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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황금 나침반 너 줄게."


로열 포츈은 눈을 껌뻑였다.


"괜찮아? 소중한 거 아니야?"

"언젠가 도움이 될 거야."


망설임 없이 나침반을 건네는 모습은, 마치 이 순간이 정해져 있는 일인 것처럼 단호했다.


"슬슬 가볼게."

"....나는 단순히 약탈하는 나쁜 해적이 아니라, 낭만을 꿈꿨어."


숨겨진 보물을 찾고 목숨을 건 대모험을 떠나는, 그런 낭만을.


"네가 있었기에, 그 소원을 이룰 수 있었어."


그런데 그 남자는 말했다.

돌아가겠다고.

하지만 나는....


"절대 잊지 않을게."


어쩌면.


"편지도 쓸게."


내가 꿈꿨던 모든 여정의 끝에 있는, 가장 소중한 보물은.....


"꼭 만나러 갈게-!!"


점점 옅어지며 사라진, 너였을 지도 모르겠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사라진 너의 등을 보며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 뿐.


"....바닷바람의 축복이 있길."


그렇게, 로열 포츈은 첫사랑을 떠나보냈다.








"...괜찮니?"


살짝 글썽거리는 그녀를 보며, 골든이 물었다.


"....응."


포츈은 지휘관이 남기고 간 나침반을 소중히 안아 들었다.

잠시 동안, 아무것도 없는 허공의 저편을 바라보았다. 혹시라도 그의 흔적이 보일까 봐.

그러나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달은 그녀는 지휘관의 유일한 흔적인 나침반을 보았다.


"괜찮아."

"....자, 그럼 선장님. 어떻게 할래?"

"그야 당연히...."


로열은 눈물을 훔치며 히죽 웃었다. 그녀가 나침반을 높이 처들면서 외친다.


"이 세계는 이미 정복했어! 우리는 다른 차원으로 향한다!!"

"후후후."


웃음을 흘리며, 유령선이 움직인다.


"나침반이 향하는 곳은...."


로열은 방향을 어림잡았다. 이 나침반은 단순한 나침반이 아니다.

차원을 넘나들 수 있게 해주는, 세계와 세계를 연결하는 차원 유랑의 열쇠.

그러나 로열은 또다른 가능성을 보았다.


"저쪽이야."


이 나침반을 따라가다보면 분명 닿을 수 있을 거라고.


'시간도, 공간도 넘어서.'


이번에는 내가 너에게.

...네가 나를 찾아왔던 것처럼.


"닻을 올려라!"


긴 여행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여행은 쉽지 않았다.


"꺄아아악! 바퀴벌레가 내 머리만 해!!"

"으아아악! 가짜 골든이 도끼 들고 쫓아와!!"

"다들 도망쳐! 금태양 골든이다!!"

"잡히면 촉수로 보지 존나 쑤셔지고 말 거야아아아!!"


세상에는 다양한 차원이 있었다.

그 차원에는 항상 사람이 사는 게 아니었다.


때로는 괴물이.

때로는 신적인 존재가.

때로는 원시시대가.

때로는 도플갱어들의 낙원이.


생물이 살 수 없는 환경의 차원도 존재했으나, 나침반은 그런 차원을 피해갈 수 있게 해주었다.


"하아.. 하아.... 무서웠어, 너무너무 무서웠어...!!"
"어머, 얘는. 고작 나였던 걸로 호들갑은."


골든이 후후 웃는다. 그러나 다른 템페스타의 인원들은 질색했다.


"네가 가짜들 틈에 섞여서 은근슬쩍 우리를 강간하려고 했잖아!"

"메리 좀 봐! 너한테 당한 이후로 촉수만 봐도 보지에서 애액을 질질 흘린다고!"

"헤윽...! 헤으으응..!"


메리가 얼굴을 붉히면서 가볍게 오르가즘을 느꼈다.


"좋은 거 아닌가?"

"갈!!!!"


그렇게 티격태격거리며 오늘도 하루가 지난다.


"후우....."


뒷풀이가 끝난 후, 로열 포츈은 갑판으로 나와 밤바다를 내다보았다. 달빛이 넘실거리는 바다의 표면을 보고 있자니, 그리운 얼굴이 스멀스멀 떠올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보지 벌리면서 유혹해 따먹을 걸 그랬지?"

"맞아맞아. 한 번이라도 했으면.... 뭐, 뭐라는 거야!?"


