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바이델 이야기 - by 신도비


리바이델은 죽음의 바다(사해-死海)를 다스리는 공포군주 크라켄의 딸이다. 천진난만하고 귀여워서 크라켄 휘하의 바다 옥토들에게 인기가 많았으나, ‘과하게’ 천진난만하고 귀여워서 크라켄의 고민거리이기도 했다. 탁 트인 바다 속 임에도 시야만 벗어나면 반드시 길을 잃고, 사해 밖의 흉폭한 괴물을 보고도 인사한답시고 헤엄쳐가서 잡아먹힐 뻔한 적이 많았다.

“앞으로 리바이델의 외출을 금지한다.”

크라켄이 바다 괴물 앙그라샤크를 죽여 배를 가르고, 위액 반죽으로 소꿉놀이를 하던 리바이델을 꺼낸 뒤에 내린 선언이었다. 또한, 크라켄은 리바이델에게 줬던 후계자 권한을 박탈하고, 태어나지 얼마 되지 않은 포세이달에게 넘겼다.

후계자 권한이 동생에게 넘겨진 것은 기뻐할 일이었으나, 외출 금지는 리바이델에게 청천벽력같은 소식이었다. 리바이델은 강력하게 항의했으나, 크라켄은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다.

이후, 리바이델은 심연의 성 안에 갇혀 살며 수도 없이 가출을 시도했다. 아무리 멀리 도망쳤더라도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면 기뻐하며 헤엄쳐 돌아왔기 때문에 붙잡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저 감시만 철저하게 하면 그만이었다.

50년 넘는 시간을 리바이델은 성 안에서 지냈다. 이제는 왜 하는 지도 모르고 그저 하루 일과려니하며 깊은 밤마다 가출하는 재미에 빠진 상태였다. 성 안에서도 리바이델이 즐길 것은 잔뜩 있었고, 자신을 감시하느라 늘 곁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기뻤다. 나이도 어느새 70살을 넘겼으나, 크라켄 일족의 70살은 인간 나이로 치면 10대 중반의 어린 나이다. 리바이델은 여전히 세상 걱정 없이 뛰노는 천진난만한 소녀였다.

어느 날의 이른 밤, 리바이델은 성안 생활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감시자가 아무도 없었다. 리바이델은 고민했다.

“어쩌지? 감시자 언니 오빠들이 없어서 가출하기 딱 좋은데, 깊은 밤이 되려면 아직 멀었어!”

시야 확인이 어려운 깊은 밤이 되어야 가출 성공률이 높아지기 때문에, 가출은 무조건 깊은 밤 이후에 해야 한다는 조언을 ‘이른 밤 담당 감시자에게‘ 들었던 리바이델이었다. 50년 가까이 지켜오던 철칙을 깨고 이른 밤에 가출을 시도해야 할지 고민하던 리바이델은, 결국 조심스레 성 밖으로 헤엄쳤다. 그리고 지옥으로 변한 사해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도망치십시오, 공주님!”

이른 밤 담당 감시자가 리바이델을 보고 외쳤다. 밤의 바다에 있어야 할 괴물이 사해를 채우고 있었다. 엄마인 크라켄을 포함해 사해의 수많은 옥토가 막아내려고 애썼지만, 적의 수가 너무 많았다. 어쩔 줄을 몰라하던 리바이델에게 크라켄이 소리쳤다.

“물러서, 리바이델! 어서 성으로 돌아가서 몸을 숨겨!”

“나, 나도 싸울게, 엄마!”

“안 돼! 저기 있는 네 동생을 데리고 어서 가!”

“응, 엄마! 동생을 데리고 어서 싸울게!”

“자꾸 너답게 멍청한 소리 할래? 당장 성으로 들어가! 이건 군주의 명령이야!”

“하지만, 엄마… 다쳤잖아!”

늘 웃기만 하던 리바이델에게서 처음으로 눈물을 발견한 크라켄은 괴물의 침공 소식을 들었을 때보다 당혹스러웠다. 크라켄은 다가오는 괴물 무리를 4번째 다리로 휩쓸어버리고는 리바이델을 돌아봤다.

“괴물과 싸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어, 리바이델. 네가 그 중요한 일을 해주겠니?”

“응, 엄마!”

“지금 당장 포세이달과 함께 뭍으로 가서 옥토들에게 도움을 청해. 도움을 받는다면 우리는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 거야!”

죽어도 죽지 못한 자들의 세계 ‘타로스’.

그곳 존재가 사해의 크라켄을 도울 리 없었다. 타로스의 주민은 오히려 크라켄을 증오하는 쪽이었다. 사해가 위기에 빠진 지금, 크라켄으로서는 자신의 귀여운 딸과 아들을 위험에서 벗어나게 해야한다는 생각 뿐이었다.

“응, 엄마!”

리바이델은 동생 포세이달과 함께 사해를 질주했다. 수많은 괴물이 둘 앞을 막았으나, 크라켄의 거대한 다리가 먼저 놈들을 휩쓸었다.

뭍으로 올라온 리바이델은 사해 이상으로 죽음의 기운이 가득한 세계를 향해 외쳤다.

“도와줘! 엄마가 위험해! 괴물이 사해를 공격하고 있어!”

놀랄 만큼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사해 주변의 해안가는 선택받지 못 한 옥토들의 영역이었다. 군주가 없는 이들은 타로스의 언데드들과 끊임 없이 충돌했으며, 바다 너머에서 몰려드는 괴물과도 자주 싸웠다. 이들의 관심은 자신의 생존 뿐이었다.

