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깁니다)

(중간에 시점이 바뀝니다)



"...리스는 괜.. 건가요?"


"그래. 아리... 괜찮..."


머리 속에 울리는 알 수 없는 소리에 아리스는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


누군가의 대화처럼 들리는 소리는 의미를 알 수 없게 띄엄띄엄 들려오고 있었다.


아리스는 최대한의 집중력을 발휘해 머릿속을 휘젓는 소리의 의미를 파악해 보려 애쓰기 시작했다.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아리스는 궁금합니다...!"




하지만 아리스가 소리를 집중해서 들어보기도 전에 머릿속의 소리들은 점차 작아져 갔다.


아리스에게 남은 것은 찝찝한 뒷맛 뿐이었다.




"아리스."


아리스는 자신을 부르는 익숙하고 따스한 목소리를 듣고는 깜짝 놀라 눈을 떴다.


그리고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리스는 목소리 만큼이나 익숙한 공간에 있었다.




"여기는... 선생님의 랠리 포인트...?"


"아리스... 내 일을 도와주겠다면서 당번 학생을 자원해놓고 와서는 자버리는 거야?"




선생은 자신의 자리에서 샬레 사무실 소파에 앉아 있는 아리스에게 장난스럽게 말했다.


아리스는 그제서야 자신이 선생을 돕겠다며 샬레 사무실까지 쫓아왔던 것을 기억해 냈다.


하지만 그 이후는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상황을 보니 아무래도 자신이 잠든 것 같았지만, 아리스에게 잠든 기억 따윈 없었다.


아리스가 아무 말도 없이 혼란스러워 하자 선생은 자리에서 일어나 아리스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아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많이 피곤했나 보구나? 우리 아리스."




자신을 혼란하게 만든 의문들은 전혀 해결되지 않았지만 선생의 따뜻한 손길에 아리스는 점차 안정을 찾아갔다.


그리고 아리스의 상태를 확인한 선생은 다시 자리로 돌아가며 아리스에게 말했다.




"어차피 거의 끝났으니까 너무 힘들면 딱히 돕지 않아도 돼."


"이 정도는 혼자서도 충분히 마무리 할 수 있으니까."


"마무리하면 점심시간일 것 같은데 오랜만에 같이 시내 나들이나 갈까?"


"밥도 먹고 이것저것 하면서 노는 거야 어때?"




선생의 말을 들은 아리스는 기뻤다.


선생님과의 시내 나들이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일 중 하나였으니까.


하지만 어쩐지 찝찝한 기분을 털어낼 수 없었다.




'아리스는 모르겠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요...'




아리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선생은 자신의 업무로 돌아가 묵묵히 일을 처리해 나가고 있었다.


아리스는 선생이 업무를 보는 동안 자신의 마음 속 혼란에 대해 고민하다가 끝내 결심했다.


선생님께 실례가 될지도 모르니까, 또 나중에 후회할지도 모르니까


이 이상한 느낌이 무엇이건 신경 쓰지 않기로.




아리스가 마음을 다잡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업무를 마친 선생은


기지개를 길게 켜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리스에게 다가왔다.




"생각보다 일찍 마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이제 나가볼까?"


"아리스는 모험 준비를 마쳤습니다! 언제든 출발할 수 있습니다!"




이윽고 두 사람은 시내로 나가 아주 평범하게 하루를 즐겼다.


시내에 나가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섞여 함께 걷고,


맛집으로 유명한 식당에서 함께 맛있는 음식도 먹고,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함께 커피도 마시고,


게임 센터에 가서 함께 게임도 하고, 사진도 찍고 인형도 뽑았다.


그리고 선생과 함께 명작 게임을 모티브로 한 영화를 보고 나올 때쯤


아리스는 자신이 줄곧 느끼고 있던 이 이상한 기분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위화감.


모든 것이 가짜인 것 같은 느낌.


평소와 다름 없는 광경임에도 아리스는 계속해서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뭔가 이상합니다... 왜 그런 걸까요..."




이렇게 다른 곳에 신경 쓰느라 선생에게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던 아리스였지만


선생은 전혀 개의치 않고 영화관 앞 가게에 들러 물건을 집더니 아리스에게 물었다.




"아리스. 여기 신기한 물건이 있어. 이거 봐봐."


"아리스가 보기에는 어떤 것 같아?"




