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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륀힐드는 낡은 물건들을 좋아하네."


언젠가 지휘관이 그녀의 방에 들어갔을 때, 주변 풍경을 보고 물었다.


"아, 골동품들 말인가."


브륀힐드의 방은 골동품으로 가득했다. 예스러운 물건으로 가득한 그녀의 방은, 아련한 추억과 편안한 분위기로 채워져 있었다.


"...이 오르골, 쓸 수 있는 거야?"

"이제는 세월이 흐른 탓에 소리도 안 나는 물건이다."

"응? 고장난 거야? 고장 난 걸 왜 가지고 있어?"

"버리기는 아까워서 가지고 있을 뿐이다."

"버리기 아깝다니....."


지휘관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망가진 물건을 가지고 있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미 본래의 목적을 잃은 물건인데.


사용할 수 없어진 물건은 도구가 아니라 쓰레기일 뿐이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건가?'


지휘관은 미간을 오므린 채 골동품들을 구경한다. 그런 지휘관을 빤히 바라보던 브뤼힐드가 묻는다.


"....지휘관.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한 적 있나?"

"과거?"

"젊었던 자신에 대한 그리움. 다시 경험하고 싶은 일, 그 당시의 억울함을 이번에야말로 해소하고 싶다고..... 그렇게 생각한 적 없나?"

"과거에 대한 미련이라.... 그렇게 말하니 조금은 알 것 같기도."


지휘관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녀의 주장을 납득했다. 하지만 이해는 하지 못했다.


"하지만 낡고 헤진 건 빠르게 처분하지 않으면 짐이 돼. 장비 노화 때문에 문제가 생기면....."

"훗. 그렇군. 관리자로써, 노화 문제를 방치해서는 안 되겠지."


브륀힐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당신의 이해를 바라는 건 아니다. 이해하지 못 해도 괜찮다."

"미안, 취미 생활일 텐데 괜히 핀잔만 준 꼴이 됐네."


정신을 차린 지휘관이 머리를 긁적이며 사과했다. 브륀힐드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내가 골동품을 좋아하는 건, 이 모든 물건에 각자의 삶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삶?"

"이 오르골을 예로 들지. 이 오르골은 족히 백 년은 된 물건이다."

"음.. 그래 보이네."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주인과 만났다가 헤어졌을지, 상상이 가나?"


브륀힐드가 말한다.


"처음 세상에 태어났을 때, 오르골은 자신의 역할을 사명처럼 받아들였을 거다. 노래를 틀어 주인에게 행복을 주고 싶다는, 그런 사명을."


지휘관은 가만히 듣는다.


"처음에는 잘 지냈을 거다. 시작부터 고장 난 물건은 생각처럼 많지 않으니까. 아마 주인의 힘든 하루를 노래로 달래주며, 또는 그 주인의 자식이나 손님에게 한 곡 대접하면서 자신이 바라던 삶을 살아갔겠지."


그녀의 이야기는 마치 영화를 보듯 머릿속에 펼쳐졌다.


"그러나 행복은 그다지 오래 가지 않았다. 첫 번째 주인과 작별한 것이다. 아마도 아이가 들고 나갔다가 잃어버렸겠지. 오르골은 텅 빈 골목에 혼자 남겨졌다. 그깟 오르골 따위, 누구도 찾지 않았겠지. 다시 사면 그만일 테니."


문득, 브륀힐드의 눈빛이 아련함을 느꼈다.


'........'


"오르골은 비를 맞으며 길가에 버려졌다. 이때부터 깨달았겠지. 삶이 그렇게 만만치 않다는 걸."


브륀힐드의 눈에 오르골이 비친다. 그러나 오르골에 비친 건....


바로 그녀였다.


"그래도 희망은 있었다. 어느 날, 누군가 버려진 오르골을 본 것이다. 흙이 묻고, 비에 맞아 색이 변했지만, 작동은 했을 거다. 아직은."

"...그러면, 오르골은 다시 행복을 되찾은 건가?"

"잠깐은 그랬겠지. 하지만... 지휘관. 이곳을 보아라. 상처가 나 있다."


브륀힐드가 가리킨 오르골의 한쪽 면에는 푹 파인 상처가 있었다.


"이건 단순히 떨어뜨린 게 아니야. 망치 같은 것으로 친 흔적이지."

"음...."

"상처의 연식을 살펴보면, 두 번째 주인을 만난 시점과 맞아 떨어진다."

"......"

"제대로 기능하지 않자, 망치로 두들긴 것이지. 이때부터 오르골은 자신이 고장 났다는 걸 깨달았을 거다."


브륀힐드의 시선이 오르골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지휘관의 눈에, 오르골과 브륀힐드의 씁쓸함이 겹쳐 보였다.


"아마 또다시 버려졌겠지. 그리고 누군가 주워가고, 고장 났다는 걸 깨닫고 다시 버렸을 터."

"....."

"그러나 두 번째 전성기는 찾아왔다. 누군가 엉망진창이 된 자신의 내부를 고쳐준 것이다. 그때부터가 진정한 행복의 시작이었지."


