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문헌


ㅅ?ㅍ, 장문) 트리니티 모티브 추측

https://arca.live/b/bluearchive/40304339


스토리 초반에 하나코랑 아즈사가 이야기하는 고전들 출처

https://arca.live/b/bluearchive/43174202




이 글에는 이만큼 스포일러가 있어요!

- 에덴조약 1장

- 아즈사 인연스토리







타락했다며...


아즈사의 인연스토리에서 모모프렌즈 체험샵을 갈 때, 아즈사가 뜬금없이 어떻게 이런 파렴치한 곳이 있냐면서


"타락했어! 여기는 타락한 곳이야!!"


라는 대사를 친다...


방금 전까지 디저트도 맛나게 먹고 게임도 하면서 잘 돌아다니까 갑자기 이래서 뭔가 싶었는데, 아즈사의 모티브를 청교도(퓨리턴) 라고 추측한 글들이 기억났다. 청교도 문학의 대표작으로 <실낙원>이 손꼽히는 만큼 이게 에덴조약과 어떤 연관성을 지녔는지 차근차근 찾아가보자.


메이플라워 선언과 그 이름을 딴 메이플라워 호


<유토피아>의 저자로 존경받던 토머스 모어의 처형 이후, 영국 사회는 왕을 모시는 국교회와 유럽 본토의 교황을 따르는 가톨릭, 그리고 이 둘에게 크롬웰 시절부터 너희들은 모두 타락했어! 를 외치던 청교도로 갈라져서 계층을 막론하고 심각한 갈등에 시달렸어. 이때 영국의 청교도는 칼뱅주의에 입각해서 특히나 검소함과 근면함을 강조했으니, 세속의 사치와 행복을 예외없이 거부하고 단 하나 신앙만이 삶의 가치라고 여겼지.


부지런히 일하고, 휴식은 오직 신앙을 위해서만.


박해에 쫓기고 낯선 땅에 도망쳐 척박한 환경에 놓인 청교도들에게 이런 교리는 생존에 큰 도움이 돼.


고등학교 때 문과였던 선생님들이 윤리와사상 고르면 배우듯, 칼뱅주의에서 강조한 검소함과 근면함의 근거는 '구원예정설' 이었어. 천국에 갈 사람은 이미 정해져 있으니 교회를 가건 헌금을 바치건 다 부질없고, 오직 성경 말씀에 착실히 살아가며 자신은 구원받으리라 믿는 것만이 최선이자 유일한 삶의 방식이란 얘기야.


그럼, 어떻게 살아야 '착실하게' 살아가는 걸까?


...그리고 아담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아내의 말에 넘어가 따먹지 말라고 내가 일찍이 일러둔 나무 열매를 따먹었으니, 땅 또한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 살리라. 들에서 나는 곡식을 먹어야 할 터인데,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리라.


너는, 흙에서 난 몸이니 흙으로 돌아가기까지 이마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얻어먹으리라.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


성경에서, 아담과 이브는 선악과를 먹은 죄로 에덴 동산에서 추방당해. 이때 아담이 받게 된 형벌이 노동하지 않으면 먹고 살 수 없는 삶이야. 즉, 원래 성경에서 노동과 그로인한 부는 낙원에선 필요치 않던 부끄러움의 증거로 여겨졌어.


하지만 칼뱅주의는 이걸 비틀어서, '노동하여 먹고 살 수 있다면 그 삶은 구원받은 것이다' 라는 관점을 제시해. 노동이란 그저 고통받기 위한 형벌이 아니라, 거룩하게 부여받은 소명으로서 수행해야 할 업이라고 본 거지. 그럼 거룩한 소명에 착실히 응하여 노동한 결과물, 부의 축적은? 자신에게 온 소명에 최선을 다해 응답했다는 증거가 되네?


묘하게 칼뱅이랑 닮은꼴로 나온 막스 베버.


훗날,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청교도의 논리가 당시 부상하던 시민계급의 이해에 맞아떨어진 덕분에 자본주의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고 설명했어. 


