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 "앵커리지가 제정신을 차렸다고!?"txt. - 벽람항로 채널 (arca.live)


전편 요약.

 

평소 아이 같았던 앵커리지가 제정신을 차리지만, 그건 찰나의 순간이었다.

지휘관은 앵커리지가 맨정신을 유지하는 동안 최대한 좋은 추억을 쌓기를 바라며 그녀와 데이트를 하는데

앵커리지는 일부러 정신을 차리기 전의 아이처럼 행동하고, 지휘관은 거기에 의문을 느낀다.

그래서 그에 관하여 묻자 앵커리지가 말하길.


"오늘의 저와, 평소의 저의 격차가 적을수록 지휘관님도 덜 아파하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앵커리지는 그 말을 남기고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가며.

지휘관은 언젠가, 그녀가 다시 정신을 차릴 날을 상상하며 기다린다.




 

 

 




 --

 



"앗! 성생님! 봐봐! 달림, 반짝반짝 예뻐...!"


앵커리지가 빵댕이를 씰룩거리면서 저 하늘을 가리켰다.

튼실한 엉덩이랑 말랑하면서도 빵빵한 허벅지. 그리고 살짝 비튼 몸에서 부푼 젖가슴은 어떤 남자라도 참기 힘들 정도로 육감적이었다.

그러나 지휘관은 그런 앵커리지가 마냥 귀여웠다.


"성생님이 아니라 선생님. 그리고 앵커리지도 예뻐."

"에헤헤...."


앵커리지가 뺨을 붉히며 배시시 웃었다.

칭찬을 하면 기뻐하며 아이처럼 웃는다.


"앵커리지, 달님도, 반짝반짝도 선생님도....! 좋아!"


달을 달님이라 칭하며, 별을 보고 화려한 미사여구로 아름다움을 포장하기보다 순수함이 묻어난, 날 것 그대로의 표현을 쓴다.


'몸은 어른인데.'


정신은 아이다.


앵커리지는 정신에 결함이 있었다.

평생 이렇게 아이처럼 살아가야 하는 운명....

하지만 전에 한 번 앵커리지가 정신을 차린 적이 있었다.

반나절이라는 찰나에 불과했지만.


-반나절은 찰나에 불과해요.


아이가 아닌, 어른인 앵커리지가 말했었다.


-하지만 그 찰나가 누군가에게는 평생 떠올려야 하는 기억이 될 수도 있어요.


앵커리지는 찰나에 불과한 순간만 정신을 차렸었다.

그러나 그 찰나를 순수하게 즐기지 않고 지휘관을 배려했다.

그가 평소의 앵커리지를 보고 찰나의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괴로워할까 봐.


사실 누구보다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던 건 그녀일 거다.

그러나 그녀는 지휘관의 감정을 위해 자신의 바람을 숨죽이고 참았었다.


'미안, 앵커리지.'


지휘관은 그날의 만남을 떠올리면서 그날의 앵커리지에게 사과했다.


'결국, 몇 달이 지나도 계속 기억하고 있어.'


어떻게 잊을까.

찰나의 만남은 달콤했고, 그만큼 아련했다.


"우아아아! 바다에 불이 떠다녀!"

"등불이라는 거야. 아마도."


등불이라고 하는 거 맞나? 사실 지휘관도 잘 모른다. 아무튼, 바다에는 등불 같은 것이 떠다녔다.


"저기도 있어..! 저기도...! 아, 저기도...!"

"앵커리지, 배를 그렇게 흔들면-"

"배, 흔들흔들.. 출렁출렁.....! 즐거워...!"


앵커리지가 등불을 구경한다고 이리저리 흔들자 배가 출렁거렸다.


앗!


결국, 앵커리지가 출렁거림에 휩쓸려 넘어졌다. 지휘관은 재빨리 손을 뻗어서 그녀가 바다에 빠지지 않게 낚아챘다.


"괜찮아? 안 젖었어?"

"응....."

"젖탱이가 커서 추처럼 흔들리잖아. 조심해야지. 엉덩이랑 젖의 무게에 휘둘리면 바다에 푹 빠져버린다, 너."


지휘관은 시시껄렁한 농담을 던지면서 앵커리지를 달랬다.


"....."


