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 모서리 아래의 에기르 이야기


수년간 이곳저곳을 전전하던 자료가 마침내 이베리아에서 내 손 안으로 넘어왔다.

기록에 사용된 종이는 원래 두껍고 평평한 좋은 종이였음을 노트의 남은 페이지를 보면 어렴풋이 알 수 있다.

이베리아에 있는 내 수임인의 말에 따르면, 메모가 지금과 같이 손상된 모습으로 변한 것은 매우 거칠게 다루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메모의 주인은 대침묵 이후 종적을 감췄고, 그의 빈 집에는 곧 도둑이 들었다.

도둑은 장물을 정리할 때, 마대에 던져진 이 노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심지어 전당포에 가서 장물을 처분할 때 그것을 가지고 가지도 않았다.

그래서 에기르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기록한 이 노트의 절반은 벽에 붙여졌고 절반은 책상 모서리를 받치는 데 사용되었다.



#01 영혼과 육체


합금 트레이에서는 희미한 붉은빛이 떠오르고, 캔의 벌레는 휴면 상태에서 깨어났고, 비늘과 같은 체표면의 구조가 천천히 열리며 작은 분비샘을 드러냈다.

하루에도 똑같은 일이 6번이나 일어나지만, 그는 그때마다 간호 로봇이 벌레의 분비샘에 바늘을 꽂았다 빼는 모습, 그리고 자신의 정맥에 바늘을 꽂았다 빼는 모습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꼬불꼬불한 핏줄이 피부를 통해 검푸른 흔적을 드러내며 굽이쳐가는 모습이 낯설고 괴상하게 느껴졌다.

이 순간 드물게도 그는 자신만의 문제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사람은 어떻게 자기 신체의 병변을 마주해야 하는가?


과학원 사회계획소의 집정관으로서 오쿨라투스는 문제에 대해 자기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선현들이 전쟁을 종식시키고 에기르의 도시국가들을 동맹으로 통합한 이후 폭력 대신 지혜가 통치의 도구로 인정되었다.

이후 천 년 동안 에기르 사회는 과학원의 중앙 기관 중 하나인 사회계획소에서 나온 계획을 엄격히 따랐다.

과학과 기술 양원의 모든 집정관들의 거듭된 평가와 고려를 거친 후, 오쿨라투스가 세운 계획은 결국 도시 전체의 사회적 규칙이 될 것이었다.

그는 절대적으로 객관적인 관점에서 생각해야 하며, 그의 사상은 어떠한 주관적인 요소도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

이를 위해 그는 모래판 위의 평범한 인형이 되기도 하고, 또 추상적인 존재가 되어 공중에 떠서 모래판 전체를 훑어보기도 해야 한다.


복도의 발걸음 소리가 그의 생각을 중단시켰고, 오쿨라투스는 귀를 쫑긋 세웠다.

규조류 복합 소재의 부드러운 밑창의 신발은 부드럽고 질질 끌리는 소리를 내지만 걸음걸이는 상당히 깔끔하다.

저 여자는 뭘 하러 온 거지, 항의하려는 건가?

하지만 그녀는 이틀 동안 세 번이나 항의했는데, 매번 의견이 비슷했다.

그는 계속 그럴 거라면 차라리 로봇을 보내 녹음을 틀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점점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를 주의 깊게 듣고 있다가, 상대방이 입을 열기 전에 먼저 태도를 분명히 밝혔다.

"정치적 문제에 관한 논의는 양원 중앙기관 집정관들이 참석하는 내일 회의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과학과 기술적 차원에서의 타당성 문제와 관련해선 과학발전기획원과 기술개발기획원이 각각 피드백을 제출할 예정입니다.

사회행정감사원 집정관으로서 사회적 측면에서의 불합리성이 발견되면 그때 질의를 해 주셔야 합니다."


물 캡슐 한 병이 그의 앞에서 엎어져 비스듬한 탁자 위를 따라 미끄러지기 시작하자, 그는 어쩔 수 없이 단말기를 한쪽에 놓고 손을 뻗어 캡슐을 감쌌다.

얼음물이 감각을 자극했고, 그는 자기 육체의 존재를 똑똑히 의식하게 됐다.


"오해하셨습니다, 집정관님. 물을 가져다드리러 왔습니다."

아우렐리아의 맑은 목소리에 현기증이 났다. 그녀는 항상 그의 마음을 어지럽힐 수 있는 그런 잔꾀를 생각해 냈다.

그는 지나치게 입담이 좋은 이 동료를 싫어하지는 않았지만, 생각의 과정이 방해받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다. 마치 자신이 그린 선 하나하나가 현실에 구현되기를 진심으로 바라지만, 그림을 그리는 도중에 선들이 갑자기 스크린 밖으로 튀어나와 물어뜯기는 일은 절대 바라지 않는 엔지니어처럼 말이다.


"전 좀 더 그럴듯한 이유가 있을 줄 알았습니다.

제 케어 로봇이 예정대로 식사를 제공하리라는 건 차치하고서라도, 물을 보내더라도 로봇을 대신 보내 줄 수도 있는데요."


"보세요! 어떤 일이 인간에 의해 수행되어야 하고, 어떤 일이 기계에 의해 수행되어야 하는지, 우리에겐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제가 직접 당신에게 물을 배달하더라도 그 이유를 듣고 싶어 하시잖아요!

그런데 이제 집정관님께선 생태학적 제변 시스템의 업무를 다시 사람의 손으로 이관시키고, 이를 위해 '인체 개조'까지 하려고 하십니까?

지름 50㎞의 수역에는 생태학적 제변 시스템의 모니터링 장치가 설치돼 있어 시스템 전체가 마비되지 않는 한 침입종 문제를 충분히 자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습니다."


오쿨라투스는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마다 매번 자신이 늙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에기르에서 경직되고, 반복적이고, 상상력이 필요하지 않은 일은 모두 기계의 책임이었다;

융통성이 필요하고, 자유롭고, 창조적인 모든 활동은 인간의 손에 쥐어졌다.

그가 어떻게 이 규칙을 이해하지 못할 수가 있겠는가?

수십 년 전 도시 전역에서 기계와 인간의 분업 규칙을 시행한 것은 젊은 시절의 그 자신이었다.

그러나 요즘 젊은 세대들은 벌써 그가 한 공헌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를 초조하게 만든 것은 자신의 공헌이 잊혀진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어휘력이 부족해지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사회계획소의 집정관으로서 평생 자신의 언변을 자랑스러워했지만, 지금은 현 상황을 명확히 표현할 단어를 만들어 내지 못한 언어설계소를 원망할 뿐이었다.

같은 집정관인 아우렐리아조차 시본을 그저 평범한 침입종으로 여기고 있는데, 그가 시본에게서 본 끔찍한 전망을 도시의 에기르 시민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만 할까?


"결국 그 얘기죠.

제 대답은 변하지 않습니다.

내일 회의에서 시본의 위협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관련 자료를 미리 보여드릴 순 없지만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시본은 완전히 새로운 생명 형태이며, 그것은 단순히 침입종으로 분류할 수 없습니다.

