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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나고 싶어.


'그 사람과......'


대현자는 허공을 올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일찍이 깨달음을 얻고 대현자라 불리던 운젠은,

더 이상 현자라 할 수 없는 잡념에 빠져 있었다.


-.....의미 없는 발버둥입니다.


어떤 목소리가 말했다.

그 목소리는 그녀와 똑같은 목소리였다.


'제가 소멸할 운명이라 하였나요.'


목소리는 그녀가 오래 가지 못해 소멸해 사라질 운명이라 하였다.


죽음은 언젠가 가까이 있다.

현자이기에 누구보다 그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실현되기 시작하자.

평생 외면해왔던 감정이 스멀스멀 피어 올라왔다.


그리움.

외로움.

그리고 간절함.


'소멸할 운명이기에... 종국을 받아들이라는 건가요.'


또 하나의 대현자는 말했다.

그녀는 어차피 죽을 운명이니 그저 받아들이라고.


그녀와 같은 존재지만, 다른 존재인 그 대현자는

그녀보다 더 많은 것을 보았고, 더 많은 것을 안다.

그렇기에 담담해졌다.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 더 큰 불행으로 이어질 뿐입니다.


그 대현자는 그저 운명을 받아들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럴 수 없었다.


-헛된 수고를 버리고 하나뿐인 길을 따라 종국으로 향하는 것이 낫습니다.


수많은 노력과 가능성을 점친 끝에 결국 모든 것을 달관하게 된 자.

어쩌면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소멸할 목숨이고

어차피 파멸할 세상이면

굳이 애쓸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동의할 수 없었다.


"설령 모든 노력이 헛수고일지라도."


감정은 남아 있다.

아득히 예전에 가슴에 담은 그 작은 감정이.

지금까지도 그녀의 기억 속에 남아 한 남자를 그리워하게 만들었다.


"설령 피할 수 없는 파멸이 찾아올지라도."


오히려 그렇기 때문이 아닐까?

결국 모든 생물이 언젠가 죽음을 맞이한다.

그렇기에 앞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노력하고.

나아가고.

얽매이며....

제한된 삶을 알차게 채운다.


달관한 자는 그것이 의미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현자는 그 찰나야말로 모든 존재의 의의라 생각하였다.


'저도 그리 하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대현자는 현자이기를 포기했다.


"저의 힘이 되어주십시오."


-.......


"본디 하나된 존재로서...."


그녀의 바람에 또 다른 대현자는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결국에는 같은 대현자다.


같은 모습을 하고.

같은 성격을 가졌고.

같은 운명을 지녔다.


그러니...


분명 같은 남자를 좋아하게 되겠지.

세계가 여러 개고,

그 세계의 자신이 여러 개라도.

결국 같은 남자를 바라보는 법이다.


그녀는 또 다른 대현자 역시 지휘관에게 반했으리라 확신했다.


"파멸의 재앙을 불태웁시다."


대현자가 손을 건넨다.

또 다른 대현자는 망설이다가 손을 잡는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합쳐지며 서로의 부족한 점을 채웠고.

온전한 존재로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중앵의 모두와 함께 재앙의 앞에 섰다.


운젠이라는 단 하나의 이름으로.








지휘관은 꿈을 꾸었다.


아름다운 장소에서, 아름다운 여인을 만난 꿈이었다.


"너는..."


언젠가 만난 기억이 있었다.

잠시 중앵에 방문했을 때 만난 그 여인이었다.

중앵의 대현자.


"전에 말씀하셨지요."

"뭐를?"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다시 만나자는 말씀을."

"아...."


기억났다.

지휘관이 중앵을 방문했을 때, 연회에서 중앵의 대현자를 만났다.


그때 이 신비한 여인을 만났었다.

그러나 어쩐지 쓸쓸하고 덧없어 보였고.

지휘관은 잠깐이나마 시간을 내어 그녀와 대화를 나누었었다.


'아주 잠깐이었지. 찰나나 다름없는.....'


이제는 기억도 잘 안 날 정도로 옛날의 일이었다.