아리스는 선생이 내민 것을 보고 놀라 뒷걸음질 쳤다.


선생이 아리스에게 보라며 내민 물건은 작은 핸드폰 모양의


...호신용품이었다.




"저... 선생님 이건..."


"역시 아리스가 생각하기에도 괜찮아 보이는구나? 그럼 이거 사서 아리스랑 나눠 가져야겠다."


"...자 여기 선물!"




선생은 아리스의 말을 듣지도 않고 자신이 할 말을 마치고는 호신용품을 사서 아리스에게 건넸다.


그리고 호신용품을 받아 든 아리스는 지금도 느껴지는 위화감의 정체를 조금 더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마치 녹화된 동영상을 보는 것처럼, 세상 모든 것이 아리스의 행동에 정해진 규칙대로만 반응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리스가 평소 같지 않게 반응하면 방금처럼 기묘하고도 어색한 상황이 연출 되는 것이리라.




"그럼 이제 그만 돌아갈까?"




여전히 아리스는 안중에도 없는 것 같은 선생은 또 다시 혼자 말을 내뱉고는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 세상이 진짜든 가짜든 선생님을 따라가야 한다.


아리스는 그것을 본능적으로 느끼며 선생이 너무 멀어지기 전에 선생을 뒤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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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레 건물 근처 골목에 다다랐을 때쯤 선생이 멈춰 섰다.


선생의 앞에는 작고 마른 고양이 한 마리가 울고 있었다.




"이거 봐 아리스. 고양이가 있어."




선생의 말에 그제서야 주변을 둘러본 아리스는 곧 모든 것을 기억해냈다.


선생님이 갑자기 사라졌던 일.


자신이 선생님을 찾아낸 일.


선생님과 함께 즐겁게 놀았던 일.


그리고 자신이 이곳에서 당한 일까지.


충격 받은 아리스 앞에서 선생은 자신이 할 말을 계속 해나갔다.




"이 녀석 제대로 못 먹어서 엄청 말랐네..."


"아리스. 내가 잠깐 가서 고양이 밥이라도 좀 사 올 테니까 여기서 이 고양이 좀 돌봐주고 있어."


"선생님... 잠깐..."




고양이 밥을 사러 간다는 선생의 말을 들은 아리스가 선생을 말려보기도 전에 선생은 등을 돌려 멀어져 갔다.


선생을 그냥 가게 두어서는 안된다.


아리스는 이미 이 세상이 가짜라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는 달려가서 선생의 팔목을 붙잡고 애원했다.




"선생님... 가지 마세요... 아니면 아리스도 데리고 가주세요..."


"제발 아리스의 곁에 있어주세요 선생님..."


"미안 아리스."


"잘 지내야 해."




갑자기 뒤돌아 아리스에게 이해할 수 없는 인사를 건넨 선생은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아리스의 손을 뿌리치고 아리스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아리스는 다시 선생을 잡으려고 했지만 왜인지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아리스는 멀어져 가는 선생을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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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마세요... 선생님..."


"....?! 선배!! 우타하 선배!! 아리스가 말하고 있어요!!"


"뭐?! 정말이야?!"


"네!! 지금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리고 있어요!!"


"그럼 자가 복구가 마무리된 건가...?"




조금은 소란스러운 엔지니어부 한 가운데서 아리스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는 열심히 소란을 만들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너무나도 반가운 얼굴들이었다.



 

"미도리! 모모이! 유즈!"


"아리스...!!"




미도리, 모모이, 유즈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아리스에게 달려와 함께 아리스를 꼭 껴안았다.


아리스는 게임개발부의 모두가 정말 반가웠지만 어째서 모두가 이렇게까지 격한 반응을 보이는지는 알 수 없었다.


심지어는 세 사람은 눈물까지 보이고 있었다.




"미도리, 모모이, 유즈. 여기는 어딘가요? 아리스는 왜 여기 있는 건가요?"


"아리스...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 거야?"


"아리스가 선생님과 함께 즐겁게 놀았던 것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녁 늦은 시간에 누군가에게 기습 당한 것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게 누구였는데?!"


"그건... 머리와 안면 장비를 착용하고 있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잘 생각해봐 아리스!"


"아리스도 방금 일어나서 혼란스럽고 힘들 거야. 좀 쉬게 놔둬."