그녀가 오르골의 내부를 열었다.


"이 부품들은 대부분 새로 교체된 것들이다. 심지어 한 번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오, 그러네. 조금 새 것 느낌이 나."


물론, 그래도 수십 년은 족히 된 물건이었다.


"마지막으로 만난 주인은, 쓸쓸한 사람이었을 거다. 자신의 감정을 대변할 대상이 필요했겠지. 그게 이 오르골이었다."


이야기가 진행되자, 오르골이 조금은 특별해 보이기 시작했다.


지휘관의 눈빛이 점점 브륀힐드를 닮아가고 있었다.


"그 남자는 자신의 삶이 다할 때까지 오르골을 고쳤고, 오르골은 이 남자의 삶이 다할 때까지 노래를 불렀다. 두 존재는 서로의 부족한 점을 보완해주며 수십 년의 세월을 이어갔을 거다. 그 정성이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녀가 오르골의 뚜껑을 닫는다. 오르골은 더 이상 노래를 부르지 않고, 탁. 이라는 공허한 소리만을 내며 숨을 죽였다.


마치, 만족했다는 듯이.


"그리고 내가 이것을 발견했지. 내가 찾았을 당시, 이 오르골은 지금과 다를 바가 없었다. 놀라울 정도로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지. 백골이 된 남자가 죽는 순간까지도 이 오르골을 신경 썼다는 뜻이다."

"음."

"난 이 오르골을 가져왔지만, 노래를 시키지 않는다. 이미 다한 수명을 억지로 되살리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

"그 이유는 하나."


브륀힐드가 오르골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웃었다.


"이 작은 전사는, 최선을 다해 살았다. 온갖 역경에 맞서 싸우고, 자신을 진정으로 원해준 주인에게 모든 것을 바쳤으며, 주인의 마지막을 지켰다."

"그러네. 누구보다 전사 다운 삶을 살았어."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브륀힐드가 오르골을 버리지 않은 건, 오르골이 살아온 삶에 대한 경의였다.


"당신은 미래를 보며 나아가지."

"그렇지."


모든 정보를 종합하여 미래를 읽고, 그 미래를 헤쳐 나갈 준비를 하는 것이 지휘관이다.


지휘관이란 단순히 전투를 지휘하는 것이 아닌, 모두를 이끌어나가는 존재니까.


"그러나 나는 미래가 두렵다."

"....어째서?"

"나에게는 전세를 읽을 줄 아는 재주가 없다. 그저 눈앞의 적을 박멸하기 위한 전사일 뿐이니."

"......"

"나는 이 오르골과 같다."


브륀힐드가 오르골에게 느끼는 감정의 정체는 공감이었다.


오르골이 살아온 삶에, 자기 자신을 대변한 것이다.


"오르골은 막연한 행복을 바랐다. 그러나 항상 행복이 찾아오지는 않았지. 때로는 쓰러지고, 때로는 좌절했다."

"......"

"나 역시 그런 존재다. 자신의 삶 하나, 앞길 하나 제대로 정할 수 없는.... 작은 존재."


꼭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브륀힐드는 당찬 여자고, 자신의 미래를 바꿀 만한 힘을 가졌으니까.


그러나 그 말을 할 때는 아니었다.


"나는 발할라가 존재한다고 믿었다. 전투 속에 태어나, 전투 속에서 죽으면, 그 모든 고생이 결실을 맺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했지."

"발할라라....."

"그러나 진정 존재할까?"


브륀힐드의 눈에 회의적인 빛이 돌았다.


"막연한 미래를 믿는다 한들,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질 가능성은 적다. 이 오르골은 우연히 누군가의 눈에 들어 고쳐졌지만, 실제로는 버려진 자리에서 풍화되어 사라질 때까지 관심 받지 못한 물건이 훨씬 많지."

"....그렇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막연한 미래를 믿고 나아가기보다, 현재 있는 것들을 지키는 것이다."

"그러네. 브륀힐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어."

"그런가?"


브륀힐드가 옅게 웃었다.


"아까 과거의 미련에 대해 말했지? 나도 비슷한 걸 하나 생각하기는 했어."

"무엇이지?"


그녀가 이쪽을 보았다. 호기심이 동한 눈빛. 지휘관은 싱긋 웃었다.


"네 머리카락."

"내 머리카락?"

"태어났을 때부터 반반이었던 걸까? 아니면 어떤 연유로 반만 머리가 하얗게 된 걸까?"

"......"

"또, 시간이 지나 브륀힐드가 할머니가 됐을 때, 나머지 반은 하얗게 될까?"

"훗...."


브륀힐드가 웃었다. 그가 갑자기 그 말을 꺼낸 이유를 짐작한 것이다.


"나는 과거와 현재에 머물러 있지만, 너는 과거로 시작하여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군."

"음, 아무래도 천성이 그런 것 같네."

"너의 그런 점은 배워야 할 것 같다. 전사로써도, 너의..... 연인으로써도."

"정말?"


브륀힐드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함께 만들어가다오. 너와, 나의 이야기를."


