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 속보



#.

화요일





 "너 설마 자다 일어났냐?"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호준의 목소리에 재호는 두 눈을 찡그렸다. 아직 대화 한 번 제대로 안 했는데 눈치는 뭐가 이렇게 또 빠른 건지. 한 쪽 손으로 기지개를 켜며 재호는 책상 위에 놓여있는 디지털 시계를 힐끔 쳐다보았다. 시계의 앞부분에는 '08'이라는 숫자가 적혀있었다.




 "아이씨, 이번엔 또 뭐가 문제야. 아직 여덟 시잖아."


 "방금 일어난 거 맞네. 시계도 제대로 못 보는 거 보면."




 한숨과 함께 들려오는 핀잔에 재호는 다시 한 번 시계를 쳐다보았다. 아까는 '08'이라는 숫자만 보고 대충 여덟 시겠거니 짐작했는데, 이제 보니 그 옆에 '59'라는 숫자가 같이 적혀있다.




 "뭐, 네 말이 맞긴 하다. 앞자리는 8이니까 아직 여덟 시네. 아, 이제 아홉 시 됐다."


 "......"


 "우리 모꼬지 극단은 작가님의 정시 출근을 진심으로 기원합ㅡ"




 일순간, 웃음기가 잔뜩 서려있는 호준의 목소리에 재호는 빨간색 버튼을 눌러 전화를 끊었다. 어차피 저 뒤로 이어질 말들은 전부 헛소리일 테니 들을 이유도 없었다. 



 반쯤 감긴 눈으로 부스스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제 마신 맥주캔이 여기저기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것만 빼면 그래도 집 상태가 제법 양호하다. 가끔씩 친구나 가족이 올 때마다 이게 사람 사는 집이냐 잔소리를 제법 듣기는 하지만, 그래도 혼자 사는 집에서 이 정도 상태면 꽤 청결하다고 자부할 수 있다. 잡동사니들도 전부 구석에 몰아 공간까지 확보했으니 이 얼마나 쾌적한 환경인가.



 바닥에 나뒹굴던 맥주캔 두 개를 대충 구석으로 치운 다음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약간은 빠듯한 시간이지만 그래도 괜찮다. 이보다 이십 분은 더 늦게 일어나 준비했던 적도 많았다. 이 정도면 충분히 양반이다.



 재호는 핸드폰 잠금을 풀어 메신저를 확인했다. 늘 그렇듯 '300+'개의 메시지가 쌓인 단체 채팅방 사이에서 아직 읽지 않은 한 통의 개인 메시지가 와 있었다. 정민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 오늘은 못 갈 것 같습니나 >




 당일에 스케줄 변경이라니. 갑작스러운 소식에 재호는 미간을 찌푸리고서 다시 한 번 메시지를 쳐다보았다. 반 년 가까이 같이 지내는 동안 항상 규칙적으로 살아왔던 녀석이다. 갑자기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전에는 보지도 못했던 오타까지 내면서 메시지를 보낸 걸 보니 적잖이 중요한 일이 생긴 모양이다.




 "뭐, 어련히 잘하겠지."




 재호는 형식적인 답장 몇 마디를 건네고 핸드폰을 껐다. 설사 중요한 일이 생겼다 하더라도 재호가 상관할 바는 아니다. 지금 당장 재호에게 중요한 건 늦지 않고 극단에 도착하는 일이니까. 



 옷장에 걸린 옷들을 대충 걸쳐입고서 거울을 슬쩍 쳐다보았다. 이만하면 꽤 괜찮다 싶어 나가려던 찰나,




 - ♬




 느닷없이 울리는 진동음에 재호는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방금 보낸 형식적인 답장에 정민이 다시 답장이라도 보낸 걸까.




 < 오늘은 그래도 사람처럼 입고 올 거지? >




 "또 이런다."




 발신인에 적혀있는 '정호준'이라는 이름을 본 순간 재호는 한숨과 함께 메신저를 꺼버렸다. 당장 어제도 그렇고, 남이 옷 입는 일에 뭘 그리 신경을 많이 쓰는지 모르겠다. 까놓고 말해서 재호 자신이 무슨 무대에 올라가는 사람도 아니고, 그냥 무대 세팅만 해주면 되는 극본 작가인데 도대체 왜 그러는 건지. 



 재호는 다시 한 번 거울을 바라봤다. 적어도 스스로 보기엔 별다른 문제가 없어보였다. 무슨 거지마냥 다 뜯어져가는 누더기를 걸쳐입은 것도 아니고, 그래도 이 정도면 제법 양호하다.



 현관문을 열고서 다시 한 번 시각을 확인했다. 



 조금 빠르게 걷기만 하면 문제 없이 도착할 시간이었다.




*




#.

월요일





  오전 아홉 시, 후드를 푹 눌러쓴 다영이 태평한 걸음걸이로 카페에 들어왔다. 기색을 보아하니 어제도 밤새 술을 마시고 온 모양이다. 나이가 스물 아홉인데 어쩜 저렇게 컨디션 관리 하나도 제대로 못하는 건지. 가만히 다영을 지켜보던 준서는 끌끌 혀를 찼다.




 "어제는 또 누구랑 그렇게 마셨대?"


 "그냥 조금 마셨어."




 축 쳐진 목소리로 다영은 그렇게 말했다. 그러고는 가방에서 짐 몇 개를 주섬주섬 챙기더니 곧장 탈의실에 들어가 문을 쾅 닫아버렸다. 아무래도 오늘 역시 탈의실에서 화장을 마치고 나올 생각인가보다. 가끔씩 보면 일터를 제 집처럼 쓴다니까. 굳게 닫힌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준서는 시계를 힐끗 쳐다보았다.




 "저기, 시간 삼십 분 밖에 안 남은 거 알지?"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별로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지난 번에도 저렇게 탈의실에 콕 박혀있다가 두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겨우겨우 기어나왔던 사례가 있다.



 결국, 준서는 탈의실 쪽으로 다가가 문을 쿵쿵 두드리며 큰 목소리로 다시 한 번 질문했다. 그러자 다영은 줄곧 쓰고 있던 헤어 드라이기를 잠시 멈추더니 "알아"라는 짧은 답변을 내뱉고는 다시 드라이기를 돌리기 시작했다. 



 뭐, 알고 있다니 그나마 다행인 건가. 준서는 한숨을 푹 내쉰 다음 이것저것 로스팅 기계들을 만지기 시작했다. 고풍스러운 인테리어만큼이나 오래된 카페다 보니 로스터 기계 역시 매일매일 꼭 점검을 해줘야만 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까지 멀쩡히 돌아가는 게 신기할 지경이다. 그렇게 세심하게 다루는 것 같지도 않은데 대체 무슨 마법을 부린 건지. 혹여나 나중에 카페를 차리게 된다면 로스팅 기계만큼은 꼭 이 브랜드의 제품으로 사야겠다고 생각하게 될 정도다.




 "이런 기계는 언제쯤 내 돈으로 살 수 있으려나."




 나지막하게 말을 뱉어냈다. 준서에게 이 카페는 자신이 이루고 싶은 거대한 꿈과 같은 곳이었다. 짙은 색감의 나무 판자를 이어붙여 만든 내벽과, 그 위에 깔려있는 새빨간 체크무늬 카펫. '보통'이라는 규격과는 제법 거리가 있는 개성적인 디자인 때문에 준서는 프랜차이즈 카페 대신 이곳을 알바처로 선택했다. 



 막상 들어오고 나니 고지식하기 그지없는 사장과 지극히 아마추어스러운 동료 때문에 꽤 스트레스를 받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어찌저찌 괜찮다는 생각이다. 손님이 별로 오지 않아 업무 강도가 낮은 걸 생각해보면 페이도 꽤 좋은 편이니까.




 "여, 좋은 아침."




 슬슬 기계 점검을 마치고 오픈 준비를 하려던 찰나, 때마침 들어온 광태가 준서에게 인사를 건넸다. 항상 이맘때면 어김없이 카페에 등장하는 단골 손님이다. 준서 역시 광태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어 반가운 얼굴로 아침 인사를 맞았다.




 "너 키가 좀 큰 거 같다?"


 "네? 제가요?"


 "아닌가? 잠시만."




 광태는 잠시 가만히 있어보라는 말을 건네더니 한 손으로 준서의 키를 가늠해보기 시작했다. 끽해봐야 몇 센치 크지도 않았을 텐데 그런 걸로 가늠이 되려나.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오십도 넘게 먹은 아저씨와 겨우 그런 생각 하나로 말씨름을 하고 싶지 않았다.




 "스읍, 잘 모르겠네."


 "매일 보시는데 무슨 차이가 있겠어요. 늘 드시던 걸로 드릴까요?"


 "어어, 부탁해."




 준서의 말에 광태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자리로 돌아갔다. 탁자 위에 놓여있는 책들을 보아하니 오늘도 하루종일 책만 읽다 돌아갈 생각인가 보다.



 한적한 카페들은 이렇게 몇몇 단골 손님들의 아지트로 변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광태처럼 푹신한 의자 위에 앉아 하루종일 책을 읽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노트북을 들고 와 한쪽 벽에 충전기를 꽂아놓고 업무를 보는 사람도 있다. 돈을 내고 이용하는 손님이니 별다른 불만사항은 없지만, 하루종일 제 집처럼 사용하고 있는 걸 보면 여기가 카페인지 게스트하우스인지 이따금씩 헷갈리기도 한다.




 "죄송합니다. 조금 늦었네요."




 기계에서 에스프레소를 내리던 와중, 정민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카페로 들어왔다. 퀭한 기색을 보아하니 이쪽도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저 사람, 저렇게 지각하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그런 생각이 스쳐갔다. 별로 존재감이 없는 사람이라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적어도 이렇게 늦은 시각에 정민을 마주했던 기억은 없다. 무언가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걸까. 내심 궁금증이 들었지만 묻지는 않았다. 공적인 관계에서 사생활을 캐묻는 건 실례니까.




 "그러고보니 오늘 다영이는 출근을 안 했나?"




 카운터 쪽을 빤히 바라보던 광태가 대뜸 질문을 던졌다. 늘 북적였던 카운터 자리가 오늘따라 묘하게 공간이 남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준서는 광태를 바라보며 "잠시 일이 생겨서요. 곧 나올 거예요."라고 형식적인 대답을 던져주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런 부분도 꽤나 불만이다. 대체 왜 이 한적한 카페에 알바를 세 명씩이나 끼워넣은 걸까. 다영이 매번 갖가지 핑계를 대며 스리슬쩍 빠지는 덕분에 얼추 밸런스가 맞아오기는 했지만, 한 명이 빠져야만 인원 운용이 깔끔하다는 점에서 이미 마이너스다. 



 대체 사장은 무슨 생각으로 카페를 운영하는 걸까. 실제로 몇 번은 사장과 직접 이야기를 나눠볼까 생각하기도 했었지만, 지난 번에 몇 마디 대화를 섞었던 경험을 떠올리면 곧장 싫증이 나버리곤 했다. 그렇게 짧은 몇 마디에서 고지식함을 드러낼 수 있는 건 쉽지 않다. 아마 카페에 대한 이야기를 해도 그는 한결같은 답답함을 드러낼 거다.




 "앗, 오셨어요?"




 어느새 단장을 마치고 나온 다영이 환하게 웃으며 광태와 정민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하던 방금 전 모습은 대체 어디로 간 건지. 준서는 다영의 모습을 바라보며 속으로 경악했다. 



 여자는 단장할 때 성격도 같이 바뀌는 걸까. 이미 많이 봐온 모습임에도 통 익숙해지지를 않는다.




 "오늘 따라 채은 씨가 늦으시네요."




 이리저리 가게를 살피던 다영이 한쪽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평소였다면 광태보다 먼저 카페에 들어온 채은이 이미 테이블에  앉아있었겠지만, 광태가 들어온 지 이십 분이 지나도록 그 테이블은 주인 없이 휑하니 자리에 놓여 있다.




 "뭐, 오늘은 조금 늦으시나 보지. 사람이 늘 규칙적일 수는 없잖아."




 그렇게 말하면서 준서는 정민을 힐끔 쳐다보았다. 평소에도 별다른 잡담 없이 묵묵히 일만 하는 사람인지라 크게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순간적으로 움찔하고 움직이는 모습에 준서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감정 없이 기계처럼 일만 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꼭 그런 건 아닌가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정민에 대한 이야기를 몇 번 들어본 경험도 있다. 이 카페에 처음 들어왔을 시절, 인수인계를 해주던 선배는 이따금씩 정민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을 때가 있었다. 이전에는 정말로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고 이것저것 썰들을 풀어줬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공감하기 힘들었다. 지금의 이미지를 생각해보면 워낙에 터무니 없는 이야기라 도무지 상상이 안 됐기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주 1회에서 주 2회 업무로 바뀐 이후에 성격이 저렇게 변했다고 하는데, 고작 그런 해프닝 하나로 사람이 바뀌었다는 이야기에는 더욱 공감하기 힘들었다. 준서가 그 선배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유일하게 공감했던 부분은, 그런 이야기들을 시작하기 전에 '믿기는 힘들겠지만'하고 말하던 부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조금은 든다. 일 년 가까이 일하면서 말 몇 마디 제대로 섞어보지도 못했기 때문에 준서는 백정민이라는 사람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그나마 유일하게 알고 있는 사실은 그가 감정 없이 기계처럼 일만 한다는 내용 하나 뿐. 그러나 그마저도 저렇게 움찔거리는 모습을 보면 사실이 아닌 것 같다. 



 어쩌면 정민이라는 사람의 본모습은 그 선배가 이야기했던 그대로의 모습이 아닐까. 물론, 여전히 믿지는 못하지만 말이다.



 준서는 가볍게 고개를 내젓고 눈 앞에 놓인 에스프레소 잔에 신경을 집중했다. 항상 규칙적으로 살아오던 두 사람이 지각을 해서 그런가, 평소와 다르게 무언가 잡다한 생각들이 준서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정말이지 요상한 하루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짤랑거리는 도어벨 소리가 준서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줄곧 오지 않던 채은이 드디어 제자리에 나타나기라도 한 걸까. 안면에 한껏 힘을 주며 밝은 표정으로 돌아선 그 순간, 눈 앞에 펼쳐진 이질적인 광경에 준서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형광색 조끼를 입은 낯선 남자 두 명이 준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이 입은 조끼 한 켠에는 '경찰'이라는 글자가 적혀있다.




 "아이고, 수고하십니다. 혹시 이 카페 사장님 되십니까?"




 앞머리를 푹 덮어쓴 중년 남성이 준서에게 한 발짝 다가오며 말했다. 살갑게 웃는 그 표정 속에는 왠지 모를 차가운 기운이 섞여 있다. 




 "그, 저기, 카페 사장은 아니고요. 사장님은 지금 여기에 안 계셔서..." 


 "아, 그럼 평소에도 이렇게 종업원 분들끼리 운영하시는 겁니까?"


 "네, 네."




 자신도 모르게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별다른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어째서 범인이라도 된 것처럼 온몸이 떨리는 걸까. 애써 감정을 다듬어보지만 두려운 기색만큼은 숨길 수가 없다.




 "저기, 죄 지으신 거 있어요?"


 "네?"


 "아니, 아까부터 엄청 떨고 계시길래."


 "아, 아뇨, 그런 건 아닌데, 그다지.."




 갑작스러운 질문에 어버버 대답을 이어나가자, 준서와 대화를 나누던 남자는 호탕스럽게 웃고서 장난이라며 준서의 어깨를 몇 번 두드렸다. 그러고는 조끼 주머니 속에서 수첩 하나를 꺼내더니 "한 가지 질문이 더 있는데," 하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채은 씨에 대해 알고 계시는 정보가 있습니까? 뭐든 좋습니다. 그 사람에 대한 정보여도 좋고, 최근 행적에 대한 이야기여도 좋고."




 이채은.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불길한 직감이 준서의 뇌리를 스쳤다. 오늘따라 유난히도 늦는 채은과, 그녀 대신에 갑자기 찾아온 경찰. 옴짝달싹 입을 움직이던 준서는 형사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요?"


 "아, 그게 말이죠. 그러니까ㅡ" 


 "실종됐습니다."




 준서의 질문에 형사가 양손을 벌리며 무언가 설명을 하려던 찰나, 줄곧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젊은 남성이 짧은 답변으로 말을 대신했다. 그러고는 앞선 형사와 마찬가지로 준서에게 가까이 다가오더니, 미간을 찌푸린 채 준서를 노려다보며 말했다.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이채은 씨에 대해 알고 계시는 정보가 있습니까?"





*




#.

