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로 함선 소녀의 신체는 그 이름의 원본이 되는 함선의 규모에 따르는 경향이 있는 듯 했다.


 물론 퀸 엘리자베스나 워스파이트, 나가토처럼 구축함에 비교되는, 추세에 벗어난 함선 소녀들이 있는 것처럼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오른 이유는 저 한 구석에서 비서함 업무를 하다 말고 잠에 빠져 있는 시나노와, 그 옆에서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시나노를 내려다보고 있는 무사시 때문이었다.


 뒤에서 살랑살랑거리는 여우 꼬리 때문에 덩치가 더욱 커보이는 것도 있지만, 시나노나 무사시는 분명히 일반적인 여성에 비한다면, 아니, 남성에 비해서도 키가 매우 큰 축에 속했다. 


 가뜩이나 신고 있는 신발의 굽까지 높아, 나름 남성 중에서도 키가 큰 편인 지휘관조차도 눈높이가 맞질 않을 정도였으니.


 본인 말로는 6척, 그러니까 2미터가 조금 안되는 정도라고 했던가. 실제로 잔뜩 솟아있는 귀까지 고려한다면 2미터가 넘지 않을까. 점심 시간이 지나고 시나노와 함께 들어온 무사시를 봤을 때는 순간 위축될 뻔까지 했다는 건 자그마한 비밀이었다.


 자고 있는 몇 번인가 시나노를 툭툭 건드린 무사시는 이내 한숨을 푹 내쉬더니 지휘관의 곁으로 다가왔다. 도저히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 그런 듯 했다.


 "미안하군, 첩이 대신 사과하지."

 "아뇨, 음, 괜찮습니다. 오늘 많이 피곤했나 보네요."


 시나노 씨는 늘 저러니까요, 라는 말은 집어 넣었다. 못마땅한 표정을 보니 군말을 덧붙였다간 시나노에게 불똥이 튈 게 뻔했다. 다만 무사시도 시나노의 사정을 알고 있는지 그 이상 억지로 시나노를 깨우지는 않았다.


 "첩에게 비서함 업무를 알려주겠다해서 기껏 따라왔거늘, 오후 시간 얼마 되지도 않아 저래서야."

 "아아, 무사시 씨는 아직 비서함을 해보신 적이 없으셨죠."


 무사시는 함선 소녀로 현현된지 얼마 되지 않아 지휘관의 모항에 배정받지도 그리 긴 시간이 되지 않았다. 시나노와 아마기, 아즈마로부터 이 모항의 평이 좋다는 이유로 지휘관 소속이 되기를 희망했다고 하던가.


 무사시와 첫 만남에서 그 소리를 듣고 나니 휘하 함선 소녀들을 위해 노력한 보람이 있는 듯 하여 뿌듯했던 것이 몇 달 전이었다.


 다행히 무사시도 별 탈 없이 지휘관의 모항에 적응했다. 별 탈이 없다고 할까, 오히려 적응이 매우 빠른 축에 속했다. 여하튼 한 달만에 대형 작전에서 세이렌을 상대로 걸출한 활약을 하며 제 존재감을 드러내고, 손실은 커녕 생채기도 없이 모든 함선 소녀들이 귀환했을 정도 였다.


 아주 살가운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얼마 전 모항을 메이드 카페로 만들어 버렸을 때도 다른 함선 소녀들을 챙기며 접대하는 모습에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의외로 온화하고 잔걱정이 많은 성격이기도 했다.


 "어쩔 수 없지, 지휘관, 업무가 조금 미숙하더라도 이해해주길 바라."


 지금만해도 그랬다. 어디까지나 비서함 업무를 견학하러 온 입장이었으니 아무 말 없이 떠나도 될 터인데, 무사시는 지휘관의 책상 앞에 놓인 서류철을 흘긋 보더니 그리 말했다.


 하지만 비서함 책상은 이미 시나노가 점거한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중앙의 접대용 탁자와 소파는 업무를 보기엔 좋지 않았다. 허리를 잔뜩 숙여 일하는 건 꽤나 부담되는 일이었으니.


