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갤에 글 쓴다는 게 할배갤에 실수로 먼저 썼다가 다시 올림;


드디어 로열 네이비 최초로 건조 금딱 구축함으로 저비스가 나왔다. 저비스는 개인적으로도 좋아하는 배고 기념할만한 첫 SSR 구축에 걸맞는 무훈함으로 생각한다.


뭐 글에 요약따위는 없고, 최대한 드립은 배제해서 적었으니 긴글 싫어하는 챈럼들한테는 미리 미안함을 전한다. 




J, K, N형 구축함에 대하여.

J, K, N형 구축함들은 총 25척을 계획하여 24척이 완공되었고, 설계에는 큰 차이가 없다. J형과 K형은 동일한 설계를 가지고 있고 K형은 배수량이 소폭 증가하였는데, 대공무장에서 미미한 차이가 있다.


이 함급은 세개의 소규모 전단에 8척씩 배속되었는데, 눈치챘겠지만 J형과 K형, 그리고 K형이 각각 8척씩 건조되어 각 전단에 배속되었다. 그리고 저비스는 J형 전단의 기함이었다.


이 함급은 전장 115m, 기준배수량 1884톤의 이전의 트라이벌 급에서 오히려 체급이 줄어든 전장 108.7m, 기준 배수량 1690톤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기존의 설계에서 적용되던 보일러를 각방에 쓰는 설계에서 단일 보일러룸을 적용하면서 줄어든 것이다. 이 덕분에 함체의 길이가 줄어들었고 대공용 소화기를 소량 증설 가능했으며 연돌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었다.


다만 이는 보일러룸 침수나 무력화시 동력을 한번에 잃어버릴 수 있다는 단점을 동반했다. 어쨌든 구축함의 미덕은 빠른 기동력으로 피격되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단점은 감내되었다.


최대 선속은 36노트, 15노트에서 5500해상마일, 즉 10,200km의 작전거리를 가졌다.


트라이벌급 구축함에서 변경된 설계사상은 그 뿐이 아니었다. 트라이벌급은 길이방향의 종부재보다는 횡단면 부재의 역할이 강조된 설계였고, 로열네이비에서는 이것이 과도한 횡강도와 다소 부족한 종강도를 가진다고 판단한 것이다. 어쨌건 이 군함은 대서양을 주무대로 활동하게 될 것이고 해상상태 5를 넘어서는 항시 황천에 가까운 바다에서 파로 인한 굽힘 모멘트를 더 잘 견딜 수 있어야하기 때문에 횡부재의 수를 줄이는 대신 종 부재의 수를 늘리는 방향으로 설계가 변경된다.


그리고 함형에서 적용된 또 하나의 주요 변경점은 함수의 형상이었다. 트라이벌급 까지는 구상선수를 가진 클리퍼 보우 clipper bow 형상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때부터 수직 선수가 적용되게 된다. 군함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J형 구축함은 도입년도가 1937년부터로, 1939년인 킹조지 5세급 전함과 비슷하다는 걸 알고 있을텐데, 눈치챘을 수도 있지만 이 둘은 공통적으로 내해성이 그다지 좋지 않아 선수가 항상 젖어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J형의 선수 설계는 이후 S 클래스 구축함부터 클리퍼 보우 형상으로 롤백되게 된다.


무장면에서 J형 구축함은 기존의 트라이벌 급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포격 중심의 트라이벌급에서부터 포가가 4개에서 3개로 하나가 줄어들어, 45구경장 QF 4.7” Mark XII 연장포탑 하나가 어뢰발사관으로 대체되어 10발의 Mk.IX 21” 중어뢰로 무장하였다.

대공무장에는 변화가 없었는데, 1기의 4연장 QF 2파운더 대공포, 2개의 4연장 0.5” Mk.III 대공기관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이후 대공기관총은 20mm 오리콘으로 업그레이드 된다. 당연하게도, 이러한 소구경 화기 중심의 대공무기는 단거리 개함방공 위주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저비스의 함생에 대해서 알아보자.

저비스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J형 구축함의 맏언니로, 1937년 8월에 기공되어 1939년 5월에 취역했다. 그리고 네 달 뒤 세계 2차대전이 발발함.


벨파스트가 취역 초기에 기뢰에 옆구리에 멍이 들어서 거의 폐선 직전까지 간 적이 있었던 것하고 유사하게, 저비스는 스웨덴 선적의 화물선이랑 1940년에 들이받고 취역하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도크에서 네달간 수리를 받았다. 이 기간동안 함장인 필립 맥은 자매함인 야누스NTR를 지휘하고 있었고 7월에 수리가 끝난 저비스가 지중해 말타에서 14 구축전단으로 복귀하면서 본처에게로 돌아가게 된다. 그 뒤 2년동안 저비스는 상대적으로 통상적인 임무들을 수행했는데, 해안순찰을 하거나, 육군을 위해 해변에 있는 목표물을 타격, 또는 말타의 상선을 호위하고 주력 함대의 움직임을 숨기기위한 교란 작전에 참여했다.


