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종교학 뇌피셜 모음

<비극의 탄생>으로 보는 프레나파테스와 디오니소스 이야기

색채와 자유의지, 운명에 대한 이야기로 본 최종장 결말

무명 사제들이 언급한 라캉의 "현실계, 상징계, 상상계" 를 알아보자

최종장에 반영된 니체의 "디오니소스적 지져스"

최종장 결말의 여고생들은 각각 어떤 모티브일까

한섭 노아 픽업배너와 노아의 생일에 대해 알아보자

(뇌피셜 아님) 비교종교학에서 "대속" 모티브를 다루는 법과 종교-문화의 분화과정에 대해 알아보자



이-글은 지 완장질한다고 꺼무에 돚거해간 시발럼이 좆같아서 쓰기 시작했고

또한 같은 꺼무식 완장자위를 출처로 념글 간 니체 글이 "꺼무" 하는 걸 보면서

참으로 꼴리는 니체의 이야기를 노꼴로 오해한 몰붕이들에게 헌정하고자 썼?음

믿거나 말거나 진실은 몰?루지만 시발 돚거는 하지마라





아ㅋㅋ 랩실 죽돌이가 좋은게 뭐 있겠음?

꼴리는게 있으면 들고와서 헠헠하는게 학문의 참맛이다


들어가기 전에 니체가 19세기 말에 한창 활동한 여파는 인문 분야에서 피할 수 없는 영향을 줬다는거부터 알려둠

비교종교학은 특히나 캠벨좌가 쓰고 용하신도 머학생때 패러디한 씹덕감성의 고전,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부터

추천도서로 니체 읽으셈^^! 하는 개씹빠요엔 학문이라 최대한 구어체로 설명하긴 할건데 뭔소린지 몰루겠는게 대부분일거임

그럴때는 "오 시발 뭔진 몰라도 좀 꼴리는데?" 하고 넘기면 된다



왜냐하면 ㄹㅇ루다가 이 책은 궁극적으로 젖가슴, 보지, 똥구멍에 대한 얘기라서임

이걸 참으로 고상한 꺼무위키 퍼거들이 좋아라하며 돚거할 표현으로 설명하자면 "관습에 도전하여 시대정신을 일깨우는 것" 정도 될텐데

역사학에서 추구하는 방향과 꺼무위키 사관들이 전혀 다른 것처럼, 학문의 범위에서 <선악의 저편>이란 참으로 진실되게 순애섹스 얘기다





1. 동정은 해롭고, 사랑은 낭만이다




한 줄로 요약해서, <선악의 저편>이란

"시대를 막론하고 변함없는 사랑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끊임없이 재고하라" 는 주제를 전하고 있으며, 그래서 초인이란 "사랑하는 자" 이다

당연히 이건 유일신교의 사랑보다는 문화로서의 기독교 =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정립된 인본주의적 기독교가 지향하는 "사랑" 에 가깝고

애초에 그럴 수 밖에 없는게,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부터 니체에게 공격받던 19세기 말에서 양차 세계대전까지 겪은 끝에 "성장" 한 결과라서다


오늘날의 인본주의 기독교가 성장하는 배경에 니체가 있었다는 인식을 잡고 시작하면 이후의 내용이 왜 그러한지 쉽게 이해될거임


여기서 순애질싸섹스 = 순수한 사랑을 좀 더 진지하게 파고들면 젖가슴, 보지, 애널은 니체에게 유일신교에 의해 배제된 모든 가치의 상징이었다

인간 스스로 인간의 섹스가 동물의 섹스와 다르다고 여기는 이유는 참으로 형용할 수 없는 삶의 충족감 = 행복을 느끼며 행복을 목표로 해서인데

이 기쁨을 나누는 연인의 섹스가 죄악시되며, 오직 생육하고 번성하기 위한 섹스만이 허락된 가운데 <선악의 저편>은 시대가 부과한 죄악의 기준,

 "도덕적인 것" 이라는게 과연 인간의 서로를 사랑하려는 본성보다도 절대적인 진리냐고 의심한다

= 모든 걸 의심하라던 데카르트가 자기자신을 의심하는 것에선 소극적이었다는게 니체의 데카르트 비판인 걸 염두에 두면 이해에 도움이 된다



공공장소에서 땀으로 촉촉해진 유두돌기까지 드러내면서 젖가슴을 출렁거리는 나체의 여인은 "음탕한가?"

당연히 개씹변태걸레치녀겠지만 니체에게는 그렇지 않았음. 지져스 가라사대, "죄 없는 자만 돌을 던져야지!"



음탕함이란 누구에 의해 정해지는가?

에이미가 젖가슴을 드러내고 싶은 이유는 센세를 착정섹스하겠다는 의사표시일수도, 단순히 더워서일수도 있음

아무튼 에이미가 정말로 무엇을 욕망하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함. 욕망의 주체인 에이미가 하는 만이 유일한 단서다

하지만 에덴조약~최종장에서 나온대로 타인의 속마음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데...



그럼에도 인간은 타인과 서로 사랑을 나눈다

센세가 아무리 에이미의 보지에 진심사랑즙 한가득 사정해줘도 그게 센세가 에이미를 진심으로 사랑하는지는 증명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에이미는 센세의 허리를 다리로 휘감고 손 꼭 잡고 보지로 쥐어짜고, 센세랑 서로의 혀를 핥아주면서 "사랑받는다고 느낀다"


행위자의 행위는 행위자의 의지를 정확하게 보여주는가? 육체로 행해진 것은 마음을 얼마나 정확히 전할 수 있는가?

사랑이란 이런 불완전한 미지를 더듬으면서 서로의 존재만을 겨우 느끼는 나체의 연인들에게서 볼 수 있다

서로 손을 꼭 잡아주고 헐떡이면서 오직 나의 쾌락과 타인의 쾌락에 모든 걸 바치는 그 순간에 사랑이 실천된다

= 모성애, 사제애, 친애와 같은 것은 인간의 창조♥가 이루어질 수 있는 이러한 연인의 사랑을 모방한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누가 감히 이런 사랑을 나누는 연인들 사이에 끼어들어서, 이래라저래라 판단하고 쾌락의 점수를 매겨달라하면?

무슨 기준으로 점수를 매기겠음? 아니 애초에 성감대부터 같은 보지라도 에이미 보지랑 히마리 보지가 다를텐데?

만약 겨드랑이에 흥분하고 기쁨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객관적인" 점수를 매겨봤자 아예 이해를 못할거임



여기서 가장 최악이고 가장 졸렬한 것은 "동정" 이다

스토리 해석할 때 니체 기준은 안된다는 이 념글에선 꺼무위키 토론을ㅋㅋㅋㅋㅋㅋ 출처로 적어놨는데 존나 웃음벨임

니체 구절들 중에 일부만 쏙 빼와서 니체까기 하는? 뭐 그런 토론이었나본데 그게 센세가 반박한 내용이라는 뇌피셜을

마치 오피셜인 것 처럼 써놓은 건 둘째치고 니체가 했던 말들을 대충 짜깁기해서 나쁜놈 만들기로 몰아가는 내용이다


뭐 니체를 뭐라고 해석하냐는 자유지만, 전문성보단 대중성에 가까운 고병권 아재 책만 읽어봐도 저건 걍 웃음벨이다

"퍼온 몰붕이에겐 잘못이 없지만" 저게 뭐라고 꺼무에서 또 통제하는지는 몰라도 딱! 잘라서 그냥 병신같은 헛소리임



적당히 주워들은 소리로 ~하지마셈 하는 꺼무식 완장놀음은 집어치우고, 머학원 교양 수준이지만 제대로 니체를 읽어보자

연애를 해봤거나 해본 애들 썰만 들어도 알겠지만, "불쌍해서 사귀는 관계" 에는 끔찍하고 가스라이팅이 되는 경우가 흔함

당연히 "자기연민" 또한 연인들에겐 가능한 멀리해야 하는 것으로 "나는 이렇게 불쌍하니까 사랑받아야해" 같은거다


그게 바로 니체가 연민의 도덕을 가리켜 노예도덕이라 부르는 이유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따위의 가식으로 감히 인간의 사랑을 설명한다면, 그건 인간이 가진 욕망을 부정하는 꼴임

"나를 굶주리지 않게 해주소서!" 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아는 사람이며,

당연히 이걸 타인에게 적용할때도 "불쌍해서" 가 아니라 "굶주리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서" 라고 할 줄 알아야만 한다



따라서 타인에 대한 사랑은 먼저 자신에 대한 사랑을 알아야 하고, 니체는 이걸 "자기자신을 존중할 줄 안다" 고 말한다

=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지도, 외면하지도 않고, 과장하지도 않은 날 것 그대로 마주하는 것부터 진정한 사랑이 시작된다

임신질싸를 생각해보자! 니체는 왜 모든 유기체의 본성이 착취하는 것이라 보았을까? 자신을 위해 타인을 착취하는 행위,

자신의 욕망을 위해 타인의 육체를 탐하는 그것이 인간이 모든 유기체와 공유하는 생명의 존재의의라서다


하지만 인간이 다른 유기체와 다른 점이 하나 있다. 모든 인간은 거짓말쟁이라는 점이다.

순애섹스를 생각해보자! 오직 인간만이 성행위에 번식행위라는 객관적인 사실"사랑" 이라는 허무맹랑한 거짓말을 붙인다

"사랑" 이라는게 뭔지 번식만큼 확실한 설명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인간은 참으로 오만하게도 "사랑" 을 믿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랑이 거짓말이라고 해서 그게 무가치하고, 무의미하고, 무쓸모한가?

그것이 순전히 인간이 상상력을 발휘해서 지어낸 것, 꾸며낸 것, "꿈꾼 것" 이기 때문에 그것은 인간만의 고유한 성질이 된다

때문에 나는 이 사람을 사랑해서 섹스를 하는 것이다 = 이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과 섹스하는 것은 내게 불쾌감을 야기한다

객관적 사실에 낭만적 거짓이라는 "가면" 을 씌움으로써 인간은 비로소 인간이 되며, 그것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로망" 이다





2. 말랑한 니체, 나츠와 알아보는 착취의 책임




사실 인간이 인간의 육체를 가진 이상, 상대방을 사랑하거나 말거나 보지에 자지넣고 흔들다가 퓻퓻 사정하는 느낌은?

사람마다 어떻게 여겨지느냐만 다를 뿐이지 보편타당한, 자연의 현상을 관찰하여 증명 가능한 사실로서 "그게 그거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랑을 꿈꾸는 인간" 들은 그렇지 않고 "강간하는 인간" 들과 달리 "참인 사실에 거짓을 발라서 즐긴다"


그러므로 사랑은 신의 은총이라고 한다면, 뭐 아무래도 좋다! 중요한 건 그걸로 "즐길 수 있느냐" 라는 느낌뿐이다

느낌은 경험될 수 있으며 그러한 느낌을 무엇이라 여기건 그렇게 여기는 것 또한 우리의 선택에 의한 경험의 결과

따라서 중요한 것은 무한한 거짓말 속에서 무엇을 자신의 사탕발림이라 선택할 것인가 = "무엇을 믿는가" 의 문제다


니체의 사랑을 적극 설파하는 나츠의 비유를 따라서 "수제 쿠키" 로 설명해보자

쿠키라는 본질은 육체이다 = 그것을 서양과자라고 부르건 밀가루반죽구이라고 부르건 쿠키가 쿠키라는 건 변함없다

태워먹지 않고 구운 쿠키의 이 거기서 거기라는 것, 특출난 감각이나 특수한 기술로 그 미묘한 차이를 볼 게 아니면

"쿠키는 쿠키다" 라는 사실은 미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객관적인 사실이다


쿠키의 생김새는 심리이다 = 그게 그거인 쿠키이지만 "먹기 좋다고 느끼는/생각하는 생김새" 의 쿠키를 선호한다

자지 모양 쿠키이건, 보지 모양 쿠키이건 사람마다 어떤 생김새를 먹기에 좋다고 느끼는가/생각하는가는 다르다

"쿠키는 쿠키처럼 생겼다" 라는 문장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처럼 이런 느낌은 그 자체론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지만


쿠키를 즐기는 것은 그런 의미를 사랑하는 것, 실체라고는 타인에게 설명하기도 어렵고 애초에 동일한 경험이긴 한지

증명은 커녕 논박부터 불가능한 한없이 개인적인 느낌에 불과하지만, 그런 느낌에 우리는 "의미" 를 부여할 수 있으니

"나는 이 쿠키를 좋아한다" = 정말로 그런지 타인이 증명할 방법은 없지만 그럼에도 좋아한다고 말하기를 선택한거다


이제 여기서부터가 개꿀잼 포인트인데

인간은 그렇게 각자 저마다 다른 의미를 부여해놓고서는 + 그런 의미를 서로 나누면서 서로 다른 느낌을 경험한다

= 신은 사랑이라고 발언하는 것이 누군가에겐 감동을, 누군가에겐 혐오를, 누군가에겐 알빠노? 를 경험하게 하지만

각자 느끼는 바가 다르기에 그런 발언에 대한 수많은 발언에는 正도 없고 反도 없으며 그저 발언 그 자체만 진실되다

그런데 또 그런 발언 자체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거짓이 참이고, 참이 거짓이란거다!