 무엇보다 무사시가 옷을 아슬아슬하게 걸쳐 입은 탓에 허리를 살짝 숙이면 보이면 안될 것이 보일 것 같았다.


 "잠시만 기다려주실래요? 시나노 씨를 좀 휴게실에 데려다주고 올게요."

 "알겠다. 첩은 그간 시나노가 해두었던 일을 잠깐 보고 있지."


 데려다 준달까, 깰 기미가 없는 시나노를 안아 올려 옮기는 것에 가까웠지만.


 시나노는 그 짧은 새에 깊이 잠들었는지 지휘관이 다가가도 전혀 깰 기미가 없었다. 하긴, 무사시와 속닥거리며 말하지도 않았는데 깨지 않는 걸 보면 코를 골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물론 언젠가 들었던 코골이마저도 작고 귀여웠으니 크게 문제될 건 없었다.


 미인은 이래저래 치사한 존재였다.


 시나노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였지만, 체격이 있는 여성을 옮기는 일은 쉽지 않았다. 무게의 문제라기보다는 그 풍성한 꼬리가 문제였다.


 도대체 무슨 꿈을 꾸는건지, 지휘관이 시나노를 안아들자 시나노의 꼬리가 지휘관을 감싸 안았다. 아니, 감싸 안다 못해 아예 지휘관의 품 안으로 파고드는 판이었다.


 사실 깨어있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지휘관에게 꼭 달라붙는 통에 한 걸음 한 걸음 움직이는 게 고역이었다.


 그 탓에 가까운 거리를 옮기는데도 시간이 꽤나 걸려서, 지휘관이 휴게실을 나선 건 십여분이나 지난 후였다.


 소파에 내려놓으니 잠깐 깬 시나노가 지휘관에게 응석 부리며 입맞춤을 요구한 탓이 컸다. 입술을 맞대는 가벼운 입맞춤도 아닌 혀를 섞는 진득한 것을 원하는 바람에 혹여 질척이는 소리가 바깥에 울리지는 않았을까 노심초사할 정도였다.


 "시나노가 그대를 꽤 잘 따르는군."


 자리에 돌아오자 무사시가 빙긋 웃곤 일어서며 지휘관을 맞이했다. 혹여 타액이 번들거리고 있을까 지휘관은 입가를 쓸며 아하하, 하고 작게 웃음을 흘렸다.


 "후후, 탓하는 건 아니야. 업무는 다행히 어려운 건 없더군. 그다지 걱정할 필요는 없을 듯 해."

 "그래도 혹시 어려운 일이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걱정해줘서 고맙지만, 오히려 첩은 지휘관이 걱정되는 걸. 피곤하다면 잠깐 시나노와 자고 와도 괜찮아. 이 정도 업무라면 그대가 없어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으니."


 "자고 있을 그대를 지켜줄 수도 있고 말이야." 무사시는 그리 말하며 자애로운 미소를 띄웠다. 고고하고 냉철해보이는 인상에 피어난 작은 미소를 잠깐 홀린 것처럼 올려다 본 지휘관이 부끄러움에 슬쩍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지휘관보다 무사시의 키가 큰 탓일까, 애써 정면을 향한 시야를 가득 채운 것은 도리어 더 선정적인 장면이었다.


 넉넉한 품의 옷, 시나노도 그렇지만 어깨까지 올리긴 커녕 팔뚝 중간 쯤에 걸쳐있는 옷 탓에 훤히 드러난 새하얀 윗가슴, 그 묵직한 중량감과 투명한 피부 너머로 옅게 비치는 푸른 실핏줄이 자극적이었다.


 그렇다고 아예 시선을 내리 깔자니 짧은 치마 아래로 보이는 길죽하고 육감적인 각선미와 트인 치마 탓에 언뜻 보이는 속옷, 그것도 얇은 끈이 더욱 눈 둘 곳이 없었다.


 그 시선을 눈치챈 것인지 무사시가 슬쩍 팔을 벌리며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지휘관에게 넌지시 말했다.


 "아니면, 첩의 품 속에서 잠들고 싶다거나? 살갗이 그립다면 부끄러워 말고 언제든지 첩의 품 속으로 뛰어들어도 좋아."


