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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가 물었다.


"비스마르크라고 했지.... 넌 꿈이 뭐야?"


그 남자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나를 봤다.

그 남자는 한 방울의 눈물을 흘리며 나를 봤다.

그 남자는 나의 아픔에 공감하듯이 나를 봤다.


".....평화."


짤막한 내 대답에, 무엇을 느낀 걸까.

길고도 긴 침묵이 흘렀다.


"....나도 그래."


그 남자는....


나를 데려갔다.







나는 전쟁을 싫어했다.


함께 웃던 동료가 죽고.

이름도 모를 아군이 죽고.

아침에 눈 뜨면 옆에 있던 누군가 죽어 있는 풍경을 계속 보다보면.

상상조차 하기 싫었던 살인을, 기꺼이 하는 괴물이 되어버리기에.


적을 죽이지 않으면 아군이 죽는다.

도망치고 싶어도 결국 동료가 죽기에, 그럴 수 없으니.

나는 내 손에 피를 묻히며 철검을 들고 전장에 나섰다.


그리고 패배했다.


"비스마르크!! 안 돼.. 안 돼, 안돼안돼안돼....!!"


나를 부르짖는 목소리.


'울지 마....'


나는 그녀를 살리고자 뛰어들었다.

그러니 슬퍼하지 말고 앞을 향해 걸어가 주기를.....

나의 희생을 덤덤하게 받아들여 줬으면 했다.


지금 나는 깊은 바다에 가라앉고 있으나,

사실 나를 죽이는 건 그저 몸에 난 상처가 아니었다.


'이제... 끝인가......'


몸에 무언가 침식되기 시작했다.

들어와서는 안 되는 것이 몸을 좀먹고, 정신을 갉아먹었다.


그런 와중에 눈을 떴을 때.


"오, 정신을 차렸나, 비스마르크."


나는 군인이 퇴역 절차를 밟는 곳의 병실에 있었다.


"상황 파악이 안 되겠지만, 그냥 듣게."


늙은 노인이 말한다.


"자네는 패배했고, 바다에 잠겼어. 의장은 박살 났고, 몸은 침식됐지."

"......"

"자네에게 남은 선택지는 두 가지 일세. 병든 몸을 끌고 떠나거나, 자네를 데려가줄 누군가를 따라 이 악물고 떠나거나."


눈은 날 보고 있지만 망막에 비치는 건 내가 아니다.

저 노인은 그저 말하고 있을 뿐.

나랑 대화할 의지는 없었다.


'그렇군.'


난 단번의 나의 처지를 이해했다.

노인이 한 말이 아닌.

노인의 태도로.


'버려졌나.'


혹은 잊혔거나.

어느 쪽이던 간에,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지휘관의 자리가 코앞이었는데.....'


이 세상에는 여러 세계가 있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다른 세계에서의 나는 지휘관의 자리에 올라서 있을까?
아니면 지금의 나처럼 초라하기 그지없는 한낱 장교일까.


나는 소속을 잃었고.

잠을 잘 자리를 잃었다.

버려지고 집에서 멀어진 비 맞은 개마냥 이곳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허면.... 기다려볼까.'


일상으로 돌아가봤자 늦었다.

내 몸과 혼은 이미 전장에 물들었기에.

정글에서 오래된 천이 썩어 문드러지듯.

내 혼과 몸은 이미 피로 얼룩져 독해졌다.


"흠... 아무래도 상태가..."

"좀 더 둘러보도록 하죠."

"어째 영...."


수많은 지휘관들이 오갔다.

그보다 조금 적은 퇴역 군인들이 왔다가 떠났다.

그런 인구의 유동 속에서도 나는 자리를 지켰다.


"자네는... 대단하군. 내가 기억할 때까지 오래 버틴 녀석은 적은데."

"....."


노인이 날 보더니 폭소를 터트렸다.


"자리를 차지하는 게 아까운가."

"아니, 그런 말이 아니야. 보통은 죽으니까. 잘도 버티고 있어."

