누구도 자신의 관점에 작은 관심조차도 기울이지 않았다는 사실에 분개했다.


다카가와 도모히코 씨는 자신이 거지가 되기 위해 이 곳에 온 게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군 출신 작가이자 동국의 남북을 두루 여행한 문화학자였으며 연합 사절단의 주요 호소인 중 한명이었다.

그의 호소는 지지를 받았지만, 미즈쿠에(御机)와 쿠사리가와(鎖川)의 정치인들은 이미 다른 계획이 있었으며, 그가 사절단에 참가하는 걸 허락하며, 약간의 술수를 써 들끓는 여론을 잠재웠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런디니움의 의회가 얼마 전 사자왕을 교수형에 처했고, 아마 빅토리아의 여덟 대공들도 동국의 여덟 가문들과 마찬가지로 제 멋대로 행동하며 도시를 우리 발 밑에서 갈기갈기 찢어버릴 것이라고 말할 수 밖엔 없었다.


사절단은 2주간의 방문을 마치고 런디니움을 떠났다.

우리가 예상한 대로 의회는 동국에 아무런 약속도 하지 않았고, 공작들은 두 거대한 지정학적 실체 사이에 위치한 이 작은 극동의 국가에는 별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여겼다.

공작들이 보기에 회담의 진전을 방해하려는 사절단 내부의 암투가 없었더라도, 우르수스의 갈증을 동방으로 끌어들이는 전쟁에 나쁠 게 뭐가 있었을까.

핏봉우리 전투(从血峰战役)와 그에 따른 우르수스의 "대반란"을 볼 때, 이런 판단이 편파적이라고 비난하기는 어렵다.

그 후 오래지 않아 다카가와는 정계에서 물러나 그에게 익숙한 문학과 역사 분야로 돌아갔다.

듣기로는 동국의 많은 사람들이 그가 한 줄기 새로운 바람이 되기를 기대하면서 그의 정치적 활동을 기대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그토록 굳건한 요새에 대체 어떤 바람이 불 수 있을까?

내겐 해답이 없다.


그 이후 30여년 간 나는 내가 교직을 그만 둔 뒤에도 다카가와 씨와 서신 왕래를 지속했다.

다카가와 씨는 나를 수 차례 동국으로 초대했으며, 내가 그의 집을 방문해 함께 극동 지역을 여행할 기회가 있기를 바랬다.

끝내 여행을 할 수 없었던 내 아쉬움을 만회하기 위해 그는 동국의 책, 영화 비디오 테이프, 심지어 만화와 게임 소프트웨어에 더해 그의 열정이 넘치는 소개 편지까지 보내왔다.

수잔나는 이런 물건들을 정리하는 것을 도와주며 우리가 허세 넘치는 두 인문학자라기 보다는 같은 취미를 찾은 두 고등학생 같다고 농담하기도 했다.

그녀가 옳다, 그녀는 항상 옳다. 이런 물건들은 연구 자료라고 하기에는 한참 모자라다; 하지만 한 명의 벗에 대한 기념으로, 그리고 또 다른 신비한 동방 국가로 통하는 초대장으로서의 역할은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금석문언약사록(今昔闻言略事录, 과거와 현재에 대한 간략한 역사)》


다카가와 도모히코 씨가 내게 보냈던 첫번째 책이 그가 직접 번역하고 다시 주석을 단 《금석문언약사록》이었던 것이 지금도 기억난다.

그가 소개한 바에 따르면,  이 책은 역사적으로 《황부기(皇敷記, 황제에 대한 자세한 기록)》와 함께 동국에서 가장 잘 보존된, 역사적 연구 가치가 높은 고서로 꼽힌다.

그러나 동국 황제 혈통의 기원을 기록하고 장기간 남북 양 측의 국서로 여겨져 왔던 《황부기》와는 달리, 《금석문언약사록》은 내용적인 측면에서 볼 때 동국 역사를 깊이 연구하고자 하는 사람을 위한 입문서에 가깝다.

상권은 "검참화진, 거제황신(剑斩祸津,祛除荒神; 검으로 화진을 베고, 황신을 없애 버리다)"라 하는 신들이 통치하던 시대에서부터 상고시대에 점차 취락이 형성되던 시기까지를, 하권은 이후 염국과의 교류를 통해 국가와 율령이 형성되던 중세까지를 다뤄 당시 높은 집안 자제들이 옛 것을 살펴보아 현재를 이해할 수 있는 한 가지 편리한 방법을 제공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금석문언약사록》은 동국 역사상 최초의 통속 역사서로서, 그 문화적 영향력은 중세 평민 계층에까지 폭넓게 퍼져나갔다.

그에 따라 무신 정권이 부상한 가미카와(神川) 막부 시대에 《금석문언약사록》의 문화적 영향력은 중앙 정권의 일시적인 쇠퇴에도 흔들리지 않았을 뿐 만 아니라 각계각층에서 추앙받는 고전이 되었다.

혹시 우연히 동국의 검극 영화에서 망명한 검객의 허리춤에 책 한 권이 묶여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면, 그 책은 십중팔구 《금석문언약사록》일 것이다.

서로 앞다투어 이 책을 읽으려는 열풍 때문에 막부는 좌탁사변(左拓事弁)(고서를 베끼고 목판 인쇄를 담당하는 관리)의 연봉을 인상하기도 했다.



상권·금석문언


《금석문언약사록》 자체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이 고서는 테라력 300년 전후에 텐몬(天文, 천문) 도노(東皇, 동황) 시대에 사찰에서 완성된 역사 서적이다.

《금석문언약사록》의 저자는 마치 의도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숨기려고 한 것처럼 보이며,  텐몬 도노가 직접 쓴 서문에서 그는 이 책의 탄생을 전적으로 자신의 공로로 돌린다——이렇게 이 책을 쓴 승려의 정체는 현재까지 동국 역사상 최대의 미스터리로 남게 되었다.

《금석문언약사록》 완전본은 두 권의 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상권 《금석문언》은 주로 동국의 신대(神代), 즉 선사시대부터 후세에 전해 내려오는 갖가지 사화와 전설을 담고 있다.


《금석문언》의 상고시대에 마가츠(華津, 화진)이라는 거대한 재앙이 극동 땅을 뒤덮었고, 하늘은 언제나 오색의 아름다우면서도 기괴한 빛깔을 띄었지만 밤낮의 구분이 없었다.