“도와줘! 도와달라고!”

“저리가!”

리바이델은 옥토들을 붙잡고 애원했지만, 약속이라도 한 듯 귀찮다는 반응만 돌아왔다. 만약 리바이델이 자신의 엄마가 크라켄이라는 사실을 밝혔다면, 옥토들은 좀 더 많은 관심을 보였을 것이다. 수많은 어선이 사해를 지나다가 크라켄에 의해 침몰했다. 리바이델이 크라켄의 딸이라는 것을 알게되면, 옥토들은 해안에 있는 작살이란 작살은 다 가져와서 성심성의껏 찔러댔을 가능성이 높았다.

깊은 밤이 되었다.

리바이델은 사해의 상황이 걱정됐다. 해안가 옥토는 한 번씩 다 붙잡은 기분인데, 단 한 명도 도움을 주려 하지 않았다. 리바이델과 포세이달은 해안가 흑사장에 나란히 쭈그려 앉았다.

“왜 그래, 포?”

동생 포세이달의 다리가 자신의 몸을 휘감자, 리바이델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돌아봤다. 자신과 달리 포세이달은 문어 형태여서 외부 변화에 민감할 수도 있었다. 다행히 그런 문제는 아닌 것같았다. 포세이달은 긴 다리로 리바이델의 몸을 휘감은 채, 다른 다리로 바다를 가리키고 있었다.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긴 리바이델은 깜짝 놀랐다.

“피잖아!”

남매의 발을 적시는 파도가 온통 붉은 빛이었다. 물을 한 줌 떠서 얼굴 가까이로 가져가니 피냄새가 짙하게 풍겼다. 리바이델은 벌떡 일어섰다.

“사해에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해!”

포세이달은 ‘처음부터 무슨 일이 생겨서 우리가 여기에 왔다는 점’을 어필하고 싶었지만, 누나가 혼잣말 할 때는 남의 말을 전혀 듣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잠자코 있었다.

“가자, 포! 우리가 엄마를 도와야 해!”

포세이달은 ‘누나가 그럴까 봐 엄마가 우리를 여기로 보냈다는 점’을 알려주고 싶었지만, 이해시킬 자신이 없어서 잠자코 따라갔다.

“어째서지? 물 속으로 깊게 들어갈수록 피가 옅어지고 있어. 무슨 일이 끝났나 봐.”

더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포세이달은 다리를 뻗어 리바이델의 발목을 휘감았다. 동생에 의해 다시 뭍으로 이끌려가자, 리바이델이 당황해 외쳤다.

“왜 그러는 거야, 포!”

뭍으로 올라온 포세이달은 다리 하나를 길게 뻗었다. 향하는 방향을 바라본 리바이델의 시야에 한 소녀가 보였다. 소녀는 바닷물로 입가의 피를 닦는 중이었다.

“이 많은 피가 전부 네 거야?”

리바이델의 물음에 소녀가 고개를 들었다.

“갖고 싶은 거면 가져. 다 내 거였는데, 방금 본의 아니게 버렸어.”

“왜 버렸어?”

“농담으로 하는 질문이 아닌 것같으니, 대화 수준을 조정할게. 난 방금 피를 토한 거야.”

“왜 토했어?”

“병약해서.”

“왜 병약해?”

“천재 미소녀라서.”

“아항! 그렇구나!”

“거기서 납득해주니까 당황스럽네.”

“도와줘! 너도 해안가의 옥토지? 우리 엄마가 위험에 빠졌어!”

“우리 대화가 차원을 넘나든다는 생각이 드는 건, 내 병이 악화되어 발생한 증상의 일부인 걸까?”

“오늘 하루 종일 돌아다녔는데, 아무도 엄마를 도와주려고 하지 않아! 이대로라면 엄마는 죽게 될 거야!”

“어떻게 도와주기를 바라는데?”

“사해에 쳐들어온 바다 괴물을 몽땅 죽여줘!”

소녀는 침묵한 채 리바이델을 쏘아봤다. 리바이델도 침묵한 채 소녀를 바라봤다.

해안가에서 이렇게까지 많은 대화를 한 옥토는 소녀가 처음이다. 리바이델은 소녀가 뭔가 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소녀는 몇 번 기침을 하더니 입가에 맺힌 핏덩이를 쓸어버리고 천천히 일어섰다.

“내 이름은 마모니르야. 해안가에 사는 옥토 중에서 가장 약하기로 유명한 애지. 내일... 아니, 지금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존재일 걸? 그런 나에게 뭘 하라고?”

“그건 상관 없을 거야. 엄마가 그랬어. 뭍의 옥토에게 도움을 받는다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마모니르는 기가 막혔다.

“내가 가서 뭐든 도와주면… 예를 들어 근처에 흩어진 쓰레기 하나라도 치우면 저절로 모든 위기에서 벗어나지는 거야?”

“그런 거야? 대단해, 마마모르!”

“마모니르야.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에 너와 엄마 사이에서 뭔가 중대한 오해가 발생한 것같아. 쿨럭쿨럭! 아, 미안. 보다시피 몸이 약해서 오래 서 있을 수 없겠어. 잠깐 누워도 될까?”

“응. 누워, 누워!”

리바이델은 친절하게 마모니르가 누울 곳을 마련했다. 졸지에 침대가 된 포세이달이었지만, 마모니르가 자신의 위에 눕는 것이 싫지는 않은 듯 편히 누울 수 있는 형태로 신체를 보정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차근차근 얘기해.”