포츈이 깜짝 놀라서 옆을 봤다. 골든이 소리 없이 다가와서 쿡쿡 웃고 있었다.


"그 남자, 절륜하게 생겼었지."

"그, 그런 거 아니거든!? 무슨... 날 똑같이 취급하지 마."

"흐응~ 과연 그럴까?"


골든의 등 뒤에서 문어 촉수가 넘실넘실 피어 오른다. 포츈은 식겁하면서 뒤로 물러났다.


"이 색녀! 자비없는 보빔마! 저리 가!"

"농담이야, 후후후."

"농담 아니었잖아."

"나도 임자 있는 몸을 막 뺏지는 않으니까."

"임자 있는..... 읏..."


포츈이 뺨을 붉혔다.


"아, 아직 아니거든. 아직... 내 마음을 제대로 전하지 못했으니까. 방금 아쉬워한 건, 이럴 줄 알았으면 제대로 고백할 걸 그랬다는 거였어."

"그리고 섹스도 하고?"

"아니야!"

"후후후후후."


포츈은 꼼지락거리며 몸을 비볐다.

솔직히 말하면, 그 품에 안기고 싶다는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었다.

다만.....


"나, 나랑 지휘관은 동료였으니까.... 그, 그런 사이가 아니였단 말이야."

"그래그래."


골든이 장난기 없는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제는 생각이 변했지?"

"......"

"원래 가까이에 붙어서 지낼 때는 모르는 법이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니까."

"너......"

"하지만 정신적인 여유가 생기면 달라지지."


골든이 고개를 돌려 지평선을 본다. 달이 세상 아래로 꺼지고 있었다.


"이 항로는 그 남자의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경로니?"

"........응."

"성실하구나. 벌써 몇 년이나. 그 남자의 그림자를 쫓다니."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거야?"

"아니."


골든은 고개를 저으며 미소 지었다.


"하지만 알아두렴."

"뭐를?"

"만나는 남자가, '그 남자'일 거라는 보장은 없단다."


포츈이 미간을 좁혔다.


"무슨.. 무슨 말이야...?"
"그 나침반."


골든이 포츈의 목에 걸려 있는 황금 나침반을 가리켰다.


"그 남자가 말했잖니. 전부터 너를 알고 있었다고."

"아, 응.... 그랬지?"


포츈의 멍한 반응에 골든이 살짝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말의 의미를 깊게 생각해본 적 없구나."

".....?"
"그 남자는 너를 만나기 전부터 널 알고 있었어. 그리고 황금 나침반이 자신을 이 세계로 이끌었다고 말했지."

"....응."


분위기가 뭔가 이상했다. 포츈은 미간을 오므렸다.


"그가 알던 '로열 포츈'은, 미래의 너일까? 아니면 오늘 만난 도플갱어처럼 수많은 차원에 존재하는 '로열 포츈' 중 하나였을까."

"뭐......?"

"만약 후자라면, 너와 '그 로열 포츈'은 동일인물일까? 같은 기억을 공유하고, 같은 성격을 지녔을까?"

"그게 무슨......"

"생각해보렴. 오늘 무수한 도플갱어와 진짜 '나'의 차이가 무엇이었는지. 그 남자를 다시 만난다 한들, '진짜 그 남자'가 아니라면 너를 알고 있을까?"

"그게 무슨....."

"미안하구나. 하지만 언젠가는 깨달았어야 할 일이야."


골든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안으로 들어갔다.

남겨진 포츈은....


"......말도 안 돼."


믿고 싶지 않았다.


"말도 안 돼......"


그날은 밤유령의 흐느낌이 유난히 가까이에서 들리는 밤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식사를 하고 있던 골든의 옆에 포츈이 뛰어왔다.


탁!


황금 나침반을 탁자에 내려놓고, 포츈이 말한다.


"가겠어!"

"......."

"네 말대로라도 좋아. 직접 확인하지 않으면 모르는 법이니까. 보물 상자에 무슨 보물이 들었는지 모르는 것처럼!"

"......"

"난 가겠어. 끝까지 갈 거야. 세상 어디든. 우주 어디든...!"

"후훗."


골든은 조용히 웃으며 문어 촉수를 꺼냈다. 그 촉수의 끝이 로열의 눈 아래 가득 맺힌 눈물을 훔쳐주었다.


