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에 대해 말할 때 가장 많이 묻는 질문이 원죄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서방교회에서 원죄론은 가장 핵심적인 교리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이때 대개는 원죄에 대해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연좌제를 적용하시는 것 아니냐?'라고 묻습니다. 원죄는 한국말로도 '죄'가 들어가고, 영어로 봐도(Original Sin) 'Sin'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비판하려는 사람들은 "하느님은 자비롭다면서, 왜 아담에게서 끝내지 않고 죄를 후대에까지 뒤집어씌우냐?"라고 하곤 합니다.


그러나 원죄는, 엄밀히 따지면 '죄'가 아닙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죄'란, 우리의 자유의지에 의하여 범하는 각종 대죄와 소죄 같은 것들입니다. 음란물을 본다든지, 과음을 하고 술주정을 부린다든지 같은 것들 말입니다. 그러나 원죄는 이렇게 우리의 자유의지에 의하여 짓는 죄들과는 다릅니다. 우리가 범한 죄가 아니라 '짊어진 죄'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원죄의 이름 자체에 '죄'가 들어가긴 하지만, 이것은 유비적 의미에서의 '죄'라는 말이지, 일의적 의미에서의 '죄'는 아닙니다.


아니, 아까는 죄가 아니라고 해놓고, 이제 와서 짊어진 죄라고 하는 건 무슨 소리인가요?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서 성경을 살펴봅시다. 창세기에서, 하느님께서는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습니다. 이들은 피조물로서 하느님과 관계를 맺으며 충만함을 누리고 있었고, 또 원초적인 거룩함과 의로움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관계가 뒤흔들리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하와가 하느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은 것입니다. 거기다가 혼자만 먹은 게 아니고 남편인 아담도 그것을 먹게 했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자유의지로 저지른 최초의 죄악입니다. 그 범죄로 인해서 이들은 본래의 원초적 의로움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그분의 충만함도 잃게 되었습니다. 또 우리의 자유의지 역시 죄에 의해 오염되어, '죄로 기울기 쉬운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생긴 본성의 결함과 하느님과의 관계 단절이라는 상태가 하나의 '죄'로서 오늘날까지 대물림되는 것입니다.


쉬운 비유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우리가 죽어서 심판대에 올랐을 때, 천사들이 우리의 죄를 영수증으로 뽑아 낱낱이 살펴봅니다. 탐욕, 시기, 질투, 음욕... 여러가지 죄악들이 올라 있는데, 그 어디에도 '원죄'라는 죄목은 없습니다. 원죄는 그 죄악의 영수증을 출력하는 프로그램이라고 보면 좋겠습니다. 그 자체로 '범할 수 있는' 죄가 아니라, 우리가 죄를 짓게 하는 하나의 '경향성'인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는 세례를 통해 씻기지만, 이러한 경향성은 우리가 세례를 받고 난 뒤에도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세례성사를 통해서 우리가 그동안 지은 죄들을 모두 씻고,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다시 태어난 상태(요한 3,5)가 되었지만, 우리의 본성은 여전히 죄에 약한 상태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이 본성을 다시 깨끗하게 할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만, 사람의 일에는 한계가 분명합니다. 이 부분에서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태초에 아담이 죄를 지었고, 이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해서 죄와 죽음이 인류 안에 들어왔습니다(로마 5,12). 그리고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희생으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고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로마 5,18). 원죄론은 "아담이 죄를 지었으니 그 후손인 네놈들도 모조리 죄인이고 천벌을 받을 놈들이다!"라는 주장이 아니라, "아담이 죄를 지었는데, 그렇게 생긴 죄를 짓는 버릇을 너희들도 물려받았다."라는 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죽음이란 하느님과 단절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심으로써 우리는 다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생명이란 하느님과 하나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원죄가 연좌제라는 주장은 기독교 교리상으로 볼 때 틀렸습니다. 아무도 자기 아버지의 죄 때문에 죽거나 벌을 받지 않습니다(에제 18,20). 우리는 아담의 죄 때문에 벌을 받아 죽게 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아담 이후로 죄로 인해 오염된 본성이 인류라는 종의 본성으로서 전해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