“기뻐! 심연의 성에 갇혀 있을 때는 누구도 내 얘기를 차근차근 들어주지 않았어!”

“나도 원래 차근차근 들어주는 여자 아냐. 죽을 때가 되면 안하던 짓 한다잖아.”

리바이델은 사해에서 자신이 겪은 일을 얘기했다. 대화 도중 여러 번 샛길로 빠졌지만, 그럴 때마다 침대가 된 동생이 리바이델의 발목을 옥죄며 이야기의 중심을 잡았다. 덕분에 마모니르는 대략의 사정을 알 수 있었다.

“너희가 크라켄의 자식이라는 것도 놀랍지만, 사해의 군주 크라켄이 바다괴물들 따위에게 당한다는 것이 놀랍네.”

“엄청 많았거든! 포의 빨판 수보다 많았어!”

포세이달은 부끄러운듯 모든 다리의 빨판을 움츠렸다. 마모니르는 자신이 베고 있던 포세이달의 머리를 매만지며 말했다.

“크라켄은 밤세계에서 가장 큰 배도 다리 하나로 간단히 휘감아 반토막 낼 수 있다는 말이 진짜야?”

“응! 난 봤어. 전에는 심해 화산이 폭발했는데, 엄마가 다리로 꾹 눌러서 막았어. 맛있는 냄새가 났어!”

“그렇다면 정말 이해가 안 가는데… 음. 혹시, 크라켄에게 부하도 있어?”

“엄마 부하? 응! 많아! 포의 빨판 수보다 많아!”

포세이달이 리바이델의 발목을 옥죄며 비유에 대해 경고했다. 마모니르는 자신의 판단에 확신을 갖기 위해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그러면 크라켄... 아니, 네 엄마는 부하들을 아끼니?”

“응!”

단호한 대답을 듣자, 마모니르는 만족한 듯 두 손을 뻗었다. 포세이달의 일렁거리던 다리 두 개가 마모니르의 손에 쥐어졌다. 포세이달의 다리를 목도리처럼 자신의 목에 감싼 마모니르는 리바이델을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엄마에게 가서 내 말을 전해. 그리고 그 전에 나를 저 산 위로 데려가줘.”

리바이델은 마모니르의 부탁을 들어주고는 계속 있고싶어하던 포세이달을 강제로 잡아끌어 심연으로 들어갔다. 사해의 상황은 더 심각해진 상태였다. 수많은 괴물이 크라켄을 뒤덮고 마구잡이로 찔러댔으며, 사해 일족 또한 많은 수가 궁지에 몰린 상황이었다.

괴물들이 리바이델을 발견하고 몰려왔다. 순간, 포세이달이 앞으로 나서며 여덟 개의 다리를 난폭하게 휘저었다. 그 틈을 타서 빠르게 헤엄친 리바이델은 크라켄의 거대한 몸통을 꼭 끌어안았다.

“엄마! 나 왔어!”

“리, 리바이델? 왜, 왜 돌아온 거야!”

“마모니르가 엄마에게 전해야 할 좋은 말씀이 있다고 해서 전하러 왔어!”

“닥쳐, 리바이델! 당장 동생 데리고 뭍으로 돌아가! 자식에게 이런 말 하면 나쁜 부모라는 거 알지만, 엄마 지금 일하는 거 안 보이니? 근처에 누구 없어? 빨리 얘랑 포세이달을 해안가로 데려가! 또 누가 얘한테 종교 권유하면 크라켄 믿는다고 얘기하고!”

“마모니르가 자기 말대로만 하면 바다괴물을 다 물리칠 수 있다고 했어!”

“뭐?”

“사해 주민 아저씨 아줌마들한테 무기를 버리고 도망치게 하래.”

“어디서 그런 멍청한 소리를 듣고 와서…”

“그리고 엄마가 뱅글뱅글 돌래. 그럼 바다괴물을 물리칠 수 있대!”

크라켄은 잠시 침묵했다. 머릿속을 스치는 옛 기억에 두통이 몰려왔다. 사해에 오직 자신만 존재했던 시절의 기억. 당시에 자신이 저지른 모든 행위가 폭풍처럼 떠올랐다.

“크로노사!”

“예, 나의 군주님!”

크라켄의 몸에 붙은 바다괴물을 떼어놓던 부관이 급히 대답했다. 크라켄은 명령했다.

“사해의 모든 주민에게 무기를 버리라고 알려라! 그리고 심연의 궁 지하 깊숙한 곳에 숨어 있을 것을 명한다!”

“그, 그건…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저희는 군주님과 운명을 함께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키는대로 하란 말이다!”

그 한 마디로 부관은 크라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간파했다. 가까이 있는 다른 부관들을 놔두고 자신을 불렀던 이유는 하나였다. 과거의 크라켄이 날뛰던 시절부터 살아온 부관은 오직 크로노사뿐이었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리바이델과 포세이달을 포함해 사해의 모든 주민이 무기를 버리고 대피했다. 그때부터 크라켄은 몸을 회전하기 시작했다. 홀로 남은 크라켄을 보고 신이 나서 달려들던 바다괴물들이 거센 물결에 휩쓸리기 시작했다.

구우우우우!