우타하가 아리스를 닦달하는 모모이를 진정 시키며 말했다.


모모이는 아리스를 공격한 범인을 꼭 잡아야 한다면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지만


아리스의 안정이 최우선이 아니냐는 우타하에 질문에 조금 진정한 모습으로 아리스를 바라보았다.




"미안해 아리스... 아직 당황스러울 텐데 내가 너무 몰아붙였지...?"


"아닙니다! 아리스를 위해주는 모모이의 마음이 느껴져서 오히려 감동적이었습니다!"


"훈훈하니 보기 좋네. 아무튼 아리스도 궁금한 게 많을 테니까 내가 간단하게 설명해줄게."


"우선 여긴 우리 엔지니어부의 부실에 딸린 연구실이야."


"그리고 아리스, 너는 기억하는 대로 누군가에게 공격 받았고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어."


"다행히 주요 기능에 큰 손상을 입지 않은 너는 기능 정지 후 자가 복구에 들어갔고..."


"그렇게 기능 정지 상태에 있던 너를... 선생님이 이 곳까지 데려오셨어."


"결국 우리 엔지니어부가 선생님에게서 너를 인계 받아서 돌보게 되었고 게임개발부 아이들도 번갈아가면서 네 곁을 지켰지."


"그리고 일주일 만에 네가 깨어난 거야."




아리스는 그제서야 게임개발부의 모두가 눈을 뜬 자신을 보고 눈물을 흘릴 정도로 기뻐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자신을 기꺼이 돌봐준 모두에게 텍스트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리스에게는 모두에 대한 고마움보다 선생에 대한 궁금증과 걱정이 더 앞섰고


우타하는 아리스에게 감사 대신 질문 세례를 받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어디 계신 건가요? 아리스를 보러 오시진 않으셨나요?" 언제 오신다는 말씀은 남기지 않으셨나요?"


"저 그게... 일단 진정하고..."


"이제 선생님은 좀 잊어버려!!"




곤란해 하는 우타하의 뒤에서


간신히 진정했던 모모이가 다시 흥분해 아리스에게 성난 목소리로 외쳤다.


갑작스러운 모모이의 분노에 당황한 아리스 대신 모모이를 진정 시킨 건 미도리였다.


미도리는 엔지니어부에 있는 캐비넷이란 캐비넷은 전부 열어보고 있는 유즈를 가리키며 말했다.




"언니 그만해. 유즈 부장이 불안해 하잖아."


"아리스를 위해서 하는 말인 건 이해하지만 그렇게 흥분할 필요는 없어. 그리고..."


"미안해 아리스. 네가 선생님을 만나러 간다고 했던 날 우리가 널 끝까지 말렸어야 했는데..."

 

"아닙니다 미도리. 제가 다쳤던 건 여러분의 탓이 아닙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탓도 아닙니다. 아리스를 이곳까지 데려다 주신 걸 보면 선생님께서는 분명 아리스를 걱정하시고 계실 겁니다!"


"그 사람은 널 걱정하지 않아."


"널 걱정했다면 한 번이라도 여길 찾아왔겠지."




모모이의 말에 아리스는 그럴 리가 없다는 표정으로 우타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우타하는 아리스가 원하는 대답을 해주지 못했다.


우타하는 곤란하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아리스에게 말했다.




"...사실이야. 선생님은 여기에 너를 맡기고는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어."


"내가 하루 24시간 이 곳을 지킨 건 아니지만 내가 없을 때는 엔지니어부의 후배들이나 게임개발부 아이들이 자리를 지켰으니..."


"선생님이 한 번도 널 찾아오지 않은 건 확실해."


"그 말에... 추호도... 거짓이 없습니까...?"




아리스는 모두를 둘러보며 천천히 이야기 했다.


하지만 모두들 대답 없이 아리스의 눈을 피할 뿐이었다.


선생에 대해 적개심을 나타내던 모모이마저


아리스가 충격 받은 모습을 보고는 말을 아끼는 모습이었다.


아리스는 고개를 숙이고 한참을 생각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도 아리스는... 선생님을 믿습니다."


"분명 무슨 사정이 있으셨을 겁니다. 만약 그게 아니라 해도..."


"적어도 선생님을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그럼 선생님은 어떻게 찾을 생각이야?"




