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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커피요."
"응. 고마워."

그렇게, 500일이 지났다. 그녀가 아무 말 없이 날 떠난 게.
그렇다. 500일이 지났다. 그녀가 이곳으로 다시 돌아온 게.

"음. 스틱 설탕 한 봉지에, 크림 많이... 아직 기억하고 있구나?"
"...그야, 뭐..."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 것이 느껴진다. 그나마 헬멧이랑 후드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 해도, 목소리랑 기분은 분명 감추지 못할 것이다. 지도자의 입장으로서 감정을 이리 쉽게 드러내선 안 되지만, 지금 이 순간은 매 1초마다 터져 나올 거 같은 기분을 간신히 억누르는 것만으로도 버겁다.

"...국장이 됐다는 소식은 들었어요."
"응? 아. 소식 들었어? 하긴, 시간이 꽤 지났으니 그럴 만도 하려나."

지금은 저 얇아 보이는 소재의 사복을 입고 있지만, 용문에선 분명 훈장이 주렁주렁 달린 제복을 입고 있을테지. 국장 진급 자체도 작년 때 전달자들을 통해 들은 바로는 이미 내정자로 지명되었다고 했으니, 사실상 미뤄져 왔던 진급이 비로소 올해 와서 이뤄진 셈이다. 그렇다 해도 이동도시 하나의 치안을 총괄하는 직위치곤 여전히 지나치게 젊은 나이라는 것도 변하지 않지만.

"일은 어때요?"
"음... 국장도 생각보다 별 거 없어. 책임이 조금 무거워지고, 걱정거리가 늘어났다는 정도려나?"

준 국장일 때도 그렇게 바쁘고 힘들다고 전화 때 칭얼거렸으면서. 괜한 허세를 부리는 거 같아 보이지만, 그런 것치고는 얼굴빛은 좋았다. 일에 적응을 끝마친 걸까? 아니면, 나에게 보여줬던 그 모습이, 설마...

"아, 혹시나 말하는데... 난 근위국을 인계받은 거지, 첸의 대타 같은 게 아니야! 그 바보 녀석이 돌아온다고 해도 엄연히 날 '장관님'이라 불러야 한다고!"
"...누가 뭐래요?"

전 용문 치안국 국장 웨이옌우의 조카이자 전 용문 고위경찰. 그리고 현 로도스의 정예 오퍼레이터, 첸 훼이지에. 로도스에서의 코드네임은 첸. 내 눈앞에 있는 그녀의 한때의 라이벌이자, 또 다른 강력한 차기 용문 국장 후보였다. 

용문 및 체르노보그 사건 이후로 경찰을 관두고 로도스로 이직하고 나선 아무 의미 없어졌지만, 그녀의 명성에 비해 스와이어는 용문 경찰로서의 입지가 근소하게 뒤떨어졌었으니 저런 반응도 나올 법하다. 실제로 근위국 간부진들 사이에서도 말이 많았다고 들었고. 여러모로 라이벌에 대한 컴플렉스는 여전한 거 같아 입꼬리가 살짝 씰룩거렸다.

"독립하고 만든 시에스타의 워터파크 사업은 잘 되어가나 보네요. 이렇게 로도스에 다시 올 정도면."
"뭐야. 왜 다 알고 있어? 설마 나에 대해 정보라도 캐고 다닌 거야?"
"...주변 사람들이 말해준 거일 뿐이에요."
"그래? 흠... 당신이 하는 말이니 믿어줄게."

물론 내가 종종 정보를 요구했던 것도 있지만, 엄연히 근황 정도다. 사람을 스토킹하는 것 따위에 관심 없다.

스페셜리스트 오퍼레이터 스노우상트를 통해 들은 바로는, 작년 9월을 기점으로 스와이어는 자신의 가문인 스와이어 가문으로부터 독립했다고 들었다. 듣자 하니, 가주인 할아버님에 대한 선전 포고였다고 하던가. 엄청 멋졌다고 나불거리는 스노우상트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명하다. 

"가족의 기업과는 거리를 두고 있긴 하지만, 당신 말대로 개인 사업 몇 가지는 아직도 하고 있어. 성장률도 좋고. 특히 무역 회사 쪽은 '사업 파트너'가 영업을 잘 뛰어주고 있거든."
"..."

그녀가 말한 단어 하나가 직접적인 물리력이 생기듯, 심장을 억세게 쥐는 듯한 감각이 느껴져 왔다. 그 '사업 파트너'가 누구인지, 매우 잘 안다. 로도스에서도 일한 적이 있고, 나랑 사이도 괜찮았던 '소년'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시간이 지났으니 이젠 '남성'인가.

그 사람을 왜 굳이 언급하는 걸까. 나보고 엿이라도 먹으라고 확인 사살을 하려는 걸까? 안 그래도 꿈자리가 사나워서 기분이 잡치는데, 지금 한 층 더 기분이 다운되는 것 같았다.

"...국장을 하면서도, 가족에게서 독립하고 사업까지 할 여유가 되나 보네요?"
"물론 초창기엔 힘들긴 했지. 하지만 원래 개인 사업이라는 게 그런 거 아니겠어? 거기에 이런 방법으로 용문에 더욱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면, 마다할 필요가 없잖아?"

