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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마르크를 대신하여 철혈을 책임지게 된 울리히 폰 후텐이다."


울리히가 와서 보고를 올렸다.


"그로세를 대신한다고도 할 수 있지."


철혈의 수장 비스마르크와 2인자라 할 수 있는 그로세가 연달아 자리를 비운 후, 울리히가 철혈을 책임지게 됐다.


"울리히라고 부르면 될까?"

"지휘관이 그렇게 부르는 한, 나는 그러한 존재라고 정의되지."

"아니, 네가 이름을 그렇게 밝혔잖아."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라는 의미였다."


울리히는 칼 같고, 가식 없는 태도로 일관했다.

또한, 그를 보는 눈빛은 서늘하면서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철혈 애들이 대부분 다 저런 식이지만.'


"그러면 일 이야기를-"

"그 전에."


울리히가 말했다.


"한 가지만 짚고 넘어가지."

"응, 말해."

"너는 많은 함순이들과 교류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어... 그렇지. 모두랑 사이좋게 지내는 편이 좋으니까."

"그런 교류를 말한 게 아니다."

"그럼?"

"섹스."

"섹스."


지휘관의 말에 울리히가 고개를 끄덕였다.


"성관계를 맺는 것 같더군. 많은 이들과."

"음....."


지휘관은 잠깐 멈칫했다.

지금 자기도 하고 싶다고 어필하는 건...


'아니, 그건 아니겠지.'


울리히의 표정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거추장스럽다. 대의에 불필요한 일이지."

"음....."

"나에게는 그런 것을 요구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나는 너의 종이 아니다. 너의 성욕 처리개도 아니지. 나는 나다. 나의 용골, 영혼은 남에게 농락되지 않아. 그건 너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울리히의 눈빛은 강하고 또렷하게 빛났다.


'누구에게 요구해서 하는 건 아니지만....'


굳이 바로 잡을 필요는 없었다. 울리히가 말을 꼬았지만, 하고자 하는 말은 간단했다.

공과 사를 구분하자는 이야기였다.


"알았어."

"제법 말귀를 알아듣는군. 좋다. 그럼 일 이야기로 넘어가지."


그렇게 말하며 울리히는 업무 이야기를 꺼냈다.

두 명의 수장이 떠나고 자신이 파악한 철혈 진영에 대한 조사였는데, 놀라울 정도로 간결한 체계가 잡혀 있었다.


"대단한데. 이렇게 효율적으로 처리한 건 처음 봐."

"그로세와 비스마르크가 잡아둔 체계를 조금 손 봤을 뿐이다. 내가 잘난 게 아니라, 그들의 실력이지."

"아니야. 울리히. 이건-"

"불필요한 대화는 나눌 생각이 없다. 이상이 없다면 이만 물러나지."

"아 잠깐."


지휘관이 떠나려는 그녀를 붙잡았다.


"뭐지?"

"이 부분은 조금 더 넉넉하게 잡고 보급하는 게 나아."


지휘관이 물자 보급에 대해서 지적했다.


"어째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특히 식량은 너무 딱 맞추기보다는 널널한 편이 좋지. 버리게 되더라도."

"우리는 육로가 아니라 바다를 누빈다. 해상에서는 실을 수 있는 무게가 정해져 있지. 그저 불안감 때문에 변수를 늘릴 수는 없다."

"그러면 이 부분을 조금 덜어내면 돼. 그 이유는..."


지휘관이 설명하려고 할 때였다.


"잠깐."


울리히가 그 말을 가로막고 고민에 빠졌다.

그녀는 잠시 동안 표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집중했다. 그리고 몇 초 후, 결론을 냈다.


"....알겠다. 네 말을 따르지."

"응, 애써줘서 고마워. 고생 많았어."

".......그럼."


울리히는 즉각 돌아서서 떠났다.

그렇게 떠나는 울리히의 모습은, 지휘관을 멀리하고 싫어하는 것 같아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지휘관이 받은 느낌은 조금 달랐다.


"흐음...."


지휘관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뭔가....


'뭔가 이렇게.. 음....'


그녀를 보며 뭔가 불안했는데....

아직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울리히님 결재를!"

"저도요!"

"나도나도!!"


업무실로 돌아온 울리히에게 무수한 결재의 요청이 쏟아졌다.

갑작스럽게 두 명의 수장이 자리를 비웠다.

철혈은 눈꼽 뗄 여유도 없을 정도로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후....."


울리히는 살짝 현기증을 느꼈다.

하지만 바로 눈을 부릅뜨면서 정신을 다잡았다.


"바로 시작하지."