어느 하나만 참되다는 것, 아무것도 참이 아니라는 것, 참도 거짓도 알 수 없다는 것은 모두 동시에 참이자 거짓이다

이것은 혼돈인가? 그렇다, 혼돈이다! 니체의 비유와 형식을 빌려쓰면 "춤추는 별들이 끝없이 펼쳐진 우주와도 같다"

인간은 그 속에서 "자기가 꼴리는대로 선택하면" 그만이고 + 그 속에서 "남의 꼴림이 나의 꼴림이다" 를 선택한다면



그게 바로 황금률(The Golden Rule)로서, 공동체를 구성한 사회적 인간인 이상 가질 수 밖에 없는 진리이다

"절대진리란 것은 없다. 진리는 꼴리는 것이며, 모든 인간은 꼴림을 원한다. 따라서 꼴리는 것을 타인에게 하라!"

= 니체의 사랑이 지져스의 사랑이자 솔로몬의 사랑이자 무함마드의 사랑이자 붓다의 사랑이자... 의 사랑인 것은,

서로 사랑하며 행복해지길 욕망하는 이상 인간이라면 누구나 납득하는, 그러나 증명 불가능한 것이 사랑이라서다



진리여성이라고 가정한다면 어떠한가?

<선악의 저편>이 취하는 형식은 심플하게 말해서 연애 가이드북임. 모든 신화가 사랑 이야기를 다루는 이유랑 비슷하게

의외로 인간의 가장 보편적인 욕망, "호기심" 은 자신이 너무너무 좋아하지만 도저히 알 방법이 없는 미지의 존재에게

= 타인에 대해 흥미를 느끼고, 그런 흥미가 조금씩 호감을 쌓아가고, 어느 순간 질내사정까지 주고받는 사이가 된다!




도대체가 알 수 없는 신묘한 이치 덕분에, 인간은 타인을 그토록 두려워하면서도 그토록 신기해하는 존재이다

완전 남남인 두 사람이 서로 자지 덜렁거리고 보지 벌릉거리면서 나 잡아봐라~♡ 할 정도로 바꿔놓는 것이 사랑인데

니체는 이를 선악의 저편 머리글부터 "여전히 어린아이 장난이고 미숙한 신출내기의 것" 이라고 말한다


이걸 알기 쉽게 풀어쓰면...




선생을 2년 일찍 만난 호시노 만화(manhwa) 5화



아마 니체가 얘기한 낙타-사자-어린아이의 비유를 들어봤다면 크으 시발 섹스으읏 하는 걸 느꼈을지도 몰루겠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완전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인간은 아무리 경험을 쌓고 뭔가를 학습해도 여전히 어린아이

누구나 실패하고 실수하고 심지어 끔찍한 죄를 자기 의지로 저지르며 세상의 지탄을 받을지도 모르는게 인간이다

= 하지만 세상의 질서가 어떠한가를 떠나서 인간의 본성은 유일신교에서 말하는 절대선과는 전혀 다른 성질이다


인간이 이런 불완전함을 등지고 완전함을 지향해야 하는가?니체의 대답은 "그건 네가 꼴리는대로지" 되시겠다.

무엇을 지향하냐는 자유지만, 그게 결코 100%를 이루진 못할거임. 인간은 전지전능한 유일신이 아니니까 ㅇㅇ

하지만 한없이 100%에 가까운 99.99999999....%는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니체는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긍정한다




271번의 "목욕의 기쁨을 안다" 라는 문장부터 아즈사, 아츠코, 고서관 때의 히나타가 해준 대사를 떠올리게 하지?


일단 271번, 272번, 273번 단락을 읽어보자

니체에게 연민 = 책임전가를 방관하는 것이다

인간에겐 각자 타고나거나 숙련되어 저마다 다른 능력이 있고 그에 따라 할 수 있는 자와 할 수 없는 자가 나뉜다

= 우열관계이고 불평등하지만, 상황과 조건이 바뀌면 아주 쉽게 뒤집히면서 어제의 비범인이 오늘의 평범인이 된다

그래서 모든 역사, 모든 유기체의 본질인 "착취" 란 인간의 삶에서 "영원한 강자는 없다" 로 승화되는 것이 가능하다


어떤 상황을 책임지는 자는 어째서 책임지는가?

그 상황을 책임질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이며, 책임질 수 없는 자들은 기꺼이 책임지는 자에게 자신을 맡긴다







3. 성장에의 의지는 변화의 원동력이다



몰루에 적용해본다면 딱 이 대사에 해당함

어른 = 책임질 수 있는 힘이 있는 자

아이 = 책임질 힘이 없거나 부족한 자


그런데 니체가 했던 말 중에서 존나 유명한거 있지?

모든 인간은 힘에의 의지를 욕망한다 = 이건 아이들도 어른처럼 언젠가 책임질 수 있는 힘을 갖기를 바란다는 것,



성장에의 의지가 바로 힘에의 의지라고 할 수 있다

아이러니하지만, 이런 의지는 기존에 책임지던 자(어른)의 위치를 빼앗는 것으로 실현되며 그래서 이기적인 욕망임

하지만 인간은 완벽하지 않은 존재이므로, 그 위치는 다시 바뀔 것이고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한없이 빼앗겠지?



그런데 이런 끝없는 변화, 불완전성의 세계에 어느 날 갑자기 완전한 신성이 강림해버린다면?

지배자와 비지배자의 관계는 언제든지 뒤집어질 수 있었지만, 이런 변화를 거부하고 고인 물이 된 이들이 있다 


인간은 살아있는 한 타인에게서 빼앗기를 욕망한다

= 아이들은 어른들을 넘어서길 욕망한다

= 모든 인간은 결국 여전히 미숙한 아이들이다

= 이러한 우열관계는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 실질적인 대등관계로 유지될 수 있었지만 


완전성이 강림해버리면서 뺏고 뺏기는 관계는 우리가 아는 그러한 "불변하는 착취 관계" 로 굳어져버리고

폭력적인 야만인도 위대한 왕이 될 수 있던 시대는 "하나뿐이신 진정한 왕", "모든 것의 끝에 도래할 왕" 때문에

귀족은 책임지는 자의 의무를 저버리고 타락했으며 그들 자신의 역할을 영원한 권력으로 만들어버렸다

= 어떤 이유로 폭군이 갈아치워져도, 새로운 권력자가 제 2의 폭군으로 거듭나며 권력은 영원히 존속될거란 소리다



권력이 많은 자가 그렇지 않은 자에게 권력을 빼앗기고, 지식이 많는 자가 그렇지 않은 자에게 뒤쳐지길 반복하던 세계

⬇

오직 착취를 위한 착취만이 남아버린 정체된 세계를 두고 니체는 자신의 관점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걸 부정하는

독단주의자(dogmatist)의 세계라고 말하며 그중 가장 오래 헤쳐먹은 이들로 유일신교의 성직자를 지목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이 휘두르는 힘, 그러한 불변성을 거머쥐게 한 힘을 "두려움으로서의 도덕" 이라고 명명했는데

소수의 명령자 - 다수의 복종자 간의 관계가 언제든 뒤집힐 수 있던 이유는 권위에 대한 도전이 자유로웠기 때문이지만

그러한 불복종로 간주하여, 지져스의 권위를 찬탈하고 손에서 놓지 않은 사제들 때문에 이들의 세계관은...






4. 마따끄는 불변성을 저격한다


마따끄 전도사님이 말해준 과정을 착실히 수행해냈다


로마제국의 권력 다툼의 현장에서 책임자의 역할을 수행해야 했던 교부들이 종교권력을 거머쥐기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했던 일이 "다른 관점을 이단으로 정죄하기" 였고,

삼위일체와 같은 "공인된 교리 = 그러니까 믿어라!" 가 탄생하며 유일신교는 길고 긴 박해의 역사, 자기자신에 대한 박해의 역사를 또다시 되풀이하며 이어가게 되었으니

훗날 라틴어 -> 독일어로 번역한 루터의 동료들도 "교황은 다곤 숭배자다!" 라며 이교도로 몰아세우는 것을 반복했으며, 느그나라의 개신교회의 역사도 이걸 반복했던 탓에

 "예수천국 불신지옥", "장막성애자" 들의 급성장을 아무도 막지 못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건 ㄹㅇ 역사가 증명한다

신의 이름을 내걸었지만, 실상은 가나안족을 멸하라고 계시받았음! 이랬던 히브리인들의 역사는 헤아릴 수 없이,

구교와 신교부터 청교도를 비롯하여 끊임없이 다름을 부정하고 자신만이 옳다고 타인을 희생시키는 사제들이 있었다



예리코가 유일신의 이름으로 히브리인에게 "부쳐진" 것이 정말일까? 애초에, 라합이 정말로 창녀이긴 했을까?

오직 유일신의 성직자들만이 제시한 기준이 절대화된 성경에서만 예리코는 "악마화" 된 집단이었고 라합은 창녀였다

= 예리코가 침략당해야 마땅한 이유도, 라합을 창녀라고 기록한 이유도 오직 유일신교의 성직자들이 임의로 정한거

하지만 이런 임의로 정한 기준, 인간이 지어내어 증명할 수 없는 거짓말이 마치 유일한 진실인 것처럼 강제하게 된다면?


모든 유기체의 본능에 따라 인간인 이상 착취는 필연적이고, 이건 역사가 증명하며 특히 유일신교가 아주 정석대로 증명한다

"난 저거 안 꼴리는데?" 라는 가벼운 멸시를 파묻고 "저것은 죄악이다!" 라고 정죄해온 것이 유일신교라는 건 너무 자명하지?



니체 기준은 안된다며 센세는 선악의 저편 반박한 거라고 오피셜인 것처럼 써놓은 념글에서 센세가 반박했다는 그 내용

= "선악의 저편은 이런 내용이다" 라는 객관적 사실을 일부만 떼와서 자기 뇌피셜을 발라서 팩트인 것처럼 쓴 념글에서

아주 구체적으로 특정해준대로, "착취" 란 선악의 저편에서 핵심이 되는 주제이지만 "서로" 에는 "우리" 가 들어가 있다


게마트리아가 굳이 빌려온 이름과 육체를 가진 것처럼, 육체를 가진 이상 센세도 베아트리체도 여고생도 전부 "서로" 

센세도 미카한테 상처를 줄 수 있고, 미카는 센세를 속일 수 있고, 그저 부탁으로 목숨걸고 싸워달라고 하는 것이 착취

하지만 그러한 착취자-피착취자의 관계는 몰루에서도 니체에서도 지져스가 했던 표현 그대로, "서로" 에게 행해지므로

= 키보토스는 외부의 베아트리체가 있는 지옥이 아니라, 외부에서 온 센세도 그 안에서 함께하는 이승이자 현세가 된다



니체는 사람들 사이에서 함께한 지져스의 삶이야말로 바리새인들에게 지져스께서 육체로 직접 보여준 사랑이라고 봤다

= 그게 어떻게 "착취" 일까? 아주 간단함. 지져스는 자신이 증명할 수 없는 신의 아들을 자처하고, 사람들은 그걸 믿는다

지져스께서 아무리 기적을 보여줘도 사람들은 그것이 신에 의한 기적이라고 증명할 수 없고 다만 지져스가 행했다 보듯이

베다니아의 마르타가 지져스를 위해 노동의 대가를 바쳐주고, 존나비싼 나드 향유를 마르타의 동생 마리아가 바친 것처럼


똑같은 육체를 가진 인간에 불과하지만, 증명할 수 없는 것을 사실이라고 말했기에 지져스는 거짓말쟁이에 불과하다

= 그게 지져스의 생애를 깎아내리는가? 전혀! 오히려 지져스가 거짓말쟁이가 아니었다면 그것이 지져스를 깎아내리는거다

센세가 그냥 죽는 육체를 가진 인간이지만 "선생" 이라는 책임과 의무 = 자신의 "가면" 을 쓰고 역할을 행동으로 보여줬기에

"사랑의 신의 아들" 이라는 가면을 죽는 순간까지 행동으로 보여준 지져스처럼 니체에겐 어지간한 빠요엔이 아니었다는거임



그래서 누구나 지져스처럼, 물 한 동이만 떠 달라고 사마리아 여인에게 부탁한 지져스처럼 "착취" 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착취" 로부터 "사랑" 을 찾아낸 = 서로를 착취하고 착취당해주며 서로를 사랑하는 관계에서 찾아낸 "인간의 고귀함" 이다

지져스께서는 그저 제자들의 발을 씻겨만 주신게 아님. 오히려, 지져스께서 먼저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씻김을 "받으셨다"

= 세례도 마찬가지로 먼저 세례자 요한에게 받은 다음부터 타인에게 세례를 베풀어주셨으며, 이건 철저히 인간적인 것이다


아니 그러면 신은 뭐했는데? 그건 아무도 알 수 없고 아무도 증명할 수 없기에 무엇이든 말이 된다

= 여기서 지져스께서 평생을 헌신하고 자신을 대가로 지불하여 얻어낸 "믿음의 자유" 라는 개념이 등장하게 된다

니체에게 지져스는 무엇을 믿건 중요한 건 행동이라며 스스로 그동안 절대적인 진리라 여겨진 율법을 박살내버린다

그러고 나서 지져스는 "율법을 완성시키러 왔다" 라고 하셨으니 니체가 보기에 지져스는 정말로 그것에 거의 성공함



그러나 당연히 인간이기 때문에 이승을 완전히 떠나 다시 돌아오지 않은, 죽은 지져스를 12사도조차 아니었던 바울로가 직접 만났다며 주작질을 돌렸다면?

