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세상에서 한 가지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Я боюсь только одного –

그것은 내 고통이 가치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оказаться недостойным моих мучений.



인류가 지향하는 지상의 모든 목적은 오직 목적 달성을 위한 끊임없는 과정에, 달리 말해 삶 자체에 있는 것이지, 어차피 2x2=4가 될 수밖에 없는 목적 자체에, 즉 공식이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2x2=4는 이미 삶이 아니라, 여러분, 죽음의 시작이 아닌가. 적어도 인간은 늘 어쩐지 이 2x2=4를 두려워해 왔지만, 나는 지금도 두렵다. 인간이 하는 일은 오직 이 2x2=4를 찾아 대양을 항해하는 것뿐이지만, 또 이 탐색의 과정에서 삶을 희생하기도 하지만 정말로 그걸 찾는 것, 발견하는 것은 맹세코 어쩐지 두려워한다. 실상 그걸 발견하고 나면 그땐 더 이상 찾아 헤맬 대상이 아무것도 없을 것임을 직감하는 것이다. 하지만 2x2=4는 어쨌거나 정말 참을 수 없는 것이다. 2x2=4는 내 생각으론 정말로 뻔뻔스러움의 극치일 따름이다. 2x2=4는 양손을 허리에 대고 젠체하듯 여러분을 바라보고 그렇게 여러분의 길을 가로막고 선 채 거드름을 피우며 침을 뱉는 것이다. 2x2=4가 훌륭한 녀석이라는 점에는 나도 동의하지만, 이것저것 다 칭찬할 바엔 2x2=5도 이따금씩은 정말 귀여운 녀석 아닌가.


"여러분, 문제가 도표와 대수학에까지 이르러 2X2=4 하나만이 통용된다면 그 상황에서 무슨 의지가 있을 수 있겠소? 2X2는 나의 의지가 없어도 4가 될 텐데. 자기 의지라는 것이 이런 것이란 말이오!"


그런데 여러분은 왜 그렇게 확고하게, 그렇게 의기양양하게, 오직 정상적이고 긍정적인 것 하나만이, 한마디로 말해서 오직 안락 하나만이 인간에게 이롭다고 확신하는가? 무엇이 정말 이익인지를 놓고 이성이 오류를 범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실상 인간이 안락 하나만을 사랑하는 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혹시 고통도 딱 그만큼 사랑하는 건 아닐까? 혹시 고통이라는 것도 딱 안락만큼이나 그에게 이로운 건 아닐까? 인간은 이따금씩 고통을 끔찍이도, 죽도록 좋아한다. 이건 사실이다. 이 경우엔 새삼스레 세계사를 뒤져 볼 필요도 없다. 여러분이 인간이고 또 조금이라도 삶의 경험이 있다면 여러분 자신에게 물어보면 된다. 나의 개인적인 견해로 말할 것 같으면, 오직 안락 하나만을 사랑하는 것은 심지어 어쩐지 점잖지 못한 일이다. 좋든 나쁘든, 이따금씩 뭘 부수는 것은 역시나 몹시 유쾌한 일이다. 실상 나는 여기서 고통을 옹호하는 것도, 더욱이 안락을 옹호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옹호하는 것은... 나 자신의 변덕이요, 또한 필요할 때마다 내가 마음껏 변덕을 부리는 것이 보장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인간은 언제나 어디서나 그가 누구든 간에 절대 이성과 이익의 명령인 아닌,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길 좋아했던 것이다. 심지어 자기 자신의 이익에 반해서라도 그렇게 하고 싶어 할 수 있고 이따금씩은 꼭 그래야만 한다.


인간이 창조를, 또 길을 개척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 이건 틀림없다. 하지만 대체 무엇 때문에 파괴와 혼돈을 또 그렇게 좋아하는 것일까? 혹시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 지금 짓고 있는 건물이 완성되는 것이 그 자신도 본능적으로 두렵기 때문은 아닐까?


고통은 예컨대 보드빌에서는 허용되지 않는다. 이 점을 나는 알고 있다. 수정궁에서라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무릇 고통은 의심이요 부정인데, 의심할 수 있는 공간이라면 그게 무슨 수정궁인가? 그래도 나는 인간이 이따금씩은 진짜 고통, 즉 파괴와 혼돈을 거부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한다. 고통이야말로 실상 의식의 유일한 원인이니까. 처음에는 의식이란 것이 내 생각으론 인간에게 있어 크나큰 불행이라고 말했지만, 인간이 그것을 사랑하여 그 어떤 만족과도 바꾸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의식은 예컨대 2x2보다는 무한히 더 높은 것이다. 2x2 이후엔 할 일이 전혀 없어질 뿐만 아니라 알아내야 할 것도 전혀 없어질 것이다. 그때 가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기껏해야 자신의 오감을 틀어막고 명상에 잠기는 것뿐이다. 뭐 그래도 의식을 갖고 있으면, 결과는 똑같을지언정즉 역시나 할 일이 전혀 없어지게 될지언정, 최소한 이따금씩은 자기 자신을 채찍질할 수는 있고 이 정도만 해도 어쨌거나 조금은 살맛이 나지 않겠는가. 좀 반동적일지라도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야 어쨌거나 더 낫다.


온 세상에다 저주를 퍼부을 텐데,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인간뿐이니까(이것이야말로 인간을 다른 동물과 근본적으로 구별시켜주는 특권이니까) 아마 그는 이 저주 하나만으로도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 셈이니, 즉 자신이 피아노 건반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확신에 도달할 것이다!




나는 이미, 방구석에서 열심히 곱씹은 나의 성스러운 이념 나부랭이를 피력하고 싶어 몸이 달았다. 뭔가가 갑자기 내 안에서 불타올랐고 어떤 목적이 '현현'했다. "나를 본받으라는 건 아니야."


'젠장, 이거 참 흥미롭군, 같은 부류라고나 할까. 이런 생각을 하며 나는 흥분에 들떠서 거의 두 손을 비벼 대기까지 했다. '게다가 이런 풋내기 영혼 하나쯤 맘대로 주무르지 못할소냐?' 이 놀이에 나는 그 무엇보다도 매혹됐던 것이다.