갑자기 왜 이때의 일이 꿈에 나타난 걸까?

하지만 딱히 중요한 의문은 아니었다.


"기억나. 다시 만나자고 했었지. 당시에는 이야기할 시간이 많지 않아서.... 아주 찰나였잖아. 우리가 만난 건."

"찰나는 영원과 같습니다."

"음, 어떻게 보면 맞는 말이네. 대현자답게 철학적이구나."

"훗...."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그녀를 보며, 지휘관 역시 미소를 지어주었다.


"마침 시간이 좀 남는데."

"그러면 느긋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네요."

"그러게. 오랜만에 봤는데.... 어쩐지 전보다 더 예뻐졌네?"


가벼운 인사에 그녀는 부드럽게 웃었다.


지휘관은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그녀와 대화를 나누었다.


이상하리만치 긴 꿈이었다.

마치....

영원처럼.... 긴....







".....찰나는 영원과 같습니다."

"응? 뭐라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운젠은 눈을 떴다.


방금, 파멸의 재앙을 봉인했다.

대현자 둘의 존재가 합쳐져 재탄생한 운젠이 일격을 가해 핵을 꺼내고.

나가토를 비롯한 모두가 힘을 합쳐 재앙의 핵을 봉인하는 데 성공했다.


재앙의 몸을 이루던 것들의 재가 하늘에서 쏟아져 내린다.

그와 함께 모두의 안도가 피어올랐다.


이로써, 일이 일단락됐다.

피할 수 없는 종국이라는 운명은......


"후우...."


시만토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거대한 재앙에 맞서 싸우느라 힘이 빠진 모두가 한시름을 놓았다.


"여러분과 함께 싸울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운젠은 들고 있던 칼을 땅에 꽂았다.

칼날은 더 존재하지 못하고 바스라지며 사라졌다.


"시간이 되었군요."


대현자가 말했다.

소멸할 운명이라고.

아무리 노력하고 발버둥친다 한들, 벗어날 수 없다고.


그건 그녀 자신과, 또 다른 그녀 자신에 대한 이야기였다.


어딘가에서 날아온 나비들이 운젠의 곁에 모여들었다.

파랗게 빛나는 나비들이 그녀를 대신목의 곁으로 배웅하는데...


'날아라 나의 나비야.'


운젠이 그 중 하나에 자신의 혼을 담아 보낸다.


나의 감정을.

나의 염원을.

나의 사랑을 담아...


나의 님에게로.


그렇게, 한 마리의 나비를 남기고.

운젠은 소리 없이 자취를 감췄다.







'긴 꿈이었어. 마치 영원처럼...'


꿈에서 깨어난 지휘관은 아직도 꿈에 젖어 있는 듯한 느낌에 빠져 있었다.

이상하리만치 동요하는 마음을 진정하려고 창문을 열고 창가에서 밖을 보고 있었다.


따스한 바람과 함께 나비가 날아왔다.

그 나비는 이상하리만치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반투명하고 푸르스름한 그 나비는 어딘가에서 본 누군가와 닮은 느낌이 있었는데...


'.....대현자?'


그런 생각이 든 찰나, 나비가 손가락에 앉았다.


"신기한 나비네. 다른 곳도 아니고 사람 손가락에......"


-다시 만날 거예요. 철새가 보금자리로 돌아오듯.....


".....!"


목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말을 거는 건 아니었다.

그 목소리는 머릿속에 직접 울렸다.

나비를 통해서.


-저도, 당신에게로.....


주륵-


지휘관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목소리를 통해 전해진 감정 때문이었다.


"어.....?"


그 흐르는 눈물에 만족한 걸까.

눈물을 흘리게 해 미안한 걸까.


나비는 다시 날아간다.


지휘관은 한참을 날아가는 나비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나비가 보이지 않게 되었음에도, 그는 눈물 자국을 닦지 않았다.


'다시 만날 거라고.'


먼 옛날, 그가 누군가에게 했던 말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가 누군가에게 들은 말.


지휘관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믿었다.


계절이 지나, 세월이 지나.


반드시 다시 만나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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