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해…….”

 

처리를 마치고 깔끔히 정돈된 사류의 산은 내가 쌓아 올린 바벨탑이요오늘은 그만 놀아도 좋다는 일종의 증거였다감탄이 절로 나와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흘리고 말았다.

 

이어 기쁨과 허무감그리고 약간의 고됨이 함유된 한숨과 함께 의자에서 미끄러지듯 움직여 소파에 몸을 던진다단순한 행위였지만참으로 행복했다.

 

이렇게 편하게 누워있는 시간이 얼마 만일까사실 일을 미루고 미루다 이런 꼴이 된 거지만 하여튼중요한 건 내가 일을 다 끝냈다는 사실 아닌가나는 기뻐할 자격이 있었다.

 

…….”

 

그렇게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기를 한참슬쩍 고개를 돌려 책상 위에 그것을 보았다안경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아카시가 주고 간 안경.

 

단순한 수식어 하나가 붙었을 뿐인데 주는 느낌이 이렇게나 다르구나새삼 녹조단또년의 위상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손을 뻗어 아슬아슬하게 안경을 주워 들었다.

 

그러니까이게…….”

 

아카시는 이것을 호감도가 보이는 안경이라 칭했다함선 소녀에 특정하여 나에 대한 호감도를 수치화하고그것을 숫자로 나타내는 물건.

 

더불어 약간의 속마음도 보인다 하였다한 마디로함선 소녀들이 나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있는조금 이기적인 장비라 할 수 있었다.

 

사실 며칠 전에 받았던 건데업무가 밀려 그것에 치중하느라 적당히 책상에 던져뒀다 이제야 떠올렸다이리저리 둘러봐도 겉모습은 평범한 안경과 다를 바 없었다.

 

당연하지만아카시와 나 이외에 아는 사람은 없다하다못해 만쥬마저도허나 이상할 정도로 사용하기 꺼려지는 까닭은 역시.

 

……남의 마음을 함부로 엿보는 건 썩 불편하단 말이지.”

 

누구에게나 감추고 싶은 치부는 존재하기 마련이다당장 나만 하더라도 아무도 읽어보지 않을 백과사전 421페이지에 비상금을 숨겨두지 않았는가.

 

비슷한 이유로함선 소녀들 역시 내게 감추고 싶은 무언가는 반드시 존재할 것이다아무리 친밀한 관계라 한들드러내기 껄끄러운 것도 존재할 테니까.

 

그러니까이런 건 사용하면 안 돼.”

 

라고평소에 나라면 분명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허나 공교롭게도최근 들어 함선 소녀들이 나를 보는 시선이 약간 수상하다무언가무언가붉은색으로.

 

그리고 결정적으로솔직히 말하면 궁금했으니까.

 

상기하며 천천히몸을 일으킨다육체는 고된 업무에 지쳤지만정신은 이상하리만치 상쾌했다.

 

아무래도 곧 일어날 일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득 찬 것이라입꼬리가 올라간 것이 그 증거였다여러모로 즐거운 시간이 될 거 같았다.

 

망설임 없이안경을 쓴다평소에 종종 멋 부린다고 선글라스를 쓴 사례도 몇 있으니 대놓고 수상하게 행동하지 않는 이상 의심받진 않을 거다벌써부터 여러모로 기대되었다.

 

한 걸음피로를 날려버리는 두 걸음입가를 올리며 세 걸음어느새 나는 문 앞에 도착해 있었다밖으로 나서는 순간부터 시작이다과연함선 소녀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과연 그들이 나를 생각하는 마음호감도는 낮을까높을까혹시나 웃는 얼굴로 내게 역심을 품고 있진 않을까불안한 마음도 따라왔지만이러한 짓거리를 하는 이상 전부 감내 해야 한다망설임 없이 문을 열었다.

 

복도는 고요했고이는 곧 지금 내가 서 있는 공간에 나 이외의 존재는 없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암시했다덕분에 천천히 걷는 와중에도 생각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눈을 감는다우선적으로 해야 하는 것은 계획 수립정확히는 어디를 가장 먼저 갈지 결정하는 것이었다.

 

이 모항에는 썩 많은 세력이 존재하는 만큼계획적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조금 불편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었으니까.

 

생각은 한참이나 이어졌으나다행히 건물을 나서기 전까지 사고를 마칠 수 있었다조용히 눈을 떴고이렇게 말했다.

 

그래처음에는 역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