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관이 하루에 가장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는 함선 소녀는 당연히 그 날의 비서함이겠지만, 그 다음을 꼽는다면 아마도 지휘관을 수행하는 로열의 메이드대 소속의 인원들일 것이다.


 지휘관 자신은 지휘관을 글러먹은 사람으로 만드려고 하는 메이드대, 대령의 표현을 빌리자면 '응애세력'의 마수를 나름 잘 피해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곰곰히 그의 일상을 뒤돌아보면 그런 말은 나올 수가 없었다.


 그야 간단한 청소며 빨래 같은 허드렛일부터 태반을 그녀들에게 맡기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한 걸음 까딱 잘못했다간 허드렛일 뿐만 아니라 식사부터 몸을 씻는 것까지 그녀들의 손길을 탈지도 몰랐다.


 물론 그게 메이드대의 일원들이 바라마지 않는 일이었으니, 그녀들이 그것에 대해 불평을 말하는 일은 없었다. 심지어 일전의 사태─정식 명칭 친밀도 강화 활동 이후, 도리어 지휘관을 어떻게 더 글러먹게 만들어 메이드대에게 좀 더 의지하게 만들 수 있을지 심심찮게 회의가 벌어지는 판이었다.


 지휘관은 추호도 그 사실을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휘관이 메이드 취향이라고 하는 것은 비약적인 논리라 할 수 있었다.


 굳이 호불호를 가리자면 당연히 선호하는 쪽이었지만, 어느 남자가 자신에게 봉사해주는 아름다운 여성을 싫어하겠는가, 메이드만 보면 눈이 돌아간다, 라는 평가에 그는 억울한 면이 있었다.


 하지만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가며, 세 명이 말하면 없던 호랑이도 만들어낸다고, 지휘관이 잘 모르는 모항 뒷면에서 일어난 메이드대의 여론 유도는 꽤나 효과가 좋은 듯 했다.


 그렇지 않다면, 아우구스트 폰 파르제팔이 새하얀 메이드복을 입고 그를 맞이할 리가 없었으니까.


 지휘관이 방금 연 집무실의 문을 다시 닫았다.


 잠이 덜 깼나, 헛것을 본 게 분명했다.


 탁한 푸른빛을 띈 앞머리로 한쪽 눈을 가리고, 다리를 꼰 채로 늘 냉소를 띄우고 있는 그녀의 평소의 모습을 생각해본다면, 파르제팔이 하얀 메이드복을 정갈하게 입고 있는 것은 절대로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암, 잘못 본 게 분명했다. 세상만사 무감해보이는 반 쯤 뜬 눈과 늘 나른하고 퇴폐적인 목소리로 지휘관을 사역마라 부르며 채근하던 그녀다.


 그런 그녀가 평소의 검은빛 옷과 대비되는 하얀 메이드복을 입고, 옅게 얼굴을 붉힌 채 지휘관을 기다린다?


 헛소리나 다름 없었다. 지휘관이 파르제팔의 메이드복 차림을 보았다고 말한다면 그 프린츠 오이겐조차 질색하는 표정을 지으며 "지휘관, 미친 거 아니야?"라는 말을 할 게 틀림 없었다.


 음, 역시 잘못 본 거겠지. 고개를 끄덕이며 그리 납득한 지휘관이 다시 문을 열었다. 그리하면 평소대로 다리를 꼰 상태로 의자에 기대 앉은 그녀가 물끄러미 지휘관을 바라보며 이리 말할 것이다.


 "조금 늦었구나, 나의 사역마. 아니면, 주, 주인님이라 불러야 할까?"


 끼이익, 다시 지휘관이 문을 닫았다.


 주인님이라니, 파르제팔의 입에서 절대로 나올리가 없는 말이었다. 애시당초 파르제팔은 그녀와 지휘관의 관계를 마녀와 사역마라고 딱 잘라 말하지 않는가. 굳이 따지자면 주인은 마녀인 파르제팔이라 할 수 있었다.


 헛것을 본 것으로도 모자라 환청까지 들리다니, 오늘 몸 상태가 제법 심각한 듯 했다. 요 최근 일이 많다는 자각은 없었는데, 알고보니 몸은 지치기라도 했던 걸까.