여덟 개의 머리를 가진 여덟 산봉우리 같은 아라가미(荒神, 황신)는 남쪽에서 와서 사람과 동물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고 강과 하천을 삼키며 땅에 비와 이슬이 내리지 못하게 했다.

마가츠와 아라가미가 가하는 재해를 피해 사람들은 갈대 이삭이 머리보다 높게 자라는 갈대밭에 숨어들어 이슬을 마시며 살아왔고, 일생동안 태양과 두 달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태양에 사는 아마하라 오미가미(天原大御神, 천원대어신) 해가 차면 보여지는 분(日盈化見尊, 일영화견존)은 검을 네 번 휘둘러 마가츠를 쪼개어 그 하늘의 오색 빛깔은 다섯 하시라사츠아마가미(柱佐津天神, 주좌진천신)이 되고, 그들이 오미카미의 다섯 자녀가 되었다.

다섯 하시라아마가미(柱天神, 주천신)는 함께 잔악한 아라가미에게 도전하러 갔지만 아라가미의 머리 하나를 베어낼 때마다 한 하시라아마가미가 삼켜져 버렸다.

사츠아마(佐津天, 좌진천)의 희생으로 아라가미의 피가 솟구쳤고, 그 더러운 피가 갈대밭에 불을 붙였다.

갈대밭에 불에 탄 사람들은 굳세고 용감해져서 다섯 사츠아마를 섬기는 다섯 부족을 결성했다.

사람들은 힘을 합쳐 아라가미의 나머지 세 머리를 베고 심장을 열었고, 그 안에서 잠든 여덟 꼬리의 아름다운 피디아 여인을 발견했는데, 그녀가 바로 아마하라 오미가미의 외손녀 아사야아케히메노미코토(朝夜夜明比売命, 조야야명비매명)다.

이 여신이 깨어났을 때 갈대밭의 백성들은 처음으로 해가 뜨고 달이 지며 낮과 밤이 달라지는 것을 보았다.


이후 아라가미를 죽인 무사들을 이끌고 다섯 부족을 차례로 정복시킨 여신은 미가미가미가쿄우(御神神禾京, 어신신화경)라는 장소에 후루아시와라고쿠(古葦原国, 고위원국; 옛 갈대밭의 나라라는 뜻)의 권력 중심으로 삼고 동시에 다섯 사츠아마를 모시는 신사를 세웠다.

그녀의 자손이 동국 전설 속 제 1대 도노인 진기(神儀, 신의) 도노가 되었다.

동국의 정치적 전통에 의하면 모든 세대의 도노는 진기 도노 황실의 후예이며, 모두 신성한 혈통을 타고났다.


다카가와 씨가 주석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수록된 상고 시대의 전설은 다양한 경로에서 수집되어 책으로 편찬되는 과정에서 다양한 문학적 가공이 가해졌을 것이므로, 그 결과 고대 동국의 문학의 기원을 추적하는 사료로서의 가치가 역사 연구 사료로서의 가치보다 월등히 높다.

한편으로 오미가미 신화 체계는 테라 문명사 연구의 "황금률"인, 고대 문명사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종종 발견되는 민중을 이끄는 한 명의 신과 다양한 종족으로 구성된 사회 구조를 보여준다.

아사야아케히메노미코토와 탄생 설화와 그녀의 부족을 정복하고 정권을 수립한 이야기는 정권이 건립되는 역사적 과정을 직설적으로 그려낸다.



「동국의 사찰과 승원


가미카와 막부가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동국의 사찰과 승원은 이미 한신, 묘우슈, 구쿄우의 피난처로 인기가 많았다.

외부인에게 동양의 정치적 각축이 이해하기 쉽지 않겠지만, 우리 모두 알고 있는 명백한 한가지 이치가 있다: 머리를 깎고 중이 되는 게 머리가 잘리는 것 보단 낫다는 것이다.

출가한 이 사회 엘리트층들은 자신의 평생동안 익힌 무예와 문학적 소양을 쉽게 버리지 않았고, 이는 그들을 비호하는 승원에도 영향을 미쳐 동국 승려들이 글과 무예를 익히는 독특한 문화를 정착시켰다고 볼 수 있다.

구쿄우와 다이묘의 손님이 됨으로서 "재입성"한 동국 승려들은 머리를 깎기 전보다 더 많은 것을 성취하게 되었다.

물론 세속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수행에 전념하기로 택한 사람들도 존재했다.」



하권·약사록


하권 《약사록》에서는 오미가미 신화 체계의 설화적인 색채가 희미해지고, 아사야아케히메노미코토가 남긴 인간계의 핏줄과 그 후계자로서 보다는 세속적 통치자로서의 특질을 더 많이 드러낸다.

아사야아케히메노미코토가 국정을 진기 도노에게 맡기고 신성한 몸이 아마하라 오미가미에게 돌아갔을 때, 후루아시와라고쿠는 "국적"의 위협에 직면해 있었다:

극동 먼바다에서 상어인들이 묵옥신주(墨玉神舟, 옥처럼 검은 신의 배)를 타고 기슭에 닿았는데, 그들의 사자는 말은 예의가 발랐지만 갑옷은 비늘처럼 겹겹이 쌓여 있었고 검으로는 산을 둘로 가를 수 있었다;

극서의 황폐한 산악에는 긴 뿔을 가진 험상궂은 오니들이 강가에 깃발을 세우고, 그들은 백 년 남짓한 시간동안 아시와라를 노렸지만, 아사야아케히메노미코토의 이름을 두려워하여 감히 침범하지 못했다.


《약사록》에서 진기 도노는 어머니의 용모와 위엄있는 무예를 물려받아 십 년의 시간 동안 적극적인 정복 활동을 펼쳐 상어인들과 오니들을 정복하고 그들에게 성씨와 토지를 하사하여 "국적"을 아시와라의 백성이 되게 했다.

사실 에기르 섬 주민들과 오니족들을 동국 문화에 융합시키는 일은 한 번의 전쟁보다는 훨씬 오래 걸렸다.

다카가와 씨는 주석에서 상어족이든 오니족이든, 그들은 아시와라의 백성이 된 순간부터 제각기 다른 성씨를 갖게 되어 역사적으로 판이한 운명을 경험했다고 말했다.

