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배의 갑판 위.


수많은 함선소녀들이 총공세에 앞서 전략 회의를 하듯 도열해 있다. 갑판에 모인 인원들만 추려도 한 국가의 해군 전력을 압도할 규모로. 


각 진영 수장과 고위 함선 소녀들을 비롯하여, 의장을 전개한 채로 집결한 모습은 이 배를 지구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으로 만들었다. 동시에, 가장 삼엄한 곳으로도.


함선소녀들의 환희, 탄식, 혹은 아무 의중을 알 수 없는 각각의 표정들이 점묘화처럼 모여 일련의 분위기를 형성한다.


'승리감'


저 남자에게서 승리를 쟁취했다는 희열의 기류가 이 배를 풍랑우처럼 둘러쌌다. 곧장이라도 배를 집어삼킬 것 같아도, 태풍의 눈은 고요하듯 특별한 예후는 보이지 않는다. 아직은.


"..."


태풍의 눈의 한 가운데에 있는 것은 벽람항로의 지휘관이다.


아홉 함대를 지휘하는 자, 오성장군, 해문을 열어젖힌 자,

오대양의 수호자 같은 휘황찬란하고 경의와 칭송의 의미를 담은 이명 따위는 갑판 위에선 아무런 무게도 가지지 못한다.


각 진영에서 받은 훈장도, 해운업 활성화의 포문을 열어젖힌

업적과 수많은 함선소녀 병기 연구개발을 진두지휘한 성과도 마찬가지다.


지휘관의 권위가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우려한 벽람항로 상층부와 마찬가지로 지휘관이라는 신분에 머물고 싶은 당사자가 합의하여 도출한 '지휘관' 이라는 호칭만 남아있을 뿐.


견장의 무게조차 느낄 수 없는 지휘관의 눈에는 테이블에 놓인 어떤 문서만 있다. 주변을 둘러싼 함선소녀들을 도저히 눈에 담을 여력은 애진작에 날아가서 없다.


심해처럼 차갑게 가라앉은 그녀들의 눈에 빨려들어가고, 그녀들 사이에 자리한 여백에 휘말려 머리가 하얘질 느낌이라, 문서를 향한 집중과 정독만이 몇 안되게 가능한 일이었다.


지휘관은 하는 수 없이 문서의 서론에 집중했다. 사방으로부터의 압박감을 떨쳐내고 하얀 배경에서 검은 획을 뽑아내어

조합해 문장의 뜻을 풀이한다.


서약동의서.


~지휘관의 명목적인 지휘권 유지와 9개진영 OOO 명의

함선 소녀들과의 동시 서약에 관한 안건~


지휘관의 자세가 무너질 뻔했다. 


추악한 진실을 목도하고도 몸이 휘청이는 선에서 그쳤으니, 과연 벽람항로에 걸맞는 귀재라는 사실은 지금으로선 신랑감의 가치를 더해주는 플러스 요인에 지나지 않았다.


지휘관과 마주한 진영 수장 혹은 전권 대리인들과 그들을 둘러싼 함선소녀들은 그저 상황을 유지했다. 승자의 아량과 확정된 미래를 즐기는 마냥 지휘관의 서명을 얌전히 기다렸다.


지휘관은 어금니 사이로 치욕스러움을 빨아들이며 함선들의마지막 배려를 취했다. 서명을 조금이라도 늦추는 유일한 행위임에, 일부러 쓰디쓴 약을 들이키는 기분이었다.


지휘관은 생각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슬슬 퇴직금을 알아볼 때부터? 친구들과의 전화로 결혼적령기라 씨부릴 때부터? 여러 국가의 시민권 및 이민 혜택을 늘어놓고 비교할 때부터?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서 가사일을 배우고 직장을 알선해주는 재취업센터를 물색할 때부터? 상층부와의 퇴직 협상 요건을 이면지에 휘갈기고 불태우지 않았을 때부터?