= 바울로가 주작질을 했냐 아니냐는 아무도 알지 못하지만, 바울로가 권력을 얻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며 그 뒤로 이어진 사제들도 권력을 "이어받게" 된다

그게 근대까지 이어지면서, 유일신교가 산업혁명에 힘입어 자본의 이름으로 더욱 확고한 지배자가 되었다는게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이다

당연히 니체는 베버 이후의 학자인 만큼 베버의 비판을 이어받아 유일신교를 비판했겠지?


오늘날까지 현대 사회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캐릭터가 검은양복이었고,

선교사 투입 -> 시장 개방 -> 빵빵한 신문물로 노예가 되어버렸♡♡ -> 식민지 착취가 그대로 재현된 사건이 아비도스라고 보면 된다

괜히 제국주의 시대에 일단 선교사 보내면 죽어도 명분이 서고 살아도 명분이 선다는 상황을 만든게 아님. 버림패로 소모당한 선교사들에게 조의를 표하자...



그래서 검은양복은 가장 반(反) 니체적인 권력을 보여준다

만약 확고부동한 세계의 법칙이라 선포된 법이 있다면?

법을 고쳐쓸 수 있는 사람이 세계의 지배자가 되며, 그래서 성경을 고쳐쓸 수 있는 사제들이 지배자가 된 것은 역사의 사실이다


그리고 거기서 독점된 것이 문자

그래서 니체는 문헌학으로 도덕의 계보를 밝혀냈던건데

히브리어 -> 라틴어 번역으로 불가타 정경 체계를 만든 것이 교부 예로니무스, 암브로시우스, 다마소 1세의 업적이지만

과연 그 과정에서 아무런 실수도 없었다고 보장할 수 있을까? 어디까지나 인간의 손에 의해 이루어진 과정임에도?





5. "왕관 빼앗기"



눈치챘겠지만, 만약 예로니무스의 뒤를 이어 끊임없이 "한없이 원문의 뜻을 바르게 전하려는" 시도가 지속되었다면

앞서간 이들의 행위는 뒤따라 올 이들의 행위가 있기에 서로가 서로에게 흠결이 있다고 따질 필요가 없는 관계가 된다

= 앞서간 이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믿어주고, 뒤따라 올 이들도 최선을 다하리라 믿어주기 때문이다


이걸 니체는 니체 자신을 포함한 "스승을 뛰어넘어라" 라면서 "제자가 언제까지 제자로 있을 것인가? 왜 그대들은 나의 왕관을 빼앗지 않는가?" 라고 말하는데



지져스의 제자사랑을 니체는 그런 의미라고 봤던거다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 = 모세 이후로 율법학자들이 씨름하느라 정체되어 권위주의적인 것이 된 율법을 "죽여서" "부활시키는" 행위라는거고

"다 이루었다" = 자신이 가장 사랑하던 제자 앞에서, 두 명의 마리아에게 "아들" 자리를 넘겨주고 자신은 "죽고" "부활하면서" 진정으로 복음을 완성해냈다 이거임


느그나라에서 익숙한 관용구로는 "박수칠 때 떠나라" 정도로 풀이할 수 있겠는데, 솔직히 이게 ㄹㅇ 기독교적인거 아님?

<고린도전서>에서 그 바울조차 "나는 나날이 죽노라" 라고 썼던 것처럼 비교종교학의 관점에서 보면 니체의 주장은

니체 본인은 자각하지 못했을 정도로 현대 기독교 문화가 지향하는 방향인 "삶에서 최선을 다해 선을 행하려 노력한다"



19세기가 끝나고 20세기 중반부터 개빡세게 각성하기 시작한 = 인간을 위한 인본주의 기독교를 천명하게 된 것처럼

아즈사랑 하나코가 "기쁨과 희망" 이라고 봤던 사목 헌장의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노바 불가타의 탄생으로 계승된다



그러니까, 니체라는 개빡센 대적자의 등장과 양차 세계대전으로 모든 가치가 파괴된 순간,

19세기 말의 유일신교"죽고" 20세기 중반의 사랑의 기독교"재탄생했다" 는 소리다!

= 이것이 보다 고귀해지기 위해 서로를 사랑하며 착취하는 성장에의 의지가 아니라면 뭘까?



그렇게 끝없이 죽고 재탄생하며, 끊임없이 새롭게 거듭나려는 인간의 본성 = 향상성이야말로

어머니의 태를 통하지 않고서도 다시 날 수 있다는 지져스가 니코데모스에게 전해준 지혜이고,

밧세바가 솔로몬에게 전해준 지혜이며, 이렇게 "전해받고 전해주는 자" 를 그리스 신화와 이집트 신화에서 찾아보면?

그게 그리스 신화의 디오니소스, 이집트 신화의 아누비스라는게 니체의 연구를 전해받은 비교종교학의 연구 되시겠다



니체가 오디세우스, 오이디푸스, 지크프리트 신화를 연구했고 특히 오이디푸스는 아리스토텔레스 비판에서,

지크프리트는 바그너 비판에서 "로마의 신앙(=유일신교)" 에게 변질되었다고 까는 내용을 제시하는데


반 세기 이후 초기 비교종교학자들은 이러한 신화들에서 니체가 얼마나 개빡세게 연구했는지 대부분 맞춰버린 걸 발견하고 히익 변태새끼를 외치게 된다

어느 정도냐면, 디오니소스 신화는 니체의 연구 덕분에 기존의 아폴론이 했던 역할이라고 생각된 것들 상당수가 디오니소스의 역할이었다는게 나올 정도였고

어쩌면 디오니소스-예수는 로마제국 시대에 "약자를 돕고 지배자에 저항하라" 라는 가치를 원하던 사람들에게 동일시된 것은 아닐까? 라는 가설로 이어졌으며



로마제국에서 유일하게 종교권력으로 흡수되지 않은 이들이 디오니소스-오르페우스 밀교였고, 이들이 초기 기독교 공동체와 서로 상부상조하던 관계라는 걸 밝혀내게 된다

그래서 당시 종교의 교리 같은 건 전혀 알지 못하던 평범한 이들에게 디오니소스의 이름이건 지져스의 이름이건, 권력에 맞설 용기를 일깨워준 이들의 흔적은

크리스천 몰붕이라면 한번쯤 봤을 영화, <쿠오 바디스 Quo vadis>에서 황제의 디오니소스 코스프레하던 눈나들과 달리 "진짜" 디오니소스 신도가 전해준 명언으로 등장한다



"Respice post te, hominem te esse memento"

"뒤를 돌아보아라, 그대도 인간이라는 걸 기억하라"

당대의 권력자들에게 단호한 일침을 놔주는 지혜로운 신은 미다스를 참교육한 디오니소스건 성전을 채찍질한 지져스건, 기존의 권위에 도전한다는 충공깽한 행위는




마따끄 전도사님도 인용하신 C.S.루이스처럼,

선악의 저편에서 니체가 어째서 배움을 그렇게 강조했고

그것이 자유를 가져다준다 했는지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당연히 무지한 것은 악이 아니고, 무지하지 않은 것도 선이 아니지만 무지하지 않은 척 하는 무지라면?

그게 https://arca.live/b/bluearchive/72555217 이 념글처럼 니체에 대한 무지를 확대, 재생산하는 글이 "병신" 인 이유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니체가 니체에게 그랬고 지져스도 자신에게 그랬듯 "누구나 병신같은 구석이 있기 때문에" 수습 가능하다


아니 그럼 이-글 쓰는 너도 병신이네? ㅇㅇ 병신이다. 굳이 쓸데없이 시간내서 피곤하게 이-글 쓰는 이런 행위는 병신짓이다. 하지만 꼴려서 하는 일은 모두 병신짓이 아닌가?

= 병신짓에 의미가 없을까? 병신같은 글을 쓰는 실수, 실패를 저질렀다고 인간이 영원한 실패자가 되라는 법은 없다!

병신짓을 했으면 다음번에는 보다 덜 병신같은 짓을 하면 되는거고 + 오히려 병신되기를 꺼리며 가만히 있는 것이 잘못이다

= 그러나 가만히 있는 자는 언제든지 움직일 수 있는 것처럼 그 또한 잘못이나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는 게 니체의 핵심이다


그래서 성경처럼 자신의 절대적인 입지를 주장하고, 위의 념글처럼 뇌피셜을 오피셜인 것처럼 "~안 된다" 라고 박아둔 모든 글은

스스로 자신이 뇌피셜에 불과하며 그럴싸한 근거들을 가졌을 뿐임을 끊임없이 인식해야 하고,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야만" 한다

= 그럼으로써 인간은 성장하고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해도 100% 똑같이 되풀이하는 일은 없어진다는게 병신같은 글들의 가치다

지져스조차 틀렸을 수 있고 니체는 아예 자기한테 오줌을 쏴갈기라고까지 강도 높여 "서로가 서로를 까야" 한다고 강조했으니,


그게 없다면 인간은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인식하지 못하고 다른 인간들도 이걸 무지성 수용하면서 걷잡을 수 없이 꼬이게 된다

= 이-글 또한 고병권 아재나 강두식 아재, 본인이 한창 신세진 대우고전총서 니체 전집의 박찬국 아재가 가진 한계점을 공유하니,

바로 이 사람들 전부 "그래봤자 사람" 이라는 점이며 그럼에도 이분들은 학자이기 때문에 자신이 "틀릴 수도 있음을 알고 있다"

= 이-글도 이분들이 했던 얘기를 이해할 수 있게 풀어쓰고 예시를 들어본 것이므로, 충분한 근거를 가졌지만 여전히 "틀릴 수 있다"


하지만 꺼무위키 토론보다는 전공서적과 랩실먼지를 주워먹으면서 배우고 풀어쓴 것이 좀 더 "그럴싸하다" 는 건 명백하지?

사실 이-글보다 더욱 좋은 것은 목사님들처럼 자기 입장 상 특정 관점의 절대적인 타당성을 전제할 수 밖에 없는 분들 제외하고

도서관 아무 데나 가서 직접 니체를 읽어본 다음에 자기가 읽고 느낀 점을 다른 학자들의 주해나 비평을 비교해보는게 최선이다


그리고 거기서 니체만 읽을 게 아니라 온갖 학자들의 연구를 최소 대학교양 수준까진 체득한 상태에서 시작하는 연구가 바로

비교문학, 비교언어학과 함께 비교종교학이 인문분야의 학제적 연구 특화로 같이 다니는 분야이자 인생꼴박하기 딱 좋은 분야다

앞에서 괜히 캠벨이 "니체 정돈 읽고오셈^^" 했다는게 시발 이 바닥이 개씹마이너판인 인문학에서도 존나빠요엔만 모인 이유다





6. 디오니소스가 구한 강도들은 누가 죽였나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루이스 얘기를 좀 더 해보자면...


