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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고....말씀이신가요....?"

"맞아."


청천벽력이었다. 그러나 벨파스트는 애써 미소를 지어보였다.


"훗.... 저의 사랑스러운 주인님. 저 벨파스트는 그 정도로는 흔들리지 않는답니다."

"......"


지휘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진지한 표정으로 벨파스트를 가만히 노려보다가 결국 눈을 감았다.


"알았어. 손에 든 그건?"

"네. 홍차를 내왔습니다. 그리고, 서류는 이쪽에 정리해두었습니다. 느긋하게 용무를 봐주시길."

"응, 고마워."

"그럼."


벨파스트는 양쪽 치마 폭을 들어올리면서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

허리를 숙여 인사할 때는 언제나처럼 젖가슴이 추처럼 늘어지며 풍만함을 과시했다.

또한, 목의 초커에 얽메인 사슬이 찰랑거리며 지휘관과의 주종관계를 표시했다.

억압된, 그리고 무자비한 주종관계를.


'......오늘도 훔쳐보시겠지요.'


이것은 벨파스트에게 야릇한 상쾌함을 주는 비밀스러운 일과였다.

그녀는 은근슬쩍 자신의 야함을 과시했다. 그러면 지휘관은 은근슬쩍 그것을 보고 얼굴을 붉힌다.


그러나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지휘관은 그녀를 쳐다보지 않고 곧바로 업무를 시작했다.


"....물러가겠습니다."

"응. 고마워."


무미건조한 대답만이 귓가에 울렸다.





"주인님. 아침이 밝았습니다."


벨파스트가 커튼을 거두자 방에 환한 빛이 가득 찼다.


벨파스트는 어제의 일을 잊었다.

뭔가 피곤하셔서 그랬을 거라고 짐작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리하여 오늘도 힘찬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는데...


"...벨파스트."

"네, 주인님."


잠에서 깨자마자 지휘관이 보낸 시선은 평소와 같지 않았다.


"오늘 하루 해고야."

"......."


벨파스트는 가슴이 철렁했다.

그녀는 지휘관에게 등을 돌린 채 서 있었다. 그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고서 가슴께에 손을 꼭 모으며 초커의 사슬을 매만졌다.


".....주인님. 저, 벨파스트는 그 정도로 흔들리지 않는답니다."

"......"


벨파스트는 어제와 같은 대답을 보냈다.


오늘은 얼굴을 마주볼 수 없었다.

그저 창밖에서 지저귀는 참새들을 보며 두려움에 떨었다.


"......알았어. 오늘 아침은?"


그제야 벨파스트는 미소를 지으며 뒤돌았다.


"언제나처럼 극상의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곧 내오겠습니다."
"응...."


지휘관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녀를 보는 두 눈에는 여러 감정이 담겨 있었는데, 이상하리만치 씁쓸함이 묻어났다.


"항상 애써줘서 고마워."

"....벨파스트,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그녀는 예를 갖춰 인사했다.

그러나 지휘관은 그 대답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그러지 않아도 돼."

"네....?"

"......."


침묵이 흘렀다.






'어째서.....?'


지휘관이 평소와 달랐다.

눈치 빠른 벨파스트는 당연히 그것을 느꼈다.


'어째서인가요?'


벨파스트는 초커에 달린 사슬을 매만졌다.

이 사슬은 중간이 끊겨 있으나, 마음이 연결되어 있었다.

바로 지휘관의 마음과 이어져 있다.

....고 믿었다.


'주인님의 생각을 알 수가 없게 됐어요.'


평소에는 눈빛만 봐도 꿰뚫어보듯 했다.

손짓만으로도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이제는 펜을 달라는 손짓과 가슴을 손바닥에 올려달라는 손짓도 구분이 가능했다.

무엇이든 알고 있었다.


무엇이든 알아야 했다.


그녀는 지휘관을 위해 태어났다.

주인을 모시지 못하는 메이드에게 가치가 있을까?

벨파스트는 주인 없는 메이드에게는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메이드란 주인이 곁에 있기에 존재할 수 있는, 기생적인 존재기에.


그러나 지금, 그 주인이 메이드를 거부하고 있었다.


'어째서인가요.....'


이유를 알 수 없는 행동이란, 이토록 두려운 것이었다.


'안 돼.'


