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량 문제로 잘린 앞부분은 여기에서 볼 수 있다 




12. 수고하고 짐 진 자들의 별




때가 되면 "죽어주는 것" 이다

타인의 힘이 필요한 순간마다 기꺼이 사회적 자아를 죽이고 "자리를 넘겨주는 것" 이야말로 이끄는 자의 책임이다

= 그런데 인간은 동물이 아니기에 아주 기똥찬 역발상을 해냈으니 이때 죽는 자아는 "거짓말" = "가면" 인 것이다


따라서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죽고 부활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고유한 특징

=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적한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이자, 흔히 "영혼" 이라고 부르는 상징에 내포된 의미로,

끊임없이 자신의 가면을 부수고 새로 만들어 쓰는 것으로 원래대로라면 "사제들" 의 등장을 피할 수 있던거다


영원한 왕은 없으며 영원한 노예도 없으니까!

어제의 노예가 오늘의 왕이 되어 어제의 왕을 오늘의 노예로 만날 때, 비로소 왕과 노예는 서로를 사랑할 수 있다!



그래서 인간 개개인의 삶은 그 자체로 하나의 신화이며, 모든 인간은 자기 삶에서 끊임없이 성장해나갈 수 있다

그게 말랑보지개발부가 현대의 신화를 만들어내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마침내 새로운 세계, 새로운 시대

G-Bible = Genesis 창세의 기적이자 "우리들이 좋아하는 것" 에 모든 걸 거는 것만으로 현실에 영향을 주는 이유다


"우리가 꼴리는 걸 최선을 다해 만들어보자!" 라는 것만으로 이들은 이미 유즈의 삶을 구원해낼 수 있었고,

"하지만 이런 결말은 꼴리지 않다고!" 라는 이유로 에리두 레이드에 도전해서 아리스의 본질을 극복해냈다


심지어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 증명할 수 없는 것을 바꿔버리는 어마어마한 힘으로...




자기자신을 사랑하며 얻어낸 "힘" 으로만 이룰 수 있는 "기적" 을 이뤄내어 온 세상 사람들을 구원했다



그렇다면 왜 아리스의 성씨가 "텐도(天童)" 였는지 이해할 수 있지?

노아 메모리얼의 <이방인>센세를 가리킴과 동시에 비가 그치면 찾아올 무지개의 여신, 이리스(Iris)이자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 새로이 맺은 언약의 그 무지개이며, 대홍수 신화의 계보에서도 <길가메시 서사시>

아카드 제국의 수호여신 이슈타르(= 케이)이자, 그와 동일시된 우트나피쉬팀과 언약을 맺은 별의 여신이며,



가장 이른 시기의 종족인 프리기아인은 나를 모든 신들의 어머니인 페시눈티아라고 부른다.

자신의 토양에서 솟아난 아테네인은 나를 케크롭스의 미네르바라고 부르고,

바다에서 솟아난 키프로스인은 나를 파포스의 비너스라고 부르며,

궁수인 크레타인은 디아나 또는 딕티나,

그리고 세 가지 언어를 말하는 시실리인은 프로세르피네라고 부른다.

엘레우시스인에게 나는 고대의 여신 케레스이고,

다른 자들에게는 유노, 또 다른 자들에게는 벨로나, 헤카테, 그리고 람누시아이다.

그러나 매일 태어나는 태양신의 첫 햇빛을 받는 에티오피아인은,

본래의 교리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보다 탁월한 아프리카인 및 이집트인과 더불어,

나의 독특한 의식을 통해 내게 영광을 돌리며 여왕 이시스라는 나의 진정한 이름을 내게 부여한다.