둘째, 생태학적 제변 시스템의 자율적 행위가 시본을 제거하기는커녕 오히려 시본의 신체상에 저희가 보고 싶지 않은 특성을 만들어 냈습니다."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분류학적 성과를 뒤집고 일반 해조류 해충이 완전히 새로운 생명체임을 증명하겠다는 건가요?

기존의 기술은 의미가 없어서 우리가 '인체 개조'라는 금기를 건드려야 한다고 모든 국민이 믿기를 바라시는 건가요?"


"전 제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시본이 단 몇 달 만에 이렇게 급격한 진화를 이루어냈으니, 에기르의 시민들도 제한된 시간 안에 혁명적인 인식의 전환을 이루어 내야 합니다."


오쿨라투스는 의도적으로 "에기르"라는 단어를 강조했다.

말을 마친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상대방의 얼굴에 작은 염려가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에기르의 언어에서 "에기르"는 가장 강력한 단어이며, 그것이 담고 있는 의미는 항상 긍정적이다.

수백 년 동안 아무도 감히 "에기르 사람은 무언가를 할 수 없다"고 말하지 못했다.

그래서 아우렐리아는 "에기르 시민들은 당장 이 정도의 변화를 이뤄낼 수 없다"고 주장하려다 거의 본능적으로 말을 멈췄다.

오쿨라투스는 마침내 누군가가 그의 마음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 같아 순간 약간의 홀가분함을 느꼈다.

그가 에기르가 새로운 장비를 발명하는 속도가 시본의 적응력을 따라가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을 때,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아우렐리아는 곧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고, 그녀의 태도는 여전히 단호했으며 말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당신이 생각하는 인식의 전환이 이뤄지더라도 걷잡을 수 없는 사회적 파동이 뒤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회계획이 변화에 대처하기 위한 허용 구간을 따로 설정해 둔 겁니다.

억압은 격동의 근간인데, 우리는 이미 억압을 뿌리째 뽑아 버렸으니 나머지 소규모의 변동으로서는 사회질서를 흔들 수 없습니다.”


"소위 '인체 개조'라는 개념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영향력을 '소규모'라고 표현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인체 개조를 받은 피험자가 여전히 인간이라는 것을 모든 시민들에게 어떻게 납득시킬 수 있겠습니까?"


"내일 회의에서 합의에 도달할 수 있다면 과학발전기획원은 즉시 연구 프로젝트에 착수할 수 있고, 이를 뒷받침할 상세한 이론적 데이터가 곧 나올 것입니다.

하지만 프로젝트의 목적을 미리 말해 줄 수는 있습니다.

피험자의 의식은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받지 않으며, 유전적 조정은 단지 그들의 육체적 강도를 필요한 수준으로 조정하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 "


"에기르인들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항상 자발적인 창의적 활동에 의존해 왔습니다.

언제부터 사람들을 '필요에 맞는' 모습으로 변화시켜야 했습니까?"


날카로운 질문에 오쿨라투스는 다시 말문이 막혔고, 이해받았다는 안도감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앉은 자세를 유지하다 보니 지친 그는 의자 뒤쪽으로 깊이 빠졌지만, 이른바 '인체공학적 구조'가 허리를 압박해 너무 깊이 파묻히진 않았다.

아우렐리아의 젊은 자태가 여전히 꼿꼿해서 그는 약간 외로움을 느꼈다.

그는 너무 오래 살았기 때문에 에기르의 의료 기술로도 그의 병을 완벽하게 제거할 수는 없었다.

그는 종종 자신의 의식과 신체가 흩어져가고 있다고 느낀다: 생각은 점점 복잡해져 가고, 몸은 점점 무거워져 간다.

그와 같은 나이대의 에기르 사람들 대부분은 안락사를 받아들이고 수명을 다해 사망했고, 오직 그만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는 자기 생각이 완전히 이해되지 않을까 두려워하며 항상 더 많은 것을 말하고 더 많은 일을 하려 했다.

그는 매우 존경받는 과학 집정관으로서 일 년 또 일 년을 유임했지만 그를 이해하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어 갔다.


이때, 그는 다시 한번 지친 몸을 이끌고 자신을 설명해야 했다:

"표현을 바꿔야 할 것 같군요.

유전자 조정은 피험자를 특정한 모습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신체적 결핍을 보완하고, 그들이 자신의 전술적 아이디어를 최대한 실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마치 환자에게 치료를 제공하고 장애인을 위해 팔다리를 달아주는 것과 같습니다.

가능하다면, 저 자신도 개조를 받아들일 용의가 있습니다."


"당신의 신체적 어려움은 이해하지만, 당신의 비유는 성립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환자와 장애인은 확실히 의료적인 치료가 필요하지만, 건강한 사람의 신체는 어떤 부족한 부분을 '개조'해서 보완해야 합니까?

당신은 마치 인체가 아니라 수리가 필요한 일상생활의 기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당신이 인간의 가치를 인정한다면 인체를 다른 모습으로 개조하려 하지는 않을 겁니다!"


오쿨라투스의 말을 되돌아보면, 모든 문장은 의식과 육체를 분리해 논하고 있다. 마치 의식만이 인간의 근간이고 육체는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다는 것처럼 말이다.

오쿨라투스는 공포에 질려 자신의 말이 더 이상 자기 생각을 충실히 반영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분명 그 어떤 에기르인보다도 건강하고 아름다운 신체를 갈망하며, 의식과 육체의 통일성을 중시했다.

인간은 소프트웨어가 탑재된 기계가 아니라는 것은 수천 년 동안 수많은 에기르 사람들에게 깊이 뿌리내린 개념이다.

당시 에기르의 조상들은 다양한 수로에서 바다로 모여들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가슴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으며 뭔가 신비로운 존재가 그 곳에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자신에게 의미를 부여했다: 신의 창조물이나 자연의 걸작, 운명의 화신이나 이념의 확장 따위로 말이다.

이러한 의미는 다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존경하거나 감탄하고, 사랑하거나 흠모한다.

후에 사람들은 해저에 묻힌 유산을 발견했다: 무궁무진한 지식과 기술이었다.

과학 기술의 발달로 사람들은 인간의 존재가 신비로운 것이 아니며, 인체는 단지 많은 세포의 집합체에 불과하다는 것을 빠르게 깨달았다.

사람들은 자기 의심에 빠졌다: 객관적 존재인 세포 집합체는 대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우리는 어째서 그것에 감정을 가지는가?

이러한 의심을 둘러싼 논쟁은 한 선현이 수천 년간 후대에 영향을 끼친 질문을 제기하기까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왜 사람은 의미를 가지고 감정의 근원이 될 수 있지만 세포는 그렇지 못한가?

과학 용어와 기술 용어의 특별한 점이 무엇이기에, 모든 의미와 감정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하는가?


그 후 기술은 신비롭고 숭고한 베일을 잃었다.