"......"

"어지간히도 살고 싶나보군. 특별히 오늘은 진정제를 놔주겠네. 내일도 살아 있길 바라지."


노인이 피 묻은 손을 흔들며 떠난다.

저 노인을 탓하지는 않았다.

저 손에 피가 묻을 때마다 생명이 살아난다.

저딴 말이나 하는 노인일지라도, 수없이 많은 군인을 살렸다.

그저 너무 많이 살려서 무덤덤해졌을 뿐.


난 노인을 욕하는 대신, 생각했다.


'난... 살고 싶은 건가.....?'


곰곰이 생각해봤다.

그러나 그 대답은 아니었다.


'아니, 난 단지 살고 싶은 게 아니야. 나는.....'


살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버티는 게 아니다.

좀 더.....

좀 더 절실한......

그러나 닿지 않는 무언가가.....


"오, 이게 누구야. 젊은 나이부터 출세한 슈퍼 루키 아닌가."

"농담은 됐습니다. 여깁니까?"

"들어가게."


노인의 목소리.

젊은 누군가의 목소리였다.


끼익-


문이 열리자 노인과 청년이 들어왔다.

청년은 이제 막 장교가 됐다고 느껴질 정도로 젊었다.


"동료를 구하려다가 대신 포격에 맞았지. 그리고 깊은 바다에 잠겼는데, 그만 침식돼 버렸어."


노인이 설명했다.


"그 다음은?"

"보다시피 여기서 악착같이 살아 있지. 하하하."

"......"


청년이 한 발 다가왔다.

나는 앉은 채 청년을 똑바로 응시했다.


".....상처가 심한데도 목숨을 구걸하는 눈빛은 아니네."

"구걸하길 원하나?"


내 대답에 청년이 웃었다.


"살아 있는 이유가 궁금했을 뿐이야."

"......"


살아 있는 이유....

난 뭐라 할 말이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그런 내 태도가 신기한 건지.

아니면 다른 생각을 품은 건지.

청년은 날 빤히 내려다봤다.


"동료를 구하기 위해 뛰어들었다고."


청년이 나랑 눈높이를 맞췄다.


"그래."

"그 동료는 살아남았어?"

"아마도."

"그렇다면 너는, 그 동료에게 영웅이겠네."

"그런 거창한 존재가 되고자 하는 마음은 없다."

"....."


청년이 돌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더는 동료가 죽는 걸 보기 싫어 대신 몸을 던졌을 뿐이다."

"그 동료도....."


돌연, 청년이 화가 난 것처럼 미간을 오므렸다.


"그 동료도 널 보고 똑같이 생각하지 않았을까?"

".......!"


난 깜짝 놀랐다.


"나....."


목구멍이 막혔다.

목소리도, 숨도, 감정도 뱉어지지 않는다.


"나는....."


난 말을 뱉으려다가 호흡 곤란이 찾아와 거칠게 숨을 헐떡였다.


"....비스마르크."

"....뭐지."


고개를 들어보니, 청년이 눈물을 한 방울 흘리고 있었다.

왜 눈물을 흘렸을까.

나와 같은 경험이 있는 걸까?

혹은 내가 구한 동료의 시선으로 세상을 본 적이 있는 건가?


"....넌 꿈이 뭐야?"


꿈.


그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한참 후, 난 입을 연다.


"......평화."


동료가 죽는 걸 보기 싫고.

내가 죽는 것도 보이기 싫다.


나는 세상이 평화로워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걸 이루기 위해 살아 있는 걸지도.


"....나도 그래."


청년이 손을 내밀었다.


"같이 가자."


처음이었다.

지금의 내게 손을 내민 건.


어떻게 거절할 수가 있을까.


나는 나의 지휘관을 따라 모항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치료를 거듭했고.

침식을 되돌릴 방법을 연구했다.


수많은 개월이 흘렀다.

그러는 동안 나는 지휘관과 의견을 나눴고.