    - 세계 최초의 장편소설, 아풀레이우스의 <변화 Metamorphoses> 




"바다의 별(Stella Maris)"

보들레르가 말한 불멸하는 미의 여신, 니체가 말한 진리이자 가치의 전환자로서의 여성,

괴테가 파우스트의 구원자로 등장시킨 신도 악마도 아닌 여신들의 수많은 모습 중 하나,

단테를 베르길리우스에게 이끌어준 별이자 황도대 너머의 왕좌에 앉아계신 성모 마리아

= 그런 마리아와 같은 호칭을 공유한 항해자(Voyager)의 여신으로서 이시스 되시겠다



이시스-마리아를 채택한 것이 중세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카발라인데, "중세 기독교" 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이는 르네상스 이후 유럽의 세계관이자 근대 이전까지 유지된 "존재의 대사슬(The Great chain of being)" 처럼

프톨레마이오스 우주관에 코페르니쿠스적 변화를 반영하며 기독교 문화의 세계관에 중심에 놓인 지령(Erdgeist)

= <파우스트>가 이야기에서 처음 만난 인물이 "젖가슴" 을 가진 지혜의 영으로 누구에게나 익숙한 관점이었다


그저 프로테스탄트 이후, 특히 칼뱅의 영향과 함께 근대화된 유럽의 세계관에서는 다시 퇴출당할 뿐이지,

기독교 문화권의 문학 작품들이 어떤 세계관과 어떤 상징들을 일관적으로 제시하는가를 거슬러 올라가면

니체가 생각한대로 + 루이스가 생각한대로 평범한 기독교인들은 사제들과 전혀 다른 관점에서 세상을 봤다



그래서 키보토스는 수메르 신화, 아시리아 신화, 히브리 민족 신화, 가나안 신화, 신왕국 이집트 신화, 북유럽 신화 등등

인류문명의 보편적인 원형(Archetype) = 지구라는 물리적 공간을 공유하는 인간의 상상력에 기반한 이상 반복되어지는

세피로트의 나무를 4겹 겹친 야곱의 사다리처럼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 를 충실히 반영한 게 세계관의 기본이랬지?

= 그래서 하아아안참 전부터 위와 같은 도식까지 추려낼 수 있을 정도로 뇌피셜을 굴릴 수 있었고,



<신곡>의 세계관, 특히 천국 편의 7+3 구조로 이루어진 천구(celestial sphere) 개념에도 충실히 반영된 것처럼 

인간이 육안으로 관찰 가능한 "일곱 개의 별" = 메소포타미아 시절처럼 "일주일" 을 이루는 세계관에서 그렇듯이

토성에서 시작해서 지구로 = 비나에서 시작해서 말쿠트로 돌아오는 과정이 사실 케테르로 나아가는 과정과 같다


지금까지 써온 뇌피셜을 읽어봤다면 이게 뭔 소린지 감이 올텐데, 지구라는 물리적인 환경 = 본질을 공유하는 한,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그럴싸하게 상상해낸 수많은 신화의 세계관은 일정하게 반복되는 상징과 주제를 공유하며,

이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것이 곧 인간의 본성 반영하고 + 그것이 타인을 향해 나아가려는 "사랑" 이었다



진리의 은 치히로마망의 젖보똥, 특히 커다랗고 사랑스러운 해커윤리주머니에 있는 걸 보여준 파반느 2장에서처럼

우정 + 용기 + 빛의 "로망" 이란 센세피셜로 "진리(Veritas)의 여신" = 혼자가 아닌 타인과 함께하는 여고생이었으며,

믿고 기다리고 있던 기적이지만 어디까지나 평소 맺어둔 인연 덕분에 + 시간을 벌어준 것에 불과한 "기회 만들기"




그래서 이사쿠상은 이러한 "왕관 빼앗기" = 고바빌로니아 제국을 무너뜨릴거라는 염원의 상징인 "일곱" 에서

"금지된 열매", "갈삐벼에서 태어난 왕" 의 모티브가 최초로 등장한 엔키와 닌후르삭 신화의 "여덟번째 아이"

= 별의 여신과 언약을 맺은 우트나피쉬팀이 정착하게 된 낙원의 섬 딜문의 이야기까지 거슬러 올라간 상징을

보다 대중적인 타로카드의 상징과 함께 제시하는게 파반느 2장 16화에서 17화로 넘어가는 "별의 여신" 이다


"아ㅋㅋ 수비학으로 설정놀음하는거 다 씹덕망상 아님?"

