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 "스트라스부르가 사라졌어."txt - 벽람항로 채널 (arca.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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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의 기억은 어디에 남는 걸까.


스트라스부르는 손가락에 끼어진 반지를 보며 생각했다.


그녀가 사색에 잠긴 이유는 간단했다.

지휘관과의 첫 만남은 다소 이상했다.


'난 분명 심판정 소속의 연주자인데.'


그녀의 육신은 심판정에서 자라지 않았다.

갑자기 훅, 하고 나타났다.

그것도 심판정이 아닌, 지휘관의 집무실에서.

그것도 큐브를 통해 부활한 게 아닌....

어딘가의 세상과 이어진 편지함에서.


스트라스부르는 편지함에서 나타났다.

그건 그녀가 정상적인 방법으로 세상에 존재했던 게 아니라는 의미였다.


'나는... 대체 누구지?'


지휘관은 스트라스부르를 알고 있었다.

그 역시 기억을 잃었던 것 같지만....

어느 정도는 기억을 회복했다.

그리고 스트라스부르도 마찬가지였다.


'기억나. 내가 그와 사랑을 나눴던 장면들이...'


두 사람은 짐승처럼 서로를 원했다.

임신을 하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로 서로를 탐했고, 스트라스부르의 안을 가득 채웠다.

육체만을 원하는 짐승 같은 교미를 계속했으나, 그런 천박한 행위의 근본은 사랑이었다.

두 사람은 진심으로 사랑했었다.

그러나 그 감정은 스트라스부르의 것이 아니었다.


'나의.... 이전의 나...?'


전대 스트라스부르가 존재했다.

그리고 지금, 그녀의 기억이 하나가 되었다.


'나는 정상적인 존재가 아니야.'


다른 함순이들은 예로부터 만들어지거나 강화됐다.

또는 큐브를 통해 부활했다.

함선에게는 그 두 가지가 가장 대중적인 탄생의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어느 쪽도 아니었다.


'난 다른 세상에서 왔어.'


태생이 다르나, 그것은 신분을 뜻하는 게 아니다.

괴리감.

소외감.

거리감.

그리고 괴로움.


'난 대체.... 누구지.....?'


기억이 없다.

출신도 없다.

국가도.

소속도.

전부 만들어졌다.


하나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온 게 아닌,

처음부터 완성된 채로 만들어져 있었다.


전대 스트라스부르와는 달리, 그녀는 육체를 포함한 정신과 기억까지.

모든 것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존재였다.


'나는 스트라스부르가 맞는 건가?'


그러한 사색이 길게 이어졌고,

그녀는 죽은 자의 기억이 대체 어디에 남는 건지 궁금해졌다.


'왜 전대 스트라스부르의 기억이 내게.....?'


유일한 연결점은 반지였다.

이 반지가 특별한 걸까?
아니, 반지의 재질은 다른 반지와 똑같았다.


그러면 무엇이 이 반지를 특별하게 만든 걸까.

반지에 전대 스트라스부르의 기억을 주입한 건 누구일까?


"어째서 여기에 기억이 남은 걸까....."


스트라스부르는 일과 시간 외의 모든 시간을 그걸 생각하는 데에 투자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스트라스부르는 자기 자신을 잃었다.

그렇기에 기억의 근원을 밝혀나가려는 것이다.


그걸 알게 된다면 전대 스트라스부르와 자신을 확실하게 선을 그을 수 있을 테니까.

즉.


'나 자신을 찾고 싶어.'


지금의 스트라스부르는 전대 스트라스부스의 그늘에 가려져 있다.

지휘관은 그녀를 보고 있으나, 눈망울에 맺히는 건 전대 스트라스부르였다.


'.......'


그런 눈빛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려 왔다.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나는.. 나야...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스트라스부르라고.'


이기적일 수도 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지휘관은 그녀를 보고 있지만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기에.


"지휘관... 너의 눈동자에도 내가 비치고 있을 텐데...."


왜 제대로 봐주지 않는 걸까.


뜨거운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다음에는... 꼭 제대로 봐주기다...?'


스트라스부르는 염원하며 반지를 바라봤다.


죽은 자의 기억은 어디에 남는 걸까.