수요일





 "정말이지, 엉망진창이네."




 난잡하게 널브러진 필기구와 사탕 껍데기들을 바라보며 수연은 착잡한 표정으로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다 쓴 필기구랑 쓰레기는 제대로 정리해달라고, 그렇게 부탁을 했는데도 아이들은 어쩜 이렇게 말을 안 듣는 건지. 



 수연은 깊게 한숨을 내쉰 다음 바닥에 나뒹구는 쓰레기와 필기구를 하나하나 줍기 시작했다. 곧 있을 레슨 시각을 생각해보면 지금부터라도 부지런히 치워야 한다.



 그렇게 한창 학원 내부를 정돈하던 와중, 느닷없이 울리는 진동벨 소리에 수연은 잽싸게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오늘 레슨을 받는 정민에게서 온 연락이다. 




 "아, 네 정민씨! 혹시 무슨 이유로 연락 주셨을까요?"




 이유를 묻자 수화기 너머로 정민의 말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것저것 사족이 붙기는 했지만, 요점만 간단하게 말하자면 오늘 자신의 집을 사용하기 곤란하니 이 학원으로 와도 괜찮냐는 내용이었다.




 "네네, 당연히 가능하죠! 그럼 똑같은 시간에 학원에서 뵙겠습니다!"




 그 뒤로 몇 마디 대화를 주고 받은 다음 수연은 전화를 끊었다. 굉장한 희소식이다. 안 그래도 정민의 집까지 걸어가는 시간 때문에 청소 시간을 빠듯하게 잡았던 건데, 정민이 이 학원으로 와준다면 수연 역시 시간 분배가 여유로워진다.



 쓰레기를 줍느라 수그리고 있던 허리를 일으키니 으그극, 하고 입에서 소리가 튀어나왔다. 최근에 몸을 너무 무리하게 굴린 걸까. 예전에 피아노 학원 일만 할 때는 몸에 이상을 느낀 적이 없는데, 이번에 취미반 레슨까지 시작하고 나니 몸에 급격하게 노화가 온 기분이다. 



 요전번에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한테서 아줌마 같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겉으로 표현은 안했지만 수연에게는 꽤나 큰 상처였다. 혈기 넘치던 대학생 시절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데 벌써 아줌마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부정하고 싶었지만 마땅히 변명할 거리가 없어 결국은 체념하고 말았다. 확실히, 수연의 몸은 이전 대학생 시절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무언가 불만이 있는 건 아니었다. 애초에 이렇게 몸을 혹사시키려고 새로 시작한 일이었으니 불만 따윈 없고 오히려 만족하는 편이다. 하루종일 별다른 잡생각 없이 시간을 보낼 수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니까. 



 사람은 본디 여유가 생기면 요상한 감정과 생각에 사로잡혀 에너지를 낭비하는 법이다. 적어도 수연은 그렇게 생각한다.




 *




 "안녕하세요! 한 주 동안 잘 지내셨어요?"




 이마 사이로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수연은 밝은 표정으로 정민을 반겼다. 온몸에 열기가 화악 달아오르는 것이, 당장에라도 손으로 부채질을 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수연은 내색 않고 정민을 학원 안쪽으로 안내했다. 



 참아야 한다. 지금은 어디까지나 비즈니스인 상황이니까.



 실은, 조금 전 청소 시간에 살짝 여유를 부린다는 것이 그만 사고를 일으키고 말았다. 곧 도착한다는 정민의 문자를 받고서야 현실을 직시한 수연은 그제서야 부리나케 뛰어다니며 청소를 진행했다. 그 결과 다행히 시간 안에 정리를 끝낼 수는 있었지만, 뭐, 보다시피 몸에 열불이 제대로 나버렸다. 정말이지, 이럴 때 보면 청소도 운동이라니까.




 "저번에도 여기서 레슨한 적이 있었나요?" 힐끗 쳐다보며 묻자 정민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면 여기 그랜드피아노 쪽에서 하실까요? 다른 방들은 성인이 들어가기에 조금 좁아서요."




 사실이었다. 애초에 아이들을 가르치려고 만든 피아노학원이었으니 성인이 연습을 하기에는 조금 좁은 감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 피아노들은 건반 상태가 영 좋지 않다. 몇몇 건반에서 소리를 내지 못하는 건 기본이고, 한 술 더 떠서 아예 생뚱맞은 음을 내는 피아노도 몇 개 있다. 물론, 그렇다고 이 그랜드피아노 상태가 좋다는 건 아니지만.




 "아, 저기. 실은 이 피아노 조율 상태가 별로 안 좋아서요. 아마 집에서 쓰시던 것보단 소리 상태가 나쁠 거예요." 생각난 김에 말을 덧붙였다. 정민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괜찮다 말해주었다.




 그렇게 평소와 다름없는 레슨이 시작됐다. 예전에는 체르니 같은 기본적인 악보들을 가르치며 레슨을 해왔지만, 두어 달 전부터는 'Luv Letter'로 레슨을 해오고 있다. 이 악보만큼은 꼭 쳐보고 싶다며 정민이 직접 부탁했기 때문이다.




 "거기 아르페지오는 조금 더 부드럽게 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잠깐 손 떼보시겠어요? 페달 부드럽게 밟으시면서, 이런 느낌으로."


 "꾸밈음 넣는 게 곡 전반적인 느낌은 더 괜찮은데, 일단은 꾸밈음 빼고 연습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지금 보시면 박자가 하나씩 밀리고 있거든요."


 "도약 하신다고 강세 갑자기 무너지면 안 돼요! 원래 연주하시던 느낌 유지하면서, 이런 식으로 가셔야 하거든요."




 말하면서도 새삼 느끼는 부분이지만, 정민을 가르칠 때 말하는 내용은 대부분 기초적인 수준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애초에 취미반이니 이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싶다가도, '그래도 연습을 열심히 해오면 훨씬 연주가 깔끔할 텐데' 하는 아쉬운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실제로 몇 번은 꾸준한 연습이 필요할 것 같다며 정민에게 직접적으로 말해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정민에게서 돌아오는 건 연습할 시간이 부족하다는 지극히 상투적인 답변 뿐이었다.



 나름 피아노에 열정적이라는 사람이 뭐가 바쁘다고 연습할 시간 하나 내지 못하는 건지. 처음 만날 때만 해도 얼굴이 반반하게 괜찮아서 호감이었는데, 그런 일을 여러 번 겪고 나니 이제는 그냥 일적인 사이로 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 피아노, 왜 배우고 싶어요?




 취미반 수강생을 처음 만나는 날, 수연은 항상 똑같은 질문을 수강생들에게 던진다. 그리고, 그 질문에 수강생들은 제각기 다른 대답을 내놓는다. 순전히 어떤 곡을 치기 위해서라던가,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라던가, 자신만의 취미 하나를 갖기 위해서라던가. 저마다의 이유는 다르지만 결국은 이 세 가지 경우 중 하나로 귀결되는 경우가 보통이다. 그런데, 정민의 대답은 조금 달랐다.




 - 꼭 이루고 싶은 경험이 있어서요.




 피아노로 이루고 싶은 경험. 혹시나 공연이나 콩쿠르를 나가고 싶은 거냐 묻자 정민은 아니라고 답했다. 그럼 도대체 피아노로 뭘 이루고 싶은 걸까. 궁금증이 들어 몇 가지 질문을 더 던져보자 정민은 잠시 고민하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 잘은 모르지만, 음악은 기억과 조금 동떨어진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요. 보통 악보 같은 걸 한 번 외우면 굳이 머릿속으로 생각하지 않아도 몸이 저절로 움직이잖아요? 그래서, 그런 느낌으로 무언가 이루고 싶은 게 있어요.




 하나도 이해할 수 없는 아리송한 답변이었다. 하지만 피아노에 대해 굉장한 열정을 갖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그래서 수연 역시 그만큼 열심히 가르쳐주리라 결심했었는데, 설마 이렇게 연습도 제대로 안 해오는 불량 학생이었을 줄이야. 



 수연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면서 손목에 찬 시계를 힐끗 쳐다보았다. 이것저것 부족한 점들을 지적하다보니 어느새 오늘 레슨도 마무리할 시간이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그나저나, 무슨 안 좋은 일 있으셨어요? 오늘따라 안색이 조금 안 좋아보이셔서요."




 그렇게 말하면서 수연은 한쪽 손으로 조심스럽게 정민의 얼굴을 가리켰다. 실제로 오늘 레슨을 받는 내내 정민은 평소와 다른 구석이 있었다. 



 뭐랄까, 평소보다 표정이 조금 더 탁하다고 해야 하나. 당장 저번 주만 해도 무슨 지적을 받건 항상 웃는 얼굴로 피아노를 쳐왔었는데, 오늘은 요상하리만치 진지한 표정으로 변하는 일이 잦다. 무언가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저기, 그게..."


 "대답하기 껄끄러우시면 말씀 안하셔도 괜찮아요."




 지극히 사회적인 말투로 말하긴 했지만 진심이었다. 이런 공적인 사이에서 곤란한 개인사 따위 별로 캐묻고 싶지 않았다. 혹시나 그런 일을 빌미로 정민이 레슨을 그만둔다면 정말로 곤란해지는 건 이쪽이니까. 




 "감사합니다. 별로 이야기하고 싶은 내용은 아니라서요."




 상투적인 배려에 정민은 감동이라도 한 듯 고개를 꾸벅 숙이며 죄송하다는 인사를 건넸다. 항상 웃기만 하던 정민에게서 오늘따라 새로운 표정이 많이 보인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럼,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늘 그래왔듯 밝게 인사를 건넨 후, 정민이 나가자 수연은 축 처진 어깨로 비틀비틀 걸어가 자신의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일이 끝나고 나니 그제서야 하루종일 쌓인 피로가 몰려오는 기분이다. 수연은 잠을 떨쳐내기 위해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이 계집애는 왜 답장이 없어."




 혹시나 싶어 가장 먼저 메신저를 확인해봤지만, 역시 오늘도 채은의 답장은 돌아오지 않았다. 심지어 읽지도 않았다. 지난 주 목요일에 보낸 문자인데 아직까지 확인도 안했다니, 적어도 수연의 상식 안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아무리 못해도 하루 안에는 꼬박꼬박 답장하던 친구였는데.




 "까먹었으려나."




 혹시나 싶어 문자 하나를 추가로 보냈다. 확실히 해두기 위해 이번에는 채은과 가장 친하게 지내는 친구한테도 연락 한 통을 넣었다. 아마 이번에는 어떤 식으로든 답장이 돌아올 거다.



 용건을 끝낸 뒤 수연은 습관적으로 캘린더를 열었다. 가끔씩 일정에 변동이 생기기도 하다 보니 이렇게라도 주기적으로 확인을 해줘야 비로소 안심이 된다. 수연은 캘린더의 카테고리 분류를 '일' 단위로 바꾼 다음 내일 있을 일정을 찬찬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나, 확인은 오래가지 못했다. 캘린더 한쪽에 새겨진 두 글자 단어를 본 순간, 수연은 그대로 시선을 멈추고야 말았다.



 [ 기일 ]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끄고는 멍하니 앞을 바라봤다. 그동안 애써 무시해왔던 잡생각들이 한꺼번에 물밀듯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아, 싫다. 대체 저런 일정은 왜 기록해놓은 거야. 과거의 자신에게 한껏 신경질을 부려보지만 의미없는 짓이다. 정작 지금도 수연은 그 일정을 캘린더에서 지우지 않고 있으니까.



 벌써 일 년이구나. 불현듯 떠오른 기억에 가슴 끝 부분이 시큰거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기억도 안 나는 사람인지라 눈물 같은 건 나오지 않지만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아리다. 그 사람에 대한 동정심이라도 남아있는 걸까. 아니면, 그저 나를 낳아준 사람에 대한 단순한 미련인 걸까.



 어릴 적 기억을 돌이켜보아도 엄마에 대해서는 썩 좋은 기억이 없다. 그녀는 화가 많은 사람이었다. 집안에서 남편과 매일같이 싸우는 건 기본이었고, 가끔씩은 수연을 찾아와 별 이상한 소리를 늘여놓으며 훈육이랍시고 때리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수연은 집에서 고성이 들리기 시작할 때면 침대 밑이나 옷장 속으로 숨어버리곤 했다. 적어도 눈에 띄지 않으면 맞을 일도 없을 테니까.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녀는 마음이 아픈 사람이었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부모 없이 혼자 살아온 탓인지 그 사람은 어딘가 마음이 망가져 있었다고 한다. 그 사실을 듣고 나니 그녀의 행동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좋아진 건 절대로 아니었다. 동기야 뭐가 됐던, 그녀가 수연에게 저지른 일들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8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나고, 수연이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날 아빠는 결국 그 사람과 결별을 고하고 말았다. 자신은 몰라도 수연만큼은 이런 환경 속에 방치시켜둘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 뒤로 수연은 그 사람을 마주하는 일이 없었다. 간간이 그 사람에게서 보고 싶다며 문자가 오긴 했지만 답신은 커녕 읽지도 않고 내버려두었다. 별로,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매년마다 꾸준히 연락은 왔지만 한 번도 연락을 받아본 적은 없었다.



 그 사람이 마지막으로 연락을 보낸 건 작년의 일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의 연락처로 다른 사람이 연락을 보냈다. 몇 년 전부터 앓고 있던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됐으니 장례식에라도 한 번 쯤 와달라 부탁하는 내용이었다. 조금은 흔들렸다. 별로 좋은 기억으로 남은 사람은 아니지만 얄팍한 동정심이 수연의 마음을 흔들었다. 이렇다 할 가족 없이 평생 동안 혼자서 살아온 사람을 기억해줄 사람 따위 아마도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전하자 아빠는 그 날 일이 바빠 가지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 아마도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중요한 일정이 있으면 아빠는 항상 검정색 유성매직으로 달력에 일정을 적어놓는다. 아무래도 가기 싫으신 거겠지. 수연과 달리 아빠는 그 사람을 기억할 이유가 없다. 



 결국, 수연은 혼자서 그 장례식을 다녀왔다. 예상대로 조촐한 장례식이었다. 그 사람과 꽤 친했던 사이로 보이는 몇몇 아주머니들만 흐느낄 뿐, 말소리 하나 없이 고요한 장례식장에서 수연은 메마른 감정으로 조의금을 넣고 왔다. 



 한 사람의 죽음이 이렇게 조용하게 잊혀져도 되는 걸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수연은 몇 번이고 고개를 돌려 장례식장을 쳐다봤다. 저렇게 슬프게 흐느끼는 친구들조차도 몇 년이 지나고 나면 그 사람의 존재를 잊어버릴 거다. 그들에게 있어 그 사람은 수많은 친구들 가운데 한 명의 친구일 뿐이니까. 



 이 세상에 그녀를 기억해줄 사람이 존재하긴 할까. 그 뒤로 수연은 그런 생각을 줄곧 해왔다. 어쩌면 자신 말고는 아무도 그녀를 기억해주지 않을 거란 생각이 그때부터 수연의 머릿속을 떠나가질 않았다.



 고개를 빠르게 저어 생각을 털어냈다. 이런 잡다한 생각에 또다시 시달리고 싶지는 않았다. 어디까지나 중요한 건 현재다. 지금 내 가족보다 중요한 건 없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일보다 중요한 건 없고, 지금 내가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건 없다.



 그렇기에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챙기려던 찰나, 갑작스럽게 핸드폰이 울렸다. 조금 전에 보냈던 메시지에 답장이 온 모양이었다. 채은이 보낸 건 아니었고, 아까 같이 보내두었던 친구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미리보기로 대충 내용을 보아하니 채은이랑 관련해서 무언가 전할 소식이 있는 모양이었다.



 별 생각없이 핸드폰 잠금을 푼 다음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확인했다.





*




#.

금요일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봤다. 자고 싶은데 도무지 잠이 오지를 않는다. 깜빡하고 켜놓았던 알람이 방금 전에 시끄럽게 울려버린 탓이다. 이대로면 새벽 다섯 시는 커녕 네 시가 되기도 전에 뻗어버릴 텐데. 



 이리저리 자세를 바꿔가며 잠을 청해보지만, 암막 커튼 사이로 새어나오는 햇빛이 거슬려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미치겠네...."




 결국, 지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커튼을 열어젖혔다. 그러고는 침대 위에 풀썩 앉아 멍한 눈길로 앞을 바라봤다. 정신력만으로 다섯 시까지 버틸 수 있으려나. 이리저리 시선을 굴리던 지아는 책상 구석에 놓아둔 비타민 알약을 꿀꺽 삼켰다. 