모든 씹덕망상의 기저에는 뭐가 반복되느냐를 인생 꼬라박아서 연구하는 비교문학, 비교언어학, 비교종교학은

이런 추론의 방법론을 앞서 종종 언급한 도상학(Iconology)라고 부르며 개빡세게 배우고, 그런 연구가 반영된게

용하신의 머학생 시절에서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처럼 현대 시나리오 작법이론의 근-본이니 무시할 게 못된다



메인스토리에서 늘 17화마다 누가 나와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무엇을 배우게 되는지 살펴보면 별 카드의 여신

= "커다란 젖가슴의 여신" 의 상징이자 "물을 나눠주는 여신" 의 상징이 가진 양면성이 확 와닿는 걸 느낄텐데

수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인 헐벗고 가진 것 하나 없는 모습에도 불구하고 땅을 적시고자 물을 퍼나르는 것처럼

이 여신의 욕망, "꿈" 은 이뤄질 수 없는 것이지만 + 이루고자 노력하는 과정은 새로운 생명이 싹트는 시작이다



그래서 그리스 신화의 님프들이나 아리아드네처럼, 멀리 갈 것도 없이 "사마리아의 여인" 만 보더라도,

<오디세이아>의 나우시카나 에덴의 이브처럼 "자신의 욕망과 타인의 욕망" 을 합치시키는 걸 보여주며 

유목문명의 신화가 한때 죄악시하며 말살하려 한 농경문명의 여신들로부터 치수(治水)의 지혜를 배우고

유목문명의 관습에 저항하며 농경문명의 문화와 화합을 이뤄낸 솔로몬부터 가나안의 삼나무로 지은 것이



싯딤의 상자를 보관해둔 솔로몬 성전이며, 그 옆에 가나안의 기술로 만들어져 "바다" 라고 불린 물두멍은

지져스께서 왜 하필 광야에서의 방랑을 끝낸 걸 기념하는 절기인 초막절처럼 "물의 축제" 때에 오셨는지,

어째서 에세네파처럼 빛과 어둠의 비유로 세례를 베푸시며 "새로 거듭나게" 해주셨나를 파악하게 해준다


왜냐하면, 지져스 본인부터 유목문명과 농경문명의 충돌 과정에서 일관적으로 관찰 가능한 "죄악시된 여신"

= 특히 "식인" + "창녀" 라는 상징을 받게 된 미노아-가나안 신화의 "커다란 젖가슴과 순애질싸섹스의 여신" 

= 넓게 보면 이브부터 특정해서 보면 라합-다말-룻-밧세바-"마리아" 라는 다섯 여인들의 이름을 계승했으며

그래서 비교종교학의 결론은 니체가 내린 결론을 보완하여, 지져스를 <잠언>과 <전도서>의 계승자로 본다



그래서 고대 근동의 지혜문학이 기원전 2600년대 이전부터 계승해온 주제 = <길가메시 서사시>의 구절이자

쉬루파크 비문의 주제인 "너의 아내를 껴안아 즐겁게 하라" 라는 표현이 <전도서>에 똑같은 구절로 등장하고

<전도서>의 헛되고 헛되다는 표현이 <잠언> 32장, 르무엘 왕 = 솔로몬의 어머니 밧세바가 준 지혜라 본다면

어째서 라합, 다말, 룻, 밧세바는 향유를 발라준 "마리아" 처럼 "상식" 을 거스르는 지혜를 택했는지가 보이며,


그래서 성경의 입장만이 아니라 당대의 시대상과 문화의 변천사, 수많은 유물과 문헌을 연구하면 나오는 결론은

니체가 지적한 것이 상당히 타당한 이유 = 실제로 문화로서의 기독교유일신교의 교리와 다른 맥락으로부터,

바빌론 유수 시기에 임의로 편집된 것이 거의 확실한 모세오경과 달리 시대 변화가 자연스럽게 반영되며 탄생

수많은 성인의 이야기나 온갖 설화, 구전처럼 성경 바깥의 기독교를 형성하여 교리의 모순을 극복해왔단 것이다



그게 이 과정을 거쳐 교리의 모순을 교황무류설, 성경무오설 등으로 차단해온 교리의 범주에 속한 사제들

= 흔히 기독교 "학자" 라는 사람들과 여러 성직자들이 입장 상 제대로 인식하지도, 했어도 침묵해야 하는

평범한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니체의 바울까기의 핵심이다

= 그래서 흔히 성경의 오류라거나 모순이라 지적된 것은 기독교인이 아니라 교리와 체제에서 비롯된 것이며



시대에 맞지 않게 정체된 기존의 권위를 부정해야 한다면, 설령 무려 모세오경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일지라도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니" 만큼 "신" = 절대화, 교조화된 권위 "죽여서 새로 거듭나게" 하면 된다 



