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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내린 바다 위.

폭발음과 함께 불꽃이 치솟아 올랐다.


"음. 완승이네."


나는 쌍안경을 통해 전투를 관찰하고 있었다.

릴라의 전투가 한창이었고, 방금 막 끝난 참이었다. 릴라의 압승으로.


'갑작스러운 전투라서 조금 걱정했는데.'


릴라의 스펙이나 전투방식은 굉장히 거칠었다.

자신의 방어보다 차라리 살을 주고 뼈를 취하는 식의 전투방식.

보고 있는 사람의 마음을 조마조마하게 만드는 전투였지만 릴라는 그런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손쉽게 승리했다.


"보고하겠다."


전투를 끝낸 릴라가 피와 먼지의 범벅이 되어서 내 앞에 섰다.


"적 함대를 점멸시켰다."

"....그게 끝?"

"뭘 더 바라지?"

"저기, 릴라. 항상 말하지만 보고는 좀 더 상세히 해줬으면 해. 몇 기를 파괴했고, 부수적인 전리품은 뭐가 있고, 이런 식으로."

"흐음...."


릴라가 미간을 오므린다.


"대충 눈에 보이는 건 다 파괴했다. 전리품은 없다. 전부 저 바다 깊은 곳으로 가라앉았으니까."

"하하...."

"내 가슴에 벅차오르는 승리감이 바로 전리품이겠군."

"뭐, 그러면 됐지. 다치지 않고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야."


나는 포기하고 미소를 보였다.

매번 똑같은 쳇바퀴의 연속이었다.

잔소리를 하면 릴라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툭 내던진다.

처음에는 의아했지만 익숙해진 지금은 그러려니 했다.


릴라가 묘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왜 그래?"

"음... 전투에 몰입하다보니 그런 것을 계산하지 못하였다. 미안하군."

"어? 아니, 뭐, 미안할 것 까지야...."


사실, 전부 다 지켜보고 있어서 따로 보고를 받지 않아도 상관이 없긴 했다.

사람마다 잘 하는 것과 못 하는 것이 정해져 있으니 이해 못할 것도 아니었고.


"...."

"...."


릴라가 입을 다물면서 살짝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나는 재빨리 아무 말이나 꺼낸다.


"음, 피가 많이 묻었네. 먼지도."

"격한 전투였으니까."


직접 다가가서 갈가리 찢어 발기는 식으로 싸웠으니, 더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정말 고생 많았어. 들어가서 씻어."
"그래야지. 그런데 지휘관. 저번에 카시노에게 들었는데, 근처에 노천탕이 있다고 한다. 같이 가지 않겠나?"

"이 야밤에?"

"밤하늘을 내려다보며 즐기는 목욕도 나쁘지 않겠지."


그녀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방금 있던 일의 사죄로 내가 한 잔 사겠다. 어떤가?"

"어, 음. 그래. 같이 가자."


노천탕이라고 해도 남녀가 따로 들어갈 공간이 있을 거다.

릴라도 당연히 따로 들어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어, 저기. 음...."


탕에 들어가기 전에 옷을 벗으려고 탈의실로 갔는데, 남녀가 구분된 탈의실이 아니었다.

남자가 나 혼자니 뭐 당연하다면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긴 했는데....


"왜 그러지?"


먼저 들어간 릴라는 아무렇지도 않은 태도로 옷을 벗고 있었다.

옷을 한 꺼풀 벗을 때마다 드러나는 하얀 속살....

난 대체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몰라서 얼을 탔다.


"저기, 일단은 나도 남잔데..."

"남자?"


릴라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반쯤 헐벗은 자신의 몸과 나를 번갈아 보았다.

그러더니 훗, 하고 웃는다.


"자잘한 것에 신경을 쓰는군. 지금은 전시다. 남녀 구분하며 여유를 부를 때가 아니야. 방금의 전투도 기습이었잖은가? 그래서 야간 대기조였던 내가 부랴부랴 나간 것이고."

"그랬지."


릴라 혼자서 출격한 건 기습해온 적의 규모가 위협적인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좀 더 신중하려고 했지만 그녀가 오는 적은 마다하지 않겠다며 출격했었다.


"서로 번갈아가며 씻을 시간은 없지 않나? 내 알몸을 보이는 데에 부끄러움은 없으니 걱정하지 마라."

"사실 난 땀 안 흘려서 안 씻어도-"

"잔소리 말고 너도 벗어라."


