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청한 하늘, 눈이 찌푸려질 정도로 눈부신 태양빛을 한 손으로 가리며 곧게 뻗은 시끌한 번화가 거리를 거닌다.

아직 업무가 조금 남았는데 비서에게 등을 떠밀려 억지로 산책을 나오게 됐다.


" 언제나 성실한 모습도 좋지만 충분한 휴식도 필요한 법이랍니다? 산책이라도 다녀오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주인··· "

" 흐음, 대체 물자는 왜 모자란거야? "


얼마 전 특별 계획함의 의장 건조를 위한 충분한 물자와 모항 유지에 사용할 물자를 차질없이 계산을 맞춰 놓았는데

어딘가 미세하게 부족했다. 큰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지만··· 짚이는 부분이 떠올랐다.


" 또 아카시 녀석인가··· " 하고 눈을 부라리며 검토하는 내 문서를 가볍게 가로채며 벨파스트가 말을 걸어온다.

" 주인님, 제가 드린 말씀은 알아들으셨는지요? "

 

무슨 말을 했는지 듣지 못했지만, 듣지 못했다 한다면 분명 화를 낼 것 같아 대충 '어어··· 으응···' 하고 말 끝을 흐려 얼버무려보지만 상대가 좋지 않았다. 벨파스트는 살짝 한숨을 쉬며 내 손을 붙잡아 집무실 밖으로 이끌고는 문 앞을 가로막아 선다. 워낙 표정에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그녀이기에 그 심중을 읽어내기 힘들지만 이번 만큼은 무엇을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저기··· " 하고 이어가려는 내 말을 단호하게 끊으며 이제부터 19:00 시까진 집무실 청소를 하겠다며 문을 닫아버렸다.

지금 시각 15:57 약 3시간 남짓한 시간을 무엇을 하며 보내야 할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모항 내를 걸으며 다른 함선 소녀들과 가벼운 인사와 시시한 이야기를 하며 결국 한 바퀴를 다 돌고 말았다. 

 '아카시의 공창에 지금이라도 당장 달려가서!' 라는 생각도 했지만 심증 만으로 몰아 세우다간 교묘하게 빠져나갈 것이 분명하기에 나중에 확실한 증거를 잡게 되면 빼도박도 못하게 만들어주겠다 다짐하고 시내로 나가보기로 한다. 더 이상 모항에서 시간을 때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이 상황이 됐다. 


 이 곳은 몇 년 전만 해도 세이렌의 영향권에 들었던 위험 지역이었다. 이 곳에 발령 온 지가 어언 6년이 지났다. 그 시간 동안 수 많은 일이 있었고, 많은 함선 소녀를 만났다. 진영과 가치관이 다르단 이유로 '레드 엑시즈'와 대립하기도 했지만,  강한 세이렌의 힘 앞에 우린 수단은 달랐으나 목적은 하나라는 뜻 아래 극적으로 타결하여 지금의 하나의 함대의 모습이 되었고. 그 덕에 어느 정도 세이렌을 밀어내는 데에 성공하게 되지만 여전히 세계 각지에서 세이렌의 출현과 함께 피해 보고가 들어오고 있다. 언제까지 이 싸움을 계속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끝이 나는지 여전히 아는 것이 없다.  


 허기를 느끼며 '오늘은 무얼 먹을까' 하며 간판을 둘러보며 걷는 도중, 건물과 건물 사이 골목에 한 여자가 몇 명의 남자에게 둘러싸여 있는 모습을 본다. 얼핏 보기에 곤란해 보였지만 내 신분은 군인이다. 대민 마찰은 되도록 피하고 싶고, 매일 하는 일도 벅찬데 시말서라도 쓰게 되면 곤욕이다. 홍차를 내오며 무표정으로 나를 한심하게 볼 벨파스트가 떠오른다. 모른 채 하고 걸어가려는 순간 언젠가 벨파스트가 신사 답게 대처하지 못한 나의 행동을 보고 ' 주인님의 언행을 바로잡는 것도 메이드의 임무입니다. ' 하며 언질을 준 일이 떠올랐다. 그리고 소극적인 내 마음에 대고 ' 그래, 신사 답게··· ' 하고 읇조리며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


"와아―!"