두 사람은 손을 잡았고, 그 손길은 부드러운 입맞춤으로 이어졌다.


생각해보면, 그때가 두 사람의 첫 키스이자, 처음으로 관계를 맺은 날이었다.


그 뒤로, 두 사람은 함께 역경을 헤쳐 나갔다. 둘이 힘을 합쳐 동료를 늘려갔으며, 함께 전투에 승리했다.


함께 사랑을 나누었고, 함께 아침을 맞이했다. 함께 첫 출산을 경험했으며, 함께 육아로 고생했고. 슬플 때와 기쁠 때도 함께 울고 웃었다.


그렇게 수십 년에 달하는 시간을 손을 꼭 맞잡고 함께 지내었다.


두 사람은 은퇴했다.


".....오늘은, 두 분의 시간을 가지세요. 아버지, 어머니."


새로운 시대를 이어가는 2대 지휘관이 방문을 열고 떠난다.


문이 닫힌 방에는 두 사람이 함께였다.


세월이 지나 빛이 바래도 옛모습이 그대로 남은, 아름다운 오르골과.


이제는 많이 늙어서 쭈글쭈글해진 남자가.


"이런 날이 오게 될 줄은....."


브륀힐드가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오랜 세월을 함께 해왔지."


지휘관도 옅게 웃었다. 소리 없는 미소였을 뿐이지만, 두 사람은 서로 할 말을 알았다.


"이제는 당신이 지휘관을 보필해줄 때야."

"그 아이도 이제는 컸어. 적어도 자기 앞가림은 할 수 있을 정도로."

"하지만 아직 부족하지."

".....저 아이의 뒷모습에서, 당신의 모습이 보여."

"피는 못 속이는 거니까. 나도 가끔 저 아이의 등에서, 당신을 보곤 해. 특히 전선에 나설 때는, 창을 쥐고 나가는 당신을 꼭 닮았어."


두 사람은 함께 웃었다.


"이렇게나 늙어서는....."


브륀힐드가 노인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 노인의 피부는 탄력을 잃어 힘없이 주름졌다.


"그러는 당신은 여전히 아름다워."

".....늙으면 주책이라더니."


말이 뚝뚝 끊긴다. 오랜 세월 이어진 두 사람이지만...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일에는 서로 서투를 수밖에 없었다.


"당신은 또다시 오랜 세월을 앞으로 나아가겠지."

".....그렇겠지."

"저 오르골은 아직도 남아 있군."


노인이 방 한쪽을 장식한 오르골을 보았다.


예스러운 분위기와, 얻었던 상처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오르골.


두 사람은 결혼하여 방을 합친 다음에도 그 오르골을 함께 관리했다.


"당신이 해주었던, 저 오르골에 얽힌 이야기를 아직도 기억해."

"그런가?"

"저 오르골은 벌써 백 년도 더 전에 생명을 다했지만..... 여전히 살아 있다고, 난 생각해."

"...나도 그렇다."

"그리고 나 또한, 그러겠지."


지휘관은 떨리는 손을 들어 브륀힐드의 뺨을 어루만졌다.


"당신의 입을 타고, 손자 손녀들에게. 증손자 증손녀들에게.... 그리고 더 나아가 먼 미래를 책임질 후손들에게도....."

"물론이다."


브륀힐드는 그의 손을 꼭 쥐며 자신의 뺨에 묻었다.


"그렇고 말고. 나와 함께 영원히 살아가는 거다. 나와, 너의 아들과도 함께. 우리는 영원히... 영원히 함께할 거야."

"....미안하오."

"미안하기는."


브륀힐드의 뺨에 행복이 흘러 내린다. 그 행복이 노인의 손가락을 적셨다.


".....그리고 보니....."


노인이 마지막 기력을 짜내어 팔을 더 높이 들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만진 것은 하얀 머리카락.


그리고 그것을 만진 다음, 추락하며 스쳐 지나간 브륀힐드의 뺨과 눈물이었다.


"당신의 머리카락은 여전히 반반이구려."


사랑이 진다.


그러나...








"할머니!! 할머니!! 이 사진에 있는 미녀, 정말로 할머니에요!?"

"훗.... 그런 때도 있었지."

"옆에 남자는 누구에요? 애인?! 애인이에요?"

".....이 남자가 궁금하니? 그럼 이리 와서 앉아보려무나."


백발이 된 노인이 앙증맞은 증손녀와 증손자를 끌어 안으며 옆자리에 앉혔다.


"와!! 할머니가 옛날 얘기 해주신데!!"

"오늘은 어떤 이야기에요? 어떤 이야기에요!? 세이렌을 콰과광 물리쳤을 때!?"

"오늘은....."


....사랑이 졌다.


그러나 마음과 기억은.


"이 할미의 머리카락이 절반은 검었을 때의....."


골동품이 되어도 영원히 남아 있겠지.


아직도 눈만 감으면 그 순간이 펼쳐졌다.


"어떤 남자와 함께 만들어간 이야기란다."


브륀힐드는 그날을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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