참으로 한결같은 기조에, 허탈한 듯이 한숨을 쉬었다. 처음 만난 이후로 어느새 3년이 넘게 지났는데, 아직도 저 지극한 고향 사랑. 참으로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베아트릭스 스와이어는 용문의 딸이야. 박사. 행동 하나하나가 용문을 향한 이득이 되도록 노력하고 있지.]

몇 년 전 그 크레이지 녹색 필라인이 내게 한 말이 새삼 떠올랐다. 그 자식이 한 말이 설마 지금까지도 이렇게 내 가슴을 뚫는 비수가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설마 몇 년 전부터 이 일이 있을 것을 예상이라도 한 게 아닐까하는 생각에, 등골이 살짝 서늘해졌다.

"오히려 말이야. 할 일을 깨닫고, 무엇을 놓아야 하는지를 깨달으니까, 그 무섭던 할아버지도 더 이상 안 무섭게 느껴지는 거 있지? 자신이 두려워했던 힘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두려움을 이겨냈다고 할 수 있는 건가 봐. 안 그래?"

새삼 하나도 안 변한 저 모습이 대단하다고 느꼈다. 최근 1년 반 동안의 나랑은 달리, 그녀는 멈추지 않고 저 앞으로 계속 걸어가고 있었다. 인간으로서의 존경심이 살짝 싹을 틔웠지만, 그 싹을 짓밟을 규모의 '이물감'이 내 머리와 가슴 속에서 증기를 일으켰다.

할 일을 깨닫고, 무엇을 놓아야 하는지 깨닫는다고?

'할 일'은 뭐고, '놓아야 한다'는 게 대체 뭐지?

주어랑 목적어를 언급 안 했으니 모른다. 그렇기에, 더욱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혹시'라는 단어가 포자처럼 머릿속을 잠식할 것만 같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지레짐작하지 말아야 하는데. 이성이 억지로 멱살을 잡아보지만, 그 이성의 손길을 뿌리치고 '어떤 감정'은 차근차근 내 마음속의 끈을 갉아 먹기 시작했다.

"... 저기, 박사. 듣고 있어?"

시야조차 어두워지는 게 느껴질 때, 눈앞에서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에 살며시 고개를 들어 올리니, 뭐하고 있냐고 핀잔을 주는 것처럼 살짝 눈살을 찌푸리는 그녀가 있었다.

진정하자. 이건 공적인 자리다. 눈앞의 그녀는 그저, 로도스에 온 비즈니스 제안자일 뿐이다. 사적인 감정은 버려야 돼.

"요즘도 과로하는 거야? 로도스의 규모도 커졌는데 일 좀 대신해줄 후임자 몇 명 정도는 알아보지."

대답 대신에 눈앞에 있는 식은 커피를 들이켰다. 평소에 마시는 단맛이 오늘따라, 유독 메딕 오퍼레이터 히비스커스가 만든 음식보다도 못할 정도로 구역질이 나는 맛이었지만, 애써 삼켰다.

커피잔을 내려놓고 다시 시선을 눈앞에 있는 '고객'에게로 옮겼다. 고급스럽고 얇은 검은색의 원단에  금색으로 자수 놓은 유니폼. 그 위로 걸친 흰색의 민소매 외투와 검은색의 숄더 로빙. 근위국의 간부로서 일하던 때의 복장과 거의 비슷한 기조다. 그렇기에 방금 봤을 때 수영복과 정장을 반쯤 섞었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겠지.

생각해 보니 그녀의 수영복 차림을 직접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던가. 서로 간에 업무가 바쁘다 보니, 단말기 속 사진 정도로만 보는 게 고작이었다. 2년 전의 내가 그렇게 기대했던 그녀의 수영복 차림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보게 되니 딱히 기쁘다거나 할 감상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의 심정이 느껴진다고 해야할까.

"...수영복. 어울리네요."
"응? 아, 이거? 맞아. 수영복인 겸에, 혹시나 '활동'이 있을 때 편하게 움직일 수 있게 주문제작한 거야."

휴가인 중에도 일할 가능성을 염두에 둔건가. 워커홀릭도 정도가 있지, 라고 하기엔 나 역시 비슷하기에 할 말은 없다.

"이 브랜드 옷에 관심 있어? 당신이 원한다면 세트로 맞춰줄 수도 있는...아."
"..."
"...미안. 내가 좀 눈치가 없었네."

안 그래도 어색한 분위기가 더욱 가중되어 속이 쓰리기 시작했다. 자신이 어떤 실언을 했는지 눈치챈 듯, 스와이어는 챙이 넓은 모자를 손가락으로 꾹 누르며 자기 얼굴을 살며시 가렸다. 후드와 헬멧에 가려졌지만, 분명 저 말을 들은 순간 내 인상이 험하게 바뀌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야 저 제안은, '지금의 우리'에겐 전혀 어울리지 않은 것이었으니까.

"..."
"..."