 오늘 이곳에 전입 와 주변을 둘러보니 모든 것이 새롭고 활기찼다.  

아카데미에선 폐허와 불길에 휩싸인 세상 만을 보여주며 현재의 심각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이 곳의 하늘은 푸르고 햇빛은 따듯했다. 모두가 행복해 보이는 거리를 한참 살펴보다 앗! 하고 뭔가 떠올려 주머니를 뒤적인다. 오늘 만을 기다리며 설레는 마음에 계속 접었다 핀 종이는 이미 본래의 모습을 잃어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이 곳에서 먼저 전입 와 생활하는 동형함이 보내준 약도? 가 적힌 종이였다. 아직 얼굴 한 번 본 적 없지만 수화기 너머로 들린 둘의 목소리와 편지의 내용에 따스함에 베어 있었다. 빨리 만나보고 싶었다. 그래 이걸 보면 약속 장소에··· 


" 어··· 아··· 여기··· 가···?  여기인가? " 

편지와 같이 들어있던 약도에 배에서 내려 오는 길이 그려져 있었다. 아니, 그랬었다. 주체하지 못한 마음에 계속 펼쳐보았던 종이는

너무 헤져 잉크가 번지고 찢어져 대강으로도 알아보기 힘들었다. 이리저리 돌려도 보고 눈을 크게 떠 보지만 소용없었다. 뭔가 크게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자 행복하게만 보이던 이 곳이 불현듯 낯설고 불안하게 느껴졌다. 

" 분명··· 카페였던 것 같은데··· "

'계속 이 자리에 있으면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처음 만나는 친구들에게 밉보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전부터 

친구나 주변 사람들이  '너무 착하다, 순하다' 하는 소리를 곧잘 해줬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우연히 길을 걷다 들은 내 이야기엔 '맹하다 , 모자라 보인다.'는 말이 오르내렸다. 이런 나를 바꾸고 싶었다. 그래서 전입 온 이곳에서 만큼은 아쉬운 소릴 듣지 않게 거울을 보며 옷도 단정하게 입었는지, 가방에 빠진 건 없는지 몇 번이고 체크했다. 그런데··· 그랬는데···


 이렇게 있으면 안돼···! 하는 마음에 주변 사람들에게 다 헤진 종이를 보여주며 카페··· 카페··· 연신 설명해보지만 뾰족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낯선 환경, 낯선 사람들 이 모든 게 힘들었던 걸까. 내성적인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용기를 쥐어 짜낸 행동은 극심한 피로와 함께 나를 더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어떡하지··· 아무도 몰라···."


 벤치에 앉아 하염없이 다 헤진 종이만 만지작 거리며 바보 같은 자신을 자책한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냥 울어버리고 싶었다. 그러면··· 그러면 누군가 도와줄 것 같았다. 항상 보던 동화책에 그려진 왕자가 나타나 눈물을 닦아주고 가볍게 나를 안아 들어 말에 태워 친구들의 곁으로 데려다 줄 것만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한숨 쉬던 그 때 발밑에 그림자가 드리운다.


" 왜 그렇게 울상이야? 무슨 일 있어? "


 올려다 본 곳에 처음 보는 남자가 있었다. 그리고는 친근하게 다가와 내 어깨에 손을 올린다. 놀란 탓에 크게 흠칫 해버린다. 놀란 내 모습을 보며 밑에서부터 나를 쓸어 올리듯 보던 남자는 '무슨 고민 있어?' 하며 상냥하게 물어온다 . 놀란 탓에 어버버 했지만 곧장 종이를 들이밀며 '저··· 친구가 여기서··· 카페? 에서··· 기다리는데···' 남자는 횡설수설하는 나를 보며 종이를 받아 들어 열어 보고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나를 보고 다시 종이를 보다가 나를 보더니 뭔가 알았다는 듯 안내해주겠다며 손짓한다. 