 효과가 있을진 모르겠지만 이런 알약에라도 의존할 수밖에 없다. 저번 방송 때처럼 마무리도 제대로 못하고 곯아떨어지는 추태를 보이긴 싫었다.




 "딱 두 살만 젊었어도 괜찮았을 텐데, 휴우."




 반 쯤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이었다. 이 년 전 인터넷 방송을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체력이 꽤 쌩쌩했으니까. 그때는 알바 일이랑 같이 겸업하며 지냈음에도 한 번도 힘들다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핸드폰을 킨 다음 하루 동안 밀린 메시지를 확인했다. 대부분은 '재동부' 채팅방에서 온 메시지였다. 지아의 스트리머 닉네임인 '재밍'과 '노동부'를 합성해서 만든 업무용 채팅방이다. 보통은 지아의 유튜브 영상 편집과 관련하여 지아와 편집자들 사이에서 피드백이 오가는 곳이지만, 가끔씩 잡담에 불이 붙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채팅 수백 개가 쌓이기도 한다. 오늘 역시 메시지 '300+'개가 밀려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잡담으로 한동안 시끌벅적했던 모양이다.



 재동부 말고도 메신저에는 여러 채팅이 와있었다. 프랜차이즈 피자 가게의 할인 행사 광고 문자라던가, 장학재단의 학자금 이자 관련 안내 문자라던가, 뭐 아무튼 여러 가지 채팅들이 늘어선 모습이다. 함께 방송했던 남자 스트리머들의 개인 채팅이 군데군데 보이긴 하지만 딱히 답장할 마음은 없었다. 적어도 방송 쪽으로는 또래 이성과 별로 가까워지고 싶지 않았다.




 "아, 맞아. 오늘 금요일이구나."




 별 생각없이 채팅 목록을 내리다 문득 채팅 하나를 발견했다. 정민이 개인 채팅으로 작업 영상을 보내놓은 모양이었다. 평소에는 재동부 채팅방에만 작업물을 올려놓지만, 가끔씩 저렇게 채팅방이 시끄러울 때면 개인 채팅으로도 똑같은 작업물을 보내곤 한다. 



 잡담 사이에 끼어있는 작업물을 찾기는 어려울 테니 보기 편하라고 이렇게 올리는 거겠지. 작은 차이지만 이런 세심한 손길 하나하나에서 무심코 친절을 느끼게 된다. 스트리머들 사이에서 정민의 이름이 유명한 데에는 분명 이런 이유도 있을 거다.



 시청자들에게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모양이지만, 적어도 스트리머들 사이에서 백정민이라는 이름은 꽤나 유명하다. 여타 네임드 편집자들과 달리 자신만의 스타일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어느 집단에 들어가던 그곳의 편집 스타일을 빠르게 익히고 전체적인 모양새를 다듬어주기 때문에 편집자를 다수 고용하는 대형 방송들 사이에서는 꽤나 인기가 많다. 다른 편집자들도 정민의 편집 영상을 보고 영감을 받아 전체적인 퍼포먼스가 좋아지는 경우가 제법 많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정민이 기존 스트리머와 계약을 해지했다는 소문이 나돌았을 때 지아는 누구보다 빠르게 정민과 접촉해 연락을 시도했다. 한 주에 딱 한 번, 금요일만 영상 제작이 가능하다는 까다로운 조건이 나왔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다른 요일들은 나머지 편집자들로 채우면 그만이고, 지아가 노리는 건 정민의 영상을 통한 편집부 전체의 실력 향상이었으니까. 



 자신과 스타일이 다른 영상을 보고 배우는 것과, 비슷한 영상을 보고 배우는 것에는 분명히 큰 차이가 있다. 잠깐이나마 편집에 손을 대봤던 지아는 그 사실을 명확하게 알고 있다. 실제로도 정민이 이곳에서 일하는 반 년 동안 효과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대충 귀여워보이는 이모티콘 하나를 같이 보냈다. 그리고는 메신저를 끄려던 찰나, 곧장 답장이 돌아왔다.




 < 아 그리고 >


 < ? >


 < 지난 번에 두고 갔던 시계 말인데요, 오늘 찾아간다고 말씀드렸던 거 기억하시죠? >




 아차. 문자를 확인하자마자 지아는 본능적으로 거울을 확인했다. 오늘은 카메라 없이 방송하는 날이라 화장 같은 거 하나도 해두지 않았는데. 




 < 그, 세 시간만 있다가 오시면 안 될까요? >


 < 그때면 방송 시작하시지 않나요? >


 < 어차피 잠깐만 전해주면 되는 거니까요 >


 


 일순간, 문자가 멈췄다. 고민하고 있는 걸까. 핸드폰을 쥐고 있는 두 손에 묘하게 힘이 들어갔다.




 < 알겠습니다 >




 한 박자 늦게 올라온 답장에 지아는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간단한 용건이라도 공적인 사이로 만난 사람에게 쌩얼을 내비치고 싶지는 않았다. 



 시계를 힐끗 쳐다보니 시침은 어느덧 숫자 4를 가리키고 있었다. 일찍 일어나버린 덕분에 그래도 방송준비는 여유롭겠다 싶었는데, 아무래도 오늘 역시 빡빡하게 시간을 굴려야 할 듯 싶다.




*




 - ♬




 일곱 시가 다가오자 기다렸다는 듯 벨소리가 울렸다. 지아는 다시 한 번 거울을 확인한 후 잠옷 차림으로 현관에 다가갔다. 그리고는 버튼을 눌러 문을 여는 순간,




 "...오랜만이야."




 생각치도 않았던, 아니, 기대치도 않았던 사람이 지아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박태주. 지아와 5년 동안 교제한, 정확히는 교제했었던 사람. 



 지아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대신 한 발짝 뒷걸음쳤다.




 "섭섭하게 왜 그래. 그렇게까지 경계할 건 없잖아."


 "뭐 하러 왔어?"




 다시는 보지 않을 줄 알았다. 볼 생각도 없었다. 둘이서 오랫동안 이어왔던 5년의 교제가 끝난 건 태주가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워서였으니까. 현장을 들킨 순간 관계에 끝을 고한 것도 태주였다. "어쩔 수 없네."라고 머리를 긁적이면서 이별을 고하던 모습을 지아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약속이라도 있나봐?" 지아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고는 말한다.


 "뭐 하러 왔어요?"


 "뭐야, 그 존댓말은."


 "할 이야기 없어요. 돌아가 주세요."


 "아니, 이야기가..."




 일순간 태주가 말을 끊었다. 옆집에서 느닷없이 사람이 나왔기 때문이다.




 "아하하, 안녕하세요." 




 멋쩍게 웃으며 인사하자 그 사람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두 사람 옆을 지나갔다.




 "...두고 왔던 짐만 찾으러 왔을 뿐이야." 사람이 지나가자 태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헤어진 게 언젠데 아직도 당신 짐을 그대로 두고 있을 리가 없잖아요."


 "거짓말. 그렇게 덤벙대는 네가 내 짐만 깔끔하게 치워냈을 리 없잖아. 당장 네가 입고 있는 옷도 그렇고."




 그렇게 말하면서 태주는 지아가 입고 있는 잠옷을 눈짓으로 힐끗 가리켰다. 그 말대로였다. 지금 지아가 입고 있는 옷은 예전에 태주가 선물해준 옷이었다.



 처음 헤어졌을 때는 미련에 사로잡혀 태주의 흔적을 정리하지 못했었다. 사람의 감정이란 건 어쩔 수 없는 건지, 배신당했다는 현실을 자각했음에도 지아는 마음 속에서 태주를 쉽게 지워낼 수가 없었다. 언젠가, 시간이 지나고 마음이 조금 진정되면 정리하겠다는 생각과 함께 무심코 계획을 미루기 일쑤였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태주라는 사람이 지아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지아는 이제 무엇이 태주의 짐인지 까먹어버리고 말았다. 확실하게 기억나는 것들은 전부 치워냈지만, 친구한테서 받은 건지 태주한테서 받은 건지 헷갈리는 물건들은 쉽게 치워낼 수가 없었다. 



 이 잠옷도 그 중 하나였다. 분명 혜민이가 선물해준 걸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오늘 방송이 끝나는 대로 이 옷도 가져다 버려야지.




 "너도 내 짐 같은 거 집에 놓고 싶지 않잖아. 필요한 물건만 챙기면 바로 돌아갈게, 정말로."




 되도 않는 궤변이었다. 태주에게 필요한 물건 따위 이 집에 남아있지 않다. 그리고, 그건 아마 태주 역시 알고 있을 거다. 지아가 아무리 덤벙대는 성격이라도 남자 물건과 여자 물건을 헷갈릴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으니까. 그럼에도 태주가 저렇게 애원하고 있는 건 지아의 집에 쳐들어온 구실을 얻기 위해서다. 



 이대로 어찌어찌 돌려보낸다 해도 태주는 반드시 돌아올 거다. 지아가 알고 있는 태주는 그런 사람이다. 짐을 아직 돌려받지 못했다는, 그런 구실로 태주는 몇 번이고 이 집에 돌아올 거다.



 ㅡ별다른 수가 없었다.




 "진짜 잠깐이에요."




 한숨과 함께 현관문을 열었다. 기다렸다는 듯 집안으로 들이닥친 태주는 멋대로 거실에 들어가 불을 켰다.




 "별로 달라진 건 없네."




 태주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리고 소파에 앉았다.




 "앉지 마." 본능적으로 소리쳐 말했다.


 "조금쯤은 이야기를 들어줘."


 "짐을 가지러 온 거 아냐?"


 "알았으니까 진정해. 언제부터 그렇게 성깔 있는 여자가 된 거야. 너 원래 그런 여자 아니잖아."




 말하는 말투가 몹시 거슬렸다.




 "볼 일 없으면 지금 당장 나가."


 "아니, 그러니까 볼 일은 있대도. 그냥 몇 마디 이야기만 하고 싶을 뿐이야."


 "무슨 이야기? 상처를 주어 미안하다는 식의 말이라면 필요없어. 나, 이제 너 같은 건 잊었고 떠올리고 싶지도 않아."




 본심이었다. 취업도 제대로 못한 채 알바 생활만 전전하던 예전이면 몰라도, 하루하루 바쁘게 방송을 이어가는 지금의 생활 속에서 태주를 떠올릴 시간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 이제 지아에게 태주는 먼 과거의 사람이다.




 "저기, 나 이래저래 일이 많았거든."




 태주가 깍지를 끼고 멋대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아는 본의 아니게 자리에 선 채 그 이야기를 듣는 형태가 되었다.



 태주는 바람을 피우던 그 여자와 헤어졌다고 말했다.




 "그 여자와 사귀는 와중에도 계속 네가 생각나더라. 생각해보면 내가 제일 행복했던 순간은 너와 함께했을 때인 것 같더라고. 그래서 정리했어. 평생 후회할 것 같아서."




 태주가 진지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러나, 지아는 냉정한 눈길로 태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직감으로 거짓말임을 알았다. 헤어진 건 사실이겠지만, 태주 쪽에서 버린 것이 아니라 분명 버림받은 것이다.




 "정리할 겸 일도 관뒀어. 이제부터 너와 다시 한 번 시작해보고 싶어."




 이 말도 필시 거짓말. 아마도 못 견디고 뛰쳐나온 것이 아닐까.



 농담으로라도 결혼하겠다는 말이 서로 오가던 사이였었기에, 태주는 회사 동료들에게도 곧 결혼할 사람이라며 지아를 소개시켜주곤 했었다. 그러던 태주가 갑자기 지아를 데려오지 않기 시작했으니, 회사 안에서는 태주를 둘러싸고 안 좋은 소문이 틀림없이 퍼졌을 거다. 아마도 태주와 그 여자가 함께 다니는 모습을 회사 사람 중 누군가 본 게 아닐까.



 한 발짝 떨어져 태주를 지켜보니 그야말로 추악하기 그지없었다. 대체 어떻게 이런 사람과 5년이라는 시간을 교제할 수 있었던 걸까. 과거의 자신이 만들어낸 결과를 눈 앞에서 보고 있자니 지아의 마음속에서 묘한 자괴감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나랑 다시 시작해주지 않겠어?"




 담담한 목소리로 말해보지만 그런 말도 지아의 가슴에는 전혀 와닿지 않았다. 교제 중에 걸린 마법은 이미 풀렸다.




 "죄송해요. 그럴 수 없어요."




 지아는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말했다.




 "그쪽과 사귀던 5년 동안 행복했던 건 사실이에요. 그러니까, 그 기억은 행복했던 채로 그냥 묻어두고 싶어요. 원망 같은 건 하지도 않을 테니까 이대로 돌아가주세요. 다시는 찾아오지도 마시고요."




 지아의 대답이 예상 밖이었던 듯 태주는 어버버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행복했었다면 다시 돌아가면 그만이잖아. 대체 뭐가 문젠데?"


 "더이상 그쪽한테 미련이 없어요."


 "...남자라도 생긴 거야?"


 "딱히 상관 없잖아요."


 "됐으니까 가르쳐 줘. 남자가 있어?"




 한 박자 쉬고 지아는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다.




 "하, 사귀는 사람도 없으면서 무슨..."




 태주는 바닥에 시선을 굴리며 조용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아는 태주에게서 등을 돌린 다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바쁘니까 이만 돌아가줘요. 더이상 마주할 시간 같은 건 없으니까."


 "알아, 열심히 일하고 있더라. 그 방송."




 태주에게서 멀어지던 지아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소름이 끼쳤다. 구독자만 수십 만인 대형 방송이라 분명히 알고 있을 거라 생각은 해왔지만, 본인의 입으로 직접 이야기를 들으니 온몸에 한기가 돋았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요? 협박이라도 하게요? 뭘로 협박하게? 예전에 잠깐 사귀었다고?"


 "협박이라니, 그냥 잠깐 이야기만 하자는 거지."




 어이를 상실한 나머지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말만 저렇게 번지르르할 뿐, 결국은 협박하겠다는 이야기다. 잔뜩 분노가 치밀어 오른 지아는 태주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분명하게 소리쳤다.




"얼른 나가. 두 번 다시 내 앞에 나타나지 마."




나가라고 다그치자 태주가 벌떡 일어섰다. 순간 놀란 지아가 뒷걸음질을 쳐보지만 이내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너, 언제부터 나한테 그딴 식으로 말하게 됐지?"




 태주가 한 발짝씩 서서히 다가왔다.




 "오지 마."


 "예전에 좋았잖아, 응?"




 손을 뻗어 왔다. 지아는 그 손을 뿌리쳤다.



 태주의 표정이 변했다. 그 표정엔 분명한 증오가 담겨있다.



 양 손목을 붙잡혔다. 엄청난 힘이다.




 "놔."




 다리가 걸려 바닥에 함께 쓰러졌다. 태주가 레슬링을 하듯 지아 몸 위로 올라왔다.




 "그만해."


 "너, 거칠게 해주는 거 좋아했잖아."




 귓가에 거친 숨결이 끼쳤다.




 "그만해!"




 태주의 입술이 목덜미를 훑는다. 지아는 필사적으로 저항의 뜻을 표했다. 그러나 힘의 차이는 역력했다. 태주의 잔혹한 폭력 앞에서 지아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입고 있던 잠옷이 말려 올라가고, 허리를 감싸고 있던 고무줄은 차츰차츰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것만큼은 벗겨지지 않도록 지아는 온몸을 비틀며 힘껏 발버둥 쳤다.



 그런 공방을 펼치는데, 불현듯 태주의 움직임이 딱 멈췄다. 쭈뼛쭈뼛 밑에서 올려다보니 태주는 상반신을 일으킨 상태에서 고개를 옆으로 틀어 복도 끝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시선 끝으로 눈길을 준 직후, 지아는 숨을 삼켰다.



 정민이 현관에 서 있었다. 손에는 낯익은 마크가 그려진 비닐봉지를 들고 있다. 근처 편의점에서 구할 수 있는 비닐봉지다. 어떻게 들어온 걸까. 아까 태주가 들어올 때 문을 제대로 닫지 않았던 걸까.



 태주가 몸에서 떨어져 일어섰다. 지아는 곧장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하, 사귀는 남자 따위 없다고 할 때는 언제고."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태주가 말했다. 얼굴에는 엷은 조소가 떠올라 있었다.




 "얼른 나가!" 바닥에 주저앉은 상태로 지아가 외쳤다.


 "예, 예. 실례했습니다."




 태주가 대답과 함께 현관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 등을 지아는 노려봤다. 현관에서 태주와 정민이 마주치자 정민이 옆으로 비켜 태주에게 길을 터 줬다.