사람들은 기술적 성과를 최고의 신으로 숭배하지도 않았고, 과학적 성과에 의해 무의미한 세포 집합체로 철저히 해체되지도 않았다.

심장은 피를 펌프질하는 기관일 뿐이고, 의식은 뇌 활동의 결과일 뿐이지만 그렇다고 인간이 일종의 생물학적 기계로 전락한 것은 아니다.

장기, 세포, 심지어 입자로 구성된 이 정밀한 시스템은 흔들리지 않는 가치를 담고 있다.

여기에서 인체를 모티브로 하는 시각예술이 탄생하였고, 신체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한 창조적 활동이 되었으며, 창조적 활동만이 인간성을 유지하는 유일한 수단이 되었다.


"아니요, 제가 그렇게 생각할 리 없습니다! 인간의 가치...…"

이 순간 오쿨라투스는 평정심을 잃고 상대방이 오해하지 않게 하는 데만 집중했다.

당황하여 옆에 있는 수조를 힐끗 보니 그 안에는 부풀어 오른 분홍색 생물이 떠다니고 있었고, 수십 개의 짧은 관을 한시도 쉬지 않고 힘껏 저으며 가까스로 헤엄치고 있었다.

이 서툴고 못생긴 생물은 그가 할 말을 되찾게 했다: "…혹시 이게 뭔지 압니까?"


"β의린하선(拟鳞下腺)-플랑크톤성 의린 다족충, 의료용 융합종 생물로 유충은 의학적 가치가 있는 분비물을 생산할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나 같은 환자들이 생명을 연장할 수 있도록 돕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종족 전체가 존재하는 유일한 이유입니다."

그의 손 옆에는 재활용 캐비닛에 버려진 약품 포장이 가득 쌓여 있었고, 각 포장에는 오그라든 유충의 사체가 들어 있었다.

분비물은 보존이 어려워 생체를 떠나자마자 효과가 없어지기 때문에, 이러한 모든 약물은 살아있는 유충의 형태로 포장되어 즉시 사용 후 폐기된다.

"그에 비해 성체는 약용가치가 없고 인공 번식 과정에서도 사용되지 않으므로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는 어떤 성충도 존재해서는 안 됩니다.”


"그럼 물탱크에 있는 이건 그냥?"


"제가 생물 연구소에 위탁해 키운 것이 아마도 이 종의 유일한 성체일 겁니다. 제가 이것들을 키우는 이유는 단지 저 스스로를 일깨우기 위해서입니다.

이 작은 벌레의 존재 가치는 전적으로 우리에 의해 결정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유전자 편집 기술을 통해 종의 경계를 마음대로 허물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종의 경계를 허물 수 있는 능력에 또 어떤 게 있는지 아십니까?

시본.

인류의 가치를 논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이 가치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오직 우리만이 자신의 가치를 인정할 수 있고, 우리가 자랑스러워하는 모든 것은 시본의 눈에는 단 한 푼의 가치도 없으니까요.”


장문의 격양된 연설에 그는 호흡이 다할 지경이었다.

오쿨라투스는 다시 의자에 깊숙이 앉아 상대의 반응을 살폈다.

그러나 그가 기대하던 눈빛은 보이지 않았고, 아우렐리아가 나타낸 태도는 연민에 가까웠다.

"인간의 가치에 대한 당신의 인식을 믿는다 해도…… 전 '인체 개조'라는 말은 절대 믿지 않습니다.

당신께서 선택하신 수단 자체는 당신의 원래 취지에 어긋납니다.

그리고, 말씀드리기 죄송하지만, 항상 자신의 병세와 약물로 예를 드실 수는 없습니다……

에기르 사회에는 좀 더 정당한 이유가 필요합니다."


이성적인 반박들은 모두 그의 마음을 더욱 굳건하게 만들 뿐이었지만, 약간의 동정심이 담긴 작은 간언은 그를 흔들었다.

과학원 사회계획소의 집정관으로서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관점에서 생각해야 하는 그의 생각은 어떠한 주관적인 요소도 포함해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오쿨라투스는 이렇게 되짚어본다: 그는 자신의 병에 대한 혐오와 건강에 대한 열망을 업무에 투사한 걸까?

그는 무거운 몸을 너무나도 이끌고 싶어서 에기르도 인체 개조로써 구원받아야 한다고 느꼈던 것은 아닐까?


다음날 회의는 예정대로 열리지 못했다.

회의에 앞서 사람들은 오쿨라투스 과학집정관이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인체 개조에 관한 아이디어는 공론화되지 않았고, 기술 집정관인 아우렐리아를 포함해 소수의 사람만이 이 환상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10여 년 후, 에기르의 상황은 악화되었고 다른 집정관에 의해 인체 개조 아이디어가 제안되었다.

이번에는 인정받아 심해 사냥꾼 프로그램의 모태가 되었다.



# 02 "삶과 죽음"


금속 상자가 공중에서 약간 흔들리기 시작했고, 정보 검색 모듈의 로딩이 곧 완료되려 했다.


너의 부검 보고서와 건강 관리 기록이 내 앞에 나타났다.

너는 마치 수천 년의 세월이 지난 유목처럼 방 안의 다른 말라붙은 식물보다도 창백해진 채 수직의 반밀폐 유리 욕조에 떠 있다.

밝은 색의 긴수염 빗살풀(长须栉齿草)이 네 가슴에서 돋아나, 발광 주머니가 가득 박힌 촉수로 물 아래에 붉은 별이 빛나는 밤을 펼쳐냈다.

물 위에 세워진 잎사귀는 보초처럼 흔들리며 촬영자의 렌즈를 쫓고 있었다. 네가 남긴 이 작품은 살아 있었고, 내가 그것을 보고 있을 때 그것도 나를 바라보았다.

이것이 자살 현장의 영상인 줄 몰랐다면 나는 내가 한 폭의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는 줄 알았을 것이다.

네가 남긴 유서는 한 줄에 불과했고, 시스템에 등록조차 되지 않은 채 벽면에 대충 휘갈겨져 있었다.

"나는 수많은 생명을 나와 함께 황량한 해변에 무의미하게 좌초시켰다."——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비록 네가 죽었다고 해도, 네가 키운 식물들은 여전히 아름다운 생명을 가지고 있고, 마치 너의 피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너의 모습을 읽어낼 수 있을 것처럼 한그루 모두 크고 우아하게 서 있어.


"검색 완료. 사망한 플로렌스는 생전에 치유하기 어려운 심각한 질병을 앓고 있지는 않았으며 안락사 조건에 해당하지 않았습니다.

부검 결과 사망자는 자살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자살——이 얼마나 낯선 말인가.

에기르인이 죽음을 편안히 마주할 수 있고, 수명이 다했거나 심각한 질병을 앓을 때 안락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살아오면서 충분한 가치를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수명의 끝자락에서 어둠 속을 편안히 걸어 나아가는 죽음은 생명에 대한 긍정이다.

다만 최근 100년 동안, 너처럼 자신의 생명을 앞당겨 끝내려고 한 사람은 없었다——자살은 생명에 대한 노골적인 부정이다.

