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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니티에 체류하고 기억을 잃은지 정확히 2주일이 지났음에도 큰 진전은 없었다. 아무런 기억도 떠오르지 않았다.


다가오던 조바심은 내 몸을 더 크게 떠밀었고 저녁에 준비하던 개인 티타임도 인원을 늘려서 진행하고 있었다. 티파티가 준비해준 이제까지의 내 행적도 계속해서 찾아보지만 그럴수록 점차 괴리감만 커져갔다.


정말 내가 그 정도로 유능한 인물이였는지가 의심스러울 정도의 이야기였다.


대기업이 연관된 학교 지부의 매수 계획을 박살내고 낙제생 취급을 받던 동아리가 모두에게 인정 받았던 정도는 차라리 낫다.


거기에다 총에 맞아 사선을 넘을뻔한 위기를 이겨내자마자 이제껏 키보토스에서도 유례없던 테러 행위의 진압과 수습에서 큰 축을 맡아 움직이는 것은 물론이고 각종 대규모의 피해를 입히던 예언자 라는 무언가의 토벌 사례까지. 


이런 초인이 나였다고? 


문득 떠오른 기억을 찾아야될 것 같다는 느낌 하나로 티파티의 의견을 받아들여 집사가 되었다. 하지만 이전의 나에 대해 들으면 들을수록 기억을 찾고 이전처럼 행동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심만이 불어났다.


그리고 그 의심이 기억을 되찾아야 된다는 내 결심을 갉아먹고 있다.


이곳 키보토스의 학생들은 나와는 다르다.


문자 그대로 초인에 가까운 신체능력과 그에 걸맞는 내구도. 농담이 아니고 나같은 일반인은 키보토스의 유치원생도 당해내지 못한다.


그런 내가 죽는다는 공포를 이겨내고 전선에 섰다는 이야기는 믿기지 않지만 티파티의 표정을 보면 진실인지 아닌지는 단번에 알수 있었다.


틀림없는 진실이였다.


자랑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신체 능력은 뛰어나다고 생각했다. 체격도 충분히 잡힌 편이고 체력도 평균 이상은 될거라고 티파티의 모두가 말해주었다.


그럼에도 난 학생들과는 다르다, 약하고 무르다.


"결국 일반인의 기준이지."


지금의 나는 무력했다.


학생들이 존경해주던 선생으로도, 단순한 1명의 인간으로도.


이런 내가 대체 뭘할 수 있지?


자신에게 물어도 대답이 돌아오는 일은 없다. 세이아는 스스로를 잃지 말라고 이야기 해줬지만 기억을 잃은 난 이미 스스로를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기다림은 조바심으로 조바심은 불안이 되어간다.


"그만 자자."


죽을지도 모르는 전선에서 난 당당히 설 자신이 없다.


두렵다.


---------------


트리니티에 머문지 3주하고 이틀째 되는 날.


트리니티의 다과회실에는 오늘도 일레븐지스가 한창이였다. 티파티의 세 사람도 이 시간을 만끽하고 있었으며 선생님도 이 순간만큼은 불안과 자신에 대한 의심을 감추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그런 노력도 의미없다는 듯, 미카가 말했다. 이제까지와는 달리 뭔가 결심한 표정이였다.


"선생님. 많이 힘들지?"


"...예?"


나기사의 찻잔에 차를 채워주던 손이 그대로 멈췄다. 찻잔에서 차가 넘쳤다.


"...! 미카 양. 설마?"


나기사가 제지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미카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둘도 없는 소꿉친구나 신뢰를 다진 다른 친구와 달리 미카는 눈치를 봐서는 안된다.


이게 지금 필요한 발언이라 확신했다.


"안돼, 나기 쨩. 지금 확실히 이야기하자. 당사자에게 알리지 않을 이유가 없는 걸."


"음. 미카의 의견이 그렇다면 첩도 동의한다. 어쩌면 선생이 바라던 이야기일지도 모르는 것 아닌가."