그리고 왜 이토록 강하게 각인된 걸까.


그 비밀을 알아낸다면....


'지휘관도 나를 제대로 봐주겠지.'


그리하여 스트라스부르는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뭔가 아니야.'


같은 시각, 지휘관은 사색에 잠겨 있었다.


'스트라스부르가 돌아온 건 좋지만.....'


어쩌면, 큰 실수를 저질렀는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2호기나 3호기의 함순이와의 만남은 자주 경험해봤다.

이번에도 똑같았다.


1호기 스트라스부르는 사라졌지만...

지금 그는 2호기 스트라스부르에게서 1호기를 보고 있었다.

두 여자를 동일시하고 있었다.

다른 함순이들에게는 절대 그러지 않으면서.


'감정에 지배됐었어.'


숨겨뒀던 반지를 꺼냈을 때, 봉인됐던 기억이 피어오르면서 감정이 격양됐다.

그 탓에 눈앞에 있는 게 정확히 누구인지 깨닫지 못했었다.


'하지만......'


지휘관은 깊은 한숨을 뱉었다.


누군가와의 헤어짐이 이렇게 가슴 아플 줄이야.


'1호기가 너무 그리워.'


이런 이별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2호기에게 1호기를 투영하는 건...

2호기 스트라스부르의 감정을 죽이는 일이다.


'어떻게 해야 하지.'


이런 고민에 빠진 건 사실 얼마 되지 않았다.

지난 번 스트라스부르의 태도가 이상했다.


-안녕, 스트라스부르.

-아......


그때 스트라스부르는 반가운 듯 인사를 건네려다가 눈을 마주치더니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었다.


'....많이 티가 났겠지.'


지휘관도 그제야 느꼈다.

그녀를 제대로 보지 않고 1호기를 봤다는 걸.


그러나 1호기 스트라스부르는 말했다.


-너의 눈동자에도 내가 비치고 있겠지?

-다시 만나면 나를 제대로 바라봐줘.


"......"


그래서 그렇게 했고, 그 결과 2호기에게 상처를 줬다.

허면, 지금 이 결과가 정말로 1호기가 원했던 걸까?


'아니야. 절대... 절대 그런 여자가 아니었어.'


스트라스부르는 외로움을 아는 여자다.

그가 스트라스부르에게 청혼했을 때, 자신을 선택했다는 걸 믿지 못하는 기색이 여력했다.

스트라스부르는 선택 받는 것에, 그리고 누군가 자신을 바라보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심판관으로써 언제나 죄인을 엄격히 벌하기 위해서 감정을 죽였고.

포격의 굉음과 비명이 울려 퍼지는 전장의 연주자로써 소리가 들리지 않는 연주를 홀로 이어갔던 자다.


고독과 외로움을 아는 사람이 또 다른 자신에게 상처를 주려고 하지는 않았을 거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스트라스부르....'


지휘관은 답을 찾지 못했다.

실제로 눈앞에 1,2 호기가 함께 존재하는 다른 함순이들과는 경우가 달랐다.


오로지 단신으로만 존재해서 더 갈피를 잡기가 어려웠다.

이별 또한 정상적이지 않았고.


'괴롭다... 스트라스부르는 얼마나 괴로웠을까...'


상처를 준 사람도 이렇게 머리가 복잡한데, 1호기와 지휘관 사이에 낀 2호기는 얼마나 답답했을까.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지휘관은 표정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사과부터 할까."


가끔은 혼자 생각하기보다 터놓고 말하는 게 도움이 될 때도 있다.

솔직히, 이번 일은 지휘관도 이렇다 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건 이성과 판단으로 해결할 수 없는 감정의 문제기에.


"후.... 가자."


그는 용기를 내어 방을 나섰다.

그리고 곧장 스트라스부르를 찾아간다.


"스트라스부르? 아까 밖으로 나가던데요."

"어디로?"

"음, 어디였더라..... 아, 경기장이었습니다."

"경기장?"


살짝 의아했으나,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알려줘서 고마워."


지휘관은 스트라스부르가 향했다는 레이싱 트랙으로 갔다.