울리히는 잠을 줄여가면서 업무에 매달렸다.

그래도 부족하자, 이틀에 한 번 꼴로 자면서 업무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빈자리는 쉽게 메어지지 않았다.


사각사각-


새벽이 지나고 밝아온 아침 햇살이 방을 비출 때도.


사각사각-


아침 햇살이 기울고 점심의 노란 햇빛이 방을 일자로 채울 때도.


울리히의 펜은 멈추지 않았다.


-아하하하. 지휘관님 엉덩이 만지니까 꺄흣!? 하더라니까?

-얘는, 함부로 엉덩이 만지면 못 쓴다니까.

-뭐 어때. 매일매일 안기고 싶은데 그마저도 못 하면 병 나.

-그럼 나는 다음에 자지 만지고 튀어야지.

-지금 할까?

-히히히 사냥 시간이다!


누군가가 문 앞을 지나갔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철혈의 함순이는 아니었다.


'업무 차 들렀다가 돌아가는 길인가.'


소란스럽군. 예의라고는 없는 녀석들.


울리히는 두 사람의 잡담 소리가 듣기 싫어 혀를 찼다.

한 손으로는 턱을 괴고, 다른 한 손은 글을 써내려간다.

졸음이 와서 눈이 스르륵 감길 때마다 턱을 굈던 손으로 미간을 안마하며 잠을 떨쳤다.


"후....."


벌써 며칠 째 잠을 자지 못했던가.

울리히는 슬슬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로세....."


그로세가 생각났다.

함께 전선에 나설 때가.

함께 연주를 할 때가.


-연주하는 것이 틀리더라도... 흐음....


울리히는 그로세만큼 연주 실력이 뛰어나지 않았다.

그뿐일까.

그로세가 2인자였고 울리히는 그러지 못했던 이유가 있다.

울리히는 그로세가 아니며, 그로세가 될 수도 없다.


'비스마르크는 어떻게 이런 업무를 잘 끝냈던 건지.'


또한, 그녀는 비스마르크 만큼 전체를 잘 살피지도 못했다.

비스마르크의 지휘 능력은 탁월했다.

동료를 소중히하고, 친우를 소중히하며, 전체의 생존을 중시하는 그 성격은 안을 굽어 살피는 성군이라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비스마르크가 대단한 것은 절제였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꾹꾹 눌러담았고, 본래 성격과는 다른 냉정하고 카리스마 있는 모습으로 모두를 이끌었다.


대의를 위해 자기 자신의 감정을 죽이고 새로운 인물로 거듭날 수 있는 절제력과 결단력.

울리히에게는 그러한 것이 없었다.


"피곤하군. 몸이 두 개라도 부족해."


울리히는 잠시 의자에 기대어 한숨을 길게 뱉었다.


"갑자기 사라지다니."


처음에는 비스마르크. 그 다음에는 그로세였다.

그 두 사람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다.

비단 업무만이 아닌, 마음의 빈자리가.


"조금만... 쉬어야겠군..."


울리히는 잠시 눈을 감았다. 아주 잠시였다.


부스럭-


"...!?"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는데 옆에 누군가 와 있었다. 울리히는 깜짝 놀라서 괴한을 봤다.


"아, 깼구나."

"뭐....?"

"옮겨줄까 했지만, 역시 그런 배려보다는 이게 더 나을 것 같아서. 괜히 건드리면 깰 거 같았고."


지휘관은 맞은편에 앉아서 서류 작업을 하고 있었다.


"너....."

"절반 정도는 해놨어. 하지만 아직도 한참 남았으니까 가서 재정비 좀 하고 와. 씻고, 먹고 마시고."

"절반?"

"응."

"잠깐, 절반이라면...."


대체 얼마나 잤던 거지?


울리히는 퍼뜩 고개를 들어 시간을 봤다.


꼬박 하루가 지나 있었다.


"아....."

"아, 모포 떨어진다."

"뭐?"


울리히가 몸을 움직이자 얇은 모포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나니 몸 전체에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덮어줬었거든. 잘 때는 체온이 내려가니까. 일이 이렇게 많은데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잖아."

"......바보 같은. 바로 깨워줬어야지."

"그랬나?"


지휘관은 살짝 웃었다.


"....나 때문에 하루를 꼬박 세우다니."

"너 때문이 아니야."


지휘관은 말하는 도중에도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모두를 위해서지. 울리히 너랑, 갑작스러운 변화에도 열심히 일하는 철혈 모두를 위해서."

".....!"


울리히는 눈을 크게 떴다.


모두를 위해서 자신의 감정을 죽인 사람을 알고 있다.

