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의 끝이라는 것이 의미를 잃은 이곳에서, 살아가며 해야 할 일에 대해 생각해보신 적 있나요?”

“……어려운 건 질색인데.”

 

살아가며 해야 할 일이라.

 

“그냥, 사는 걸로 충분하지 않아? 뭘 더 해야 해?”

“……그것도 어쩌면 현답(賢答)일지 모르죠. 다만, 생명으로써의 당연한 권리인 죽음조차 박탈당한 저와 현우 님, 그리고 이곳의 모두가.”

 

잠시 말을 멈춘 혜진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마치 기도하듯 천천히 말했다.

 

“지나치게 가혹한 운명을 살아가는 것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드네요.”

 

***

 

누군가의 죽음의 가치는 그 당사자에게도, 바로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에게도, 모두에게 다르기 마련이다.

오늘 하루만 해도 수 명의 죽음을 목격했는데, 지금 내 눈앞에서 벌어진 별다를 바 없는 죽음이 너무나도 가혹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방금 들은 "철컥"하는 소리가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해내느라 총성이 나는 것도 미처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로지의 총에 머리를 정통으로 맞아 피를 뿌리며 쓰러지고 있는 혜진의 모습은 마치 영화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를 깨달은 순간, 나는 이 상황에 대한 현실감을 완벽하게 상실하고 말았다.

로지는 채 쓰러지지도 않은 혜진을 겨누어 방아쇠를 몇 번이고 더 당겼다. 그리고 마침내 총구가 잠시 내려가고, 다시 나를 향해 들어올려지려는 찰나.

 

[생존자가 사망했습니다.]

[최종 생존자가 세 명 남았습니다.]

 

분노가 차올랐다.

분노의 근원도, 방향도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나는 그때쯤 내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내 몸짓은 어떤 목적의식도 없는 단순하고 원초적인 폭력일 뿐이었다.

그러다 로지의 총탄이 내 목 한 쪽을 꿰뚫고 지나가며 시린 고통이 몰려와, 그제서야 나는 희미한 이성을 되찾았다. 목 한 쪽만을 맞았는데 그 주위 전체가 시큰거리는 것이, 아마 총탄이 적중하는 순간 여러 조각으로 퍼져나간 것 같았다.

로지는 벽에 내몰린 채 내 팔이 누르는 힘으로 인해 목이 졸려 얼굴이 파랗게 질려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이를 악물며 권총을 쥔 손을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탄약을 장전하려 한다는 것을 직감한 나는 로지의 멱살을 잡고 벽에서 떼어내 바닥에 강하게 내팽개쳤다. 로지가 그 충격에서 벗어나기 전에 나는 재빨리 그녀의 손에서 권총을 빼앗아 짓밟고, 로지의 허리춤에 걸린 탄약 상자를 잡아뜯었다. ‘뚜두둑’하는 소리와 함께 탄약 상자를 매달아두고 있던 벨트가 통째로 끊어지며 끌려 올라왔다.

나는 탄약 상자를 힘껏 던져 버리고, 총을 발로 차 멀리 날려 버렸다. 바닥에서 일어나던 로지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렇게 로지를 무력화시켰다고 생각된 순간.

 

-타다당!

 

“……어?”

 

어디선가 들린 총성과 함께, 로지가 일어나려던 자세 그대로 푹 주저앉아 쓰러졌다. 머리에서 피를 흘리면서였다.

총성의 근원지를 돌아보니, 아이솔이 소총을 로지 쪽으로 겨눈 채 이를 악물고 있었다.

 

[생존자가 사망했습니다.]

[최종 생존자가 두 명 남았습니다.]

 

“너……!”

 

아이솔은 그 자세를 그대로 유지하며 총구를 천천히 돌렸다. 내 쪽이다.

나는 앞으로 달려나갔다.

 

-타다당! 타다당!

 

자신을 향해 직선경로로 돌진하고 있는 나를 향해 3점사로 쏘아지는 총알들이 마주 날아왔다.

오른쪽 옆구리와 팔에 총알이 박히는 것이 느껴졌다. 아릿한 고통에 뱃속이 당기는 것 같았다. 오른손 새끼손가락에 감각이 없었다. 아마도 총알에 맞아 날아가버린 것 같았다. 분명 아프긴 했지만, 그런 걸 신경 쓸 이성이 내겐 남아있지 않았다.

 

“큭!”

 

그렇게 지근거리까지 접근했을 때, 아이솔의 총구는 정확히 내 눈과 마주쳤다.

아이솔의 손가락이 움찔거리며 방아쇠를 당기는 장면이 가까이 보였다.

 

타다당-

-타악!