 "연차를 써야 하나."


 연차를 별로 써버릇하지 않다보니 연차가 제법 남아있었다. 상부에 연락해 몸이 좀 안좋다고 언급한다면 긴급 연차 하루 정도는 군말 없이 내줄 것이다.


 그러고 나서 벨파스트에 연락한다면 메이드대의 누군가가 그의 수발을 들기 위해 오겠지. 몸 상태는 지극히 정상인 것 같기는 했지만, 혹시 모르니 불러두는 게 좋을 듯 싶었다.


 오늘의 일정을 급히 결정한 지휘관이 몸을 돌려 숙소로 향하려 했다. 그 순간 뒤로 집무실 문이 빼꼼히 열리고, 누군가가 지휘관의 옷깃을 조심스레 잡아챘다.


 "어, 어서오세요, 주인님. 아우구스트에게 무엇이든……, 무엇이든 며, 명령만 내려 주시길."


 뒤돌아 본 지휘관의 눈에 비친 것은 잔뜩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인 채 지휘관을 맞이하는 아우구스트 폰 파르제팔의 모습이었다.


 그렇게 자존심 상할 것 같으면 하지 말지.


 그리 말했다간 저 창문 너머에서 지휘관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파르제팔의 의장, 그 거대한 용의 입에서 불꽃이 뿜어져 나올 것이었기에, 지휘관은 파르제팔에게 이끌려 조용히 집무실로 들어갈 뿐이었다.


 지휘관은 이 모습을 누구도 보지 못했길 바랐다.


 주로 그녀의 자존심을 위해서.




 지휘관의 몸상태는 지극히 정상적이었으며, 비정상적인 것은 파르제팔이었기에 지휘관은 얌전히 오늘의 할 일을 시작하기로 했다.


 당최 무슨 바람이 분 것인지 묻고 싶지만, 창 밖에서 지휘관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파르제팔의 의장─그러니까 용의 시선이 매서웠다.


 평소의 검은 빛 옷은 어디로 간 것인지, 새하얀 메이드복을 입은 파르제팔이 어쩔 줄 몰라하며 지휘관의 곁을 서성였다. 

 

 그 모습이 꼭 관심을 가져주길 원하는 고양이 같아서 지휘관은 작게 웃음을 흘렸다.


 하긴, 평소의 파르제팔도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비서함을 맡은 파르제팔은 비서함 자리에 앉아 잠시간 일에 집중하는가 싶다가도, 금세 흥미를 잃었다며 서류를 휙 치우고는 했다.


 그러고는 나른한 목소리로 지휘관을 향해 "이정도 사소한 시련에 애먹을리는 없겠지."라며 난해한 말을 읊는 것이다.


 그게 파르제팔의 '마녀'라는, 특별 계획함으로서 부족할지 모르는 그녀의 정체성을 나타내기 위한 노력이라는 건, 정작 그 내용이 그다지 별 것 없다는 것에서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이를테면 저 말은 일이 지루하니까 지휘관이 알아서 해, 라는 표현이었다.


 군말 없이 그녀의 서류를 받아들이고 나서 또 십 분여 쯤 지나면, 정작 자기가 미안한지 슬그머니 일감을 다시 가져가곤 한다.


 그 때 빤히 쳐다보면 또 "이렇게 계속 쳐다보면 쉽게 네 속을 알 수 있다, 지휘관." 이라고 말하는데, 그건 부끄러우니 쳐다보지 말라는 그녀 나름의 표현이었다.


 여하튼 제멋대로인 고양이와 똑 닮았다.


 그걸 지적하는 순간 아마 창문 너머 용의 아가리 사이로 들어가게 되겠지만.


 지휘관은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 여겼다. 파르제팔이 메이드복을 차려입은 것도 아마 사소한 변덕이겠지. 뭐가 그녀를 자극한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휘관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파르제팔이 헛기침을 하더니 그에게 물었다.


 "크흠, 지휘관, 마녀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나?"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파르제팔의 모습이 귀여워서 지휘관은 무심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 웃음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파르제팔이 드러난 한 쪽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부끄러움이 가득 실린 얼굴로 그런 표정을 지어봤자 귀여울 따름이라, 지휘관은 작게 웃으며 말했다.