낯선 손길이 닿는 건 힘들었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이걸로 친구들을 만나러 갈 수 있게 되었단 기대감이, 모자라단 소릴 듣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그 모든 불안함을 집어삼켰다. 네···! 하고 대답하며 그 뒤를 따라간다. 혹시 이 사람이 나를 위기에서  도와줄 동화 속 왕자님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쿡쿡 웃으며 가벼운 발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어두운 골목에 서서 ' 다 왔다~ ' 하는 말에 주변을 살피지만 뭔가 이상했다.


"저기··· 앵커리지 친구들··· 여기있는 거에요···?" 불안한 마음에 먼저 입을 뗀다.

"어? 이름이 앵커리지야? 외국인 일거라 생각하긴 했는데. 친구라면 여기 많아." 


 하고 내 뒤를 가리킨다. 고개를 돌려 본 곳엔 무섭게 생긴 남자 둘만 보일 뿐 기대하던 상냥한 친구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갑자기 무서워졌다. 도망가고 싶다. 무언가 잘못됐다. ' 아··· 아니에요··· 저··· 저···그만··· ' 하고 나가려는 내 앞길을 남자들이 막아 서며 천천히 다가왔다. 


" 시··· 싫어··· 싫어··· " 


무서운 마음에 뒷걸음질 치며 더 깊숙한 골목으로 스스로를 밀어 넣는다. 그러다 처음 만난 남자와 작게 부딪친다.  '에···' 하고 작게 뱉은 말과 함께 남자의 손이 내 허리를 감싸 자신 몸으로 힘껏 당겼다. 느껴지는 이질감에 놔 달라는 소리를 연신 뱉으며 버둥거리지만 소용없었다. 길을 막던 남자들이 나를 훑어보며 천천히 다가오며 실소하듯 물어온다.


" 햐··· 이런 년은 어디서 낚아 온 거야? 빨통 봐 개쩌는데?  "


 남자들의 손이 더 해지는 이물감에 못 이겨 더 세게 몸부림 치려는 찰나, 나를 데려온 남자가 하는 말을 듣고 

내 안에 무언가가 무너지는 느낌과 함께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 와꾸 보고 말 한번 걸어봤는데 완전 모자란 년이더라고 지 발로 따먹어 달라고 따라오던데? " 하며 웃으며 서서히 내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처음엔 허리, 그리고 그대로 손을 늘어뜨려 허벅지 안쪽을 쓰다듬기 시작한다. 벌레가 기는 듯한 끔찍한 감촉··· 하지만 그보다 끔찍한 건  바보처럼 또 실패해버린 자신이었다. 

몇 년 간 거울을 보며 다짐했다. '오늘은 다를꺼야'   '오늘은 다를꺼야'. 

하지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부정하고 싶었다. 나는 맹하지 않아. 바보 같지 않아. 모자라지 않아··· 멍청하지 않···

달라질 나를 위해 거울을 보며 단정하게 메어 입은 옷이 아무렇게 헤쳐지고 있었다. 머리도, 리본도··· 분명 지금 내 얼굴도 못 볼 꼴이겠지··· 난··· 틀려먹은 아이일까. 나 자신이 너무 한심했다. 그래서··· 그래···


그래··· 난 어떻게 해도 모자란 바보였구나···. 


 끅끅 눈물을 흘리는 나를 보며 남자들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들의 가학심과 성욕을 부추겼는지 숨소리와 옷을 스치는 소리만이 더 격해질 뿐이었다. 그런 나를 보며 '우리 앵커리지 저항 하지 않는거 보니 사실 즐기는 거 아냐? ' 라는 추잡한 말과 함께 더듬는 행위에 박차를 가했다. 제 울음 소리에 소리가 묻혀 들리지 주변의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 즈음 이었을까··· 옷을 해치고 몸을 더듬던 손들이 일제히 멈추었다. 그 변화에 울음을 그치며 눈을 뜬다. 갑자기 들어 오는 빛에 눈이 적응할 때 즈음 내가 들어온 골목 입구에 한 남자의 실루엣이 보였다.  


" 뭘 꼬라보고 있어 미쳤어?"

" 뭐야 뒤지기 싫으면 꺼져 "


저급한 욕설들 사이에서 낯선 목소리가 낮게 골목에 울린다 


" 신사답지 못하게 떼로 모여서 뭐 하는 거야? " 


그 목소리에 기가 차다는 듯 무리 중에 한 남자가 ' 이 개새끼가 ' 하며 다가가 주먹을 내지른다.  



