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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이런 복장을 좋아해."


바니걸이 된 키어사지가 말했다.


"뭐.... 맞지."


지휘관은 순순히 인정했다. 그러자 키어사지가 엣헴 하고 숨을 뱉으며 뿌듯해했다.


"지휘관의 취향을 조사했어. 다른 함순이들을 보고 당신이 보여준 반응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아하....."

"그 결과, 당신은 이렇게 젖이 반 이상 노출된 복장을 좋아해. 스타킹도 찢어져 있어서 맨살이 군데군데 보여야 하고. 보지 둔덕이 보이면 더 좋아하지."

"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맞지."

"역시."


키어사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신이 대단한 걸 발견했다는 태도였다.


"큰일 났어."

"뭐가."

"내가 당신의 취향을 파악해버렸으니, 이제 다른 함순이들은 당신을 나에게 빼앗길 거야."

"오....."


당돌한 선전포고에 지휘관은 감탄했다. 그는 키어사지를 살짝 겁줄 생각으로 입을 연다.


"상당히 위험한 발언인데, 그거."

"위험?"

"자칫하면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어."


함순이들 중에는 과격한 함순이도 있다.

도발을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거나.

그를 독차지하기 위해 다른 함순이들을 견제한다거나.

그런 함순이들은 키어사지의 독점 발언을 그냥 넘기지 않을 거다. 절대로.


'물론, 진지하게 뱉은 소리는 아니지만.'


그래도 누군가 들으면 발끈할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다. 만약 시끌벅적한 치정 싸움에 살짝 무덤덤한 키어사지가 휘말리면....


'그건 그거대로 재밌을 것 같기도-'


".....그런 일은 없어."


키어사지가 말했다.


"응?"

"적어도 이 모항 안에서, 전쟁이 일어날 일은 없어. 특히나 우리들 끼리는."

".....?"


지휘관은 눈을 멀뚱히 뜨고 키어사지를 보았다.


'뭐지, 뭔가 묘하게.....'


키어사지의 상태가 뭔가 이상했다.

몰두하고 있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키어사지는 평소에도 조금 맹하거나, 아니면 너무 진지한 모습을 보이곤 했다.

특히 감정이 옅어서 무감각한 것 같은 모습을 많이 보였는데, 그런 그녀가 저렇게 무언가를 표현하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보니 최근에 날 계속 관찰했지?'


아마도 그것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지휘관은 우선 가볍게 받아친다.


"그런데 갑자기 내 취향은 왜? 혹시 지금 나 유혹하는 거야?"

"음, 좋은 질문이야."


키어사지가 고개를 주억였다.


"나는 지휘관을 신뢰하고 있고, 지휘관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어."

"그건 알아. 키어사지는 호기심이 왕성하잖아."

"...그렇지."


키어사지가 잠깐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평소와는 태도가 살짝 달랐다.


"단순히 날 알고 싶어하는 게 전부야?"

"......"


키어사지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대답하지 않는다기보다, 대답을 생각해내는 느낌이었다.


"...오늘 키어사지는 뭔가 평소랑 다르네."

"그런가?"

"그 복장도."


지휘관이 바니걸 복장을 지적했다.


"뭐, 키어사지야 원래부터 보지 쫄쫄이를 입고 있었으니까 바니걸은 큰 거부감은 없겠지만."


지휘관은 그녀의 위아래를 쭉 훑었다.


"유두가 보일 락 말락 한 아슬아슬한 젖가리개랑 일부러 찢은 스타킹은, 키어사지 스타일이 아니지."

"....그런가? 평소 입던 거랑 비슷한 거 같은데."

"키어사지는 FM이잖아. 활동하기 편한 옷이 아니라, 단순히 이성을 위한 옷을 입는 스타일은 아니야."

"......"


키어사지의 말수가 줄었다. 지휘관은 점점 핵심에 다가가고 있음을 느꼈다.


"보통 내 취향의 야시시한 옷을 입고 오는 함순이들은 단순히 내가 좋아하는 걸 입었다, 말고 그 이상의 것을 원해. 뭐... 데이트거나. 아니면 천박한 섹스 같은."


지휘관은 일부러 대놓고 섹스라고 말했다. 하지만 키어사지는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보아하니 넌 그런 쪽을 원해서 온 건 아닌 것 같은데."