 지휘관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리도 많은 함선 소녀들과 피부를 맞댔으면서 지휘관은 여전히 숙맥인 면이 없잖아 있었다. 물론 툭툭 놀리는 맛이 있으니, 많은 함선 소녀들이 그 점을 좋아하긴 했다.


 크흠, 헛기침을 하곤 고개를 아예 돌리며 경직된 모습으로 제 자리로 향하는 지휘관의 모습에 무사시가 싱긋 웃었다.


 과연, 이런 맛에 다들 그리도 제 비서함 차례를 기다리는구나.


 무사시가 슬쩍 입술을 핥았다. 시나노도 그렇고, 다른 중앵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듣고 윗선에 제법 강압적으로 나가면서까지 이 모항으로 온 보람이 있었다.


 애써 분위기를 바꾼 지휘관의 노력 덕에 대화가 이어지진 않았다. 픽 웃은 무사시도 자리에 앉아 제 할 일을 시작했다. 오늘만 그런건지, 아니면 평소에도 그런 것인진 모르겠지만, 비서함에게 주어진 업무는 그다지 어렵진 않았다.


 혹은 지휘관이 그리 안배를 해주었거나.


 "지휘관 님, 다녀왔습니다."

 "응, 고생했어. 잠깐 쉬고 있을래? 바로 의뢰서 확인해줄테니, 끝나면 바로 들어가서 쉬어."

 "도와드릴 건 없나요?"


 어차피 별다른 일이 있지도 않을 터이니 잠깐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해 쉬고 와도 괜찮았을 터인데, 뭐가 그리 급하다고 위탁 의뢰가 끝나자마자 돌아왔는지.


 위탁 의뢰에서 돌아온 카시노와 그녀를 맞이하는 지휘관을 빤히 바라본 무사시가 픽 웃었다.


 다른 함선 소녀들에게 돌아올 곳이 되어주는 모습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자고로 위에 서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었다.


 자신의 능력을 과소평가 하는지, 아니면 함선 소녀들이 다칠까 무서운지 작전에 임하는 모습이 조금 소극적인 모습이 아쉬웠지만, 그 정도야 충분히 감내해줄 수 있었다. 제 능력을 과대평가하고 자만심에 절어 되도 않는 무리수를 두는 것보다는 백배 천배 나았다.


 무엇보다 다른 아이들을 돌보는데 힘껏이면서 자기를 돌보지 않는 그 모습이 마음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따지고 보면 지휘관이 이 곳에서 가장 약한 이일텐데.


 그렇다면 너는 어디로 돌아가야 할까.


 흐음, 무사시가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누군가를 돌보고 챙겨주는 걸 좋아하는 무사시였다. 특히나 무사시가 '여리다'고 판단한 이라면 더더욱.


 그런 면에서 지휘관은 무사시의 기준에 완벽히 부합했다.


 제 휘하의 함선 소녀들이 기댈 수 있는 존재로 있으려하지만, 정작 자신은 기댈 곳을 만들지 않는 삶. 무엇이 지휘관을 그리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실이 품에 끌어안고 달래주고 싶다는 모성애를 자극했다.


 가능한 한 첩에게서 떨어지지 않도록 하려면─.


 "엣취."


 갑작스러운 재채기 소리에 무사시가 고개를 돌려 지휘관을 바라보았다. 살짝 붉어진 눈, 훌쩍이는 모습에 덜컥 걱정이 먼저 들었다.


 "괜찮나, 지휘관? 무슨 일이지? 어디 아픈가?"

 "아뇨, 큼, 그런 건 아니에요."


 지휘관이 놀란 듯 바짝 선 무사시의 꼬리를 보며 말했다. 시나노도 그렇더니, 무사시도 감정이 꼬리로 드러나는 모양이었다.


 여하튼 정말 걱정할 건 아니었다. 단순히 털이 코에 들어가서 재채기를 했을 뿐이었으니까. 알러지가 있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가뜩이나 꼬리가 풍성한 둘─시나노와 무사시가 한 공간에 있다보니 평소보다 털이 많이 날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계절이 넘어가는 때라 그런지 더한 것 같기도.