                                                                          ◈


 욕을 하며 다가오는 남자를 보며 후회가 밀려온다.  계급장이 달린 해군 정복을 보면 물러설 줄 알았던 내 생각이 너무 안일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경찰이라도 부르고 들어올 걸. 겉으론 평정을 가장하고 있지만 속 마음은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었고 신사 타령을 하던 벨파스트가 미웠다. 주저 없이 다가오는 남자에게 말을 붙여보려고 하지만 갑작스럽게 상대가 주먹을 뻗어온다. ' 어···? ' 하며 간발에 차로 피했지만 이상하다 . 이 녀석들 진짜 뒤가 없는 위험한 놈들이란 걸 이제야 깨닫는다. 실제로 한 번도 사람과 주먹으로 싸워본 적 없는 내겐 너무 아찔한 순간이다. 사관학교 때 배운 최소한의 호신술과 벨파스트와 워싱턴이 알려준 겨루기와 근육으로···! 남자의 공격을 막거나 덜 아프게 맞기에 급급했다. 그렇게 상대의 주먹을 몇 합을 막으며 말로 범죄 행위를 협박해 보지만 돌아오는건 욕설과 주먹 뿐이었다. 


큰일이다ㅡ 이젠 아파서 요령 있게 맞기도 힘이 든다 그 찰나 가드를 뚫고 날아온 주먹에 안면을 허용한다. 핑 도는 감각. 묘하게 느껴지는 피 냄새··· 아 진짜 위험하구나. 하고 주춤하자 상대의 입에서 ' 쳐 맞아보니 이제 감이 와? ' 하며 호승심 서린 말을 내뱉는다. 이대론 진짜 안되겠구나 하고 어떻게든 되겠지 라는 마음으로 상대에게 천천히 걸어가 주먹을 드는 순간 

낯익은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온다. 


" 어? 지휘관 ? 

" 뭐야 뭐야 싸우는 거야? "


 뒤 돌아보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이 가는 목소리, 그 소리를 듣자 큰 안도감과 함께 긴장이 풀려갔다. 

살았다. 다행이다. 하고 속으로 희열의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 잠깐 비켜 봐 ' 라는 소리와 함께 좁은 골목에서 나를 넘어가 순식간에 남자 셋을 바닥에 메다 꽂았다. 메다 꽂힌 남자들은 이해력이 상황을 따라가지 못해 연신 욕을 하며 위협했지만, 의장을 벗고 있을 지라도 상대는 함선 소녀다. 뒤따라온 브레머튼이 내 얼굴을 여기저기 훑어보며 터진 입술 위를 손수건으로 닦아준다. 


일단락 난 상황에 남은 건 볼티어모의 품에 안겨 엉엉 울고 있는 여자아이이다. 둘이서 옷도 다시 입혀주고 음료도 사주고 이야기도 해주고 갖은 노력을 했지만 아이는 불안을 떨치지 못하고 계속 울기만 했다. 그럴 만도 하지··· 그대로 뒀다면 그 남자들에게 실컷 성 노리개 취급 받았을 것이다. 그러던 중 볼티모어가 쓴 웃음을 지으며 ' 곤란하네··· 카페에 가봐야 하는데 ' 하며 작게 속삭인다. 


" 카페 ? "하고 묻는 내 말에 끄덕이며 " 오늘 새로 전입 오는 아이와 만나기로 했어. 알고 있잖아? " 하고 되물어온다.

확실히 오늘 볼티모어급 한 명이 18:00 이후에 전입 신고를 하러 온다는 일정을 달력에서 봤다. 


" 미리 만나서 이야기도 하고 친해지려고 외출 허가도 받았는데··· 기다려도 안 오길래 항구로 가는 길에 지휘관이랑 만난 거야. "

" 흩어져서 찾아볼까? 내가 항구로 가볼게, 지휘관이 카페에··· " 

브레머튼이 말을 다 잇지 못하고 끝을 흐린다. 무슨 말을 해도 울기만 하던 아이가 갑자기 브레머튼의 옷깃을 잡고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끅끅거림을 참으며 울다 갈라진 목소리로 작게 말한다.