단호한 압박에 나는 포기했다.


'하긴, 이제 와서 부끄러워 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지.'


릴라가 합류한 지 벌써 여러 달이 지났다.

내가 여러 대원들과 성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쯤은 그녀도 잘 알고 있을 터.

오히려 알몸 따위에 부끄러워하는 내 태도가 그녀에게 실례가 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나도 내색하지 않고 털털한 태도로 옷을 벗고 노천탕으로 향했다.


"...저기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아니지 않나?"


탕에 들어간 직후, 나는 뭔가 잘못됐음을 느꼈다.

릴라가 내 바로 앞에 앉았다.

내 다리 사이로 들어와 내 가슴에 등을 기대고 누웠다.


"무슨 문제라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게 이상한데."

"내가 올 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잖은가."


그녀는 내가 탕에 들어가 앉자, 마치 평소에도 그랬다는 듯 자연스럽고 당당하게 내 다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몸을 섞지 않은 사이였음에도.


"너무 놀라서 말문이 막혔거든. 뇌정지가 왔었어."

"늦게 대응한 네 잘못이다."

"....."

"그 실례되는 반응은 대체 뭐지?"


그녀가 뒤돌아서 나를 본다.

노천탕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사이로, 부력 때문에 살짝 떠 있는 가슴이 보였다.


"아니, 음.... 그게 말이지..."

"이상하군. 이런 것은 일상이 아니었나?"

"그거야, 몸을 섞은 애들 얘기지."

"그럼 나랑도 몸을 섞으면 되겠군."

"네?"


조금 얼빠진 대답에 그녀가 웃으며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본다.

내리쬐는 달빛과 피어 올라가는 노천탕의 증기가 합쳐져 마치 달의 축복처럼 빛이 산란되고 있었다.


"저렇게 아름다운 달밤 아래서, 이렇게 몸을 맞대고 있다는 것. 그 사실만으로도 마음의 평화가 오지 않는가?"

"음..."


나는 달빛보다는 릴라의 몸에 더 시선이 쏠렸다.

창백한 피부는 그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었고,

안쪽 허벅지와 가슴에 닿는 매끈한 피부는 그녀가 얼마나 몸매에 신경을 쓰는지 알려주고 있었다.

매끈하고 부드럽고, 동시에 탄탄했다.


'아, 설 것 같아.'


생각해보니 릴라의 엉덩이랑 내 자지랑 거리가 가까웠다.

발기하면 바로 들킬 터.

내가 필사적으로 감정을 억누르는 와중에 릴라가 다시 말한다.


"전투를 치른 병사는 보상을 받아야 한다. 당연한 것이다. 목숨을 걸고 노력한 만큼 오는 것이 있어야 사기가 오르니까."

"음... 특별히 받고 싶은 게 있는 거야?"


난 릴라가 자기 나름대로 애교를 부리고 있는 건가 싶었다.

가지고 싶은 게 있어서 조르는 아이처럼 말이다.

조금.... 의외의 방법이었지만.


"그 반대다."

"반대?"

"솔직히 말하지, 지휘관. 나는 서류 작업이 싫다."

"......"


갑작스러운 고백.

그녀는 언제나처럼 진지했다.


"너에게 떠넘긴 것을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나 나름대로 그 보답을 하려는 것이지."

"딱히 보답하지 않아도 되는데... 어려운 것도 아니고."

"그 말은, 지금 이 구도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는 것인가? 또는 내 몸이 그대 취향에 맞지 않는가?"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참 난감한 일이었다.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이것으로는 통하지 않는 건가."


'통하지 않아?'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갑자기 릴라가 일어섰다.

근육의 라인이 선명한 배와 허벅지에서 물이 흐르며 그 육체의 매력을 더욱 강조한다.

게다가 은은하게 내려오는 달빛의 후광으로 가슴과 골반이 더 돋보이고 있었다.


하마터면 정신이 나갈 것 같았으나, 나는 침착했다.

릴라의 태도가 조금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혹시 화났어?"

"화나지 않았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릴라는 탕에서 떠나 물이 뚝뚝 흐르는 채로 탈의실로 걸어간다.


"릴라?"


나는 벌떡 일어나서 그녀를 따라간다.

항상 무표정한 얼굴이라 화가 난 건지, 아닌 건지 분간이 되질 않았다.

그리고 왜 갑자기 돌아가는지도.


"저기, 릴라..."

"그만."