"음....."

"자, 키어사지. 솔직히 털어놔야지. 감정을 숨기는 건 좋지 못한 행동이야."


지휘관이 재촉했다. 그러자 키어사지가 허공을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나는 아직 부족함이 많아."

"그런가?"

"그래서 지휘관의 생각을 이해하고 따라하기가 조금 벅찬 것 같아....라고 느끼고 있어."

"내 생각?"


되물었으나, 키어사지는 그 질문을 넘겼다.


"....지휘관은 나를 신뢰해?"

"신뢰하지."

"....그렇다면 나는 지휘관의 신뢰를 망쳤군."


'갑자기?'


지휘관은 미간을 오므렸다.

솔직히 말해서, 키어사지의 감정기복을 따라가기가 조금 벅찼다.

원래 마이웨이적인 기질이 강했는데 오늘처럼 알쏭달쏭하니 더 힘들었다.


"어느 부분에서 그렇게 생각한 거야?"

"난 지휘관이 바니걸을 좋아하는 줄 알았어. 하지만.... 당신이 좋아하는 건 바니걸 그 자체가 아닌 것 같네."

"그런가?"

"만약 바니걸 자체를 좋아하는 거였다면, 이런 저런 말들로 나를 떠보고 내 의사를 재확인하지 않았겠지."

"오, 날카롭네."


맞는 말이었다. 바니걸이라서 무작정 좋은 게 아니다.

바니걸만 보고 발기하기에는 이미 수천, 수만의 바니걸을 봤기에 무감각해졌다.

누가, 왜 입어줬느냐가 훨씬 중요했다.


"이번에야말로 당신을 완전히 이해했다고 생각했는데."


키어사지가 깊은 한숨을 뱉었다.


"흐음."


지휘관은 팔짱을 낀 채 신음했다. 키어사지가 약간의 후회를 담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당신을 이해하는 건 전투에 있어서도, 그리고 앞으로 나의 삶에 있어서도 중요한 문제야."

"뭐, 같이 부대끼며 사는 사이니 이해하면 좋-"

"그런 의미가 아니야."


키어사지가 단호하게 뱉었다.


"난 좀 더.... 지휘관. 당신이라는 존재를.... 음....."


그녀가 고민하면서 신중하게 단어를 선택한다.


"당신을 좀 더 깊게 이해하고 파악하고 싶어."

"어째서?"

"당신은 나를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였고, 많은 도움을 줬지. 또, 많은 동료와 만나게 해주었어."


키어사지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행복이 담겼다.


"또, 부족함이 많은 나를 다독여주었어. 나는 남들과는 달리 감정이 무디고 생각이 더딘 편이니까. 내게 부족한 면을 당신이 채워줬지."

"꼭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아. 지휘관. 나는 내 감정과 타인의 감정에 둔감해."


키어사지가 살짝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원체 표정이 없고 감정에 둔하다보니 슬픔도 제대로 비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은 유난히 감정을 많이 보이고 있었다. 안 좋은 쪽으로.


"왜냐하면, 나는 전투를 목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야."

"......"


지휘관은 가만히 들었다.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유니온 소속의 특수 계획함이야. 전함과 항공의 하이브리드. 모든 전황과 전장에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았고, 나의 모든 사고 또한 전쟁을 이기기 위해 설계됐어."


전쟁을 위해 태어난 존재가 있다면, 그것이 키어사지였다.


"내가 당신의 모항에 편입된 것도, 나의 전력을 활용하길 바라서였지. 나는 당신의 힘이 되어주기 위해 이 모항에 몸을 담았고, 잡담도 불사하고 업무를 보면서 전투를 위해 내 모든 것을 바쳤어."

"그랬었지."


처음의 키어사지는 원리원칙을 철저하게 지키는 면모가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의지보다 전황을 우선시했지. 상황에 따라서는 당신의 명령을 무시하고 움직일 수도, 또는 승리를 위해 아군을 희생시킬 수도... 있다고... 아니, 그래야 한다고 배웠어. 나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존재하니까."


키어사지의 눈이 점점 아래를 향했다. 말하면서 괴로워하고 있었다.


"대의를 위해서 다수의 희생하는 자......"

"......"

"세간에서는 그러한 자를 살인마라고 하더군."


키어사지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두 눈에 담긴 감정은....