회전이 빨라지면서 크라켄 주위에 소용돌이가 일기 시작했다. 사해... 아니, 밤세계 역사상 유래없는 초대형 소용돌이였다. 주변 모든 것이 소용돌이 물결에 휩쓸렸다. 사해의 주민이 버린 날카로운 무기들도 소용돌이에 휘말리며 주변 바다괴물들을 난도질했다. 바다괴물들이 놓친 무기 또한 마찬가지였다. 헤아릴 수 없던 수많은 바다괴물이 조각조각 잘려나갔고, 기세등등했던 침공자들은 거품을 뿜어대며 도주했다. 하지만, 영역이 급격하게 넓어지는 소용돌이는 놈들의 도주를 용납하지 않았다. 침공한 바다괴물 뿐 아니라, 사해 외곽 경계에서 놈들의 침공을 방관하던 존재들까지 소용돌이의 인력에 빨려들었다.

쿠와아아아아아아!

“말 잘듣는 엄마셨네.”

타로스 외곽의 산 정상에서 바다를 바라보던 마모니르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해안가와 사해의 영역이 꽤 거리가 있었음에도 밤하늘 끝까지 치솟은 물기둥이 뚜렷하게 보였다. 물기둥으로 인해 해안가의 지형이 바뀌는 중이었다. 15m가 넘는 거대한 해일이 삽시간에 해안가를 휩쓸었다. 마모니르는 바닷물에 잠긴 자신의 고향을 바라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다들 이사가겠네.”

해안가 주민들은 이미 마모니르의 경고를 받고 대피한 후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 마모니르의 경고를 무시할 주민은 아무도 없었다. 이제까지 해안가 마을에 타로스의 죽음이 몰려들지 못 했던 이유는 천재 전략가 마모니르의 완벽한 대비책 때문이었다. 그래도 주민들은 마모니르의 마지막 계책만큼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마을을 버리라는 계책. 아무리 뛰어난 전략으로 막아낸다 해도, 해안가 마을이 죽음의 절망에 빠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사람들은 마모니르의 말을 믿지만, 오랜 세월 살아왔던 마을을 떠나는 것만큼은 감히 시도할 용기를 내지 못 했다.

“이사가기 좋은 지역을 몇 군데 알려줬으니까 괜찮을 거야.”

마모니르는 산 밑까지 몰려온 바닷물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홀가분했다.

어쩌면 자신이 편한 마음으로 죽을 수 있도록, 밤세계의 군주이신 도미너스 옥토 중 누군가가 리바이델을 보내준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희미하게 미소 짓던 마모니르는 바다 물결을 향해 뻗은 손을 고개와 함께 천천히 떨궜다.

사해의 심연 밑바닥은 난장판이었다. 살아있는 바다괴물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또한, 포세이달도 보이지 않았다. 크라켄은 멘탈에 심한 붕괴현상이 왔다. 자신이 만든 소용돌이에 포세이달까지 휩쓸린 게 분명했다.

“엄마가 동생 꼭 붙잡고 있으랬지, 리바이델! 너 혹시 그거니? 후계자 쟁탈 골육상잔?”

“진짜 꼭 붙잡고 있었어, 엄마! 근데, 포가 엄청 미끄럽단 말야! 꽉 잡을수록 더 쑥쑥 빠져!”

“대체 걔가 왜 성을 나간 거야? 제 정신이 아니고서야!”

“마모니르를 보러 간 게 아닐까?”

“마모니르? 너에게 계책을 알려줬다는 그 해안가의 옥토?”

“응! 마모니르가 포의 다리 두 개를 잡아서 요렇게 목에 감싸니까, 포가 화산 막았던 엄마 다리 색깔처럼 빨개졌었어.”

“포세이달이 부끄럼을 탔다고? 마모니르라는 애가 문어였니?”

“아니, 병약 미소녀.”

이제는 다른 의미로 두통이 몰려온 크라켄이었다.

“마모니르라는 애… 지금 어디있니?”

“피 토한 해변가.”

“가서 데려오렴. 엄마가 좀 보잔다고 해.”

리바이델은 사해 바닥을 정리하는 주민들을 뒤로 하고 해안가를 향해 질주했다. 사실 마모니르를 보고 싶은 건 크라켄보다 리바이델이 더 했다. 리바이델은 사해를 구해준 은인 겸 자신의 첫 친구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었다. 만나자마자 꼭 끌어안고 “네가 엄마를 구했어!”라고 외치고 싶었다.

“네가 엄마를 구했어, 마모니르...”

리바이델은 차갑게 식은 마모니르의 시체 앞에서 낮게 중얼거렸다. 이제 마모니르는 더는 병약한 미소녀가 아니었다. 병으로 고통받을 일이 영원히 사라졌으며, 예쁜 얼굴도 곧 썩을 것이다.

“일어나, 마마모르! 엄마가 널 데리고 오라고 했어!”

리바이델이 화내듯 소리쳤다. ‘내 이름은 마모니르야.’라며 정정해주기를 기다렸지만, 창백한 입술은 벌어지지 않았다. 리바이델은 마모니르를 들쳐 업었다. 장례를 치르려던 해안가 주민이 깜짝 놀랐지만, 누구도 접근하지 않았다. 이제는 모두가 리바이델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대 해일을 일으킬 수 있는 사해 군주 크라켄의 딸. 리바이델이 마모니르를 업은 채 바다로 들어가는 것을 막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크라켄 앞에 마모니르의 시체를 내민 리바이델이 외쳤다.

“마모니르가 아파, 엄마! 치료해줘!”

“아픈 정도가 아니라, 이미 죽었잖아!”