1941년에는 지중해 전역에서 하나의 굵직한 해전이 있었고 저비스도 거기에서 한 몫을 하게 된다. 케이프 마타판 해전이다. 여기에서 저비스는 항공어뢰에 피격, 병신이 되서 부유하던 파스타 중순양함 폴라를 구원하기 위해 분투하던 자매함 차라를 용궁으로 보내는 데 일조한다.


폴라는 3월 27일부터 29일까지 일어났던 해전의 둘째날, 폴라는 회피 기동 도중 자매함 피우메와 충돌 직전 선속을 줄이던 상황에서 항공 어뢰에 피격됐고, 구획의 침수로 인해 보일러가 침수되어 기동불가능한 상태가 되어있었다. 밤 10시경, 로열네이비 함대는 약 93km 떨어진 지점에 있는 폴라를 포착하게 되고, 그 후 약 2시간 뒤 약 10km 정도 거리까지 접근하게 된다. 폴라는 이 함대를 아군이라 생각해서 붉은 색의 신호탄으로 이끌었고, 잠시 후 영국 구축함 두대, HMAS 스튜어트와 HMS 하복은 차라와 피우메를 영거리에서 서치라이트로 밝혔다. 차라는 몇분 사이 워스파이트에게 옆구리에 네방을 얻어맞았고 밸리언트에게 다섯방을 얻어맞는다. 스튜어트는 병신이 된 차라에게 어뢰를 쏴서 최소 한발을 맞췄고 동행한 하복도 네발을 더 쐈지만 몇발이나 맞췄는지는 아무도 모름. 차라의 함장은 오전 2시, 함을 포기하기로 결정했고, 저비스는 마찬가지로 불구가되어 부유하던 폴라의 주변에서 표류하는 차라를 향해 어뢰를 발사, 여기에 피격된 차라는 탄약고 폭발로 수면 아래로 향한다. 그 후에는 HMS 누비안과 함께 승조원이 모두 이함한 폴라를 뇌격처분한다. 이 날은 고리치아를 제외한 차라급 세자매가 사이좋게 손잡고 용궁으로 간 날이었다.


이후 저비스는 크레타 공방전에 참여하게 된다. 이 전투에서 로열네이비는 많은 함정을 잃었는데, 이 중에는 저비스의 자매함인 HMS 켈리도 포함되어 있었다. 켈리는 K급 구축함의 선도함이었다. 여름동안 저비스는 토브룩 항으로 물자를 보급하는 임무를 수행했고, 그 해 12월에는 1차 시르테 해전에서 구축함 전단를 이끈다. 알렉산드리아로 귀환하던 도중, 저비스는 이탈리아의 인간어뢰 공격으로 파손되어 약 6주간의 수리를 받았다. 이 때 퀸 엘리자베스와 밸리언트는 착저할 정도로 심한 손상을 입었다.


1942년에는 1월부터 앓아 누운 맥 함장을 대신하여 폴란드 함장이 부임한다. 그리고 그의 지휘 하에 저비스는 14 구축전단을 이끌었고, 2차 시르테 전투에 참여했다.

1942년에는 1월 2일부터 구축함 한 척과 어뢰정 한 척이 호위중이던 이탈리아 수송대를 그리스 구축함 퀸 올가와 함께 약 30분간의 전투 끝에 적 어뢰정을 격침시키고 나포한다.그 후로는 시칠리아, 칼라브리아, 살레르노, 안치오, 그리고 아드리아 해 일대에서 작전을 하며 영국 육군 제 8군과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을 보조했다. 10월의 에게해에서는 그리스의 도데카니사 제도에서도 작전을 하는데 이 때 함께 작전하던 HMS 펜을 유보트의 공격으로 잃기도 했다.


1944년에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보조하다 정비를 겸해 퇴역하게 되었다. 1945년에는 지중해 지역에서 전후의 혼란상황에서 경비 임무를 위해 재취역하게 되었고 1946년에는 런던의 채텀에서 예비역으로 돌려져, 지역 사관생도를 위한 훈련용으로 쓰이게 된다. 1947년에는 폐기대상 목록에 오르게되어, 1948년에 폭발물 시험의 대상이 되어 함생을 마감한다.


저비스는 상당한 강운함이었다. 5년 반에 달하는 긴 기간동안 13회의 굵직한 작전에 참가하면서, 저비스는 전투중 단 한명의 승조원도 잃지 않았다. 1944년 안치오에서는 상륙작전을 보조하면서 자매함 야누스와 함께 포격도중 독일군의 활강폭탄 공격에 피격되었는데, 야누스는 탄약고 폭발로 160여명의 승조원과 함께 침몰했지만 저비스는 함수가 날아가는 피해를 입으면서도 놀랍게도 한 명의 사상자도 발생하지 않았고 80명이 넘는 야누스의 생존자를 구출한다.


충분히 기념함이 될만한 배였을텐데 폐기된 게 너무 안타까운 배라고 생각한다. 워스파이트와 얘가 보존되었다면 2차대전의 전설적인 전함, 순양함, 구축함이 모두 역사에 실물로 남았을텐데 영국의 전후 경제난이 안타까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