다만 전반적으로 전자는 동국의 정치 흐름의 조수 법칙을 물 흐르듯 파악하여 여덟 가문의 반열에 올랐고:

더욱 "호전적인 전투"를 일삼은 후자는 막부 시대에 잠시 무신 정권의 버팀목 역할을 했지만, 남북 전쟁에서 몇 차례 흥망성쇠를 겪은 후 극동 전쟁에서 젊은 피가 다했다.

오늘날 그들은 남북 양측의 군사 기관과 법 집행 기관에서 제한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진기 도노의 뒤를 이어 그의 장남 진로(神滝, 신롱) 도노는 아사야아케히메노미코토가 남긴 가르침을 따라 경작을 장려하고 가축을 길들이고 신사와 약원은 건설하는 데 큰 기여를 한 사람에게 포상을 내렸다.

진로 도노가 후대 역사에 끼친 가장 큰 영향은 그가 재앙 순찰대의 선발 훈련을 전통적인 애니미즘 신앙과 결합해 선포한 《어평화진수국령(御平禍津守国令, 재앙을 평정하는 지위에 있는 사람에 대한 국가의 명령)》, 약칭 《평화령(平禍令)》에서 비롯된다.

《평화령》에 따르면 이후 도노가 지정한 신사에서만 재앙을 조기에 경보하는 재난 순찰대를 양성할 수 있게 되었다.

도노의 가문이 여전히 민간에 의해 오미가미 신의 외손으로 받들어지던 시대에, 《평화령》은 지방 호족 세력의 확장을 저지하고 도노의 권위와 통치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무자비하다고 할 만 하다.

고대 대형 신사의 신주와 무녀는 일반적으로 교육 수준이 높은 주술사가 맡았기 때문에 한 때 《평화령》은 재앙에 대한 지시과 경험이 전수될 수 있도록 보장했다.

그러나 중앙 권력에 빌붙은 신사는 점차 걷잡을 수 없는 부정부패를 낳았고, 지방 호족들의 극심한 불만을 피할 수 없었다.

이들 중 상당수가 오니족이 동쪽으로 이주하며 가져 온 사찰과 승원으로 눈을 돌려, 인구가 밀집한 정치 및 경제의 중심에는 신사가 시장성을 가지고, 광활한 농촌 지역에서는 승원이 더 큰 경쟁력을 가지며, 결국 양측이 서로에게 스며드는 신앙문화 구도를 형성했다.



「사지가와(匙川, 시천)의 재앙


《약사록》에는 겐몬(玄文, 현문) 도노 시기에 수도 아래 사지가와 지방에서 있었던 재앙이 기록되어 있다.

지역 호족과 신사 사이에 100년 된 삼림지대를 놓고 논쟁이 벌어지자, 신주은 재난 순찰대를 시켜 호족 지주에게 재앙 피난 기한을 거짓으로 보고했고, 결국 수천 명이 병에 걸렸다.

재난 순찰대는 이후 주범으로 신사에서 쫓겨나 귀양을 갔지만 신주는 관용을 베풀어 무사했다.

승려가 쓴 《금석문언약사록》은 여러 신사 신주의 악행을 기록하고 있으며, 오늘날 화목하게 지내는 신사와 승원이 서로 공격을 주고받았던 긴장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명확한 역사적 기록이 남아 있는 진가쿠(山岳, 산악) 도노 시대에 이르러 후루아시와라고쿠와 남쪽의 용은(龙隐, 용이 숨음)의 고향 일염국(一炎国) 간의 문화적 교류는 나날이 밀접해졌고, 양 측은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 서로 정보를 교환하였다.

재위 후기에 진가쿠 도노는 염국의 율령과 민본사상의 전수에 영향을 받아 직접 율령 개혁 운동을 주도했다.

후루아시와라도 이 때부터 "东皇化土,律令万民(동황화토, 율령만민)"[도노는 최고 통치자로서 숭고한 미덕을 통해 국토(위의 민중)를 교화하고, 율령으로 아시와라의 만민을 다스린다]를 강조하기 위해 정식으로 국명을 "동국"으로 고쳤다.

염의 율령을 바탕으로 한 《출아율정령(出峨律政令, 높은 곳에서 나온 율령)》이 반포되고, 중앙 관료 체제가 수립되고, 도노와 중앙 구쿄우의 시대가 열리면서 가계제도와 도량형 통일의 국가 체제 개혁이 추진되었다.

《약사록》은 개혁의 경과를 상세히 기록해 찬사를 아끼지 않았지만, 나라의 통치자가 지방을 배려하고 관용적으로 통치해야 한다는 경고의 잠언 또한 남겼다.


공교롭게도 《금석문언약사록》이 쓰여진 텐몬 도노 시대는 율령 체계가 쇠락하기 전 빛나던 마지막 순간이었다.

동국의 율령 체계는 《평화령》을 계승하여 지방과의 관계가 계속하여 악화되는 대가 위에 세워졌고, 이로 인해 율령정부는 지방을 압박하려는 최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재정난에 빠지는 일이 잦았다.

특히 재해가 자주 발생한 해에는 지역의 부유한 가문들은 도노의 약속과 율령이 똑같이 무가치하다는 사실을 쉬이 깨닫게 되었고, 이어서 광석병 유민들에 대한 유토수수(流土收授)(호족들이 재앙에 영향을 받았다는 이유로 자작농의 토지를 합병함)는 토지 조세 제도의 붕괴를 한 발 가속시켰다.

염국에서는 지배집단과 중앙 관료들이 "전국의 힘을 모아 이재민을 구휼하고 백성을 평안하게 하는 일"을 도리로써 당연히 여겼다; 그러나 율령 시대의 동국은 유사한 제도를 도입한 도노 율령 정부가 인력과 재정을 배분하는 데 어려움을 겪으며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사회적인 문제에 대처하지 못하는 정치적 위기에 빠졌다.

율령 시대 마지막 역사서이자 중요한 아시와라 문학의 기원으로서, 《금석문언약사록》는 시대의 전환을 상징하는 지표이자 도노의 권력이 기울어지는 과정을 지켜본 증인이다.

이후 구쿄우와 무신 가문이 다음 시대의 주도자가 되었다.




