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더 갤리 (Whydah Gally 또는 Galley)


이름에 "갤리" 가 들어가서 몇가지 설명해야 할 것이 있다


보통 "갤리선" 이란 분류로 엮이는 지중해의 노젓는 배들, 특히 16~17세기 갤리선들은 이렇게 생겼다:



한 벤치당 5명이 앉아 (1명의 전문 격군과 4명의 노예) 크기에 비해 굉장히 인구 밀도가 높고, 노젓는것을 주 추진장비로, 돛을 보조 추진장비로 쓰며, 보급 없이 1~2주 이상 버티기 힘들다.


반면 위더 갤리는 돛을 주로 사용하는 범선이며, 노를 어디까지나 보조적으로 사용하지만 어쨌든 노를 쓰기 때문인지 이름에 갤리가 들어간다.



박물관 레플리카 사진을 보면 큰 사각형 포구 아래에 작은 사각형의 마개들이 점점이 박혀 있는 것이 보인다.

이것들이 노 저을때 개방하는 스윕 포트 (Sweep port) 이다. 

스윕 포트를 열고 노를 (당시엔 노를 oar 가 아니고 sweep 이라 불렀다) 전개하면 아래와 비슷한 모습이 된다.


(1720년 즈음의 영국 6등급함, 대포 20문의 소형 프리깃, 스윕을 전개한 모습)


범선 기술도 발달한 시대에 왜 노가 필요한가 싶을 수 있는데 활동 영역에 따라 노가 있어야 많이 편해지는 경우가 있다.

먼저 스웨덴 앞바다나 카리브 해 처럼 작은 섬들이 많고 수심이 낮아 좌초하기 쉬운 곳이 많으면 노를 저어 민첩성을 확보해야 항해가 편하다.


그리고 지중해나 적도 부근 처럼 바람이 잠잠한 날이 많은 곳도 노가 있어야 항해가 편하다. 특히 적도 부근은 무역풍 둘이 만나 돌드럼 (Doldrum, 현대 영어에선 지루함을 뜻하는 단어로도 쓰인다) 이라는 극한의 무풍지대를 만들기 때문에 저을 노가 없고 운이 없으면 여기서 한 달 넘게 뜨거운 태양과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지루함을 견디며 체류해야 할 수도 있다.


(ITCZ 가 돌드럼 지역)


이야기가 약간 샜는데 위더 갤리는 대항해시대 시리즈를 해봤으면 자주 했을 삼각 무역 스타일의 무역을 하던 상선이었다.

이름부터 주 고객인 서아프리카 해안 위더 왕국의 이름을 따 지어졌다. 

위더 갤리가 따라가던 무역루트는 먼저 영국에서 직물, 인도산 조개껍질 (서아프리카에서 통용되는 화폐), 철물류, 술, 도자기 등을 선적한 뒤 서아프리카 해안에서 팔고 흑인 노예, 상아, 금 등을 사들인 후, 노예들은 플랜테이션 농업을 주력으로 하는 카리브 해 지역에 팔고 설탕과 향신료, 염료 등을 사 영국으로 돌아오는 삼각무역이다.


위더의 함생 자체는 상당히 짧았다. 1716년 처녀항해를 시작하고 1년 후, 그러니까 삼각무역 한번을 다 돌기 전 카리브 해에서 유명 해적 벨라미에게 3일간의 추격전 끝에 따라잡혀 나포당한다. 

벨라미는 2008년 포브스 기고글에 평생 노획물 예상 값어치 당시 달러가치로 환산 약 1억 2천만 달러로 해적랭킹 1등을 찍은 해적이며, 인생의 허무함을 보여주듯 위더를 나포해 기함으로 삼은 지 두달만에 유난히 강한 폭풍에 휘말려 배와 함께 가라앉으면서 28세의 젊은 나이로 1억 2천만달러를 다 써보지도 못하고 죽는다.


1716년 초반 언젠가 영국에서 출항 -> 1717년 2월 카리브 해에서 나포, 해적 기함이 됨 -> 1717년 4월 미국 메사추세츠 해안에서 침몰


아즈렌에서 위더를 소개할때 "은세의 템페스타" 라고 소개하는데, 사실 오래 숨어 있지도 못했다.

머리 위에 두껍게 모래를 쌓고 숨었었으나, 현대 기술은 당해내지 못했고, 1984년 배리 클리포드 라는 보물사냥꾼에게 발견되어 클리포드의 사유물이 된다.


현재 위더에서 발굴된 보물과 유물들은 미국 메사추세츠 주 웨스트 야무스에 소재한 "위더 해적 박물관" 에 탑승가능한 위더 갤리 레플리카와 같이 전시되어 있다.

스윕 포트를 설명할때 사용한 사진이 탑승 가능한 레플리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