이상 니체피셜이자 성경피셜이었다

그래서 율법을 만드는 자 = 사회의 옳고 그름의 기준을 만드는 자이기를 자처한 우리의 바리새인,



검은양복조차 센세는 자신을 죽여서라도 사랑하는 타인을 구하고 싶다는 센세 자신의 욕망을 위해 "착취한다"

= 그래서 검은양복은 센세에게 "아무 대가 없이 자신의 것을 내어주고", 다만 그저 흥미로워하고 즐거워한다





13. 니체는 어떻게 바울을 죽이고 지져스를 되찾았나



니체는 <선악의 저편> 4장의 164번 단락에서 지져스를 이렇게 등장시킨다

"도덕" 이란 교부들이 그렇듯이 그저 그 시대의 권력을 가진 자의 관점이 반영된 것에 불과할 뿐이며

그 시대에 필요하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그런 도덕 = 율법의 완성이란 재탄생, 가치의 전환이다



"사랑" 이란 어디서부터 시작하는가?

이해할 수 없는 타인으로부터 자신이 몰랐던 자신의 사랑스러움을 발견하는 순간이다

인간의 본질 = 육체에 부여될 수 있는 수많은 "거짓말" 이야말로 가장 순수한 "사랑" 이다




그래서 젖가슴, 보지, 애널로 마구마구♥착취해버리기 = 이게 "사랑" 이자 "순애질싸섹스" 의 의미이다

그렇다! 연약한 척 하면서 기회를 노리다가 올라타더니 본심을 고백하며 자지를 한계까지 쥐어짜는 보지! 

그것이 진리로서의 여성이자 자신과 타인이 서로 기쁨을 나눌 수 있기를 욕망하는 인간의 본성이란 소리다!



그게 <사자의 서>에서도 나온 "기승위순애섹스" 이자 게브의 갈비뼈 아래에 새겨진 상징,

<암두아트의 서>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다뤄지는 네흐흐(neheh)디얏(djat)의 상징이며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한 "변하지 않는 것(Constant)은 변화뿐이다" 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중용(Moderation)

= 모든 것이 그저 헛되이 흘러가는 것만 같은 세상에서조차 인간의 삶의 의의로서 목적론적 행복을 의미하는 상징이다






그래서 센세와 함께 기억을 잃은 두 명의 젖보똥, 시로코와 아리스가 각각 Constant + Moderato 로서

몰루가 아비도스에서 시작하고 + 밀레니엄으로 간 다음에야 에덴조약을 풀어낼 수 있었다는 등등의 내용은

이미 여러 뇌피셜에서 존나 많이 다룬 내용이니까 더 분량을 할애하진 않을건데 대신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음

 