9시 이후에는 유난히 기운이 나고 신이 나서 이따금씩은 상당히 달콤한 몽상에 잠기기까지 했다. 가령, 리자가 내 집을 오가고 나는 그녀한테 이런저런 말을 들려주고 바로 이로써 그녀를 구원하는 거다…


하필이면 이런 실내복을 걸친 채 성질 사나운 개처럼 아폴론한테 덤벼들었을 때 찾아온 너를 절대로 용서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정말 지금도 깨닫지 못했어? 너를 부활시킨 자, 전에는 영웅이었던 자가 옴투성이에 털북숭이 똥개처럼 자기 하인한테 덤벼들고 그 하인 놈은 오히려 주인을 비웃는 장면이라니! 또 아까 창피당한 여자처럼 네 앞에서 그만 눈물까지 흘렸으니, 이 때문에라도 나는 너를 절대 용서하지 못할 것이야! 그것도 모자라 지금 너한테 이런 걸 주저리주저리 고백하다니, 이 때문에라도 역시 절대 너를 용서하지 못할거라고!





자, 여러분은 나한테 화를 내고 고함을 지르면서 두 발을 쾅쾅 구를 것이다, 나도 잘 안다. "당신 자신의 얘기만, 당신의 비참한 지하생활 얘기만 할 것이지, 감히 우리 모두라고 둘러대진 말라." 라면서.


나는 실상 여러분이 감히 절반도 밀고 나가지 못한 것을 내 삶에서 극단까지 밀고 나갔을 뿐인데, 여러분은 자신의 비겁함을 분별이라 생각하고 이로써 스스로를 기만하면서까지 위안을 얻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여러분보다는 훨씬 더 '살아있는(생기로운)' 셈이다.




이상으로 <지하생활자의 수기>에서 나오는 문장들이었다.

줄거리를 대강 설명하면, 주인공 '지하생활자' 는 참을 수 없는 열등감에 빠진 인물이다. 그런데 이런 열등감을 해소하고자 자기 하인을 못살게 굴면서 지배욕을 충족하고,



그런 성질 드러운 주인 밑에서 깔개 취급받느라 에휴 시발 소리하는 하인의 이름이 하필 '아폴론' 이다.

지하생활자에게 아폴론은 자기 말싸움을 받아주는 유일한 '적' 인데, 바로 그 사실이 지하생활자에게 참을 수 없는 열등감을 안겨준다. 아무리 현란한 이념과 신앙에 대한 고찰로 인텔리겐치아를 자처하는 지하생활자라도 막상 말싸움에서 자기 논리가 비현실적이라는 걸 깨닫게 해주기 때문. 성경조차 제대로 못 읽어본 이 우둔한 멍텅구리한테도 말싸움으로 밀리다니! 결국 둘의 말싸움은 매번 '내가 주인이고 너는 하인이다' 라는 계약관계로 아폴론을 찍어누르며 끝난다.


그런데 지하생활자에게 더욱 고통스러운 현실은, 지하생활자가 탐구한 결과물은 또 당대 러시아의 사회상에 걸맞는 날카로운 통찰이었다는거임.

문제는 그가 내린 결론이라는게 현실을 날카롭게 지적하지만 + 사람들이 받아들이기엔 너무 비현실적으로 다가와서 = 이에 질려버린 나머지 스스로를 지하에 가둬버렸다, 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가 질리기 전에 "저 미친놈 말이 진실이라면 어쩌지?" 라며 불안에 떨던 사람들의 시선에서, 그만 지하생활자 스스로도 "만약 진짜로 내 말이 다 진실이면 어쩌지?" 라고 겁먹어서 더이상 나아가기를 멈춰버린거다. 정신분열에 가까운 망상을 보여주는 캐릭터라서 왜 이 지랄을 떠는지 잘 이해가 안 갈수도 있는데



에덴조약에서 세이아가 다음 장을 넘기기 두려워서 꿈에 스스로를 가둬버린거랑 똑같음.

도스토옙스키가 기독교에 대한 고찰(러시아뿐만 아니라 당대 유럽에 이르기까지) 끝에 쓴 소설이 <지하생활자의 수기>인데, 어떤 이념도 과학도 종교도 진리는 "니들다좆됐어" 로 귀결된다를 발견해버려서다. 인간은 죽는다. 왜? 살아있으니까. 살아있는 한 죽음이라는 관념으로부터 인간은 평생 자유로워질 수 없다.


왜냐면 죽음이란 자연에서 인간이 유일하게 "경험할 수 없는 현상" 이라서다.

살아있는 인간은 죽음을 경험할 수 없다. 왜? 살아있으니까. 그럼 죽은 인간은? '경험' 을 못한다. 왜? 죽었으니까. 이 딜레마는 인간에게 원초적인 공포가 될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아직 닿지 못한 미지의 영역– '신비' 에 대한 탐구에 도전할 수 없게 만든다. 왜? 내가 알던 세계에서 모르는 세계로 발을 들이면, 그 세계는 무엇이든 나를 죽일 가능성이 0이 아닌 세계니까. 정체된다는 것, 그것은 무지에 안주하여 정해진 결말인 죽음을 애써 덮어두고 잊어버리려는 인간의 무의미한 저항이다. 이렇게 신비(아직 밝혀내지 못한 부분)에 대한 도전이 가로막히므로 과학은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여 헤매고, 종교는 인간이 그나마 밝혀낸 몇 가지 사실조차 덮어두고 부정하며 잊으라고 요구한다. 공산주의? 종교를 아편취급하는 주제에 종교랑 똑같다. "우리는 모른다." 성경에 나온 내용을 100% 확신한다면 그건 맹목이지 신앙이 아니다. 그러나 성경의 내용을 '믿기 위해 이해하려면' 일단 성경을 의심해야 된다. 문제는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의심할건데? 누가 그 기준을 정하고, 그 기준이 참되다 보증해주나?


지하생활자는 이런 고뇌 끝에 '알고 싶었지만 막상 알게 되니 무서워지는' 깨달음을 눈앞에 두고, 끝내 자신이 그동안 믿어온 '알던 세계' 가 무너져내릴 것이 무서워 도로 덮어버린다. 그게 이로워서? 아님. 그게 옳은 행동이라서? 아님. 너무나 두려운 나머지, 이성으로 탐구하던 걸 멈추고 전부 손에서 놔버린거다. 그래서 지하생활자에게 인간의 본성은 다른 무엇도 아닌 '변덕' 이다. 그 변덕스러움이 인간을 무지라는 저주이자 축복 속에 머물게 한다. 지하생활자는 이런 무지에 머무르고 있지만, 여전히 시대를 앞서간 선지자(종교적인 의미가 아주 강한)가 되려는 욕망은 포기 못하고 갈팡질팡한다. 그런 자신을 관조할 정도로 통찰력은 충분해서, 애써 덮어둔 진실, 그 머릿속이 불타버릴 만큼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진실은 결코 잊을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지하생활자는 극도의 고통 속에서 살아간다. 그렇다고 고통받는 사람이니 남에게 막 대해도 된다는 건 아니라는 걸 아는 인물이니, 홧김에 아폴론을 막 대할 때마다 후회하고 괴로워하는 건 덤이다.