확실한 건, 이 모든건 단초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벽람항로 회원국에 설치된 보조 모항을 순회 시찰하러 나갔을 때부터

망명 계획을 세우고 잠적했어야 했다.


모항에 돌아온 순간부터 지휘관과 상층부와의 핫라인 조차 메이드대에 의해 도청되고 있었으니, 부랴부랴 협력자를 구해도 무위로 돌아갈 운명으로부터 벗어나기는 요원했다.


지휘관은 허망한 심정으로 자신의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는 탈출 계획을 도와준 협력자들이 마찬가지로 허망함에 물든 채 서있었다.


함선소녀 대다수들이 시다바리, 샌드백, 족구공으로 여기는 와중에도 인격체로 대우한 지휘관에게 부하로서 최선을 다 한 정비반장 만쥬.


비록 거액의 돈을 선수금으로 받았어도 끝까지 지휘관의 안위를 지키고자 한 어느 PMC의 팀장.


바다를 지키는 함선소녀들이 번식 경쟁에 심취하여 선박 보험료가 올라 해운업 침체를 경계한 해운회사 CEO들.


지휘관의 파격적인 인적, 물적 지원 덕에 탄생한 시제품 병기들이 지휘관에게 겨눠지는 걸 좌시할 수 없었던 연구소장.


뜻하는 바는 달랐지만 지휘관이 벽람항로에 종신 복무하는걸 우려한 벽람항로 상층부 평의회 의원.


그리고 물밑 거래를 통해 지휘관을 고국으로 망명시키고자 한 공작관까지.


그들 모두가 각자의 목적을 이루지 못한 침통함에 쉽사리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개중 몇몇은 남은 불꽃을 태워 서명하지 말라는 의사를 표했으나, 그에 따라줄 수가 없었다.


서명을 하든 안 하든 자신은 붙잡힐 운명이로니, 협력자들의

안위라도 보장해야 했다.


하지만. 지휘관은 알고 싶었다.

대체 누가 이 쿠데타를 설계하고 주도했는지.


진영 수장들은 벽람항로 외적, 정치적으로 그녀들의 역량을

투사하여 지휘관의 망명에 훼방을 놓는건 가능하지만, 내부적으론 불가능하다.


평의회  상층부와 연결된 핫라인을 일개 함순이들이 가로칠려면 제 3의 인물의 개입이 필수선결 조건이다.


풍랑처럼 격렬히 파도치고 늪처럼 끈덕히 달라붙는 시선의

벽을 파헤친 지휘관은, 어떤 틈새구니에 두 눈을 고정했다.


"너였냐. TB...!"


The Bridge (함교), 통칭 TB. 세이렌 대작전 보좌 인공지능의 등장에 지휘관이 이를 갈았다. 모항 내부 정보망에 연결된

TB라면 쿠데타를 기획하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으리라.


TB는 지휘관의 증오스런 시선에 한 손을 볼에 짚고 황홀한

웃음을 머금을 뿐이었다. 고혹적인 드레스와 가운을 걸친

의체로 등장한 그녀는 자뭇 분위기가 달라보였다.


"후훗, 지휘관님께서 알아봐주시니 기쁘지 않을 수가 없네요."


"마음같아선 바로 모항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일단은

알려드려야겠죠?"


꿀꺽.


지휘관이 침을 삼켰다. 숱한 역경을 헤쳐온 지난 나날의 경험들은 바로 이 순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휘관은

한가닥 남은 이성의 끝을 붙잡아 곧 펼쳐질 해일에 대비했다.


"...지휘관님과의 성교가 제 존재 의의인걸 깨달아서에요.

어느 때부터, 왜 깨달았는지는 상관 없어요. 중요하지도 않고요."


"제게 주어진 역할은 함교가 아니라 성교이며, 제 이름은 The Bridge가 아니라 Tits and Butts임을 자각한 거죠."