벨파스트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자꾸만 부정적인 생각이 떠올랐다.

이대로는 급사에 지장이 생길 터. 생각을 전환할 필요가 있었다.


그녀는 정원으로 향했다.


"분홍 장미...."


정원에서 벨파스트가 본 것은 탐스럽게 피어 있는 장미 한 송이였다.

그 정원에는 여러 색상의 장미가 피어 있었고, 이는 벨파스트가 관리하고 있었다.


'언젠가, 이 장미들이 주인님의 손을 통해 다른 분들에게 가겠지요.'


벨파스트는 백만송이의 장미를 선물로 받은 함순이들의 표정을 떠올리며 미소 지었다.


'제가 가꾼 장미가, 지휘관님의 손을 타고 다른 분들에게로.'


그렇게, 사랑이 이어진다.

신기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꽃은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다.

자신을 희생하여 지휘관에게 고백의 설렘을 주고.

그런 지휘관이 건넨 꽃다발을 받은 여성은 행복에 겨워 미소를 짓는다.


벨파스트는 그런 일렬의 과정에서 지휘관이 얻는 행복 그 자체를 소중히 여겼다.

모항에는 수백의 여성이 존재하되, 이들은 단 한 명의 남성을 바라보고 있다.

치정싸움이 안 일어날 수가 없으나, 단순한 질투는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벨파스트는 자신의 노력이 만든 결과물로 지휘관이 더 큰 행복을 얻는 것을 즐겼고, 행복을 느꼈다.


'모름지기 메이드라 함은, 주인님과 영원을 함께하는 것이니까요.'


꽃은 자신을 희생해 연인에게 행복을 준다.

벨파스트도 그러했다.

물론, 벨파스트와 지휘관 사이에도 끈끈한 사랑이 존재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언젠가, 또 이 꽃들로 마음을 고백하시는 날이 오겠죠.'


벨파스트는 꽃을 전해주는 지휘관을 떠올리며 정원을 가꿨다.

그 꽃이 자신을 향했던 적도 있다.

그때의 가슴이 벅차오르는 순간을 아직도 잊지 못했다.

아마도 그렇기에 더 열심히 가꾸는 걸지도 모른다.

그 기쁨과 행복을 모두와 나누고 싶어서.


"후훗."


벨파스트는 장미를 소중히 어루만지며 웃었다.


어쩐지 오늘은 평소보다 더 각별해 보였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세요. 벨파스트가 주인님의 곁에 있겠습니다."


점심이 지난 이후, 벨파스트는 지휘관의 등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일과라고 할 수 있는 일들이 끝나면 벨파스트는 언제나 지휘관의 뒤쪽에서 기다렸다.


".......들어가서 쉬지 그래?"


지휘관이 업무를 처리하면서 물었다. 그러나 벨파스트는 미소 지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주인님께서 필요한 일이 생겼을 때 즉각 대응해야 하니까요. 저는 이곳에 있는 게 좋습니다, 주인님."

"그래?"

"네. 부디, 앞으로의 봉사를 기대해주시길."

"......"


지휘관은 묵묵히 서류를 처리한다. 사각사각 소리가 은은하게 방에 깔렸다.


벨파스트는 이 시간이 좋았다.

지휘관의 넓은 등을 보는 것이.

그가 앞날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힘들어도 묵묵히, 싫은 소리 한 번 없이 자신의 업무를 다하는 성실함이.

결코 귀찮음에 지지 않고 모든 것을 꼼꼼히 살피는 책임감이.


'어쩌면 지금의 주인님을 제대로 알고 있는 건 저뿐일지도 모르겠네요.'


모두가 알고는 있으나 미처 직접 본 적은 없는 이 사소하면서도 중요한 일상은, 벨파스트에게 큰 의미였다.


사소한 서류 한 장이 뭉치면서 거대한 업무가 되는 것처럼.

사소한 추억 한 장면이 합쳐지며 거대한 신뢰와 행복이 된다.

그래서 조금 지루할 수도 있는 이 시간이 좋았다.


"......벨파스트."


문득, 지휘관이 그녀를 불렀다. 평소에 부를 때보다 빠른 타이밍이었다.


"네, 주인님."

"벨파스트는 지금 웃고 있어?"


지휘관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두 눈과 손은 여전히 서류에 고정되어 있었다.


