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 속보


난 서현과 헤어지고 난 후 저택 근처에서 잠깐 바람을 쐬려 했다.

정문을 나설 때 입구 주변의 사람들이 모두 깍듯하게 경례를 하는걸 보고 어찌나 당황했는지 원.

이곳의 수장이 데려온 손님이니 그런 태도를 보여야 한다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는건 아니었지만 역시 좀 부담스럽다.


그렇게 저택을 나서 주변을 돌며 머리를 식히고 있자니 내가 방금 나온 저택 쪽으로 시선이 쏠렸다.


다시 한번 돌아보니 정말 웅장하기 따로 없는 곳이었다.


생김새는 마치 기와로 이루어진 한옥 같았지만 곳곳에서 현대적으로 리파인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 조화로 인해 저택에서 뿜어져 나오는 화려함이 마치 배가 되는 것 같았다. 거기다 크기는 저택 안에 웬만한 건물 수십 개는 들어감직할 정도.


이런 청와대도 울고 갈 장소를 본거지로 쓰다니 검계라는 조직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이라고 그토록 자랑하던 서현의 말은 허풍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자랑이라기보단 내게 하던 잔소리에 가까웠지만 그게 그거 아니겠는가.


그렇게 길가를 활보하던 나에게 누군가 소리를 내어 멈춰 세웠다.


"공격할 생각은 없어요. 잠시 대화를 하기 위해 왔을 뿐입니다."


내가 실없는 생각을 멈추고 앞을 보니 거기에는 그녀가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방심했었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이 적대하고 있는 사람들의 본거지에 떡하니 나타날 줄은 몰랐지.


이걸로 오늘만 벌써 세 번째다.


내 눈 앞에 당당히 서 있는 그녀, 김희연과의 만남은.




당황하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니 어느새 나는 꽤나 외진 장소로 와 있었다.

생각에 잠겨 있었던 그 짧은 시간 동안 이렇게 멀리 와버리다니, 내 빠른 발걸음을 저주하고 싶어진다.


윽, 당황해서 머리를 너무 빠르게 돌렸나. 목이 아프다.


"저는 대통령이 납치된 장소를 알아내야 해요. 당신이라면 아시겠죠? 김서현, 그 아이가 대통령을 숨겨놓은 장소를 솔직하게 말하면 당신을 적대할 일도, 해를 끼칠 일도 없을 겁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아니지, 나는 아직 김서현의 진정한 목표를 모른다.

그녀가 내게 숨기던 사실이 이거였을까?


알고 싶다고 생각했던건 사실이지만 이런 방식으로 알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근데 이 여자는 또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아낸 거래.


"우선, 희연 씨가 간과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사실 하나. 전 그런거 모르는데요."


그러자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검을 뽑아 내게 들이밀었다.


"허튼 소리, 검계 분파가 이 일을 주도한건 전부 다 압니다. 당신이 모를리가 없어요."

"당신이 간과하고 있는 중요한 사실 두 번째, 전 검계가 아닌데요."


그렇게나 필사적으로 부정해왔는데 아직도 믿어 주지를 않네.

나는 이 서러운 감정을 얼굴에 그대로 담아내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김희연을 노려 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맞서듯이 내 얼굴을 한참을 노려보더니,


"하아, 알겠어요. 당신은 본국검술을 사용하지도 않고 태도나 차림새도 검계라면 결코 하지 않을 짓만 골라서 하고 있으니...... 지금까지 했던 말들을 봐서 믿어드리죠."


그녀는 그러고는 검을 다시 집어넣었다.


.저거 내가 품위 없다는 욕은 아니겠지?


........앗!


방심은 금물!


"흠, 뭐하시는 거죠? 왜 전투 태세를,"

"그야 당신이 언제 폭주할지 모르니까요."


내가 바보인줄 아나.

그녀는 항상 바슷한 타이밍에 갑작스런 두통을 호소하고는 나를 공격하곤 했다.


그렇게 한참을 경계하고 있으니 그녀가 언짢은 눈빛으로 나를 응시한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냐는 눈빛.


진짜 괜찮은 건가?


"크흠, 아무튼 전 정말로 억울합니다. 한 일이라고는 제 집 앞에서 곤란해하던 사람을 도운 일 밖에 없거든요. 그런데 이런 위험한 사건에 휘말리다니, 아이고 내 팔자야, 흑흑."


씨알도 통하지 않을 거라는건 알고 있었지만 난 일부러 과장된 제스쳐와 어투를 취하며 한탄했다.

그리고 눈 앞을 바라보니 아주 조금이지만 미안해 하는 듯한 얼굴의 김희연.


뭐지, 내가 잘못 본 건가.


그녀는 한숨을 한번 크게 쉬고는 무언가 고민하다가 나를 바라보고는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째서 서현이를 돕고 있는 거죠? 당신이 하는 행동만 보면 영락없이 검계 분파의 중요인물로 밖에 보이지 않아요. 그 아이가 당신을 자기 옆에 꼭 붙여서 데리고 다니는 것도 그렇고요. 만약 당신이 우리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반인이라면, 왜 서현이를 도와서 저를 방해할 필요가 있는거죠?"


이전까지와는 확연하게 다른, 분노나 증오가 일체 담겨 있지 않은 온화한 목소리.

그녀에게 이런 면모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


아니, 정확히 말하면 김희연의 이런 모습을 난 본 적이 있다.

떠오르는건 나와 그녀가 처음 만났을 때, 내가 베푼 호의에 순수하게 감사를 표하던 그녀의 모습.