니체 바로 다음 세대의 "뒤따라온 자" 로서 20세기 초중반에 활동한 C.S. 루이스야말로 니체가 바라던 "니체를 뛰어넘는 자" 였다

"정반대의 주장을 펴는 사람들이 자신이야말로 기독교를 옹호하기 위해 싸운다" 라는 말을 니체가 들었다면 굉장히 기뻐했을거임

신학계에서도 니체 -> 루이스는 공통점이 많다는, 비교종교학과 가까운 입장인데 이게 2010년대 기준이라 지금은 어쩔지 몰?루?



일단 마따끄 전도사님도 철학자 김형석과 소설가 C.S.루이스를 인용하신 만큼, 이-글도 철학과 신학 사이의 문학 작품,

<나니아 연대기>처럼 철학이자 신학의 공통점에서 만나는 작품이자 "새로운 시대의 신화" 로서 문학적 텍스트의 가치가

<오이디푸스 왕>처럼, <일리아스>처럼, <길가메시 서사시>처럼 "앞선 시대의 이야기를 새롭게 쓴 이야기" 가 되었는지


병신같은 꺼무위키 사관들이 대놓고 서사시이자 비극인 <오이디푸스 왕>을 문학이지 신화랑 별개라고 본 헛소리 대신에

캠벨이 직접 니체의 영향을 받았고 니체 책을 읽어보라고 했던 것처럼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이 등장한 1949년 이후,

"모든" 현대 시나리오 작법이론의 기반이 된 것이 신화연구이자 이건 아리스토텔레스도 <시학>에서 똑같이 반복한 만큼

"모든 문학 작품은 그 시대의 사회적 맥락과 작가의 내면을 반영한 신화이다" 라는 객관적 사실부터 확실히 짚고 넘어가자



니체가 정설임? 성경이 정설임? 이라고 따지는 것 자체가 병신놀음이라는 건 굳이 더 다룰 필요가 없을텐데

그럼에도 아득바득 "ㄴㄴ 아뉴스데이 나왔고 세번부활 나왔으니까 가장 확실한거 성경임" 하는 헛소리 대신

모든 신화 = 문학 작품이 그렇지만 딱 하나 유일신교만은 부정하는 신화이자 문학 작품 읽는 법을 알아보자


챈질하는 몰붕이들 보라고 쓰는거니까 당연히 챈에서 존나많이 다룬 내용이고 아예 따로 빼서 정리한 내용인데

근첩들마냥 꺼무에 박제함 ㅅㄱ 이거 한 마디도 없이 돚거해가는 병신들이 그런 걸 신경이나 쓸까 모르겠으니까

딱 한 마디로 다시 한번 더 정리하면 "시발 신화가 문학이 아니면 길가메시 서사시는 왜 서사시겠냐 병신들아?"

= 아리스토텔레스도 Mythos Logos Nomos 를 구분했고 이걸 구분 안 하는건 Logos 를 신으로 보는 성경뿐이다


그러면 문학적 모티브는 종교적 모티브가 될 수 없을까? 이야기(mythos)> 문화(logos) > 종교(nomos)니까 가능함

그러면 종교적 모티브는 철학적 모티브가 될 수 없을까? 시발럼들아 그럼 왜 급식시절에 "교부철학" 이라 배우겠냐?

그러면 철학적 모티브는 과학적 모티브가 될 수 없을까? "과학철학" 만든게 니체 이후에 등장한 토머스 쿤이다 시발...

그래서 비교종교학적 모티브 >= 문학적 모티브가 성립하는거고,


[Interview] 할리우드 시나리오 구루 크리스토퍼 보글러 “사람들은 영웅 이야기로 자기 삶을 비춰본다”

그래서 캠벨의 연구는 20세기 중후반에 할리우드 시나리오의 파파, 크리스토퍼 보글러의 이론으로 정립된거고

괜히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얘기가 용하신 대학교 동아리 시절부터 나온게 아닌 만큼 "씹덕감성의 기준" 이다

= 당연히 캠벨의 오류와 한계를 계속 수정하고 보완해온 비교종교학으로 "우리 시대의 신화" 를 바라보는 경우에


전설 속의 영웅이 현대의 신화인 게임의 용사로 돌아왔다는게 그냥 모든 대화에서 드러나는 아리스 젖보똥처럼

G-Bible 은 성경을 만든 것이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관점 = 그리고 이게 종교의 신을 부정하지는 않는 관점인

비교종교학이자 비교문학의 관점에서 본 "우리 시대의 이야기" 이므로 그렇게 꼴리는 뇌피셜을 굴릴 수 있는거임

= G-Bible 에서 나오고 밀레니엄에 대한 편견이 사라졌다는 덧글처럼 "사랑" 만큼은 변함없이 늘 똑같았으니까!



그래서 꺼무위키에서 지금까지 쓴 뇌피셜 말도 없이 돚거해간 병신은 대답하지 못한 걸 여기선 알 수 있으니,

제우스가 크로노스로부터 숨어 살고 자애로운 염소 아말테이아의 젖을 빨면서 어린 시절을 지낸 낙소스 섬

죽음과 부활을 경험하고 어른이 된 디오니소스가 올림포스의 몇 안되는 인간 출신 신이듯이 고향으로 가다가

배에서 만난 강도들한테 돛대에 매달리자 포도나무의 신으로서 배를 통째로 포도나무로 바꾸고,



그리스의 신이라면 으레 그렇듯이 냅다 죽이면 그만인 것을, 강도들에게 돌고래의 몸을 주며 풀어주었으니

그것도 디오니소스의 고향인 낙소스 섬으로 가던 중에 일어난 일이며 이들의 후손이 바로 옆의 크레타 섬에

유럽 최초의 문명, 미노아 문명을 세우게 된 이들이자 돌고래에서 다시 인간이 되었다는 은유가 에우로페임



그리고 낙소스 섬이 바로 그 테세우스가 자신은 아테네의 왕이 되러 미케네인들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아리아드네를 유기한 바로 그 섬이고, 그래서 미노아인들은 아리아드네는 명계의 여왕 페르세포네로 여겼으며,

미케네인들이 크레타 섬을 침략해 미노아 문명을 멸망시켰다 = 이게 테세우스와 아리아드네 신화에 반영되었고

이후 폴리스 그리스 시대에 다시 정립된 세계관에서, "길잡이의 신" 이자 "넝쿨지팡이의 신", "경계의 인도자 신"

= 헤르메스의 탄생으로 이어지며, 폴리스 그리스 시대가 라미아 전쟁으로 끝난 이후 헬레니즘 시대가 되면서...



짐승 거죽을 뒤집어쓴 디오니소스의 여신도를 형상화한 헤르마누비스로 습합된다는게 비교종교학의 관점이다

디오니소스의 넝쿨이 휘감긴 지팡이(Thyrsus)는 당시 지중해 전역에서 널리 쓰인 젖가슴의 여신이 쓰던 것으로

보통 뱀이 하나 휘감긴 것은 이시스를, 둘이 휘감긴 것은 네프티스까지 더한 것이며 서로 큰 의미 차이는 없었고

당연히 지중해의 일원인 만큼 아론의 싹튼 지팡이, 모세의 놋뱀과 십자가, 세례 요한의 두루마리 지팡이가 된다


그리고 이 눈나들이 아누비스와 습합이 가능했던 이유는? 마치 헤르메스가 그랬던 것처럼 이분들의 역할은

유목민 계열의 침략자 신을 견제하는 것이었고, 그리스에서는 헤르메스가 아폴론의 양 떼를 도둑질한 신화,

슬라브에서는 벨레스가 페룬의 가축을 도둑질한 신화로, 이는 둘 다 원시인도유럽 신화의 침략을 받아서다

= 그래서 이 눈나들이 "유목민의 아이에게 농경민의 문화를 가르쳐준" 것의 상징이 위 그림에 드러난 것으로



<박코스 여신도들>에서 나오는 것처럼, 유목민 출신의 지배자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광기의 무리와 같았지만

실상은 농경민들의 신화에서 "애도하되 행복을 기원해주는" = 포도나무에서 죽은 소년을 사랑한 여신들의 후예,

삶의 원동력으로서 오늘날 박카스의 어원이 되기도 하는 "기쁨" 으로의 인도자들이자 평범한 이들의 수호자였다

= 그래서 오직 디오니소스만 유일하게 메이저한 신들 중, 네로 황제의 똥꼬쇼처럼 권력에 끌어들일 수가 없었다


애초에 그 본질부터 유목민에 의해 정해진 사회 질서에 끊임없이 저항하는 이들이자 결정적으로 여자들이었는데,

아테나만 보더라도 여자 취급 어땠는지는 뻔하고 + 로마 제국 시대에 "처녀" 의 개념이 도덕으로 강제된 것만 봐도

이분들이 구태여 지배자들에게 고개 숙일 필요 없던 진정한 "초인" 이나 다름없었겠지?



그래서 원시 인도유럽어가 피지배층인 농경민의 문화 앞에 끝내 굴복하고, 농경민들은 그들의 본래 미덕인 용서를 베풀었다

보다 포괄적이고 본질적인 "사랑" = 젖가슴, 보지, 똥꾸멍, 겨드랑이, 자궁덮개살까지 정신없이 쭈압쭈압하는 "연인의 사랑"

= 태양보다 먼저 떠오르고, 하늘에서 일곱 별들 중 유일하게 "태양의 질서를 거슬러서" 다른 별들과 다함께 빛나는 여신님이

"문을 여는 자" 로서 가나안에서 저승길을 열어젖힌 아스타르테이자, 헤카테이자, 에오스이자, 아프로디테이며 "이시스"였다


결국 모든 신화에서, 히브리 민족 신화에서도 가나안의 지혜로운 젖보똥의 순애질싸섹스를 즐기는 "여신" 하와를 등장시켰고

쾌락을 위한 섹스를 죄악이라 정했지만, 그럼에도 그게 인간의 본질인데 어케 없애겠음?

그래서 지져스에게 이르는 다섯 명의 여인들은 하나같이 창녀이거나, 창녀로 변장했거나, 시어머니의 가르침을 따르거나,

강간을 당했건 꼬셔서 불륜했건 밧세바를 거쳐야 솔로몬이 등장하는 등 "사랑" + "지혜" + "화합" 이라는 공식을 반복한다

= 기어이 "마리아" 조차 둘로 나눠서 한쪽은 성모로, 한쪽은 "죄 많은 여인" 으로 끌어내리기에 이르는데,


바로 그 지점이 비교종교학에서 유일신교와 문화로서의 기독교를 구분하는 이유랬지?

성직계층의 주도로 교리를 체계화하려는 시도는, 필연적으로 성직계층이란 특정 조건에 국한된 특권계층과 다름없기 때문에

= 독신 + 금욕 + 남자들만 허락된 성직계층이 주도하던 모든 종교가 그렇듯이 "어머니로서의 여신" 에 편향된 해석에 이른다

문제는 모든 여자가 어머니는 아니고 어머니도 그저 어머니이기만 한 건 아니지?



(지금 기준으로 보면 이것도 너무 고전이지만, 고전에는 그만한 범용성이 있으니까 고전이 된 거다)

독일의 종교학자 Volkhard Krech 께서 제시한 종교의 교리 분화 과정은 성직계층이 주도하는 내적 관점과 그 바깥의 외적 관점

= 유일신교에서는 히브리인과 가나안인의 관계로 시작했고, 지져스 직전에는 바리새&사두개파와 에세네파의 관계로 이뤄졌고,

유일신교 전체를 포괄해서 본다면 "하느님 아버지" 와 "중보자 마리아" 의 관계가 각각 교리와 문화의 상호작용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유일신교는 크게 "모세오경의 권위를 바탕으로 교리를 수정, 해석, 반포할 수 있는 성직계층 중심의 종교" 라 정의되며

꺼무위키식 표현으로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 라는게 성서비평학이나 신학이 아니라 비교종교학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의미다

만약 모세오경을 부정한다면? 무려 원죄론과 창조론을 부정하는 셈이니 그때부터 그건 더이상 같은 종교라고 부를 수 없겠지?

= 이게 중요한 건 모세오경이 율법에 권위를 부여하고 + 성문화된 율법으로 구체적 명령을 내리며 + 어기면 받는 처벌이라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에서 보면 유일신교는 노모스(Nomos)가 더욱 체계화되어 시대가 바뀌어도 변화를 쉽게 수용하지 않는

= 항구성(permanence)을 극대화한 것으로 헬레니즘 사회에서 통용되던 어떤 분류도 포함되지 않는 극단적인 수준의 별종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 신화(Mythos)옛이야기로서 교훈을 전해주는 느슨하고 범용적인, 시대 변화가 쉽게 반영되는 반면에,

로마 시대까지도 오직 히브리인들만 키토스 전쟁까지 벌이면서 "별종" 의 위치를 고수했다는 걸 이미 여러 글을 통해 설명했다


이쯤하면 왜 비교종교학이 니체에게서,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이어받은 관점을 설명했나 대충 감이 오지?

