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가 선생님을 사랑하는 만큼, 지금도..앞으로도.. 선생님이 아리스를 오랫동안 기억해주셨으면 합니다. 이 물망초는 그러한 마음을 담아서 선택했어요.]


아리스가 물망초 무더기를 왼 손에 수북하게 들고, 그것들을 보란 듯이 내게 내밀어 보인다.


..그나저나 기억해달라니,


애초에 내가 널 잊을 날이 오긴 할까? 그런 날은 영원히 오지 않겠지.


키보토스 내에 존재하는 모든 학생들의 얼굴을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는 판에, 그중에서도 개성이 유독 짙은 너를 잊는다라.. 말이 안된다.


"...내가 아리스를 잊을리가 없잖아. 기억하면 기억했지. 그럴 일은 절대로 없어."


[아리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저... 아리스의 이 소중한 마음을, 선생님께 재차 확인시켜 드리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렇구나."


[그리고 물망초의 또 다른 꽃말은 진실된 사랑이라고 합니다! 이 꽃에 담겨있는 꽃말들은... 마치 전부 아리스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에요.]


"....."



진심이라, 누구보다도 맑고 순수한 아리스의 입에서 그런 단어가 나오니, 몸에 죄악감이 엄습한다.


그야 너는 나에게 맹세코 진심이겠지만.. 난 거짓된 말로 널 대하고 있는걸.


내가 너에게 계속 이래도 되는걸까?


순수한 어린양을 달콤한 언행으로 속이고 있다는, 스스로에게 큰 죄가 있다는 걸 잘 알고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와서 너에게 진심을 고하기가 무서워진다.


이제 정말 어찌하면 좋을까.




[..선생님? 어딘가 아프신가요? 표정이 매우 고통스러워 보입니다.]


"..아."



죄악감으로 잠시 몽롱해져있던 정신이, 아리스의 한마디로 다시 깨어났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내 안색을 살피는 아리스.


이런데까지 와서 학생의 기분과 추억을 해칠 수는 없다. 어서 빨리 화제를 돌리자.


"그냥 햇빛이 너무 눈부셔서.. 잠깐 눈좀 찔끔 감고있던거니 신경쓰지 않아도 돼. 그나저나 너는 꽃을 고르는 안목이 좋은 것같네. 이 물망초의 단아한 모습과,너와 비슷한 색깔을 담고있는 이 푸르른 하늘색까지... 정말로 너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 아리스. 네 말마따나 너를 위해 존재하는 꽃같달까."



[그..런가요?  아리스는 단순히 꽃말만 보고 고른건데, 선생님은 그런 면으로도 보실 수 있는거군요! 역시 선생님이십니다!]



다행히 좀 전까지의 슬퍼보이던 표정은 사라지고, 다시 입에 웃음기를 함박 머금은 아리스.


지금 한 말은 분위기 전환을 위해 내뱉은거긴 하지만, 그렇다고 헛으로 내뱉은 말도 아니다. 


아리스의 퍼스널 컬러는 푸른색. 물망초도 마찬가지로 푸른색이다.


세계에서 푸른색은 신성하고 맑다는 의미로 통용되니, 꽃말과 더불어 아리스와 합이 잘맞는 요소들이다.



그리고 물망초는 다른 꽃들처럼 유별나게 화려하거나 꽃잎이 큼지막하지는 않지만....오히려 그렇게 꽃잎이 작고 아담한 것이, 마치 미성숙한 모습을 나타내는 것 같아  아리스와 잘 어울린다고도 볼 수 있으리라.


아리스가 꽃이였다면 분명 물망초로 태어나지 않았을까.



[그러면 슬슬.. 화관을 만들어보도록 할까요?]


"선생님도 도와줄까?"


[아니요. 선물을 받아야 하는 분에게 도움을 받는건 실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마음은 고맙지만.. 이번엔 아리스 혼자서 만들겠습니다.]


정중하게 내 도움을 거절하는 아리스를 보곤, 나는 그냥 옆에서 그녀가 화관을 만드는걸 조용히 지켜보기로 했다.


저번 발렌타인 때 아리스가 내게 선물해준 수제 초콜릿의 형태를 생각해보면,  이번에 만드는 화관 또한 형태가 조잡하거나 이상할지도 모르지만...뭐, 상관없긴하다. 선물은 완성도보단 그 안에 담겨진 마음이 더 중요한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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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생각했었는데....