너는 훌륭한 아이이고 뛰어난 인재야, 무엇이 너 자신의 생명을 부정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니?

나는 너의 생각을 추측할 도리가 없어서, 그저 나 자신을 되돌아볼 뿐이야.


"검색 완료.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이 보조 로봇은 '검색 완료'라는 말을 덧붙이는 듯했다. 이런 의례적인 인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자. 내가 너 때문에 한순간이라도 슬퍼한 적이 있었나?

나는 공공 양육소의 양육자이고 너는 내가 키운 아이였다. 20년 전에 너는 양육소를 떠나 기술원의 생태예술창작소에서 공부하고 일했다.

네 가치를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바로 네 동료이고, 그들이야말로 너의 진정한 가족이겠지.

결국 가족애를 유지하는 유대는 혈연도 가정도 아닌 가치 인식이니까.


이제 너는 예고도 없이 돌아와 나의 가치를 파괴하려고 하고 있어!

나는 일생의 가치를 공공 양육소에 두고 내가 사랑하는 일을 했다.

수십 년에 걸쳐 셀 수 없이 많은 원래의 부모들로부터 아이들의 양육권을 물려받았는데, 눈을 감아도 부모님의 안심한 표정과 아이들의 기대에 찬 눈빛을 볼 수 있었다.

양육소의 존재는 에기르인을 가정생활의 굴레에서 해방시켰다──네가 죽기 전까지 나는 그렇게 굳게 믿었다.

너는 굳이 운명적인 자살의 길을 선택하고, 가슴에 긴수염 빗살풀을 심었지──왜 내가 네게 준 첫 번째 식물인 긴수염 빗살풀이야?

만약 너를 궁지에 몰아넣은 것이 그때 내가 널 양육했던 것이라면, 넌 당연히 항소를 제기해서 내가 정식 판결을 받을 수 있도록 했어야지.


"검색 완료. 숨진 플로렌스 씨는 생전에 잦은 불면증을 겪었고, 최악의 경우 사흘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불면증──또 생소한 단어다.

보조 로봇이 데이터베이스를 샅샅이 뒤졌지만, 불면증에 대한 짧은 언급이 있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은 문헌 한 편만을 찾아낼 수 있었다.

저자는 독보적인 탐험가로, 53년 전 그 혼자만으로 구성된 탐사대가 자체 개발한 '육지 탐사선' 프로토타입을 타고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육지에 발을 내디뎠다.

그는 육상인의 불면증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곳에선 기계의 노동이 보편화되지 않았고 가족이라는 개념도 아직 희석되지 않았다.

사람의 하루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8시간은 일에 쓰이고, 8시간은 생활, 그리고 8시간은 수면에 쓰인다.

그러나 그들의 일과는 낮에는 8시간 동안 똑같은 공작물을 두드리고, 밤에는 8시간 동안 같은 인사말을 반복하며, 같은 음식을 조리하고, 같은 집안일을 처리하는 등 무의미한 기계 노동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진정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하기 위해 수면시간을 쪼개야 하는 경우가 많다."


정말 슬프지 않니?

우리의 일과 삶, 가치 창출과 자아실현은 모두 통일되어 반복적인 기계 노동으로 인해 의미가 잃어버리지 않고, 인정받기 위해 지루한 가정생활에 의존할 필요도 없지.

우리의 활동은 충분히 훌륭하고 우리의 삶은 충분히 만족스러워.

너는 도대체 무엇을 갈망해서 밤 시간을 빌려 낮의 부족한 점을 보충할 수밖에 없었던 거니?


"검색 완료.

고인이 된 플로렌스는 밤에 예술 작품을 만들곤 했습니다.

그녀의 집에는 죽었거나 죽어가는 식물이 가득하며, 그중 대부분은 유전자 편집과 형질 변형으로 조작된 것으로, 아마도 그녀의 '생태 예술' 작품일 것입니다.

올해 5월부터 그녀는 자신의 작품 중 버려진 초안 식물들을 더 이상 회수해 처리하지 않고 집에서 썩게 내버려 두었습니다. "


그래, 넌 어렸을 때부터 여기에 푹 빠져 있었어.

보육원의 다른 아이들이 프린터와 비디오 단말기를 놓고 경쟁하고, 움직이는 모형과 생체 모방 애완동물을 가지고 놀 때, 넌 항상 꽃과 식물을 돌보며 재미있는 모양으로 만들곤 했지.

나중엔 식물을 특정한 방향으로 자라게 하는 법을 배웠고, 또 스스로 새로운 관상용 품종을 만들어 내기도 했지──그건 황금색 나선형의 줄기와 별 모양 꽃을 가지고 있었어.

네가 보여준 예술적 재능에 난 큰 기대를 걸 수밖엔 없었지.

창조적 활동은 인간성을 유지하는 유일한 수단이며, 예술은 모든 창조적 활동 중에서도 가장 개발적인 것이지.

예술은 모든 시민에게 격동의 정신과 생생한 의식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실용적인 수단이야.

내가 기대한 대로, 너는 뛰어난 예술 창작자이자 기술원의 중역이 되었어.

그런데 넌 어떤 한계에 부딪혔기에 더 이상 작품을 내놓지 않고 수십 수백개의 초안이 집에서 썩게 내버려둔 거니?


"검색 완료.

사망한 플로렌스는 최근 반년 동안 여러 차례 다른 기관의 프로젝트를 맡아 생물연구소와 환경관리소의 인력 공백을 메웠습니다.

그녀가 생전 마지막으로 맡은 프로젝트는 시본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모니터링하고 보고하기 위해 특별한 뉴런을 탑재한 일종의 융합종 식물을 재배하는 것이었습니다.”


너의 모습이 갑자기 낯설어지기 시작했어.

사람들은 창조적인 노동에서 가치를 창출하고 자아실현을 하기 때문에 자신이 사랑하는 직책을 떠나려는 사람은 거의 없어. 그리고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네가 바로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 가장 집중하는 사람이야.

씨앗이 언제 싹트는지, 식물이 언제 자라는지 눈으로 보기 위해 먹고 자는 것도 잊은 채 온실 속에 며칠, 몇 달 동안 쪼그려 앉아있기도 했지.

어떤 사고가 네가 자신의 창의적인 활동을 제쳐두고 다른 일에 참여하게 할 수 있는 거니?


"검색 완료.

처음 다른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위해 지원한 사람도 플로렌스 본인이었으며, 프로젝트의 핵심 구상도 그녀가 제안했습니다.

기술발전계획소의 집정관은 그녀의 열정과 창의성을 높이 평가해 신청을 승인했습니다.

그 후 그녀는 예술 창작과 추가적인 종 재배를 동시에 수행하면서 두 가지 작업을 겸임했습니다."


낯익은 인상이 다시 떠올랐다. 그래, 네 눈에 보이는 세상은 좁고, 그 밖의 일에는 관심이 없지만, 그 안의 모든 일에는 더 잘하려 끊임없이 애썼지.