"..."


미카의 발언에 세이아가 동의하고 나기사가 침묵한다. 이미 주워 담기에는 분위기가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하아 알겠습니다. 제가 이야기하죠. 선생님 저희는 사실 며칠 전에 총학생회에게 긴히 받은 연락사항이 있습니다."


"총학생회에게?"


키보토스의 모든 중앙 행정시설을 통제하며 각 학원의 문제와 분쟁들의 조율에 앞장서는 조직.


그리고 듣기론 내가 키보토스에 오게 된 이유도 이 총학생회의 회장이 나를 샬레의 고문이자 대리자로 임명했기 때문이라고.


지금 내 사정을 아는 몇 없는 조직이다.


"그렇습니다. 총학생회는 현재 샬레가 맡던 업무를 돌려서 처리하고 있으며 현재 선생님의 복귀가 불확실한만큼 이에 대해서 장기적으로 기동시킬 체계적인 시스템을 구축해둔 상황이라고 합니다."


나기사는 고민했다. 이 이야기를 건네도 괜찮은건가? 어쩌면 이 발언이 가져올 여파로 키보토스의 명운이 달린 것인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선생님이 가진 위상은 높다.


하지만 이미 꺼낸 이야기. 돌이킬 수는 없다.


"여러모로 긴 내용이였습니다만 단도직입으로 본론만 말씀 드리죠. 선생님, 혹시 지금이라도 선생님이 바라신다면 굳이 기억을 찾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뭐?"


나기사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총학생회는 선생님의 빈 자리를 대신할 준비는 모두 마쳤고 선생님이 힘들게 기억을 찾기 위해서 노력할 필요는 없다고.


내가 기억을 찾지 못한 조바심이 표정에 드러나고 시간이 지나며 그것이 점차 두려움과 고뇌로 바뀌는 것을 눈치챌 때마다 사정을 알고 있는 모두가 괴로웠다고.


설령 기억을 찾지 못해도 선생님은 선생님이라고.


존경할 수 있는 어른이라고.


나기사는 말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모두가 날 그리 생각해줬다는 것에 대한 감사와 걱정을 끼쳤다는 무안함. 기억을 찾아야만 한다는 알수없는 압박에 짓눌리던 마음이 가벼워진 것에 대한 안심.


다양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조금 생각하게 해줄래? 가볍게 정할 내용은 아닌 것 같아."


"물론입니다. 저희야말로 죄송합니다. 선생님이 기억을 찾으신다는 결심을 흔든 것 같은 모양새가 되어서..."


나기사는 왠지 슬픈 표정이였다. 해선 안되는 행동을 후회하는 것 처럼 보였다.


그녀가 그런 표정을 지어서는 안된다. 찻 주전자를 내려두고 조심히 그리고 부드럽게 그녀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잡았다.


지금의 내가 할수있는 건 그녀를 위로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니야. 이것저것 신경써줬구나. 고맙습니다, 나기사 아가씨."


쌓여있던 불안이 빠져나간 기분이 들어서일까, 스스로도 밝게 웃었다고 확신했다.


왠지 모르게 나기사의 얼굴이 붉다. 상태가 나쁜걸까?


"괜찮아, 나기사? 얼굴이 붉어."


"ㄱ, 괜찮습니다! 정말, 아무런 일도 아니니깐요."


나기사는 순식간에 등을 돌리며 으으...하는 신음을 냈다. 왠지는 몰라도 미카와 세이아의 시선이 차갑다.


"미카. 대체 선생에게 뭘 가르친건가?"


"힝...먼저 이야기를 꺼낸 건 나였는데. 맛있는 건 나기 쨩이 가져가버렸어~!"


"후우. 선생, 티 타임은 여기까지일세. 점심에도 학생들의 상대로 바쁠테니 어서 가보게."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네. 그럼 다들 나중에 봐."


다과회실의 문을 열어 선생이 퇴실한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침묵이 감도는 와중에 입을 연 건 세이아 였다.