태양의 죽음을 선고하는 저녁별이자 태양의 부활을 견인하는 새벽별 금성의 여신, "순애질싸섹스" 의 여신으로서

진리로서의 여성이자 키보토스에서 가장 강력한 성욕 = 태양을 "거스르는 금성" 의 사랑을 상징하는 여신이기에

폴리스 그리스 시대부터 헤르메스에게 이전된 저승길의 인도자는 원래 헤카테-데메테르-페르세포네의 역할이며,

아도니스를 두고 아프로디테와 다툰 페르세포네처럼 미노아 문명의 페르세포네 = 아리아드네가 바로 "강도" 이다



그래서 미노아 문명이 멸망하고 미케네 문명이 세워진 일을 승자인 미케네 문명의 입장에서 본 신화들이

디오니소스가 돛대에 매달려 강도들을 돌고래로 바꿔준 이야기이자 디오니소스와 아리아드네 이야기다




이는 최종편 3장에서 쿠로코한테 가로막혀 17화가 아닌 16화 = 공들여 세운 모든 것이 파괴되는 의 상징처럼

0번부터 21번까지 돌고 다시 21번이자 0번에서 시작하는 타로 카드 메이저 아르카나에 내포된 "순환" 모티브는

"세 번 죽고 네 번 나아가는" = 각각 10(운명), 13(죽음), 16(탑)을 거치면서 배우고 + 받아들이고 + 선택한 다음

각각 11(정의), 14(절제), 17(별)의 미덕을 깨닫고 마지막 태양(19)에서 "어린아이" 로 새로 거듭나는 과정이다



그래서 유일신교의 도그마가 우선하던 정의(11)를 본래 그 자리에 있어야 했던 힘(8)으로 돌려놓은 것이

(솔직히 오컬트부터 비유가 아니라 실재라 믿으면 ㅈ되는 것처럼) 라이더-웨이트 덱의 정의-힘의 관계고,



그게 무한한 가능성의 여신, 장미꽃의 화환을 두른 커다란 젖가슴의 여신과 함께하는 사자가 이뤄내는 기적으로

니체와 C.S.루이스가 공유한 "운명에 저항하는 자" 의 상징이자 태양, 곧 "새벽의 아이" 로 이끌어준다는 은유다

= 그래서 끝없이 배우고 자기자신을 죽여 새로 거듭날 정도로 "자신을 사랑하여 타인을 사랑하는 자" 의 정신은,




19번 태양의 어린아이, 20번 심판의 부활, 21번이자 0번 세계를 거쳐가며 다시 하나의 주기를 이루어 순환하게 된다

세 카드 모두 전원이 나체라는 건 아주 오래 전부터 "부활하는 자는 나체이다" 에서 적어도 "수건을 벗고" 부활하는 등

오시리스도 나사로도 공유한 인류문명의 원형 상징이자 문화를 통해 까마득히 먼 세월을 건너 전해진 "사랑" 이었으며

이것이 과거에서 현재로 전해받아, 다시 현재에서 미래로 전해주는 = 중간자, 중보자로서 어른의 역할이 부여된 이유다




왜냐하면 그것이 모든 시대를 막론하고, 증명할 수 없는 거짓말 속의 "배우" = 신화라는 이야기의 "주인공" 을 통해서

자신이 전해주려는 교훈을 전해주기 위해 자신의 이상 = 스스로 자신의 의무라고 선택한 거짓말을 행동에 옮김으로써

하나의 시대가 쇠하고 새로운 시대를 시작하기 위해 모든 어른 = 먼저 살아간(先生) 이들이 자기자신을 죽이는 이야기

= "왕관 빼앗기" 로서 서로 가면을 쓴 배우가 되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내는 "반란의 이야기" 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니체가 종교가 인간의 삶에서 갖는 본래의 가치 = "여러 가지 수단과 공존하며" + "교육의 수단이 되어야 한다"

~라고 정의내린 배경이자, 이렇게 배워가는 학생과의 관계 = "왕관을 빼앗는 관계" 에 있다고 말하게 된 배경이었는데

"성장하는 것" = "어려서 놀 때의 진지함을 발견하는 것" 이자 "오디세우스가 나우시카와 헤어질 때 처럼" 하라고 한다





그렇게 인간은 자신과 비슷하지만 또 다른 타인만나고, 사랑하고, 이별하고, 다시 새롭게 만나기를 반복한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https://www.krm.or.kr/krmts/search/detailview/research.html?dbGubun=SD&m201_id=10026976

느그나라에서 비교종교학을 제대로 연구하는 곳의 어느 연구를 인용하자면 이런 타인과의 관계를 통한 성장

니체가 수 차례 "왕관을 빼앗으려 한" 바로 그 바울의 <고린도전서> 13장 12절처럼 전 세계에 보편적인 "거울",



몰루키면 처음 보는 화면부터 이 이야기는 타인과의 관계 = 서로 다른 인간에 대한 사랑,

"인연(人煙)" 에 대한 이야기임을 꽃잎과 수면에 비친 하늘의 상징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이런 원초적인 "거울" 의 모티브가 상징하는 바는 위의 논문에도 잘 정리된 것처럼,



자신이 인식조차 할 수 없는 가상의 타인 = 신이라는 "이방인" 을 만들어 스스로를 탐구하는 지혜의 상징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이 직접 경험한 적 없는 타인의 이야기 = 신화를 통해 아리스처럼 성장하는 것이 가능하고