넌 너 자신의 작은 세계가 완벽하기를 바라면서, 나뭇잎 가장자리가 아주 약간이라도 말려 있거나 누렇게 변한 흔적만 있더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잎은 다듬어 내야 하는 사람이었지.

화단에는 늘 가지와 잎의 부스러기가 떨어져 있었고, 네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식물을 만지작거리는 데 썼는지 과연 아는 사람이 있었을까?


양육소 안의 아이들은 모두 형제자매고, 양육자는 모두 부모고 어른이지. 원래 서로 구분해 대해선 안 되지만, 모든 양육자 중에서, 넌 나와 가장 친해지고 싶어 하는 것 같았어——아마도 완벽함을 추구하는 너를 가장 잘 이해했기 때문이었을 거야.

수천수만 가지의 기성 물감이 있더라도, 뛰어난 화가는 마음속으로 직접 색을 조절해야 한다——너도 이런 고상한 철학을 좇았겠지?

조금 힘이 들더라도 나는 널 위해 실험실 수준의 배양 장비를 요청하고 싶었어.


요 몇 년 새 네 시야는 많이 넓어진 것 같네.

만약 네가 다른 분야에서도 완벽을 추구하기 시작한다면, 그건 네가 그것들을 네 세계로 포함시켰기 때문이겠지.


"검색 완료.

프로젝트에서 육성한 융합종 식물은 투입 직후 시본에 의해 빠르게 동화되었고, 그 결과 관측소에서 근무하던 기술자 3명이 순직하면서 필요한 데이터 보호 조치도 취할 새 없이 동화되어 현장에 출동한 해양 순찰대는 이들을 사살해야만 했습니다.

환경관리소의 데이터베이스는 한동안 다운되었는데, 대부분의 데이터는 백업을 통해 복구할 수 있었지만 유출된 데이터의 양은 추산하기 어려웠습니다.

유출된 데이터를 시본이 읽거나 심지어 활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프로젝트 자체가 취소됐고 플로렌스는 생전에 기술원의 심문을 받았습니다."


시본, 시본.

해양 순찰대의 함대가 몇백 년 만에 처음으로 손실을 겪은 후부터, 이 사악한 것들은 이미 너무나 많은 불완전성을 가져왔어.

하지만 그건 결국 일시적인 재난일 뿐이고, 우리는 반드시 영광스러운 승리를 거두게 되겠지.

만약 네가 조금만 더 오래 기다릴 수 있었다면?

한 명의 에기르인은 아직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고난을 겪을 수 있겠지만, 에기르는 언제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

모든 불완전한 것을 네 손으로 뿌리 뽑아야 하는 건 아니야.

이런 기본적인 이치를 난 어째서 네게 가르치지 못했을까?

……그런데 생각해 보면 난 네게 이런 이치를 가르칠 자격이 없는 것 같네.

어떤 물건은 산산이 흩어져도 상관없지만, 어떤 존재는 완전무결해야만 한다——우리 모두 이런 집착을 가지고 있지.

그렇지 않았다면, 내 평생의 가치가 자기도 모르게 흠집이 났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나는 네 죽음을 애써 조사하지 않았을 테니까.


"검색 완료.

정상적인 절차에 따라 환경관리소 책임자는 심문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에기르의 국방 안보에 심각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집정관은 프로젝트와 관련된 모든 사람을 심문할 권리가 있습니다.

환경관리소 소속은 아니지만 프로젝트 수행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플로렌스는 그에 따라 철저한 조사와 사후관리에 협조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검색 완료.

업계 차원에서 예술 관련 종사자는 해마다 감소하고 있으며, 주요 창작 기관의 인력 수준도 여러 차례 축소되고 있으며, 생태예술창작소도 예외는 아닙니다.

전시를 비롯한 각종 예술행사의 개최에는 큰 영향이 없으나, 참여자 수가 감소하였고 참여층의 연령 구성이 점차 중장년층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습니다.”


"검색 완료.

개인 차원에서 플로렌스는 최근 몇 년간 생산 빈도가 계속 낮아졌고, 그녀의 작품은 엇갈린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녀는 생태예술창작소 부소장으로서 최근 행정업무에서도 어느 정도 비정상적인 모습을 보여 왔습니다.

그녀는 올해 생태예술창작소의 전시를 취소하거나 적어도 자기 작품을 전시하지 않기 위해 신청서를 제출했습니다.”


"검색 완료.

질문을 받았을 때 플로렌스는 자신과 자신이 길러낸 식물의 생명을 '좌초'라는 말로 설명했습니다: '살아서 가치를 창출할 수도 없고, 정당하게 죽을 수도 없는, 존재해선 안 될 모습으로서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좌초되어 있을 수밖엔 없다.'

그녀의 발언은 '사회정신에 맞지 않는다'는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


노인은 수색을 멈추고 보조 로봇을 끄고 물침대에 누웠다.

그는 불안감에 압도되기 전에 조사를 잠시 멈췄다.

노인은 예리하게도 한 가지 수상한 냄새를 맡았다: 에기르 사회에 미묘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았고, 극도로 예민하게 살아가던 플로렌스는 이런 변화를 가장 먼저 반영하게 되었다.

그는 이 일을 행운이라 생각해야 할지 아니면 겁을 먹어야 할지 몰랐다.

플로렌스의 자살이 그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여 다행이었지만, 무언가 더 복잡한 이유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두려운 건, 양원의 집정관들이 왜 에기르에 이런 변화가 생기는 것을 묵인했는지 모르겠다는 점이었다.


그는 적어도 자신의 일은 여전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며 잠자리에 들기로 결정했다.

내일 그는 두 명의 새로운 아이를 맞이할 예정이니 미리 너무 많은 에너지를 낭비해서는 안 됐다.

그러나 잠시 후 그는 보조 로봇을 다시 깨웠다.

"왜……그녀가 자살했다고 생각하나?

질문에 대한 압박감?

창의력의 고갈?

가치의 부재?

인지적 착란?"


"검색 완료.

'조력자' 보조 로봇의 정보 검색 모듈을 사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기계의 기능은 기존 정보 검색으로만 국한되며 인간을 대신해 사고하는 기능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사용자가 본 기계에서 출력되는 정보를 의견으로 착각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본 기계는 '검색 완료'라는 출력 형식을 따르고 있으니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03 "빛과 그림자"


08:00:00


"지금은 7월 29일 8시 정각, 헤르쿨라네움 시민 여러분,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날 공기 순환 시스템의 유속은 다음과 같이 설정됩니다: 미풍

광열 제어 시스템의 밝기는 다음과 같이 설정됩니다: 맑음

설레는 마음으로 시민 여러분께 알려드립니다: 환경관리소는 헤르쿨라네움이 오늘 10시를 전후해 금세기 첫 자연 화산 분화를 경험할 것으로 추산했습니다."


"헤르쿨라네움 화산은 바다에서 가장 큰 규모의 에너지 저장고 중 하나입니다.