과묵하고 냉정해 보이는 그녀의 이면에는 사실 내성적이고 다정한 언니가 존재했다.


"......"

"어서. 세수라도 하고 와. 그리고 뭐 좀 먹어야지."

"....네 업무는?"

"밀렸지."


지휘관이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반나절이면 끝낼 줄 알았어. 그런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많더라고. 나도 꼬박 하루를 묶일 줄은 몰랐지."

"바보군."

"그러네."


아무렇지도 않아 하며 업무를 속행하는 지휘관을 보며 울리히는 코웃음쳤다.


"내 호감을 사서 날 어떻게 해보려는 수작인가? 다른 함순이들처럼."

"그렇게 보여?"


지휘관이 여유롭게 받아쳤다.


울리히는 말문이 턱 막혔다.

앉은 자리에서 꼬박 하루를 잤다.

아마 몸을 만졌어도 적당한 선이라면 깨어나지 못했을 터.

실제로 모포를 덮어줄 때도 기척조차 못 느꼈다.


"......하려고 했다면 이미 했겠지."

"뭐, 그렇겠지. 그런데 괜찮겠어?"

"뭐가?"

"불필요한 대화는 나눌 생각이 없다며?"

".....!"


울리히의 눈이 커졌다. 그러자 지휘관이 능글맞게 웃었다.


"너무 건방졌나?"

"칫."


울리히는 혀를 차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어디 가?"

"씻으러 간다. 며칠 째 샤워를 못 했어. 미안하지만, 조금 더 고생해줬으면 하는군."

"물론이지."

"밥은......"


울리히는 슬쩍 지휘관을 바라봤다.

지휘관도 그녀를 보았다.


"....같이 먹도록 하지. 여기서."

"오, 그거 설마-"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다. 일이 바쁘니까. 착각하지 마."

"물론이지. 나도 알아."


지휘관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참, 울리히."

"뭐지."

"비스마르크는 나와 함께 일하길 좋아했어. 또, 티르피츠도 종종 비스마르크를 도와줬지."

"........"


잠꼬대를 했던 걸까?

이런 부끄러운 일이...


"그리고 그로세는 너를 비서로 뒀었지."

".....!"


울리히는 깜짝 놀랐다. 진심으로.


"완벽한 사람은 없어. 서로 돕고 사는 거지. 그로세도, 비스마르크도."

"........"

"두 사람이 갑자기 소식이 끊긴 건, 널 그만큼 신뢰하기 때문일 거야. 특히 그로세가 그러겠지. 널 비서로 뒀던 것도, 어쩌면 지금을 위한 포석이 아니었을까 싶어."

"......."

"하지만 그런 책임감에 짓눌릴 필요는 없어. 손만 뻗으면-"


지휘관이 손을 뻗었다. 중간에 서 있던 울리히의 손에 닿았다.


"닿을 정도로 가까이 있잖아?"

"........"

"급한 건 알지만 쫓기지 마. 조금만 더 주변을 둘러보면 거들어줄 사람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어."


지휘관이 울리히에게 본 것은 조급함이었다.

사람이 마음이 급해지면 평소 잘 보던 것도 놓치기 마련이다.

울리히가 식량을 좀 더 넉넉히 챙겨야 한다는 걸 모를 리가 없다.

워낙 정신이 없어서 세세하게 파고들지 못했던 것이다.


"넌 나보다 똑똑해. 하지만 나는 너보다 일을 잘하지. 경험이 많거든."

"자랑인가?"

"서로 돕자는 거야.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면서. 난 울리히를 신뢰하니까. 너는 어때?"

"......."


울리히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목에 뭔가 걸린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서 다녀와."

"......금방 오지."


울리히는 문을 닫고 복도로 나왔다. 하지만 어쩐지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닫힌 문에 기대어 선 채 지휘관의 말을 곱씹었다.


-난 울리히를 신뢰하니까. 너는 어때?


지휘관이 얼마나 천박한 성교를 즐기는지는 잘 알려져 있다.

신뢰? 허구엇날 오고곡 소리 나도록 보지나 따먹고 다니는 남자가 할 말은 아니었다.

함순이들한테 엉덩이랑 자지를 성추행이나 당하는 허약한 남자가 할 말도 아니었다.


그러나 모포를 덮어주고 24시간을 꼬박 대신 일처리를 해준 남자의 입에서는 나올 법한 말이었다.

그런 지휘관의 모습을, 과연 몇 명이나 알고 있을까.


신뢰.


그 단어가 입안에서 맴돌았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녀석."


경쾌한 발걸음으로 복도를 걸어가는 울리히의 입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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