 "사귀기에는 나이 차이가 한참인 것 같은데. 취향이 노처녀야?"




 태주가 그렇게 말했으나 정민은 대꾸하지 않았다.




 "뭐든 간에 빨리 헤어지는 게 좋을 거야. 저 여자, 독기만 가득하지 매력은 하나도 없거든. 뭐, 어차피 그쪽도 곧...."




 순간 태주가 말을 끊었다. 그리고는 유심히 정민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그 시선을 피하듯 정민이 얼굴을 돌려 신발을 벗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런 정민의 등 뒤에서 태주는 게츰스레 눈을 떴다.




 "얼른 나가라고!"




 지아가 다시 한 번 외쳤다. 이윽고 태주는 문을 열고 나갔다. 



 문이 닫힘과 동시에 지아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이렇게 추한 모습,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보여주고 싶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하염없이 터져나오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다.




 "오는 길에 아이스크림 하나 사왔어요. 방송이 조금 늦어질 것 같다고 공지글은 써둘 테니까 푹 쉬세요."




 흐느끼는 소리 사이로 정민의 목소리가 먹먹하게 들려왔다. 정민은 식탁 위에 놓여있던 각휴지를 지아에게 건네고서 말을 이어 나갔다.




 "아, 시계도 방금 찾았으니까 걱정 마시고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저기, 잠시만."


 "네?"




 가까스로 울음을 멈추고서 정민을 멈춰세웠다. 하지만 이런 말, 이렇게 말해버려도 되는 걸까. 머릿속에 떠오른 문장 하나가 지아의 입에서 선뜻 나오지를 않았다. 



 지극히 유치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지아는 지금 사람이 필요했다. 지금 이 순간 곁에 있어줄 사람이 필요했다.




 "오늘 하루만...같이 있어주면 안 돼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곤란한 눈치였다. 당연한 일이다. 업무로밖에 연락하지 않던 사람에게 갑자기 이런 부탁을 받다니, 부담스러워서라도 거절하는 게 당연하다. 아마 지아 역시 자신이 똑같은 입장에 처했다면 죄송하다는 말로 거절했을 거다.



 그렇지만 애원할 수밖에 없다. 어디든 기댈 곳이 필요했다.




 "부탁이에요. 절대로 이상한 뜻은 아니니까. 제발, 저, 진짜..."




 말을 삼켰다. 더 이상 말을 이어나갔다가는 기껏 참았던 울음이 다시 터져나올 것 같았다.



 역시, 무리인 걸까.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린 채 두 눈을 찡그렸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말을 이어가려던 순간. 




 "...알겠어요. 부탁이니까."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정민은 지아 옆에 무릎을 대고 등을 쓸어줬다.



 옷자락 너머로 느껴지는 은은한 온기에, 겨우 그쳤던 울음이 이번에는 더 깊은 곳에서 터져나왔다.




*




#.

토요일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봤다. 자고 싶은데 도무지 잠이 오지를 않는다. 깜빡하고 켜두었던 알람이 오늘도 시끄럽게 울려버린 탓이다.



 찌뿌둥한 몸을 일으키고는 멍하니 창 밖을 바라봤다. 암막커튼 사이로 새어나오는 햇빛이 오늘은 따뜻하게 느껴졌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어제 방송은 어떻게든 진행해낼 수 있었다. 마이크에 코맹맹이 소리가 그대로 나가버려 어디서 울고 온 거냐는 채팅이 올라오기도 했지만, 코감기에 걸렸다는 식으로 아무렇지 않게 얼버무리자 가벼운 놀림 정도로 넘어갈 수 있었다. 



 문제는 방송이 끝난 이후였다. 조금은 진정된 마음으로 이불 속에 들어가 하루를 돌이키던 그 순간, 뭐라 형용하기 힘든 불안감이 지아의 마음을 흔들었다. 사정이야 어찌 됐건, 결과만 따지고 보면 오늘 자신은 잘 알지도 못하는 외간 남자를 집 안에 들인 셈이다. 그것도 애원까지 해가면서. 이런 적, 지금까지 살면서 한 번도 없었다.



 옆 방에 귀를 기울여보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이 벽 너머에는 확실히 정민이 누워 있다. 아마도 자고 있겠지. 방송에 정신이 팔려 정확히 보지는 못했지만, 무언가 메모장 같은 것을 열심히 끄적이던 정민은 밤 11시 정도가 되자 일전에 지아가 안내해준 방으로 들어갔다. 대충 그 시간 정도가 되면 잠을 청하는 걸까. 20대 치고는 굉장히 건전한 생활습관이다.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이불을 뒤척였다. 저쪽 방에서 자고 있는 정민이 신경쓰여 잠들지 못할 줄 알았는데, 한 시간 정도 지나고 나니 슬금슬금 졸음이 몰려왔다. 그러고는 잠깐 눈을 깜빡이니, 알람을 맞춰놓은 세 시까지 어느새 시간이 지나가 버린 것이다.



 방문을 열고 바깥을 빼꼼 쳐다봤다. 금세 집을 나가버린 것인지 사람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 대신에 맛있는 냄새가 느껴졌다. 아침에 스스로 밥이라도 해먹고 나간 걸까.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가보니 랩으로 싸인 계란말이 위에 메모지 하나가 붙어있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온통 냉동음식 밖에 없어, 걱정되는 마음에 간단하게나마 요리를 해놓았다는 내용이었다.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냄새가 지아의 코끝을 찔렀다. 이렇게 맛있어보이는 음식을 더 이상 바라만 보고 있을 수 없었다. 지아는 조심스럽게 랩을 뜯고 젓가락으로 계란말이를 집어 먹었다.




 "...맛있어."




 본능적으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평소 먹는 냉동음식이나 가끔씩 시켜먹는 배달음식에서는 느낄 수 없는 묘한 온기가 온몸을 휘감았다. 서울로 올라온 이후로는 단 한 번도 먹지 못해본 맛이었다.



 다시 한 번 계란말이를 집어 먹었다. 코끝이 찡해지면서 눈물 한 방울이 찔끔 흘러나왔다. 정말이지, 이렇게 자주 눈물을 흘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어젯밤, 태주가 떠난 뒤 지아는 한 시간을 내리 울었다. 정민은 그 옆에서 아무것도 캐묻지 않고 말없이, 그저 조용하게 지아의 곁을 지켜줬다. 그것이 얼마나 고마웠던지. 마지막에는 정민의 다정함 때문에 울었던 것 같다.



 그 후, 지아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 정민에게 털어놓았다. 기억이 가물가물하긴 하지만 분명 감사인사도 전했던 것 같다. 그러자 정민은 괜찮다며, 앞으로도 사람이 필요하다면 자신을 불러도 좋다고 이야기했다. 단, 지난 번처럼 하룻밤을 넘기는 건 곤란하다고 확실하게 선을 두기도 했다. 



 이 이상의 거리감은 곤란하다는 걸까. 하긴, 정민 입장에서 본다면 지아는 일곱 살 씩이나 차이 나는 나이 많은 아줌마에 불과하다. 아마도 이성적인 생각 같은 건 들지 않겠지.



 그렇게 머릿속으로 생각은 하지만 그럼에도 내심 분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어제만 해도 그렇다. 비록 다른 방에서 잤다지만 아침까지 털 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지아는 괜스레 섭섭함을 느꼈다. 역시 이성으로 보는 건 무리려나. 하긴, 제 감정도 제대로 주체 못하고 무작정 매달리는 여자가 이성으로 느껴질 리 없다. 지아는 고개를 내저은 뒤 한숨을 내쉬었다.



 계란말이를 한 입 베어물고는 핸드폰을 켜 메신저를 확인했다. 갑작스럽게 방송 시작 시간을 세 시간씩이나 늦춘 여파로 재동부 역시 시끌시끌한 상황이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냐 물어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고, 정말로 괜찮은 거냐며 개인 채팅으로 물어오는 여자애들도 몇 명 있었다.




 < 나 진짜로 괜찮아! 걱정해줘서 고마워 >




 짧게 채팅을 보내고는 대충 귀여워보이는 이모티콘 하나를 같이 달아주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수어 개의 반응이 지아의 채팅에 달라붙었다.




 < 다행이에요 언니 퓨ㅠㅠㅠ >


 < 휴 하마터면 직장 잃을 뻔 >


 < 그러게 호들갑 좀 떨지 말라니까. 내가 보기엔 이 누나 남친 생겼어 >




 어라, 이 놈 봐라. 지아는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고 곧장 답장을 보냈다.




 < 근거는? >


 < 그냥 느낌이 오잖아요. 저스트 필링 >


 < 내가 벌써 서른이 코앞인데 그런 게 생기겠니 >




 갑자기 답장이 오지 않았다. 줄곧 채팅을 해오던 그 녀석은 놀란 표정의 이모티콘을 지아의 채팅에 반응으로 달 뿐이었다.



 하여간, 사람 화나게 만드는 데는 재주 있다니까.




 < 갑자기 괘씸하네, 너 다음 달 월급 삭감 >


 < 아. >


 < ㅋㅋㅋㅋㅋㅋㅋ >


 < ㅋㅋㅋㅋㅋㅋㅋㅋㅋ >


 < 한 번만 선처해주시면 안 될까요 ㅠㅠ >




 그렇게 채팅을 보내면서 그 녀석은 잔뜩 울먹이는 이모티콘을 채팅 밑에 달아두었다. 지아는 피식 웃으며 답장을 보냈다.




 < 이번 한 번 만이야 >


 < 넵 명심하겠습니다 >




 만족스러운 웃음으로 지아는 다시 한 번 계란말이를 집어먹었다. 그나저나 토요일이 돼서일까. 채팅방이 온통 시끄러운데도 정민이 나타나질 않는다. 사실 업무적인 이야기를 빼면 채팅 같은 건 잘 하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이번 일을 계기로 꽤 가까워졌다고 생각했었는데. 여전히 변함없는 정민의 행동을 보면 자신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아 괜히 서글픈 감정이 들었다.



 지아는 정민의 프로필을 누르고 개인 채팅에 들어갔다. 시계 문제로 어제 정민과 주고받았던 채팅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지아는 한참동안 액정 화면을 쳐다보다가 키보드에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가져다댔다.




 < 지난 번엔 고마웠 >




 채팅을 치던 지아의 손가락이 금세 멈춰섰다. 문장을 끝맺는 방식에서부터 문제가 생겼다. 지난 번처럼 존댓말로 해야 하나. 아니면 반말로 보내는 게 나으려나. 



 이런 기묘한 관계는 살아생전 처음이었기에 정민과 자신 사이의 거리감을 좀처럼 짐작할 수가 없다. 이전에도 존댓말로 써왔으니 이번에도 존댓말로 채팅을 보내면 크게 문제가 없지 않을까 생각은 들지만, 그럼에도 섣불리 손이 움직이질 않았다. 정민과 조금 더 친해지고 싶다는 지아의 욕심 때문이었다.



 빠르게 기억을 돌이켜봤다. 어젯밤 동안 반말을 썼던 기억이 있던가? 군데군데 반말을 쓰기는 했지만 기본적인 화법은 존댓말이었다. 멘탈이 무너진 와중에도 지아는 본능적으로 정민과 사회적인 거리감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역시 존댓말로 보내는 게 정답이려나. 아니, 아니다. 이대로 존댓말을 써버리면 다시 원래의 관계로 돌아가버릴 뿐이다. 무언가 돌파구가 필요하다. 조금은 주책처럼 보일지 몰라도,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확실한 도전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그렇게 결심한 지아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부지런하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 지난 번엔 고마웠어! 아침밥도 그렇고 신세를 꽤 진 것 같아서, 다음 번에 밥이라도 한 번 사고 싶은데 괜찮을까? > 




 자신이 써놓은 채팅을 슥 읽고는 초록색 전송 버튼을 눌렀다. 그러고는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귀여운 이모티콘을 채팅 밑에다 붙여 넣었다.




 "이번에도 금요일에 답장이 오면 조금 곤란한데...."




 조용히 중얼거리면서 지아는 그릇 쪽으로 젓가락을 뻗었다. 무언가 감각이 이상했다. 계란말이가 잡히질 않았다. 요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돌아보니 노란색 계란 파편 몇 조각만이 그릇 위에 남아있었다. 어느새 정민이 만들어둔 계란말이를 전부 해치워버린 것이다.




 < 아, 그리고 계란말이 맛있었어! 다음 번에도 부탁 >




 무심코 메시지를 쓰다가 아차 싶어 메시지를 지웠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주책인 것 같았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를 한창 하고 있던 와중, 지아의 핸드폰으로 느닷없이 전화가 왔다. 모르는 번호였다. 방송과 관련된 누군가려나 하고 받자 "나야" 하고, 아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순식간에 몸이 경직됐다. 상대는 태주였다. 지아는 하고 있던 설거지를 급하게 마치고서 오른쪽 손으로 전화기를 넘겼다. 




 "어제는 미안했어."


 "이 번호는 또 어떻게 알았어요?"


 "네가 소속된 소속사에 부탁했지."




 혀를 찼다. 분명 관계자인 척 행세하고 번호를 받아냈으리라.




 "계속 이러면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


 "아직 하진 않았나보네."


 "네, 아직 안 했어요. 앞으로 또 그런 일이 일어나면 그때는 신고할 테지만."


 "걱정 마. 이제 아무 짓도 안 해. 그 부분은 분명히 약속할게. 그러니까 그, 어젯밤 일은 없었던 걸로 해 줘."




 그렇게 말하는 태주의 목소리가 떨렸다. 과연. 어젯밤 일로 경찰에 불려 갈까 무서웠나.




 "네, 없던 일로 해줄게요. 그러니까 다시는 내 눈 앞에 나타나지 마요."


 "그래. 정말 미안했어."




 그렇게 지아가 전화를 끊으려고 핸드폰에서 귀를 뗐을 때였다.




 "그 어린 녀석, 정체가 뭐야?"


 "별로 그쪽이랑 상관 없잖아요."


 "아니아니, 다른 건 아니고. 지난 월요일에 그 녀석을 봐서 말이야."




 월요일? 느닷없이 던져진 정보에 지아는 귀를 기울였다. 자신과 만나고 이야기하는 금요일을 제외하면 지아는 정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다.




 "구석진 골목을 지나가다가 이런 곳에 카페도 있구나, 하고 무심코 안을 쳐다봤는데 말이야. 그 녀석이 경찰에게 취조받고 있더라고. 복장을 보니 아마도 거기서 일하던 녀석 같던데."




 카페라니, 그런 이야기는 듣도보도 못했다. 애초에 웃기는 이야기다. 스트리머 사이에서 네임드 편집자로 소문난 사람이 카페에서 일을 한다니. 원래부터 카페 쪽에 꿈이 있었던 게 아니라면 불가능한 이야기다. 시급으로 환산해도 편집 쪽이 열 배는 높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좀처럼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임에도 태주의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가질 않았다.




 "그래서요?"


 "나중에 들려오는 소식으로 찾아보니까, 그 녀석, 어떤 실종 사건에 유력 용의자로 찍혀 있더라고. 당장은 심증이지만 확실한 증거만 나오면 곧장 체포라도 할 기세야."


 "......."


 "저기, 듣고는 있어?"


 "농담은, 그만해요." 목소리가 떨렸다.


 "나도 진심으로 하는 소리는 아니야. 그런데, 그 녀석의 정체는 제대로 알고 있는 거야?"


 "당연히 알죠. 당장 월요일에도 몇 번이고 만났어요. 착각한 모양이네요."


 "뭐야, 그래?" 단번에 흥미를 잃은 듯 태주가 말했다.


 "설마 살인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너이니 만큼 틀림없이 위험한 자식에게 이용당하지 않을까 싶었거든."




 자기가 한 짓은 생각 안 하고 이 남자는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기가 차서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뭐, 그래. 아무리 너라도 그 정도 사리분별은 할 줄 알겠지."


 "...당연하죠."


 "행복해라."




 마지막으로 생뚱맞은 말이 들리고 전화가 끊겼다. 지아는 움직일 수 없었다. 싱크대에 물이 콸콸 쏟아지고 있는데도 그 자리에서 한 발짝도 발을 내디딜 수 없었다. 월요일에 정민을 봤다는 이야기 따위, 당연히 거짓이었다. 금요일을 제외한다면 지아는 정민을 본 적도 연락을 해본 적도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방금 자신과 전화한 태주는 서울지방경찰청에서 일하는 사람이었다. 지금이야 회사를 나왔다지만 지인을 통한 연락망 정도는 여전히 보유하고 있을 것이다. 아마 조금 전에 말했던 '들려오는 소식'이란, 경찰청에서 들려오는 소식을 말한 게 아니었을까.