어색한 정적은 한동안 지속되었다. 1시간 같은 1분이 지나는 동안 들리는 건, 서로 간에 커피를 마시는 소리와 천장에서 가동되는 냉방 시설의 모터 소리뿐. 우리 사이에 그 이상의 대화가 흐르지 않았다.

"...박사."

그 정적을 어렵게나마 다시금 부순 건, 그녀 쪽이었다.

"사실 당신에게, 말할 게 있어서 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무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렸다. 문이 열리고 건장한 체격의 한 여성이 성큼성큼 우리에게로 걸어왔다. 단국의 속담에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했는데, 방금 언급했다고 이런 기막힌 타이밍에 올 줄이야. 

아니다. 종족을 생각하면 용이라고 해야 하나?

"아미야한테 들었는데 설마 진짜로 왔을 줄이야."

뚱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며 내 반대편 소파에 앉아 있는 여성을 노려보는, 남색 머리를 가지런히 양갈래로 묶은 용족 여성. 조금 전까지 구설에 올랐던 로도스의 정예 오퍼레이터 첸이다. 복장을 평소와 달리 가볍게 입은 걸 보아하니, 시에스타에 정박한 김에 바캉스라도 즐기려는 모양이다.

"...너도 양반은 못 되는구나. 첸 훼이지에."
"스 아가씨에게 듣고 싶진 않은데. 아니, 이젠 스 장관님이라고 불러줘야 하나?"
"험한 말 나오기 전에 그만하지? 나름 공석인 자리인데."
"흥."

생각해 보니,  3년 전에도 이런 비슷한 일이 있었지. 그때는 의자까지 집어던지고 싸웠던 거 같은데, 역시 30을 넘겨서 그런가? 두 사람 다 나름 점잖아진 것이 느껴졌다.

"박사. 지금 나보고 30살이 넘었다고 이상한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니겠지?"
"...안 했어요."

정정. 점잖아진 건 맞지만, 다른 걸로 민감해졌다. 특히 지금 도끼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는 첸은 특히. 얼마 전에 혼기가 어쩌고 하면서 다른 여성 오퍼레이터랑 술마시면서 투덜거리는 걸 들었긴 했다만, 저 정도로 민감해질 사안인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큼큼. 아무튼, 잘 됐어. 마침 두 사람 다 모였네."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스와이어는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 두 사람을 교차하며 응시하였다. 

"내가 여기 온 건, 비즈니스도 비즈니스지만, 두 사람에게 부탁할 게 있어서야."

핸드백을 뒤적거리더니, 그녀는 나랑 첸에게 무언가를 휙 하고 집어던졌다. 허둥지둥 양손으로 받아서 확인해 보니, 문패 번호로 추정되는 플라스틱 바(bar)가 달린 은빛 열쇠가 내 손에 있었다. 바에 써져 있는 이름을 보아하니, 어느 호텔의 객실의 것이었다.

"두 사람 방은 잡아놨어. 자세한 내용은, 와서 이야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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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정예화 대사 : 국장도 생각보다 별거 없어. 책임이 조금 무거워지고, 걱정거리가 더 늘어나서 첸을 더 이해할 수 있게 된⋯⋯ 아, 다시 한번 말하는데, 난 근위국을 인계받은 거지, 첸의 대타 같은 게 아니야! 지금 그 바보가 돌아온다고 해도 날 '장관님'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2차 정예화 대사 : 가족의 기업과는 거리를 두고 있긴 하지만, 개인적인 사업 몇 가지는 아직까지도 경영하고 있어. 이런 방법으로 용문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 수 있다면야 굳이 피할 필요는 없잖아. 오히려 해야 할 일을 깨닫고 나니까 할아버지도 별로 무섭지 않게 느껴지는 거 있지? 자신이 두려워했던 힘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두려움을 이겨냈다고 할 수 있는 건가 봐. 안 그래?


신뢰도 터치 대사 : 이 브랜드 옷에 관심 있어? 세트로 맞춰줄 수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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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잘 보냈냐 명붕이들아. 뱃사람 명붕이에겐 휴일 따위 없다. 주말이고 휴일이고 명절이고 나발이고 언제나 항해한다... 슬프다...

근데 그 와중에 회사에서 다른 배에 2등 항해사 결원이라고 나 발령보내버림... 담주에 하선해서 다담주에 다시 승선할 거 같은데... 거기 생활 적응할 거 생각하면 글쓰는 거 잠시 쉬어야 할지도...


본편 내용으로 넘어가서, 슬슬 내용 시동 걸리기 시작했다. 다음 편부터는 무대가 시에스타에서 일어날 예정. 


그거랑 별개로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두 사람인 만큼 불편한 기색이 역력한 분위기가 나오도록 묘사해봤는데, 잘 됐는지 모르겠네. 특히 원본 대사 자체가 너무 드라이하다 보니 어떻게든 재해석시키느라 머리 좀 쓴 거 같음. 신뢰도 터치 대사를 맛도리 있게 써먹은 거 같아서 난 만족.


새벽 4시에 당직 끝나고 7시반에 나고야 입항 끝나고 지금 퇴고가 끝나서 이렇게 글 올려본다. 다음 글도 가능한 빨리 써와볼게.


피드백과 감상은 언제나 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