니체가 비판한 것은 절대화된 권위에의 도전을 허락하지 않는 유일신교의 교리이지, 지져스처럼 사람마다 다르게 설명해주신

= 노모스가 로고스를 자처하며 정체된 것을 비판한 것이지 로고스로서 문화, 뮈토스로서 이야기 속의 지져스를 부정한게 아님

니체의 아리스토텔레스 비판도 유일신교처럼 노모스가 정체되어 "귀족이 제 본분을 망각하고 변질되는" 사태를 예상치 못한거다


그렇다고 니체에겐 한계가 없었느냐? 그게 비교종교학에서 니체를 비판하며 특히 21세기에 들어서 재발견되는 중인 "여신들"

= 중요한 건 디오니소스가 아니라, 니체가 언급만 하고 제대로 풀어내지 못한 아리아드네, 또는 여러 번 언급된 "마녀" 키르케다

니체에게 변화는 <선악의 저편>과 거의 동시대에 출판된 19세기 말의 프레이저가 쓴 <황금가지>에서 범한 오류와 거의 같은데,

이게 발견되기까지는 1949년 나온 캠벨의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도 놓쳐버리면서 1980년대 이후에나 제대로 조명받게 된다


그리고 눈치빠른 독자라면 이제 슬슬 왜 앞에서 루이스를 언급했는지도 감이 오지?

<나니아 연대기>에서 지져스처럼 부활하는 아슬란은, 어째서 "사자" 이자 그것도 "어린아이에게 돌아오는 사자" 일까?



눈치챘음?

<나니아 연대기>에서 두 자매는 바로 이시스와 네프티스였고, 헤카테와 데메테르였고, 아프로디테와 페르세포네였으며,

<요한복음>에서 요단 강 인근의 베다니아에서 나자로를 부활시켜내기 전 "애도" 를 통해 히브리인들에게 "사랑" 을 보여준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처럼 "애도하는 두 자매" 의 신화가 얼마나 인간의 본성인 "사랑" 의 모티브인가를 보여주는 캐릭터임



눈썰미가 좋다면 영화판 나니아 연대기에서 아슬란루시(Lucy)가 만나는 배경에 핀 초목과 꽃들의 상징성도 보일거다!

그리고 어째서 아슬란은 다른 야수도 아니고, 아주 오래 전부터 샛별 여신의 힘을 상징하는 바로 그 "사자" 로 등장했으며,



만약 지금까지 쓴 뇌피셜을 꾸준히 봤거나, 또는 도상학(아이코놀로지)에 관심이 생겼거나, 또는 미장센에 대해 알고 있다면

많은 이름 중에 희생하는 남자 곁에서 태양빛을 맞이하는 여자의 이름에 그렇게나 "루시(Lucy)" 란 이름이 붙는지 짐작가지?


황소의 뿔처럼 굽어진 달대를 바꾸는 힘이자, 그러한 변화에는 희생이 따름을 알고 있으며, 그럼에도 나아가려는 의지

이렇게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지구상에 사는 문명사회의 구성원인 이상 수없이 반복된 일정한 의미의 상징을 가리켜

전문용어로는 "원형적 상징(archetypal symbols)" 라고 부르며 니체가 문헌학과 신화학과 심리학에서 동일하게 발견한 개념임

= 그래서 오늘날에도 이 용어는 각각 현대문학, 비교종교학, 정신분석학에서 서로 거의 비슷한 개념으로 쓰이는 중이다



당연히 인류문명에서 일관적으로 반복된 상징이라면 타로카드 또한 포함되겠네?

수많은 게임 시나리오에서 타로를 모티브로 쓰고, 비교종교학에서 타로의 상징성을 연구하고, 정신분석학에서도 쓰는 이유는

(솔직히... 정신분석학은 엄밀히 말해서 인문학이나 미학에 가깝지만) 타로에서 등장하는 상징이나 성경이나 신화나 일정하며,

그 끝에는 언제나 젖가슴 빵빵하고 유륜부터 유두에 겨드랑이까지 훤히 보여주시는 맨발의 여신 모든 걸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럽 최초의 문명이자, 헬레니즘의 기반이 된 크레타 섬의 미노아 문명은 같은 상징성을 같은 시대에 공유하던

가나안 지역의 여사제들이자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동쪽 = 바빌론의 문화에 정확히 반대되는 방향을 지향한 저항자들,

제국의 압제에 맞서 싸워 탑을 무너뜨린 이들이며 그래서 가나안에서도 우트나피쉬팀의 이야기가 발견되고 있는거고

그래서 미노아에서도, 가나안에서도 "새벽의 여신" 이자 "사랑의 여신" 이며 "지혜의 여신" 께서는,



맨발의 여신이자 더 본질적으로는 나체의 여신, 나아가 보지벌릉벌릉애액줄줄자궁큥큥키스쮸압쮸압질내사정퓻퓻♥순애섹스의 여신이다

특히 (진짜로) 맨발이라는 점이 아주 중요한데, 이분들은 농경민의 여신답게 유목민에겐 부족한 물의 여신들이었다고 이미 여러 번 말했지?

그리고 알다시피 물은 분명히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지만 고정된 실재보다는 흐르는 유동체



그래서 자유의 여신은, 아테나+아르테미스-에일레이테이아-엘레우테리아-리베르타스로 이어지는 여신답게

자유, 평등, 그리고 무엇보다도 박애의 이름으로 또다시 돌아와주신 커다란 젖가슴과 맨발의 여신님 되시겠다

그분은 여신이지만 복종의 대상은 아니며, 그러나 분명히 사람들을 이끌어주시고 또한 명령이나 의무가 아닌,



마치 축제처럼, 배고픈 자들이 찾아오면 이삭으로 배를 채우고 고단한 자들도 찾아와 푸른 연꽃의 향기에 취할 수 있으며,

떠나는 자에게 행운을, 머무는 자에게 행복을 베푸는 "전능하지 아니하고 전지하지 아니하나 언제나 사랑을 베푸는 여신"

= 시대를 막론하고 누구나 원하는 가장 본연의 욕망의 대행자로서, "행복해지고 싶다" 는 욕망을 이루어주는 여신님이니,

교리가 아니라 오직 문화에서만 존재하므로 시대마다, 지역마다 언제나 다르지만 일정한 모습으로 등장한 "이시스" 이다


"무조건적인 사랑의 여신" 으로서 이 여신은 괜히 "모든 여신의 여신", "수 천의 이름의 여신" 이라 불리는 여신이 아니며

엄밀히 말하자면 유일신교에서 말하는 그런 "신(God)" 의 개념보다는 "신격(Deity)" 의 개념이라 지칭하는 편이 적절한데

= 유일신교의 교리와 함께, 예컨대 가톨릭이나 정교회의 "전승" 에서 등장하는 성인이나 성모 발현이 정확히 이에 해당한다


 

그래서 기적의 메달과 신왕국 이집트의 섬전암 쇠똥구리는 둘 다 부적(Talisman) 문화의 대표적인 사례로서,

죽은 자에 대한 애도행복을 빌어주는 마음을 상징하기 때문에 둘 다 내세의 안식을 보장해주는 역할이었고

아누비스의 심판에서 암무트가 숭배받지 못한 것처럼, 두 부적 모두 "심장" 과 "진실함" 의 상징으로 다뤄졌다


누군가는 이걸 "기독교가 이집트를 베꼈다", "성모 마리아를 숭배하는 가톨릭은 이교의 것이다" 따위의 말들로

그 본래의 의미를 훼하려 하겠지만 심장이 없는 인간은 없으며 사랑할 때 심장의 두근거림은 누구나 경험하듯이

가장 진실된 단 하나의 진리가 "있다면" 그것은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들이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 일 것이다...


물론 이것도 어디까지나 인간이 상상해낸 거짓말을 써서 증명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관념을 형용하는 거랬지?

= 그렇다면 이런 상상력의 산물이 시대를 막론하고 유사하게, 일정하게, 맥락을 따라갈 수 있게 반복되고 있다면

그것만큼 인본주의 기독교, 곧 21세기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이 에서 실천하려 노력하는 보편적인 사랑 아닐까?


그렇기에 오직 사랑만이, 그것도 가장 열렬하고 어찌보면 이기적인, 그러나 분명히 이타적인 "기쁨을 나누는 사랑",

나의 기쁨을 바라듯이 타인의 기쁨을 바라고, 내가 기쁘고 또한 타인이 기쁘며, 그렇기에 "사랑을 나누는 순애섹스"

= 아기만들기가 목적이 아닌 쾌락과 절정과 황홀함 속에서 의도치 않게 태어난 아이들이야말로 "자유로운 아이들",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태어날 때부터 세상에 내던져진" 아이들이기에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존재의 자유를 갖는다





7. 기도 문화와 사랑의 여신에 대하여



니체가 (한계가 명확하지만) 진리를 여성이라고 본 것은, 최소한 지중해 문화권에서 비롯된 사랑의 여신이라 본 이상

보들레르의 <이방인>에서 등장하는 불멸하는 미의 여신으로서 모든 예술가에게 시대를 넘어선 사랑 = 아름다움으로

역동적인 불멸성 = 불변하는 것이 아닌 끝없이 변화하며 죽고 새로 거듭나기를 반복하는 존재로서 불멸하는 이들이다

= 그래서 "이시스" 계열의 여신들은, 바다의 별이자 하늘의 여왕이며 상지의 보좌라는 호칭을 공유하는 "마리아" 처럼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중보자로서 자신이 타인을 위해 보내는 기도와, 그러한 기도를 올리는 자신의 본심

= 타인의 행복을 보며 자신이 행복을 느끼고 싶다는 그 이기적인 마음이 이타적인 행동이 될 수 있게 해준다

마치 신화의 영웅이 해피엔딩을 맞이하길 바라는 마음처럼 사실 결말은 이미 정해졌어도 행복을 바라는 마음

= 자신을 속이고 기만하는 인간의 "가면" 을 뜻하는 여신이 이시스-마리아라는 무조건적인 사랑의 여신이다


뭐 굳이 이시스-마리아라는 개념을 어떤 이유로든 그다지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고 느낀다면, 그런건 아무래도 좋다!

까짓거 이시스는 이미 한참 전에 없어진 신이고, 마리아를 여신이라 부를 수 있는 건 크리스천이 아닌 사람들뿐인데,

구태여 우리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의 "상징" 을 두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의 범위에 제한을 두는 게 의미가 있겠음?

그거야말로 꺼무위키에서나 할법한 짓이지! 


그래서 이런 "사랑" 을 가리켜 자신이 부르고 싶은대로 부른다고 해서 아무런 문제될 것이 없고 + 없어야만 한다!

"무조건적인 사랑" 이란 말이 참이 되려면 어떤 경우에도 그 본질이 사랑이며 그 이상의 의미는 필요없어야 한다

= 물론, 현실적으로 사랑을 그저 공상이 아니라 행동에 옮기게 된다면 반드시 어떤 욕망의 충족을 위한 것이 되며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해소하는 과정에서 "거짓말" 을 꾸며내고 스스로 그걸 믿는/속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그게 아츠코가 쓴 "가면" = 아뉴스 데이로서 희생을 선택한 상징이자, 타인을 위해 힘이 되고 싶다는 욕망의 상징이다

무명 사제들의 기술로 만들어진 원수의 도구조차 보지도 애널도 말랑말랑한 아츠코의 손에서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 이렇게 부여된 의미는 아츠코 본인의 행동을 통해 실현되며, 이렇게 아츠코는 자기만의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냈다



그렇다!