"다들 준비는 되었겠지. 예지몽의 내용에 따르면 사태가 일어나는 건 틀림없이 오늘. 미카, 준비는 어떻지?"


"완벽하다구, 세이아 쨩. 아리우스 테러 때는 직접 날뛰지 못한만큼 의욕도 충만인걸~"


"나기사도 그만 정신 차리거라. 주변 학생들의 피난은 어떻게 되었지?"


"후...물론 완벽해요. 중앙 정원 인근의 모든 교실은 비어 있어요. 학생들에게도 반경 30km 이내로는 접근을 금지했습니다. 선생님의 경호로 붙인 두 분의 준비는 어떻죠?"


"그쪽도 문제는 없다. 밀레니엄의 중장갑 관통 탄환도 도착해서 전달이 끝났지, 츠루기와 하스미도 대기중이네. 요격 태세는 만전이다."


필요한 준비는 모두 끝났다.


남은 건 전력을 다해서 곧 닥쳐올 재앙을 격퇴하는 일만 남았다.


결전은 직전까지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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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했다.


왠일인지 트리니티의 중앙 정원은 이상하리만치 한가했다. 시계탑의 시간은 11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평소라면 지금 시간대의 이곳은 다른 학생들의 인파로 가득했다.


내가 듣지 못한 연락 사항이라도 있는건가 싶은 상황이였지만 지금은 그 이상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갑작스레 생긴 지금의 시간이 반가웠다. 나기사에게 전해들은 안건 때문에라도 조금 더 고민할 시간이 필요했으니깐.


간단히 정하기 쉽지 않은 안건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사실 이미 마음은 기울어있었다.


이제와선 한심하지만 솔직히 기억을 되찾고 싶지는 않았다.


선생으로서 내가 쌓아온 공적들을 돌아본다면 기억을 찾고나선 더한 위험에 처할 가능성도 있다. 그냥 일상만을 무사히 보내기도 내심 떨리는 키보토스에서 더 위험한 일에 접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집사 일도 나름대로 성미에 맞았다. 내가 공부한 내용을 타인에게 접대하고 모시는 것으로 활용하며 기뻐하는 상대방을 보는 일은 생각 이상으로 충실한 일이였다.


트리니티에 체류했던 2주라는 시간 동안 스스로에게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명확한 답변이 돌아올리가 없는 자신에게 몇 번이고 물었다.


'과연 지금의 생활보다 이전의 생활이 더 가치가 있는걸까?'


'사실 나는 선생이란 역할과는 맞지 않는 것은 아닐까?' 


'구태여 위험한 세상으로 돌아가야 되는걸까?'


'정말 내가 선생이긴 했던걸까?'


'이런 겁쟁이가?'


모두가 보내주던 존경과 걱정. 그리고 호감의 사이에서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들은 그 하나하나 전부가 기억을 잃고 희미하게 남은 자존감을 깎아갔다.


지금은 모두에게 존대를 받는 것 조차도 불편하다. 차라리 하대 해주는게 마음이 편할 것임에 분명하다.


중앙 정원의 장미들이 보였다. 


각자 색이 다른 장미들이 곳곳에 장식된 그 모습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관이다. 문득 집사 수업 중에 배운 이야기가 떠올랐다.


트리니티는 수 많은 분교의 통합을 통해 생겨난 학원이며 이를 상징하기 위해 중앙 정원의 경관을 꾸미는 주제는 변함없이 '조화' 라고 한다.


이 형형색색의 장미들 또한 그러한 주제에서 나온 아이디어 일테지.


조화를 앞세운 가드닝이지만 그럼에도 자세히 보면 추하다. 어느 장미는 관리가 부족해 시들고 벌레가 끼는 반면 어느 장미는 파릇파릇하다. 가드닝을 담당하는 인부에게 돈을 쥐어준 파벌이 있기 때문에 생기는 차별이다.