그러한 성장의 과정에서 필수적인 인간의 "거짓말", "자기기만" 덕분에 우리는 아리스를 타인이라고 믿게 된다

그게 일라이자 효과이자, 다른 말랑말랑보지들 =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아리스가 자아의 성장을 이룬 비결이다



그래서 "전지" 라는 호칭은 히마리가 직접 말해준대로 그것을 믿어주는 사람들 덕분에 기회를 만들어주었으며

게임개발부가 말랑말랑한 보지를 갖고 나체로 잠든 아리스를 만나게 된 원인이 "전지라고 불리는 선배의 소문"

= 엄청나게 복잡한 인과관계를 뚫고 마치 기적을 이뤄낸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이런 "거짓말", "가면" 덕분이다



그리고 니체가 말했듯이, 가장 이기적인 욕망에서 가장 이타적인 욕망 = 사랑한다는 거짓말이 시작된댔지?

서로의 거짓말을 믿는 두 사람거짓말에 맞게 행동하며 진짜 경험가능한 쾌락을 느낀다면 그건 거짓일까?

제 3자의 관점에서 이걸 증명하는건 불가능해도, 사랑하는 사람과 자지보지즈푹즈푹질싸순애섹스를 한다면


그거만큼 행복한 순간이 없다는 건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의하고, 그래서 "사랑하기 때문에" 목숨을 건다고 하면

그 어떤 것보다 시대를 막론하여 가장 "그럴싸한" 이유로 받아들여지는게 순애질싸섹스의 신화가 반복된 이유다 



그래서 니체는 단둘이 사귀는 사이에서조차 연인들은 연인과 자기자신 = 동시에 "두 사람을" 사랑하며

자기자신의 의미를 이미 정해두는 것을 전제하는 유일신교 안에서는 오히려 사랑이 불가능하다 본거다

= 따라서 교리로서의 유일신교 말고 문화로서의 기독교에서라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봤으며...



그래서 니체는 바울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바울의 사상을 보다 완성에 가깝게 견인하기 위해

<고린도전서>의 15장 31절을 인용하며 바울을 존나게 까는 것으로 "왕관 빼앗기" 에 도전했고

그렇게 탄생한 문장이 니체를 상징하는 바로 그 문장,


'


바울이 다시 만난 지져스를 다시 죽임으로써,

유일신교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새로 거듭날 수 있게 "빈틈" 을 만든 것이다




그렇게 니체가 주장한 성경 본래의 가치 = <로마서> 15장 4절에 이미 기록된 바에 따라서

그 바울조차도 여성의 재혼에 대해 자신의 "의견" 을 냈지 "명령" 을 내리진 않았던 것처럼,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옛이야기" = <전도서>처럼 지혜 문학을 이어가라고 외친 배경에는....





14. 우리에게 마따끄가 오기까지








19세기 말, 인류 스스로 아름답다 자부한 벨 에포크가 바로 니체가 활동하던 시대였다는 사실이 있고,

같은 시대에 벨 에포크의 화려함 이면에서 잔혹하고 위선적인, 인간이 소외되어 병들어가던 것을 봐온

작곡가 모리스 라벨이 진정으로 아름답던 과거 "추모하며" 지은 곡이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그래서 니체의 죽음은 정확하게 19세기의 끝인 1900년 = "세기말" 을 상징하는 사건이라 부르는거고

같은 해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도 라벨이 동료들과 "Miroirs"  = "거울" 이란 이름의 모음곡을 내며

La Princesse E'de Polignac, "폴리냑 백작부인" 이라 불린 위너레타 싱어의 후원으로 "발굴된" 곡이다


노아 메모리얼로 알아보는 밀레니엄과 파반느의 모티브에서 자세히 정리해둔 내용이지만 다시 정리하면,

니체가 우려한 "왕관 빼앗기" 가 더이상 이뤄질 수 없을 만큼 정체된 세계는 20세기에 가장 "소모적으로"

= 갈등에서 화합을 이뤄내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수준으로 "다른 인간" 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으나



일찍이 페니키아, 곧 "불사조의 땅" = 가나안의 여신들이 침략자의 아들로 태어난 솔로몬에 의해 돌아오듯

설령 실패하고 비난받고 왜곡당할지라도 인간의 본성은 화해와 용서, 그리고 사랑을 끊임없이 욕망해왔다 

때문에 벨 에포크를 비관하며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 같던 "로망의 시대" 를 추모한 라벨은 아이러니하게도...