"네....?"

"계속 서 있는 거, 힘들지 않아?"

"...주인님. 저는 주인님을 모시는 메이드이며, 메이드장입니다. 결단코 이러한 것으로는...."

"나는 하루종일 서 있으면 다리가 아파. 무릎이 쑤시고, 발목이 저려."


지휘관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너희라 해도 다르지 않겠지. 하루는 멀쩡하다고 해도 그게 이틀, 사흘... 한 달이 넘어가면 틀림없이."

"주인님....."

"정원에 있던 너를 봤어."


사각거리던 손짓이 멈췄다. 지휘관은 여전히 뒤돌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천장을 보고 있었다.


"기뻐 보였어."

".......네, 기뻤어요."

"지금의 너도, 그런 미소를 짓고 있어?"

"물론입니다, 주인님."

"정말로?"


지휘관이 의심하는 투로 말했다.


"주인님....?"

"난 보이지 않아."


지휘관은 여전히 앞을 보고 있었다.

두 눈은 서류에.

두 손도 서류에.

두 사람 중에 어느 한쪽을 보고 있는 것은 벨파스트뿐이었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이 시간을, 그저 내가 뭐라도 부탁하기만을 기다리면서 버티는 거 아니야?"

"주인님... 그게 무슨....."


벨파스트는 당황했다.

이어져 있어야 할 것이 이어져 있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사슬로 엮여 있어야 할 두 사람의 사이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


문득, 지휘관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벨파스트. 너는 오늘 하루 해고야.


벨파스트는 초커에 연결된 사슬을 매만졌다.

사슬은 짧디 짧았다. 어디와 연결되지 않고 단절되어 있었다.


그 사슬은 언제부터 끊어졌던 걸까.


아니.... 누가 끊었던 걸까?


"설마, 주인님.... 제가 억지로 버티고 있는 줄 아셨던 건가요....?"

"벨파스트는 내 모든 걸 알고 있어. 이제는 내가 눈빛만 보내도 내가 필요한 걸 알아채잖아."

"네... 메이드로써 주인님의 모든 것을-"

"나는 그런 재주가 없어. 미안해."


미안하다는 말이 귓가에 파고들었다.


"벨파스트는 내가 볼 때면 항상 웃고 있었어."

".......물론이에요."

"때로는 그 미소 뒤에 다른 감정이 숨어 있기도 할 테지."

"아, 아니에요! 주인님. 저는 결코....!"

"하지만 해고라는 말을 들었을 때 눈빛이 흔들렸잖아."

"아......"


지휘관의 손이 멈췄다.


"그건 내가 심했어. 떠보려고 했던 말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걸로 분명히 알았어."


지휘관의 손이 떨린다.

벨파스트의 손도 떨렸다.


"벨파스트도, 때로는 날 위해 억지로 미소 짓는구나, 라고."

"주인님!"


벨파스트가 외쳤다. 그러나 감히 다가갈 수 없었다.

보이지 않는 균열이 생긴 듯했다.

바닥이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절벽이 되었다.


"나도 가끔은 지쳐. 때로는 서류를 다 내던지고 보지나 따먹으면서 놀고 싶어져."

"주인님...."

"너희라 해도 마찬가지겠지. 조금 더 강할 뿐인.... 인간이니까. 나와 같은."


완벽한 사람은 없다.

사람이기에 불완전한 것이다.

좀 더 강할 뿐인 존재라 해도 마음은 똑같겠지.


불편함보다는 편리함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런 불편함을 없애고자 하는 욕구가 지금까지 인간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으니까.

세상이 갈수록 편리해지는 건, 그런 불편함을 없애는 작은 도전이 무수히 쌓였기 때문이었다.


"벨파스트. 내가 노력하는 건, 모두의 행복을 위해서야. 왜냐하면, 내가 이 모항을 이끌어가는 지휘관이니까. '모두'라는 틀에는 당연히 나 자산도 포함되어 있어."

"저도 같아요. 저의 역할은 다른 누구도 아닌 지휘관님을 모시는 것이니까요."

"명분을 묻는 게 아니야."


지휘관은 여전히 뒤돌지 않았다.

벨파스트는 괴로웠다. 어째서? 어째서 돌아봐 주시지 않는 거지?