 

나는 눈앞의 총구를 오른손으로 잡아채 다른 방향으로 돌려 버렸다. 그 바람에 아이솔의 총알은 엉뚱한 방향의 하늘로 쏘아졌다. 총구를 잡아챈 관성에 그대로 힘을 실어 총을 빼앗아 뒤로 던져버린 나는 왼손으로 아이솔을 세게 밀쳤다. 총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느라 총과 함께 앞으로 끌려오던 아이솔은 헉, 숨을 내뱉으며 뒤로 나동그라졌다.

나는 아이솔이 일어나지 못하게 무릎으로 가슴을 찍어 눌러 제압했다.

 

“커헉……!”

“허억, 허억…….”

 

그 상태 그대로 숨을 고르기를 몇 초나 했을까, 그제서야 나는 조금씩 생각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아.”

 

옆을 돌아보자 혜진의 시신이 보였다. 총상을 입은 흔적이 몸 곳곳에 선명했다.

조금 더 고개를 돌렸다. 목 안에서 정신 나간 통증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 통증을 유발한 장본인, 로지가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나는 내 무릎 아래에 깔린 채 저항을 포기한 아이솔을 내려다보았다.

아이솔이 헛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끝났군.”

“……끝?”

 

끝이라고?

 

“그래, 끝이지. 뭐가 더 있는데?”

“넌…… 지금 이 상황이 뭐라고 생각하냐?”

“무슨 상황?”

 

아이솔이 표정을 찡그렸다.

 

“금지구역을 예고 없이 기습적으로 추가하고, 생존자가 우리 넷만 남을 때까지 안내방송을 하지 않은 것?”

“…….”

“아글라이아가 새로운 변수를 실험하는 것이라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잖아?”

“그걸 묻는 게 아니잖아!”

 

소리를 지르자, 바람이 새는 것처럼 목소리가 이상하게 나온다.

목이 아프다.

 

“끝, 정말 이게 끝이라고 생각하는 거냐고.”

“그럼? 그래, 그야 다시 시작하기는 하겠지. 죽어도 살아나는 곳이 이곳이니까.”

“넌……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냐. 로지는 이미 제압된 상태였잖아. 죽일 필요는…….”

“하. 설마 죽일 필요는 없었다, 이딴 소리를 하려는 거야?”

“…….”

“지랄하지 마. 남은 건 우리뿐이었어. 죽이지 않으면, 죽어.”

 

나는 순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래, ‘죽일 필요까지는 없다’라는 내 생각이 이곳에서는 지나치게 비현실적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어떤가. 이 상황 자체가 내게는 비현실적인데.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내가 죽지 않고 살아있는 지금이 잘못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거든.

 

“왜…… 왜 이렇게까지 해서 살아남아야 하는데.”

“살아남는 데 거창한 이유가 필요해?”

“그러니까 왜!”

“죽기 싫으니까!”

 

쾅-.

나도 모르게 주먹이 뻗어져 아이솔의 어깨를 내리쳤다.

아이솔은 눈꺼풀을 움찔하더니 중얼거렸다.

 

“……어차피 나는 지금 무장해제 당했고, 너와 육탄전을 해서 이길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추호도 없어. 살아남긴 글렀지, 넌 날 죽일 거고.”

 

살아남아야 한다며? 죽기 싫다며?

그런데 지금 넌 왜 포기하고 있지? 어차피 포기할 거라면, 로지는 왜 죽인 건데?

나는 로지를 돌아봤다.

어차피 너도 죽을 거였잖아. 살아남지 못할 거였잖아. 그런데 꼭 혜진을 죽였어야 했어?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목소리가 있었다.

 

‘살아가며 해야 할 일에 대해 생각해보신 적 있나요?’

 

그냥, 사는 걸로 충분하지 않아? 뭘 더 해야 해?

 

“도대체 뭘 위해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데……?”

 

내 목소리는 이제 눈에 띄게 덜덜 떨리고 있었다.

이것은 차라리 내게 던지는 질문에 가까웠다.

아이솔은 대꾸하지 않은 채, 흐릿한 눈에 억지로 힘을 줘가며 나를 노려봤다.

문득,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나는 아이솔을 짓누르던 다리에 힘을 풀고는 일어섰다.

 

“……그래. 알았어.”

 

갑자기 마음이 편해졌다.

 

“네 맘대로 해.”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으니까.

아이솔을 바닥에 짓누르던 것을 그만두고 일어서자, 머리에 쏠렸던 피가 쭈욱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정신이 멍했다. 이대로 영원히 멍하니 살다가, 나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죽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필생(必生)이라.’