아리스의 결연한 발언을 듣던 미도리가 아리스에게 되물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아리스에게 미도리는


선생이 눈에 띄지 않은지 제법 시간이 지났으며


근래 한 주 동안은 우타하의 보고 모모톡에도 모모이의 분노 가득한 모모톡에도 답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미도리의 이야기를 들은 아리스는 선생을 다시 찾을 방법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생각에 잠긴 아리스가 침대에서 내려오자 아리스의 겉옷 주머니 속에서 무엇인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아리스의 머릿속에는 잊고 있던 것 하나가 떠올랐다.


아리스는 천천히 겉옷 주머니에 손을 넣어 들어 있는 호신용품을 조심히 꺼냈다.


아리스 자신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아리스가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쥐고 있었던 물건은


여전히 아리스의 손 안에서 제대로 작동하고 있었다.




"이걸로 찾을 수 있습니다! 아리스와 선생님이 함께 장착한 장신구입니다!"


"여기에 선생님의 위치가 표시됩니다!"


"이건... GPS 기능을 이용한 호신용품인가 보네. 이쪽에 있는 건 경보 기능인가?"


"그런데 이 GPS 신호는..."


"선생님은 지금도 움직이고 있는 모양인데?"




아리스가 꺼낸 호신용품을 유심히 보던 우타하는 조금씩 이동하는 GPS 신호를 보고 말했다.


아리스는 우타하와 함께 GPS 신호를 보고 있다가 결심을 굳힌 표정으로 말했다.




"아리스는 선생님을 만나러 가겠습니다!"


"잠깐, 이대로는 안 돼."


"확신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만에 하나 선생이 너를 공격한 범인과 관계가 있다면..."


"맨 몸으로 가는 건 너무 위험한 일이야."


"괜찮습니다! 가는 길에 선생님의 랠리 포인트에 들려서 무기를 장착하고 가겠습니다!"


"잠깐...! 아리스 우리도 같이 가!"




우타하의 지적에도 의지를 꺾지 않은 아리스는


자신의 뒤를 쫓는 미도리, 모모이, 유즈와 함께 선생을 찾아 힘차게 달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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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이 내리쬐는 늦은 오후.


핸드폰 모양의 호신용품을 입에 문, 다소 특이한 모습의 고양이 한 마리가 골목을 걷고 있었다.


고양이는 외출을 즐기는 편이 아니었지만 자신을 챙겨주는 소녀를 만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은혜를 받으면 개도 갚는다는데 자신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자신을 선택한 남자가 사라진 후에도 때가 되면 찾아와


자신에게 먹을 것을 주고 돌봐준 옅은 핑크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를 위해


고양이는 자신이 사는 곳에서 제일 괜찮아 보이는 물건을 물고는 소녀를 찾아 나선 것이었다.


소녀의 냄새를 쫓아 천천히 나아가던 고양이는 몇 번인가 자신의 다리를 핥느라 소녀의 냄새를 놓칠뻔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꾸준히 소녀에게 가까워져 가고 있었다.


곧 소녀를 만날 수 있으리라.


고양이는 그렇게 생각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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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 시점)



"선생님,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그럼 뭐라고 하셔야 하죠?"


"조심해서 다녀와 세리나. 사랑해."


"그리고는요?"



나는 말을 마치고 나를 빤히 바라보는 세리나에게 다가가 가볍게 입을 맞췄다.


세리나는 만족스럽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잘하셨어요. 이제 좀 익숙해지신 것 같네요."


"제가 학교 다녀올 동안 집을 잘 지켜주세요. 선생님"



나는 집을 나서는 세리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세리나가 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아 한숨 쉬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나 역시 점점 이 생활에 익숙해져 감을 느끼고 있다.


심지어는 과거처럼 세리나에게 의존하기 시작했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변명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여고생의 방에 하루 종일 혼자 갇혀 있는 것은 상당한 곤욕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것과도 상호작용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시간을 보내는 것.


나는 이제서야 독방에 가둬 놓는 것이 왜 죄수들에게 무거운 처벌로 작용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나의 생활 속에서 세리나는 너무 강한 자극이었다.


밀어내고 무시하고 싶어도 자꾸 빠져들 수 밖에 없는 강렬한 자극.


...내가 점차 세리나에게 빠질 수 밖에 없는 환경이 완벽하게 조성되어 있는 셈이었다.


세리나는 이것까지 계산해서 움직였던 걸까.