사실 아예 지하에 틀어박히기 전까지만 해도 지하생활자에겐 친구들이 있었다. 지하생활자가 보여준 명민한– 아폴론도 동의할 만큼, 진리를 향한 그의 집요한 탐구에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뭔가가 있었다. 원래 한낱 말단 관리에 불과했고, 그가 발견한 진실을 남들한테 보여주는 방식이래봐야 높으신 분들, 고귀한 분들, 명망 있는 분들에게 괜히 과장스럽게 꼬장부리다 참교육당하는 (그가 발견한 진실인즉, 결국 인간은 다 똑같은데 누가 누구에게 존경받을 인간이겠느냐는 식이었다) 것이었지만 말이다. 그런 방식이 아니라면 차마 진실에 충실하지 못하여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그를 대면하길 꺼려했을 뿐, 여전히 편지를 주고받고 책을 보내주며 지하생활자와 교류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물론 그런 '책' 이 아니라 사람 대 사람으로 대면하는 인물은 지하생활자를 딱히 연민하지 않기에 소신발언하는 하인 아폴론뿐이었지만. 그러나 지하생활자가 결국 "더이상 어찌할 줄 몰라서" 지하에 틀어박히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친구들이 슬슬 지하생활자의 광기와 그가 들고 와버린 진실에 질려 하나둘 손절하던 즈음, 지하생활자는 '내가 약속시간에 늦은 것은 너희와의 관계에서 내가 우월하니까' 따위의 태도로 모임 장소에 오게 된다. 이에 짜증이 난 친구들은 술에 취한 지하생활자를 챙겨주는 대신 내버려둔 채로 자기들끼리 유곽으로 2차에 간다. 술이 깨고 정신이 든 지하생활자는, 명료한 이성으로 곱씹어보아 친구들이 자길 손절했음을 깨닫고(그리고 손절할만 했다는 자기혐오를 애써 억누르기 위해) 온전히 자기 판단이 가능한(심신미약이 아닌) 상태에서 친구들을 줘패버리겠다며 유곽으로 뒤쫓아간다. 그런데 막상 유곽에 도착하니 친구들은 이미 (자기혐오를 가리기 위해 분노를 가장한 것이니 애초에 진심으로 줘패려는 것도 아녔다) 할 일 다 끝내고 각자 집에 돌아간 다음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지하생활자는 '리자' 라는 창녀를 만나게 된다.


리자는 그냥 창녀가 아니었다. 지하생활자가 몇 마디 툭 던져도 알 바 아니라는 듯 무던했던 그녀에게, 지하생활자는 괜히 약이 올라서 그녀를 괴롭히기로 작정한다.

그런데 막상 리자와 대화를 시작하자니, 빵빵한 가슴을 가진 아름답고 순박하고 심지어 고결함까지 느껴지는(지하생활자는 스스로 애써 창녀 주제에 왜 깨끗한 척이냐며 무시하지만) 아직 세상에 나올 의지가 있던 지하생활자에겐 아폴론과 대비되는 부드럽고 상냥한 빛이었다. 물론 아폴론처럼 그녀도 성경에 대해서는 어리숙했고, 그녀가 품은 마음은 신앙이라기엔 양심에 가까운, 자기 내면에 귀기울이는 '인간' 에 가까웠다. 그녀는 창녀지만 결코 방종맞거나, 살아가기를 체념하고 예예 전 걸레입니다 그래서 어쩔건데요 하는 불손한 인간도 아니었다.  물질과 황금에 눈이 멀어 품위를 잃기는커녕, 창녀 주제에 가소롭다는 소리를 들어도 자기 나름의 품격이 있는...지하생활자는 콩깍지가 제대로 꼈는지 리자를 회상하다 못해 찬미하는 수준에 이른다. 


만약 <죄와 벌>처럼 도스토옙스키의 다른 작품을 봤다면, '신성한 창녀' 모티프가 반복되고 그게 도스토옙스키가 발견한 이상적 인간상이라는 걸 알거임. 도스토옙스키가 굳이 타의 모범이 될 만한 인간상에 창녀 설정 붙이기를 반복한 이유는, 다른 모든 측면에서 우리와 다르지 않거나 우리보다 더욱 고결한 인간이 '그저 창녀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악인이라 단정짓는', 2x2=4 라는 정해진 공식처럼, '모든 창녀는 음행한 죄로 지옥에 떨어지리라' 같은 명제가 그리스도께서 진짜 원하신 거냐는 의문을 제시해서다. 그래서 <지하생활자의 수기>에 등장한 리자를 가리켜 '그리스도적 인간상' 으로, 지하생활자를 율법학자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이단심문관의 위치로 구성했다고 설명한다.


그럼 도스토옙스키가 발견한 '우리 사이의 그리스도' 는 어떤 인물일까? 지하생활자는 리자를 회상하며 그렇게 실컷 찬미하다가, 갑자기 태도를 바꿔 온갖 저주를 퍼붓는다.




'젠장, 이거 참 흥미롭군, 같은 부류라고나 할까. 이런 생각을 하며 나는 흥분에 들떠서 거의 두 손을 비벼 대기까지 했다. '게다가 이런 풋내기 영혼 하나쯤 맘대로 주무르지 못할소냐?' 이 놀이에 나는 그 무엇보다도 매혹됐던 것이다.


지하생활자는 리자에게 '창녀로 사는 것이 얼마나 도덕적으로 타락한 삶인가' 라며 창녀 일을 관두라고 설득한다. 그럼으로써 잠시나마 '지혜를 궁구하여 깨달음을 얻고 타인을 구제하는 선지자' 라는 자아를 되찾는다. 평소 아폴론을 상대로는 말도 안되는 말을 '아니 이걸 이해 못해?' 라고 우기던 인간이, 리자한테는 '내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말인데 이걸 이해하네?' 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리자랑 얘기할수록, 창녀라는 것 빼면 당대의 누구보다 선량한 이 여인은 자신을 구원받지 못할 죄인이라며 진심으로 참회해버린다. 지하생활자는 자기가 지금 말도 안 되는 말을 지껄이고 + 리자는 죄인은커녕 그 시대에 보기드문 손수한 영혼이라 그런 것임을 충분히 알 만큼 명석했다. 누군가를 죄인이냐 아니냐 낙인찍는 것은 선지자의 특권이라는 걸 깨닫고, 누군가의 앞날을 원하는대로 정해버릴 수 있다는 전능감까지 느낄 정도로. 그가 발견한 진실은 그의 행동과 리자의 사례를 통해 의심할 여지없이 증명된거임.