"꿈꾸는 것" 이란 결국 "자신이 원하는 것" 이므로, "행복해지고 싶다" 는 욕망의 일환이다

= 그렇기에 행복한 미래를 자유롭게 꿈꿀 자유, 욕망할 자유는 무려 인간의 존재의의로 이어지며,

아무리 금욕으로 억누른들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미를 욕망하는 것조차 금욕할 순 없는 노릇이다



심지어 아츠코는 가치를 창출해낸 것에서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이 원하는 것 =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찾아간다

삶이 다하는 순간까지, 기찻길을 걸어가며 "아무도 가지 않은 길" 에서 자기만의 꽃을 피워내는 아츠코의 모습을 보며

곁에서 두려워하거나 주저하는 보지들, 히요리와 미사키에게 자상하면서도 단호하게 "두려워 말라" 라고 하는 것처럼

이 이야기에서 아뉴스 데이는 센세가 될 수도 있고, 아츠코가 될 수도 있고, 언젠가 사오리도 마찬가지로 해낼 수 있다


차이점은 다만 자신이 책임지기를 선택했을 때, 책임질 수 있는 능력이 있냐 없냐일 뿐이니까

아이들이 진심으로 원하는 꿈을 이룰 수 있게 도와주는 센세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원하는 "행복해지고 싶다" 는 소망을

마치 지져스께서 서로 사랑하면 자연히 모두가 나의 제자임을 알 것이라 말씀하신 것처럼 "행복하게 살아라" 라는 일이

혼자만으로는 이뤄질 수 없기에 자신의 행복을 욕망하여 타인의 행복을 이뤄주라는 참으로 간단한 말씀의 실현이다


이렇게 "가면" =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타인이 필요하기 때문에, 잠시 자아를 "분리" 시켜주는 것은

"역할연기" = 타인의 욕망을 실현하는 것처럼 "자기기만" 을 하는 것이 중요하며, 이런 가면이 자신의 자아가 아니란 것

= "가면은 가면에 불과하고, 거짓말은 거짓말에 불과하다" 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게 진정으로 서로를 사랑하는 길이다

쉽게 말해서 타인을 사랑하려면 자신을 속여야 하고, 자신이 지어낸 거짓말이 거짓임을 알면서도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8. 히후미의 손이 이룬 대딸이라는 기적



<파우스트>에서 악마의 힘을 빌려 낙원을 건설하는 파우스트의 행동은 선할까, 악할까?

선도 악도 아님. 하나 확실한 것은 이것이 존나게 이기적이고, 또한 자기기만적인 행위이며, 그러나 행복한 일이란거다

파우스트는 자기자신을 속여서 타인을 위한 낙원(=실제로는 자기만족을 위한 낙원)을 세웠으며, 그래서 행복해진건데

= 자신의 거짓말이 자신의 행동으로 실현되면서 그건 진짜로 타인의 행복까지 이뤄줄 수 있는 낙원으로 만들어져서다!


그렇기에 우리는 끝없이 낙원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음을 확실하게 알고 있는 상태에서 "믿어야 = 거짓말해야 한다"

겨드랑이가 섹시한 세이아가 말한 것처럼 낙원의 존재 증명은 애초에 불가능하고 가능한 건 그저 "믿을 뿐이다" 인데

이때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 아리우스처럼 바니바니하게 살아갈 수도, 히후미처럼 블루 아카이브! 하게 살아갈 수 있다


물론 믿음은 결코 현실이 될 수 없기에 지어낸 거짓말이고, 그걸 현실에서 실현한다는 건 진짜 끔찍하게 고통스러울거임

다른 것도 아니고 무려 현실 그 자체에 맞서는 일이니까 = 하지만 그렇기에 어떻게든 자신의 믿음, 자신의 거짓말을 향해

딱 한 걸음이라도 더 가까워지는 순간, 인간은 거짓말에서 새로운 진실을 만들어버리는 개쩌는 "기적" 을 이뤄내는거다!



이 땅에 기적을 이루는 것은 신인가?

뭐, 그렇다고 볼 수도 있음. 하지만 그렇다고 기적이 신의 현존을 증명할 수는 없고, 무엇으로도 불가능함

기적이 관측 가능하고 경험 가능하다는 사실은 기적 또한 결국 인간에 의해 감각되는 세계의 일부란거니까

= "기적처럼 보이는" 모든 일은 대딸받으면 정말 기분좋을, 모든 역경을 헤쳐온 히후미의 손에서 이뤄진다


그리고 같은 손으로 히후미가 증명할 수 없는 센세의 마음 속에 진심으로 황홀하고 행복한 느낌을 주듯이,

감각되는 세계의 일부라 할지라도 플라톤마냥 거짓이라 무의미한 것은 결코 아니며, 오히려 이게 현실이다

= 닿을 수 없는 낙원, 보이지 않는 신은 "전부 거짓이다" + 그렇기에 오히려 현실의 의미는 무한해질 수 있다


히후미에게 대딸받아봤자 사실 남들 손이랑 크게 차이 없는 손인데 그렇게 기분좋은 이유는 뭘까?

센세가 보지들마다 한명한명이 서로 다른 개성이 있다는 거짓말을 스스로 꾸며내어 스스로 믿기/속이기 때문임

그런데 센세의 성욕이 히후미의 손에서 행동으로 실현되는 순간? 성욕은 성욕 이상의 "아름다움" 을 가지게 된다



생각해보자. 히후미의 보지가 정말로 다른 보지들에 비해 본질적으로 다른, 무언가 고유한 것일까?

자지를 넣고 문지르고 흔들고 쑤셔주면 앙앙 소리내면서 기분좋아하고 질중에 내면 기분좋아진다는 건 다 똑같다

= 하지만 우리가 히후미랑 순애섹스를 한다면, 보지는 "사랑하기 때문에" 라는 증명 불가능한 거짓말로 특별해진다



"사랑하기 때문에" 라는 어처구니없는 환상 하나가, 그저 서로 다른 두 사람이 그걸 "믿기/속아주기" 때문에

서로의 감각에 지극히 자명한 사실로서 너무나 황홀한 쾌락을 안겨주며 온몸이 벌벌 떨릴 정도로 경험할 수 있다

그때부터 히후미의 육체 "사랑하기 때문에" 본질과는 다른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며 "온몸이 보지가 될 수 있다"



모든 것이, 그야말로 히후미라는 하나의 존재를 이루는 모든 것이 "사랑하기 때문에" + "보지가 될 수 있다"

히후미의 땀냄새조차 히후미를 사랑한다면? 그건 향기가 되며, 실제로 킁카킁카하면 너무너무 행복해진다!

히후미의 눈물이 다른 사람의 눈물보다 훨씬 감정을 요동치게 만드는 것은? "히후미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 그저 젖보똥을 좀 더 기분좋게 "착취" 하고 싶은 욕망을 이룰 뿐인데도 인간은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낸다



참으로 자명한 사실이지만, 거기서 사람은 행복해지며 무엇보다도 "서로 행복해진다"

타인을 기꺼이 자신의 욕망을 위해 착취하면서 + 자신을 기꺼이 타인이 착취할 수 있게 내어주는 순간부터

"연인" 이라는 너무나 쉽게 깨어질 수 있고 심지어 덧씌울 수도 있는 "가면" 덕분에 "사랑" 이 성립하게 된다

그토록 욕심덩어리에 이기적인 인간이 사랑할 때는 그토록 헌신적일 수 있을까? 그게 "가면" 때문이란거다



이 자리에 선 4명은 섹스가 너무너무 좋고, 스컬맨이 너무너무 좋고, 떡인지가 너무너무 좋다는 "욕망"

=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이 있기에 페로로가 너무너무 좋은 만큼 친구들을 너무너무 "사랑하는"

아주 개인적인, 평범하기 짝이 없는 마음을 가진 히후미가 그저 최선을 다해 욕망을 이루려 했기 때문



그 자리에 있는 모두에게 "순애질싸섹스를 할 자유", 보다 고상하게는 "행복해질 수 있는 자유" 를 선언하게 된다

자신의 행복이 무엇인지, 자신이 꼴리는 것이 무엇인지는 오직 자기만의 것이며 이는 다른 모두에게도 마찬가지다

무엇이 행복을 가로막는가? 자신이 행복을 느끼는 행위가 좌절되었을 때? 아니다. 자신의 행복을 부정당했을 때다

당장의 욕구불만은 언젠가 해소할 수 있으나, "행복해지고 싶다는 마음" 에서 죄악의 구분이 개입되면 노예가 된다


그것이 강박이고 고정관념이며 유일신교의 원죄론이다

모두를 태어나자마자 죄인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현세의 삶을 벗어나야 할 대상으로, 아무리 현세에 행복하더라도

내세에서 행복한 것만 못하다는 논리로 증명할 수 없는 내세를 안다며 "착취의 절대화" 를 이룬 사제들에게 복종한다

= 심지어 사제들이 죽더라도 사제들이 만들어둔 교리는 남아서 끝까지 인간을 구속하니 얼마나 끔찍한가!





9. 사제들 이전에 기도하는 인간이 있었다



모두에게 그저 "사랑" 을 행하라며 그밖의 모든 규범으로부터의 죄책감에서 해방시켜준 것이 니체가 본 지져스

그래서 니체에게 지져스는 "자유" 그 자체의 의인화이자, 자신의 죽음조차 자신의 자유로 선택하여 실천한 자이다

= 이게 니체만의 관점이 아니라는 건 <요한복음>만 봐도 잘 알 수 있으니, "진리란 너희를 자유롭게 하는 것" 이다



그래서 지져스께서 모든 죄를 대속하셨다는 "거짓말" = 그건 아무도 증명할 수 없고, 단지 믿냐 마냐의 문제다

그런데 마치 "사랑하기 때문에" 라는 거짓말처럼 "지져스께서 우릴 사랑하셨기 때문에" 라는 이 단순한 문장이

그 어떤 고난에서도 자유를 보장하니, 지져스께서는 죽음조차 자유롭게 선택하여 살해를 순교로 바꿔버리셨다!

= 십자가형이라는 처벌조차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의미가 바뀔 수 있음을 보여주신 것이니...



자기자신조차 자신의 욕망 = "이들이 모두 행복해지기를 바란다" 라는 욕망을 위해 희생했음을 깨닫는 순간,

지져스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지져스가 그토록 끈질기게 이루려 한 욕망의 대상이 바로 자신들임을 깨달았고,

그제서야 "다 이루었다!" 라며 자신의 욕망이 이미 실현되었음을 깨달은 지져스의 유해 앞에서 전율했을거다

그게 니체가 지져스가 고귀하고 위대한 이유 =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같은 선택을 했다



그게 바로 니체가 말한 성실함(Integrity) 되시겠다

어떤 상황이더라도, 타협하지 않고 반드시, 무조건 사랑을 행하는 것. 

검은양복이나 베아트리체가 말한 것처럼 센세가 말하는 "책임과 의무" 라는 건 오직 센세만의 생각이다

= 아무도 동의하지 않고 증명할 수 조차 없더라도 센세는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까지 행동으로 실천했다


어떤 의미에서 니체는 칸트의 정언명령이나 데카르트의 생각하기에 존재한다는 발상의 한계를 넘어서서

앞서 살아간 이들(先生)의 유산을 전해받아 새롭게 보완하여 뒤따라올 이들에게 전해준 것이라 볼 수 있다

= 마찬가지로 니체의 유산을 전해받아 새롭게 보완해낸 C.S.루이스도 앞서 살아가는 자(先生)인 셈일테고

이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삶이 그저 다른 누군가보다 앞서 살아가기 시작했다는 사실만으로 갖게 되는"힘"


자신의 삶, 시간, 수명 그 자체가 곧 자신이 살면서 어떠한 가치를 끊임없이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만으로도

뒤따라올 이들에겐 엄청난 영향을 줄 수 있으며 "먼저 태어났다는 사실" 은 절대로 뒤집을 수 없는 사실이니

키보토스에서 선생(先生)이란 존재가 해낼 수 있는 일들은 전능은 아니더라도 "기적" 이라 할 수 밖에 없겠지?


그런데 그러한 기적은 절대로 센세 혼자서 이루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기적을 전해받는 젖보똥이 있기 때문에

= 자신의 욕망에 응해줄 타인이 있기 때문에 실현되며, 이것이 몰루가 "우리들의 기적같은 이야기" 라는 이유다



그래서 지져스께서 세족식 때도 말씀하신 것처럼, 히브리어 YADHA = "상관하다" 라는 의미와 동등한 의미로,

"손을 맞잡고 기도하다" 라는 의미와 함께 "순애질싸섹스를 하다" 라는 의미가 있는 것은 "기쁨을 주고받는 것"

= "나의 기쁨이자 타인의 기쁨을 소망하는 마음" 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사랑이야말로 기도의 본질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풀어쓰면, 신화의 신들은 자연현상의 의인화에서 관념의 의인화 = 어떤 가치의 의인화가 되며

그중에서 "사랑" 이라는 관념은 무언가를 간절히 염원한다는 가치이므로 모든 관념의 의인화는 사랑에서 유래함

= 그리스 신화에서 주신은 제우스지만, 그 제우스조차 꼼짝 못하게 만드는 것이 에로스의 화살인 걸 생각하면 됨


따라서 기도란 가장 이기적인 행위인데, 기도 자체가 무언가를 원하기에 행해지는 욕망의 표현이라서다

하지만 그런 특성이 기도를 가장 이타적인 행위로 바꿔주며, 그런 "가치의 전환" 를 의인화한 것이 "신" 이다

= 직관적인 비유로는 "인간은 타인을 사랑하고 싶어서 신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라는게 기도 문화의 기원이다

중요한 건 이게 기도에 대한 교리가 형성된 과정이 아니라, 체계적인 교리 이전부터 기도하는 문화가 있었단거임


그리고 그 기원이 서구권에서는 가나안의 애도 문화였다

니체는 그 시대의 한계 탓에 폴리스 그리스 신화까지 거슬러 올라가는게 한계였지만 "여신" 을 발견하긴 했고,

루이스 또한 "저물어버린 태양은 달 아래에서 샛별이 되어 아침과 함께 돌아온다" 라는 신화를 발견했다는거임

= 서로 다른 두 문화권의 갈등이 봉합된 이후, 갈등 속에서 세상을 떠난 이들에 대한 사별의 아픔을 애도하는게



미네, 파우스트, 그리고 진명 이야기 - 2편

몰약나무에서 태어난 아도니스(Adonis) = 히브리어로 나의 주님(Adonai)의 어원이라는 걸 계속 얘기했었지?