" 브레··· 끅··· 머튼···? 볼티모···끅··· 어? " 


두 사람은 그 반응에 '응응 그래그래' 하며 아이를 토닥이고 쓰다듬어준다. 감정의 기복을 바로잡은 나는 처음 보는 아이의 살펴본다

다 헝클어진 머리와 풀어 해쳐진 상태에선 알아보지 못했지만··· 조금 낯익은 얼굴이었다. 어디서··· 어디서 봤더라··· 하다 불현듯 한 이름을 입 밖으로 냈다.


" 혹시··· 앵커리지야? " 


그러자 작게 끄덕이며 '으···으응···. 앵커리지··· 앵커리지··· 에요···.' 하고 대답하고는 그대로 기절하듯 잠들어버렸다. 


모항으로 돌아가는 길, 브레머튼에게 지휘관 쯤 되어서 동네 불량배한테 맞고 다녔다고 놀림을 받는다. 순간 욱 하는 감정에 

발끈할 뻔 했지만, 나쁜 말 대신 와줘서 고맙다는 말을 꺼낸다. 


" 아냐, 우리가 더 고맙지··· " 

" 그래, 지휘관이 아니었으면 험한 일이 됐을 테니까··· 이 아이한테. "


 모항에 돌아와 남은 일을 끝 마치고 사복으로 갈아입는다. 오늘은 너무 많은 일이 있어서 그런지 몸이 평소 같지 않다. 얼굴도 쓰리고··· 팔도 아프고···. 돌아가는 길에 벨파스트가 앵커리지의 상태를 간단히 브리핑 받는다. 지금 쯤 의무대에 있지만 깨어있을 테니 방문을 추천한다는 말이었다. 나보다 동형함들의 방문을 더 반기지 않겠냐는 말에 통금 시간을 운운하며 끝내 내게 떠 넘긴다. 

하릴없이 의무대로 발길을 옮긴다. 


 수속을 마치고 안내를 받아 천천히 병실로 걸어간다. 병원이나 의무대를 오면 언제나 나는 이 약물 냄새. 이 냄새를 맡으면 

멀쩡한 사람도 드러눕고 싶고 아파지는 것 같은 착각을 느낀다. 다른 함선 소녀들이 작전 중 다칠 때 마다 들르는 곳 이지만 익숙해지지 않는다.


 문 앞에 서서 노크를 한다. 깨어있을 거라 던  앵커리지의 대답이 들리지 않는다. 다시 한 번 노크하고 '실례합니다.' 하고 병실 안으로 들어간다. 아니나 다를까 곤히 잠들어 있는 앵커리지의 모습이 보였다. 뭘 어떻게 해야 하나··· 하다 일단 침상 옆 의자에 앉아 잠시 모습을 들여다 본다. 


너무 활발해 옆에 있으면 기가 빨리는 기분이 드는 볼티모어급 아이들과 상반되는 소극적이고 말수가 적은 아이. 마치··· 그래, 정말 말 그대로 너무 순수한 아이 같았다. 그러다가 들어온 몸매에 잠시 시선을 빼앗긴다. 펑퍼짐한 환자복을 입었는데도 확연하게 자기 주장이 확실한 가슴과 선, 군더더기 없는 몸매에 쭉 뻗은 다리. 길을 다닌다면 반드시 남자의 시선을 강탈할 육감적인 몸매였다. 

" 확실히 이건···  볼티모어급이네···. " 혼잣말을 하며 고개를 살짝 끄덕인다. 

문득 지휘관이 되서 부하의 몸으로 욕정을 하는 것에 자괴감을 느끼기 전에 의자에서 일어나 나가려는 순간 "으응···. 누구···?" 하고 앵커리지가 일어난다. 


" 일어났구나. 아까 만났지? 내가 이 함대의 지휘관이야. "


얼굴을 보며 기억 난다는 듯이 "아···! 앵커리지··· 도와준 사람··· 고마워···!" 라고 천천히 말하더니 핫! 안절부절 못하며 정정한다

아마 내가 상급자라는 것을 이제 인식한 모양이다.


