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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 변태라니.... 불가항력이었어."


지휘관이 애써 변명을 늘여 놓았다.

바람에 치마가 휘날렸을 때 허먼의 팬티를 봤기 때문이다.


"불가항력? 그런 걸 허먼이 믿을 거라고 생각해? 제대로 자기소개를 하고 싶었는데... 방금 일은 기억해둘 거라고!"


허먼은 그 말이 거짓이라는 걸 안다.

치마가 펄럭인 순간, 지휘관은 온 신경을 집중해서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녀의 치마 속을 말이다.


"허먼, 잠깐만, 허먼!"


허먼은 도망쳤다.

그녀는 화가 난 듯 달려가지만 어쩐지 마음이 울적함을 느꼈다.


지휘관과 한참 멀어진 후, 허먼은 어떤 골목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두 눈을 감았다.


"또 화 내버렸어...."


치마 믿단을 꽉 쥔 손이 조금 떨렸다.


'이러려고 했던 게 아닌데. 너무 당황해서 그만....'


몸이 바뀌면 마음도 함께 변할 줄 알았다.

더 강해지면 마음도 따라서 강해질 줄 알았다.

그러나 지휘관과의 만남으로 깨달았다.


그건 헛된 바람일 뿐이었다.

변할 거라는 믿음은 허상이었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시간이 지나고 육체가 변해도 허먼은 허먼인 채로였다.


'자기소개 열심히 준비했는데.'


허먼은 앙증맞은 주먹을 꽉 쥐며 슬픔을 삼켰다.






"...."


그로부터 며칠 후.

허먼은 비서의 역할을 하기 위해 함장실로 갔다.


'그렇게 화를 냈는대도...'


지휘관은 그녀를 불러주었다.

이게 화해의 의미라는 걸 모를 정도로 눈치가 없는 허먼은 아니었다.


'오늘은 꼭.....'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그리고 사과를 하고 싶었다.

저번에 너무 화를 내서 미안하다고.


그런 결의를 다지며 문을 열었다.


"지, 지휘관!"

"아, 왔구나."


지휘관이 퀭한 눈으로 그녀를 보고 미소 지었다.


"미안, 업무가 바빠서."

"아, 아니야."


허먼은 방을 둘러본다.

어마어마한 서류의 지옥이었다.


"이번에 이런저런 것들에 손을 댔더니 서류가 좀 많아졌어. 미안한데 커피 좀 타줄래?"
"흐, 흥! 허먼처럼 유능한 비서를 불러 놓고 고작 커피?"

"미안."

"...미, 미안할 것 까지는 없어. 기다려! 정신이 번쩍 들 커피를 내줄 테니까!"

"고마워."


허먼은 문을 쾅 닫고 나왔다.

하지만 복도를 달릴 때 그녀의 표정은 조금 밝아져 있었다.

문을 세게 닫은 건 어쩌면 기쁨때문이었을 지도 모른다.

애당초 그녀는 그런 줄도 모르고 있었으니까.


"어머, 허먼. 어디를-"

"커피 타러!"


누군가 말을 걸었지만 허먼은 얼굴도 보지 않고 외쳤다.

그 누군가가 요크타운이었다는 것을 모르는 채, 그녀는 주방으로 달려갔다.


"커피, 커피..."


주방에서 허먼은 메이드들이 만들어둔 '주인님이 좋아하시는 커피를 만드는 순서'를 보며 커피를 타기 시작했다.


'1미리도 틀리면 안 돼.'


허먼은 눈에 불을 켜고 가루 하나, 물 1밀리리터까지 재 가면서 커피를 만들었다.

그렇게 만든 커피에서는 달콤한 향이 물씬 피어올랐다.


"다 됐다!"


허먼은 다 만든 커피를 들고 지휘관에게로 돌아갔다.


"자, 커피!"

"아, 고마워."


잔과 컵을 내려놓자 지휘관이 바로 한 모금 마신다.


"어때? 허먼이 만든 커피는?"

"응, 맛있어."


지휘관은 건성으로 대답했다.

사실 건성이라는 말은 조금 틀렸다.

업무에 집중하고 있어서 아마 허먼이 물어본 줄도 몰랐을 거다.

반사적으로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었다.


"....."


허먼은 목구멍까지 튀어나오던 말을 삼키고 뒤로 물러섰다.


'잘 참았어.'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그녀는 지휘관이 일을 끝날 때까지 기다린다.