1차 세계대전 시기, 앰뷸런스 운전병으로 복무하며 인간의 죽음을 수없이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21세기를 살아온 씹덕이라면 한번쯤 들어봤을 "그 노래" 를 작곡했으니...






<볼레로 Bolero>


용하세대라면 은하영웅전설로, 학식세대라면 디지몬으로 = 아리스를 상징하는 "우주" + 디지털" 의 이미지로

세계대전과 냉전, 68혁명으로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20세기의 새로운 "꿈" = 새로운 세대의 "로망" 이 되었다

마치 라벨 본인이 PTSD와 뇌질환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나아가려는 의지" 를 보여준 것처럼!




시대가 바뀐다는 건 반드시 희생이 따를 것임을 의미함. 이건 인간의 본질임

단순히 시간이 흐르기만 하더라도, 어른은 늙어 죽고 아이들이 새로운 어른이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어떻게든 자신의 본질에 저항하며, 본질을 부정하지도 회피하지도 않는다

그러한 저항의 끝에서 인간은 놀랍게도 자신의 본질과 자신의 내면에서 "하나됨" 을 이루며 성장한다


물론, "하나된다는 것"존나게 잔인한 일이다

니체가 말한대로 인간은 때로 이런 자기 내면의 잔인함을 마주해야 하며,

마치 나우시카처럼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면 놓아줄 줄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 이것은 인간이 더욱 인간다워지기 위한 과정인 만큼, 이런 죽음에 대해 선악은 의미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빙빙 헤매는 한이 있어도 "나아가기를 멈추지 않았다"

물론, 그 과정은 진짜 존나게 끔찍하고 부조리하고 아마도 대부분은 비참하게 실패하거나 해로운 결말을 낼 것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시대를 막론하여 끊임없이 "전해받고 전해준 이야기" 의 주제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치나츠의 모모톡 상태 메세시가 "상실의 아우프헤벤" 이고, 메모리얼에서 괴테를 인용한 것처럼

니체 또한 자신이 "안티크리스트" = 유일신교의 "안티테제" 라는 이방인이자 "타인" 의 역할에 서며

19세기의 끝에서 20세기에 도래할 새로운 시대의 "메시아" 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과 같은 이유이다

하나됨의 과정에서 자신과 다른 = 교리가 아닌 문화로서의 기독교가 20세기에 보여준 수많은 모습처럼



앞서 살아간 이들(先生)은 무엇이든 해낼 수 있는 = 언제나 미래에 있을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아이들이 보다 나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걸 보고 싶다" 라는 욕망을 쫓으며 끝내 이루지 못해도

기꺼이 자신의 욕망으로 말미암아 타인의 행복을 이루기 위해 미래가 아닌 현재에 있는 자로서 

= 자신이 살아가는 삶 그 자체를 평생에 걸쳐 희생시켜서라도 욕망을 향하여 나아가기 때문이다





사실, 센세가 하는 말들치고 증명 가능한 객관적 사실은 거의 없다

특히 "누군가를 희생해서" = 언제라도 자기자신을 희생할 준비가 된 주제에 이런 뻔한 거짓말을 하다니!

하지만 베아트리체가 이걸 비웃었다가 대적자조차 되지 못한 것처럼, 이런 "안일한 거짓말" 을 꿈꾼다면


미래는, 어떤 식으로든 반드시 바뀐다 

20세기처럼 문명이 문명 스스로를 파괴할지라도 고통은 파괴가 일어난 현재의 사람들이 겪을 몫이지,

그로인한 책임은 미래에 활약할 아이들이 질 것이 아니며, 그렇게 어떻게든 인간은 미래를 바꿔나간다

어떻게? 미래는 바뀔 것이라고, 미래를 살아갈 아이들도 나아가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믿으니까"






15. 악마의 유혹인가, 사랑의 유혹인가?