"필라델피아" = 세계의 배꼽, 옴팔로스를 상징하는 델포이 섬의 "돌고래" 를 계승한 이들이 "스미르나" 와 함께

<요한묵시록>에서 어떤 의미로 등장하는지 되새겨본다면 묵시록이 "행복합니다" 로 귀결되는지도 정리했는데,


길게 풀어 쓴 걸 볼 여유가 없는 몰붕이들도 있을테니까 요약하면, 비교종교학의 관점에서 보면 <요한묵시록>은

<잠언> 31장의 현숙한 여인이 도성에서 거둘 "열매" 처럼 고대 근동의 지혜 문학(Wisdom literature)을 계승한

= 율법서나 역사서 형식이 아니라 <잠언>, <전도서>, <토빗기>로 이어지다가 단절된 "교훈을 주는 이야기" 였다

복음서나 예언서처럼 실제로 일어난/날 일을 진술하는 것이 아니라, 그걸 가장해서 쓰여진 "우화(寓話)" 라는거임



이 분야에서 그 정신이 끊어지지 않고, 교리 바깥의 문화로서 평범한 기독교인들이 계승해온 가장 유명한 흔적으로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롤>에서 스크루지가 과거-현재-미래의 비전(vision)을 보고 깨달음을 얻는 것이 있다

= 당대에 익숙한 상징을 사용한 만큼, 후대의 사람들과 달리 당대의 독자들에게 <요한묵시록>은 딱 이런 책이었음

불지옥은 사실 영원한 고통이 아닌 당대의 식자층이면 누구나 알았을 이집트, 그리스 신화의 부활에 대한 상징으로


지혜가 있는 자라면 알 수 있다던 666이란 상징 또한 "세 번 거듭하는 여섯" 으로서 "일곱" 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

메소포타미아 시절부터 아아아주 오랫동안 통용되어 당시에는 알렉산드리아만 가도 손쉽게 배울 수 있던 상징으로

대충 요약하면 "토성 = 순환의 입구에 들어서며 목성 = 왕은 세 번 죽고 네 번 부활한 끝에 지구로 돌아온다" 는 뜻,

풀어써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기 전에는 으레 나타나는 흔한 인간군상들" 을 가리키는 존나게 단순한 의미였다


"잡혀갈 사람은 잡혀갈 것이며 칼을 맞아 죽을 사람은 칼을 맞아 죽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장은 666 의 표를 받아 죽은 이들이 마치 이스카리옷 유다처럼 "그리할 운명이었기에 그리했다"

= 시대의 과도기 속에서 빚어진 혼란에 희생된 이들은 그 사람이 부덕하거나 악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거고

직관적으로 풀어쓰면 "죽을 사람은 죽고 살 사람은 살 것이니 너무 슬퍼하지도 오만하지도 말아라" 는 뜻이다



하늘에 큰 이적이 나타난다 = 점성술에 대한 지식이 대중에게 보급되지 않고 독점된 사회에서라면

그동안의 세계관이 말 그대로 하늘이 무너지는 = 일식이나 금성의 일면통과와 같은 천체현상에서,

두려워한 나머지 패닉하다 스스로 "사실 별 것 아닌 현상에 의미를 부여하며" 무너져버리게 십상임

세기말적인 분위기가 횡행하면 사회의 무질서함이 껑충 뛰어오르고 치안이 마비되기도 쉬운 것처럼



그저 "일어날 일이 일어났을 뿐" 인데도 사람들은 증명할 수 없는 죄책감에 그만 자멸해버린다는거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에게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의 원인" 을 그럴싸하게 제시해준다면? 그들은 견뎌낼 수 있음

= 예컨대 태양이 달에게 가려진 것이 태양을 쫓는 늑대에게 태양이 집어삼켜져서 그리 보일 뿐이라고만 해줘도

사람들은 안심하며 차츰 패닉에서 벗어나 상황을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러면 정말 흥미롭게도 "적그리스도" 처럼 그 존재가 증명될 수 없는 가상의 존재가 원인으로 지목되는데

그 존재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만 해도 사람들은 "우리가 잘못해서 태양이 가려진 게 아니구나" 라면서

죄책감을 "대속" 받는 상징이 되니 이런 "이로운 거짓말" 덕분에 사람들은 "해로운 거짓말" 에서 해방된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센세가 이뤄낸 "기적" 의 정체, 센세가 가진 어른으로서의 힘이 뭔지 감이 오지?





10. "가치의 전환"



"말장난" 이다.

이 힘은 이번 황륜대제에서 우타하가 말해줄 "패러다임 시프트" 처럼 기존의 관습, 상식, "옳다고 여겨진 것"

좀 더 "설득력 있는" 거짓말로 여러 사람의 믿음을 받아 기존의 가치를 뒤엎고 새로운 가치로 전환해내는 힘이다


이 순간을 위해서 약 33000자에 달하는 빌드업을 쌓아왔다! 

지금 바로 구글 켜서 "가치의 전환 예수" 라고 검색해보고 그 결과를 쭉 읽어보면 바로 이게 니체와 신학의 공통점,

그것도 "어린아이" 라는 상징에서 맞물리는 공통점이라는 걸 볼 수 있으니 직접 검색해보고 그 전율을 실감해보자



"세이아의 겨드랑이보지같다고 믿으면, 세이아의 겨드랑이는 사랑스러워지니까"



상상으로 지어낸 이야기는 어떻게 현실을 바꿔나가는가?

인간이 꾸며낸 거짓말을 "믿는/속는" 것으로 현실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 현실을 바꾸는 것은 거짓말이 아니라, 거짓말임을 알더라도 납득하여 행동에 나서줄 사람이기 때문이다



최종장에서도 이 주제는 다시 한번, 아예 니체가 직접 연구한 <오이디푸스 왕>이라는 "고대 서사시"

= 당연하지만 "신화" 이자 "옛이야기" 로서 그걸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운명의 장난이라는 명목 하에,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사람의 판단으로 단죄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며 "정화" 해주는데

= 이런 카타르시스가 바로 비극의 기능이자 이야기의 기능, 우리가 최종장을 보고 감동받는 이유이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센세의 "부활" = 센세의 무사귀환이자 "타다이마 오카에리" 를 가능하게 해준 "기적" 이란

아로나와 프라나 = 센세를 사랑하는 아로나와 센세를 사랑하는 프라나가 "사랑하는 사람과 다시 만나기 위해서"

= 아주 오래 전부터 인류문명에 반복되어온, 계보를 따지자면 바빌론을 무너뜨린 이들이 가나안에 계승해준 문화,

"애도 문화" 로부터 기원하기 때문에 센세의 귀환은 "사랑""두 명의 여인", 그리고 "바다" 라는 상징을 공유하며...




"딘기르", "이슈타르의 별", "락슈미의 별" 그리고 "베들레헴의 별" 이라고 불린 "인도하는 별" 의 상징으로서

한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시대의 태양 = 내일의 아침을 맞이하라는 복된 소식을 들려주러 온 "샛별" 이 나온다

그리고 알다시피, 샛별 금성이자 태양보다 먼저 저물고 태양보다 먼저 떠오르는 "아름다운 푸른 별" 께서는?



그 장면의 여고생들은 각각 어떤 모티브일까? 에 나온 여고생 9명 전원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초기 왕조 시대의 수메르(기원전 2600년대~2300년대)에서 나온 청금석 판을 든 별의 여신, 쉬루파크의 니사바 찬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사랑" 의 상징이기 때문에, 비교종교학에서 보는 지져스는 그야말로 사람의 아들(人子)이라는 말 그대로

인류문명의 아득한 세월에 걸쳐 증명할 수 없는 수많은 사람의 삶이 쌓이고 쌓이며 계승되어온 "자유" 의 계승자 되시겠다

= 그것이 이 지점에서는 니체와 니체의 연구에 영향을 받은 비교종교학이 같은 관점에서 지져스가 존나쩐다고 보는 이유다



무려 약 250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한 명의 인간이 자신의 온 생애를 바쳐서까지 사라져가던 가치를 실천한거다!

그 사이에 있던 수많은 전임 계승자들이 있었고 + 그들의 생애를 "반영하여" 만들어진 옛이야기 = 수많은 신화에서

지져스보다 앞서 살아간 이들(先生)도 수없이 많았지만, 지져스가 그들 중에서도 정말 독특한 사례로 손꼽힌 이유는

지져스가 그 어떤 신화보다 이런 "여신의 계승자" 를 철저하게 박멸하던 히브리인들 사이에서 계승에 성공해내서다


때문에 지져스는 오직 성경에서만 등장하고 전 세계에서 유일한 대속자도 아니며, 그것이 지져스의 고유함도 아니다

모든 신화를 통틀어서 오직 지져스만이 가진 고유함은 전 세계에서 가장 철저하게 복종을 요구하는 유일신교 속에서

그전에도 그후에도 없을 가장 가혹한 억압 속에서조차 끝까지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타협하지 않고 실천한 것으로

=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종교전쟁을 벌이는 유일신교에서 가장 보편적인 선행을 추구하는 기독교인들과 똑같다!



이왕 사람의 아들(The son of man)이란 말이 나왔으니 잠시 마그리트좌의 <The Son of man>을 감상해보자

카프카의 <변신>에서도 반복되는 "사과" + "비일상화" 의 조합은 <변신>의 그레고르가 바퀴벌레로 변하기 훨씬 전부터

그 시대는 언제라도, 설령 바퀴벌레가 아닌 다른 무엇이거나 아예 변하지 않았어도 언제든 인간소외가 일어날 수 있다고

"시대의 흐름에 휩쓸려가지 않게 발버둥치는 인간" = 자아와 세계의 관계에서 자아의 말살에 저항하는 실존의 상징이다


<골통트>가 자아의 분리나 이미 유기되어 독자성을 잃어버린 자아를 상징한다면, <사람의 아들>은 그 반대격에 해당함

마그리트의 초현실주의는 산업화된 세계에서 도구로 전락한 인간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질문하는 작품으로 이어지는데

좀 더 관심을 갖고 싶다면 "백일몽", "대상으로서의 말(言)", "단어와 이미지" 라는 키워드를 마그리트랑 같이 검색하셈



"For me the world is a defiance of common sense."

"내게 세상이란 상식에 대한 투쟁이다"


상식에 저항하여 보다 진실된 가치, "사랑" 을 찾아내는 인간이 바로 마그리트의 <사람의 아들>이자 니체의 초인이다

관점에 따라 니체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작에 영향을 줬지만 니체 본인은 포스트모더니스트가 아니라고도 말하는데,

그 이유는 니체가 추구한 것이 완전 새로운 미래 = 과거와의 단절, 특히 "신화와의 단절" 을 추구한 포스트모던과 달리

오히려 "복고" 라고 해도 좋을 만큼 고전적인 "로망" 을 추구했기 때문이며 이를 가장 잘 드러낸 것이 "아름다움" 이다



파우스트가 자신의 낙원이 현존함을 깨달았을 때 뭐라고 외쳤는가?

"순간이여, 멈추어라! 너는 참으로 아름답구나!"




괴테의 <파우스트> 결말을 보면 지져스의 자유, 니체의 자유, 루이스의 자유가 여기서도 반복해서 등장할 뿐더러

그것이 지혜, 진리에 도달한 자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이자 절정의 순간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 = 극상의 꼴림이며,



그래서 니체가 말하고 괴테도 말하고 마따끄전도사님도 말하고 지져스도 말하고 디오니소스, 오디세우스, 필레몬을 비롯한 이들이 시대를 넘어서 전해받아 전해준 지혜는

"그럼에도 저항하기를 멈춰서는 안 된다" 라고 끊임없이 일어선 아즈사젖가슴, 보지, 애널, 겨드랑이, 자궁덮개살이 그렇게나 개꼴렸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그렇다! 끊임없이 세상을 살아가며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이 타인과 만나 서로 욕망을 나누고 서로를 착취하는 그 순간이 인간이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순간인거다!