그렇게 지하생활자는 선지자로서 다가올 새 시대의 사도라도 되는 것처럼, 리자에게 자길 진지하게 따르고 싶다면 찾아오라고 집 주소를 건네준 뒤 집에 돌아온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아폴론과 말씨름을 벌이려는데, 그제서야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아버린다. 평소에 아폴론 앞에서는 '내 말이 맞다' 믿어서 논리가 반박되더라도 아냐 내가 옳아! 하면서 갈궜는데... 사실 그게 말이 안 되는 소리였고, 정작 리자한테 했던 '내가 봐도 말이 안 되는 소리'라 믿었던 그 말이 오히려 유익하고 건전한 충고였던거임. 집에서는 선지자 콤플렉스에 열등감을 터뜨리고 밖에서는 열등감을 감춘 채 속인 줄 알았지만? 반대로 집에서는 열등감을 감춘거였고, 리자가 참회하는 모습을 보며 우쭐한 척하던 순간 진심은 리자처럼 구원받고 싶다는 욕망을 토해냈다는, 어디까지가 진심이고 위선인지 알 수 없게 뒤집힌거였다.


<지하생활자의 수기>에서 인간은 스스로 구원을 줄 수 있는데, 뭔가 더 우월한 것이 있다 믿어 스스로를 죄인으로 만들어버리는 존재다. 더 우월한 것에 대한 믿음, 더 진실한 것에 대한 믿음이 타락의 근원이다. 당대 러시아에서 정의를 앞세운 공산주의든, 과학을 앞세운 계몽주의든, 진리를 앞세운 정교회든 다같이 막장으로 치닫던 시대였으니까. 그런데 도스토옙스키는, 거기서 가장 비극적인 것은 '순수하던 나는 어디 갔냐며 체념해버리고 엇나가버리는 그 인간이야말로 스스로 눈이 멀었을 뿐 여전히 순수한 인간' 이라는 사실에서 온다고 역설함. 지하생활자의 행적을 다시 살펴보면 과연 그가 평생 모든 인간관계로부터 격리당하는 수용소형에 처할 필요가 있었을까? 자신이 몹쓸놈이라는 믿음에 빠져 몹쓸놈처럼 행동해야 한다는 강박에 미친짓을 반복하다, 지하생활자를 자기랑 같은 순수한 인간으로 맞아준 리자한테 잠시나마 그 믿음에서 벗어난 경험을 한 거다.


오히려 진짜 몹쓸 인간들은 지하생활자가 그토록 번민한다는 걸 알면서도, '친구 노릇은 해줘야' 한다며 챙겨주다 결국 질려버린 친구놀이꾼들이 아니었을까? 그렇다고 친구들이 죄인이라는 건 아니다. 진짜 문제는, 인간에게 그런 '나는 이 사람의 친구이기 때문에', '나는 남에게 몹쓸놈이기 때문에' 와 같은 역할놀이를 강제하고, 그런 놀이의 '룰' 이라는, 2x2=4 라는 공식처럼 어떤 기준 하나로 인간이 영원히 그리하리라 결정해버리는 데에 있지 않냐는거다. 차르는 차르답게, 사제는 사제답게, 관리는 관리답게, 빈민은 빈민답게... 도스토옙스키가 보기에 그런 역할이 있고 + 역할에 따른 룰을 벗어나면 광인 취급하는 세상이야말로 미쳐돌아가는 것이었음. 거기서 자발적으로 저지른 잘못은 행위자의 잘못이 맞고 그는 죄인이 맞다. 그러나 죄인에게 자기 행위를 후회하고, 반성하고, 용서받아, 구원받을 '빈틈' 하나 내주지 않는 세상에서 과연 누구나 평생토록 100% 순수할 수 있을까?


그래서 99%의 한없이 완전하지만 창녀라는 당대 최악의 역할을 부여해 1%의 불완전함을 섞은 인물, 그게 리자였다.

지하생활자는 아폴론과 말싸움하다 결국 끝내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진실, "이렇게까지 사서 괴로워할 필요가 없다" 를 제 손으로 증명해버린다. 그거 봐라, 결국 너도 괴로워하고 싶지 않고 행복해지고 싶은 인간 = 나와 같은 평범한 인간 아니냐며 어이없어하는 아폴론에게 지하생활자는 오갈 곳 없는 허망함에 정복도 아닌 실내복 차림으로 달려들게 된다. 여태까지 지하생활자가 괴로움을 벗어나는 방법은 그렇게 하인을 줘패면서 지배욕을 충족하고, "내가 너보다 강하다" 를 몸소 경험하는 것 뿐이었으니까.




지하생활자, 남들은 수긍하고 타협하는 진실 앞에 차마 어찌하지 못하고 어긋지던 소심한 현대인의 비극은 아폴론을 줘패던 그 순간 리자가 진짜로 집에 찾아왔다는거다.


서둘러 리자를 맞이한 지하생활자는 다시 리자의 구원자 역할을 '연기' 하려고 하지만, 애초에 그게 연기가 아니라 그 순간 자기도 모르게 나온 진심 =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순수함이었음을 이미 깨달아버린 상태였음. 그럼에도 리자는 이 모든 걸 털어놓고 난 쓰레기라고 절망하는데... 



리자는 그런 지하생활자를 진심으로 연민하고, 그의 괴로움에 슬퍼하고, 그를 사랑으로 안아준다.

전날 지하생활자가 스스로는 놀이를 한다 여겼지만 그가 보여준 '빈틈' 에서 리자는 분명히 봤거든. 이 사람도 창녀라고 손가락질받는 자기처럼 남들한테 상처받은 영혼일 뿐이라고.


그게 이 이야기의 결말을 비극으로 결정짓는다.