《귀봉행》

내 책장에는 《귀봉행》의 영화 비디오 테이프가 아주 오랫동안, 아마 거의 20여년 간 꽃혀 있었다.

다카가와 씨가 그것을 보내 준 이후로, 나는 그것을 기꺼어 보관하여 설령 방습 케이스에 먼지가 쌓이더라도 내 손이 닿는 곳에 항상 남겨두였다.

이런 구식 비디오를 재생하는 장비는 이제 중고품 시장에서만 구할 수 있고, 이 영화를 만든 기술은 이미 구식이지만, 흑백의 검극 영화에만은 시대를 뛰어넘는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츠바키 지츠로(椿実郎)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한 오니 검객의 무술 수행에 관한 이야기와 함께 가미카와 막부 시대와 국전의 참상, 초기 남북조 시대를 관통하는 모습을 그려냈다.

영화는 피비린내 나는 살인이 난무하고, 동국적인 칼싸움이 심금을 울리지만, 흔히 볼 수 있는 대중 오락 영화와 달리 어떤 등장인물의 죽음도 기쁨과 위안을 주진 않는다.

다카가와 씨는 주석에서 《귀봉행》은 초기 검극영화의 전형인 "검호낭만담(剑豪浪漫谭)"을 뛰어넘어 동국영화사에 이름을 남겼고, 난세가 일반인에게 끼치는 잔혹함을 남김없이 보여준다며 주인공인 오니야카타 타케(鬼八方岳)와 그의 라이벌인 난마모토 다이묘(亂麻元 大名)처럼 범상치 않은 인물들 마저도 바람에 날리는 가랑잎 두 장에 불과해 시대의 흐름에 어디로 날려갈지 모른다는 내용이라 말한다.


테라력 400년을 전후해 도노의 율정 시대 말기, 동국의 지방 정세는 주기적인 재앙과 토지조세제도의 붕괴가 겹치면서 요동쳤다.

지방 호족들이 저마다 군사력을 결집해 봉건 군벌로 변신하는 과정에서 퇴역한 사무라이 출신의 지방 묘우슈 계층이 갈수록 중요한 역할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의 무력과 지략을 기반으로 안정된 생활을 하며 다이묘 주군과 막강한 가문에 충성을 다하여 통치집단에 오르기를 원했고, 그 뜻을 이룬 무사들은 무인 가문을 탄생시켰다.

이들은 이 역사적 시기에 급부상해 도노 주변의 실세 구쿄우들을 직접 무력으로 대체함으로써 국가 전체의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미가미가미가쿄(御神神禾京) 교외의 가미카와에는 도노로부터 "진다케온타이 사무라이(鎭岳御大侍, 진악어대시)"라는 칭호를 하사받은 무가의 가문 지도자 오니죠가마 시게이치(鬼菖蒲重一)가 막부 시내소(侍内所)를 세워 죽어도 무너지지 않는 구쿄우 관료 시스템과 병행하는 중앙 정치 기구로 삼았다.

동국 역사상 검신으로 불릴 만큼 유명했던 오니죠가마 시게이치는 《귀봉행》의 주인공인 오니야카타 타케와 악역인 난마모토 다이묘의 모티브로 젊었을 때는 검술이 뛰어나고 기세가 넘치는 오니 무인이었고, 늙었을 때는 관직에 깊이 몸을 담은 악랄한 무가의 오니였다.

오니죠가마가 국정을 독차지하던 60년 동안 그에게 충성을 다한 시내소의 하급무사는 동국 내정의 생명줄을 틀어쥐었고 심지어 "율령부흥"이라는 대의명분까지 내걸며 각지에 하급무사를 재난 순찰대로 임명함으로써 막부의 '도노의 율령 대행'으로서 지방과의 관계를 재건하려 했다.


그러나 온타이사무라이 오니죠가마가 주창했던 막부의 신정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수포로 돌아갔다.

권세가 하늘을 찌르는 막강한 군사력을 지닌 시내소의 하급무사는 도노의 혈통 계승에는 외부인이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금기를 어기고, 무가 막부에 가까운 북원의 고곤 혈통(北院光嚴統)을 지원함으로써 신의 외손을 인위적으로 두 개의 혈통으로 나눈다:

북쪽의 고곤 혈통과 이에 첨예하게 대립한 구쿄우에 더욱 가까운 남원의 미츠모토 혈통(南院光元統)이다.

발흥할 때 "忠恕守義(진실하고 어질며 절개있고 의로움)"를 자처했던 무가는 수백 년 동안 동국 역사에 영향을 끼친 국전과 남북 분단의 국면을 만들어냈고, 오니죠가마 시게이치의 철권 아래 짧은 무가의 치세는 난세에 앞선 회광반조에 불과했다.

《귀봉행》의 서두를 인용하면:


武侍世家兴,国祸川原乱。(무신 세가가 번성하고, 나라의 재앙이 강변을 어지럽히네.)

刀兵纷至起,祀卜已无常。(칼과 군사가 분분히 일어나니, 제사와 점이 수시로 바뀌는구나.)

(다카가와 도모히코 옮김)


후세에 국전(國戰)으로 불리게 되는 100년간의 전쟁과 반란이 동국 전역을 휩쓸었고, 도노의 남북 분립 국면은 멀리 남쪽의 염나라 조정까지 놀라게 했다.

631년 염나라의 공식 사절이 진룡에게 바친 보고 서한에 극동 전란 초기의 한 토막이 자세히 묘사돼 있다.

그는 오니죠가마 시게이치의 장남 오니죠가마 세이사쿠(鬼菖蒲征作)가 막부통수권자 자리를 놓고 정쟁에서 패한 것을 거론하며 막부 하급 사무라이의 불충을 질타하고 집안을 이끌고 남으로 달려가 남쪽의 미츠모토의 도노의 혈통을 지켰다고 언급했다.

전장에서 병사부터 장비까지 압도적으로 우세한 북원의 막부군을 상대로 거듭해 큰 손실을 입히며 남원의 미츠모토 도노의 군사 동원을 위한 시간을 벌었다.


내전과 혼란 속에서 오니죠가마 세이사쿠처럼 무사 다이묘가 모시는 주군을 바꾸는 건 국전 때 드문 일이 아니었으며 충성과 명예가 전례 없이 강조되면서도 이런 전통적 가치관이 급속히 평가절하되던 시대였다.

