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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 선물로 보지털을 달라고.....?"


터무니없는 부탁에 브륀힐드는 미간을 오므렸다.


"응. 흰 털 하나, 검은 털 하나, 두 개."

"......어째서...?"


평소였으면 헛소리라고 치부했을 거다.

그러나 오늘은 지휘관의 생일.

아무리 허튼 개소리일지언정, 브륀힐드는 지휘관의 말을 귀담아 들었다.


"그야, 브륀힐드의 반반보지털을 간직하고 싶으니까."

"......"


브륀힐드의 머리카락은 검은색과 흰색으로 나뉘어져 있다.

보지털도 마찬가지.

그러나 사실, 그런 건 남들에게 보여주기도, 알려주기도 싫었다.

하물며 그 상대가 가장 사랑하는 남자여서야.....


"아, 잠깐. 뭔가 오해가 있는데."


지휘관이 갑자기 손을 들더니 진지하게 말한다.


"장난치려고 하는 거 아니야. 진짜 진지한 이유가 있어서 그래."

".....말해봐라."


브륀힐드는 우선 끝까지 들어보자고 생각했다.

헛소리지만, 솔직히 대체 왜 저런 헛소리를 뱉는지 궁금하긴 했으니까.


"브륀힐드, 너 골동품 좋아하잖아."

"그렇다."


브륀힐드는 낡은 물건들을 좋아했고, 수집하기를 즐겼다.

그 이유는...


"그 물건에 깃든 역사와 기억, 이야기를 좋아하잖아, 그렇지?"

"....그렇지."


대답하면서 브륀힐드는 자신의 왼손에 껴진 반지를 봤다.


-나랑 결혼해줘, 브륀힐드.


브륀힐드는 반지를 볼 때마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그날을 떠올릴 수 있었다.


지휘관이 처음으로 마음을 밝힌 날이자.

브륀힐드가 처음으로 솔직하게 대답했던 날.


사람이 지난 일을 기억하듯.

물건에도 기억이 존재한다.

물론, 물건이 직접 기억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물건이 존재함으로써.

또, 물건이 빛 바라고, 낡아감으로써.


행복했던 시절.

즐거웠던 순간.

슬펐던 장면도.


모두 떠올리면서 회상할 수 있다.


브륀힐드가 골동품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래서다.

망각이라는 삭제 시스템이 기억을 지울지라도.

기쁨의 중심축이 됐던 물건을 다시 쳐다보면 그 기억이 살아나니까.

물건에 그날의 기억이 남아 있으니까.


-너의 반반 머리가 하얀 백발로 물들 때까지. 그리고 그 이후도 함께하자.


지휘관은 평생 함께 하자는 말을, 그렇게 돌려 말했다.

브륀힐드는 그 말을 좋아했다.


"......하지만 내 털을 보여준 적은 없다."

"아니, 본 적 많은데? 만날 보지빨면-"

"쓰읍...."


브륀힐드가 눈에 힘을 주자 지휘관이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이런.'


브륀힐드는 아차, 했다.

그래도 지휘관의 생일인데.

오늘 같은 날 화를 내면 안 되지.


-너의 반반 머리가 하얀 백발로 물들 때까지.


"......."


다시 한 번 반지를 쳐다보며 브륀힐드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럼 반대로 묻지."

"응?"

"만날 보는 내 .....털을 왜 가져가려는 거지?"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고 해도 대뜸 보지털을 달라고 하면 곤란했다.

평소 보지털을 보여주고 싶어서 보여주나?

섹스하다보면 옷을 벗게 되니까 저절로 노출되는 거지.


그리고 가져간다는 건 또 어떻게 가져가는데?

생일 선물로 달라고 했으니 그냥 화장실에서 뽑아가는 건 절대 용납하지 못할 거다.


스스로 팬티를 벗고.

털이 난 음부를 내밀어야 할 거다.

최악의 경우, 다리를 벌려야 할지도 모른다.


'.........'


브륀힐드는 그런 천박함과는 거리가 먼 성격이었다.

어떻게 전해주는지까지 상상하자, 더더욱 하기 싫어졌다.


"코팅해서 영원히 간직하려고."

"미친놈."


브륀힐드는 저도 모르게 욕을 뱉었다.

그리고 깜짝 놀라 입을 틀어 막았다.


"....방금은 미안하다. 말이..."