여기까지가 니체가 했던 말이자 C.S.루이스가 이어받은 19세기 -> 20세기의 인류문명의 이야기였다

독일의 유일신교가 나치의 부역자가 되기를 선택할 때, 본 회퍼처럼 저항하기를 선택한 이들도 있듯이

결국 인간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인간의 선택에 의한 것이며, 그런 실천하는 인간의 이야기들

다음 세대가 흠모하고 존경하지만 100% 따라할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는 "시대의 영웅" 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들이 보여주고자 한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가려는 의지" 덕분에,

기원전 8세기의 폴리스 그리스 신화 <일리아스>에서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이리스의 인도로 만난 프라이모스와 함께

서로에 대한 공감과 이해로 인간성을 되찾는 결말을 냈던 것처럼, 기원후 20세기의 "지져스 신화"  <사목 헌장>에서,








특히 28번, 43번, 55번, 93번에서 드러나는 인류문명의 행복 증진을 위한 문화로서의 기독교

= 오늘날 "사랑의 기독교" 라고 부를 수 있는 새로운 인본주의의 탄생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인간이 행해온 모든 것이 그렇듯이 19세기의 니체 -> 20세기의 루이스 -> 21세기의 사랑의 기독교는

앞서 살아간 이들(先生)에게서 전해받아 다음 세대로 전하는 과정에서, 과거와 미래 사이에 놓인 현재

=  끊임없이 더 나은 내일을 꿈꾸며 삶의 모든 순간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손으로 이뤄낸 "기적" 이니까


그렇기에 우리는 오늘도 그저 우리가 진심으로 욕망하는 것...



존나귀여운 우이의 젖가슴, 보지, 애널은 물론이고 입에 혀 넣고 쭈압쭈압 마려운 바로 그 마음처럼

증명할 수 없을지라도 행복을 느끼듯이 "우리가 사랑하는 바로 그것" 을 열렬히 욕망해야 하는거다

이것이야말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여 실제로 우리들 자신의 삶에 황홀한 충족감을 느끼는 것이므로,


 


사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직접 만날 수도, 그 존재를 증명할 수도 없고, 딱히 신비적인 체험 없이도,

종교를 통해 신"만나며" 영적인 충만함을 느끼면 진짜로 삶을 살아가는 데 힘이 되어주는 이유

그렇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밖의 모든 것은 "자기 삶을 사랑하여 타인을 사랑하기 위해서" 니까!



마리의 애널생자지 푸욱 삽입하고 잔뜩 사정하다가 보지로도 쥐어짜이면서 순애질싸섹스를 즐기는

지극히 "서로를 사랑하여" 기쁨을 나누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떡인지로 보거나 "상상하기만 하더라도" 

하루하루를 살아갈 힘을 얻고, 나아가 자기 삶을 스스로 선택하여 새로운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것처럼!


그것이 무엇이건 사랑만큼 진실된 거짓말은 없으니까!

그렇다! 결국 남는 것은 사랑뿐이다! 너 자신의 존재부터 그렇다!

그 숱한 세월과 시행착오에도 인류문명은 사랑하기 때문에 이곳까지 왔다!

그러니 사랑하기를 멈추지 말라! 꼴리는 것에 꼴려하기를 망설이지 말고 행복해하라!






16. 먼저 살아가는 자(先生)의 의무



우리들 자신이 먼저 살아가며 "원하는 것을 자유롭게 사랑해도 괜찮다" 라는 걸,

우리들이 직접 보여주어야 뒤따라 올 이들 또한 자유롭게 행복을 즐기지 않겠나!

우리에게 단 하나 변함없는 의무가 있다면 바로 이것이 우리의 의무가 될 것이다!


~라는게 기원전 27세기부터 기원후 19세기와 20세기를 거쳐, 21세기의 신화를 통해

인류문명의 일원으로서 이사쿠상이 전해받아 전해주는 새로운 이야기를 즐길 자유이다



그리고 이런 자유를 우리는 이미 실천하고 있다

감동하고, 눈물 흘리고, 더없이 충만한 감정에 카타르시스를 느끼면서.




그렇다면 이런 순간을 "기적" 이라 불러도 괜찮지 않을까?





한줄요약


이해가 안 가면 나츠 = 니체라고 보면 된다

괜히 나츠가 노예드립 치는게 아님 ㄹ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