괴로움이었다.


"그렇다면 지휘관, 나는 살인마인가?"

"......"

"나는 전쟁을 위해 내 모든 능력을 부여 받았어. 그렇다면 나는, 살인을 위해 태어난 건가?"


지금 지휘관의 앞에는 무뎠던 감정이 살아나며, 자신의 존재에 고뇌하게 된 소녀가 앞에 있었다.


"이 모항에 오고 나서 느꼈어. 주변의 다른 함순이들과 나는 무언가 다르다는 걸."


키어사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평소 무감각하기까지한 그녀의 눈망울이 촉촉하게 젖어서 파도처럼 일렁거렸다.


"나는 전쟁과 승리만을 생각했어. 하지만 다른 이들은 그러지 않았지. 승리도 중요하지만, 그들이 더 중요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건....."


소녀의 눈은 살인병기처럼 메마른 군인의 눈동자인 동시에, 이제야 세상을 알아가기 시작한 사춘기 소녀의 눈망울이 뒤섞여 있었다.


"바로 당신과의 관계였어."


병기와 소녀의 감정을 오가는 눈빛을 보며, 지휘관은 침묵을 지켰다.


"다들 전투에서는 무자비한 무력과 다친 전우를 돌보는 우정을 보였어. 하지만 일상에서는 당신이라는 보물을 두고 추잡하게 서로 머리채를 잡고 싸웠지. 어제까지 함께 싸운 전우의 머리채를."

"......"


'추잡하다니.'


지휘관은 그녀의 단어 선택에 옅게 웃었다.


"하지만 결코 진심으로 그러는 건 아니야. 티격태격이라는 단어가 있지. 다툼 또한 추억으로 쌓아가는..... 일상 속에서 생기는 모든 일들은 모두의 추억으로 머릿속에 자리 잡아. 다른 함순이들은 절대 당신이 슬퍼할 일을 저지르지 않아. 절대로."


'그래서 함순이들끼리 전쟁이 일어날 리 없다고 한 건가.'


키어사지가 생각한 전쟁은, 지휘관이 생각한 치정 싸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진짜 잔혹한 전쟁을 말하던 것이었다.


"웃고, 울고, 때로는 질투하고, 때로는 부러워하는..... 일상의 평온을 즐기는 모습들을 보며 난 내가 무언가 잘 못 됐다고 느꼈어."


그녀가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내 손에는 화약과 모래가 묻어 있어. 그러나 그들의 손에는 도넛 반죽과 수제 초콜렛이 묻어 있었지."

"......"

"전쟁에서 무자비하게 세이렌을 침몰시키던 함순이들도 당신의 자지에 박히면서 오고곡~! 하고 칠칠맞게 분수를 뿜어대는 허접보지가 돼."

"하하."


지휘관은 웃었다. 진지한 표정으로 저 말을 뱉는 걸 보자니 웃음이 안 나올 수가 없었다.


"당신은 모두에게 있어 평화와 상징이야. 모두가 나처럼 항상 전쟁을 생각하지 않아. 평소에는 즐거워 보였어. 그래서 생각했지. 나도 변해야겠다고. 일상과 전투를 구분해야겠다고. 하지만....."


키어사지가 또다시 깊은 사색에 빠졌다.


"하지만...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 일상이란 뭔지. 쉰다는 건 뭔지."


가끔, 일만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한테 쉬라고 일감을 뺏어버리면 오히려 공항상태에 빠지게 된다.


다행이 키어사지는 그렇게까지 되지는 않은 것 같지만.


"그래서 모두의 중심에 있는 당신을 관찰했어. 다른 함순이들은 각자의 개성이 너무 달라서 내가 흉내내기 벅찼으니까. 이해할 수도 없었고."

"친하게 지내는 이들이 몇 있지 않나?"

".....그렇긴 하지만, 난 당신을 이해하고 싶었어."


다시 맨 처음 질문으로 돌아왔다.


"왜?"

"........글쎄. 왜지?"


키어사지가 한손으로 턱을 괴고 한참을 고민했다.


".....당신은 지금까지 누구도 희생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했어."

"....그랬지."

"그러나 나는 대의를 위해서라면 희생을 불사하라고 배웠어. 그러니 언젠가 그런 상황을 마주하면, 나는 그렇게 하겠지."