우리들의 세계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한 계획을 짰다.


그러는 동안 우리 주위에는 수많은 동료가 생겼다.

힌덴부르크, 브륀힐드. 티르피츠....


전혀 다른 성격인 것 같으면서도 우리는 평화를 원했다.

살아온 방식이 달랐음에도 우리는 힘을 합쳤다.

오직 평화를 위해.


어느덧, 나는 나의 침식을 함께 나눠줄 새로운 의장을 얻었다.

수많은 동료들의 노력이 맺은 결실.

우리는 협력을 통해 우리의 터전을 넓혔고, 평화의 기반을 단단히 쌓았다.


마치 비버가 담을 쌓듯이.


그러나....


비버가 아무리 담을 쌓는다 한들.

터져오는 강물을 버틸 수는 없으니.


"좌향! 서쪽을 봐라!"

"젠장.....! 양동작전이었나."

"아, 아니, 뒤에서도 온다...!"

"적의 수가 너무 많아, 후퇴, 후퇴 명령을...!!"


안일했다.

아니, 준비는 완벽했다.

그러나 싸울 대상을 잘 못 알았다.


우리를 기습한 적은 세계의 문을 열고 들이닥쳤으며.

대해조차 하찮다는 듯 뒤덮었다.

규모부터 상대가 되지 않는 압도적인 차이.

그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발버둥 치는 것 뿐...


'또 인가.'


이보다 훨씬 작은 규모의 전쟁에서도, 나는 동료를 잃었다.

이보다 몇 배는 덜 잔혹한 전투에서, 나는 동료를 대신해 중상을 입었다.

그럼에도 나는 무엇 하나 바꿀 수 없었다.


이번에는 무엇을 바쳐야 하는 거지?


"비.... 스..마르....크....."


피를 토하며 나를 부르는 동료가 있었다.


"힌덴."

"나는 드디어...... 온갖 무료함과 지루함에서....."


힌덴은 언제나 자극적인 것을 찾았다.

내가 죽음을 싫어하듯, 힌덴든 무료함을 싫어했다.

그녀가 평화를 부르짖은 건, 그곳에 도달하기까지 온갖 것들을 경험하며 무료함을 달래기 위함이었다.


"벗어나......."

"더는 말하지 마라."


그러나 나는 안다.

그녀가 잘난 듯이 늘어놓는 무료함은.

사실 자신의 진심을 감추기 위한 멍석이라는 걸.


"....너는... 여전히 고통 속에.... 있나....."

".....말하지 마. 출혈이 심하다."

"훗......"


힌덴이 피와 함께 미소를 흘렸다.


"이대로.... 너에게 나의......"


동공이 넓어진다.

힌덴은 멍한 표정으로 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시커면 철포와 피가 쏟아지는, 멸망해버린 하늘을.


".....말을 끝마칠 시간조차...... 주지 않는 건가."


무엇을 위한 전투였나.

무엇을 위한 준비였나.

고작 이것을 위해?

우리는 자살하려고 온갖 노력을 퍼부었단 말인가?


"비스마르크! 일어나!!"


온간 회환 속에서.

너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휘관.... 나는...."

"검을 쥐어, 철포를 준비해!"

"........"


순간, 나는 지휘관이 지독하게도 미웠다.


그토록 다정했던 남자 아니던가.

폐기 처분해도 모자랄 정도의 중상인 나조차 데려와 치료해준 남자였잖은가.

그런 네가 어떻게...


"주변을 봐! 우리 동료들이 죽어가고 있다고!"


나는 이성을 놓고 목놓아 외쳤다.


"동료들이 죽어나가는데 슬프지도 않는 거냐! 네 눈에 보이는 건 동료가 아닌, 불가능한 평화 뿐이냐고!!"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으니까."


순간, 난 귀를 의심했었다.


"뭐.....? 방금 뭐라고.....?"


지휘관은 날 보지 않았다.

등을 돌린 채, 정면을 보며 말한다.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건, 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거야."