“살려줘! 엄마쯤 되면, 죽은 옥토 살리는 건 엄청 쉽지?”

리바이델이 시체를 내밀 때부터 크라켄은 당황하고 있었다. 마모니르를 데려오라고 한 것은 아들의 행방보다 은혜를 갚으려는 이유가 더 컸다. 하지만, 이미 죽은 존재에게 은혜를 갚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쉬운 문제가 아니란다, 리바이델.”

“엄마, 째째해!”

“째째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야, 리바이델. 육체를 되살리는 것은 어렵지 않아. 하지만, 그렇게 살아나면 더는 이 아이라고 할 수가 없게 돼. 무한한 갈증의 고통 만을 가진 채 타로스를 떠도는 ‘죽지 못 하는 자’가 되겠지. 그렇게 되살리는 것은 은혜를 갚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를 끼얹는 꼴이야.”

“왜 그런 걸로 살려? 그냥 마모니르로 살리면 안 돼?”

“그건 온전히 내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단다, 리바이델. 밤세계 어딘가를 떠돌고 있을 이 아이의 영혼의 힘이 부활의 고통을 감내할 만큼 강해야 해.”

“마모니르는… 약해.”

리바이델은 울먹거렸다. 밤바다에 피를 토하던 창백한 소녀의 모습이 시체와 겹쳤다. 다른 방법을 물었지만, 크라켄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마모니르의 차가운 손을 가슴에 품고 있던 리바이델이 결심한 듯 말했다.

“해도 손해볼 건 없지?”

“응?”

“이미 죽었잖아. 살리는 걸 실패해도 달라질 건 없지?”

크라켄은 잠시 당황했다. 내 딸이 이렇게 똑똑했던가? 이 정도라면 심화과정에 들어가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아이에게는 손해볼 것이 없겠지만, 내 힘이 많이 소모될 거란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내 힘으로 감당이 되지 않을 때는 사해에 흩어진 테라의 힘까지 써야 할 거야.”

“엄마 힘만 소모되고, 마모니르는 손해볼 것 없다는 거야?”

“그, 그렇지?”

“그럼 됐네. 해.”

딸이 가볍게 결정하자, 크라켄은 저도 모르게 여덟 개의 다리를 불끈 말아 쥐었다. 시집 갈 때 사해 살림을 거덜내고도 남을 년이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턱짓으로 마모니르를 시체를 가리키는 딸의 모습이 얄미웠지만, 크라켄은 수하들에게 부활 의식을 준비하라고 명령했다.

“너 때문에 살려주는 게 아니야, 리바이델. 나는 이 아이에게 생명을 빚졌어. 그 이상의 것으로 갚지 못 하면 영원히 찜찜할 거야. 하지만!”

“하지만이 왜 나와, 엄마! 또 째째하려고 그러는 거지?”

“이 아이가 정말로 살아난다면 넌 기쁘겠지?”

“응! 많이! 엄청나게!”

“그 은혜는 뭘로 갚을 거니?”

“응?”

“내가 널 기쁘게 해준다면, 너도 그만큼의 보답을 해야해. 내가 이 아이에게 생명을 빚져서 생명으로 갚는 것처럼.”

“으, 우, 응… 어, 엄마를 기쁘게 해줄게!”

“어떻게?”

“으으으으음… 포! 포를 찾아서 데려올게!”

크라켄의 모든 다리가 움찔거렸다. 마모니르의 시체 때문에 아들의 실종을 깜빡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애초에 은혜를 갚으라는 말은, 수하들이 부활의식을 준비하는 동안 얄미운 딸을 놀려줄 셈으로 꺼낸 농담이었다. 크라켄은 만족하며 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약속이야. 꼭 찾아야 해.”

“응! 자신있어! 마모니르도 이렇게 잘 데려왔잖아!”

“전혀 잘 데려온 게 아니야! 꼭 살려서 데려와!”

“알았어!”

부활의식이 준비되자, 크라켄은 마모니르의 시체를 제단에 올려놓았다. 긴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는 의식이었다. 지금 마모니르의 영혼은 밤세계 어딘가를 떠돌고 있을 것이다. 육신을 떠난 옥토의 영혼 대부분은 시간이 흐르면서 가느다란 실처럼 늘어지다가 결국 테라의 일부로 흡수된다. 약한 영혼일수록 빨리 사라지기 때문에, 의식은 빠를수록 좋았다. 문제는 영혼이 어디를 떠돌고 있느냐였다.

“이 아이의 영혼이 가까운 곳에 있기를 빌어라, 리바이델.”

의식이 시작됐다. 마모니르의 시체에 힘을 불어넣던 크라켄이 일순간 다리를 움찔거렸다. 크라켄은 눈을 가늘게 떴다.

“운이 좋구나. 이 아이의 영혼이 사해를 떠돌고 있었어.”

실보다 가느다란 영혼 줄기가 마모니르의 시체에 닿았다. 크라켄은 감각을 끌어올려 영혼의 실을 끌어당겼다. 영혼이 끊어지기라도 한다면, 그 반동으로 나머지 영혼이 튕겨져 나갈 것이다. 조심조심. 크라켄은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며 가느다란 영체를 잡아당겨 마모니르의 시체 안으로 밀어넣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모니르의 영혼 줄기가 조금씩 굵어졌다. 다행이었다. 마모니르는 육신과 다르게 튼튼한 영혼을 가졌던 것이다. 이제는 끊어질 염려가 없다고 생각하여, 크라켄은 좀 더 힘을 불어넣었다. 영혼 줄기가 어느 정도 육신에 흡수되면 굳이 힘을 쓰지 않아도 알아서 빨려들어갈 것이다. 그때 크라켄이 마모니르의 육신에 힘을 불어넣어서 영혼과 엮으면 부활의식은 성공이었다.

