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능자는 자기가 들지 못하는 바위를 만들 수 있는가?"

흔히 '전능의 역설'이라고 부르는 이 질문은 기독교인들의 믿음에 큰 도전으로 받아들여진다. 만약 전능하신 하느님이 그것을 만들 수 있다고 하면 그는 전능성을 잃는다. 바위를 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을 못한다고 해도 문제이다. 하느님이 전능하시려면 모든 것을 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한 주된 답변은 이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그것조차 하실 수 있다. 단지 하지 않으실 뿐.' 저명한 개신교 신학자인 C. S. 루이스는 이렇게까지 말했다. "온갖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려놓고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 시킨다고 해서 그게 말이 되는 것은 아니다." 4세기의 교부 아우구스티노 역시 "전지전능이란 논리적으로 가능한 모든 것을 하면 성립된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하느님은 무한한 가능성이므로 선택만 한다면 자신의 전능성을 버릴 수 있다. 대개의 경우 그러지 않기를 선택하는 것뿐. 그러나 나는 말하고 싶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 앞에서 전능성을 내려놓아 보이셨다.

성서 속 하느님께서는 순수한 정신이시요, 무한자이시다. 하느님께선 말씀만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모든 것이 무한자이신 그분의 말씀으로부터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 무한으로부터 나온 유한자인 인간은 그분을 완전히 볼 수 없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고, 모세는 떨기나무의 불길에서, 그리고 시나이 산에서 그분을 접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이들 외엔 하느님을 이해할 수 없다. 시나이 산의 모세가 들은 하느님의 목소리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겐 우렁찬 우렛소리에 불과하였다. 사실 우리가 생각하기에도 유한한 것이 무한한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리고 무한한 것이 유한계로 내려오는 것 역시 불가능한 것 같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이것이 불가능하나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루카 18,27).' 


신약 시대에 와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전능성을 덜어내신 사건이 발생한다. 그 사건이 바로 예수의 강생이다. 전능하신 무한자 하느님께서 유한계로, 심지어 유한자의 육신을 입고 태어난 사건. 역사 속 이단자들의 말처럼 '그냥 그렇게 보였던 것'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입고, 우리와 똑같은 유한자로서 강생한 것이다. 하느님의 놀라움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유한자이자 무한자인 하느님이 '유한자의 필연'을 직접, 그것도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겪으셨다. 그것은 죽음이다. 무한자이신 하느님께서 스스로의 선택으로 유한자가 되셨고, 불멸자이신 하느님께서 스스로의 선택으로 죽음을 겪고 되살아나셨다. 말하자면 들 수 없는 바위를 만들어 보이신 것이다.


그리스도는 여전히 신성을 겸하셨기에, 당신이 하고자 하시면 십자 형틀에서 당장이라도 내려와 신성을 증명해보이실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광야의 그 굶주림 속에서, 교만함에 벅차 당신을 능멸하는 사탄의 앞에서 하고자만 하시면 집채만한 바위를 뽑아들고 당신의 하느님되심을 선포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다만 당신의 신성을, 당신의 전능함을, 당신의 섭리를 이루기 위하여 내려놓으셨던 것이다. 골고타 언덕,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리스도에게 들 수 없는 바위란 당신의 섭리였다. 아담의 죄로 들어와 인류를 물들인 죽음, 그 '악'을 해결하기 위해 전능함을 버리신 것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도 하느님의 '무한한 가능성'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 전능함을 내버리셨지만 여전히 그리스도는 전능하신 하느님이시다. 결국 당신의 섭리를 관철해내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무한한 가능성이며, 그분의 사랑이다.


모든 기독교인이 이것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하느님의 전능함을 조금도 훼손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강생 자체가 없었던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없는, 마르치온파와 영지주의자들이다. 이들에게 있어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구원 사건 자체를 없던 일이자 재미있는 연극놀이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하느님이 전능성을 포기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더 나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십자가의 희생 없는, 그리스도의 피 없는 그리스도교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탄생이 불합리의 극치라고 말하면서도 자신들의 합리적 신앙으로 그리스도교 자체를 불합리로 돌려버리고 마는 것이다. 


2세기경의 교부 테르툴리아노는 이것을 두고, "불합리하지만 믿는 것이 아니라, 불합리하기에 나는 믿는다."라고 말했다. 마르치온은 그리스도가 사람으로 오셨다는 것이 불합리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불합리한' 하느님의 가능성을, '불합리한' 그분의 사랑을 기독교에서 지워버렸다. 그리스도 자체를 그리스도교에서 지워버렸다. 이 무슨 말장난이란 말인가? 그리스도 없는 그리스도교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토대를 쌓지 않고 집을 지을 수 있는가? 그런 집은 하루도 못 가서 내려앉아 먼지 날리는 폐허가 되고 말 것이다. 마르치온이 말하는 이 십자가의 '어리석음'이야말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다.


신앙은 불합리함의 연속이다. 무한자가 유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말이다. 그 무한자가 죽을 수 있다는 것도 그렇다. 아무 죄 없는 그리스도가 인류의 죄를 위해 대신 희생당한다는 것도 지극히 불합리하다. 전능자가 전능함을 버리고도 전능할 수 있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아니, 애초에 그 자체로 완벽하고 무한하신 하느님께서 굳이 세상을 창조한 것에 대해서도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기억해야 한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태 19,26)." 하느님은 무한한 가능성이다. 그 무한한 가능성은 때론 인간의 이성과 논리조차 초월한다. 그래서 우리 상식만으로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 상식을, 우리 이성을 초월하는 하느님의 무한하신 가능성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가능성의 바다를 향해 반신반의의 마음으로 몸을 던질 때, 우리의 불안은 믿음이 되고, 떨리는 의심은 확신으로 굳어진다.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기도하며, 끝없는 그 가능성의 낭떠러지를 향해 발을 내딛는 모든 사람들을 나는 축복한다.


필리피서의 한 구절을 끝으로 이만 마친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필리 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