대부분의 에기르 도시들이 수소에너지를 주 에너지원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지열에너지는 에기르인들이 최초로 배운 에너지원이었습니다.

아름다운 우리 도시——헤르쿨라네움——는 자연적인 지리적 이점으로 오늘날 에기르에서 지열에너지를 주 에너지로 하는 몇 안 되는 도시이기도 합니다."


"저희는 분화구를 중심으로 반경 5 해리 이내에 300개가 넘는 에너지 터널을 굴착했고, 각각의 터널 아래에 부스터 펌프를 설치해 화산이 휴면 중일 때에도 미세 화산 폭발에 준하는 용암 폭발을 인공적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에너지 터널에는 특수 액체 매질이 저장되며 3000만 단위의 압력 하에서 분출구의 액체 매질은 고온 상에서 초임계 유체로 전환됩니다.

초임계 유체에서 생산된 전기에너지는 헤르쿨라네움 에너지 소비량의 70%를 공급합니다."



09:00:00


"환경관리소 공식 채널에서 실시간 중계방송을 할 예정이니 오늘 쉬는 시민분들 께서는 집 밖으로 나와 화산 폭발을 직접 두 눈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보호안경은 광케이블을 통해 모든 노드에 배포되었으며, 필요한 시민분들 께서는 자택이나 직장의 터미널에서 수령하실 수 있습니다.

보호안경은 음성, 제스처, 생체 전기 등 다양한 제어 모드를 지원하며 사진, 비디오, 모델링 생성, 데이터 측정 등 다양한 실용적인 기능을 갖추고 있습니다.


"분화가 일어나는 동안 화산 분화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기 위해 도시의 광열 제어 시스템은 일시적으로 차단될 예정입니다.

이 경우 주양거기(铸阳巨械, 아마 인공 태양 같은 물건인 듯)는 가동이 중지되고 개방이 중단되니, 관람을 예약한 시민분들 께서는 예약을 변경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화산 분화를 감상하면서 위대한 불카누스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을 잊지 말도록 합시다.

그가 주도해 설계한 단열 돔은 규모 4 이하의 화산 폭발을 완벽하게 견딜 수 있고, 헤르쿨라네움은 수억 세제곱미터의 화산 분출물 세례를 무사히 견뎌낼 수 있습니다.

분화 기간 중 돔의 발색 유닛도 일시 차단돼 시민분들께서는 단열층 본연의 색상을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09:47:25


"시민 여러분, 주의하십시오.

알 수 없는 데이터 간섭으로 인해 이전에 보고된 측정 결과가 부정확할 수 있으며, 이번 화산 폭발의 강도 지수는 규모 4를 초과할 수 있으며 최대 규모 7에 도달할 것으로 추정됩니다.

시민 여러분은 당황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규모 7의 화산 폭발에도 단열 돔은 충분한 시간을 버틸 수 있습니다.

헤르쿨라네움의 이동 프로그램은 2시간 안에 긴급 가동되며 도시 전체가 화산 폭발의 영향권에서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게 됩니다.



"헤르쿨네움은 속도를 희생하여 최대의 안정성을 달성하기 위해 다리와 추진기를 결합한 복합 이동 모드를 채택합니다.

현재 에기르의 도시 중 약 5분의 1이 이 모델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다리로 도시의 기반을 지탱한 후, 하부의 추진체는 도시를 부유 상태로 유지합니다.

도시 이동의 핵심 동력은 주 추진체가, 변속·조향·지형횡단 등 복잡한 동작은 다리가 보조합니다.


"일반적으로 도시 측면의 보조 추진체는 주거층의 균형을 유지하는 데 사용됩니다.

시간이 촉박하기 때문에 일부 보조 추진체가 추가 동력을 공급하기 위해 사용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도시 거주층이 흔들리고 덜컹거릴 수 있습니다.

공공 피난시설은 개방되어 사용되고 있으며, 또한 급속 충전 보호 필름은 광케이블을 통해 모든 노드에 배포되었으니 시민 여러분께서는 가능한 한 빨리 자택이나 직장 내 터미널에서 수령해 주시기 바랍니다.

급속 충전 보호 필름을 사용할 때 무거운 옷을 벗고 보호 필름 생성기를 가슴에 고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접촉을 막기 위해 보호막 생성기의 작동 모드를 자동으로 조정하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10:02:37


"주의하십시오, 주의하십시오.

용암에서 알 수 없는 가지 모양의 생물학적 조직이 자라났으며 많은 수의 시본 유충도 동반되었습니다.

3번과 4번 다리와 하부 추진체가 다양한 정도로 손상되었고 주 추진체의 연소실이 시본에 의해 막혔습니다.

현재 모든 시본은 공격성을 보이지 않고 있으며, 모바일 모듈에 대한 긴급 수리 작업이 진행 중입니다.

관계기관들은 시본을 제거하고 도시의 이동 능력을 회복하는 데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하고 있습니다."


"주의하십시오, 주의하십시오.

인원 모두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시민 여러분을 도시 외곽의 안전한 지역으로 대피시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시민분들은 즉시 지정된 대피 장소로 이동하여 질서 있게 함정에 탑승하여 대피하십시오.

대피 과정은 전 과정에 걸쳐 해양 경비대가 호위할 예정이니 시민 여러분께서는 당황하지 마시고 적극적 협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주의하십시오, 주의하십시오.

모든 도시 문이 이미 개방되어 대피 함대가 출항할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관계기관 직원들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본 채널에서도 방송을 계속 진행할 예정이니 시민 여러분께서는 계속 관심을 기울여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10:55:48


"3번 다리의 수리 완료, 주 추진체 작동 재개.”


"시본의 수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1번 다리는 펼쳐진 가지에 걸려 죽었습니다.”


"에너지 터널 대규모 붕괴. 당장 이동 절차를 시작해 남은 다리로 도시를 지탱하십시오.”


"아직 대피하지 않은 시민 여러분은 즉시 지정된 대피 장소로 대피해 주십시오!”



12:03:46


"아직 대피하지 못한 동포 여러분께 깊은 경의를 표합니다.”


"청소와 긴급 수리 작업이 계속되고 있으며, 헤르쿨라네움은 아직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선현께서 여러분과 함께하고, 에기르가 여러분과 함께합니다."




서커스의 에기르인


11세기 초엽, 이베리아 최초의 에기르인이 상륙한 지 거의 100년이 지났다. 이베리아 왕국의 눈부신 전성기를 맞이한 이때, 사람들의 진기한 것에 대한 추구는 탐험 그 자체에 대한 열정을 능가했다.

피난을 떠나 뭍으로 올라온 에기르인들은 대부분 무리를 떠나 고립된 채 살았지만, 해저 문명의 진보적인 성과는 여전히 이베리아 사회로 끊임없이 흘러 들어갔다.

그러나 이 시대의 이베리아 인들에게 체계적인 지식과 기술은 소화하기 너무나 어려웠고, 대신 사물의 겉을 대충 벗겨 기이한 정신적 패스트푸드를 만드는 것을 더 선호했다.