누가 구원받을지는 이미 정해져 있다.

따라서, 구원을 기도하는 행위, 교황에게 무릎꿇고 면죄부를 사고 큰 교회를 짓는 일체의 종교행위는 불필요하다.

그러므로, 자신이 구원받음을 믿고 착실하게 노동하여 먹고 사는 삶으로 그 믿음을 증명하는 것만이 가능하다.


"기도해봤자 달라질 것 없으니 그 시간에 먹고 사는 문제에 집중하자"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지? 그게 합리적이고 효율적이니까. 신에게 감사한 마음은 일상에서 열심히 먹고 사는 것으로 증명해야지, 교회의 크기와 위세로 해선 안 되니까. 덕분에 청교도 정신은 기성 가톨릭 문화권보다 효율성, 합리성의 추구가 용이했고. 그런 잠재력을 갖고서, 교황이나 영국 왕처럼 신의 대리자를 참칭하는 이들에게 은총을 구걸하느니 성경 싸들고 아무도 모르는 땅에 가서 고립되길 택한 청교도들은 이것이 유배나 추방이 아니라 신의 뜻이라 여겼어.


그곳에 세워진 나라는 피로 세워졌고, 서쪽으로 넓어지며 발견된 사금의 양보다 많을 피를 흘렸지만 기어코 강대국으로 발돋움했지. 이 시기에 청교도 정신은 독립전쟁의 시작을 커피와 홍차가 열었던 시기로부터 한참 과격해져서, 모르몬교의 술, 담배, 커피, 홍차, 녹차 모두 금지하는 도시 솔트레이크 시티의 탄생을 지나, 말이 좋아 가정폭력 근절이지 실제로는 여러 이해관계가 얽혀 알카포네의 화려한 등장으로 이어진 금주법의 시대를 거쳐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대의 끝에서, 무조건적인 금욕을 강요하며 합리적이기를 강조한 청교도 정신은 완전히 폭주해버렸다.


이걸 왜 이렇게 길게 설명하냐면...




1945년 7월 16일에 실행된 트리니티 작전 때문이야.


맨하탄 계획의 결과물이 처음으로 실험된 날, 합리의 정점에 있던 과학자들은 우리가 뭔 짓을 한 거냐고 경악했어. 전쟁을 끝낸다는, 완전히 순수할 순 없겠지만 생존을 위해서, '먹고 살기 위해서' 착실하게 살아온 결과물을 직접 마주한거야.


아까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추방되는 장면에서 이 문장 기억나? "내가 일찍이 일러둔 나무 열매를 따먹었으니, 땅 또한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선악과, 곧 지혜로 땅에 방사능이라는 저주를 내리는 법에 도달한 것. 그것이 트리니티 실험이라는 이름으로 에덴에서 추방되는 장면과 오버랩되는 게 우연은 아닐거야. 실험 이름부터 트리니티인데 너무 확실하지?


이때부터 냉전이 종식되기까지 계속된 자본주의 정신의 허무함은 가장 앞장섰던 미국부터 온 서구권에 깊숙히 박혀버렸어. 착실하게 살면서 도착한 곳이 또다른 실낙원이라면? 그런 허무한 삶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메인스토리의 아즈사와 인연스토리의 아즈사.


아즈사와 처음 만나는 순간, 부비트랩과 IED로 농성하던 모습은 2차세계대전과 냉전을 거치며 강력한 힘을 얻었지만 허무함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던 청교도 정신의 말로 라고 할 수 있을거야. <람보>에서 묘사된 베트남전 참전군인의 오마쥬가 되는 셈이지. 이들에게 자신이 구원받으리란 믿음이 있을까? 그런 믿음을 떠올릴 수는 있을까...?