"....."

"그 승리를 안겨주기 전까지, 눈물을 흘려선 안 돼. 동정해서도."

"어째서!! 동료잖아, 생사를 함께한-"

"넌 알 텐데, 비스마르크."

"....!"


이제야 지휘관이 살짝 뒤를 돌았다.

그러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건 음영이 진 얼굴의 옆모습 뿐.


"너만은, 이해해주리라 믿고 있어."

"........"


병상에 있을 때가 떠올랐다.

수많은 지휘관들이 다녀갔고.

그중에는 나의 일화를 듣고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하지만 저희 함대에는 어울리지 않는군요. 아쉽지만...


떠날 때의 배신감.

눈빛에 어린 동정심을 보고 잠깐이나마 기대했던 나 자신을 향한 자괴감.


'...그러면 눈물이나 흘리지 말 것이지.'


지휘관들이 흘린 그 눈물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감정을 위한 눈물.

자신이 느낀 슬픔을 털어내기 위한 눈물이었다.


그때 나타난 한 남자가 있었다.


-그 동료도 널 보고 똑같이 생각하지 않았을까?


다소 지독한 말을 뱉었던 그 남자는, 이렇게 물었다.


-...넌 꿈이 뭐야?


그리고 그 남자의 눈에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대 그 남자는 왜 눈물을 보였을까.

지금 나에겐 울지 마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건 아마도....


'......그때 나를 보며 운 건, 나를 동정해서가 아니었군.'


가끔 생각날 때마다 궁금해 했었다.

그때 지휘관은 왜 눈물을 흘렸을까.


나처럼 몸을 던져 동료를 구한 경험이 있는 걸까?

아니면 내가 구한 동료의 시선으로 세상을 본 적이 있는 건가?


둘 다 아니었다.


'그런가.'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힌덴을 내려놓았다.

죽어가는 동료들의 기척이 사방에서 느껴졌다.

그러나 그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자신을 희생한 자들.'


그녀들 모두 나와 같은 목적을 가지고 이곳에 왔다.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준비했고, 싸웠다.

그리고 죽어간다.


만약 내가 그들처럼 죽어가고 있었다면...


'해야 할 일은 안 하고 우는 나를 때려주고 싶었겠지.'


난 그제야 지휘관을 이해했다.

처음부터 지휘관이 내게 바랐던 건, 아마 이것이었으리라.


그걸 깨달았기에.

나는 죽은 동료를 내려놓고 두 발로 섰다.


".....고마워."


내가 일어서자 지휘관은 쓰러졌다.

뒷모습이라 안 보였을 뿐, 그는 이미 중상을 입은 채였다.


"언젠가...."


난 그의 어깨를 한 번 토닥이고 매정하게 앞으로 나아간다.


"다시 만나자."

".....그래."


난 걸었다.

두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앞으로 나아간다.

멸망한 세상이 한눈에 들어오는 그곳으로.


'나는.......'


....


나는.........


나는 함께 평화를 기약한 자들을 돌보지 않고.


그들의 피를 밟으며.

철검을 쥐고 나아가니.


내 몸에는 뜨거운 피가 흐르나.

그 피는 철로 이루어져 있다.


나약한 진심을 숨기고.

철로 마음을 뒤덮는. 


나는 철혈....


철혈의 재상, 비스마르크다.









"....이상이 xxxx번 세계의 마지막 기록이야."


치갈로프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

지휘관은 미간을 오므린 채 깊이 사색했다.


"....어떻게 생각해?"


한참이 지나 그가 입을 열자, 옆에 있던 비스마르크가 답한다.


"나 또한 그녀이기에 안다."


순간, 피로 얼룩진 기록이 그녀의 얼굴과 겹쳐 보였다.

실제로 두 사람은 속한 세계가 다를 뿐, 같은 존재였다.


"...언젠간 만날 거다, 반드시."


반드시.

그 말이 유독 지휘관의 귓속을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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