하필이면 이런 실내복을 걸친 채 성질 사나운 개처럼 아폴론한테 덤벼들었을 때 찾아온 너를 절대로 용서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정말 지금도 깨닫지 못했어? 너를 부활시킨 자, 전에는 영웅이었던 자가 옴투성이에 털북숭이 똥개처럼 자기 하인한테 덤벼들고 그 하인 놈은 오히려 주인을 비웃는 장면이라니! 또 아까 창피당한 여자처럼 네 앞에서 그만 눈물까지 흘렸으니, 이 때문에라도 나는 너를 절대 용서하지 못할 것이야! 그것도 모자라 지금 너한테 이런 걸 주저리주저리 고백하다니, 이 때문에라도 역시 절대 너를 용서하지 못할거라고!


리자가 도리어 지하생활자를 안아주고 그래도 자긴 여전히 사랑하고 그가 사랑받을 가치가 있음을 리자 본인의 몸으로 '증명' 해버린다. 어떤 이념의 구호나 문명의 이기, 종교의 경건함보다도 모두가 창녀라 무시하는 여자의 포옹이 자길 구원해버린거다. 이 세상의 진실을 알면서도? 그렇다. 인간이 인간에게 굴레를 씌우고 채찍질하는 것만이 살아있다는 희열을 주는, 이 뒤틀린 세상임을 알면서도. 이에 어쩔 줄 모르던 지하생활자에겐 단 하나의 '기준' 만이 남았다. 이 따뜻한 포옹 한번이 괴로움에서 구원해주기 전까지, 괴로움을 잊어온 유일한 방법, '고행'. 지하생활자는 아폴론에게 그랬던 것처럼 리자를 모욕하기 위해 리자의 포옹에 섹스를 갈구하며 달려들었고, 자신의 구원자인 그녀보다 우월해지고 싶다는 욕망에 이를 사랑으로 받아들인 리자와 섹스를 하는데,


섹스를 마치고 "창녀 주제에 이제와서 생색이냐" 라며 돈다발을 쥐어준 뒤 유곽으로 꺼지라 일갈한다.




구성상 지하생활자와 아폴론은 '여느 인간처럼 그 둘도 같은' 인물로 다뤄진다. 아폴론에게 늘 말싸움에서 밀리는 것도, 아폴론이 지하생활자와 굳이 말싸움을 계속 하는 것도, '구원을 바라는 인간' 이라는 진심은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리자는 이를 모든 인간의 진심이라 선언하고, 지하생활자를 안아주면서 사랑으로 구원하고자 했다. 그래서 리자는 그리스도이지만, 인간은 그리스도가 그저 자신과 다르지 않은 평범한 인간이라는 걸 견딜 수가 없어한다. 그게 인간이고, 그래서 인간은 구원받을 수 없다는게 도스토옙스키의 결론임.


리자가 지하생활자에게 내쫓기듯 떠나는 광경을 보면서, 아무리 몹쓸 주인이지만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아폴론은 지금 뭐하는거냐고 처음으로 지하생활자에게 대든다. 아폴론 입장에선 자기한테 오지 않은 구원의 기회가 지하생활자에겐 왔는데, '이 세상에 구원받을 자격이 있는 영혼은 없다' 라고 선언하고 구원의 가능성을 닫아버린 꼴이니 어이없다 못해 분노에 가까운 감정을 들게 한거임. 하지만 아폴론은 이런 광기어린 이성의 시대에, 결국 그런 '이성의 하인에 불과하기에' 지하생활자가 뒤늦게 리자를 찾아가지만 다시 만나지 못하는 모습만 보게 된다.





자, 여러분은 나한테 화를 내고 고함을 지르면서 두 발을 쾅쾅 구를 것이다, 나도 잘 안다. "당신 자신의 얘기만, 당신의 비참한 지하생활 얘기만 할 것이지, 감히 우리 모두라고 둘러대진 말라." 라면서.


나는 실상 여러분이 감히 절반도 밀고 나가지 못한 것을 내 삶에서 극단까지 밀고 나갔을 뿐인데, 여러분은 자신의 비겁함을 분별이라 생각하고 이로써 스스로를 기만하면서까지 위안을 얻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여러분보다는 훨씬 더 '살아있는(생기로운)' 셈이다.


이야기의 끝에서 지하생활자는 더욱 암담한 진실 하나를 꺼내면서, 스스로 몹쓸놈이기를 선택한 자신보다 애초에 선택할 생각조차 못하는 독자들을 엿먹인다.

이게 허세가 아니라 진실이기 때문에 <지하생활자의 수기>는 명작이라 불린다. 찬찬히 되짚어보면 지하생활자는 "인간이 진심으로 욕망하는 것은 무엇인가?" 를 찾고자 끊임없이 의심했고, 방식이 심히 뒤틀렸을 뿐 지하에 함께 갇힌 아폴론과 지하생활자만이 그 답을 찾아냈다. 지하에 틀어박힌 지하생활자도 가관이지만 더 가관인 것은 이런 의심조차 안하는 지상의 인간들이다. 지하생활자는 스스로 구원의 기회를 걷어차버리며 추락해버렸지만, 여전히 지상에서 멀쩡히 순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구원의 기회조차 갖지 못하니까."


지상 사람들은 여전히 리자를 창녀라고 단죄할테지만, 적어도 이제 지하생활자는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깨달음' 을 얻었다. 

그게 더이상 지하생활자의 구원으로 이어질 순 없지만 적어도 대부분의 지상 사람들과 명백히 수준높은 존재, 한없이 구원에 가까운 지점까지 갔고 시발 이게 허세가 아니라 당대 러시아 기준 팩트라는거임ㅋㅋㅋㅋ



더 비참한 사실은 그렇게 구원의 문턱까지 다다른 지하생활자가 깨달음을 얻고 내려왔건만, 그렇다고 지하생활자가 승리자일까? 아니다.


차라리 자기자신을 기만하며 '죽은 듯이' 살아가는 편이 더 행복했을 고통스러운 진실 속에서 죽을 때까지 괴로워해야 한다.