현재 그 생각은 전부 바람에 휘날리는 먼지처럼 날아가 버렸다.


아무래도 내가 아리스를 너무 얕본게 아닐까? 그녀의 감정적인 모습과 어린아이같은 순수함에 가려져서 그렇지, 그녀의 근간은 엄연히 완벽한 행동을 추구하는 로봇이거늘.


"...생각 외로 잘 만드는구나."


아리스가 화관을 만들기 시작한 10분째,


벌써 화관은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하고 완벽한 형태로 70% 가까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나저나 원래 실력이 이렇게 좋았던가?


로봇이라서 자체적으로 손기술이 좋다기엔, 저번 발렌타인 때 스네일 초콜릿건을 생각해보면 그건 아닌 것 같고...



[칭찬 감사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이 정원에서 이미 화관을 만드는 법을 78번 연습했었거든요. 선생님에게 세상 그 어떠한 화관보다 아릅다고 완벽한 화관을 만들어 선물해 드리고 싶었기에, 이번에는 아리스가 레벨업을 하며 노력을 계속해왔습니다.]



아하. 그냥 노력을 엄청 했던거구나.


날 위해 78번이나 시행착오를 겪었을거라 생각하니.. 너무나도 감동적이지 않은가.


당장이라도 눈물을 펑펑 흘리고 싶은 심정이다.


한방울은 날 위해 피땀흘리며 노력해준 아리스를 위해, 그리고 남은 한방울은 78번동안 희생되었을 이 정원의 꽃들에게 애도를 표하기 위해..


"확실히.. 네가 지금 만들고 있는 화관은 세상의 그 어떠한 화관보다 아름다워. 이런 고도의 수제품을 나 하나를 위해 만들었다니, 선생님은 행복에 겨워 심장이 멎을 것만 같은걸."


[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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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분이 또 지났다.


아리스가 규칙적으로 물망초의 줄기를 구부리고 세심하게 화관을 엮어 가면서...


"슬슬 다 되가네."


[네! 곧 있으면 고성능의 아티팩트가 탄생할겁니다.]


화관은 어느덧 1/5를 남기고 완성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조용히 그러한 과정을 지켜보니 슬슬 심심해져 아리스에게 대화거리나 던져보기로 했다.


"아리스."


[무슨 일이신가요?]


"갑자기 궁금하게 생겼는데 말야. 너는 나에게 자기를 영원히 기억해달라는 의미를 전하기 위해, 물망초를 골랐던 거지?"


[확실히 그렇습니다만.. 어딘가 문제가 있었나요?]


"아니, 아니. 문제같은건 하나도 없는데.. 뭔가 묘한 기분이 들어서."


[묘하다, 라고 하시면은...?]


"아리스. 너는 로봇이지. 나는 그냥 평범한 인간이고.'


[...네. 그렇습니다. 아리스는 튼튼한 로봇이지만, 선생님은 총알 한발에도 딸피가 되거나, 최악에는 바로 게임오버가 되버리는...라이프가 위태로운 인간이라고 알고 있어요.]


"...우리 둘중 누가 더 오래 살 것 같아?"


[그..건..]


아리스의 얼굴이 빠르게 굳어져간다.



...맹세컨데, 아리스를 기분 나쁘게 할 생각은 하나도 없다.


놀릴 생각도 없고.


그래, 악의같은거 하나없이...그저 순수하게 궁금해서 하는 질문이다.


나는 너를 영원히 기억할 자신이 있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먼저 떠나는건... 영생을 사는 로봇인 너가 아니라 , 한낱 보잘 것 없는 삶을 지닌 인간인 나니까.


그렇게 홀로 남겨져 가여워질 너는, 나를 기억할 수 있을까.


너를 꾸짖을 생각은 결코 없지만...걱정된다.


아주 만약에, 만약에... 우리 둘이 서로 사랑에 빠진다 하더라도, 그게 옳은걸까.


너가 날 사랑한다는 그 마음을 진심으로 거절해버리면 넌 분명 상처를 입겠지만,


내가 너의 그 마음을 받아들인다 치더라도.. 넌 지금 당장은 편하고 행복하겠지만, 나중에 수십년 후, 거절당하는 아픔보다 더한 고통속에서 평생을 몸부림치겠지.


그 때쯤 나는 이 세상에 없을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