나는 곰곰이 생각해보려다가 그냥 그만둬버렸다.


어차피 그런다고 해서 내 삶이 달라지진 않을 테니까.


지금 내가 할 일은 아무 생각도 않고 무력하게 누워서 몽롱한 시간을 보내는 것 뿐이다.


나는 그렇게 멍하게 세리나의 침대에 엎드려 버렸다.


자는 것도 깨어 있는 것도 아닌, 이도저도 아닌 상태로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나는 유리를 긁는 것 같은 소음에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소음의 근원지를 찾아 세리나 방의 창문을 쳐다본 나는 상상도 못한 광경을 마주했다.


내가 샬레의 지하실로 데려갔던 고양이.


바로 그 고양이가 입에 뭔가를 문 채 열심히 창문을 긁고 있었다.


그동안 잘 먹고 잘 지냈는지 살이 붙어 건강해 보이는 모습의 녀석은


내가 반가움에 바로 창문을 열어주었음에도 기대한 상황이 아니라는 듯 앙칼지게 야옹야옹 울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녀석은 입에 물고 있던 것을 놓쳤고, 그것은 곧 내 발 앞에 떨어졌다.




"이게... 왜 여기에...?"




고양이가 물고 온 것은 아리스와 함께 샀던 호신용품이었다.


틀림 없이 그 날 내가 샬레 지하실에 두고 왔던 그 물건이 맞았다.


말로는 이유를 찾고 있었지만 이제 와서 고양이가 이걸 왜 여기까지 들고 왔는가는 내게 별로 중요치 않았다.


내게 진짜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이윽고 나는 떨리는 손으로 호신용품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심호흡을 두 번 한 다음, 호신용품의 GPS 신호를 바라보았다.


호신용품의 GPS 신호는.... 움직이고 있었다. 


불안한 마음에 몇 번이고 확인한 후에야 나는 기뻐할 수 있었다.


아리스가 깨어난 것이리라.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나는 GPS 신호를 자세히 확인해 보았다.


GPS 신호는 샬레 건물 근처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아리스가 나를 찾고 있는 걸까.


나는 나를 찾고 있을 아리스의 모습이 떠올라 금세 마음이 무거워졌다.




억지로 잊고 있었던 아리스에 대한 기억.


그것이 터져 나오기 시작하자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내 머릿속을 채워 나갔다.


그렇게 오랜만에 경험하는 생각의 물결은 내 주의력을 간단히 흐트러트렸고


나는 내 뒤에서 다가오는 작은 인기척을 놓치고 말았다.

 



"뭐하고 계세요 선생님?"


"뭔가 재밌는 거라도 있나요?"


"흐업! 아니? 아무 것도 아니야. 일찍 들어왔네?"


"일찍이라뇨. 오히려 늦은 편인 걸요."




내가 일부러 친근하게 말을 걸었음에도 세리나는 나에게 점점 다가왔다.


내가 무엇인가를 감추고 있다고 확신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들고 있던 호신용품을 최대한 감춰보려 했지만 얼마 안 가 세리나에게 들켜버렸고


지키려는 나와 빼앗으려는 세리나 사이에는 작은 몸싸움이 벌어졌다.




삐비비비비비빅-- 삐비비비비비빅--




갑자기 호신용품의 경보음이 울려 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몸싸움 중에 둘 중 누군가가 경보 기능을 작동 시켜 버린 듯 했다.


경보음을 들은 세리나는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완력으로 나를 제압해 호신용품을 빼앗았다.


그리고 빼앗은 물건이 그 호신용품이라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곧바로 부숴버렸다.


잠시 고개를 숙인 채 미동도 없이 서 있던 세리나는 이내 나를 쳐다보았다.


평소와 같은 여유 대신 분노가 가득 담긴 표정으로.




"이걸 어떻게 여기 가져오신 거죠?


"그 날 저를 속이고 어떻게든 몰래 들고 오신 건가요 아니면..."


"아직도 선생님을 믿는다는 둥 돕는다는 둥 헛소리를 하는 학생들이 남아 있는 건가요?"


"누구죠? 그 학생은?"


"제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아직 포기하지 않다니... 좀 더 강도를 높여서 선생님이라면 생각하기도 싫게 만들어야겠어요."


"...학생들이 도운 게 아냐. 저 고양이가 물고 왔어."