영혼 줄기가 마모니르의 팔뚝만큼 굵어졌을 때, 크라켄은 만족감을 보였다.

“됐어. 영혼이 스스로 들어가고 있…”

크라켄이 갑작스레 눈을 치켜떴다. 마모니르의 허리만큼이나 굵어진 영혼 줄기가 미친듯 몰려들고 있어서다..

콰아아아아아!

마모니르의 육신으로 빨려들어가는 영혼 줄기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영혼의 이동일 뿐인데, 가속의 힘이 실체화되어 크라켄 주위로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이게 뭐야!”

“왜, 왜 그래, 엄마?”

의식 상황을 알지 못 하는 리바이델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크라켄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더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콰콰콰콰콰!

부활 의식을 위해 마모니르의 시체와 닿아있던 크라켄의 힘이 영혼의 파도에 밀려 이끌리는 중이었다. 크라켄은 깨달았다. 마모니르가 병약했던 이유는 초월적으로 광대한 영혼을 육신이 감당하지 못 해서였음을. 지금 마모니르의 영혼은 크라켄의 힘을 빨아들여 육신을 강화하는 중이었다. 어느 정도라면 크라켄도 자신의 힘을 빌려주겠으나, 이건 아니었다. 마모니르의 영혼은 사해 전역을 구름처럼 뒤덮은 채 끊임 없이 심연 속으로 줄기를 밀어넣고 있었다.

“다들, 여기서 나가! 성 밖으로… 아니, 사해에서 벗어나! 리바이델, 너도! 모든 주민에게 알려! 빨리 사해 밖으로 나가라고!”

“엄마, 무섭게 왜 그래?”

“바로 그거야, 리바이델! 두려워해! 공포에 쫓기며 헤엄쳐! 조금만 지나면 사해에서는 엄마 이외의 누구도 살아남지 못 해! 어서 도망가!”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수하들이 리바이델을 잡아끌었다. 리바이델을 포함한 사해 주민의 철수는 빠르게 이뤄졌다. 크라켄은 사해 어디에도 생명 반응이 느껴지지 않자, 비로소 안도하며 의식의 문을 활짝 열었다.

콰콰콰콰콰콰!

몰려드는 영혼의 힘은 여전히 끝이 보이지 않았다. 크라켄은 자신의 힘만으로도 이 문제를 수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다. 만약 영혼의 힘이 생각 이상으로 강하다면, 의식을 마친 후의 크라켄은 크게 약해질 것이다. 밤바다의 또다른 괴물들이 그때를 노려 다시 침공하면, 끔찍한 결과를 맞이할 수도 있다. 크라켄은 자신의 힘을 10%만 불어넣고, 나머지는 사해 전역에 깔린 테라의 도움을 받았다.

사해는 오랜 세월 수많은 존재의 목숨을 앗아간 곳이었다. 그만큼 엄청난 생명력이 사해를 떠돌다가 테라 속에 흡수됐다. 크라켄이 알기에 사해에 존재하는 테라들보다 강력한 힘을 가진 테라는 밤세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수하와 리바이델을 사해 밖으로 쫓아낸 이유는 마모니르의 육체가 테라보다 먼저 저들의 생명력을 빨아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쿠구구구구구!

테라의 도움을 받자, 마모니르의 육체가 급격하게 강화되었다. 흡수되는 영혼의 양이 급속히 늘었음에도 안정적으로 받아들일 정도였다. 크라켄은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판단해 영혼의 문을 활짝 열었다. 가급적 빨리 의식을 끝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 행동이 큰 실수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런 젠장!”

구아아아!

빨려드는 영혼이 빠르게 두꺼워지더니 순식간에 제단 전역을 뒤덮었다. 눈부신 빛이 마모니르의 육신을 뒤덮었고, 주변에서 빨려드는 테라의 양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크라켄은 조금씩 뒤로 물러서며 사상 초유의 사건을 감상했다. 처음에는 두려움이, 다음은 경외심이, 그리고 마지막에는 벅찬 기쁨이 크라켄의 감정을 휘감았다.

“이제 알았어. 이 소녀는 어차피 내게 올 아이였어. 이렇게 될 운명이었던 거야! 신이 내린 밤세계의 숙명을 파괴할 아이! 마모니르! 이 아이는 도미너스 옥토가 될 숙명을 가지고 있었어! 아하하하하!”

사해 전역을 뒤덮는 영혼의 빛 속에서 크라켄은 미친듯 웃었다. 고대인이 저지른 죄로 영원히 밤세계에 갇혀버린 옥토들. 신이 내린 형벌은 사해의 군주인 자신조차 벗어날 수 없는 강력한 숙명이었다. 아니, 현존하는 도미너스 옥토조차 어쩌지 못 하는 족쇄다.

“마모니르! 이 아이라면 할 수 있어! 봐! 사해의 모든 테라를 빨아들여도 부족할 거야! 이 아이가 가진 웅대한 영혼은!”

크라켄은 결심했다.

“살리겠다, 위대한 왕! 새로운 도미너스 옥토! 나 사해의 군주 크라켄이 생명을 바쳐서라도 너의 육신에 저 광오한 영혼을 다 담게 만들겠어!”

