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술은 잘 못 마셔서, 한 잔만 마셔도 취할 정도라.”
아무런 감정도 담지 않은, 아무런 의도를 담지 않은, 그 어떤 생각도 담지 않은, 그저 질문에 대답하기 위한 한 마디.
그 무엇도 문제 될 사항 없었고, 실제로 그러했다. 지휘관의 한 마디는 딱 그 정도의 무게를 담고 있었다.
다만, 발언자의 의도가 어떠하든, 청자가 그것을 어떤 식으로 해석하느냐에 따라.
“……뭐라고요?”
그 파급력은, 가히 천둥과 같아질 수 있다.
이곳은 연회장, 단순히 친목을 다지기 위해, 함선소녀들이 지휘관을 초청한 자리.
물론 앞에 ‘북련의’라는 수식어가 붙는다면 음주의 비중이 조금 늘어나는 등 약간의 차이점이 존재하긴 했지만, 목적은 모두 같았다. 친목 도모.
를 표면상으로 내세운 지휘관 보쌈하기.
이는 구태여 앞에 ‘북련’ 이라는 수식어가 붙지 않아도 일어나는, 암묵적 약속, 아직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만, 지금 중요한 것은 배경이다.
앞서 말한 대로, 이 파티는 지휘관을 보쌈하기 위한 일종의 의식이다. 아직 성공한 적은 없어도, 그런 목적을 위해 모인 여자들이다.
“……술에 아주 약하다는 거구나, 지휘관.”
그리고 사내는, 자신을 잡아먹기 위해 모인 맹수들 앞에서, 스스로의 약점을 드려낸 가련한 먹잇감.
후후후, 차파예프가 웃었다. 평소보다 정확히 두 배 가량 비릿한 미소, 손은 어느새 허벅지에 걸린 수갑을 매만지고 있었다. 지극히 불순한 의도였다.
이러한 행동 변화는 비단 차파예프만의 것이 아니었다. 벌컥벌컥 들이키던 보드카를 내려놓고 지휘관을 바라보는 강구트, 평소와는 약간 다른 눈빛을 취한 아브로라.
또 이미 잔에 술을 따르기 시작한 벨로루시아, 부끄러운 표정을 지은 탈린, 옆에서 사슬을 닦기 시작한 폴타바, 하나하나 나열하면 끝이 없었다.
허나 한 가지, 그들에게 공통된 목적이 하나 있다면.
“그래도 지휘관, 딱 한 잔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응?”
‘아무리 그래도 자리가 자리인데.’ 약간의 콧소리를 섞으며 차파예프가 지휘관에게 술잔을 들이밀었다. 투명한 색, 당연히 보드카였다.
“그러지 말고, 술은 잘 못한다니까 맥주는 어떤가.”
이번에는 러시아의 차례, 의도는 같았다. 잘 보면 표정도 같았다. 음험한 마음마저도 같았다.
“내가 진짜 술은 몸에 안 받아서 그래, 진짜 맥주 한 캔도 다 못 마신다니까?”
“……아하.”
그들의 권유에, 지휘관은 적당한 웃음과 함께, 거절의 뜻을 전했다. 의도는 좋았다. 즐거운 술자리를 망치고 싶지 않았으니까.
허나 이는 함선 소녀들의 더욱 자극하는 발언이 되었다. 당장 보드카를 병째 주워든 강구트의 반응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지휘관 동지! 걱정하지 마라, 본래 처음이 힘들지, 다음은 쉬우니까.”
“맞아, 지휘관 동지, 만약 취하더라도, 우리가 알아서 잘 처리해줄테니까.”
차례로 강구트, 폴타바, 자매끼리 협력하는 참 보기 좋은 모습이었다. 물론 속내는 의상과 달리 지극히 검었다.
“자, 어서, 지휘관 동지, 빨리.”
벨로루시아, 평소의 여유 있는 모습은 어디로 간 건지, 다짜고짜 술을 강권하는 모습은 평소의 그녀가 아니었다. 이는 그녀의 흥분을 나타냈고, 다급함을 나타냈다.
“맞아요. 드셔보시면 생각이 달라질텐데, 한 번만 마셔보세요, 어서.”
여기에 아브로라가 합세, 기류가 달라졌다.
***
“……힘드네.”
하지만 그러한 함선 소녀들의 노력에도 불구, 지휘관이 술을 마시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극도로 흥분한 함선 소녀들끼리 서로 얽혀버린 까닭이다.
덕분에 지휘관은 혼란을 틈타 연회장 뒤편으로 나올 수 있었다. 아마 5분 뒤면 들킬테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하아, 지휘관이 입김을 내었다. 추운 날씨에 뱉어낸 기체는 수증기 되어 하늘로 날아갔고, 그는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소소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아, 지휘관 동지.”
그런 그를 멀리서 부르는 존재, 지휘관이 살며시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사람이었지만, 최근 들어 달라진 외견은 익숙치 않은, 그런 사람.
그럼에도, 저 특유의 하얀색은 익숙한 사람.
“소유즈구나.”
이런 곳에서 볼 거라 예상하지 못한 탓에 반가움은 보다 컸다. 때문에 입꼬리가 올라가는 정도도 보다 컸다.
“분명 연회일 텐데, 어째서 이런 곳에서 계시는지 여쭤봐도 좋을까요.”