북쪽이든 남쪽이든, 다이묘든 로닌(浪人, 낭인, 떠돌이 무사)이든 난세 속에서 자신에게 맞는 '도의'를 몸에 맞는 옷을 제단하듯 찾을 수 있었다.

그 시대의 동국 지식인들과 무사들은 종종 국전을 염국 백씨(百氏)의 난에 비유하여 은유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토로하거나 포부를 밝히는 시를 많이 남겼다.

많은 사람들은 반드시 경천위지(經天緯地, 온 천하의 일을 조직적으로 잘 계획하여 다스림)의 통치자가 세상에 내려와 여덟 꼬리의 아사야아케히메노미코토처럼 난세를 휩쓸고 극동을 통일하여 번영했던 시절로 되돌릴 것이라고 믿었다.


653년, 오니죠가마 세이사쿠는 55세의 나이로 오랜 전쟁 중 감염된 광석병으로 인해 사망했다.

이런 불명예스로운 죽음으로 인해 그의 가족과 부하들은 더 이상 난인 황실의 예우를 받지 못했고, 막부 시대 번영했던 오니죠가마 가는 역사의 뒤안길로 빠르게 사라졌다.

《귀봉행》에서 난마모토 다이묘를 물리친 오니야카타 타케도 난마모토의 죽음이 난세를 종식시키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유파를 버리고 삿갓을 쓴 후 그의 검술과 함께 종적을 감춘다.


이후 3세기 동안 기대했던 통치자는 끝내 내려오지 않았고, 남북 양쪽 도노 가문을 포함한 8대가 극동을 분단 통치하는 것이 기정사실화되었다.

정확히 말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동국 남북조 시대는 807년 양측의 도노가 미가미가미가쿄가 있던 곳에서 《양국령》을 공동으로 공포하면서 시작됐다.

그 무렵 북방의 쿠사리가와 정권과 남방의 미즈쿠에 정권 간의 대규모 전투는 줄어들었고, 이후 양측은 각각 민중을 회복시키고 생산을 재개하는 시기로 접어들었다.

남북 양측 도노의 혈통을 비롯해 동국에 널리 알려진 8대 가문이 100년의 국전으로 파괴된 재 속에서 부상했다.

이들은 염나라와 우사스가 차례로 동국에 전래한 두 차례의 기술의 물결 속에서 기회를 포착하고 동국을 오리지늄 공업의 시대로 이끌었다.

옛 구쿄우 무가를 바탕으로 북쪽의 고곤 덴노 혈통을 비롯한 4대 가문(고곤(光嚴), 쿠로이(黑衣), 호아시(帆足), 니시코리(錦織))과 남쪽의 미츠모토 덴노 혈통을 비롯한 4개 가문(미츠모토(光元), 구시마츠(九枝松), 카노(叶), 가네시로(金城))가 각각 방대한 방대한 정경복합체를 만들어 구 권력 기구와 정치세력을 흡수했다.

이들 복합체의 중심은 여전히 핏줄로 연결된 다이묘의 종친으로 구성돼 있지만, 동국 사회 깊숙이 파고든 뿌리 끝은 종종 얽히고설킨 정치단체, 은행, 공장, 유통업체 집단으로 분열된다.

따라서 이동도시가 다이묘의 성벽을 대체하고, 사람들의 생활양식이 중세에 비해 크게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국전 이전의 많은 정치적 전통이 여덟 대가문의 영향으로 유지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다음 챕터를 읽으며 들으면 좋을 만한 노래

https://youtu.be/Q9niH21_mac?si=MLSWRgiF5ird6Q8w


《아수(牙兽, 어금니 괴물)》


다카가와 씨가 내게 보낸 모든 책, 영화 작품 중 《아수》가 가장 "막내"였고, 그가 개인적으로 내게 편지를 썼던 것도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다카가와 부인이 대신 쓴 편지를 통해 그의 몸 상태가 급격히 악화되어 마지막 순간에는 병상에 누워 있어야만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자나깨나 그는 나의 뒤늦은 답장을 기다렸는데, 그의 끝내 이루지 못한 숙원으로 남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애니메이션 《아수》는 역사적 배경에 대한 가정에 기초하고 있다:

동국의 핏봉우리 전투에서 악전고투 끝의 승리가 아닌 참패를 겪고, 산기슭의 방위선은 무너졌다;

고곤 정권의 중심지 쿠사리가와의 주둔군은 세찬 공세를 막아내지 못하고 북부 전역이 점령당하게 된다;

염국의 긴급한 조정으로 집단군은 세인트존스버그(圣骏堡)의 지시도 없이 일방적으로 고곤 정권과 휴전 조약을 맺는다.

이후 우르수스 군인들은 동국의 남북 간 전통적 경계로 후퇴해 난민들의 남쪽행을 허용한다.

인구를 대거 수용하게 된 미즈쿠에성(御机成)은 위기감이 팽배한 혼돈의 도시로 변했고, "평화협정 반대"와 "남쪽 국경 확보"라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며 대규모 항의와 남북 주민 충돌로 인한 극단적인 강력범죄가 난무한다.

우르수스에서 "대반란"이 일어났다는 극비 소식이 북쪽에서 전해지자, 남자 주인공 오토이 마모루(乙井護, 을정호)와 그가 속한 기동대는 미즈쿠에 관료기구와 국내외 정치파벌 간의 암투에 휘말린다.


이 애니메이션은 다카가와 씨와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국립대학교 강의상영실을 몰래 "점거"하여 그가 혼자 녹화한 도시의 영상을 시청했다.

전쟁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미즈쿠에성은 크리스탈 소자와 재즈 음악의 분위기가 물씬 풍겼고, 가정용 TV와 음악 플레이어의 거대한 전광판 광고가 정체된 차량의 흐름을 압도했다.

많은 보행자와 차량이 가문 문장을 단 장갑 돌격정과 갑옷을 입은 무사들이 대열을 지어 거리를 질주하는 것 때문에 교차로에서 신호등이 녹색으로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것은 그 비디오에서 전쟁에 관한 유일한 단서였다.


핏봉우리 전투 이후 20년동안 동국의 남북 정권은 우르수스와의 전쟁 포로 교환을 둘러싸고 끝없는 논쟁을 벌였고, 이를 이유로 국지적 무력충돌도 여러 차례 일어났다.