" 아니···! 죄송해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앵커리지··· 죄송해요··· "

" 왜 계속 미안하다고 하는 거야? 괜찮으니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다 하렴" 


 그러자 자신의 아카데미 때 이야기를 풀어놓는 앵커리지. 아카데미 시절 이야기를 하며 잠시 시간을 보냈다. 

 말을 하는 중간중간 말끝을 흐리고 어설픈 말투가 처음엔 신경 쓰였다. 하지만 이내 적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함대엔 앵커리지 처럼 자신을 지칭 할 때 ' 마녀, 메이드, 하무망 , 여왕, 등' 으로 말하는 애들도 많고 말투도 유니콘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 다만 걸리는게 있다면,  계속 나를 '선생님'이라 부르다가 사과하고 정정하고 반복하는 것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중에도 앵커리지는 선생님이라 부르고 다시 사과를 하고 있었다.

 

" 혹시 지휘관이라 부르기 힘들면 선생님이라 불러도 좋아. "


 그러자 얼굴에 화색이 돌며 " 정말··· 지휘관··· 선생님으로 좋아···? 응! 선생님··· 선생님이 좋아···. " 하며 방긋 웃어 보인다.


" 앵커리지만 좋으면 괜찮아. 서민이나 변태라고 불리는 것 보다 좋아. " 


" 변태···? " 하고 갸웃하는 앵커리지. 아차 싶어서 얼른 자리에서 일어난다. 


"아하하··· 오늘 힘들었을 테니 푹 쉬고 내일 다시 만나자. 그럼··· " 하고 돌아서려는 나를 "선생님···" 하며 불러 세운다.

응? 하고 돌아선 시선엔 불안한 듯 쭈뼛거리며 말을 이어간다. 


" 앵커리지··· 혼자서는··· 조금 무서워··· 같이··· 응?··· " 


 아침에 있던 일이 아직 불안한 걸까. 그렁그렁한 눈으로 부탁해오는 앵커리지. 그래도 다 큰 남여가, 오늘 전입 온 심신미약 상태의 아이를 건드렸다고 들키기라도 하면 옷을 벗어야 할 수도 있는데···? 라는 현실감이 브레이크를 잡는다. 그래,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하고 뿌리치고 나가려 하자, '아···.' 하는 단말마 같은 작은 소리를 내며 침울해 한다. 


"······"

"······" 


"그럼 앵커리지? " 

"응···?" 

"손만 잡고 자는 거야···? 알겠지?"  

그러자 잘 모르겠다는 듯이 갸웃하며 "으응···" 하고 생각하다 그래도 남아준다는 것이 기쁜건지 "응···! 손만···" 하고 미소 짓는다.

다시 자리에 앉아 앵커리지의 손을 잡고 시선을 돌린다. 그러자 앵커리지가 부스럭부스럭 소릴 내며 무언가를 꺼내며 입을 연다


"선생님도··· 좋아···?" 


무슨 소릴 하는 걸까. 무슨 소릴 하는 걸까 ! 그래, 알았어. 이 아이도 분명 볼티모어 급이다. 틀림없다 '그 볼티모어 급들' 이다. 

그렇게 시선을 발밑으로 하는 와중에 앵커리지가 스윽 하며 과시하듯 내 쪽으로 몸을 세웠다. 틀렸다 나도 남자이기 때문에 

이런 대쉬··· 거절하는 건 쉽지 않다. 하지만 거절해야 해. 


"어··· 응? 어··· 좋아하지. " 하며 몸과 마음이 따로 놀았다. 


그러자 앵커리지는 "와이ㅡ" 하며 웃으며 동화책을 내게 들어 밀었다 .  


"동화··· 책···?" 

"응··· 앵커리지의··· 보물···"

"아··· 보물! 그렇지, 동화책 좋아하지. 응···" 

"응···? 선생님···? 어디아파···?"

"응? 아니? 하나도 안 아픈데!? 근데··· 그, 동화책 읽는 거야···? 우리···?"


                                                                           ◈


새로운 지휘··· 아니, 선생님이 생겼다. 