물론 대부분의 '죽은 듯이 사는 인간', 진실에서 눈을 돌려 고통을 모른 척하는 인간보다는 '살아있다'. 고통을 긍정하거나 옹호할 수는 없다. 고통이 끔찍하다는 건 변함없으니. 하지만 매 순간 '삶이란 이렇게나 고통스럽구나' 를 경험하기 때문에, 지하생활자에겐 모든 순간이 깨달음의 순간이 된다. 거기서 지하생활자는 스스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더 큰 이념, 과학, 종교에 의존하는 인간보다 훨씬 자기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 2x2=4로 모든 규범이 결정되어 '천한 것' 과 '귀한 것' 의 기준이 강제로 주어질 때,


오직 지하생활자만이 "에베베 아닌데?" 하고 비웃고, 조롱하고, 저주할 수 있다. 그것이 지하생활자가 세상을 저주하면서 살아있음을 감각하게 되는 이유임. 어쩌면 자신의 저주로 누군가 고통받는다면, 오히려 그 누군가를 보다 삶의 진실에 가깝게 인도해준 선지자이기도 하겠지.




이러니 가장 먼저 검은양복과 정면에서 충돌한다.


검은양복은 자기 행동이 악이라는 걸 인정하고 + 그러나 법이라는 기준을 우선적용해서 행위의 당위성을 부여한다.

지하생활자는 자기 행동이 악이냐를 따지기 전에 + '선악의 기준은 누가 정해준거지?' 라고 기준의 허위성을 폭로한다.


<지하생활자의 수기>에서 인간이 어떤 선택을 내리는 기준은, 일단 이익은 확실히 아니라고 선을 긋는다. 거기서 검은양복의 목적인 이익은 무의미해진다. 베아트리체처럼 완전한 통제에 도달하는 건 모두가 불가능하니 그것만큼 정신승리도 없고, 마에스트로가 추구하는 숭고함은 그저 잘난 체 하는 상류사회의 말장난에 불과함. 골통트&데칼코마니는? 해석의 결론이 무엇이든 모든 것의 결말은 죽음인데? 인간은 정해진 기준을 가질 수 없다. 변덕스러움이 유일한 기준이지만, 변덕은 정해진 기준이 될 수는 없으니까.



지하생활자가 센세를 상대하려는 이유는 뭘까?

과거에 얼마나 패악질을 벌이다 갇혔는지, 왜 베아트리체처럼 즉결처형이 아니라 감금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센세를 상대하는 이유는, <지하생활자의 수기>와 지금까지 나온 언행을 보면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프랜시스가 처음 와서 풀어줄 때만 하더라도 지하생활자는 심약하고 체념해버린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자기한테 이래라저래라 참견한 순간 말투 바꾸면서 프랜시스한테 달려들었음. 이런 행동은 <지하생활자의 수기>에서 하인 아폴론한테 달려드는 주인공과 똑같은 행동으로, 자신이 남보다 우월하다는 상황에 취해야 괴로움을 견딜 수 있어서다.


게마트리아가 괴멸했다니 + 내가 그 명성을 드높이겠다

지하생활자에게 이 행동은 "나를 무시하고 감옥에 처박은 놈들은 다 털렸다" = "엌ㅋㅋㅋ거봐 내가 맞다니까ㅋㅋㅋㅋ" 에서 오는 우월감이다. 자기보다 잘난 척 하던 애들이 보기좋게 작살났으니 얼마나 통쾌하고, 덕분에 그동안 감옥에서 겪어온 오랜 고통의 시간이 그대로 생존전략이라는 의미를 인정받으니 얼마나 기분좋냐? 그런 우월감에 정신승리도 아니고 아주 오르가즘을, 아니 오르가즘마저 넘어 삶의 의지를 불태우는 모습은 풀려나자마자 즉시 '여기서 제일 잘난 놈',



'학원도시 키보토스의 선생' 이라는 상대에게 최적화된 공략법을 뚝딱 만들어내는 능력처럼, 허세가 아니라서 더 소름끼치게 만든다.

'학생과 선생' 이라는 장르의 룰 때문에, 게마트리아는 그냥 선생이랑 사이좋게 지내자는 선택지만 남았다. 베아트리체 빼고 다들 그걸로 만족해서 그렇지. 오히려 선생을 연구 대상으로 선회하기까지 함.



그런데 얘는 나오자마자 자기가 원래 알던 세팅도 아닌데 택틱쪄옴


베아트리체는 총학생회장이 남기고 간 에덴조약이라는 변수를 그저 병력! 무한한 병력! 처럼 스펙업에만 올인했지만, 지하생활자는 시작부터 초점을 선생과 학생의 관계에서 맹점을 찾는게 과연 리트하다 탈모온 비주얼에 걸맞는 능지다.


그럼 대체 어떤 맹점일까? 





지하생활자는 선생과 정보전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아비도스를 전장으로 골랐다.

선생이 처음 방문한 학교가 아비도스인 것처럼 지하생활자도 아비도스 스타팅을 골랐는데, '학원도시 키보토스' 로 바뀐 시점에선 드문 개념인 '죽음' 의 의미 운운하는 건 물론



'키보토스가 키보토스로 불리기 전의 세계' 에서 키보토스로 이어지는 공통점은 인격을 가진 '신비' 들이 있다는거임.

그게 왜 맹점이 되냐면.... 선생한테 타카나시 호시노는 타카나시 호시노라는 '학생' 이지, 같은 신비의 다른 이름인 새벽의 호루스가 아니다. 화면 밖의 블붕이라면 그 호루스가 현실의 이집트 신화에 나오는 그 호루스라는 걸 알지만, 화면 안의 선생은 '학원도시의 선생님' 이기 때문에,



학생을 학생으로만 대할 수 있지, '신비' 로서 대할 수는 없다는게 '학원도시의 선생' 이라는 역할의 맹점이다.

학생은 학생이지 신이 아니니까. 문제는 선생한테만 학생인거지, 사실 얘네들은 생김새는 같아도 총알 한 방이면 죽는 '그냥 인간' 선생과 다르게, 학생이면서 또한 신이다.




지하생활자는 '죽음' 의 의미를 안다. 키보토스가 키보토스라고 불리기 전, '죽임이 거의 관측될 일 없는 세계' 로 바뀌기 전을 알기 때문임.

그저 외부인이라서 그런게 아니다. 이전 세계가 어땠는지는 검은양복도 마에스트로도 대충 알겠지만 육체쯤이야 갈아끼우면 그만인 애들과 다르게... 상상해보자. 도스토옙스키의 인간관 형성에 결정적인 경험은 '사형수로서 시베리아의 수용소에 감금된 경험' 이었다.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에서 이름을 빌려왔다면, 게마트리아의 다른 애들처럼 이름과 육체가 연관된 상태겠지. 그렇다면 지하생활자를 위험하다 여김에도 불구하고 베아트리체처럼 죽이는 대신 가둬버린 건, 게마트리아의 다른 멤버들과 달리 얘만 '누군가 풀어주기 전까지 사형의 공포 속에 고통스러워하며 감금된다' 라는 상태를 강제할 수 있어서 가능했을거임. 