흥분해 혼자서 말을 쏟아내던 세리나는 내 말을 듣고 말하는 것을 멈췄다.


모든 것이 잠깐 정지한 것 같은 착각이 드는 고요함 속에서


고양이만이 창문을 통해 뛰어 들어와 세리나의 다리에 얼굴을 비볐다.


세리나는 곧 작게 웃기 시작하더니 말했다.




"그렇죠. 선생님을 도와줄 학생이 남아있을 리가 없죠."


"선생님을 좋아한다며 고백하려던 년들도."


"선생님 옆에서 짝사랑하던 년들도."


"선생님을 좋아해서 몰래 스토킹하던 년들도."


"다 선생님에게서 등을 돌려버렸으니까요."


"제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요."


"아직도 저를 밀어내실 생각이신가요?"


"제가 이 모든 사태를 만든 장본인이라서?"


"아니면 그 아리스라는 아이를 죽이려고 해서?"


"...그만 포기하세요. 선생님."


"저를 완전히 받아들이시고 편해지세요."


"이제 더 이상 선생님을 도우려는 학생은 없어요."




나는 세리나의 말을 부정해보려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나 자신도 이미 느끼고 있었다.


세리나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는 걸.


오히려 완벽하게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는 걸.


여태껏 열심히 부정하고 피해왔지만 그것이 현실이라는 걸.


나는 세리나의 말을 부정하는 것을 포기하고 조용히 고개를 내리박았다.


세리나는 그것을 포기의 신호로 받아들이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때.




"그 말, 부정합니다."




조용히 울리는 단호한 목소리에 나와 세리나는 모두 소리 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레일건을 맨 채 방 입구에 서서 당당하게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작은 소녀.


아리스였다.


그리고 아리스의 뒤로 게임개발부 학생들도 함께 서있었다.


현실감 없는 장면에 내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자 아리스가 다시 한번 말했다.




"아직 선생님을 도우려는 학생이 있습니다."


"바로 선생님을 믿는 아리스입니다. 선생님을 믿는 아리스가 선생님을 구하러 온 것입니다."


"...여긴 어떻게 들어온 거죠?"


"아리스에게는 레일건을 들 수 있는 근력이 있습니다."


"그러니 악당 씨, 그만 포기하고 선생님을 넘기세요!"




아리스의 말이 끝나고 세리나가 미처 대답을 하기도 전에


아리스의 뒤에 서 있던 미도리가 천천히 나와 세리나에게 말했다.




"스미 세리나 씨죠? 잘 알지는 못하지만 좋은 일을 하는 분이라고 들었어요."


"정말 당신이 이 모든 일을 꾸민 건가요? 도대체 왜..."


"...제가 왜 그랬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네요."


"중요한 건 제가 이 모든 일을 벌였다는 것과... 그 사실을 여기 있는 모두에게 들켰다는 것."


"그리고 이제 와서 포기할 수는 없다는 것이겠죠."


"이렇게까지 일을 벌여 놓고 '실패했으니 예전처럼 지내게 해주세요' 라고 얘기하는 건... 불가능한 일일 테니까요."


"안될 게 뭐 있어. 예전처럼 지내면 되지."




체념한 듯이 말하던 세리나는 갑자기 끼어들어 영문 모를 말을 꺼낸 나를 보고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 되었다.


물론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는 건 아리스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헛기침을 두 번하고 모두의 주목을 받으며 세리나에게 말했다.




"물론 이제 와서 너의 잘못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어."


"하지만 네가 정말 스스로 잘못을 뉘우치고 반성한다면."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을 벌이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한다면."


"난 너를 용서할 수 있어 세리나."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고 그 실수에서 배우는 거니까."


"더군다나 너는 아직 학생이잖아?"


"어른으로서, 선생으로서 그 정도는 해줘야 하는 것 아니겠어?"




방금까지 현실을 받아들이자고 절망하던 나 치고는 제법 괜찮은 말을 뱉어냈다.


나를 조금이라도 믿어주는 학생이 곁에 있다는 것 만으로 힘이 난 모양이다.


하지만 세리나는 여전히 내 말에 대답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난 진심으로 한 말이었는데.


어쩔 수 없이 다음 수를 쓰기로 한 나는 아리스에게 물었다.




"아리스, 넌 어떻게 생각해?"