그리고 인간은 절대! 혼자 싸우지 않는다!

당연한 것이 혼자서 이룰 수 있는 욕망보다 서로 함께할 때 이룰 수 있는 욕망이 훨씬 다채롭고, 뭣보다 훨씬 더 꼴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페로로질라 = "우주", 곧 세계 그 자체가 내리는 운명적인 시련에 맞서, 찰나의 순간에 불과할지라도

"세상을 이겼노라" 라고 선언하며 장렬히 사그라들 수 있는 "로망" 의 일원으로 회개한 카이텐져가 나왔으며

또한 같은 역할을 여름 숏애니에서는 <선악의 저편>을 쓴 저자로 등장하는 니콜라이가 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11. 니체와 괴테와 단테의 노래



니체에겐 "만약 진리가 여성이라면?" 이자 디오니소스의 반려자, "길잡이의 신" 아리아드네로 표현된 여신이었고

지져스의 발을 씻겨주고, 지져스께서 부활하시자마자 사도들보다 먼저 찾아간 <요한복음>의 막달라 마리아였으며

파우스트를 구하러 온 것이 메피스토펠레스에게도 손을 내민, 그리스의 여신들의 후계자로서 성모 마리아였으니



게마트리아의 베아트리체는 "이름을 빌려왔다" +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 덕분에 무대장치로 전락해서 추하게 퇴장했고

순례자로서, 지옥(게헨나)에도 다녀오고 연옥(아리우스)에도 다녀오고 마침내 천국에 도달한 단테를 이끌어준 "여신"

= "별" + "행복" 을 상징으로 가지며 센세를 트리니티로 처음 초대해준 미카가 <신곡>의 진짜 베아트리체 역할이었겠지?



좀 더 구체적으로는 8번째 천구에서 가브리엘과 함께 성모 마리아를 만나면서 별과 사랑을 노래했던거다



그래서 방황하는 순례자는 그냥 방황이 아니라 설령 길을 잃더라도 어딘가로 향하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있어야 하고

그의 여정에 그 자신을 소모하는 것은 여정을 이어가길 포기한다는 것이므로 자기자신을 챙기는 것은 굉장히 중요함

= 그런 자신을 희생하는 것은 희생을 통해 무언가를 성취하는 것이므로, 진정한 희생은 그저 소모적이어선 안 된다



오히려 자기희생은 여정에 필수적인 자기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무언가를 이뤄내고 말겠노라는, 니체에겐 가장 강력한 힘에의 의지를 표현하는 행동 중 하나다

C.S.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에서 죽음을 선택하고 태양과 함께 부활하는 왕, 아슬란이 승리를 위해 기꺼이 자기자신을 희생시킬 정도로 강인한 의지를 지닌 것처럼 말이다

당연히 자기자신의 존재가 어떤 위치에 있고, 자신의 선택이 불러올 결과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이 있어야만 그의 선택은 비로소 진실된 것이며 죽음으로써 그는 새로 거듭난다



누군지 바로 떠오르는 젖보똥이 있지? 그게 바로 모에가 메모리얼에서 "선을 넘어서는(The Sublime)" 것에 대해 고민하는 이유다

이건 그만큼 자기 행동이 가져올 결과에 대해 선택을 내리는 순간마다 고민해야만 하고, 모에가 버튼 하나 누를 때마다 흥분하기 전에 망상풀가동부터 굴리는 걸로 묘사됨

그런데 메모리얼에서 모에가 내리는 결론은 앞서 말한 작가들과 거의 유사한 맥락으로 나아가긴 하는데, 결론을 내리는 순간 이사쿠상은 한 걸음 더 나아가보자고 말한다



비교종교학에서 사랑의 기독교의 핵심은 단연코 기도 문화인데, 니체는 이걸 신에게 기도하는 것은 자기자신이 행위자로서 가져야 할 책임을 떠넘기는 것이라 보았지만

비교종교학에서는 이런 기도가 엄밀히 말해서 "신에게 기도하는 것" 이지만, "신을 위한 기도" 는 아니라고 보며 그 이유로 기도의 목적이 기복적인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기복신앙적 측면은 모든 종교의 가장 기본이고, 오히려 이게 없으면 사이비로 흘러가기 딱 좋은 허울뿐인 예식만 있는 종교가 대부분에 그런 종교는 대부분 진즉에 소멸함


이런 기복적인 측면이 중요한 이유는, 기도를 통해 복을 내려달라는 것 같지만 사실 복을 받았기에 기도로 감사해하며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라는 감사에 가까워서다

때문에 마리 메모리얼처럼 마리가 타인을 위한 기도를 올리는 순간, 거기에는 "타인의 행복을 바라는 나의 욕망" 을 보여주는 행위라는 의미가 부여되면서



신에 대한 복종, 운명에 대한 순종의 의무를 부과하는 유일신교의 교리에서 가장 불복종하는 의미의 문화이기 때문이다

= 모든 것을 신에게 맡겨야 하는 죄인의 신분일진데, 어째서 인간은 파렴치하게도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욕망하는가?

니체에 따르면, 아주 간단하다...




다름아닌 지져스께서 인간이 행복을 욕망할 자유를 자신의 목숨까지 바쳐가며 베풀어주셨으니까.




그래서 이 장면, 가장 니체적이고 가장 기독교적이며 가장 신화적일 뿐더러, 까마득히 오랜 세월을 넘어서서

"사람의 아들" = 인류문명에서 전해주고 전해받은 아주 오래된 이야기의 교훈을 잊지 않고 기억한 인간답게,

먼저 살아간 사람(先生)으로서 센세가 뒤따라 살아갈 이들에게 다시 전해줄 "거짓말" = "가면" 은...



(출애굽기 24:1) 야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의 장로 칠십 명을 데리고 야훼가 있는 곳으로 올라와 멀찍이 엎드려 있어라.

(출애굽기 24:2) 모세, 너만 야훼 앞으로 나오고 다른 사람은 나오면 안 된다. 백성들은 아예 너 모세를 따라 올라올 수도 없다."

(출애굽기 24:10) 그들은 거기에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뵈었다. 그가 딛고 계시는 곳은 마치 사파이어를 깔아놓은 것 같았는데 맑기가 하늘빛 같았다.



카스팔루그의 모티브와 에덴조약 이후의 이야기

니체가 지져스의 대속이 특히 특별하다고 본 이유는 비교종교학과 거의 같은데, 히브리인들 사이에서 태어나셨음에도

선택받은 민족의 일원이지만 기꺼이 그 자격을 포기하고 모세 이후로 독점된 사제의 권력에 불복종하는 데 성공해서다

사실은 원죄라는게 증명할 수도 없는 "거짓말" 임을 보여주며, 모든 인간을 "거짓말로 인한 죄책감" 에서 해방시켜주고

"너희가 태어나면서부터 받은 것은 오직 사랑뿐이다!" 라며 베풀어준 것이 "어떤 거짓말을 믿을지 선택할 자유" 란거다



니체는 행복이란 어떠한 행위의 보상이 아니라 행위하는 순간에 느끼는 실체감이라고 보았다

= 여기서 니체가 보는 지져스교리상의 지져스가 구분되는데, 믿으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받은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믿어야 구원받는다는 거짓말" 조차 불필요한 "이미 구원받은 상태로 태어난다는 거짓말" 이란 얘기다

둘 다 증명할 수 없고 단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한다는 문제이지만 니체가 후자의 거짓말이 전자보다 훨씬 좋다고 본 건


결국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는 세상에서 오직 무엇을 믿을지 선택할 수만 있다면,

최소한 삶을 살아가는 동안만은 삶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거짓말을 선택하는 편이 보다 행복에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 그래서 수많은 학자들이 니체를 가리켜 "실존적 불안을 존재의의에 대한 긍정으로 승화시킨 철학자" 라고 하는거임


그런데 무엇을 믿느냐는 "선택의 자유" 가 보장되어야 한댔지?

문제는 원죄론이라는게 "자신이 태어나기를 선택할 수 없는" 아이들에게 태어나자마자 부과된다는거다

= 아이들이 어릴때부터 자신이 선택하지도 않은 를 짊어졌고, 심지어 그걸 만난 적도 없는 타인이 대속했다는 인식은

아이들로 하여금 어릴때부터 죄책감, 부채의식의 "노예" 로 만들어 존재의 의의를 선택할 줄 모르게 길들인다 봤던거임


이때 더 나아가서, 니체는 정말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 줄 알고, 그럴 "힘" 까지 가진 신이 굳이 지옥을 만들면서까지

= 인간이 스스로 죄를 뉘우치고 반성해서 개심하는 게 보고 싶다면 이미 지상에서 충분히 고통을 겪을 수 밖에 없는데

이를 두고보는 건 "힘" 을 가진 자가 가장 악랄한 책임전가 = 탄생과 죽음이라는 책임질 수 없는 운명을 정한다는거임

간단히 말해서 유일신교의 교리는 "낳음당했다 + 특정한 역할을 가진 인간에게 복종한다 + 안 그러면 지옥임" 이거다


니체는 이 지점에서 너무나 당연한 질문을 하나 던지는데 "어째서 이런 인간을 선택하는가?" 라는 질문임

이 아니라 인간이냐고? "보다 우월한 인간" 으로서 그 자리를 끊임없이 사수하고 빼앗기기를 반복해야 하지만,

이런 자연스러운 투쟁 = 서로 뺏고 뺏기며 언제든 뒤집힐 수 있는 지위의 역동성을 거부하고 불변성에 틀어박힌 것이


내가 증명할 수 없는 신의 말씀을 잘 따르고 있나 교정하고 바로잡아줄 "책임" = "힘" 을 가진 이들이 "사제들" 이니까!

프로테스탄티즘과 인간의 "도구화"를 거치면서 현대 유럽 사회는 더이상 시대 변화에 적응할 동력을 잃어버렸다는게

니체의 비판이자 경고였고 + 결국 2차 세계 대전 냉전, 68혁명이라는 극단적인 삽질 끝에 20세기가 끝나게 되었다


사제라면 모름지기 자신이 한낱 인간에 불과하며, 자신이 남들보다 우월하지만 그 또한 언제든 더 우월한 자의 등장

= 앞서 살아간 자(先生)의 가장 중요한 책임인 "거짓말" 에다 새로운 시대를 반영할 새로운 세대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게 니체가 말한 "왕관 빼앗기" 의 의미였으며, 니체가 말한 "힘" 이란 시대에 따라 우열의 기준이 늘 바뀌는 힘이다


따라서 가장 강한 자는? 현재는 당연히 이미 강한 자이겠지만 세상엔 수많은 상황이 있고 수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그때마다 그 시점에 가장 적합한 힘을 가진 자가 누구냐도 수많은 기준에 따라 수없이 바뀌게 되며, 그게 투쟁이다

= 그래서 타인을 "착취한다" 라는 개념을 조금 더 고상하게 표현하면 타인을 "이끌어준다" 라고 부를 수 있는거다


그렇기에 힘에의 의지로 끊임없이 타인을 착취하려는 본능을, 인간은 무려 "사랑" 으로 승화시키게 된다!

뭔가 잘 감이 안 온다면, 우리가 어릴 때 부모님 말씀에 따라 가져 마땅한 자유의 일부를 헌납한 것과 비슷하고

미래에 부모님에게서 독립하여 자기만의 힘으로 살림을 꾸리기를 욕망하는 것이 바로 힘에의 의지의 작동이다


하지만 어떤 부모님은 자식이 평생 자신을 따르기를 요구하기도 하지?

그때 우리는 부성애와 모성애가 절대로 조건 없는 사랑이 아니라는 걸 실감할 수 있는데,

그 순간 드러나는 것이 사랑의 기본적인 속성"타인을 위하는 나" 에 대한 욕망으로서 이기심이다

그래서 한 인간의 성장이란, 성장의 대상인 당사자뿐만 아니라 성장을 이끄는 인도자들까지 함께 겪는 시련이다


모든 아이는 언젠가는 부모의 품을 떠나야 하고,

어쩌면 그러기 전부터 부모보다 어떤 상황에선 훨씬 행복한 판단을 내릴지도 모름

= 그렇다면 인도자 되는 입장으로서 모든 어른이 가져야 하는 책임이란 무엇일까?





분량 문제로 뒷부분은 여기에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