아직 잘은 모르지만··· 왕자님처럼 나쁜 악당을 막 혼내주진 못했지만

내가 위험할 때 나타나준 사람···

나를 먼저 알아 봐준 사람···

내가 혼자 있을 때 옆에 있어준 사람···


"선생님 ···?"


그런 생각을 하던 중, 선생님은 방금까지 동화책을 읽어주다 의자에 앉아 침대에 엎드려 잠이 들었다.

분명 앵커리지 때문에 분명 힘들었을 꺼야··· 미안해요···

선생님이 자신에게 덮어준 모포를 걷어 선생님 어깨에 덮어준다. 


" 앵커리지··· 친구들··· 함께··· 무섭지 않아···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선생님 뒤에 선다. 그리고 깨지 않게 살며시··· 그리고 꼬옥 뒤에서 안는다. 


"선생님은··· 특별해···.  선생님··· 앵커리지의··· 왕자님···!"


아직 모든 것이 낯선 곳이지만··· 

시작부터 불안하고 무서운 일 뿐이었지만···

여기는 괜찮을 꺼야···! 하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변하려고 버둥대지 않아도 받아주는 사람들이 있어. 그래도 노력할 꺼야.

그렇게 다짐하는 앵커리지의 마음 속엔 생에 처음 느끼는···  지금껏 느껴본 적 없는 따듯한 마음이 자라고 있었다.



 





                                                                           IF



평소에 메이드대에게 도움이 된다고 선생님은 말했다. 


그러면 앵커리지도 메이드 처럼 행동하면 선생님이 좋아할 꺼야···!


책장에 먼지를 털던 앵커리지는 동화책 표지를 보고 멈칫한다.


"선생님··· 앵커리지에게··· 읽어 줄 새로운 동화···?" 


선생님이 읽어줄 테니 읽지 말아야지! 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앵커리지는 내용이 너무 궁금했다. 

조금만··· 앞에 조금만 읽자···! 하고 마음먹은 앵커리지는 동화책을 펼쳤다. 


"에···? 동화였는데··· 동화··· 아니야···?" 


분명 표지는 동화책이었는데··· 책을 펼쳐보니 옷을 거의 벗고 있는 여자들의 사진만이 가득했다.


이상한데··· 닫아야 하는데··· 하고 생각하고 있지만


전투에서 느낀 심장의 고동과는 다른 가슴의 두근거림이 앵커리지의 마음속을 지배하며 책장을 한 장씩 넘기게 만들었다


그렇게 넘기다 앵커리지는 책장 중에 끝 모퉁이가 살짝 접혀 있는 책장을 발견하고 열어보았다. 


"아··· 뱅가드···? 아니야··· " 


분명 접힌 책장의 사람은 뱅가드를 닮은 것 같지만 몸은 전혀 달랐다. 


"다이호···? 으음··· 카시노···? 응! 뱅가드··· 달라···!"


앵커리지는 곰곰히 생각해보니 로얄 네이비의 메이드들도, 선생님이 눈길을 주는 아이들도 모두 이런 입은 듯 안 입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혹시··· 선생님이 고마워 하는 건···!


앵커리지는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이 접혀있던 책장을 조심히 뜯어 주머니에 넣고 책은 그대로 바닥에 둔 채 방으로 돌아왔다. 


방에 돌아와서 거울 앞에 서 보았다.


"으응···. 카시노···? 정돈 아니지만 ··· 될지도···! "


평소에 같은 옷만 입고 다니던 앵커리지는 사진에 있는 옷은 없었다. 하지만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앵커리지는 지루하게 시계를 보며 시계 바늘이 도는 만큼 고개도 같이 돌리고 있었다.


볼티모어와 브레머튼이 원정에서 돌아오길 기다리며···


" 볼티모어··· 브레머튼··· 빨리··· 선생님에게··· 칭찬 받고 싶어···!"


지루한 시간이지만 콧노래가 나올 만큼 기대되었다. 분명 이렇게 입으면··· 선생님··· 앵커리지를  칭찬해 줄 꺼야···!


하며 당기면 금방 이라도 풀릴 것 같은 끈으로 된 흰색 수영복 세트와 흰색 스타킹을 신고 수영장에서 촬영한 야한 그라비아 모델 사진을 들고 꿈을 키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