 

살아남는다는 목표의식이라도 있는 삶이, 사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냐고 답하는 나 같은 삶보다는 그래도 가치있는 삶이 아닐까.

그렇게 멍하니 생각하고 있으려니, 아이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

 

대답조차 힘겨웠다. 아니, 그마저도 무의미하게 느껴져 대답할 가치를 찾지 못했다는 말이 더 적합할 것이다.

 

“장현우!”

“……말 해. 듣고 있으니까.”

“언제까지 그렇게 멍하니 있을 거야? 죽이려면 빨리 죽이라고.”

“…….”

 

내가 그렇게 오랫동안 멍하니 있었나?

갑자기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비웃음. 나조차도 이유를 알 수 없는, 그런 비웃음이다.

 

“왜 웃어? 드디어 미친 건가?”

“……흐.”

 

아버지, 저는 도무지 당신처럼 되긴 싫습니다.

 

“하기야, 충분히 미칠 만한 환경이기는 하지. 애초에 이 실험 자체가 ……뭐야, 어디 가?”

 

나는 뒤돌아서 발걸음을 옮겼다.

아이솔이 몸을 일으키려 애쓰는 것이 보였다. 이젠 상관없다. 녀석이 일어나든, 말든.

 

‘지나치게 가혹한 운명을 살아가는 것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래. 결국엔 너도, 나도, 그리고 이곳의 모두가.

똑같이 불쌍한 놈들일 뿐이야.

 

“어차피, 살아남아도 의미 없잖아?”

“……병신 새끼.”

 

몸을 일으키려다 힘이 빠져 버렸는지, ‘윽’소리를 내며 아이솔이 털썩 넘어지는 소리가 등 뒤로 들려왔다.

알아서 하라지. 소총은 그리 멀리 날아가지 않았다. 기어가서 그걸 주워 날 쏘든, 그렇게 끝까지 편하게 누워서 혼자 살아남든.

 

‘병원이…….’

 

병원이 저쪽이었던가.

나는 팔찌를 만지작거리며 걸어갔다.

숨을 내쉬며 하늘을 올려보자, 먹구름이 끼는 것이 보였다.

비가 오려나.

나는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가, 곧 고개를 저으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길 안쪽에 쓰러진 리 다이린의 시체가 보였다. 정신이 멍했다. 거창한 감상을 내뱉을 겨를은 없었다. ‘이 사람도 얼마 전까지는 살려고 발버둥쳤을 텐데’까지가 한계였다.

필생(畢生), 필생(必生).

다만 그 자리에는 곧 다가올 미래의 내가 죽어있을 뿐이었다.

나는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아마 늦추려 했어도 늦춰지지 않았을 것이다. 공장과 병원의 경계선을 코앞에 두고도 마찬가지였다. 문득 내 표정이 궁금해졌다. 금지구역까지는 이제 한 걸음.

그 순간,

 

-타앙…….

 

하고 등 뒤 멀리에서 희미한 총성이 들려왔다. 하지만 나는 미처 그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이미 경계 너머에 발을 디디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 실험에서의 내 마지막 기억이다.

 

[생존자가 사망했습니다.]

[생존자가 금지구역에서 사망했습니다.]

[최종 생존자가 0명 남았습니다.]

[실험이 종료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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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현우가 다 압도할 수 있었던 건 아까 초록무기(대나무+나뭇가지=톤파) 만들면서 숙 쌓아가지고 아슬아슬하게 무숙 오르는바람에 미묘하게 딜 좀 더 들어가서 이긴거라 카더라.



아빠겜 현우 실험일지 내용임.

나무위키 캡처해 옴.

"묵묵히 금지구역으로 걸어 들어가는 모습이 많이 포착됩니다.", "그럴 때는 절대 몰라서 들어가는 표정이 아니에요."

내가 이 소재를 구상한 결정적인 문장들임.

잘 구현되었다면 좋겠다.

인물들 심리묘사가 특히 힘든 화였음. 저런 감정은 당사자 스스로도 잘 표현하기 힘든 감정들이다 보니까.

혹시 어색했다면 너그러이 용서하고 쉽섀귀양 박아주길 바람.


참고로 조아라라고 웹소설 사이트에도 팬픽으로 올려뒀는데, 혹시 그거 보고 오해하는 사람들 있을까봐 출처 개념으로 링크 남겨두겠음.

http://s.joara.com/15iA1

혹시나 무지성 복붙같은걸로 오해하지는 말아주길.


그리고

마지막까지 읽어준 사람들

정말로 고맙다고 말하고 싶음

대략 일주일정도 걸려서 힘들게 썼는데

재미있게 읽어줬다면 정말 뿌듯할 거 같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