콰아아아아!

크라켄은 마모니르의 육신에 자신의 힘을 쏟아넣기 시작했다. 리바이델과 포세이달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었지만, 밤세계의 미래에 비하면 철없는 소망이었다.

“미안해, 리바이델. 미안해, 포세이달.”

콰아아아아!

이미 사해의 모든 테라를 빨아들였다. 어쩌면 대양과 육지의 테라까지 빨아들이는 중일 수도 있었다. 크라켄은 시체 속으로 빨려드는 영혼의 파도 안에 자신의 생명력을 내맡겼다.

“언젠가 너희도 엄마가 죽음을 선택해야만 했던 것을 이해하게 될 거야.”

“엄마, 죽어?”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리바이델을 크라켄이 더 놀란 눈으로 돌아봤다.

“리바이델! 왜 도망가지 않은 거니?”

“갔다 왔어. 아직 멀었어? 엄마 왜 죽어?”

“어서 도망가! 빨리! 여기에 있으면 너도 죽어!”

“엄마는?”

“따, 따라갈게! 의식만 끝내고 바로 따라갈테니 빨리 도망쳐!”

“......”

리바이델은 불신의 표정으로 크라켄을 쳐다볼 뿐, 도망갈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딸의 게슴츠레한 시선을 피해 딴곳을 바라보던 크라켄이 참지 못 하고 소리쳤다.

“사, 살 수도 있단다, 리바이델. 이 아이의 힘이 어디까지인지 알 수가 없어서 가장 비관적인 경우를 생각했을 뿐이야. 사해 바깥의 테라까지 흡수하면 내 생명력을 다 주지 않더라도 의식을 마칠 수 있을 거야.”

“내가 도와줘?”

“멍청한 소리하지 마!”

“엄마가 약해서 죽을 것같으니까 그러지. 엄마 죽는 거 싫어.”

“엄마, 안 약해. 사해의 군주에게 약하다고 말한 애는 네가 처음이야. 너 낳은 것에 회의감이 든 것도 처음이고. 제발 부탁이니, 어서 도망쳐!”

“싫어. 엄마가 죽으면 마모니르가 살아나도 슬플 거란 말야. 내가 깨워볼게. 사해의 테라를 다 흡수했다며? 얘도 양심이 있으면 더 욕심 안 부리고 부활해줄 거야.”

“건드리면 안 돼!”

크라켄의 다리가 리바이델을 향해 총알처럼 쏘아졌다. 하지만, 리바이델이 더 빨랐다. 하얀 손이 마모니르의 가슴에 닿는 순간, 영혼 폭풍이 요동쳤다. 크라켄은 뭔가 큰 변화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구구구구구구구!

“연결됐어?”

마모니르의 영혼이 둘로 쪼개지더니, 그 중 하나가 리바이델의 가슴을 꿰뚫었다. 리바이델은 마모니르의 가슴에 손을 얹은 채 영혼폭풍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크라켄은 낮게 중얼거렸다.

“리바이델……”

영혼폭풍의 끝을 가늠할 수 없어서 두려웠던 크라켄이었다. 그와 똑같은 감정이 자신의 딸에게서도 느껴졌다. 끝을 알 수 없는 그릇. 아무리 많은 영혼이 몰려들더라도 아무렇지도 않게 담을 것만 같은 심연이 리바이델의 몸속 어딘가에 존재했다.

크라켄은 실소했다.

“하… 하하하.”

도주한 사해의 주민을 다시 불러모으고 싶었다. 아니, 타로스의 주민까지 불러내어 리바이델을 보여주고 싶었다. 어때? 저 아이가 나의 딸이야! 보여? 너희가 얼마 전까지 바보라고 수군거렸던 저 아이가 밤세계의 미래를 맡길 위대한 존재를 저렇게 간단히 품어버리고 있어! 크라켄은 벅찬 감정을 다스리며 최선을 다해 리바이델을 도왔다.

끝도 없을 것만 같았던 마모니르의 영혼이 모두 흡수되었다. 부활은 성공했다. 그러나 상당한 양이 리바이델의 몸으로 빨려들어가서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고 말았다.

“......”

깨어난 마모니르는 제단에 누운 채 자신의 가슴을 꼭 누르고 있는 소녀를 묵묵히 주시했다. 자신이 부활했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은 없었다. 영혼이 밤세계를 떠돌다가 강한 힘에 이끌릴 때부터 짐작했던 일이다. 놀라운 것은 리바이델이라는 존재였다. 자신의 육체를 보조할 수 있는 또다른 육체. 도미너스 옥토만이 가능할 것같았던 일을 눈앞의 작고 귀여운 소녀가 해냈다.

“계속 누르고 있을 거야? 일어나고 싶은데.”

“부활했어?”

“덕분에.”

“엄마는? 죽었어?”

리바이델이 돌아보자, 크라켄은 쿡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살았구나. 덕분에.”

많은 힘이 소모됐지만, 크라켄은 기분이 좋았다. 수천 년을 살면서 가장 뿌듯한 일을 해낸 기분이었다. 크라켄은 자신에게 감사를 전하는 마모니르에게 물었다.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너는 생각보다 큰 힘을 갖게 되었단다. 묻겠다, 마모니르. 너는 그 힘을 갖고 뭘 하고 싶니?”

“타로스를 도울 거야.”

“타로스?”