"괜찮아. 더 한 욕 먹을 각오도 했으니까."

"......?"


지휘관은 웃거나 슬퍼하지도, 좌절하지도 않았다.

평소 가벼운 성희롱을 할 때와는 태도가 달랐다.

평소에는 성희롱했다가 화내면 시무룩해져서는 터덜터덜 걸어가면서.

지휘관은 그걸 본 브륀힐드가 마음이 약해져 가슴을 만지게 해주는 걸 즐겼다.


"오늘은... 평소랑 다르군."

"그야, 오늘 같은 날 아니면 절대 못 할 부탁인 걸."

"......"


확실히 그렇긴 했다.

생일인 걸 아는데도 이렇게 거부감이 들 정도니까.

평소였으면 바로 등짝부터 때렸겠지.


".......왜 그렇게까지 진지한 줄 모르겠군. 하찮은 일 아닌가."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브륀힐드, 너의 골동품도 다른 시각에서 보면 이미 쓸모가 없어진 물건이잖아?"

"뭐, 틀린 말은 아니지."


그건 브륀힐드도 알고 있었다.

사실, 지휘관도 처음에는 그녀가 골동품을 수집하는 걸 이해하지 못했다.

전장에서 낡은 부품은 곧 자멸의 지름길이니까.

지휘관이 된 이상 모든 도구와 그 속의 부품의 품질을 관리할 책임감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해해준다.

그러니 브륀힐드도 다른 시각의 지휘관을 이해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가치가 있어."

"......."

"너의 보지털도 나한테는 가치가 있고."

"그.... 하....."


브륀힐드는 정신이 아찔해지는 듯했다.


"멋진 말이기는 하다만, 단어 선택 좀 어떻게 안 되겠나?"

"뷰지털?"

"돌아버리겠군."

"아니면 잠지털?"


브륀힐드는 실소를 터트렸다.


"둘 다 최악이군."

"그럼 보지털로."

"그걸 정하는 대화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브륀힐드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뱉었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뜨며 지휘관을 바라봤다.


"....진심으로 그걸 원하는 건가?"

"응."

"....다시 한 번 생각해봐라. 지휘관, 너의 생일이다. 네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들어줄 수 있어."


왜 못하겠는가.

평소에는 부끄럽고 성격에 맞지 않은 일이라도, 오늘은 해줄 수 있다.


"음탕한 것이 좋다면, 오늘만큼은 너의 요구대로 천박한 춤을 출 수 있다. 펠라한 다음 정액 먹어주는 걸 좋아하지? 보통은 해주지 않지만 오늘은 해줄 수 있다. 가슴으로 정액을 짜내주는 것도 가능해. 또는, 그 세 가지를 전부 다 할 수도 있지."


브륀힐드는 정적인 섹스가 좋았다.

작은 신음이 흐르고, 부드러우면서 정석적인 섹스 말이다.

반면, 지휘관은 천박한 섹스를 즐겼으나, 그건 다른 함순이들도 해줄 수 있는 일.

그렇기에 브륀힐드는 평소에는 그런 쪽의 섹스를 거절했었다.


"네가 원하는 모든 천박한 꿈을, 다른 여인이 아니라 내 몸으로 이룰 수 있는 날이 바로 오늘이다. 그런데 너는 그 기회를 걷어차고 고작 내 털 두 개만을 얻겠다고?"

"응."

"함께 자고 일어나면 침대나 바닥에 떨어져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그건 내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야."


예상 밖의 대답.

브륀힐드는 할 말을 잃었다.


단순히 털을 얻는 게 목적이면 얼마든지 얻을 수 있다.

브륀힐드는 털을 다듬긴 해도 아예 밀어버리진 않았으니까.


"....그럼 네가 원하는 건 무엇이지?"

"네가 말했잖아. 물건에는 기억과 감정이 남는다고."

"....그랬지."


브륀힐드는 아직도 반지를 볼 때마다 고백 받았던 당시의 기억과 그때 느낀 감정을 고스란히 떠올릴 수 있다.

물건에는 그 물건에 얽힌 기억과 감정이 깃들어 있다.


"천박한 섹스는, 그냥 한 번 하면 흘러가면서 사라지는 강물 같은 거라고 생각해."

"....."

"물론 침대나 정액이 든 콘돔 같은 걸 보면 잠깐 떠오르긴 하지만... 매일매일 되풀이돼서 감동이 덜하지."