 설마, 그런 바보 같은 일이 있을 리 없다. 그런 바보 같은 일이....




 - ♬




 느닷없이 울리는 진동에 급하게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정민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 다음 주 금요일이라면, 괜찮습니다. ]




 이번에도 금요일이다. 왜 굳이 금요일일까. 생각해보면 이상하다. 당장 어제만 해도 지아가 하룻밤만 같이 있어달라 부탁했을 때 정민은 굉장히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때야 지아의 무리한 부탁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넘겼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지아와의 일정을 토요일까지 넘기는 것' 자체가 부담이었던 걸 수도 있다. 실제로, 정민이 확실하게 선을 그었던 부분도 '하룻밤을 넘어가는 건 곤란하다'라는 부분이었으니까.



 혼란스러운 생각 속에 지아는 정민이 보낸 메시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토록 바라던 답신이었는데, 이상하게도 기쁘지 않았다.




*




#.

월요일





 카페 문 앞에 걸려있는 'OPEN' 명패를 'CLOSED'로 돌려놓고는 깊게 숨을 들이켰다. 문자 그대로 죽을 맛이다. 어떻게 하루가 지나갔는지도 모르겠다. 줄곧 세 명이서 해오던 일을 혼자서 해치우는 건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다.




 "오늘 하루 고생했구만."




 준서와 함께 카페를 나온 광태가 수고했다며 준서의 어깨를 툭툭 두들겨주었다. 힘든 것 같이 보였으면 빨리 나가기라도 해주던가. 원망에 가득 찬 문장이 입 안에서 맴돌았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최소한의 사회적 예의였다.



 오늘 하루 카페 일을 쉬겠다고 다영이 문자를 보내온 것은 지난 화요일이었다. 자세한 이유는 말하지 않았지만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꽤나 충격받았겠지. 매 주마다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던 단골 손님이 하루 아침에 실종됐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누구라도 그럴 거다. 그 고지식한 사장이 아무런 추궁 없이 다영의 휴가 신청을 받아들인 것도 분명 그런 맥락 때문일 거라 생각한다.



 정민은 아예 한 술을 더 보태 카페 일을 그만두겠다 선언했다. 말솜씨는 없어도 제 일은 척척 해내는 직원인지라 떠나지 않길 바랐지만, 이미 한 번 정한 결정을 돌리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다영을 통해 들은 이야기로는, 준서가 근무하지 않는 매주 목요일마다 정민과 채은은 자주 이야기를 나누며 꽤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나니 정민의 갑작스러운 퇴직 발언을 제법 납득할 수 있었다. 아마도 정민이 느꼈던 상실감과 충격은 다영 몫지 않게 컸을 거다.



 준서 역시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몹시나 당황했다. 다영이나 정민만큼 채은과 이야기를 자주 나눈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얼굴만큼은 충분히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하루아침에 실종됐다니. 어안이 벙벙해져 여러 번 질문을 반복했지만 대답은 똑같았다. 실종을 넘어 살인 쪽에 무게를 두고 수사하고 있다고, 경찰은 냉정한 어조로 분명하게 말했다.



 말에 따르면 채은은 목요일 정도에 실종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CCTV랑 여러 진술들을 합쳐 수사 중에 있으니, 빠르면 수일 내로 범인의 윤곽을 드러낼 수 있을 거라고 경찰은 전했다. 역시 다른 건 몰라도 치안력 하나만큼은 굉장하구나. 준서는 길 너머 전봇대에 매달려있는 CCTV를 힐끗 쳐다보았다.




 "저기, 혹시...."




 순간 귓가에 목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돌아보았다. 웬 낯선 여성이 준서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슬쩍 얼굴을 바라보니 20대 중후반 정도로 보이는 모습이다.




 "혹시, 이 카페 문 닫았나요...?"


 "아, 네. 방금 닫았습니다."


 "아, 아...그런..." 그녀가 몹시 실망한 기색을 내비쳤다.


 "내일 오전 7시에 다시 오픈하니까요. 그때 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뇨, 딱히 카페가 목적은 아니고, 그...백정민이라는 사람, 혹시 여기서 일하나요?"




 백정민? 느닷없는 질문에 눈을 깜빡이며 그녀를 쳐다봤다. 어떻게 대답해줘야 하려나. 지난 주까지만 해도 일하긴 했었으니, 일단은 일한다고 말해주는 편이 나으려나.




 "네네, 직장 동료 사이입니다. 혹시 지인 분이신가요?"


 "아, 네. 그게, 정민 씨가 여기서 일한다는 소문을 얼핏 들어서요."




 정민 씨라고 말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닌 모양이다. 이렇게 예쁜 여자가 졸졸 따라다니는 삶이라니, 역시 잘생긴 사람의 삶은 무언가 다른 건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어 나갔다.




 "카페까지 찾아왔었다고 나중에 정민이한테 연락이라도 해드릴게요. 혹시 실례지만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아, 아뇨. 딱히 그런 걸 바라는 건 아니라서...."




 그녀가 한 발짝 물러서며 손사래를 쳤다. 뭐지, 스토커 부류라도 되는 건가. 




 "네, 뭐, 그러면 알겠습니다. 실은 정민이가 지난 주부터 카페 일을 그만둬서요. 아마 여기 오셔봤자 찾지는 못할 거예요."


 "아아,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대화를 마친 뒤 그녀는 감사인사를 전하고서 저 멀리 도망치듯 사라졌다. 대체 뭐였을까 그 사람은. 가만히 서서 머리를 긁적였다. 문득 생각해보니 꽤 유명한 스트리머와 얼굴이 닮은 것 같기도 하다. 뭐였더라, 재밍이었나. 자주는 아니어도 가끔씩 챙겨보던 스트리머인데, 묘하게 얼굴이 비슷한 느낌이다.




 "설마. 진짜겠어."




 준서는 자조적인 웃음을 내뱉은 뒤 역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평소에 친구 얼굴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데, 실물로는 본 적도 없는 스트리머의 얼굴 따위 알아맞출 리 없다. 그냥 대충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겠지. 인터넷 글들을 둘러보다보면 연예인 닮은 꼴이라는 제목의 게시글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아마 저 여자도 그 중 하나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을 마치고 걸어가던 와중, 낯익은 얼굴을 마주친 준서는 자연히 발걸음을 멈춰세웠다. 이번만큼은 확실했다. 자신이 익히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닮은 꼴 따위가 아니라, 분명히 그 사람의 모습이다.



 ...정민이다. 그가 지금 자신의 눈 앞에 서 있다.



 본능적으로 근처 나무 뒤에 숨어 모습을 지켜보았다. 틀림없이 정민이다. 그는 지금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서 가만히 핸드폰을 두드리고 있다. 이쪽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걸 보니, 아무래도 정민은 아직 준서를 보지 못한 모양이다.



 이런 곳에서 뭘 하고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이 떠오름과 동시에 준서는 자신이 꽤나 어색한 자세로 숨어있다는 걸 깨달았다. 자세 뿐만이 아니라 상황 자체가 어색하다. 이런 상황, 보통이라면 반가운 얼굴로 인사를 나누면 그만이다. 



 하지만, 준서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다. 실은, 아주 조금이지만 준서는 정민을 의심하고 있다. 들은 이야기대로라면, 채은이 실종된 목요일은 정민과 채은이 카페에서 만나는 날이다. 꽤나 가까운 사이였다고 하니 납치도 비교적 손쉽게 진행할 수 있지 않았을까.



 무엇보다도, 경찰이 카페에 찾아온 그날 정민은 누구보다도 당황한 표정을 드러냈다. 평소의 로봇같은 행색을 생각하면 상상도 못할 표정이었다. 준서가 그랬던 것처럼 단순히 경찰이 찾아왔다는 사실에 당황했던 걸 수도 있지만, 그런 것 치고는 굉장히 어색한 표정이었다. 마치, 정말로 죄라도 지은 것처럼.



 명확한 근거 따위 없는 심증일 뿐이지만 그럼에도 준서는 강력한 직감을 느꼈다. 감으로만 따지자면 심증 수준이 아니라 확증에 가깝다. 그때 그 선배가 말했던 것처럼, 저 로봇같은 가면 뒤에 어떤 표정이 감춰져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순간, 핸드폰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던 정민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준서는 거리를 조금 두고서 정민을 따라갔다. 예전에 듣기로 정민의 집은 이 거리에서 꽤 먼 곳이었다. 카페까지 그만 둔 마당에 이 거리에 무엇을 하러 나온 것인지. 준서는 그것을 확실하게 알아내기로 결심했다. 아마 그 답을 찾고 나면 자신의 직감이 정답인지 오답인지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가로수가 늘어선 인도를 따라 약 50미터 간격을 두고 시선을 살짝 떨군 채 미행했다. 이런 건 타깃의 등을 직시하지 않고 바깥쪽 시야에 넣어 두는 게 좋다고 들은 적이 있다.



 그렇게 몇 걸음을 걷고 나니 역 안으로 들어가는 정민의 모습이 보였다. 단순히 집으로 돌아가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파보기로 마음 먹었다. 준서는 정민을 따라 개찰구를 통과한 뒤 계단을 내려갔다. 버스가 아니라서 그나마 다행이다. 버스에 타 버리면 아무래도 숨을 장소가 없다.



 계단을 따라 플랫폼에 내려오자 제법 많은 사람들이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 여덟 시가 넘었는데도 아직 퇴근 시간의 열기가 남아있는 모양이다. 오히려 좋다. 이렇게 북적북적한 플랫폼이라면 정민에게 들킬 일도 없다. 



 준서는 승차구 두 개 정도의 간격을 두고서 열차에 탑승했다. 열차 안은 생각보다 한산했다. 준서는 정민의 모습이 보이는 위치로 이동하여 의자에 몸을 묻었다.



 자리가 비어 있음에도 정민은 앉지 않고 문 부근에 서 있다. 금방 내릴 생각인 걸까. 문득 든 생각에 전광판 쪽으로 시선을 옮기니 정민의 집과는 반대로 향하는 방향이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일정이라도 따로 있는 모양이다. 대개 이런 경우는 단순한 약속으로 치부하는 게 보통이지만, 꼭 그렇다고 단정지을 수도 없다. 조금은 선입견적인 의견이지만, 저 로봇 같은 사람에게는 '약속'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다. 



 준서의 머릿속에서 '정민 = 살인자'라는 가설은 점점 커져갔다. 의식해서 생각해볼수록 이상한 구석이 많은 사람이다. 당장 채은과 관련된 부분만 봐도 그렇다. 월요일마다 정민과 함께 일해온 준서였지만, 채은과 정민이 그렇게 가깝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자신이 근무하는 월요일에는 한 번도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월요일의 정민이 채은을 대하는 모습은 정민이 준서와 다영을 대하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로봇. 그것이 정민을 묘사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표현이었다.



 단지 요일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같은 손님을 다르게 대하는 게 정상인가? 적어도 준서의 상식 안에서는 그렇지 않다. 생각해보면 채은도 이상하다. 그렇게 상반된 태도로 몇 달을 지내왔는데 채은은 마치 그게 당연하다는 듯 자연스럽게 정민을 대했다. 왜지, 어째서일까. 준서는 시선을 아래로 내린 채 머리를 굴렸다. 떠오르는 답은 하나 밖에 없었다.




 "자아가 여러 개인가...?"




 아무한테도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말하고 나서는 굉장히 유치하다고 스스로 생각했지만, 그런 조건을 두고서 생각을 곱씹어보니 퍼즐이 하나 둘 맞춰졌다. 준서는 다시 한 번 혼잣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주 2회로 바뀌고 나서 성격이 갑자기 변했다는 것도..."




 안전을 위한 거였다. 만약 자아 간에 기억이 제대로 공유되지 않는다면 사교적인 성격으로 지내는 것은 분명한 마이너스다. 사교적인 성격으로 사람들과 이야기를 자주 나누게 되면, 사람들과 이야기한 걸 잘 기억하지 못하는 정민의 모습이 필시 드러나게 될 테니까. 그렇기에 정민은 주 2회 근무로 바뀌자마자 아무런 잡담 없이 묵묵히 일만 해왔던 것이다. 




 "그러면 채은 씨는..."




 아마도 정민의 이런 비밀을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주 2회 근무로 바뀐 이후, 정민과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은 채은 뿐이었다. 그말인즉슨, 채은은 어떤 방식이든 간에 정민의 비밀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렇게 가정하면 정민의 상반된 태도에도 아랑곳않던 채은의 반응도 설명이 된다.



 

 "마지막으로, 경찰이 찾아왔을 때 유독 당황했던 것도..."




 기억이 없으니 알지 못했던 거다. 채은이 실종되었다고 경찰이 처음 말했을 때 일그러진 표정으로 경찰을 바라보던 정민의 모습을 준서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때 처음으로 알아차린 거다. 자신이 채은에게 모종의 해코지를 가했다는 것을.



 등줄기에 소름이 끼쳐 순간적으로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직은 소설일 뿐이지만 적어도 개연성에는 문제가 없다. 여러 개의 인격이 공존하는 사람이라는, 조금은 비현실적인 설정 하나만 빼면 소설이 아닌 수필이라 생각해도 무방할 정도다.



 정민은 정말로 여러 인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 걸까. 생각이 결론에 다다르려던 찰나, 갑작스럽게 사건이 일어났다. 왕십리역에 도착하자마자 사람들이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온 거다. 젠장, 이렇게 되면 정민의 모습을 볼 수가 없다.



 준서는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선 다음 정민이 서있던 곳으로 움직였다. 인파가 잔뜩 몰린 탓에 발걸음 하나하나 내딛기가 힘들었다.




 "죄송합니다."


 "지나갈게요."




 정민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심스럽게 말을 뱉어내며 앞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정민이 줄곧 서있던 출입문 부근에 도착한 순간.




 "......."




 준서는 그 자리에 굳어버리고 말았다. 정민이 없었다. 인파 탓에 어딘가로 밀려버린 건가? 아니, 그럴 리 없다. 정민은 워낙 키가 큰 편이라 군중 사이에 서 있어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정민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준서는 급하게 열차칸을 돌아다니며 좌석에 앉아있는 승객들을 샅샅이 살폈다.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도 없다. 설마 방금 전에 타이밍 좋게 내리기라도 한 건가.



 준서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어떻게 이런 실수를. 단순하게만 생각했던 멍청한 자신을 저주하고 싶었다.



 지금이라도 쫓아가야 하나. 아니, 그러면 너무 늦다. 지금 당장 열차에서 내려 반대편 열차를 타고 간다 해도, 배차 간격을 고려해보면 족히 5분은 걸린다. 그 정도 시간을 따라잡는 건 무리다.



 결국, 준서는 다음 정거장에서 하차했다. 자신의 집과 멀어지는 열차를 더 이상 타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플랫폼을 건너가 반대편으로 가는 열차를 기다리고 있다 보니 핸드폰에서 알림이 울렸다. 친구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 게임하자 사람 불러놓고 왜 아직도 안 왔어? 어디 길 가다 죽었냐? >


 < 지금 출발했어 좀만 ㄱㄷ >




 문자를 보내고서 준서는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처음 미행을 시작할 때만 해도 여덟 시 정도였는데 어느새 아홉 시를 훌쩍 넘긴 모습이다.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피로감이 순식간에 몰려왔다.



 다음 번에도 기회가 오긴 할까. 준서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봤다. 카페 일도 그만둬버렸으니 더이상 준서와 정민 사이에 접점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는 순전히 우연에 기대는 수밖에 없는 셈이다.



 

 "하아...야단났네."




 좀처럼 오지 않는 열차에 준서는 플랫폼에 설치된 전광판을 힐끗 쳐다봤다. 다음 열차까지 배차 간격이 20분이나 남아있다. 보통 7분 정도면 들어오는 열차인데 이번엔 또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준서는 플랫폼 뒷편에 설치된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의자 왼쪽 편에는 사람이 앉아있어 무심히 그쪽을 쳐다봤다.



 어라, 잠깐.



 이 사람, 아까 카페 앞에서 봤던 여자 아닌가?




*




#.

화요일





 속으로 '아차' 한 직후, 쨍그랑 하고 귀청이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방 안에 울려퍼졌다. 책상 위에 두었던 컵을 실수로 밀어버린 것이다.




 "괜찮냐?"




 바로 옆자리에 앉아있던 정민에게 자연히 시선이 향했다. 다행히도 반대쪽 방향에 앉아있어 사건 현장과는 제법 거리가 있지만, 아무래도 작은 파편 같은 것들이 그쪽까지 튀었을 수도 있다. 재호는 목덜미를 한 번 쓸어넘기고는 빗자루를 가져오겠다는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끼던 컵이었는데.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한숨을 뱉었다. 자신이 깨뜨린 것이니 공연히 탓할 대상도 없다.