"벨파스트. 만약 네가 하는 일에. 아주 일말이라도. 아주 티끌 만큼이라도 의무나 사명감 때문에 움직이고 있다면....."


지휘관의 손이 떨렸다. 그가 쥐고 있는 깃털펜이 부르르 떨리면서 그의 감정을 대변했다.


'아.....!'


벨파스트는 그가 왜 뒤돌아보지 않는지 깨달았다.


그녀들은 조금 더 강할 뿐, 근본은 눈앞에 있는 남자와 같다.

그러니.....

그 남자 역시, 그녀와 같다.


지휘관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벨파스트가 그의 표정이 두려워 뒤돌아보지 못했던 것처럼.

지휘관도 지금 그녀의 표정이 두려워 쳐다보지 못하고 있었다.


"주인님!!"


벨파스트는 용기를 내어 앞으로 몸을 날렸다.

깊이가 보이지 않았던 절벽을 훌쩍 넘자, 겨우 두 걸음 거리였던 현실이 깨어났다.


벨파스트는 지휘관을 와락 안았다. 따스하고 부드러운 젖가슴이 지휘관의 등을 꾹 눌렀다.

살과 살이 닿고 온기와 온기가 닿는다.


"저는 저의 행동을, 주인님도 당연하게 여기실 줄 알았어요. 저에게는 당신을 사랑하고 봉사하는 게 당연한 일이기에."


장미는 자신을 희생해 꽃다발이 된다.

그렇게 스스로를 희생할 때 반박하지 않는다.


그러나 과연 반박하지 않는 걸까.

아니면 입이 없어서 비명을 지르지 못하는 걸까.


어느 날, 꽃을 따서 꽃다발을 만들던 사람이 문득 생각했다.


이 꽃은, 정말 스스로 원해서 희생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내가 죽이고 있는 걸까.


안타깝게도 꽃은 말을 할 수 없다.

영원히 이 문제의 정답을 알아내지 못할 거다.

그러나 사람은 다르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벨파스트는 지휘관을 꼬옥 끌어안으면서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자랑스러운 저의 주인님.... 저는 당신의 뒷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요."

"벨파스트....."

"조용히 뒤를 지켜보고 있으면, 당신이 얼마나 애써주시는지 볼 수 있기에."

"......."


지휘관의 손의 떨림이 멈췄다.


"좋은 모습만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당신께 걱정 끼치기 싫어서."

"......"

"그게 불안감을 심어줄 줄은 정말로 몰랐어요."


벨파스트가 진심을 전했다.


그저 아끼고 사랑했을 뿐이었다.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그를 보필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역으로 생각하지는 못했다.


지휘관 역시 자신을 희생해서 그녀를 사랑한다는 걸.


"내일은 함께 쉬어요."

"......."

"함께 정원을 걷고, 마주 보고 식사하고, 서로의 눈을 보면서 사랑을 나눠요."

"......"


긴 침묵.


그 끝에 지휘관이 미소를 지으면서 벨파스트의 손에 손을 포개었다.


"지금 바로는?"

".....주인님이 원하신다면."


벨파스트는 미소를 지으며 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것은 그대로 키스가 되었고,

하룻밤의 사랑이 되었다.





"음......"


지휘관이 눈을 떴을 때, 보드라운 살결이 뺨에 닿았다.


"일어나셨습니까?"

"....벨파스트?"


지휘관은 몸을 뒤척이며 위를 보았다. 벨파스트가 젖가슴을 내놓은 채 웃으면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후후... 잠든 얼굴이 무척이나 귀여우셔서 그만 깨우기 아까워서....."


그녀가 지휘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면서 미소를 지었다.

지휘관의 시선은 브래지어가 없어 예쁘게 늘어진 그녀의 가슴에 향해 있었다. 작은 음탕함이 묻어나는 눈빛이었다.


"벨파스트의 무릎베개는 어떠셨나요?"

"부드럽고, 따스하고... 야해."

"그러시다면....."


두 사람의 알몸에는 어젯밤 서로를 격렬하게 탐했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잠깐이지만 마음이 멀어졌었다.

하지만 공백은 짧았고, 그것이 메꾸어진 다음에는 더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언제까지나 흡족하실 때까지 즐겨주세요."


벨파스트가 몸을 숙여 키스했다.


목에 걸린 사슬이 아름답게 찰랑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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