내가 왜 서현을 돕고 있냐고? 그거야 당연한거 아니겠는가


"전 단순히 그녀를 돕고 싶어서 이러는 거에요. 제 딴에 판단하기는 서현 씨가 도움이 필요해 보였거든요. 자, 끝"

".......고작 그 정도 이유로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타인을 이렇게까지 도와주려 한다는게 말이 된다고,"

"말이 됩니다. 되고 말고요.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지금 서현 씨가 무슨 일을 하려고 하는지 저는 잘 모르지만, 그래도 그녀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 만은 저라도 알 수 있어요. 그렇다면 전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도울 뿐, 입니다."


인간은 서로에게 손을 내밀어주며 살아가는 생물이다.

히어로는 도움이 필요한 타인을 아무 이유 없이 도와주는 인간이고.


그렇다면 그런 히어로를 꿈꾸는 인간으로서, 아무런 이유 없이 타인에게 손을 내밀어 주는 정도는 당연히 해줘야겠지.


"말해두겠지만 저는 어떠한 보상을 원해서 이러는게 아닙니다. 그냥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면서 제 꿈에 한 발짝 다가서는 것 만으로도 충분해요."  


힘을 얻고 횡단자가 되기로 다짐한 날 내딛었던 작은 발걸음.


아무런 이유 없이, 아무런 보상 없이, 생면부지의 남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준다.


그것이 내 꿈.


뭐, 이번에는 김서현에게 먼저 도움 받은 처지가 되어버렸지만, 그렇기에 더욱 그녀가 혼자 고생하는 꼴을 두고 볼 수는 없어졌다.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짓는 김희연에게 나는 추격하듯이 말했다.


"그리고 저는 당신도 돕고 싶습니다."

"네?"

"도움이 필요하다면 자신을 해치려 했던 자도 감싸주는 것이 정진정명한 히어로! 저는 반드시 될 겁니다, 그런 히어로가!"


그녀가 질겁하며 나에게서 물러났다.


솔직히 김희연에게는 갚아주고 싶은 것이 한 둘이 아니다.


오늘 하루 동안 얻어맞은 것만 생각해도 분해 죽겠는데, 내 집을 통째로 날려버린 장본인이기까지 하니.


내가 애지중지하던 <오메가맨 U> 비디오 전집을 생각하면 지금도 피눈물을 흘리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만행은 정말로 자의로 행하던 것일까. 


그녀가 고통스러워하며 머리를 감싸쥐던 광경이, 그러고는 괴로워하며 주변을 향해 무차별적인 공격을 날리는 광경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어떻게 생각해도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란 것은 자명.


내 머릿속에서 문뜩 두 사람의 아버지가 누워계시던 방에서 발견했던 어릴 적의 서현과 희연이 함께 찍었던 사진이 떠올랐다.

그 두 아이는 정말..... 정말로 친하고, 또 행복해 보였다.


"자매끼리 서로 피튀기며 싸울 필요는 없잖습니까, 희연 씨도 무슨 사정이 있는 거라면 얼마든지 말씀해주십쇼."


김희연은 내가 한바탕 쏟아낸 말에 할 말을 잃은 건지 아무 말도 없었다.


다만 그녀의 파란색 눈동자는 내가 본 어느 때보다도 차분하게 보였다.

항상 이글거리던 모습만 기억에 남아 있다 보니 그런걸까, 그런 그녀의 눈이 굉장히 아름답게 느껴졌다.


내 진심어린 말이 그녀에게 닿은 걸까?

그렇다면 정말 기쁠텐데.


솔직히 헛소리 취급 받아도 할 말이 없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라는 것은 나 스스로도 잘 알기 때문에 불안하다.

내가 좀 뜬금없이 급발진 한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그녀와 이렇게 대화할 기회가 올지 모른다.

그렇다면 난 그저 지금,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모두 쏟아 부을 뿐이다.


"이대로 가면, 검계의 분파는 분명 제 손에 전멸할 겁니다. 제 동생도 포함해서요. '배신자'는 반드시 합당한 대가를 받아야 하니까."


이런, 전혀 안 닿았나본데?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낙담하는 것도 잠시,


그녀가 차분한 어조로 말을 다시 이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건 저도 원하지 않는 결말이에요. 제가 원하는 것은 오로지 진실. 제가 대통령 살해범으로 몰린 이유와 대통령의 현 위치, 저는 그게 궁금합니다."


오! 드디어 김희언과 말이 통했다.


지금 내 심정은 정말 뛸 듯이 기쁘지만, 문제가 딱 하나.


'나도 모르는데........'


"가서 물어보고 올까요?"


그 말에 상상도 못한 답변이었는지 희연의 눈이 커졌다.


내가 졸라대면 김서현은 마지못해 알려줄 가능성이 있다.

겉모습과 맡고 있는 직책과는 어울리지 않게 서현은 상당히 무른 성격이었으니.


"........좋아요, 이건 제 휴대폰 전화번호입니다. 무언가 알아내면 연락해주세요."


그녀의 스마트폰 번호를 받아버렸다.

날 죽이려 하는 인간(살인범으로 쫓기는 중)의 연락처라니, 영 꺼림칙한데.


내가 손 안에 있는 종이쪼가리에 적혀 있는 번호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가 고개를 드니 그녀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검계 사람들은 신출귀몰한게 패시브인가......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서둘러 저택 안으로 들어서 김서현을 찾으러 갔다.










이런, 길을 잃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