 "뭐 어디 다치거나 그런 곳 없지?"


 "네, 괜찮아요."




 정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나마 다행이다. 어딘가 크게 다치기라도 했다면 몹시 곤란했을 거다. 정민의 자아 가운데에는 작은 상처 하나에도 소스라치게 기겁하는 녀석이 있다 들었으니까.



 정민이 재호에게 자신의 비밀을 고백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세 달 전 즈음이었다. 극본 작가와 그 수습생으로서 관계를 이어오면서, 재호는 정민에게 배우 일을 해보는 게 어떻겠냐 끊임없이 제안을 해왔었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제안이었다. 



 배우로서 연극 경험을 해보는 것은 극본을 쓰는 데에 있어 큰 도움이 된다. 재호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극단에서 일하고 싶다는 사람이 이 정도 마스크를 가지고서 배우 일을 시도해보지도 않는 건 너무나도 아까운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정민은 재호에게 대뜸 자신의 비밀을 고백했다. 이런 사정을 갖고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배우 일은 힘들 것 같다고, 정민은 진중한 목소리로 분명하게 의사를 표현했다. 



 그 뒤로 재호는 정민에게 단 한 번도 배우 일을 권유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자신의 비밀을 밝히면서까지 거절 의사를 드러낸 사람에게 계속해서 배우 일을 제안할 수는 없었다.



 다만, 정민을 '이해'하는 건 별개의 일이었다. 재호는 여전히 정민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 이야기가 전부 사실이라면 어차피 일상이 전부 연극인 셈인데, 작은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연극 하나를 못하겠다니 이 무슨 아이러니인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의견이었지만 그래도 재호는 정민의 의견을 존중하기로 결심했다. 아마도 연극 연습 스케줄을 맞추는 과정에서 극단 멤버 모두에게 자신의 비밀을 공개해야 한다는 점이 곤란한 거겠지. 그렇게 스스로 결론을 내렸다. 



 모꼬지 극단 멤버들은 명성 치고도 꽤나 프라이드가 센 편에 속한다. 주에 한 번 밖에 연습하지 못하는 녀석을 별다른 사연도 없이 연극에 끼워넣겠다고 선언하면 얼굴을 붉히면서 반대할 인간이 태반일 것이다. 뭐, 애초에 그렇게 사람을 꽂아넣을 권한도 없긴 하지만.




 "지난 주는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거야?"




 빗자루로 바닥을 쓸어내면서 정민에게 물었다. 큰 생각없이 던진 질문이었다.




 "아...그게, 조금 사고가 생긴 것 같아서요."


 "사고? 무슨 사고?"


 "일단 알아보고 있습니다. 적어도 '그 녀석'은 자신이 그러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어서요."




 그 녀석이란, 정민의 다른 자아를 말하는 걸까. 재호는 다시 한 번 질문했다.




 "만약, 그 녀석이 그런 거라면 어떻게 할 생각이야?"


 "......."




 정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한쪽 손으로 옷소매를 배배 꼬면서 다리를 꼬았다 풀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미안, 괜한 소리를 했던 것 같네."




 아무래도 대답하기 곤란한 걸까. 재호는 멋쩍게 웃으면서 머리를 긁적이고는 화제를 돌렸다.




 "지난 번에 피드백 해준 파일 내용은 받았던가?"


 "아, 네. 그대로 고쳐도 괜찮을 것 같더라고요."


 "그러냐."




 만족했다니 다행이다. 실은, 반쯤 술에 쩔어있는 상태로 고쳐줬던 거라 만약에 수정이라도 해달라 그랬다면 처음부터 각본을 다시 봤어야 했을 거다.



 시계를 헬끗 쳐다본 정민이 이제는 가봐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말에 덩달아 시계를 쳐다보니 시침이 아홉 칸이나 움직여 있었다. 뭘 했다고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된 거지. 캐릭터 설계 단계에서 조금 열띤 토론을 하긴 했지만, 그것만으로 이렇게 시간이 지났다 하니 굉장히 당혹스럽다.



 오늘 캐릭터 설계에서 재호와 정민이 부딪힌 부분은 대인관계에 대한 부분이었다. 평소에도 자주 말씨름을 하는 부분이긴 했다. 



 삼십 년도 넘게 인생을 살아오면서, 재호는 사람이라는 존재가 몹시도 유동적이고 의존적인 존재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말하자면 닻 없이 바다 위에 떠있는 부표와도 같은 것이다. 주변 사람과 환경에 따라 이리저리 바뀌고 뒤섞이면서, 때로는 사람 자체가 변하기도 하는 사례를 재호는 종종 목격했었다.



 그에 반면, 정민은 사람의 성격에 분명한 뿌리가 존재한다 말했다. 앞에서 말했던 비유를 그대로 이어서 말하자면 부표 밑에 닻을 달아둔 셈이다. 주변 환경에 따라 사람이 어느 정도 바뀔 수는 있어도 그 기저에는 분명하게 바뀌지 않는 뿌리가 존재한다고, 정민은 뚜렷한 목소리로 주장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결국 토론은 정민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몇 시간이고 이어진 토론 끝에 결국 재호가 두 손을 들어버린 것이다. "역시, 젊은 녀석의 패기는 이길 수가 없다니까" 라고 나직한 목소리로 말하면서 재호는 씁쓸한 표정으로 키보드를 두들겼다. 그렇게 한창 각본을 쓰던 와중 실수로 물컵을 깨뜨리면서 지금의 상황까지 도달한 것이다. 




 "잘 가라.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네."




 자리에 앉아 손을 흔들며 배웅하자 정민은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그러고는 문고리를 잡더니 "아, 그리고"라는 말을 뒤에 덧붙이며 중얼거리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녀석이 그랬을 거라고 생각 안 해요. 적어도 저한테만큼은 한 번도 거짓말하지 않았거든요."




 말을 마친 뒤 정민은 문을 열고 나갔다. 



 스스로를 믿고 있는 걸까. 아니, 그다지 믿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아마도 믿을 수밖에 없는 거겠지. 분명히 혼란스러울 거다. 자아 간에 기억이 공유되지 않는다고 말했던 걸 생각해보면, 지금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화요일'의 정민은 영문도 모른 채 사고에 휘말린 셈이다.



 대체 무슨 일을 겪었길래 저렇게까지 동요하는 걸까.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캐묻고 싶지만 일단은 참기로 했다. 어차피 큰 사건이라면 나중에 자연히 알게 될 것이고, 별 볼 일 없는 작은 사건이라면 그대로 묻어버려도 상관 없다.




 "뭐, 끽해야 도둑질 정도겠지."




 별 생각없이 혼잣말을 읊조리다 문득 궁금증이 들었다. 만약 정민이 말한 그 '사고'가 모종의 범죄라면, 지금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정민에게도 그 사건의 책임이 있을까? 책임이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정민과 그 사고 사이에 있는 연관점이라곤, 범죄를 일으킨 범죄자와 자신이 같은 몸을 쓰고 있다는 불행한 사실 하나 뿐이니까. 



 하지만 '처벌'의 문제에 있어서는 이야기가 또 달라진다. 범죄를 저지른 자아만 콕 집어 처벌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즉, 처벌하거나 처벌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의 이야기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셈이다.



 어떻게 결정을 내려야 하는 문제일까.



 슬슬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해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어차피 이런 문제는 잘나신 법조인 분들께서 알아서 처리할 거다. 방구석에서 술만 마시는 작가가 이렇게 머리를 쓰면서까지 고민할 필요는 없다.



 재호는 자리로 돌아와 조금 전에 먹다 남긴 맥주 캔을 들었다. 무게가 가볍다. 아무래도 맥주가 얼마 남아있지 않은 모양이다.



 캔을 통째로 뒤집어 내용물을 입 안에 털어냈다.



 오늘따라 술맛이 어딘가 묘했다.




*




#.

수요일





 "저기, 괜찮으세요?"




 누구일까. 아득한 정신 사이로 드문드문 들려오는 말소리에 수연은 게츰스레 눈을 떴다. 아이를 데리러 온 학부모일까. 아니, 아이들은 이미 진작에 보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학부모가 찾아올 리 없다.



 그러면 오늘 레슨을 받겠다고 온 사람일까. 아니, 그럴 리 없다. 이번 한 주는 레슨을 쉬겠다고 진작에 문자를 돌려놓았다. 분명 전부ㅡ




 "...아."




 순간, 수연은 외마디 소리를 뱉어냈다. 숙취로 온통 몽롱한 머릿속에 생각 하나가 번뜩 스쳐 지나갔다.



 기억이 없다. 수요일 레슨을 받는 정민에게 문자를 보낸 기억이 없다. 다른 요일들은 분명히 보낸 기억이 존재하는데, 유일하게 수요일만 문자를 보낸 기억이 떠오르질 않는다.



 오늘, 무슨 요일이더라. 수연은 엎어져있던 고개를 일으켜 멍하니 앞을 바라봤다. 흐린 시야 안에 사람의 형체가 들어왔다. 방금 수연을 깨워준 사람인 걸까. 



 미간을 찌푸리자 흐릿한 실루엣이 점차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사람의 정체를 파악한 순간. 뇌리를 스치는 번개와 함께 번뜩 정신이 돌아왔다.




 "죄, 죄송합니다!"




 수연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연신 굽혔다. 세상이 온통 휘청거려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참아야 했다. 지금 쓰러지면 다시 일어날 자신이 없다.




 "그, 죄송해요. 제가, 진짜, 제가 연락을 드렸어야 했는데 깜빡해버려서..."




 머리가 깨져버릴 것 같은 통증에 두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지금, 제대로 말은 하고 있는 걸까. 소리가 제대로 들리질 않으니 자신이 똑바로 말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가 없다. 분명, 혀가 잔뜩 꼬여버린 소리를 내고 있겠지.




 "아, 괜찮습니다. 연락을 해도 받질 않으셔서, 무슨 일이 생겼겠거니 하고 짐작은 하고 있었어요."




 젠장, 연락도 했었구나. 수연은 다시 한 번 허리를 굽혀 죄송하다는 말을 건넸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아뇨아뇨, 정말로 괜찮습니다. 편하게 앉아계세요. 술기운에 몸도 안 좋으실 텐데."




 역시, 술에 잔뜩 취해버린 건 들킨 모양이다. 생각해보면 들키지 않는 게 이상하다. 기억대로라면 지금 수연 앞에는 텅 빈 초록색 소주병이 여러 개 놓여 있을 테니까.




 "쉬고 계세요. 아래 편의점에서 뭐라도 좀 사올게요."




 수연을 부축해 자리에 앉힌 후, 잠시 나갔다 오겠다는 말과 함께 정민은 자리에서 사라졌다. 세상에 저렇게 친절한 사람도 존재하는구나. 수연은 멍한 눈길로 앞을 바라봤다. 술기운 때문인 걸까. 쿵쿵거리는 심장 박동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정민이 다시 학원에 돌아온 건 그로부터 오 분 정도 지났을 때였다. 숙취해소제랑 달달한 음료 몇 개를 가져온 정민은 그것들을 책상 위에 놓고서 수연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초록색 소주병을 빤히 쳐다보더니 대뜸 이야기를 꺼냈다.




 "저기,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네?"


 "이거, 무슨 맛이에요?"




 순간, 수연은 정민과 소주병을 번갈아 쳐다보며 두 눈을 여러 번 깜빡였다.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소주의 맛을 알려달라는 건가?




 "술, 한 번도 안 마셔봤어요?"




 정민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왜요?"


 "그냥,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어요."


 "거짓말치지 마세요. 나이도 꽤 있으실 텐데."




 수연의 입에서 피식 웃음이 튀어나왔다. 아마도 거짓말일 거라 생각은 하지만,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소주병을 쳐다보고 있는 정민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진심인 건가' 하는 생각도 조금은 들었다.




 "그럼 지금 드셔보실래요? 마침 딱 한 병 남았거든요."


 "아, 그게 딱히 마시고 싶다는 뜻은ㅡ"


 "뭐 어때요. 한 잔 정도는 괜찮잖아요. 자."




 종이컵 하나를 정민의 손에 쥐여주고는 소주를 졸졸 따라주었다. 한참동안 그것을 빤히 바라보던 정민은 조심스럽게 입을 가져다대더니 그대로 소주를 들이켰다.




 "먹어보니까 어때요?"


 "...쓰네요."




 잔뜩 찡그린 표정으로 물을 마시는 정민의 모습에 수연은 웃음을 터트렸다. 진짜로 첫경험인 걸까. 문득 궁금증이 들어 묻자, 정민은 "아까부터 계속 말씀드렸잖아요."라는 말과 함께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술은 맛있는 거라고 아는 사람이 그랬었는데, 아무래도 속은 것 같네요." 정민이 휴지로 입가를 닦으며 말했다.


 "아는 사람? 누구요?"


 "친한 친구를 통해 알게 된 사람인데, 항상 캔맥주를 달고 다니는 사람이에요. 제 친구랑 종종 같이 일하거든요."


 "그 사람, 틀림없이 괴짜겠네요."


 "가끔씩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이런저런 대화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음식이라던가, 취미 같은 간단한 대화 주제를 시작으로 피어난 이야기꽃은 차츰차츰 두 사람이 살아온 이야기로 번지기 시작했다. 




 "ㅡ어릴 때만 해도 저는 제가 굉장히 재능 있는 사람인 줄 알았어요. 그래도 고등학교 때까지는 성적도 나름 상위권이었거든요. 분명 그랬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돼버린 건지."


 "어떤 일이라도 있었던 건가요?"


 "아뇨, 사건 같은 건 없었어요. 그냥, 대학교에 오고 나니 이제는 쫓아가는 것조차 벅차더라고요.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진작에 음악 같은 건 포기했을 텐데."


 "짐작도 안 되는 이야기네요. 저는 수연 씨가 연주하는 것도 따라가기 벅찬데."


 "그거야 당연하죠. 저도 일단은 전공생이니까. 그리고, 따라가기 벅찬 건 정민 씨가 연습을 안 해서 그래요."


 "...죄송합니다."




 과연. 그래도 연습을 안했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가지고는 있구나.




 "저 말이죠. 처음 만났을 때 정민 씨한테 진짜 기대 많이 한 거 알아요?"


 "기대요?"


 "처음 만나셨을 때 그랬잖아요. 음악으로 이루고 싶은 게 있다고."


 "......."


 "뭐야, 거짓말이었어요?"


 "아뇨, 그건 아닌데요. 다만,"




 말씀드리긴 곤란할 것 같습니다. 뭔가 그런 말을 할 것만 같은 표정으로 정민은 수연을 바라봤다. 세상에 뭐 이리 비밀이 많은 건지. 수연은 신경질적으로 소주를 들이켰다.




 "됐어요. 관둬요."


 "죄송합ㅡ"


 "사과는 됐고요. 그래도 음악에 진심이신 건 맞죠?"


 "당연하죠."


 "그럼 됐어요."




 그렇게 말하고서 수연은 다시 한 번 소주를 들이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정민은 수연이 잔을 내려놓자마자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평소에도 이렇게 술 마시는 일이 잦은 편이신가요?"


 "왜요, 그런 사람처럼 보여요?"


 "아,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순간, 잔뜩 당황하며 손사래를 쳐대는 정민의 모습에 수연이 피식 웃었다.


 "농담이에요. 일단, 이렇게 많이 마셔본 적은 처음이에요."


 "그러면, 혹시 뭐 때문에..."


 "비밀로 할래요. 그쪽도 비밀 많잖아요."




 수연이 정민을 째릿 노려다보며 말했다. 반 쯤은 장난이었지만 반 정도는 진심이었다. 저마다 말하기 싫은 비밀 하나 쯤은 간직하고 있으니 충분히 이해는 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거리를 두는 것 같이 느껴져 섭섭한 감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마지막 잔을 들이켠 뒤 수연은 다시 한 번 정민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내 나직한 목소리로 이야기 하나를 꺼내기 시작했다.




 "ㅡ저기, 혹시 그런 생각 해본 적 있어요?"




 그 말을 시작으로 수연은 자신의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처음 이야기를 시작할 때는 방금 막 꾸며낸 소설이라도 되는 것 마냥 말했지만, 시간이 지나니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어느새 수연 자신으로 변해 있었다. 어두웠던 어린 시절부터 엄마의 조촐한 장례식장에 다녀왔던 이야기까지. 누구에게도 꺼내지 않았던 과거를 수연은 상세히 털어놓고 있었다.