 하지만 잔걱정이 많은 무사시는 그냥 넘어가지 못하는 듯 했다.


 "되었다, 아프면 먼저 들어가서 쉬어도 된다. 아니면 잠깐 여기서 쉬어도 좋고. 첩의 품이라도 괜찮으면 얼마든지 빌려줄테니."

 "어디 아픈 건 아니, 엣취, 에요."


 재채기를 하면서 그리 말하는 건 설득력이 없던 탓일까, 무사시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한숨을 푹 내쉰 무사시가 자리를 옮겨 소파에 앉고는 제 허벅지를 툭툭 쳤다.


 "아뇨, 그, 진짜 괜찮은, 엣취, 데."

 "눈가에 맺힌 눈물이나 닦고 말하도록 해. 자, 첩의 무릎은 준비 됐으니, 빨리 여기 누워 잠깐 쉬는 게 좋아."


 지휘관의 눈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정말 별거 아닌데, 그렇다고 대놓고 털이 날려서요, 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나.


 "다리가 시렵구나. 지휘관, 어서. 아니면, 첩의 무릎은 싫다는 걸까?"

 

 어떻게든 지휘관을 쉬게 만들겠다는 의지일까, 무사시는 기어코 지휘관에게 피할 수 없는 질문 아닌 질문을 던졌다. 지휘관은 어쩔 수 없이 쭈뼛거리며 소파로 향했다. 그제야 무사시는 짐짓 화난 듯한 표정을 풀고 자애로운 웃음을 띄웠다.


 짧은 치마, 가려지지도 않은 허벅지가 고스란히 뺨에 닿았다. 살랑거리는 꼬리가 조심스레 소파에 자리를 잡은 지휘관의 품을 덮었다. 따스한 살갗, 풍성한 꼬리가 따뜻했고, 잘 손질된 꼬리에서 슬그머니 풍겨오는 샴푸 향기에 섞인 푸근한 냄새가 기분이 좋았다.


 다만 재채기의 근원지가 더욱 가까이 다가왔기에, 필연적으로 재채기는 더 잦아질 수 밖에 없었다. 도리어 재채기에서 잔기침으로 바뀔 정도였다. 길죽한 꼬리털이 뺨에 붙어 간질간질했지만 지휘관은 필사적으로 꿈틀거리는 제 손을 참아냈다.


 그 안쓰러운 모습이 도리어 무사시의 보호심을 자극한 걸까, 무사시는 천천히 지휘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괜찮아. 일에 대한 걱정은 잠깐 내려 놔. 첩의 품에서 잠깐 잠드는 것 정도로 무어라 할 이는 아무도 없고, 없어질 거야."


 피곤이 쌓이긴 한 모양인지, 눈이 슬그머니 감겼다.


 

 시간이 지나 무사시가 비서함을 하는 날이 돌아왔다.


 그리고 지휘관은 무사시의 꼬리에 메여 무사시의 옆에서 떨어질 수 없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됐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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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앵 지휘관 자격엔 털 알러지가 없어야 한다는 항목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날이 쌀쌀해지니 따뜻한 것이 그립습니다. 무사시와 시나노의 꼬리 사이에 파묻히면 무척 따뜻하지 않을까요. 털 범벅이 되어도 그 사이에 파묻혀 낮잠을 자보고 싶습니다. 세상 음습한 욕망입니다. 하지만 솔직히 저만 그렇지는 않을거라 생각합니다.


 한동안 논문을 쓰다가 다른 글을 쓰고 싶어서 키보드를 붙잡았습니다. 한동안 논문 첨삭만 계속했더니 글이 딱딱해진 것 같은데, 생각해보니 처음부터 그랬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그나저나 저는 논문 쓰기 싫어서 취직을 한 건데 왜 회사에서 논문을 쓰고 있을까요. 학사 나부랭이에게 뭐 이리 많은 것을 바라는 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무사시가 눈에 밟혔습니다. 장신 함몰 빅찌찌 여우 마망이라니, 세상에 꼴잘알 같으니라고. 


 언제나 그렇듯 별 영양가 없는 푸념과 헛소리입니다.


 이번에도 덜컥 올린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