 "그 옷 잘 어울리네."


 정말 그렇기는 했다. 키가 조금 작을 뿐이지 애시당초 비율이 워낙 좋은 파르제팔이었다.


 남색 머리칼과 검은 옷 때문에 조금 창백하게 보였던 평소와 달리, 새하얀 메이드복 사이로 언뜻언뜻 드러난 혈색 좋은 피부가 아름다웠다.


 다리를 감싼 하얗고 얇은 스타킹 너머로 비치는 살구색 피부 또한 그녀의 뇌쇄적인 매력을 더해주고 있었고.


 지휘관의 그 말에 파르제팔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귀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것이 어지간히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늘상 짓던 냉소적인 표정과 다른 툭 찌르면 터질 것 같은 그 모습에 지휘관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어지간히 부끄러웠던걸까, 지휘관에게 들릴락말락 심호흡을 한 파르제팔이 고개를 들고는 커트시를 선보였다. 벨파스트의 커트시에 비한다면야 서투르다 한들, 아름다운 여성이 그리 하는 것만으로도 한 폭의 그림이 되었다.


 "지, 지금은, 당신이 나의 주인이니까. 난 단지 당신을 모시는 존재일 뿐. 그럼, 이 잠시 동안의 꿈을 만끽해."


 용케 더듬거리지 않았구나, 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이리저리 흔들리는 파르제팔의 눈동자 때문이었다. 파르제팔이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지휘관은 늘 있는 그녀의 변덕이라고 생각하곤 그녀의 기분에 맞춰주기로 했다.


 지휘관이 작게 헛기침을 하며 분위기를 바꿨다. 그 작은 소리에 파르제팔의 화들짝 놀라는 바람에 웃음이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지휘관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파르제팔에게 말했다.


 "그럼 음료라도 한 잔 부탁할 수 있을까?"

 "기꺼이."


 파르제팔의 얼굴에 안도가 떠올랐다.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라 그런 것일까. 파르제팔이 종종걸음으로 탕비실로 향했다. 창문 밖에서 지휘관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파르제팔의 의장도 그녀를 따라 움직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파르제팔은 손재주가, 조금 많이 없는 듯 했다.


 우당탕거리는 소리에 놀란 지휘관이 탕비실로 향하자 보이는 건 바닥에 쏟아진 얼음과 음료, 그리고 자기 발을 부여잡고 깡총거리고 있는 파르제팔의 모습이었다.


 탕비실의 큰 창문으로 파르제팔이 늘 데리고 다니는 의장이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있었다. 분명 쇳덩이일 터인데 시무룩해보였다.


 어떻게 된 일인지 조금 예상이 갔다.


 아마 열심히 준비한 음료가 덜컥 고개를 내민 파르제팔의 의장 때문에 넘어지고 말았고, 파르제팔이 홧김에 그녀의 의장을 발로 걷어찬 것이 아닐까.


 그녀의 의장은 저리 덩치가 크고 사나워보여도 어리광쟁이인 면이 없잖아 있었다. 이따금 지휘관에게도 뺨을 부비려 할 때가 있을 정도로.


 다행히 크게 어질러진 것은 없었다. 잔도 깨지지 않았으니 쏟아진 음료 정도만 닦으면 끝날 일이었다. 시리우스에 비하면야 큰 사고를 친 것도 아니었다. 시리우스였다면 벌써 잔이 깨지다 못해 아마 머리까지 음료로 흠뻑 젖어있지 않았을까.


 "파르제팔, 괜찮아?"


 그제야 의장을 발로 찬 통증이 좀 가신걸까, 깡총거리는 걸 멈춘 파르제팔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슬쩍 눈을 감고는 "흥, 아무것도 아니다." 라며 답했다.


 다리가 슬쩍슬쩍 떨리는 것을 보니 아직 통증이 모두 가신 건 아닌 것 같았다만, 모르는 체 해주는 게 옳은 일이겠지.