가 보니, 스트라스부르가 자동자 범퍼에 앉아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


행색이 참.... 사과를 꺼내기 어려운 복장이었다.

사과를 꺼내기보다는 자지를 꺼내서 바로 섹스를 존나 해야 할 것 같은 복장.

스트라스부르는 레이싱걸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노출이 상당한.


"스트라스부르."

"아, 지휘관? 후후후, 들키고 말았네."


그녀가 지휘관을 보더니 싱긋 웃었다.

마치 전에 봤던 슬픔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밝은 미소였다.


"레이싱 대화에 참가하게?"

"그럴까 고민하고 있었어. 꽤 흥미가 있거든."

"굉장하네."


지휘관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울적함을 풀려는 거구나.'


그렇게 멋대로 생각할 때였다.


"지. 휘. 과안."

"어, 응?"


묘하게 장난스러운 미소와 목소리.

슬픔과 진지함을 생각하고 있던 지휘관이 얼을 탔다.


"어디를 보고 있는 거야? 정말인지."

"아, 아니, 그게...."


지휘관은 당황해서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스트라스부르가 요염하게 웃는다.


"오자마자 나한테 끌린 거야? 작전은 성공했나 보네."

"작전?"

"후훗."


스트라스부르가 가만히 미소를 지으며 그를 올려다본다.

그 눈빛은 즐겁게 그를 놀리는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안심한 듯했다.


"나를 제대로 봐주고 있잖아."

"......!"


지휘관의 눈이 크게 떠졌다.


언젠가, 한 여자가 그에게 말했다.


-너의 눈동자에도 내가 비치고 있겠지?

-다시 만나면 나를 제대로 바라봐줘.


그리고 지금, 스트라스부르가 말했다.


-나를 제대로 봐주고 있잖아.


"아, 나, 나는, 그게...."


지휘관은 당황해서 말을 버벅였다.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할 수 없었다.

가슴이 죄어오고, 압축되어 찢어지는 느낌이었다.


"......."


지휘관이 고통에 숨을 몰아쉴 때, 스트라스부르는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손을 잡아 부드럽게 이끌면서 포옹했다.

여러모로 푹신한 가슴이 찢어지고 불타오르는 지휘관의 마음을 꾹 누르며 식혔다.


"불쌍한 사람."

"......."

"그렇게 사랑하던 사람을 잃었으니, 마음이 갈피를 못 잡고 움직이는 것도 당연해."


지휘관은 퀭한 눈을 크게 뜨고 그 말을 가만히 들었다.


"나도 고민했어. 나는 그저 전대 스트라스부르의 거울일 뿐인 걸까, 하고."

"아....."


아니라고 말하려고 했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실제로 그녀를 거울 취급 했기 때문이다.

그게 그의 의도였냐와는 별개로.


"하지만 지휘관에게 전대 스트라스부르를 그냥 잊으라는 건, 너무 잔인한 말이야."

"....."

"나는 당신에게 상처를 주기도 싫고, 전대 스트라스부르를 욕 보이기도 싫어."


스트라스부르가 그의 쇄골에 머리를 대고 말을 잇는다.


"하지만 나는 욕심쟁이인가봐. 예전에는 이렇게 사람을 원하지 않았는데.... 당신을 만나고 나니까 당신의 사랑을 받고 싶어졌어."

"....."


지휘관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사실, 지금은 아무 말도 할 필요가 없었다.

그가 무슨 마음인지는 이미 다 들킨 것 같았으니까.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가장 이해해준 게 바로 지금의 스트라스부르였던 것이다.


"그래서 정했어. 내가, 둘 다가 되면 되겠다고."

"무슨....?"


스트라스부르가 살짝 떨어지며 그를 올려다본다.

두 남녀의 눈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지금의 나와, 당신이 기억하는 스트라스부르는 똑같아?"

"......아니."


지휘관은 고개를 저었다.


"비슷하지만 달라."


일단 복장부터가 그렇다.

사람은 시각에 많은 것을 의존한다.

옷이 날개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옷이 다르면 인상이 달라지기도 한다.


그가 기억하는 스트라스부르는 신빅하고 지적인, 그러면서도 쓸쓸한 분위기를 풍기는 고고한 여성이었다.