앵커리지는 품에 안긴 채 멀뚱한 눈으로 그를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응, 조심할게...!"


그러다가 묘한 분위기와 함께 눈웃음을 지었다.


"......"

"......"


짧은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지휘관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앵커리지가 몸을 일으켜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앵커리지가 서로의 팔이 꾹 눌릴 정도로 바짝 붙어 앉았다.


지휘관은 미소를 지은 채 그것을 그저 받아들였다.


"그리고 보니, 소유즈가 곧 온대."

"소유즈...?"

"귀여운 인형을 좋아하는 북련의 함순이야. 오게 되면 소개해줄게."

".....응."


앵커리지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모나크도 새로운 옷을 주문해놨다고 해. 이번에는 오피스룩이라던데. 외로움을 잘 탄다는 점에서 상당히 어울리는 것 같아."

"......응."


앵커리지는 가만히 이야기를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풍경이 예쁘지? 축제를 즐기려고 다들 노력했어."

".......응."


앵커리지가 조용히 그의 팔을 껴안으며 어깨에 머리를 댔다.


잔잔한 바람이 불어온다.

밤하늘의 공기는 차가웠지만, 주변에 있는 등불은 따스했다.

무엇보다 맞닿은 앵커리지의 체온이 차가움을 달래주고 있었다.


꼬옥-


지휘관이 슬쩍 앵커리지의 손을 잡았다. 앵커리지도 그의 손을 잡았다.


"지난 번에는 치정 싸움이 일어났어. 피곤해서 도망쳤는데 그 탓에 내가 공공의 적이 되어 버려서 혼났지."

"....."

"임플한테서 도망간다고 뉴저지한테 숨겨달라고 했는데, 오히려 뉴저지한테 반쯤 감금당한 채 짜여지기도 했고."

"후훗."

"지안이 주방을 폭발시켜서 한바탕 소란이 일어나기도 했어. 또, 환창이랑 낚시 대결해서 압승했어."


지휘관은 그간 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평온한 분위기였고, 잔잔한 대화였다.


멀리에서는 함순이들이 술을 마시면서 시끌벅적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까이에서는 앵커리지의 낮은 웃음소리와 숨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심장 소리도.


두근두근- 두근....


"......."

"......."


침묵마저 부드러웠다. 고요함과 소란이 공존하며, 새벽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렸다.


밤이 지나면 빛이 세상을 채운다.


그리고 다시 밤이 온다.


모든 생물은 각자의 밤과 낮. 주어진 시간 동안 해야 할 일을 하며 살아간다. 그것이 하루의 일과다.

그런 일상은 매일매일 되풀이된다.

혹자는 이것을 두고 삶이 쳇바퀴와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망설이다가 놓쳐버린 기회는 돌아오지 않는다.


"....너는 어땠어?"


지휘관이 미소 지으며 앵커리지를 바라보았다.


"....바보 같은 분."


앵커리지는 눈을 감았다가 살짝 젖은 눈으로 그를 보았다.

눈빛이 변했다.

순수함에서 그윽함으로.


"...결국, 평생 기억하시게 됐네요."


말투도 변했다.

천진난만함에서 부드러움으로.


"제가 온 걸 바로 알아차리실 정도로. 저를 잊지 못하고 계세요."


화법도 변했다.

순수하고 직설적인 아이가, 노련하고 상대하기 어려운 여자로.


'혼날 건 각오했지만.'


지휘관은 미소를 지은 채 맞잡은 손을 더 꼭 잡았다.


"슬픈 기억이 아니었으니까."

"...거짓말에도 능해지셨고요."


지휘관은 하하, 웃었다.

 

"그래도 나쁘지 않아."

"네?"

"난 앵커리지를 무척 좋아해."

"....앵커리지도 그래요."


자신을 말한 것이 아니라, 평소의 앵커리지의 대답을 대변한 것이었다.


"너를 말한 거야."

"....."

"결국, 하나의 앵커리지잖아? 굳이 구분 짓고 싶지 않아."

"....!"


앵커리지의 눈이 살짝 커졌다.


"너한테는 음담패설하면 혼날 것 같다는 것만 빼면."

"......"


앵커리지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나는 앵커리지가 좋아.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 앵커리지와 함께 쌓는 모든 건 소중한 추억이야. 그게 슬픔이나 아련함일지라도."