고대어(라틴어)를 읽을 수 있지만, 처음 본다는 투로 무슨 뜻이냐며 물어본 단어가 '기쁨과 희망' 이라는 장면은 아즈사가 이런 기쁨도 희망도 잊을만큼 청교도 정신에 일체화된 모습을 보여줘. 1965년 2차 바티칸 공의회는 2차세계대전의 여파로 충격에 빠진 사람들에게 '기쁨과 희망' 을 주기 위해 열린 자리이자, 청교도를 포함한 한때 갈라선 모든 크리스천을 인정해주는 자리였다는 사실까지 알고 본다면... 


다시 이 글의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영국에서 <유토피아>의 저자, 토머스 모어의 죽음으로 종교갈등이 격해졌다는 게 이 글의 시작이었지? 이 책은 유토피아라는 은어를 처음으로 만들어낸 책이야. 그리스어로 말장난하듯 만들어낸 '존재하지 않는 곳', Utopia 말이야.


사소한 우연 같지만, 이것도 라틴어로 쓰인 책이다? 그것도 영문학에서 은근 중요한 사례로 손꼽혀. 토머스 모어는 처형되기 전에 이 책을 영어로도 번역해달라는 부탁을 남겼는데, 덕분에 영국 사회는 물론 지금까지도 Utopia 라는 이름이 이상적인 공간, 낙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 꼭 등장할 정도로 널리 알려졌거든. 


'존재하지 않는 낙원' 이란 말, 어디서 본 적 있지?


결정적으로 유토피아 + 청교도의 연관성에 주목할 이유는 이래. 유토피아는 일종의 소설로, 가상인물인 '라파엘' 이라는 여행자가 토머스 모어를 만나서 "내가 유토피아란 곳에 가봤는데 거기가 참으로 낙원이라서 영국이 본받을 만 하다..." 하고 썰 풀어주는 형식으로 쓰였어.


어라? 잠시만. 라파엘이라고?




위에 링크된 트리니티 학생들의 모티브에서 추측한 내용과 "히후미의 성인 '아지타니(阿慈谷)' 는 '자애로운 언덕과 계곡' 이라는 뜻이므로, 히후미의 모티브는 에덴 동산의 수호천사 라파엘이다!" 라는 추측까지 덧붙이면? 


로딩화면에서 히후미가 아즈사를 안아주면서 행복해하는 모습은, 읽을 줄 아는데 뜻을 잊어버린 '기쁨과 희망'께서 착실하게 살아왔지만 여전히 불안한 현대인을 안아주는 장면이 된다...! 




아직 히후미를 뽑질 못해서 링크로 대신하는 히후미 메모리얼 테마곡을 들어보자. "어떻게 이런 아이를 미워할 수 있겠어요? 히후미는 우리의 기쁨과 희망입니다!" 하는 느낌으로 들을 수도 있지 않겠어?



그래도 아즈사는 아직 청교도 근본주의에서 완전히 헤어나온 상태는 아냐. 메모리얼을 연 다음에도 인연스토리가 하나 더 열리는데, 여기서도 아직 주변 분위기를 두고 타락했다고 말하는 모습이 나와.


금욕과 합리만으로 살아온 청교도로서, 군인이라는 역할에 착실하게 살아가는 아즈사에겐 이 모든 것이 아직 어색하기만 하지. 전학생이 적응하려면 시간이 좀 걸리니까.


그런 아즈사가 먼저, 자신이 착실하게 있는 장소인 사격장에서 나가자고 말을 꺼내.



이건 조금씩 사회에 적응하는 참전군인의 웃음이자

착실히 살아도 불안함을 벗어날 수 없는 현대인의 웃음이고

에덴에서 쫓겨난 이래 인류가 겪은 아픔에도 웃을 수 있다는


모든 것이 허무한 삶에서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그러니 다들 오늘 저녁은 아즈사처럼 맛있는거 먹고 힘내서 남은 하루를 살아가는 건 어떨까?



지금까지,


"이야기를 공부하는 입장에서... 이 게임에 나타난 비유와 상징이 얼마나 섬세하고 애정 어린 시선으로 쓰였는지 배울 점이 진짜 많다...! 아즈사 한 사람만 봐도 이렇다!"


라는 내용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