전쟁 청년들이 군대에서 정계로 입문한 1090년대 초에 이르러서야 핏봉우리 전투에서 함께 싸웠던 사람들의 손에 의해 남북 정치 지형은 겨우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고, 염국의 끈질긴 외교적 중재가 관계 정상화의 중요한 원동력이었다.


긍정적으로 보면 1072년 이후의 20년을 "호황과 회복의 20년"이라고 부를 만하다.

전쟁의 영향을 덜 받은 남쪽에서는 염국과 라이타니아 등에서 유학한 많은 고급 인력들이 전쟁의 불길 속에서 살아남았고, 미츠모토 정권의 원부제를 관청제로 전환하는 1080년 정부개정안을 마련했으며, 오리지늄 결정 전자 기술 분야에서 남쪽의 경제적 지주가 탄생했다.

동국에서 생산되던 가전제품과 가정용 게임기가 시라쿠사와 림 빌리턴에 밀반입되어 시장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해 평소 이를 눈감아 주던 현지 가문이나 법 집행기관이 대대적인 단속에 나서야 했다.

비바람을 직접 맞았던 북방에서는 전쟁의 충격으로 군수산업이 기형적으로 팽창했고, 그 과잉분을 북원 4개 가문이 나눠 소화하면서 신흥공업그룹의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다시 나타났다.

가족 기술관료들이 장악하고 있던 이들 공업그룹은 이로써 북측 경제의 기둥이 될 수 있었고, 염국의 인프라 모델을 본떠 전후 복구사업을 시작했다.

이동도시 확장과 함께 도시 항로 건설 계약이 잇따라 체결되면서 하루빨리 전쟁의 그늘에서 벗어나려는 이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다.


1090년대 초에 이르러 경제적 번영의 일환으로 영화 및 TV 시리즈, 음악 앨범, 애니메이션 및 비디오 게임은 동국에 사는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문화 및 오락 상품이 되었다.

국전으로 얼룩진 이후 침체된 사회 분위기가 불과 20년 만에 일소되는 듯했고, 한때 재즈음악을 보이콧했던 북원마저 신흥 대중문화에 대한 강력한 단속을 자제하는 쪽으로 태도를 바꿨다.


내 동국의 친구는 한때 우르수스 제국이 두 나라의 군사력과 산업력의 격차를 잔혹하게 과시했기 때문에 미즈쿠에와 쿠사리가와의 정치인들과 다이묘가 다시 현실로 눈을 돌렸다고 편지에 격한 마음을 쏟아냈다.

남측과 북측 사이의 국경은 이 땅의 유이란 국경이 아니었고, 동국의 과거와 미래 사이에는 서글픈 벽이 놓여 있다.

"우르수스의 일격이 동국의 가슴을 휩쓸고 나서야 동국의 두 동강 난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때 냉소적이었던 다카가와 도모히코 씨는 오늘날의 사람들이 그 벽을 뚫고 미래로 향할 문이 그가 사랑하는 땅에 열렸다고 믿는다.



「오늘날의 동국 남북의 수도


남원의 도노 미츠모토 정권의 수도는 "남원행존 미즈쿠에 대사(南院行在御机大社)", 일명 "미즈쿠에"이고;

북원의 도노 고곤 정권의 수도는 "북원진수 쿠사리가와 성(北院镇守锁川城)", 일명 "쿠사리가와"이다.

이 둘은 동국에서 가장 중요한 두 이동도시이다.」



나는 예전처럼 그와 논쟁하며 이 진술의 일부 주장에 반대한다고 말하려고 펜을 든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몇 번이고 내 자신을 단념했다.

나는 감정변화가 그의 건강 회복에 해로울까 봐 걱정됐고, 테라의 많은 나라를 여행한 후 나는 무지와 오만은 항상 우리 본성에 자리를 잡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차라리 그것을 스스로 억제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나는 다카가와 씨도 내 침묵에 깊이 공감하여 침상에 눕기 전에 옛 친구에게 마지막 선물로 《아수》를 주기로 했다고 생각한다.


《아수》는 애니메이션의 형식으로 기동대——가상의 치안 정예부대——에 복무하는 기간 동안 남자 주인공 오토이 마모루가 겪는 이야기를 풀어낸다.

애니메이션의 1화에서 피난민들이 미즈쿠에 성으로 밀입국하려는 것을 도우려는 전직 북군 병사들이 기동대에 포위되어 한을 품고 전사하지만, 도움을 받은 피난민들은 본인들의 가족이 도시 밖으로 내쫒기는 걸 피하기 위해 이 무장세력과의 관계를 부정한다;

5화에서는 대가족 산하의 금융기관이 기업의 경영자금을 통제하는 과정, 절망에 빠진 사업주가 건설 차량을 탈취해 수백 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휘말리는 무자비한 파괴를 자행하는 과정을 그린다;

9화부터 10화까지는 핏봉우리 전투에서 돌아온 전쟁영웅이 광석병에 걸린 늙은 부하들을 불러 미즈쿠에 황궁 대사를 자폭 공격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부검을 통해서야 사람들은 본인이 광석병에 감염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기괴하면서도 현실감 넘치는 이야기들은 핏봉우리 전투 이후 20년간의 남북 정세와 사회적 변화를 날카롭게 지적하며, 주인공이 한 번도 말하지 않은 질문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두 발로 걷는 인간인가, 아니면 네 발 달린 이빨을 가진 짐승인가?


《아수》가 진지한 주제를 다루며 "호황과 회복의 20년"에 대한 또 다른 종류의 성찰을 내포하고 있으며, 내 동국 친구와는 정 반대의 입장을 나타낸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나는 전자의 입장에 더욱 동의하는 경향이 있다:

전후 20년 동안 동국이 누렸던 평화와 비약적인 발전은 지극히 취약한 역사적 전제 위에 세워졌다.

변함없이 동국은 계속 동방의 지정대국들 틈바구니에 놓여 있고, 도노 남북 분단의 국면은 급변하는 미묘한 균형 속에서 급변하고 있다.

이와 함께 여덟 가문 산하 기업 중 감염자가 은신해 있는 성 주변의 시가지에도, 오리지늄 정제소로 오염된 수원에도, 도시민의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터에도 이름 없는 아수들이 번영의 장막과 금테를 두르고 있다.