나는 자연스럽게 바통을 아리스에게 넘겼다.


세리나에게 공격 당했던 아리스마저 용서한다고 한다면


그 누구도 용서라는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리라.


아리스가 용서하지 않는다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어차피 내가 용서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니


결국 아리스의 답을 듣는 것은 필수불가결한 일이었다.




"이 상황, 아리스는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악당이 개과천선해서 주인공 파티로 들어오게 되는 클리셰입니다!"


"그렇게라도 모두가 함께 할 수 있다면 아리스는 용서할 수 있습니다!"


"정말... 내가 그런 짓을 했는데도 용서한다는 거에요...?"


"다른 사람을 해치려고까지 했는데도...?"




자신을 용서한다는 말을 들은 세리나는 심하게 떠는 목소리로 물었다.


상상치도 못한 호의를 받은 것에 심적으로 동요가 큰 듯한 모습이었다.


이제 내가 나서서 훈훈하게 마무리 해볼까.


하지만 내가 나서기도 전에 아리스가 세리나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악당 씨가 동료로 합류했습니다, 뽜밤뽜밤!"




그리고 아리스는 세리나에게 웃어주었다.


얼마 전 나를 구원해 준 그 해맑은 웃음은 이번에는 세리나를 구원해 준 듯 했다.


아리스의 티 없는 순수한 모습에 세리나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아리스에게 사과의 말을 전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요, 모두에게 찾아가서... 진실을 알리고 사과할게요."

  

"아리스쨩, 그리고 선생님... 정말 고마워요..."




세리나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이야기하더니 곧 울음을 터뜨렸다.


착한 아리스는 우는 세리나를 위로해주기 시작했다.


한 명은 울고 한 명은 위로하고 나머지는 그걸 바라보는 이상한 모습으로


나를 괴롭혔던 이번 사태는 조금은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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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로는 모든 일이 빠르게 해결되었다.


나는 샬레 사무실로 돌아왔고


세리나는 학교마다 방문해 학생들에게 진실을 밝히고 고개를 숙였으며


더 이상 나를 피하는 학생들은 없어졌다.


오히려 몇몇 학생들은 나에게 사과하러 찾아오기까지 했다.




"으헤... 내가 너무 성급했네... 선생도 다른 녀석들과 똑같은 글러 먹은 어른이라고 생각했어... 미안해 선생..."


"선생. 증거도 없이 무리하게 판단한 점 사과할게. 정말 미안해."


"응... 선생님. 나 선생님 이름으로 온 편지에 써 있던 것들 완벽하게 연습했어. 시험해볼래?"




사과라기엔 내용이 좀 이상한 것들도 섞여 있었지만


어쨌든 예전처럼 다시 학생들과 가까이 지낼 수 있으니 된 거겠지.


학생들이 모두 돌아간 후 나는 소파에 앉아 나를 기다리는 아리스를 바라보았다.


내심 걱정됐는지 내 곁을 지키겠다고 완고하게 주장한 아리스를 말릴 방법을 찾을 수 없어


나와 아리스는 얼마 간 함께 있게 되었다.



"오래 기다렸지 아리스?"


"괜찮습니다. 그보다 아리스는 안심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다시 모두와 함께 하실 수 있게 되신 거군요."


"다 아리스 덕분이지."



나는 아리스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나는 엄청나게 밀려버린 업무로 돌아갈 시간... 이었지만


오늘 하루 정도는 농땡이 쳐도 괜찮겠지.




"아리스 우리 시내 나들이 갈까?"


"헛...? ...좋습니다! 아리스는 이미 모험을 떠날 준비가 되었습니다!"




아리스는 왠지 모르게 내 말을 듣고 잠깐 움찔했다.


하지만 금세 괜찮아진 걸 보면 별일 아니겠지.


나는 사무실 책상 위에 놓인 소지품을 챙겨 아리스에게 말했다.



"그럼 바로 가볼까?"



따스하게 햇살이 비추고 시원하게 바람이 불어오는 오후.  


우리는 나른하게 울리는 고양이 울음소리를 뒤로 한 채 함께 샬레 사무실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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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엔딩으로 끝냈습니다.

욕심 그득해서 과하게 길어지고 개연성도 박살난 것 같지만 해피엔딩이라면 OK가 아닐까요?

항상 부족한 글 재밌게 읽어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