"그렇다면 좋아. 지시를 내리렴."


골든이 속삭이듯 말한다.


"우리의 선장님."

"응! 모두 출항이야! 빨리빨리 움직여!!"


또 다시 배가 나아간다. 바다를 건너, 시간을 건너. 공간을 너머 그곳으로 향한다.


그렇게 다시 오랜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이곳인가 봐."


나침반이 격렬하게 회전하고 있었다.


"나침밤은 목적지에 도착하면 방향을 못 잡고 계속 돌지."

"맞아. 이곳이야. 바로 이곳에....!!"


로열 포츈은 감격해 눈물을 흘릴 뻔했다. 드디어 지휘관이 있는 장소에 도착한 것이다.


"그럼 이제 남은 건...."

"확인뿐이지."

"...다녀올게!"


그녀가 용감하게 나서자 다른 인원들이 말한다.


"정말 혼자 괜찮겠어?"
"물론이지. 금방 다녀올게!"


포츈은 배가 정박한 장소로 갔다.


'마침 할로윈 파티네.'


테마파크에서 잔치가 한창이었다.


'어쩌지, 지금 바로 갈까?'


포츈은 섣불리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해안가에서 서성였다.

그도 그럴 것이, 골든의 말이 자꾸 머릿속을 떠돌았기 때문이다.


-그 남자를 다시 만난다 한들, '진짜 그 남자'가 아니라면 너를 알고 있을까?


이곳에 있는 지휘관은 진짜 지휘관일까? 아니면 뿌리만 같은 다른 사람일까.

만약 후자라면.....


"실례지만...."


그때 등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걸었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몇 번을 들었고, 몇 번이나 떠올렸던 그 목소리.


"쉿..!!"


포츈은 깜짝 놀라서 지휘관에게 그렇게 말했다.


"쉿...?"

"아...."


어쩌다보니 지휘관이 이곳으로 나왔다.

일단 뭐라도 말해야 했기에, 그녀는 아무 말이나 꺼내고 본다.


"혹시 들려? 바다에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 말이야."

"...파도 소리 말하는 거야?"

"바다의 비명이라고 비명!"

"어, 음...."


'어두워서 얼굴이 안 보여.'


포츈은 미간을 좁히면서 지휘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때 테마파크에서 불이 번쩍 켜지며 이쪽을 비추었다.

불빛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얼굴을 마주봤다.


'아....!'


포츈이 불빛 아래 드러난 지휘관의 얼굴을 보고 환히 웃었다. 그러나 그의 두 입이 열렸을 때, 그녀는 절망했다.


"난 이곳의 지휘관인데, 넌 누구지?"

"나......?"


잠깐 튀어 나온 실망감. 포츈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일단 말이 트였으니,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그녀는 으레 하던 식으로 자신을 소개한다.


".....처음 인사하네, 내가 바로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찾기 위해 사방을 돌아다니고 있는 귀엽고 매력적인 수수께끼의 대해적! 로열 포츈이야!"

"........"

"........"

"그래서... 몰래 들어온 거지?"


미적지근한 반응. 이것으로 분명해졌다.


"후후..... 그러네. 나는 불청객인 셈이네."


포츈은 옅에 웃으며 돌아섰다.


"만나서 반가웠어, 지휘관."

"......."


포츈은 등을 돌리고 떠난다. 어둠 속에서 가만히 이쪽을 응시하던 시선은.... 곧 발길을 돌리고 테마파크로 돌아갔다.


"흑......"


포츈은 눈물을 참으려고 애썼으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땠... 포츈? 울어?"


배로 돌아갔을 때, 동료들이 그녀를 둘러쌌다.


"아니었어......"


포츈은 울었다.


"흐윽... 아니었어.. 내가 찾던 지휘관이 아니었어....! 으흑... 흐윽....."

"......포츈...."

"그렇게 애타게 찾았는데....! 아니었어..! 전혀 다른 사람이었어..! 날 몰라. 나를 몰라....!"


지난 몇 년 동안 쌓인 설움과 불안함이 이 자리에서 터지려고 했다.

그걸 막은 건 골든이었다.


"얘야."

"골든.. 흑... 으흑... 네 말이 맞았어. 아니었어... 진짜 지휘관이..."

"쉿."


골든이 그녀의 뺨을 쓰다듬으며 눈물을 닦아주었다.


"이래서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한 거였어."