그런 문제를 제쳐두더라도 키보토스에서 '선생' 이라는 역할이 그저 외부인이라서가 아니라, '선생이기 때문에' 육체적 죽음에 몹시 취약하다는 건 학생들을 죽이기 어려운 것처럼 '키보토스라는 세계의 룰' 이라서 그럴거다. 베아트리체가 선생을 제거하려 노린 약점도 그거였고, 총학생회장은 일찌감치 그걸 내다보고 아로...


어?



선생은 누구보다 쉽게 '죽음' 을 경험할 수 있다.

당연히 '죽음의 공포' 를 매일매일 직면하고,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는 괴로움에 고뇌하다 미쳐 날뛰고 광분해야 마땅한 '인간' 이다. 그런 공포에서 진실로 자유로운 인간은 있을 수 없음. 죽음이라는 정해진 운명은 바꿀 수 없으니까. <지하생활자의 수기>에서 가장 열등하고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는 존재.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가 만들어준 '수정궁' 안에 갇혀 사는 존재. 지하생활자의 시선에서 선생은 그런 존재다. 


이 문제는 선생이 죽을 운명마다 끼어들어 '운명을 바꾸는' 존재, A.R.O.N.A. 덕분에 한없이 완벽에 가까운 수정궁이 되었지만 당장 그 원본 되는 프라나부터 프레나파테스를 지키지 못했다. 아로나는 에덴조약 때 한번, 최종편에서 한번씩, 선생이 생사의 경계로 다이빙하는 상황을 막지 못했음. 지금 상태는 프라나가 머물면서 싯딤의 상자도 불안정해졌고. 물론 이런 상황으로 바뀌더라도 선생이 죽음의 공포에 질려버려 어른의 의무를 저버린다거나, 자신의 생존을 위해 학생을 희생시킨다거나 하는 선택은 절대 안 할거임. 애초에 그런 선택지가, 화면 밖 블붕이에겐 선택지로 제시될 수가 없음. 키보토스의 선생이라는 역할에 딸린 룰이 그거니까. 



하지만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지 못하고 죽는다는 공포' 라면 어떨까?

유메 선배의 사인은 이미 복선이 나왔는데 호시노가 PTSD 와서 발작하기 직전에 노노미가 언급해줌. 



조난사.


이미 선생은 아비도스에서 조난사당할 위기를 몇번 겪어봤다. 유메 선배처럼 아비도스 학생회장도 조난사로 죽었다고 가정하면, 적어도 이건 아비도스의 지리를 몰라서 당하는 조난사는 아님. 길을 알고도 당할만한 상황이란거다. 그리고 이것도 이미 복선이 나왔음.



세리카가 납치당했을 때 찾아낸 방법은 '총학생회의 중앙 통신망에 접속해서 마지막 발신지를 추적한다'


납치당한 대상이 세리카라서 다행이지, 이 방법을 쓰려면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함

1. 세리카의 핸드폰은 불법적인 위치추적이 가능한 수준의 보안일 것

2. 총학생회의 중앙 통신망에 위치추적을 강제할 직권이 있을 것

3. 한 방에 기절시켜 납치 가능한 수준의 화력을 명중시킬 것


문제는 대상이 세리카에서 선생님으로 바뀔때다.

1. 싯딤의 상자는 데카그라마톤 본체를 데려와도 끄떡없는 수준의 보안임

2. 총학생회의 중앙 통신망은 선생의 직권이 필요함 (선생이 없으면 개입 못함)

3. '신이 아닌 인간이라 생사의 경계에 훨씬 가까운' 선생의 육체는 납치도 쉬움



슈퍼 아로나 실드가 철야하다 과로해서 기절하는 건 막지 못하는 것처럼, 데카르트와 카이저는 각각 마취제와 개머리판으로 선생을 '죽이지 않고 기절' 시켰다.

싯딤의 상자는 오파츠다운 보안 수준인데 샬레의 보안 수준은 진짜로 노숙자가 와서 마취제 꽂고 데려갈 수 있는 수준임. 



샬레의 보안은 쀼장이 빌딩등반으로 살펴봐도 사각지대가 많다. 그런데 이걸 '학생과 함께하는 선생님' 일때는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샬레를 표방하는지 그대로 열려 있지만, 입장 바꿔서 선생이 샬레 건물을 공략할 때는 그 사각지대를 누구보다 (당연히, 치히로보다) 더 잘 알아서 폭스잡을때 쓰려던 SOF를 꺼내게 했다. 선생이 학생을 이끌고 전투에 나서면 빈틈이 없는 만큼, 정작 선생 자신의 보안은 "샬레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야 한다" 처럼 이 문제도 모종의 '룰' 의 작용이라고 추측할 수 있음.




그리고 이런 추측을 다 제쳐두더라도 결정적인 맹점.

'세인트 네프티스 소유의 철도가 깔린 아비도스 외곽' 을 경계로, 거길 넘어가면 세리카가 말한대로 '어떤 연락도 닿지 않는다'.


호시노 구하러 가거나(구교사 본관) 성소 공략전(사막횡단열차와 철도) 때는 멀쩡히 통신했는데? 다르게 생각하면,

1. 아비도스 학교의 건물은 특수한 연락망에 연결되어 있다. (게마트리아가 굳이 구교사 본관 건물에 실험실을 지으라 요구한 이유가 된다)

2. 네프티스 그룹에게 이런 특수한 연락망을 세울 기술이 있다면 네프티스 그룹이 지은 다른 건물과 철도 옆에서도 연락망이 유지될 것이다.



(키보토스 최대 규모의 축제가 열리던 오아시스라면 아마 그 호수 전역과 주변까지 아우르는 연결망을 구축했을거다)


이러면 왜 네프티스 그룹이 아비도스의 채권을 전량매입하는지 이유를 알 수 있다.

1. 카이저 그룹은 네프티스 그룹의 자산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유형의 자산은 물론 철도부설권마저 못 가져오는 판국이다)

2. 네프티스 그룹이 이제야 개입한 이유는 "아비도스를 지키는게 아니라 기술유출을 막으려고" 가 목적이라면 설명이 된다.