이 노트의 주인은 이른바 "에기르 서커스"에서 일했다.

동물 공연과 기괴한 전시가 유행하던 이베리아에서 사람들은 이미 물구나무서기를 타는 버든비스트와 시소를 밟는 투스비스트에 질려 버렸고, 기형 맹글러와 쌍두 글룸핀서가 싸우는 공연도 인기를 끌지 못할 정도로 심해에서 온 기이한 보물들이 주목의 대상이 됐다.



#04 저자의 잡다한 기록


뭍에 오른 후에 우리는 곧 육상인을 만났다.

이베리아의 어촌 마을이었는데, 마을은 부유하지 않았고, 사람들은 바다에 나가 낚시와 보따리 장사를 하면서도 우리를 따뜻하게 수용해 주었다.

식사 후 마을 노인과 아이들이 우리를 에워싸고 퉁명스럽게 말을 걸기도 하고, 때론 아무 말도 없이 우리를 빤히 쳐다보기도 했다.

한 동포가 감사의 표시로 금박 회중시계를 꺼내 선물하면서 이런 이상한 구경은 끝이 났다.


이틀도 안 되어 누군가가 우리 집에 찾아와 자신이 현지 귀족의 대표라며 우리를 데리러 왔다고 했다.

대부분의 사람은 출신을 알 수 없는 몇몇 육상인들의 안내를 받기보다는 이전에 상륙한 에기르인들과 연락이 닿기를 희망하며 조심스럽게 거절했다.

나와 같이 영문도 모른 채 차에 탄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았다.

육지의 나라들은 생각보다 시끌벅적하면서도 혼란스러웠다.

시장을 지나갈 때 공기 중에는 죽은 물체의 비린내가 가득했다.

노점 천막 뒤, 널빤지 상자 안, 처마 밑에서 헐벗은 아이들 무리가 나와 우리를 뒤쫓아오며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질러댔는데, 마치 굶주린 시본 유충 같았다.

그들은 현지 훈제 햄, 육상의 증류주, 심지어 시본 모양의 수공예품까지 들고 다니며 우리 수중의 값나가는 물건과 바꾸려는 듯했다.

키가 큰 네발 동물이 우리 차를 기웃거리며 냄새를 맡은 후 돌아서서 바퀴에 악취가 진동하는 대소변을 한 무더기 남겼고 주인은 웃음을 터트리곤 술 트림을 했다.

차를 이끄는 '귀족 대표'가 검을 뽑아 들고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욕설을 퍼붓자 그는 맥없이 가버렸다.


나지막한 단층집으로 이뤄진 미로를 벗어나 비교적 깔끔한 도심으로 향했다.

공기는 또 다른 냄새로 바뀌었는데, 담배 타는 냄새와 새로 칠한 벽 페인트 냄새는 코를 찡그리게 했다.

차가 웅장한 저택 앞에 멈추었고, 우리는 입구에서 잠시 기다리라는 요청을 받았다.

며칠간의 여행으로 한순간도 쉬지 못한 우리 일행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옆에 누가 급히 다가와 끈적끈적한 청록색 액체가 담긴 병을 하나 꺼내 자랑스러운 듯 우리에게 소개했다.

"아고르 집정관이 매일 마시는 귀한 음료로, 한 병은 기운을 북돋우고, 두 병은 사람의 힘을 짐승처럼 강하게 만들고, 세 병은 세상 어디를 가든 두려울 것이 없어집니다."

나는 손을 내저으며 거절을 표시했지만, 그는 여전히 들어주지 않았다.

"손님께선 바다에서 오신 것 같은데, 오랜 여행에 피곤하실 텐데 한 번 해보시지 않으시겠어요?"

내가 에기르 사람인 줄 알면서도 에기르에 이런 기괴한 "음료"가 없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것 같아 놀라웠다. 그것은 생물연구소에서 식물에 쓰는 영양액에 가까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택의 고용인이 우리를 들여보냈다.

이베리아 귀족이라는 여성이 우리를 맞이했고, 그 뒤에는 화려한 옷차림의 에기르 출신 노인이 따라다녔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귀족은 이빨을 계속 드러내는 긴 털의 동물을 조용히 쓰다듬고 있었고, 그 옆에 있던 에기르 노인이 대부분의 협상을 마무리했다.

이 귀족의 끔찍하게 긴 이름을 소개하곤 혼잣말을 하듯 한 차례 인사말을 나눈 뒤 노인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과 단둘이 이야기하고 싶다고 했다.


기품 있는 저택을 나서자 노인은 나를 혼란 속으로 이끌었다.

공터에는 수십 개의 천막이 어지럽게 널려 있고, 그 사이에는 동물을 묶은 나무 수레가 흩어져 있었다.

나는 머리에 검은 것이 뾰족하게 튀어나와 있고 키가 거의 3미터는 되는 우람한 거인이, 혐오스러울 정도로 뒤틀린 자세로 작은 나무칼에 묶여 있는 것을 보았다;

유리 항아리 속엔 말라빠진 사람과 짐승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는 것이 보였고, 시커먼 결정체가 둘의 피부를 찔러 하나로 묶어 마치 샴쌍둥이처럼 보였다.

그들은 내가 이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방식으로 나를 바라보았다——눈가 구멍의 젤라틴 구체만 나를 향하고 있을 뿐 그 속에 눈빛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들이 뭣 때문에 눈동자를 굴리고 있는지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여기서 노인은 꽤 직설적으로 말했다.

그는 내가 이베리아에서 편안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고 싶다면 "바다에서 가져온 지식과 기술로 산업에 도움을 주겠다"는 약속만 해준다면 밝은 길로 안내해 줄 용의가 있다고 했다.

그렇게 말하며 그는 잘 다듬어진 물푸레나무 진열대를 열었는데, 그 안에는 생활용품부터 장식품까지 없는 것이 없었고, 모양은 에기르의 제품과 비슷하면서도 가장 추하고 쨍한 색깔이 아무렇게나 칠해져 있었다.

잠시 뒤적거리다가 그는 동물의 피부가 둘러지고 반짝이는 금칠이 된 괴상한 갑각 하나를 꺼냈다.

윤곽으로 판단하건대 갑각은 해저에 서식하는 시본의 일종인 것으로 보였지만 갑각에 둘러진 방추형 가시는 분명히 다른 종류의 시본에서 온 것으로 보였다.

나는 나중에야 이 갑각이 정말로 몇 가지 시본의 뼈를 이어 만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요즘 육상에서 보는 다른 것들에 비하면 그건 거의 평범해 보일 지경이지만, 나는 여전히 그것이 어떻게 존재하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처음 왔으니 간단한 것부터 해야 해. 서커스의 이상한 전시회에서 우리를 도와 이걸 소개해 줄 수도 있겠지.”


그러나 문자학자로서 시본에 대한 나의 지식은 일반적인 교육 수준에 그쳤다.

내가 의구심을 다 표현하기도 전에, 노인은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알다시피 모두가 에기르식 학술 보고를 들을 수 있는 건 아니야. 네가 말해야 할 건 시본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들이야.