"....."

"하지만 당신은 지금까지 누구도 희생시키지 않고 모두를 이끌어왔어. 그러니 당신을 이해하면......"


키어사지가 아련한 웃음을 흘렸다.


"나도 당신처럼 될 수 있을 것 같아. 누구도 희생시키지 않고 승리할 수 있는.... 그런...."

"....!"


지휘관은 깜짝 놀랐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키어사지를 봤다.


".....그렇게 모두를 지킬 수 있는.. 그런 완벽하고 거대한 존재가."

"저런, 키어사지...."


지휘관이 대뜸 그녀의 양쪽 어깨에 손을 얹었다.


"....지휘관?"

"....굉장히 어려운 길을 가려고 하는구나."

"....?"


키어사지가 눈을 멀뚱히 뜨고 지휘관을 바라봤다.

그의 두 눈동자가 살짝 떨리고 있었다.


"그 길은 무척, 무척이나 어렵고, 괴롭고, 힘든 길이 될 거야. 정말로 어려운...."

"하지만 지휘관은 해냈잖아."


키어사지가 말했다. 그건 사실이었다.

지휘관은 지금까지 자신이 직접 지휘한 전투에서 사망자를 낸 적이 없다.

모든 함순이를 돌봐주었고, 뒤처지는 일 없도록 잘 캐어했으며, 누구도 죽지 않게 했다.


그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역사를 통틀어도 이만큼이나 희생 없이 부대를 운용한 사람은 드물었다.


"당신은 해냈어. 그래서 당신을 보면서 배우면...."

"하하...."


그가 힘없는 웃음을 흘렸다. 뭔가 속이 막힌 것처럼 입을 뻐끔거리더니 고개를 숙였다. 그 직후, 어깨를 잡은 두 손이 파르르 떨렸다.


"지휘관?"

"세상에. 어쩌다가 그런 생각을."


지휘관이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키어사지는 그가 갑자기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뭔가 이상해. 지휘관의 바이탈 사인을....'


키어사지는 몸에 닿은 지휘관의 손을 통해 그의 바이탈 사인을 읽었다.


-바이탈 사인의 상승을 확인. 심박수, 맥박, 체온 상승.


몇 가지 검사 결과가 머릿속을 헤엄쳤다. 특히 번쩍인 건 그의 감정 상태였다.


'불안, 불신... 자책....? 공포.....?'


극심한 불안함이 지휘관을 강타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상황에, 키어사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멍하니 서 있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지금 그가 느끼는 감정들이 낯설지 않다는 것이다.


"키어사지. 나처럼 하고 싶다고 했지."


어느 정도 진정한 지휘관이 입을 열었다.


"....응."

"사실, 정해진 방법은 없어. 계속 고민해. 계속 고민하고, 또 고민하면서 돌파구를 찾아야 해."

"......"

"그러다가 만약 도저히 돌파구가 없다고 느껴졌을 때, 다시 나를 찾아와."


지휘관이 미소를 지었다. 여러 감정이 얽힌 미소였다.


"내가 같이 방법을 찾아볼게."

"......."

"반드시."


지휘관이 그녀를 꼭 안았다. 그건 단순한 포옹이 아니었다. 마치 흐르는 눈물을 숨기려는 듯한 격렬한 포옹이었다.


"......."


키어사지는 지휘관의 어깨 너머로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그녀의 등을 꽉 껴안은 지휘관이 손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와 함께, 지금 지휘관이 느끼는 감정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나.... 이 감정을 알아.'


공포, 두려움, 불안, 불신, 그리고 자책.


'그렇구나.'


돌연, 실패란 존재하지 않았던, 완벽하고 거대하게만 보였던 존재가 딱 눈 앞에 있는 사내의 크기 만큼으로 축소되어 보였다.


그녀는 천천히 두 손을 들어 올려 지휘관을 살포시 안았다.

지휘관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그녀의 온기를 느꼈다.

키어사지도 그에게 기대어 눈을 감았고, 조용히 속삭였다.


"조금은 당신을 이해한 것 같아."


완벽한 지휘관이란 없다.


두려워하면서도 용기 내어 앞으로 나아가는, 소심한 개척자가 있을 뿐.


키어사지는 지휘관이 어떤 사람인지 보았다.


그리고 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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