“내 영혼이 구름처럼 타로스의 하늘을 뒤덮었을 때, 다 보았어. 죽지 못하는 불쌍한 존재들이 수많은 괴물에게 유린당하는 모습을. 나는 타로스의 주민을 구할 거야.”

“지금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니?”

“응. 그렇게 하면 나는 밤세계의 새로운 도미너스 옥토가 되겠지. 지위 따위는 상관 없어. 고통받는 모든 옥토에게 내 힘을 빌려주겠어.”

“위대한 왕의 탄생이네. 내가 또 도울 것이 있을까?”

“이미 알고 있겠지만… 당신의 딸을 데려가게 허락해줘, 크라켄.”

“허락하겠어.”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리바이델이 놀라며 박수쳤다.

“우와아! 나 시집가는 거야, 엄마? 뭔가 건너뛴 것같지만, 기뻐!”

크라켄과 마모니르가 잠시 입을 다물고 리바이델을 주시했다. 크라켄이 한숨과 함께 물었다.

“이런 딸이라도 괜찮겠니?”

“적응해볼게. 뗄 수 없는 사이니까 선택의 여지도 없어.”

마모니르는 리바이델을 돌아봤다. 영혼을 나눠가진 사이. 처음 만났던 그 순간에 리바이델을 돕고 싶었던 이유가 이것이었을까? 마모니르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갈게.”

몸을 돌리는 마모니르의 앞을 크라켄의 거대한 발이 가로막았다.

“부활한지 얼마되지 않았어. 좀 더 쉬었다 가는 것이 어떨까?”

“나야 상관없지만… 당신… 나에게 부탁할 것이 하나 있지 않아?”

“무슨 뜻이지, 마모니르?”

“길치 문어 한 마리가 대양 한 가운데에서 괴물들에게 쫓기는 중이야. 내 영혼이 바다를 뒤덮을 때 발견했었어. 그 정도 헤엄쳤으면, 육지와 다른 방향이라는 걸 짐작했을 텐데 계속 바다 쪽으로 가는 중이야.”

“포, 포세이달! 그 아이를 찾아서 구해줘!”

“그러려고.”

“내가 도와줄게, 마마모르!”

“마모니르야.”

기다렸던 대답이라는 듯 리바이델이 활짝 웃었다.

“응! 이제는 틀리지 않을게!”

리바이델은 마모니르의 손을 잡고 바닷속을 질주했다. 리바이델이 지나칠 때마다 수많은 물고기와 괴물이 회오리에 휘말렸다. 이들이 회오리에서 빠져나왔을 때는 이미 둘의 모습이 사라진 뒤였다.

“포!”

저 멀리 포세이달의 모습이 보였다. 마모니르는 자신이 잘못 보았음을 시인했다. 포세이달은 쫓기는 것이 아니라, 뭔가를 찾으며 헤엄치는 중이었다.

“포라고 불러? 아무튼 이쪽으로 와.”

마모니르가 말했다. 리바이델이 부를 때는 더 빠르게 헤엄쳐 가던 포세이달이 일순 멈칫하며 뒤를 돌아봤다. 리바이델 곁에 있는 마모니르를 확인하자, 포세이달은 망설이지 않고 몸을 돌렸다. 그때까지 포세이달을 쫓던 수많은 괴물은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쿠촤촤촤차차차차아!

바다 괴물 수십 마리가 하늘 위로 치솟아 올랐다. 수면을 빼곡하게 메웠던 바다 괴물들이 포세이달의 질주를 막지 못 하고 속절없이 튕겨나간 결과였다. 포세이달은 마모니르 앞에 멈춰서더니 리바이델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리바이델은 아직까지 마모니르의 손을 잡고 있었다.

“네가 잡을래? 하지만, 네 발은 미끄럽잖아.”

리바이델이 마모니르의 손을 건네려하자, 포세이달은 살짝 뒤로 물러서더니 얼굴앞에 내세운 발을 가로저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수면 아래로 잠수했다.

“으응?”

마모니르는 자신의 몸이 급작스레 치솟는 것을 느꼈다. 포세이달이 수면 위로 부상하며 마모니르를 머리에 태운 것이다. 검은색 몸통임에도 붉은 빛이 감도는 것을 보니 자기가 한 행동임에도 부끄러워하는 듯했다.

“뭔가 쾌적하네. 이대로 육지까지 갈 수 있겠어?”

포세이달은 여덟 개의 다리로 수면을 박차며 콧바람을 뿜었다. 리바이델이 웃으며 말했다.

“포가 이렇게 기뻐하는 건 처음 봐.”

“이 아이까지 데려가면 네 엄마가 섭섭해하지 않을까, 리바이델?”

“잠깐 놀다 오는 거니까 괜찮아. 천 년 정도라면 봐주실 거야.”

“아… 천 년. 많이 잠깐이네.”

“자! 가자, 육지로! 뒤에서 괴물들이 몰려오니까 서둘러, 포!”

리바이델이 신이 난 목소리로 외쳤다. 포세이달은 또 한 번 여덟 개의 다리로 수면을 내리친 후 빠르게 질주했다. 마모니르가 포세이달의 머리를 살짝 비틀어 방향을 수정했다.

“육지는 저쪽이야.”

셋은 바다 위에 비친 커다란 달빛을 가로질렀다. 이날은 밤세계 역사에서 가장 밝은 달이 떴지만, 아무도 그것을 기억하지 못 했다. 새로운 도미너스 옥토인 ‘죽음의 밤 마모니르’가 처음으로 타로스에서 모습을 드러낸 날로 기억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