“내가 할 말이야, 연회는 북련에서 열었는데, 총 기함인 네가 왜 여기 있는지 물어봐도 좋을까?”
의문문에 의문문으로 답하는 상황, 특정한 누군가라면 불같이 화를 낼 상황이었지만, 다행히도 소유즈는 아니었다. 그저 약간, 씁쓸한 목소리를 내는 게 전부였다.
“……지휘관 동지가 생각하는 연회의 이미지는 무엇입니까.”
마찬가지로 의문문, 보다 가라앉은 목소리에 지휘관의 동공이 약간 커졌다. 그리고 답을 내놓았다.
“보통은, 즐거운 쪽이지.”
“맞습니다. 본래 연회란 즐거워야 합니다. 축하와 환영, 혹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축복하기 위해 모이는 잔치니까요.”
아련한 목소리가 그려내는 광경은 미련과 아쉬움, 그리고 조금의 애절함을 담고 있었다. 말하는 주제와는 정 딴판이었다.
이러한 이율배반적인 광경에, 지휘관은 약간 당황했지만, 곧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누군가의 눈치를 볼 필요 없이 말이죠.”
“……아하.”
그녀는 북련의 총 기함,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존재, 특유의 과묵한 성격까지 합쳐지니, 분명 그녀를 불편해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이는 그녀의 성품이 얼마나 좋더라도, 필연적인 결과였다. 그녀가 야기하는 불편함은 사람이 아닌 그녀가 서 있는 자리에서 기인한 것이니까.
“……그럴 리 없을 거야. 같이 가자, 같은 말은 역시 안 되겠지?”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역시 안 될 것 같습니다.”
소유즈의 입가가 약간 올라갔다. 허나 저것은 미소가 아니였다. 무릇 미소란 행복, 혹은 그에 준하는 것에서 비롯되어야 하는 것이니까.
허탈함, 그것이 소유즈의 입가에 물든 웃음의 진실이었다.
“엄격한 관리자보다는 모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경청자처럼 보이고 싶지만, 타고난 성정은 그것을 어렵게 만들죠, 참, 씁쓸할 따름입니다.”
소비에츠키 소유즈는 분명 다정하고 속 깊은 사람이다. 허나 사적인 소통에 서투른 그녀는, 그렇게 비춰지지 못했다.
또한 노력과는 별개로, 그녀는 조율할 필요가 있었다. 자리가 자리인 만큼, 무거운 이미지를 유지할 까닭이 있어 무작정 다가가기에는 힘들었으니까.
“연회, 분명 즐거울텐데 말이죠.”
결국, 그녀는 공적인 이유를 위해 스스로를 포기한 것이다.
이어 짧은 침묵, 어색했다. 지휘관은 어느새 눈꺼풀을 닫고 있었다. 그것을 본 소유즈의 가슴에 응어리가 하나 늘었다. 자신의 이야기가 지루하고 무겁다고 판단한 탓이다.
“넋두리가 길었군요. 죄송합니다. 괜히 무거운 소리 듣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슬슬 들어가보셔도 좋습니다.”
때문에 소유즈는 황급히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완벽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속내를 털어놓으니 기분은 조금이나마 나아졌다.
그렇게 합리화했다. 그녀는 아쉬워하고 있었다.
“연회가 즐거워 보이면, 하면 되는 거지.”
그리고 그가 눈을 뜬다. 지휘관의 품에서 술병 하나와 잔 두 개가 튀어나왔다. 강구트에 의해 조금 전 강제적으로 쑤셔진 물건이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소유즈의 눈동자는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지휘관과 술을 번갈아보며, 자신의 당황을 몸소 나타냈고, 지휘관은 말했다.
“꼭 사람이 많아야 연회는 아니잖아?”
“…….”
한 마디, 그녀는 눈을 감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으로는 미소를 지었고, 눈을 떴다.
응어리는 전부 녹아내렸다.
“그런데 지휘관 동지, 술은 잘 못 드시는 게 아니었나요?”
“아 그거, 거짓말이야. 그냥 위험한 상황은 피하고 싶어서.”
애초에 지휘관은 함선 소녀들의 속내를 모두 알고 있었다. 애초에 눈치채지 못하는 게 더 이상한 수준이었으니까.
그리고 이는 되려 소유즈의 마음이 한 층 더 풀리는 계기가 되었다. 혹시나 그가 무리하는 게 아닐까. 걱정된 까닭이다. 거듭 말하듯, 그녀는 본래 다정한 사람이니까.
“그럼 이제 기원하자, 원래 연회는 그런 자리니까.”
“지금 이 곳은 저희 둘 밖에 없습니다만, 따로 할 게 있나요?”
“없긴, 왜 없어.”
다음으로 이어질 행위는 뻔했다. 서로가 한 번씩, 차례로 술을 따르고, 그것을 맞댄다. 챙, 울리는 소리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그럼 이제, 소비에츠키 소유즈의 다정함을 모두가 알아주기를 기원하며.”
사내가 웃었고, 소유즈는 놀랐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도 웃을 수 있었다. 오늘 지은 미소 중 가장 밝은 미소였다.
그렇게 둘만의 연회는 시작되었다. 규모는 더없이 작았지만, 얻어가는 것은 그 무엇보다 거대했다.
“참, 즐거운 연회네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싹트는 마음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