그들이 날카로운 발톱으로 피묻은 흙 속에서 고랑을 파낼 때, 사람들이 사는 나라는 휘황찬란한 거품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거품들이 사람들을 위로 떠받치고 재즈 음악으로 즐거운 경지로 올려놓을 때, 그것들이 터지는 순간도 멀지 않았다.




우선 다 읽느라 수고했고, 번역하면서 느낀 점을 좀 적어봄.


첫째로 번역하면서 내가 씹덕겜 설정집을 번역하고 있는 건지 역사서를 번역하고 있는 건지 헷갈렸다시발

일단 일본어 발음으로 번역될 수 있는 것들은 발음을 살려서 표기하고 한자 원문과 한글 음독을 같이 첨부했고, 발음으로 버역하기 힘들거나 책 제목, 법령 이름 같은 것들은 그냥 한국식 한자 음독으로 읽고 한자 표기와 의미를 풀어서 설명함. 최대한 통일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는데, 하시라사츠아마가미(柱佐津天神)와 하시라아마가미(柱天神), 후루아시와라고쿠(古葦原国)와 아시와라(葦原)는 같은 대상을 가리키는 걸로 보이는데 아마 줄여서 표기한 거 같음.


다음으로 일본 신화랑 역사에서 많은 부분을 가져온 걸로 보임.


우선 최고 통치자의 호칭인 도노(東皇)는 실제 일본의 덴노(天皇)에서 따 온 거고, 《금석문언약사록》 자체가 고서기와 일본서기를 포함한 육국사를 합친 정도의 물건으로 보임. 책이 편찬된 이후 도노가 힘을 잃기 시작했다는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일본삼대실록이 편찬 된 후 본격적으로 헤이안 시대에 지방 귀족 세력들이 대두되던 것과도 일치하고.


초기 동국 건국 신화 부분은 내가 일본 건국 신화를 잘 모르긴 하는데 우선 아마하라 오미가미(天原大御神)는 당연히 일본의 태양신 아마테라스 오미가미(天照大御神)에서 따 온 거고, 오미가미의 자녀 다섯 하시라사츠아마가미(柱佐津天神)는 아마테라스와 스사노오의 맹세 때 태어난 다섯 남신이고, 이후 머리 세 개를 더 베어 태어난 여덟 꼬리의 피디아는 나머지 세 여신을 합쳐서 만들어 낸 새로운 등장인물 아닐까?

그러면 아사야아케히메노미코토(朝夜夜明比売命)는 천손강림을 한 니니기(ニニギ)고, 이후 가계를 확 줄여서 진기(神儀) 도노는 초대 덴노로 꼽히는 진무(神武) 덴노에 대응될 거로 보임.

한신, 묘우슈, 구쿄우는 원문은 藩臣, 名主, 公卿인데, 우선 藩臣는 일본의 옛 행정구역인 번을 다스리던 지역 영주를 뜻하는 걸로 보임. 번은 규모적으로 볼 때 시/군 정도랑 비슷함.

名主는 고대~중세 일본에 다이묘가 대두되기 전 각 지역에서 중앙정부의 허락을 받아 농지를 관리하고 대신 공물을 바치던 지역 유지를 말함. 다이묘의 권력이 막강해진 이후엔 권력이 약해졌음.

公卿는 위에서도 계속 언급된 율령제에 기초하여 운영된 국가의 국정기관에서 일하던 관료들을 말함.

참고로 율령제는 일본 몬무(文武) 덴노 시기에 당나라의 법률 체계를 수용해 만들어진 것으로, 중앙집권화를 추진했다는 점이나 중앙의 권력이 지방에 미치지 못하고 피지배층들이 토지를 빼앗기거나 버리고 도망가거나 해서 유명무실화 되었다는 점도 실제 역사와 비슷함.


현실 역사와 비슷한 점은 일단 놔두고, 동국의 역사의 특징적인 부분을 꼽자면 당연히 진기 도노 시대에 도래했다는 두 종족 오니족과 상어족인데, 오니는 우리가 아는 그 오니고 상어족은 에기르 섬이나 발전된  기술(검은 옥빛의 배, 비늘 갑옷 등)이 언급되는 걸 보면 에기르족이겠지? 시테러로 에기르가 살던 곳이 지랄나기 시작한 게 생각보다 꽤 오래 전인 걸로 보임. 에기르 족은 동국 정치체계에 빠르게 유화되어 8대 가문으로 성장했다고 하니 어쩌면 키라라가 왔다는 미츠모토 가문이 에기르가 주류 세력인 가문일 수도 있을 듯.

한편 오니족은 설명을 보면 가문을 이루기보단 이곳저곳에서 전투인원으로 고용된 용병 느낌이 강함.

그리고 테라 역사의 황금률이라는 부분이 "민중을 이끄는 신 한 명과 다양한 종족이 어우러지는 다종족 사회"인데, 구인류 떡밥이랑 관련이 있을 수 도 있지 않을까 싶음.


 《귀봉행》과 《아수》 부분은 해묘의 자기가 좋아하는 동국 문화 자랑 시간임.

명일방주에도 여러 문학 작품과 매체들의 모티브를 심어놓은 것처럼, 여기서도 몇가지 대중문화를 통해 과거와 현재 동국의 상황을 묘사함.


우선 영화 《귀봉행》은 영화에 조예가 있는 사람은 설명을 보고 느꼈겠지만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츠바키 산주로》가 모티브임.

일단 《귀봉행》의 감독 이름 츠바키 지츠로(椿実郎) 부터가 《츠바키 산주로(椿三十郎)》의 오마주고, 사무라이가 악인을 처단하고 홀로 걸어나가는 장면이 《츠바키 산주로》의 마지막 장면과 닮아 있음.

이와 비교되는 전형적인 사무라이 영화인 《검호낭만담(剑豪浪漫谭)》은 사실 잘 모르겠는데, 아마 같은 감독의 《7인의 사무라이》가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 봄. 서부 영화에도 영향을 준 작품이고 츠바키 산주로 보다 일찍 나온 영화니까.