 술기운 때문인걸까. 스스로 그렇게 핑계를 대보지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취기는 이미 가신 지 오래다. 애당초 자신이 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조차 도무지 알 수 없다.




 "미안해요. 괜히 말 실수를 해버린 것 같네."


 


 수연은 멋쩍게 웃으면서 찔끔 흘러나온 눈물을 휴지로 닦아냈다. 정민은 수연을 바라본 채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역시, 이런 무거운 이야기는 별로 듣고 싶지 않았으려나.




 "그러면, 오늘 술을 마신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인가요?"


 "아뇨, 그건 다른 이야기예요. 실은..."




 제멋대로 움직이던 입을 순간적으로 다물었다. 이런 것까지 말해도 되는 걸까.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결정을 내렸다.




 "...친구 한 명이 이번에 실종됐어요." 파르르 떨리는 입술로 말했다.


 "이채은이라고, 꽤 친한 친구였는데 얼마 전부터 갑자기 연락을 안 받더라고요. 그래서 혹시나 싶었는데..."




 입술을 꽉 깨물었다. 더이상 이야기를 이어나갈 수가 없었다.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져나올 것만 같아 휴지 몇 장을 급하게 뽑아 들었다.




"죄송해요. 오늘 따라 감정이 주체가 안 되네요. 아, 왜 이러지."




 결국, 수연은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적어도 다른 사람 앞에서만큼은 울고 싶지 않았는데, 제멋대로 흐르는 눈물을 도저히 주체할 수 없었다.




 "미안해요. 이렇게 꼴사나운 모습 보여줘서."


 "괜찮습니다."




 정민은 괜찮다는 말 한 마디와 함께 수연에게 휴지를 가져다주었다. 그리고는 주춤주춤 몸을 움직이더니 이내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ㅡ저한테 이런 말 할 자격이 있을진 모르겠지만, 수연 씨,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뭐예요, 위로해주는 거예요?"


 "진심입니다."


 "......."


 "어머니 문제로 고민하는 것도, 친구 문제로 슬퍼하는 것도 전부 수연 씨가 좋은 사람이라서 그런 거라고 생각해요. 다른 사람에게 무관심한 사람이라면 그런 고민 같은 건 갖고 있지도 않을 테니까요."


 "...고마워요."




 떨리는 미소로 정민에게 웃음을 지어보였다. 이 사람, 어쩜 이렇게 말을 상냥하게 할 수 있는 걸까. 온기를 담은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마음까지 저절로 따뜻해지는 기분이다.




 [ 당신이야말로 좋은 사람이에요. ]




 낯이 부끄러워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그렇게 말했다. 분명히 그렇게 생각한다. 적어도 자신에게 있어 백정민이라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다.




 "이렇게 말해놓고 다음 주부터 안 나오시는 건 아니죠?" 웃음기를 가득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 들켰나요? 실은 오늘 무단으로 레슨 펑크내신 것 때문에 그만둘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또 이러신다."




 그렇게 말하면서 수연은 한쪽 손으로 정민의 어깨를 가볍게 때렸다. 늘 봐왔던 장난기 많은 정민의 모습이다.




 "아무래도 시간도 늦었고 하니 오늘은 돌아가봐야겠네요."


 "어라, 벌써...그러네요." 




 잠깐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시간이 두 시간이나 지나있다. 수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밝은 표정으로 정민을 배웅했다.




 "다음 주에 또 봐요."


 "네, 가보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정민은 홀연히 사라졌다. 배웅을 마친 수연은 현관문에 등을 댄 채 축 늘어진 자세로 가만히 생각했다.



 사귀는 사람, 이미 있으려나.



 문득 떠오른 걱정에 수연은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넘겼다. 



 아마도, 역시. 



 있지 않을까.



 다음 번에 스리슬쩍 물어봐야겠다고, 그렇게 다짐을 맺었다.



 적막 속에서 깊게 한숨을 울렸다.



 

*




#.

목요일





 늦은 저녁,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한 준서는 침대 위에서 외마디 탄식을 내질렀다. 왜 시간은 항상 휴일에만 빨리 흘러가는 걸까. 아직 일어난 지도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핸드폰 속 시계는 벌써 열 시를 가리키고 있다.



 오늘 하루도 이렇게 끝났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급격하게 피로감이 몰려왔다. 일하기 싫다. 그런 감정에서 몰려오는 피로도 있었지만 단지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번 한 주, 그 짧은 사흘 사이에 준서는 너무나도 많은 사건을 겪었다. 그 고단함에서 나오는 피로감은 휴일 하루로 지워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지난 월요일, 미행하던 정민을 놓친 후 준서는 카페에서 마주쳤던 여자를 우연히 다시 만났다. 설마 자신과 똑같은 방법으로 정민을 따라가다 놓친 걸까. 생각이 직감적으로 들었지만 크게 의식하지는 않았다. 그런 바보같은 짓을 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또 있을 리 없다.



 어쨌거나 반가운 감정이 들어 준서는 그 여자와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자는 자신을 지아라고 소개했다. '재밍'의 본명과 똑같았다. 혹시나 싶어 물어보니 지아는 자신이 맞다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설마 싶었는데, 진짜였구나.



 그 이후로 준서는 궁금했던 질문을 몇 가지 덧붙였다. 우선 가장 궁금한 건 정민을 찾는 이유였다. 정민과 무슨 사이냐 묻자 지아는 자신의 영상을 편집해주는 사람이라 대답했다. 영상 편집자 일이라도 했던 걸까. 평소의 과묵한 성격을 생각한다면 도통 매치가 안 되는 직업이다.



 지아 역시 정민이 카페에서 일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납득하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당연한 이치다. 돈을 벌기 위한 게 목적이라면 편집자 일에 올인하는 쪽이 훨씬 편할 테니까. 그래서 지아는 자신의 두 눈으로 확실하게 확인해보고 싶었다고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혹시나, 다른 사람을 착각했던 걸 수도 있으니까.



 그 이후로도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누다 두 사람은 번호를 교환한 뒤 헤어졌다. 번호를 달라는 말에 처음에는 망설였던 지아였지만, 정민을 찾기 위한 목적이라 말하자 지아는 선뜻 자신의 번호를 알려주었다. 그러고는 서로 간에 정보가 생기면 꼭 공유하자는 약속도 맺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이후로 준서는 어떤 단서도 건지지 못했다. 하루는 정민을 놓친 왕십리역에서 온종일 돌아다녀보기도 했지만 결국은 마땅한 수확 없이 집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대체 어디로 사라져버린 건지. 지아에게서도 통 연락이 없는 걸 보니 그쪽도 상황은 비슷한 모양이다. 하긴, 애시당초 사는 지역이 똑같으니 조사 결과도 비슷할 수밖에 없다.




 - ♬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 현관문에서 느닷없이 벨소리가 울렸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올 사람이 있던가? 크게 생각해보면 택배 아니면 아파트 직원일 가능성이 높다.



 준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눈을 비비며 현관으로 향했다. 그리고 문을 연 순간, 눈앞에서 나타난 사람의 모습에 준서는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네가...여긴 웬일이야?"




 정민이다. 틀림없는 정민의 모습이다. 갑자기 여기는 왜 찾아온 걸까. 단순히 집에 가는 길에 들렀다기에는 부자연스럽다. 정민의 집과 준서의 집은 자그마치 사십 분 거리다.



 아니, 그보다도 어떻게 이 집을 찾아온 걸까. 기억을 돌이켜보니 한 달 전 즈음 무심코 집 주소를 말했던 기억이 있다. 설마 그걸 한 번 듣고서 지금까지 기억해온 건가. 바싹 말라붙은 입에 침을 꿀꺽 삼켰다.




 "잠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요. 들어가도 될까요?"




 쿵쿵 울리는 심장 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온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이라도 문을 닫을까? 아니, 안 된다. 지금 정민은 한 손으로 현관문의 모서리를 잡고 있다. 문을 닫으려고 시도했다가 실패라도 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저 거대한 체격의 남자를 힘으로 이길 자신은 없다.



 잠시 자리에서 고민하던 준서는 들어오라는 말과 함께 현관문을 열어주었다. 그냥, 정말로 단순히 이야기를 하러 온 걸 수도 있다. 괜히 예민하게 반응했다가 정민이 눈치라도 챈다면 그쪽이 오히려 곤란하다.




 "차라던가, 커피 같은 거 괜찮아?"




 문장 하나를 말하는 게 이토록 힘든 일이었던가. 평소에는 크게 생각치도 않았던 단어들이 뇌리에 또렷하게 자취를 남긴다.




 "커피 한 잔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줄곧 현관에 서있던 정민이 대답했다.


 "알겠어."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커피포트를 들고서 싱크대로 향했다. 



 준서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등 뒤에 있는 정민을 힐끗 쳐다보았다. 정민은 자신의 핸드폰에 시선을 두고 있다. 이쪽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모습이다.



 준서는 급하게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정민이 찾아왔어'라는 짧은 문자를 지아에게 보낸 뒤 다이얼 화면에 1, 1, 2 라는 번호를 입력했다. 초록색 통화 마크가 반짝 하고 빛났지만 누르지는 않았다. 이건 어디까지나 비상용 수단일 뿐이다.



 커피포트에 물을 받은 뒤 자리로 돌아왔다. 정민은 어느새 식탁 위에 앉아있었다.




 "따로 좋아하는 커피 있어? 맥심이라던가, 카누라던가."


 "딱히 상관 없습니다."




 볼 일을 마친 걸까. 정민은 핸드폰의 화면을 끄더니 그것을 주머니 안에 넣어두었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부글부글 끓는 물소리가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은 적막을 맴돌았다.




 "무엇...때문에 온 거야?"




 가까스로 말을 뱉어내고는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아까 전부터 입 안이 자꾸만 바싹 타오른다.



 분명 아무 일도 없을 거라 생각한다. 이성적으로 생각을 해보면 지금까지 준서가 해왔던 추리 중에 확실한 증거가 있었던 건 아무것도 없다. 지금 준서가 정민에 대해 품고 있는 생각은, 정황증거와 심증을 그럴 듯하게 섞어서 만들어낸 하나의 추리 소설일 뿐이다.



 하지만, 왜일까. 가슴 아래 더부룩한 감각이 맺혀있다. 직감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이 감각이 준서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준서는 책상 아래로 숨긴 핸드폰을 두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정민이 자신에게 달려든다면 그 즉시 초록색 통화마크를 누르리라. 준서는 그렇게 다짐을 지었다. 그리고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정민을 응시했다.




 "사실, 여기 올 생각 같은 건 원래 없었어요. 선배도 아시겠지만 어차피 저희 다시 만날 일도 없잖아요. 그냥 이대로 헤어지면 그만인 일이니까, 그래서 이렇게 선배 집에 찾아올 생각도 없었죠."




 말투가 묘하게 바뀌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정민은 단 한 번도 준서에게 '선배'라는 표현을 쓴 적이 없다.



 팔과 목덜미에 소름이 쭈뼛 돋았다. 다른 건 몰라도 이 사실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지금, 준서가 마주하고 있는 정민은 자신이 알고 있던 정민이 아니다.




 "그런데, 계획이 조금 바뀌었어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선배 얼굴만큼은 꼭 보고 가야겠더라고요."




 '그'가 환한 표정으로 밝게 웃으면서 말했다.




 "솔직하게 말해주세요. 저, 선배가 미행하는 거 다 보고 있었으니까."




 전부, 알고 있었다고? 그럴 리 없다. 미행하는 내내 정민이 자신을 쳐다본 기억은 한 번도 없다.



 그렇다면, 어디서, 대체 어떻게.




 "당신, 뭔가 알고 있죠?"




 '그'가 싸늘하게 굳은 표정으로 묻는다.



 준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 목소리가 나오질 않는다.




 "그렇게 가만히만 계실 거면ㅡ"


 "...미행한 거, 본 적 없잖아."




 떨리는 목으로 말했다.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는 딱딱하게 굳은 동공으로 준서를 응시할 뿐이다.




 "그건, 월요일이었잖아. 설사 봤다고 하더라도 네가 기억할 리 없어. 그건 네가 나를 본 게 아니니까."


 "...어디까지 알고 있어요?"




 목소리가 바뀌었다. 아주 짧은 문장 하나임에도, 차갑게 식어버린 물음표가 너무나도 강렬해서 알아차릴 수밖에 없다. '그'는 한 손을 턱에 괴고서 준서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그'의 다른 손 한 쪽은 책상 아래에 있다. 처음부터 책상 아래로 두 팔을 두었던 그였기에 별다른 차이가 생긴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무언가 바뀌었다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다. 



 방금 소리 하나를 들어 버렸다. 쇠붙이가 무언가와 부딪힐 때 나오는, 그 특유의 둔탁한 소리를.




 "방금, 알지 말아야 할 걸 알아버린 건 확실한 것 같네."




 나직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를 쳐다봤다. 목이 바싹 타올라 얼마 고이지도 않은 침을 억지로 삼켰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까. 스스로에게 그런 질문을 던져봤지만 우습다는 생각이 들어 이내 관두고 말았다.



 이미 알고 있잖아. 그 질문의 대답 정도는.




 "...유감입니다."




 한순간이었다. 말과 동시에 '그'는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준서에게 달려들었다. 



 준서는 초록색 통화마크를 누르고서 핸드폰을 바닥에 던졌다. 그리고는 옆자리에 놓여있던 의자를 집어 '그'를 가격했다. 순간, 짧은 비명과 함께 '그'가 넘어졌다.



 도망쳐야 한다. 준서는 재빠르게 현관으로 달려가 도어락 버튼을 눌렀다.



 ...거짓말. 문이 열리질 않는다. 문은 커녕 기계에서 소리조차 들리질 않는다. 




 "무슨..."




 강하게 버튼을 몇 번 내리치자, 헐겁게 끼워져있던 건전지 뚜껑이 바닥에 떨어졌다. 



 ㅡ사라져 있다. 건전지 뚜껑 안쪽에 건전지가 하나도 없다. 이상한 일이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작동했던 도어락이다.



 설마, 아까 현관에 계속 서있던 이유가.



 급하게 수동으로 문을 돌렸다. 그리고, 문고리를 돌려 밖으로 나가려던 순간.



 등 뒤에서 무언가 묵직한 쇠붙이가 움푹 들어왔다. 이상한 느낌이 들어 아래를 쳐다보니 자신의 가슴에서 새빨간 선혈이 흘러나오고 있다.



 찌릿하는 통증과 함께 시야가 차츰 흐려지기 시작한다. 준서는 문고리에 손을 올린 채 주르륵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저 멀리 부엌에서 무언가 말소리가 들려온다. 경찰인 걸까.



 말해야 하는데, 말이 나오지를 않는다. 지금 자신이 내뱉을 수 있는 건 거친 호흡과 신음 뿐이다.



 푹. 쇠붙이가 다시 한 번 등을 꿰뚫었다.



 그리고, 한 번 더 꿰뚫었다.




*




#.

금요일





 < 지금 찾아가도 될까요? >




 그런 문자가 찾아온 것은 12시가 조금 지난 새벽이었다. 지아는 순간적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때마침 휴방일이라 별로 문제는 없지만,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찾아오는 건 조금 당황스럽다.




 < 조금만 이따가 찾아오면 안 될까? >


 < 급해요 >




 곧바로 돌아온 답장에 지아는 창밖으로 시선을 두었다. 장대비가 얼마나 세차게 내리는지, 깜깜한 밤인데도 빗줄기가 드문드문 눈에 들어온다. 지금 밖에 있기라도 한 걸까. 키보드를 두들겨 문자를 보냈다.




 < 지금 밖이야? >


 < 네 >




 답장은 이번에도 곧장 돌아왔다. 지아는 다시 한 번 창밖을 바라보았다. 



 역시, 이런 날씨 속에 내버려두는 건 조금 그렇다. 




 < 알았어 >




 문자를 보내고 5분 정도 시간이 지나니 초인종이 울렸다. 한걸음에 달려가 문을 열어주니 비에 홀딱 젖은 정민이 가만히 자리에 서 있었다.




 "우산, 안 가져갔어?"




 조금은 어색한 반말로 물었다. 정민은 고개를 세로로 끄덕였다. 



 얼굴을 얼핏 살펴보니 눈두덩이가 새빨갛게 부어있다. 울기라도 한 걸까.




 "일단 들어와. 그, 집이 조금 지저분하긴 할 텐데, 이해해줘."




 그렇게 말하고는 정민의 손을 붙잡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흥건하게 젖은 옷에서 물방울이 떨어지길래 우선은 욕실 쪽으로 정민을 안내했다.