 별 것 아니라는 듯 지휘관을 탕비실에서 쫓아낸 파르제팔이 음료를 가져온 것은 십 여 분 쯤이나 지난 후였다. 자신감 넘치는 행동과는 다르게 표정에는 옅은 불안감이 어려있었다.


 조금 삐뚤빼뚤하지만 나름 잘린 레몬도 띄워진 레모네이드의 상큼한 향과 맛이 꽤 좋았다.


 "응, 맛있네. 고마워."

 "그래, 마음껏 당신의 메이드에게 응석부리라고, 주인님."


 작게 웃으며 감사를 표하자 파르제팔의 표정이 은근슬쩍 풀렸다. 그 모습에 지휘관이 또 작게 웃었다.


 "읏."


 메이드대 소속의 다른 함선 소녀들의 흉내라도 내려는 것이었는지, 지휘관의 뒤로 돌아가려던 파르제팔이 작게 신음을 내뱉었다. 지휘관이 재빨리 무너지는 그녀를 받아냈다.


 그렇잖아도 키가 그리 크지 않은 편인 파르제팔이 지휘관의 품 안에 파묻혔다. 옅게 배인 레몬의 향과 달큰한 향이 섞여 은근히 풍겨왔다. 그럴 때가 아닌데도 무심코 두근거리고 마는 것은 지휘관이 어쩔 수 없는 남자이기 때문이었다.


 아까 의장을 걷어찬 발목이 시큰거리는 모양이었다. 파르제팔은 지휘관의 품 안에서 창 밖의 의장을 흘긋 노려보았다. 그 거대한 몸뚱아리가 움츠러드는 모습이 퍽 우스웠다.


 "무리하지 말고 앉아있어."


 파르제팔을 안아든 지휘관이 집무실 가운데 놓여있는 커다란 소파로 향했다. 


 지휘관에게 끌어안긴 몸, 드러난 팔뚝에 닿은 지휘관의 손의 감촉과 셔츠 너머 가슴팍의 단단한 느낌에 파르제팔이 작게 움찔거렸다.


 혹여 발목에 무리가 갈까, 지휘관이 조심스레 소파에 파르제팔을 내려놓았다. 파르제팔이 떠나가는 온기에 작게 탄식을 흘렸다.


 이 눈치 없는 남자는 기껏 좋아한다는 메이드복을 입어줬는데도 반응이 시원찮았다.


 파르제팔이 지휘관의 소맷부리를 잡고는 그대로 잡아당겼다. 엉거주춤한 채로 서있던 지휘관의 자세가 무너졌다.


 이번엔 파르제팔이 지휘관을 품에 끌어안을 차례였다.


 "바라보기만 하는 걸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성품인 건, 나도 잘 알고 있어, 주인님."


 가슴팍에 끌어안은 지휘관, 그의 귀에 제 가슴 너머로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들릴까 노심초사하면서 파르제팔이 말을 이었다.


 "지금에 한해서는 당신, 주인님 마음대로해도 상관없어. 당신이 이 찰나, 마녀의 굴복에 만족하는 만큼, 이 순간이 끝났을 때에 온갖 감정이…… 나를 가득 채워줄테니까."


 되는대로 내뱉은 말, 지휘관이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한 눈치로 파르제팔을 바라보았다.


 작게 볼을 부풀린 파르제팔이 다시 한 번 지휘관의 귀에 속삭였다.


 "날 마음대로 다뤄주겠어?"


 이번엔 좀 더 확실한 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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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메이드 제팔이 가슴팍에 코박고 싶다


 죄송합니다. 슬슬 미쳐가는 모양입니다.


 원래는 라투디가 아니라 파르제팔 스킨은 안샀었는데, 전체 스킨 복각 때 홀린 듯 덜컥 구매했습니다. 라투디가 아닌데도 만족도가 높네요. 부끄러우면서 억지로 말하는 듯한 모습이 매우 마음에 듭니다. 이걸 왜 이제 샀지.


 쉬는 날에 옆에 벽람 켜두고 메이드 제팔이를 터치 하고 있는 제 모습을 생각해보니 끔찍하기 그지 없네요.


 완결 내놓고 덜컥 올린 이번 편도 봐주시고 댓글 달아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 인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