현실 역사와 비교해 본다면 현실의 일본이 율령국가 이후 여러 번의 막부 정권을 거치고 분열된 시기도 있었지만 결국 하나의 나라를 유지한 반면, 동국은 짧은 막부 시기를 거친 후 남북조 시대에 진입하여 그런 분열 상태가 현대까지 교착된 걸로 보임.

가미카와(神川) 막부는 아마 가마쿠라(鎌倉) 막부가 모티브일 거고, 오니죠가마 시게이치(鬼菖蒲重一)는 가마쿠라 막부를 처음 세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 겠지. 다만 동국의 가미카와 막부는 미처 아들 대 까지 제대로 이어지지도 못하고 새로운 도노를 옹립하는 바람에 순식간에 남북조로 분열됐음.

어찌 보면 정치적으로 힘을 잃고 병든 몸으로 유폐당한 뒤 암살당한 요리토모의 아들 요리이에의 최후와 동국의 정치파벌 싸움에서 쫓겨나 남조를 돕다 광석병에 감염되어 남조에게서도 버림받고 쓸쓸히 죽은 시게이치의 아들 세이사쿠의 인생도 비슷한 보이긴 함.


북조에서 옹립한 북조의 고곤 혈통(北院光嚴統)은 실제 역사에서 북조 초대 덴노인 고곤 덴노(光嚴天皇) 그대로임.

남북조가 나뉜 시기가 600년대 초반이고 현대가 1100년 쯤이니까 거의 500여년 간 분단된 상태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정도면 사실상 다른 국가가로 할 수 있지 않을지...


그 다음 작품인 《아수》는 처음엔 바로 알기 힘들지만, 일본 전후를 배경으로 하는 대체역사 세계관과 기동대에 복무하는 남자 주인공이라는 내용을 보면 예전 애니를 좀 본 사람들이나 최근 영화관에서 한국 실사화 영화를 보며 쌍욕을 좀 해 본 사람들이라면 《인랑》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을 거임.

《인랑》은 2차대전에서 독일은 승리했지만 일본이 패전한 이후 흉흉한 사회 분위기를 통제하기 위해 1960년대에 조직된 가공의 치안부대인 "특기대"에 복무하는 주인공을 그리는 반면,

《아수》는 동국이 우르수스와의 핏봉우리 전쟁에서 패배하고 북조 지역이 점령당하면서 혼란스러워진 남조의 치안을 관리하기 위한 "기동대"에서 복무하는 주인공을 그림.

또 《인랑》은 애니메이션 영화지만 《아수》는 TV 애니메이션이라는 차이가 있음.


《아수》는 우르수스와의 전쟁에서 패전한 가상의 동국을 배경으로 현실의 동국의 어두운 면을 그려내는 사회 비판적인 애니메이션으로, 현재 동국은 1960~1980년대 일본처럼 오리지늄 공업과 군수 산업을 기반으로 고도 성장을 이륙해 버블 경제 상태에 돌입해 있는 것으로 추정됨. 사실 버블 경제라는 걸 확인하려면 부동산과 주식 시장이 얼마나 과평가되어 있는 지가 나와야 하는데, 그런 건 없이 영화, 음악, 애니메이션과 게임과 같은 일본 버블 경제 시절의 문화적 분위기만 나와 있어서 불확실하긴 함.

다만 동국의 '버블'은 경제구조가 아닌 '불안한 정세 위에서 세워진, 현실과 유리된 문화적 향략'를 뜻한다고 하면 버블 상태가 맞다고 할 수 있겠지.



여기서 나온 동국의 역사를 연대 순으로 정리하면

400년경: 도노의 율정 시대 말기, 지방 호족 세력의 부흥

500년대 중반: 시게이치의 가미카와 막부가 실질적인 정부 역할 수행

631년: 국전 초기, 세이사쿠가 남조 측을 도움

653년: 시게이치의 장남 세이사쿠 55세의 나이로 사망

807년: 《양국령》 반포

(1072년: 우르수스와의 핏봉우리 전투)

1070년대~1090년대: 우르수스와의 전쟁 이후 부흥기, 버블 경제


정리하면 동국은 고대 일본과 유사한 신화적 배경과 도노를 중심으로 하는 율령 사회였다가, 짧은 막부 정권 시기를 거쳐 현재까지 남북조 분단 정권이 유지되고 있으며, 지금은 1980년대 한창 때의 일본과 유사한 문화적 황금기 상태에 있음을 알 수 있음.



셋째로 좀 불편할 수도 있는 부분은 실제 역사에서 일본에 문화를 전하는 징검다리 역할은 한국이었는데, 여기선 싹 날리고 염국과 직접 문화교류를 한 걸로 나옴. 실제 테라에서 바다가 없이 딱 붙어 있으니 가능한 점이긴 할 테고, 단국의 등장이 가구 외에는 거의 없는 걸 생각해보면 그럴 만 한가 싶기도 하다가도 막바지에 '염국에서는 지배집단과 중앙 관료들이 "전국의 힘을 모아 이재민을 구휼하고 백성을 평안하게 하는 일"을 도리로써 당연히 여겼다'라고 나온 부분을 보면 중국겜의 한계...라고 해야 할 지도 모르겠음. 설정집에서 염국에 대해 어떻게 나왔는지를 봐야 어떤 뉘앙스인지 제대로 알 수 있겠지만 솔직히 난 염국은 별로 번역하고 싶지 않아서 아마 누군가 해주지 않을까



번역하면서 힘들었지만 처음 한 문단을 번역해보니깐 뭔가 재밌어서 계속 했더니 결국 동국편을 다 변역해버림

뭔가 베히모스나 큰 떡밥 같은 게 있을 줄 알았는데 동국 편에는 딱히 그런 건 없었음 단국 떡밥도 당연히 없었고

후반에는 힘이 딸려서 좀 번역기에 많이 의지했는데 아마 여긴 일본에 대해 나보다 훨씬 잘 아는 사람이 많을 테니까 혹시 오역이나 수정해야 할 부분이 보이면 말해주면 바로 수정함





마지막으로


「극동 먼바다에서 상어인들이 묵옥신주(墨玉神舟, 옥처럼 검은 신의 배)를 타고 기슭에 닿았는데, 그들의 사자는 말은 예의가 발랐지만 갑옷은 비늘처럼 겹겹이 쌓여 있었고 검으로는 산을 둘로 가를 수 있었다;」


스카디는 산 갈랐음 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