계속. 그리고 계속.

그러나 비서 교대 시간이 다가올 때까지 지휘관의 일은 반도 끝나지 않았다.


"....."

"커피 한 잔 더 가져다줄래?"

"그, 그렇게 커피만 계속 마시면 안 돼! 바보 지휘관."


커피만 내오기를 벌써 다섯 번 째.

지휘관은 누가 봐도 카페인 하루 섭취량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미안.. 잠을 잘 못 잤더니 계속 졸음이 쏟아져서. 부탁 좀 할게, 허먼."

"그렇다면야... 어쩔 수 없지..."


허먼은 다시 커피를 타다줬고, 그런 그녀를 조용히 지켜보는 누군가가 있었다.


"....."


물론 허먼은 그녀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했다.

마지막 커피를 내다주며 허먼은 지휘관의 책상 앞에 우두커니 섰다.


"....."


지휘관은 그녀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건지, 그림자가 드리웠음에도 묵묵히 일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바보 지휘관, 이대로 나 근무 끝까지 일할 생각이야?"

"어?"


지휘관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그의 행동에 허먼은 깜짝 놀랐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자기 일이라도 열심히 하면 얼마나 좋아!"

"....고마워."


지휘관은 옅은 미소를 보이고는 다시 일에 집중했다.


"...."


그렇게, 교대 시간이 되었다.





"...벌써 커피를 여섯 잔 마셨어."
"인수인계 내용은 그게 끝인가?"

"아....."

"알겠어. 고생했어, 허먼."


교대자는 티르피츠였다.

문이 천천히 닫히는 와중, 그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지휘관. 업무가 바쁘다고 들었다."

"아, 응... 좀 많네."

"거들어주지."

"아, 정말 고마워."


탁.

문이 닫혔다.


"...."


둘의 대화를 들은 허먼은 시무룩해졌다.


'나, 나도 도와준다고 했어야 했나....'


그러나 문제는 허먼이 저런 일을 잘 모른다는 것이었다.

반면 티르피츠는 신중한 성격인 만큼 저런 잔업무도 잘 처리했다.


"난...."

"허먼."


고개를 들어보니 요크타운이 있었다.

그녀가 싱긋 웃으며 말한다.


"잠깐 이야기를 좀 할까?"





허먼은 그간 있던 일들을 말했다.


"그렇구나, 그래. 허먼도 열심히 준비했었지."

"....지휘관은 내 팬티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어!"

"음, 그래. 지휘관님이 나빴어."


나빴다라는 말에 허먼이 움찔했다.


"...."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입을 다물었다.

잠깐 동안 흐르는 침묵을 깬 것은 요크타운이었다.


"허먼. 열심히 자기소개 준비했는데 펼칠 기회가 없어서 속상했겠네."

".....조금 달라."


허먼이 속상한 건 단지 자기소개를 할 기회가 없어서가 아니었다.

그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는 찰나, 요크타운이 부드럽게 말한다.


"그래? 그럼 어떻게 다른지 얘기해줄래?"

"....."


허먼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본다.

인자한 미소는 언제나와 같았다.


"허먼은...."

"응."

"허먼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모르겠다니, 뭘?"

"나도.... 나도 지휘관한테 잘 대해주고 싶어. 화도 안 내고, 같이 웃고. 그, 그게 안 된다면 일을 거들어주면서 시간을 보내거나..."


티르피츠처럼 말이다.

그녀도 붙임성이 좋은 성격은 아니라고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휘관과 함께 있을 때 특유의 잔잔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조곤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 그런데 나는.. 나는 매번 화만 내. 매번 지휘관한테 못되게 굴었어... 난.. 난.. 그런 게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줄 알고..."


허먼이 울음을 터트리듯 신음하며 말을 멈췄다.

감정이 격해지고 있었다.


"나아질 줄 알았구나. 이제 허먼은 옛날의 허먼이 아니니까. 몸과 마음이 함께 강해질 줄 알았던 거야."


부드러운 음성이 귓가에 박혔다.

허먼은 결국 두 눈을 꼭 감으며 눈물을 똑, 똑, 떨어뜨렸다.


"응... 변할 줄 알았어...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하지만 아니었어. 나는.. 나는....."

"예전과 똑같아서 화가 났구나. 허먼 너 자신에게."

"응..."


허먼은 이를 악물며 울었다.

흐느끼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최대한 노력했다.

지금 소리를 내면 완전히 무너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우리 착한 허먼."