(게임 안에서 비나의 모습을 '거대한 뱀과 고래를 섞은 모습' 이라고 제시해둔 걸 주목하자)

네프티스 그룹과 카이저 그룹이 가진 '어른의 사정' 까지 추측하면, 역시 비나가 원인일거임.


두 그룹은 여전히 철도부설권 두고 서로 견제하는 적대관계지만 도저히 답이 없는 비나를 상대하려면 힘을 합쳐야 했을거다.

카이저는 유일하게 학교 하나를 대체할만한 무력의 PMC를 가졌고, 네프티스는 비나가 활동하는 사막에서 연락망을 구축할 기술이 있다(고 가정하자). 두 그룹은 적대관계이므로 네프티스 그룹의 기술이 정확히 무엇인지 카이저 쪽에 알려줄 일은 없다. 따라서 이런 상황에 나서기 딱 좋은 검은양복이 두 그룹을 중재하며 여전히 구속력을 갖는 계약을 맺었을거라 추측할 수 있다. 아마도 이런 계약이겠지?


1. 카이저 그룹은 아비도스의 구교사 건물과 철도를 포함, 네프티스 그룹의 기술이 들어간 '땅'을 독점하여 매입할 권리를 갖는다.

2. 네프티스 그룹 입장에선 아비도스 학생회가 처분한 땅을 누군가 매입할 때마다 기술유출이 일어나지 않게 막아야 한다.

3. 그러나 카이저 그룹만 사간다면? 카이저 그룹만 네프티스 그룹의 기술을 '이용은 하지만 유출은 못하게' 제약하면 된다.



심지어 카이저 그룹 입장에선 정확히 어디에 방주가 묻혔는지 모르니 땅을 전부 사야했다. 거기서 비나가 돌아다니다 방주가 부서진다면?

최대한 빠르게 아비도스의 땅이 매물로 올라올 때마다 전부 사들이고, 빨리 매물로 올리도록 빚도 때려박고, 이미 있던 건물 위에 짓는게 아니라 아예 새로운 발굴기지를 지어야 된다. 이래나 저래나 네프티스의 손을 빌려야 한다. 만약 방주를 발견한다면? 키보토스 전체를 적으로 돌려도 방주의 무력이면 상관없다(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만약 네프티스 그룹이 방주에 대해서도 고대병기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면? 생텀 타워를 점령해야 방주를 작동할 수 있으니, 카이저는 쿠데타를 일으킬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실 방주는 고대병기가 아니므로, 카이저에서 이 사실을 발견하는 시점은 이미 쿠데타를 일으켜 키보토스 공공의 적이 된 상태일거임. 그런 상황에서 네프티스의 기술을 긴빠이해서 유출시킬 여유는 없을거고, 따라서 네프티스 그룹의 기술이 유출되는 일은 원천봉쇄된다.



그럼 지금 상황은 이미 맺어둔 계약이 여전히 구속력을 갖기 때문에, 두 그룹에서 서로 손해볼 일 피하려고 눈치싸움하는 상황이 된다. 카이저는 더이상 네프티스의 통신망을 이용할 필요는 없고, 여전히 계약은 유효하니 이용하던 통신망을 뜯어서 역설계로 긴빠이하는 선택지는 막혀있다. 그러나 네프티스는 카이저가 방주만 믿고 생텀 타워에 쿠데타 일으켰다 자멸할 줄 알았더니, 카야의 간섭으로 유야무야된 상황이다. 결국 네프티스는 카이저가 값을 부르는대로 아비도스 채권을 사갈 수 밖에 없고, 카이저는 카이저대로 만에 하나 제3자가 사가면 어쩌지~ 라고 불안해할 네프티스 그룹이 아니면 사갈 사람도 없게 된다. 




종합하면 지하생활자의 택틱은 이거다.

1. 네프티스와 관련된 일로 선생을 통신이 닿지 않는 사막에서 납치, 조난시켜 학생들이 선생을 구할 수 없는 상황으로 몰아간다.

2. 선생이 조난사할거라는 죽음의 공포에 빠진 '학생들' 에게 접근, '학생을 포기하고 신이 된다면' 선생을 구할 수 있다고 꼬드긴다.

3. 이것은 단순한 자퇴가 아니라 학생과 선생의 인(人)연을 끊는 방법으로, '신과 인간의 관계' 는 더이상 인(人)연이 아니기 때문이다.

4. 학원도시라는 장르에서 일어나선 안 될 일을 일으켜 세계의 '공식' 에 흡집을 냈다는 우월감을 만끽하면 뒷일은 아무래도 좋아진다.


그런데 지금까지 세운 가설대로라면, 지하생활자는 그런 뒷사정을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

적어도 네프티스 그룹의 의중과 호시노의 PTSD까지는 알아내야 세울 수 있는 택틱인데...



그게 가능한 원인은, 지하생활자가 알고 있을 '학원도시 스킨이 씌워지기 전의 신비' 로서 네프티스가 여기에도 있기 때문이다.

"장르가 바뀌더라도 네프티스에게는 무언가 허점이 있다", "그 허점은 죽음의 공포, 관계의 단절, 호루스의 후회와 관련되어 있다"





다음 글에서는 죽은 자의 애도를 주관하는 슬픔의 신, "신전의 여주인" 네프티스에 대해서 알아보자.





요약

<지하생활자의 수기> 내용 정리

하인 아폴론은 지하생활자와 같은 입장이지만 선택권이 없다. 지하생활자는 그런 아폴론 앞에서 '구원받을 기회' 를 내다버리며, 인간은 구원받을 수 없다고 선언한다.

창녀 리자는 도스토옙스키가 그려낸 "창녀라는 이유만으로 버림받은 그리스도" 이며, 지하생활자는 리자를 '부활' 시켜주는 척 '놀이' 하다가 아폴론 앞에서 내다버린다.

1시노는 아폴론에게, 유메 선배는 리자에게 대응된다


지하생활자가 세운 택틱 추측하기

"네프티스 그룹과 관련된 일로 선생이 아비도스 사막을 방문할 때 납치, (헬맛단의 세리카 납치와 비슷하게) 어떤 연락도 닿지 않는 사막에 조난시킨다."

유메 선배를 조난사로 잃은 호시노를 기폭제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는 죽음의 공포' 앞에서 대책위원회는 학생이길 포기하고 신이 되기를 강요받는다.

이전 세계의 신들이 키보토스의 학생들임을 아는 지하생활자는, 키보토스의 룰을 학생 스스로 벗어나 이전 세계(지하생활자가 플레이어였던 세계)의 룰을 따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