"마음의 준비.. 흐끅...?"

"앞으로도 숱하게 실패할 거란다."

"앞으로..? 앞으로라니 무슨 말이야?"


포츈은 놀랍도록 빠르게 진정했다.


"수십, 수백.. 어쩌면 수천 번을 실패할 지도 몰라."

"......."


서서히, 그 말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마도, 그 세계에는 이미 또 하나의 네가 존재하겠지."

"아....."


지휘관은 이미 그녀를 알고 있었다.

당연히 그 세계에는 이미 로열 포츈이 존재할 거다.


"이 자리에서 결정하렴. 저 지휘관과 새로운 만남을 시작할지."


골든의 속삭임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너의 도플갱어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널 아는 지휘관을 찾으러 갈지."

"아......"


포츈은 뒤를 돌아본다. 저 멀리에서 웃음과 비명이 들리는 할로윈 파티가 진행 중이었다.


"우리는 네 뜻에 따를게. 하지만 잘 생각하렴."


골든이 전에 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한다.


"이 나침반은 지휘관의 손에 들어가야 해. 안 그러면........"


긴 침묵.

그 끝에 절망이 있었다.


"루프가 끝나 버릴 거야. 어디에선가 존재하는 또 다른 우리들이 죽겠지. 그 세계가 멸망할 거야."

"아......."


포츈은 나침반을 내려다보았다.


'만약 이것이 또 다른 차원에서도 벌써 일어났던 일이라면.'


지휘관이 가지고 있던 나침반은, 로열 포츈이 전해줬다는 이야기가 된다.


"우리는 나침반 없이는 차원을 유랑할 수 없어."

"아... 아아....."

"잘 생각해야 해."


골든이 당부했다.


"기회는 한 번 뿐이니까."


선택지가 생겼다.

또 다른 세상을 위해 남을지.

루프를 끊고 나 자신을 위해 떠날지.


"윽... 흐윽....."


포츈은 눈물을 흘렸고....


결정했다.


'그 차원에서의 너는..... 잘 지내고 있니?'









"후..... 돌아왔어."


지휘관이 말했다.


"정말 고생 많았어."

"....이대로 된 거야? 나침반을 그 세계의 너에게 주고 와 버렸는데."


꽤 짓궂은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포츈은 미소를 지었다.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어."

"응?"

"내가 만난 너와, 새로운 차원의 네가,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

"하지만 이제 알겠어."


포츈은 지휘관에게 다가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바로해주었다.


1년.


1년의 시간이었다.


그 1년 동안 지휘관은 로열 포츈이라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갔고.

여러 일을 겪으면서 이 세상을 구했으며.

날짜를 맞춰서 또 다른 세상을 구하고 돌아왔다.


이것이 뜻하는 건 하나였다.


"넌 내가 아는 그 지휘관이 맞아. 다만... '똑같아지기까지'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야. 너도, 나도."


포츈이 그를 꼭 끌어 안으며 품에 안겼다.


"나.... 돌아왔어, 지휘관."


기이한 일이었다. 다른 차원에서 돌아온 것은 지휘관인데 포츈이 돌아왔다고 말하고 있으니.

그러나 그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

"많은 일이 있었어. 함께한 동료들도 있고, 골든한테 강간 당할 뻔하기도 했고. 그러면서... 그러면서 고생 끝에, 너에게....."

"......"


지휘관은 그런 포츈을 꼭 안아주었다.


"잘 돌아왔어. 정말로."


많은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처음 지휘관을 만났을 때.

그에게 받은 물건으로 그를 찾아 나섰을 때.

그리고 그를 다시 만났을 때.


"정말 잘 돌아왔어, 포츈."


포츈은 그의 품에 안겨 눈물을 흘렸다.

아마 나침반을 주었던 로열 포츈도 이렇게 울었겠지.

그리고 지금 지휘관에게 나침반을 받은 로열 포츈 역시.


훗날, 포츈이 골든에게 말했다.


"딱 하나, 네가 틀린 게 있었어."

"뭔데?"

"도플갱어도 결국 다 똑같은 너였다는 거. 도플갱어의 틈에 숨으니까 분간할 수가 없었거든."

"흐응~"


골든이 짙은 미소를 지었다.


"결국, 다 같은 나인가."

"응."


포츈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결국 다 같은 나야."


지평선의 바다 위로, 노랗게 익은 석양이 넘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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