 "여분 옷은 내가 어떻게든 찾아둘 테니까, 일단 씻어."


 "...네."




 생기라곤 전혀 없는 메마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퀭한 얼굴도 그렇고, 오늘따라 정민의 상태가 어딘가 이상하다.




 "너ㅡ"




 무슨 일 있었어? 그런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지난 번에 정민은 지아가 울고 있을 때 아무런 사정도 캐묻지 않고 지아를 다독여줬었다. 그러니 이쪽도 사정을 캐묻지 않는 게 당연한 예의다. 두 눈을 깜빡이면서 지아를 쳐다보는 정민의 모습에 지아는 "아무것도 아니야"라는 말과 함께 여분 옷을 찾으러 돌아섰다.



 십 분 정도 옷장을 뒤적거리고 나니 대충 커보이는 티셔츠 한 벌을 찾아낼 수 있었다. 사이즈를 잘못 샀다가 교환하기는 귀찮아서 내버려두었던 옷인데, 설마 이 옷이 이렇게 쓰일 줄은 몰랐다. 지아는 곧장 욕실로 돌아와 문틈 사이로 옷을 건넸다.




 "그, 바지는 네 키에 맞는 게 없어서 반바지로 넣어뒀어. 괜찮지?"


 "괜찮아요."




 미소와 함께 옷을 받아든 정민은 금방 갈아입고 나오겠다는 말과 함께 문을 닫았다.



 기분 탓일까. 찰나의 순간이긴 했지만 방금 마주친 정민의 눈은 아까보다도 붉어져 있었다. 조명 탓이라고 생각하기에는 확연한 차이였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목소리도 그렇고 평소 편집자로서 마주하던 정민과는 무척이나 다른 모습이다. 지아도 지난 주에는 정민에게 저런 모습으로 비춰졌을까. 문득 떠오른 기억에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저기, 옷은 여기에 두면 될까요?"


 "어? 아, 나한테 주면 돼."




 어느새 옷을 갈아입고 나온 정민이 지아에게 옷가지를 건넸다. 시간이 지나 제법 물기가 빠졌을 텐데도 옷에서는 여전히 물방울이 뚝뚝 흐르고 있었다. 지아는 "금방 세탁기에 넣고 올게" 라는 말을 건네고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세탁기 쪽으로 걸어가던 와중, 지아는 옷에서 이상한 흔적을 발견했다. 워낙에 옷 색깥이 짙어서 처음에는 눈치채지 못했었는데, 이 옷, 소매 부분만 조금 색상이 다르다. 무슨 물감이라도 묻은 걸까. 코에 가까이 대보니 비릿한 냄새가 올라왔다. 가끔 코피가 터졌을 때 느껴졌던 냄새와 느낌이 비슷하다.



 설마, 아니겠지. 지아는 고개를 가로저은 뒤 세탁기에 옷을 집어넣었다. 기껏 해봐야 코피가 터져서 소매로 조금 닦아낸 정도일 거다. 



 분명, 별 거 아닐 거다.



 

 "저, 피곤한데 여기서 자도 괜찮을까요?"




 정민이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나, 지아는 그것이 꾸며낸 표정이라는 걸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아무래도 정민은 표정 연기에 영 소질이 없는 듯 하다.




 "그럼, 마음대로 써도 돼."




 분명 피곤하겠지. 저번에도 밤 11시 정도에 방으로 들어갔으니 지금은 틀림없이 피곤할 거다. 지아는 잘 자라는 말을 건넨 뒤 정민이 들어간 방의 불을 꺼주었다.



 뱌닥에 잔뜩 떨어진 물기를 가볍게 정리한 뒤 지아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상황이 대충 정리되고 나니 문득 생각난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맞다. 소식 보내줘야지."




 책상 위에 두었던 핸드폰을 집어든 뒤 메신저를 켰다. 약속은 약속이니 지켜야겠지. 



 지난 월요일, 지아는 태주가 말한 내용을 토대로 카페 리스트를 쭉 뽑아낸 뒤 한 곳 한 곳 찾아다니며 정민의 행방을 물었다. 가야 할 카페만 스무 곳이 넘었지만, 다행히도 전부 비슷한 지역에 몰려있어 하루 안에 충분히 끝낼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카페를 돌아다녀봐도 정민을 알고 있다는 카페는 단 한 곳도 없었다. 역시, 지아를 골탕먹이기 위해 태주가 일부러 지어낸 말이었을까. 그런 심정으로 찾아간 마지막 카페에서는 드디어 수확을 얻을 수 있었다. 정민이 일하던 카페를 마침내 찾아낸 것이다. 



 그러나, 그 카페는 이미 오늘 영업을 종료한 상태였다. 지아를 맞이한 건 정민이 아닌 다른 남성이었고, 그 남자는 정민이 일주일 전 카페를 그만두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결국, 지아가 잡을 수 있는 연결고리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던 거다.



 괜한 욕심을 부렸던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집으로 돌아가던 찰나, 지아는 우연히 거리에서 정민을 마주쳤다. 정민은 어디론가 급하게 걸어가는 모습이었다.



 대체 어디를 가려 하는 걸까. 문득 호기심이 든 지아는 정민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혹시나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 지하철 안에서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이동했다. 미행이 결코 좋은 짓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지아는 금요일이 아닌 다른 시간대의 정민이 궁금했다. 정민이 어디로 이동하는지만 확인하고 미행을 마치리라. 지아는 그렇게 다짐하고서 문 부근에 서 있는 정민을 멀찍이서 쳐다봤다.



 그러던 와중 사건은 갑작스럽게 발생했다. 왕십리역에 열차가 도착하자마자 사람이 쏟아진 탓에 지아는 그만 정민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뒤늦게서야 정민이 왕십리역에 내렸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는 있었지만, 열차는 이미 왕십리역을 지난 지 오래였다.



 하는 수 없이 지아는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 반대편 방향으로 가는 열차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 정거장에서 일전에 만난 적 있던 남자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아까 카페에서 보았던 그 남자였다. 설마 자신과 똑같은 방법으로 정민을 따라가다 놓친 걸까. 생각이 직감적으로 들었지만 크게 의식하지는 않았다. 그런 바보같은 짓을 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또 있을 리 없다.



 그 후, 그의 인사를 시작으로 지아와 그 남자는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을 준서라고 소개했다. 아무래도 지아의 스트리머 이름을 알고 있는 듯 싶어, 방송에 관한 이야기를 몇 가지 나누다 준서의 제안으로 약속 하나를 맺게 되었다.



 정민에 대해 새로 알게 된 정보가 있으면 서로 공유할 것. 그것이 준서가 내놓은 제안이었다. 정민에 대한 정보가 턱없이 부족했던 지아에게는 괜찮은 제안이었다. 실제로 당장 어젯밤만 해도 준서는 지아에게 '정민이 찾아왔다'라는 간단한 문자를 보냈었다. 그 뒤로 자신이 보낸 답장은 읽지도 않았다는 게 문제긴 하지만.




 "아직도 안 읽었네."




 메신저에 들어가보니 자신이 보낸 메시지 옆에 여전히 숫자 1이 남아있었다. 아직 읽지도 않았다는 뜻이다. 순간 흥분해서 이것저것 질문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읽씹까지 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지아는 양쪽 볼을 잔뜩 부풀린 채 준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 오늘은 저한테 찾아왔네요 >




 오늘이라기에는 몇 시간 밖에 안 지나긴 했지만. 



 지아는 핸드폰을 끄고서 침대에 누웠다. 잠은 별로 오지 않았지만 내일 방송 일정을 위해서라도 숙면을 잔뜩 취해둬야 했다.



 그러다 문득, 지아의 머릿속에서 질문이 떠올랐다. 정민은 대체 왜 지아의 집에 찾아온 걸까? 당장 몇 시간 전만 해도 준서의 집에 있었던 걸 생각해보면, 굳이 비를 피해 지아의 집까지 찾아올 이유는 없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 때문일까. 지아는 오늘 하루 얻은 정보들을 차근차근 모아보기 시작했다.



 갑자기 집에 찾아온 정민과, 연락이 두절된 준서. 그리고,



 ...핏자국이 묻어있는 소매.



 순간, 뇌리를 스치는 가설에 지아는 부르르 온몸을 떨었다. 아니, 그럴 리 없다. 그럴 리가.




 - 나중에 들려오는 소식으로 찾아보니까, 그 녀석 어떤 여자의 실종 사건에 유력 용의자로 찍혀 있더라고. 당장은 심증이지만 확실한 증거만 나오면 곧장 체포라도 할 기세야.




 일전에 태주에게서 들었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무슨 바보같은 짓을 해버린 걸까. 지아는 자신의 집에 살인자를 들여놓고 말았다. 단순한 살인자도 아니다. 방금 막, 집에서 사람을 죽이고 빠져나온 연쇄살인마다.



 다시 한 번 핸드폰을 집어들고는 본능적으로 전화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는 경찰에 신고를 넣으려던 순간, 낯익은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어왔다.




 "저기, 혹시 주무시고 계세요?"




 등골에 소름이 끼쳤다. 목소리를 들은 순간 오싹했다. 지아는 애써 가다듬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아니. 그냥 눕기만 했어."




 필사적으로 말했다. 어색하게 들리진 않았을까. 걱정 속에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럼, 혹시 잠깐만 나와줄 수 있어요? 도통 잠이 안 와서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지아는 평소의 자신이 했을 법한 대답을 곰곰이 생각해봤다. 잘못 말해서는 안 된다. 지금 저 문 너머에 서 있는 남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




 "알았어, 나갈게."




 나지막하게 말을 뱉어내고는 침대에서 일어섰다. 원형 문고리에 손을 걸친 순간 움직임이 멈췄다. 거실에 들어가는 것이 이렇게까지 무서운 적이 있었던가. 숨마저 턱턱 막혔다. 마치 이 문 너머에 맹수가 기다리고 있는 듯한 그런 공포와 지아는 싸우고 있었다.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다잡아, 문손잡이를 비틀었다. 평소보다 문을 힘차게 열고는 "무슨 일이야?"라고 애써 밝은 미소로 정민을 맞았다. 




 "죄송해요. 누군가, 들어줄 사람이 한 명은 필요했거든요."




 씁쓸한 표정을 지어보인 정민은 지아를 이끌고서 거실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눈 앞에 보이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더니 멍한 표정으로 지아를 쳐다보았다. 어째서인지, 소파에 앉아 잔뜩 설교를 늘어놓던 태주의 모습이 겹쳐보인다. 결국은 정민 역시 그런 거짓을 말하려고 하는 걸까.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내 이어진 정민의 말에 지아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실은 제 안에 일곱 명의 사람을 품고 있어요."




 그 말을 시작으로 정민은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줄곧 지아가 쫓아오던 '카페 알바생' 정민의 모습을 비롯하여, 요일마다 하나씩 존재하는 자아를 정민은 담담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처럼 살아가보려 했었는데,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더라고요. 몇 장 되지도 않는 메모지로 사람의 기억을 담아내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까. 그래서 그때부터 결심했어요. 각자의 삶을 하나의 사람으로 존중하면서 살아가기로. 지아 씨가 지금 마주하고 있는 저도 그렇게 편집자 일을 시작했어요."




 그 뒤로 정민은 자신이 온전하게 기억을 갖고 있는 '금요일'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무턱대고 영상 편집을 시작했다가 작은 이펙트 하나 제대로 쓰지 못해 끙끙댔던 경험부터, 모두가 알아주는 네임드 편집자로 오르는 과정까지. 그 이야기 속에는 지아의 이름도 끼어 있었다.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는 기뻤어요. 기억하실진 모르겠지만, 예전에 올렸던 영상 중에 고민상담 컨텐츠 같은 게 있었거든요. 그때가 한창 일거리도 제대로 안 들어오고 힘들었던 시기였는데, 그 영상에서 지아 씨가 그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힘들고 어려운 순간은 혼자서 이겨내는 게 아니라고. 말 뿐인 응원처럼 느껴질지는 몰라도, 자신이 곁에서 지켜봐줄 테니 함께 헤쳐나가자고."




 순간, 지아는 예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는 방송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라 지아 역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힘든 시기였다. 그래서 함께 힘내자는 의미로 말했던 내용이었는데, 설마, 이렇게 될 줄이야.




 "고마웠어요. 그 한 마디는 그래도 전하고 싶더라고요."




 시선을 아래에 둔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며 정민은 살짝 웃음을 지어보였다. 



 지아는 멍한 눈길로 정민을 쳐다봤다.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갑작스럽게 쏟아진 정보를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다. 이제는 정민이 살인자가 맞는지도 모르겠다.




 "그럼, 너는..." 기어들어가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 맞는 거야...?"




 질문이지만 희망사항에 가까웠다. 지아는 정민이 거짓을 말해주기를 바랐다. 자신은 살인 같은 거 저지른 적 없다고, 강력한 목소리로 그렇게 외쳐주기를 바랐다. 정민이 이미 사람을 죽였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정민이 그것을 부정해주기를 바랐다.



 대체 왜 그런 대답을 바라는 걸까. 그 이유는 지아 자신도 잘 몰랐다. 



 지아는 정민이 떠나가지 않기를 바랐다. 단지 그 뿐이었다.




 "일단은, 금요일이니까요."




 정민이 고개를 끄덕이자 지아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마음 한구석에 드는 묘한 안도감과 함께 눈시울이 촉촉하게 젖어왔다.




 "그렇지만, 지아 씨가 알고 있는 만큼 착한 사람은 아니예요. 저, 실은 도망치려 그랬거든요."




 정민은 다시 한 번 자신의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처음 정민이 채은을 죽였을 때, 목요일의 자아는 '자신이 죽였다'라는 말을 똑똑히 메모지에 써놓았었다고 전했다.




 "처음 그 내용을 확인했을 때는 경찰에 자수하려 그랬었지만, 시간이 지나니 생각이 바뀌더라고요. 제가 저지르지도 않은 잘못으로 제 삶을 잃고 싶지 않았어요." 정민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래서 '목요일'이 적어놓은 메모의 내용을 바꿨죠. '내가 죽였다'에서 '나는 죽이지 않았다'로."




 이야기를 마치고 정민은 한쪽 손으로 자신의 입을 덮었다. 그의 눈가는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열두 시가 넘어 금요일이 되자 제가 빗줄기 한가운데 서있더라고요. 상황을 파악하고 나니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그때 메모 내용을 바꾸지 않았다면, 처음 생각했던 그대로 자수를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랬다면, 적어도 준서 씨만큼은 살 수 있지 않았을까."




 결국, 정민은 양손에 얼굴을 파묻고서 소리없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지아는 정민 옆에 조용히 무릎을 대고 등을 쓸어줬다.



 지아가 처음 생각했던 대로, 정민은 살인자가 맞았다. 하지만 지아가 생각했던 대로의 살인자는 아니었다. 지금 자신의 눈 앞에 있는 정민은, 지아가 처음부터 알고 있던 사람의 모습 그대로였다.



 

 "아까 방 안에서 혼자 생각해봤어요. 솔직히 도망치고 싶었는데, 그래도 제 잘못은 제 의지로 확실하게 마무리짓고 싶더라고요. 그 메모지의 내용을 바꾼 건 저니까. 그래서 이번에는 제가 메모지를 작성했어요. '내가 죽였다'라는 내용으로."




 완전히 쉬어버린 목소리로 정민은 더듬더듬 말했다. 그리고는 책상 위에 놓여있던 핸드폰을 집어들더니, 그 안에 남아있는 통화기록을 지아에게 보여주었다.



 1, 1, 2.



 그 기록의 의미를, 지아는 누구보다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일순간, 정민이 슬쩍 열어놓은 현관문으로 경찰들이 들이닥쳤다. 순식간에 서너 명의 경찰들이 거실로 달려들었고, 두 손을 들고 앉아있던 정민은 그들에게 그대로 제압당했다. 삽시간에 벌어진 상황에 멍하니 정민을 지켜보던 지아도 이내 경찰들의 손에 붙잡혀 어디론가 끌려가기 시작했다.



 안돼. 아직 하고 싶은 말이 잔뜩 남았는데.



 지아는 어떻게든 정민 쪽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있는 힘껏 발버둥쳤다. 그러나 무리였다. 건장한 성인 남자 네 명의 힘은 지아 혼자서 이겨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놓아. 놓으란 말이야.



 지아는 멀어져가는 정민의 모습을 보면서 비명을 내질렀다.



 복잡한 감정이 섞인, 절규에 가까운 비명을 내질렀다.




*




렌죠 미키히코의 7인 1역에서 영감을 받아 작성했습니다.

- 현재 퇴고 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