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글] 키보토스.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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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 그럼 저희도 이만 가볼게요!"

"아, 응, 수고했어! 내일 보자~."


문을 닫고 나간 두 학생을 마지막으로 세미나 부실에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노아 선배가 이 시간까지 남아 있다니 신기하네, 그치?"

"그러니까. 저녁 시간도 한참 지났는데 자리에서 일어나는 거도 못 봤어."

"아 헐, 지금까지 저녁도 안 먹은 거야? 어떡해... 편의점 도시락이라도 사갈까?"

"에이 뭐 그렇게까지... 알아서 해결하지 않을까?"

"그치만... 그런가...."


복도에 울려퍼지던 두 목소리는 점점 멀어지더니 이내 사라졌다.


달칵-

"아, 뜨뜨...."

컴퓨터에서 막 뽑은 메모리스틱은 손을 델 정도는 아니어도 생각보다 뜨거웠다.


"...."

엄지손가락 남짓한 크기의 메모리스틱이 왠지 기관단총보다도 무겁게 느껴져서, 자그마한 손이 가볍게 떨려왔다.


"이걸 넣으면... 정말 돌이킬 수 없는데...."

책상 위에는 지금 들고 있는 메모리스틱이 딱 들어갈 만한 크기의 케이스가 열려 있었지만, 노아는 한참 동안 케이스를 바라보기만 했다.


밀레니엄 사이언스 스쿨은 키보토스의 최신 과학기술을 선도하는 학교답게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다른 학교보다 몇십 년은 앞선 시스템이 보편화돼 있다. 특히 모노레일이나 배달 드론처럼 실체를 가진 인프라는 그게 존재하지 않는 생활을 상상할 수가 없을 정도로 강렬한 존재감을 자랑한다. 그러다 보니 잊히기 쉬운 사실이지만, 사실 이 모든 인프라도 초고성능의 밀레니엄 교내 전산망이 없다면 금속덩이에 불과할 것이다. 단순히 인터넷이 안 되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 금융망, 인프라 기간망, 교육지원망 등 학교 생활에 필수적인 전산이 모두 먹통이 된다는 것이니 말이다. 실제로 지난번 네트워크 허브가 데카그라마톤에게 점령당했을 때 밀레니엄에 발생했던 혼란은 지금도 학생들 사이에서 한번씩 대화 주제로 나올 정도였다.


"고작 이만한 칩이 회선 수천 킬로미터를 마음대로 제어한다니... 최신 기술이란 건 가끔은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니까."

그리고 지금 노아가 들고 있는 메모리스틱의 정체는 노아의 액세스 토큰. 세미나의 임원인 자신의 액세스 토큰이라면, 마음먹기에 따라 그 중요한 전산망을 몇 날 며칠이고 멈춰버릴 수도 있다. 이걸 넘겨준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노아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노아는 쉽사리 결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선생님... 정말로 이 방법밖에 없는 건가요?"

달빛이 창백한 탓이었을까, 은빛으로 아름답게 빛나는 머리카락에 가려진 노아의 표정은 어딘가 서글퍼 보였다.




[선생님, 일어날 시간이에요!]

"으으, 벌써? 얼마 자지도 못한 거 같은데 시간이 이렇게 됐나."

[아, 일어나실 때 조심하....]

콰당탕탕-

[... 조금 더 일찍 말씀드릴걸 그랬네요....]

"아이고야... 어쩌다가 이렇게 끄트머리까지 간 거야."


"망했네.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아."

선생의 머리 높이만큼 쌓인 서류 더미를 3시간째 붙들고 있었지만, 선생의 관심은 이미 책상 앞을 떠난 지 오래였다.

"키보토스에서 학생 찾기를 맨땅에 헤딩으로 해야 한다니, 이걸 무슨 수로 한다...."


"선생님, 당번 활동 하러 왔어!"

발목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카락에 고양이귀를 쫑긋 세운 학생이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함께 부실의 문을 열어젖혔다.

"으악! 아, 안녕 세리카."

"뭐야 선생님, 내가 온 게 맘에 안 드는 것처럼. 당번이니까 어쩔 수 없다고."

"미안 미안. 좀 생각에 빠져 있어서 나도 모르게 놀라서 그랬어. 오늘은 별로 할 일도 없으니 편하게 있다 가."

"오오 정말? ... 이라고 할 줄 알았어?! 세상에, 서류가 머리 높이만큼 쌓여 있잖아! 일을 이렇게까지 미루다니 믿을 수가 없네!"

세리카의 기겁을 넘어 거의 경멸에 가까운 눈빛에 선생은 자기도 모르게 움찔했다.


"게다가 선생님, 아무데나 물건을 떨어트리고 다니면 어떡해. 내가 오는 길에 주워서 다행이지 잃어버렸으면 어쩔 뻔했어."

"어? 내가 떨어트린 거라고?"

"잃어버린 줄도 몰랐다니, 맙소사....  자, 여기. 이거 선생님 거 아냐?"

선생은 푸른 빛이 감도는 케이스를 건네받았다. 샬레에서 사용할 법한 디자인은 아니었지만, 마감이 깔끔하고 약간의 광택이 도는 손바닥보다 작은 크기의 케이스였다.