요크타운이 그녀의 어깨를 토닥인다.


"하지만 허먼. 그렇게 슬퍼하는 건 고치고 싶다는 거지? 더 나아지고 싶다는 거, 맞니?"

"응... 나아지고 싶어. 나도.. 나도 지휘관과 더 가까운 사이가 되고 싶어...! 더 친해지고 싶어!"

"첫 단추를 잘 못 꿰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면 돼."

"....?"


허먼은 고개를 든다.


"언니랑 함께 가자. 언니랑 함께라면, 허먼도 할 수 있어. 그렇지?"

"......!"


마치 후광이 비치는 듯한 미소였다.

허먼은 눈물을 닦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푹 쉬도록 해, 지휘관."

"응, 티르피츠도. 도와줘서 정말 고마워."

"별 것 아니야. 다음에 또 같이."

"응."


자정이 한참 넘은 시간.

겨우 일을 끝낸 지휘관이 티르피츠를 보내고 문을 닫으려고 할 때였다.


"지휘관님."

"요크타운, 그리고 허먼? 이 새벽에 무슨 일이야?"

"잠깐만 시간 될까?"

"뭐, 잠깐이라면...."


피곤해서 쓰러지기 직전이었지만 지휘관은 정신줄을 붙잡았다.

허먼이 우물쭈물하는 것이 뭔가 이상했기 때문이다.


"자, 허먼. 자기소개하렴."


'자기소개?'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제와서 자기소개?


그러다 문득, 허먼과 다시 만났던 그날이 떠올랐다.


-어, 어디를 보고 있는 거야, 이 변태!!


'아아.'


그날, 허먼은 화를 내며 뛰쳐갔다.

하지만 지휘관은 급하게 그녀를 불러 세우려고 했다.

뛰쳐가는 그녀의 표정이 꼭 울음을 터트리려는 것 같았기에.

그러나 일이 바빠서 까먹고 있었던 것이다.


"지, 지휘관. 만나서 반가워....."


허먼이 부끄러워하면서도 말을 잇는다.

저 당찬 성격에 이런 낯부끄러운 상황을 견디기가 쉽지 않을 텐데, 어지간히도 각오를 다진 모양이었다.


"허먼은 지휘관을 다시 만날 날을 계속 기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딱히 네가 오지 않아도 난.. 난....! 자, 잠깐. 이러려던 게.. 이러려던 게 아닌데... 아...."


허먼이 당황한 나머지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요크타운이 진정시키려고 애쓰지만 쉽지 않아 보였다.


"응, 허먼. 나도 허먼과 다시 만날 날을 기다렸어."

"아....."


그 말에 허먼이 정신을 차렸다.


"이렇게 다시 만나서 반가워, 허먼."

".....! 그, 그게 난...."


허먼이 뭔가 말하려다가 입을 도로 다물었다.

무언가를 꾹 참는 것처럼 두 주먹을 쥔 소녀.

그 소녀는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머릿속에 하얗게 질리고 있어 결국 가장 하고 싶었던 말만 뱉었다.


"이, 이제 허먼은 1인분 할 만큼 강해졌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지휘관. 허먼도 지휘관의 힘이 될 수 있어!"


허먼이 호통 치듯 외쳤다.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고, 너무 부끄러운 나머지 눈도 못 뜨는.

그러나 어떤 반응이 올지 몰라 두려워서 살짝 겁에 질린 표정.


지휘관은 성큼 다가가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햐우!?"


허먼이 깜짝 놀라 몸을 움찔했다.

안기기 싫어하는 고양이처럼 조금 몸을 뺐는데, 지휘관이 꼭 껴안자 그런 반응은 곧 사라졌다.


"자, 허먼도."


요크타운이 허먼의 손을 잡고 지휘관의 등을 둘렀다.

그렇게 서로가 꼭 껴안은 자세가 되었을 때, 지휘관이 말한다.


"고마워 허먼. 정말 보고 싶었어."

"흐, 흥...! 그, 그런 말을 들어도...."


갑자기 기가 살아난 허먼이 평소의 모습대로 돌아오는 순간.

지휘관이 축 늘어지며 옆으로 스르륵 미끌어졌다.


"많이 피곤하셨나 보네."

"마, 마지막 말은 못 들었겠지?"

"아마도. 자, 허먼. 함께 방으로 옮기자."

"응...!"


그렇게 또 하루가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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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람 그림, 단편문학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