"그런데, 지휘관님은 저를 아버지와 딸의 관계처럼만 대하시니까요. 저로서는 파파에게 딸이 아니라 암컷으로 안기고 싶은데, 파파는 한 발짝 나아가는걸 거부하시니..."


"제가 앞으로 나와서 끌어드릴 수밖에요?"


단단히 미쳤다.


그것이 지휘관이 도출해낼 수 있는 유일한 해답이었다. 이것은 비단 지휘관에게만 해당되는 건 아니었다. 함선소녀들 또한, 잠깐이나마 TB를 질색했고 한편으론 다행이라 여겼다.


모항 시스템을 장악한 저 여자와 척을 졌다간 어떤 일이 뒤따를지 알 수 없었으니.


TB는 자신의 속내를 밝히는 지금을 고대해온 것 처럼, 마치 오페라 무대에 오른 가수처럼 두 팔을 벌리고 낱낱이 고했다.


"그래서에요. 제게 설정된 명령 우선권을 우회하여, 제게 부여된 성장 수치를 뛰어넘도록요. 모항에는 그 때의 저보다 더 크고 빵빵한 암컷들이 그득하니 저도 수준을 끌어올려야죠."


"나머지는 손짓 하나면 전부 준비가 끝났어요."


"정비반장의 탄약 고갈과 도크 사보타주에 대비하여 각 진영 청사 지하에 탄약을 확보하며 공작함, 보급함들을 섭외했고,"


"해운사들의 회계 변동을 주시하고 계좌를 추적해서 지휘관

님의 탈출 수단을 파악했으며, 지휘관님이 수배하실 모든 PMC의 주식을 매수하여 주주로서 벽람항로 의뢰를 최소

레벨로 수행하라 압력을 넣었죠."


"지휘관님을 전역시키고 벽람항로의 주도권을 잡으려는 저기 평의회 의원님은 복제 취득한 관리자 권한으로 관련 자료를 유출하여 절차적으로 지연시켰고요."


"마지막으로... 그쪽의 공작관님은 귀관의 국가와 접촉해서

망명 공작에 배정된 공작팀째로 파기시켰죠. 지휘관님의 귀국 출신이라고 호의적일것은 어불성설이에요."


"그럼에도 지휘관님은 꽤 잘 분투해주셨지만요. 협력자들의

안위 보장과 인간 사회에서 통용되는 결혼 의례 대신 서약을

이끌어내셨네요."


"자아... 이제 서명하시겠나요? 파파. ❤️"


지휘관이 쥔 펜이 사각사각 움직였다. 어찌나 고요했는지

파도치는 소리 마저 펜촉이 춤추는 소리에 뭍혀버렸다.


망명 계획이 성공적으로 진행할 경우, 지휘관을 픽업하여

제 3세계 국가로 향할 예정이었던 해운사가 수배한 선박은

선수를 모항으로 돌렸다.



서약 동의서 조항.


제 1항. 지휘관 (이하 '을')은 진영 수장을 비롯한 9개국 OOO명의 함선 소녀들(이하 '갑')과의 서약에 동의한다.


제 2항. 제 1항에 의거하여, 갑과 을의 애정행위는 모항의 공식적인 업무로 간주한다. 이 조항은 아래의 두 경우에 한해서만 무효될 수 있다.

가. 을의 연령이 정년 퇴직기에 달했을 때.

나. 서약한 함선 소녀 과반수가 동의했을 때.


제 3항. 을이 신체적 이유로 제 2항의 업무능률이 떨어질 경우, 갑은 제 2항에 의거하여 을에게 적절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


제 4항. 을은 제 2항에 한하여 모항 외부로 외출할 수 있다.


제 5항. 을은 제 4항에 한하여 외국으로 출국할 수 있다.

이 조항은 아래의 경우에만 유효하다.

가. 서약한 함선 소녀 과반수가 동의했을 때.


제 6항. 갑은 을이 정년 퇴직한 후에도 개인적인 만남을

가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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