트리니티의 상류사회는 특히나 이런 대외적으로 드러나는 상징적인 요소에 특히나 신경을 쓴다고 하니깐.


집사 일을 배우기 전에는 몰랐던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파벌 싸움에 사로 잡히지 않은 이들도 있다. 트리니티의 학생회, 티파티가 그것이다.


겉으론 어느정도 팽팽함을 유지해야만 하는 그들도 외부의 시선이 없어지면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순간이 종종 보인다. 문자 그대로 화기애애하진 않아도 그 이상의 신뢰가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그런 순간의 그녀들은 빛났다.


그 광경을 실현하는데 기억을 잃기 전의 내가 도움을 주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난 뭘 고르면 좋은거지?"


아주 희미하게 이어진 결심이 끊어진다면 조금도 망설임 없이 지금의 생활을 고르게 될거라고 생각한다. 일도 충실하고 신변도 티파티에 맡게둔다면 그 정도로 큰 사건에 휘말리긴 쉽지 않을 것이다.


제자리를 빙빙 도는 듯한 사고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기억을 찾는 걸 포기하고 싶은 나와 정말 포기해도 괜찮은건지 염려하는 내가 있다. 하지만 내심 포기하는 것을 더 간절히 바라는 내가 있다.


짤깍.


중앙정원에 있는 시계탑의 시침이 움직이는 소리가 귓가에 명확히 울렸다.


신경이 곤두섰다.


갑작스레 위험한 느낌이 들고 호흡이 거칠어진다.


"...뭐야...?"


왜 이러지? 뭔가 잘못 먹었던가?


당장 지금 자리에서 벗어나라고 머릿속에서 경종이 울린다. 본능이 거기서 제발 달아나라고 등을 떠민다. 이성은 지금 닥친 상황이 무엇인지 확인하려 들었다.


순식간에 다가온 사고 반응에 머리가 따라가질 못했다.


본능에 따르기로 했는지 몸이 먼저 움직였다. 그 사이엔 조금의 틈조차 없었다.


"헉, 헉...!!"


쿠구구궁!!


땅이 울린다. 착각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땅이 울리고 있다.


지진인가? 무슨 일이 일어나는거지?


콰쾅! 쏴아아아....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와 그로 인해 공중에 튄 흙먼지가 떨어지는 소리. 소리로만 들어도 대충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직감할 수 있다.


지진은 아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한 것이 뒤에 있다.


우우웅.


쇠로 된 무언가가 움직이면서 생기는 울리는 듯한 구동음. 지금 내 기억에는 없다. 하지만 이게 무엇인지는 틀림없이 알고있다.


달리며 슬쩍 뒤를 돌아봤다.


아니나 다를까, 눈 앞에 있는 존재는 거대한 괴수였다. 땅이 울렸던 건 이 녀석이 이동하는 소리였음에 생각이 미친다.


녀석은 일단 거대했다.


상당히 높이를 가진 트리니티의 시계탑 조차 우스울 수준의 거체는 흰색을 기조로 한 색깔에 부분마다 규칙적으로 마디가 나뉘어져 있었고 나뉘어진 마디마다 주황색 빛이 새어 나오고 있다.


거기에 사냥감을 응시하는 두 쌍의 눈과 무엇이든 분쇄할 날카로운 송곳니.


그리고 눈에서 희미하게 퍼지는 노란색 안광과 같이 빛나는 머리 위의 거대한 헤일로.


선생은 자기도 모르게 굳게 닫힌 기억 속에서 떠올렸다. 어느 남자와의 해후를.


"선생이여... 당신이 이제 마주하게 될 예언자는 세피라의 가장 상위에 존재하는 천상의 삼각형 중 하나."
"그의 패스PATH는 이해를 통한 합일."
"그의 이명은 <다름을 통감하는 숙고의 이해자> --바로--."


그것이 울부짖었다.


목표를 제거하기 위해서.


데카그라마톤의 3번째 예언자. 비나가 이빨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