이 물건은 수집품으로 파는 건데, 충분히 신기한 내력이 있어야만 좋은 가격에 팔 수 있어.”


내가 떠나는 날까지 에기르는 시본를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명명하는 방법을 구상하지 못했다. 이런 생물의 다변성으로 인해 전통적인 방법은 낡아빠진 게 되어 버렸고, 나는 눈앞의 이 기이한 갑각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조차 몰랐다.

그러나 노인은 다시 한번 내 걱정을 가볍게 넘겨 버렸다:

"과학적 분류법은 잊어버려. 이베리아에서는 '빛나는 스파이크 아머비스트'라고 불러야 해."


나는 노인이 진짜 에기르 사람인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아마 모자 밑에 육지 종족의 털 달린 귀가 숨겨져 있을 것이며, 단지 내가 볼 수 없을 뿐일 것이다.

나는 그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다.

에기르의 이야기는 존재의 의미, 행위의 가치, 인간 본성의 경계에 대해 논한다.

알 수 없는 해사의 갑각에 발음하기도 어려운 이름과 기괴한 사연을 꾸며내는 것은 언어와 글의 낭비일 뿐이다.

그날 오후 나는 시내에서 물건과 돈을 바꿀 수 있는 "전당포"를 찾아 들고 다니던 수맥 측정기를 육상의 화폐로 바꿔 에기르인들의 집단 거주지를 찾았다.

육상인들이 언어를 망치는 헛소리만 듣고 싶어 한다면, 적어도 에기르인들에겐 고향에서 온 이야기가 필요하다.


동포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으며 대부분의 상인은 여러 에기르인들의 거주지의 위치를 자세히 알고 있었다.

피난하여 뭍으로 올라온 사람들은 충분한 설비와 도구를 가지고 갈 겨를이 없었고, 이곳엔 선진적이고 원시적인 생활 방식이 공존했다.

내가 도착했을 때, 마을에는 해저와 다시 연락을 취하기 위한 광케이블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들이 동물의 힘으로 윈치를 당기고, 거친 나무 그루터기에 섬세한 광케이블을 감는 것을 보고 나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마을 관리인인 젊은 에기르 여성이 키가 큰 네발 동물의 등에서 나를 훑어보았다.

그녀가 탄 안장은 버려진 '조력자'를 개조해 만든 것으로 보였는데, 야외 생활 유닛의 도르래는 발안장으로 사용되었다.

그녀는 나에게 들어가라고 고개를 흔들었는데, 그녀가 웃는 모습이 내겐 낯설었다.

그것은 내가 어렸을 때부터 양육되며 배운 정확하고 우아한 미소가 아니라 어수룩하고 호방한 미소, 육상인의 미소였다.

그때 나는 관리인 여성이 육상에서 태어난 에기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이곳의 사람들이 모두 내 이야기를 들어주려 했다.

저녁 식사 후 사람들이 하나둘 해변으로 와서 모닥불을 피웠고 나는 사람들에게 내 창작물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 이후 아이들은 더 이상 오지 않았고, 육지에서 태어난 에기르인들은 내가 탐구하는 의미와 가치, 인간 본성을 알아듣지 못했고, 거대한 조개껍데기와 멋진 함선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다.

노인들은 여전히 나와 대화하고 싶어 했지만, 내 가장 큰 문제인 생계를 해결해 주진 못했다.

에기르인들이 많이 사는 마을에서도 글쓰기는 안정적인 수입원이 될 수 없었다.

관대한 이웃들이 사정을 듣고 가끔 물건을 나눠 주었지만, 생활은 늘 힘들었다.

나는 매일 밤에 복강을 비우는 펌프가 있는 것처럼 속이 텅 빈 통증을 느끼며 깨어났다.

나는 인생 전반에 걸쳐 "배고픔"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내 사고를 교란하지는 않았지만, 생각을 점차 사치로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마을 대부분의 사람은 경작이나 수공업과 같은 반복적인 기계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이베리아 왕가의 지원을 받아 과학 연구를 할 수 있는 에기르인이 일부 있다고 들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소수에 불과했다.


한 달 만에 나는 그 지역 귀족들이 차린 서커스로 돌아가 그 언어를 낭비하는 일을 맡게 됐다.

나는 나 자신에게 밥을 먹여야 한다.

나는 일을 하면서도 에기르에서 가져온 자료를 정리해서 이야기로 쓰고 있다.

누가 이걸 읽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계속 써 나가야 한다.





설정집 쓴 교수가 에기르에 대한 정보는 별로 못 구했는지 떡밥이 풀리기보단 떡밥이 더 쌓이는 느낌이 더 강함.


한섭 정식 번역을 따라 해사는 시본으로, 리틀 핸디는 조력자로 번역함.


두번째 이야기는 말투를 어떻게 번역해야 할 지 고민이 많이 됐는데 선생이 옛 제자에게 질문하듯 독백하는 거라 반말과 평서문을 섞어 쓰는 걸로 번역함. 그래도 좀 어색할 거 같긴 한데 양해해주면 ㄱㅅ


세번째 이야기와 관련된 이야기를 좀 하면



도시 이름 헤르쿨라네움은 폼페이로 유명한 79년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멸명한 고대 로마의 도시 헤르쿨라네움에서 따왔음.

일반적인 인식과는 좀 다르게,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인근 지역 사람들 대부분이 산 채로 화살쇄설류에 파묻힌 건 아님.

도시에 거주하던 사람들 대부분은 해안가로 도망가 배를 타고 도시를 탈출할 수 있었지만, 일부 미처 대피하지 못한 주민들이나 해안에서 배를 타려 기다리다 고열과 화산쇄설류에 덮쳐져 사망한 주민들의 흔적이 뼈와 공동의 형태로 남아 있는 게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석고상들임.


헤르쿨라네움에선 해안가에서 수백 구의 시체가 발견됐는데, 역시 배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화산에 휩쓸린 흔적으로 보임.

특히 폼페이보다 헤르쿨라네움에 쇄설류가 더 많이 유입됐는데, 폼페이는 4~6m 가량인 데 반해 헤르쿨라네움은 20m에 가까운 쇄설류가 퇴적된 곳도 있을 정도임.


에기르에선 헤르쿨라네움 화산 분화 규모를 4 정도로 추정했는데, 실제 베수비오 화산의 분화 규모는 5 정도였음.


또 에기르의 단열 돔을 설계한 불카누스가 언급되는데 잘 알다시피 불카누스는 그리스 신화의 헤파이스토스가 로마 신화로 유입되면서 바뀐 이름으로, 불의 신이고, 아이러니하게도 실제 79년 베수비오 화산 분화 당시 불카누스를 기리는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고 함.



이번 설정집에 나오는 이야기들에서 에기르가 고대 로마식 이름과 지명을 사용하고 베수비오 화산 분화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것을 볼 때 전설 속 물에 잠긴 도시 아틀란티스와 고대 로마에서 모티브를 딴 지역임을 알 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