그러자 지금 앞에 있는 스트라스부르는 그의 아기씨를 노리고 유혹하는 매혹적이고 음탕한 고양이 같은 자태였다.


"그래, 다르지."


그 대답이 정답이었는지 스트라스부르가 미소를 지었다.


"많이 고민했어. 죽은 자의 기억은 어디에 남는 걸까. 이미 사라진 그녀의 기억을 전해준 매개체는 대체 무엇일까, 하고."

"......그 결과가 이거야?"


지휘관이 그녀의 복장을 내려다보았다.

지휘관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넓은 경기장과 그것을 둘러싼 관중석.

그리고 자동차와 음란한 여자.


"응."


스트라스부르는 요염한 미소를 지었다.

다만, 눈에는 야한 분위기만 맴도는 게 아니었다.

여러 가지 감정이 복합적으로 섞여 있었다.

.....전대 스트라스부르의 감정도.


"내 평소 복장과 반지는, 전대를 위해."


스트라스부르가 그의 손을 잡고 자신의 가슴께에 가져간다.

손바닥이 가슴골에, 손가락이 쇄골에 닿자 뜨거운 온기와 함께 처녀의 콩닥거림이 느껴졌다.


"지금 이 모습은, 나를 위해."


스트라스부르가 웃는다.

전과는 다른 새로운 모습에, 이제야 보이기 시작했다.

거울에 비친 게 아닌, 진짜 스트라스부르가.


"당신은 당신이 원할 때"


그녀의 미소와 목소리가 귓가에 파고든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올려다보는 얼굴에서 두 여자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원하는 나를 골라서 사랑하면 돼."

".......진심이야?"


사실, 지휘관은 전대를 잊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과거는 흘려보내고 현재와 미래를 보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스트라스부르는 말한다.


"응."


행복과.


"내가 허락하니까 괜찮아."


기쁨으로.







나는 누구일까.


기억과 정신, 육체까지.

전부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다면.

그건 진짜 내가 아니라 가짜인 걸까?


나는 진짜 내가 아니라.

그저 전대의 복제품일 뿐일까?


그걸 고민하던 한 여자가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도전을 위해 복장을 바꿔 입었을 때.

그리고 그걸 지휘관이 똑바로 쳐다봤을 때.

그의 눈망울에 맺힌 건 연주자 아닌, 레이싱걸이었다.


'아, 그렇구나.'


그때 스트라스부르는 깨달았다.

죽은 자의 기억과 감정은 반지나 물건에 남는 게 아니다.


자아를 고민했던 건, 전대와 자신이 너무도 똑같기 때문이었다.

같은 남자와 사랑에 빠졌고.

같은 이유로 사랑에 빠졌고.

같은 공간에 살았기 때문에.


즉, 혼동이 일어난 이유는...


'결국, 둘 다 같은 나이기 때문이었어.'


모조품이나 복제가 아니다.

기억을 이어받은 순간부터 스트라스부르는 전대 스트라스부르와 동일 인물이 됐다.

하나가 된 것이다.


그러나 뒤틀림은 분명 존재했고.

그건 아주 사소한 차이에서 왔다.


스트라스부르의 내면에는, 전생 전과 관련 없는 새 삶을 살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었다.

모든 것을 처음부터 시작하려는 스트라스부르도 존재했다.


그래서 헷갈렸던 거다.

새로 태어난 육체의 기억과 예전 기억의 선을 긋기가 어려웠기에.


'어쩌면, 난 지휘관이.... 새롭게 태어난 나도 사랑해줄지가 궁금했을 뿐일지도 몰라.'


지금 지휘관이 자신을 사랑하는 건 이전의 일이 있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사랑에 빠질 운명이었기에 사랑하는 사이가 된 걸까.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리고 해답을 알아냈다.


"사랑해, 네가 어떤 모습이든."


지휘관은 스트라스부르를 사랑했다.

그녀가 평소의 복장이든, 레이싱걸의 복장이든.

그냥 알몸에 이불 하나만 덮고 있든.


전생에 그랬듯 언제나 격렬하게 사랑했고, 뜨겁게 그녀의 안을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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