'이건... 메모리스틱이잖아. 이런 게 왜...?'


"뭐야 선생님, 왜 그렇게 뜷어져라 쳐다보는 거야? 서, 설마... 나 모르는 사람 물건을 가져와버린 거야?"

"아냐. 내 물건은 맞을 텐데.... 잠시만. 아로나?"

[네?]

선생은 메모리스틱을 싯딤의 상자에 꽂았다.

"혹시 이 안에 바이러스 같은 게 없는지 확인해줄래?"

[아하, 잠시만요!]

출처를 알 수 없는 이동식 저장장치를 꽂으면 안 된다는 건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강조하는 보안 수칙 중 하나지만, 싯딤의 상자라면 어지간한 해킹은 재채기 한 방으로 막아낼 수 있을 터였다. 세리카는 선생이 아로나와 대화하는 게 신기했는지 아까부터 계속 선생과 싯딤의 상자를 번갈아가며 바라보고 있었다.


[분석 끝! 다행히 나쁜 프로그램이 깔려 있지는 않은데, 선생님, 이건....]

"액세스 토큰? 이런 게 왜...."

선생의 표정이 굳어졌다. 액세스 토큰이란 것은 쉽게 말하자면 서버에 접속하기 위한 신분증. 사용자가 자신의 토큰을 절차에 따라 접속할 서버에 등록한 뒤, 서버에 접속할 때 자신의 토큰을 제시하면 서버는 사용자 토큰 목록과 대조해 사용자를 식별한다. 그렇다 보니 토큰 자체로는 어떤 서버에 접속하기 위한 것인지도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는 보안상의 장점도 있지만....

'샬레 서버에 쓰는 토큰도 아니야. 대체 어디에 쓰이는 거지? 아니 애초에, 누가 이런 걸 준 거야? 목적이 뭐지?'

토큰의 정체에 대해 고민하면 고민할수록 점점 생각은 미궁 속으로만 빠져갔다.


"저기, 이게 뭔데 선생님? 무슨 토큰?"

"아, 컴퓨터 관련해서 뭐가 좀 있는데 별 건 아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세리카의 존재를 잊은 선생은 급히 얼버무렸지만, 이미 뭔가 단단히 오해를 산 듯했다.

"아니 잠시만, 들어 본 적이 있어. 누가 루나 토큰이라는 가상화폐를 만들어내서 투자자들을 잔뜩 모은 뒤에 갑자기 전부 처분하고 내뺀 사기 사건이 있었다고!"

"가, 가상화폐라니...."

"서, 설마 선생님도 이상한 가상화폐 같은 거 하고 있는 건 아니지? 안 돼! 그건 파산의 지름길이라고!"

"잠깐만 세리카! 우리 멱살은 놓고 이야기하자! 그런 거 아니니까 정말로!"


"뭐야, 그런 게 있다니. 나는 컴퓨터 같은 건 잘 몰라서 오해를 했네. 정말 미안...."

선생은 액세스 토큰이란 것에 대해 한참을 설명을 해주고 나서야 겨우겨우 세리카의 오해를 풀 수 있었다.

"괜찮아. 사실 컴퓨터를 많이 쓰는 사람도 잘 모를 수 있는 내용이거든."

"근데 그러면, 그 액세스 토큰이란 거만 있으면 어디에 있든 아무때나 다른 컴퓨터를 들여다볼 수 있는 거야? 인터넷이란 건 대단하네."

"그런 셈이지. 인터넷만 연결돼 있다면... 어?"

선생은 금새 뭔가 이상함을 눈치챘다. 대부분의 서버는 보안을 위해 내부망 밖의 사용자를 차단하는 기능이 있다. 특히 회사라면 업무에 사용되는 서버는 회사 내부에서만 접속이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 당연한 상식이다. 대외적으로 공개돼 있는 웹 사이트의 서버라면 이야기가 다르지만, 웹 사이트에 접속하는 데는 액세스 토큰을 사용하지도 않으니 애초에 논외. 즉 액세스 토큰이 있다고 해도 그걸 이용해 '샬레에서' 서버에 접속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하지만, 만약 외부에서도 반드시 접속이 가능해야 하는 서버라면?'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선생은 씩 웃었다. 갑자기 모든 의문이 한순간에 풀려 버렸다. 그리고 선생의 생각이 맞다면, 다음에 선생이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세리카, 정말 고마워. 덕분에 고민이 해결됐어."

"뭐, 뭐야 갑자기! 참나. 그래도 나 덕분에 뭔가 해결됐다니 다행이네."

"아, 그러면 혹시 부탁 하나만 더 들어줄 수 있을까?"

"물론이지. 오늘 나는 당번으로 온 거니까, 혹시 내가 도와줄 일이 있다면 또 얼마든지 말만 해줘."

우쭐해진 세리카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선생을 바라봤다.


"오늘은 이만 가줄 수 있을까?"

"뭐야, 그 정도... 뭐?!!!!!"

자신만만하던 표정은 그새 어디가고 없고, 당황이 잔뜩 묻어나오는 카랑카랑한 비명만이 샬레 부실에 울려퍼졌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