지휘관은 수백의 함순이들을 상대한다.


사람은 기억을 망각한다.

그 망각은 비슷한 일이 계속 되풀이될 때 더 심해지는데,

지휘관에게 있어 섹스는 일과나 나름없는 일이니 더욱 심할 거다.


매일 매일 수많은 함순이들과 몸을 섞으니.

그 모든 섹스를 일일이 다 기억했다가는 뇌가 터져버리겠지.

그래서 지휘관은 섹스 기억력이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난 브륀힐드와의 성적인 기억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어."

"하아......"


브륀힐드는 생각한다.

지휘관은 정말....

정말 나쁜 사람이라고.


'거절할 수가 없게 만들다니.'


그녀가 그런 생각을 하며 쓰게 웃을 때였다.


"넌 반지를 보면서 나랑 처음 맺어지는 순간을 기억하지?"

"그렇다."

"난 네 그녀의 보지털을 보면서, 너의 사랑과 봉사를 기억하고 싶어."

"정말인지....."


반박할 수가 없었다.

먼 옛날.

지휘관이 그녀의 골동품 수집이라는 취미를 이해하지 못하던 시절.

브륀힐드가 했던 설명을 거의 그대로 인용하고 있었으니까.


"사실 애액 묻은 콘돔으로 할까 했는데 그냥 콘돔만으로는 누구랑 한 건지 확실히 알 수가-"

"그만."


브륀힐드는 정신이 아찔해지는 걸 느끼고 말을 멈추게 했다.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았다."

"오.....!"

"확실히, 내 털 색이 나의 아이덴티티기는 하지....."


-너의 반반 머리가 하얀 백발로 물들 때까지. 그리고 그 이후도 함께하자.


신체적인 특징은 자랑거리인 동시에 트라우마가 된다.

남들과 다르다는 건 장점인 동시에 단점이다.

그러나 지휘관은 그런 그녀의 특색을 좋아했다.


"맞아. 흰 털이랑 검은 털을 함께 코팅하면 딱 보자마자 너라는 걸 알 수 있을 테니까."

"....."


'이걸 기뻐해야 하나....'


브륀힐드는 골머리를 앓다가 돌연 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나를 기억해주려는 건 기뻐할 일이군.'


상당히 낭만적인 부탁이었다.

하필이면 그게 보지털이라 그렇지.


"알겠다."

"어?!"


지휘관이 깜짝 놀랐다.

마치 들어줄 줄 몰랐다는 듯.


"한 순간의 부끄러움과 천박한 행위일지라도."


브륀힐드가 한 발 다가가 지휘관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 기억은 추억이 되어 평생 이어질지니."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마주봤다.

그녀의 붉은 자위에 지휘관의 얼굴이.

지휘관의 눈동자에 브륀힐드가 비췄다.


브륀힐드는 지휘관의 눈 속에서 자신을 보았다.

반은 검고.

반은 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그녀가.


"당신이 나와의 추억을 만들겠다면....."


브륀힐드는 그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이끌었다.

자신의 치마 아래.

레깅스를 찢고.

더 깊고 깊은, 은밀한 장소로.


질척-


지휘관의 손이 균열에 닿았을 때, 브륀힐드는 뺨을 붉혔다.

평소였으면 그의 손이 닿았을 때 움찔하며 놀랐을 거다.

그러나 오늘 만큼은 브륀힐드가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생일을 축하해준다는 건, 그런 거니까.


"나는 기꺼이 나의 모든 것을 내어줄 거다."


브륀힐드는 그와 입을 맞추었다.

순간, 지휘관은 보지털을 채취하는 것도 까맣게 잊고 그 입맞춤에 모든 감각을 집중했다.


서로를 지긋이 누르는 입술이 온기를 전했고.

촉촉한 감촉이 서로의 마음을 전한다.


시간이 지나 지휘관은 코팅지에 들어간 털을 보며 오늘의 브륀힐드를 떠올리겠지.


마찬가지로, 브륀힐드도 그 코팅지와 자신의 털을 떠올릴 때마다 오늘을 떠올릴 거다.


지휘관이 얼마나 자신을 원해주었고.


또 자신이 얼마나 지휘관을 원했는지.


아마도 내일도.

어쩌면 모레도.

그리고 글피도.


그렇게...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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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 자축 겸 반반뷰지백작의 반반뷰지털 반반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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