탈의실로 들어가려는 찰나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탈의실은 불이 꺼져 캄캄했고, 릴라 역시 그 어둠에 파묻혀 보이지 않았다.


"잠깐 거기 있어라."

"....?"


다짜고짜 명령조로 말을 하는데, 그 묘한 분위기 때문에 더 다가갈 수가 없었다.

나는 알몸으로 어중간하게 서서는 그녀를 기다린다.


"아까 카시노에게 노천탕을 추천 받았다고 했었지. 기억하는가?"


어둠 속에서 목소리만 들려온다.

그리고 뭔가 바스락 거리는, 천이 쓸리는 것 같은 소리도 들려왔다.


"응."

"사실 그 얘기가 나온 건 내가 한 질문 때문이었다."

"어떤 질문?"

"나의 마음을 전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물었다."

"....?"


카시노에게 그런 걸 물어봤다는 점이 조금 놀라웠다.

그녀도 조금 맹한 구석이 있어서 잘 하는 편은 아닐 텐데....


"그러자 여기저기서 대원들이 달라붙어 각자의 방법을 알려주었다. 알몸으로 들이대면 알아서 덮칠 거라고 누가 말했거늘, 너는 그러지 않았지."

"하하....."

"그래서 이번에는 직접 진심을 전하려고 한다."


이윽고, 그녀가 탈의실에서 나온다.

걸어나오는 발부터 천천히 달빛 아래 그 자태를 드러내는데....


'드레스?'


아니, 잠옷이었다. 드레스 형태의 잠옷.


"저기, 그 옷이...."


다만, 잠옷은 잠옷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

몸에 묻은 옷 때문에 여기저기가 달라붙어 가슴과 배, 허벅지와 둔부의 라인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다.


'이건 진짜 위험한데.'


내 두 번째 자아가 꿈틀거리가 시작했다.

나는 그걸 간신히 억누르며 침을 꿀꺽 삼킨다.


"이 세계로 온 이후, 줄곧 너를 봐왔다."


릴라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응...."

"너는 누구에게나 친절하더군. 그리고 그런 너의 다정함을 좋아하는 이들이 많다."

"음, 그럴 수도."


최대한 모두와 함께 잘 지내고 싶었다.


"너의 다정함은 이세계에서 온 나에게도 편견이 없었지."

"그랬던가?"


갑작스러운 칭찬에 조금 머쓱해졌다.


"이 세계로 와서 내가 전투 외의 부분에서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너는 정중하게 부탁할지언정 화를 내거나 닦달하지 않았지. 그런 작은 마음씨가 계속 쌓이고 쌓일 때마다, 조금씩 널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달라졌다 함은...?"

"좀 더 너와....."


돌연, 그녀가 얼굴을 붉혔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좀 더 너와 여러 가지를 함께 하고 싶었다. 나는 밤하늘을 올려다 보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때 네 곁에 네가 있었으면 했다."

"오...."

"그런 걸 대원들에게 말했더니, 남녀의 사이가 가까워지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성교라고 했다."

"....그 대원들의 이름을 알려줄 수 있을까?"


내 말에 릴라가 살짝 웃었다.

그녀는 대답 대신에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긴다.

그때 가슴 부분의 옷이 팽팽히 당겨지며 봉긋 솟은 유두가 강조되었고, 나는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으음....."

"...남자는 머리 쓸어 넘기는 걸 좋아한다더니 정말인 모양이군."


내가 어색한 포즈로 자지를 가리며 막자 그녀가 살짝 기뻐했다.


"아무래도 그녀들의 말이 맞았던 것 같아. 아까부터 지휘관도 필사적으로 참고 있는 표정을 지었었지. 안됐지만 나에게 진실을 알려준 이들을 팔아넘길 수는 없어."


그녀가 엉거주춤 몸을 숙인 나에게 다가와서 팔을 잡았다.


"탈의실로 가지, 지휘관."

"어, 응...?"

"이렇게 어두운 곳이라면 누가 뭘 하더라도 바로 눈치채지 못할 테니까."

"그 말은...."

"자꾸 눈치 없는 척하지 마라. 나는 너와 함께 좋은 밤을 보내고 싶을 뿐이다."


그녀가 손을 내밀며 다시 한 번 권한다.


"자, 어서."


나는 더 참지 못하고 그녀의 안으로 들어갔다.

탈의실의 짙은 어둠 속에는 나와 릴라의 거친 신음과 헐떡임이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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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람 그림, 단편문학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