밤이 지나면 아침이 온다.

오후가 지나면 밤이 오며 세상이 암흑이 잠긴다.

그러나 다시 해가 뜬다.


"네 말이 맞았어."

"....."

"확률은 정직해. 절대 배신하지 않아. 언젠가, 또 만날 수 있겠지. 두 번째 만남이 생각보다 빨라서 안심이야."

"......"

"그리고 언젠가는 양면 같은 모습의 앵커리지가, 하나의 앵커리지가 될 테고."

"....저는 어떻게 지내셨냐고 물으셨죠, 지휘관님."


호칭이 변했다. 평소 앵커리지는 그를 선생님이라 부른다.

그러나 정신을 차린 앵커리지는 그를 지휘관이라 불렀다.


"응.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해."

"저는....."


그녀가 손을 들어 지휘관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윽하게 반짝이는 눈동자에 그의 얼굴이 맺혔다.


"지휘관님을 보면서 지냈어요. 항상. 매일. 언제나."


지휘관은 얼굴을 가까이 했다. 앵커리지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의 입술이 겹쳤다. 코가 톱니처럼 엇갈리며 맞물렸으며, 서로의 온기와 달콤한 입술을 느꼈다.


"사실, 저번에 조금 후회했어요."

"뭐를?"


입술이 떨어진 후, 앵커리지가 환히 웃었다.


"이번에는 모진 말을 하지 않을게요. 지휘관님이 말씀하신 대로, 찰나의 행복을 즐길게요."


그녀가 지휘관을 와락 끌어 안으며 다시 키스했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조금 더 정열적이고, 조금 더 뜨거운 키스였다.


"사랑해요. 진심으로."

"나도 사랑해."


와락-


지휘관은 그녀를 껴안으며 배에 눕혔다.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뜨거운 숨결과 상기한 얼굴, 그리고 그윽한 눈빛이 이끈, 본능적인 몸부림이었다.


"......"


하지만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직전의 순간, 지휘관이 멈칫했다.


"우웅.....!"


앵커리지가 볼에 바람을 넣더니 불편하게 얼굴을 찡그리면서 허리를 만졌다.


"아파아.... 선생님... 앵커리지 다쳤어... 호 해줘."

"하하."


절로 웃음이 터져나왔다.

이번에도 찰나의 만남이었다.

그러나 어쩐지 슬프지는 않았다.


"미안, 미안. 앵커리지가 바다에 빠질까 봐. 조금 과격했네."

"바다에 빠지는 건 싫어.... 추워...."

"춥지, 춥지."


지휘관은 앵커리지를 일으켜주었다. 그리고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오늘의 저와, 평소의 저의 격차가 적을수록 지휘관님도 덜 아파하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앵커리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말이 맞다. 찰나의 추억이 달콤할수록 뇌리에 깊게 박힌다.


그러나 지휘관은 웃을 수 있었다.


일상은 반복되니까.


"앵커리지 오늘 즐거웠어?"


지휘관이 말을 잠깐 멈췄다가 다시 잇는다.


"허리 아픈 거 빼고."

"응....! 선생님과 함께니까 앵커리지 뭐든지 즐거워!"

"....눈 좀 감아볼래?"

"눈 감으라고? 웅..... 왜?"

"부탁할게."


앵커리지가 아이처럼 어둠을 두려워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눈을 감았다.


쪽.


지휘관은 입술을 맞췄다.

그러자 앵커리지가 놀라서 눈을 크게 뜨더니 새끼고양이처럼 배시시 웃으면서 뺨을 붉혔다.


"....선생님... 좋아! 앵커리지도 선생님, 계속 좋아할 거야...!"


저건 누구의 대답이었을지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결국, 둘 다 같은 앵커리지니까.


-지휘관님을 보면서 지냈어요. 항상. 매일. 언제나.


앵커리지의 수줍은 고백에, 지휘관은 작게 대답한다.


"나도. 앵커리지를 계속 사랑할게."


미소를 교환하는 두 사람의 주변을 수면 위의 등불이 환히 밝혔다.


드물게, 어둡지 않은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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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2편은 뇌절인데

스킨 나온 김에 후일담 느낌으로 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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