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현대 가톨릭교회 곳곳에서는 그동안의 교부철학이나 스콜라 철학이 아닌 다른 철학으로 신학을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당장 20세기만 하더라도카를 라너(Fr. Karl Rahner S.J., 1904-1984)라는 사제이자 신학자가 칸트와 하이데거를 응용하여 가톨릭 신학을 설명하려 하였다. 19세기에는 존 헨리 뉴먼 추기경(St. John Henry Newman, 1801-1890)이 데이비드 흄과 존 로크를 활용하여 종교적 인식론을 설명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전통적으로 교부철학과 스콜라 철학특히 스콜라 철학 중 토미즘(Thomism)을 교육의 근간으로 삼을 것을 현재까지도 권고하고 있다이는 신()토미즘의 시발점이 된 교황 레오 13(Leo PP. XIII, 1810-1903)의 회칙, <영원하신 아버지 Æterni Patris (1879)> 36항에 다음과 같이 명징하게 드러난다.

 

특별히 신중한 분별력을 가지고 그대들이 뽑은 스승들은 자기 제자들의 정신이 성 토마스 데 아퀴노의 가르침으로 관통될 수 있도록 깊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그의 가르침이 다른 모든 이론에 견주어 얼마나 튼튼하고 월등한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중략그대들은 정통 가르침 대신에 이런 저런 허풍떠는 이론들에 말려들거나진정한 가르침 대신에 타락한 이론들에 현혹되지 않도록 성 토마스의 지혜가 그 원천으로부터또는 적어도 뛰어난 지성들의 확실하고 한결같은 판단에 따르면 그 원천에서 흘러 나와 아직도 맑고 투명하게 흐르는 저 강물들로부터 탐구될 수 있도록 조처해야 합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토미즘은 소위 암흑 중세의 편린에 불과하지 않은가? “철학은 신학의 시녀에 불과하다던 사람들이 탈종교 시대인 현대에 와서 무슨 철학을 논한다는 말인가게다가 그중 어느 것이 교육에 내재하고 있다는 것인가?

이와 같은 질문들에 명확히 답하기 위하여필자는 먼저 1) 토미즘이 받는 일련의 오해를 해명한 뒤 2) 토미즘의 어떤 점을 일반 교육에 적용할 수 있을지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 1224-1274)의 신학대전 Summa Theologiæ (1266-1272)』 안에서 알아보고자 한다.

 

1. 일련의 오해에 대한 해명

 

제일 먼저 보고자 하는 것은 각주 2번에서 인용한 본문신학대전 제1부 제1문제 5절의 2번째 답변(ad)이다맥락 없이 제시된 본문만을 보았을 때 거룩한 가르침즉 신학이 다른 학문들을 사용할 뿐이라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정말로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런 의미를 담아 쓴 것일까만약 그렇다고 한다면신학대전의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표현이 인용되지 않았겠는가그러나 그런 표현은 신학대전에서 단 한 번만 등장한다.

여기에서만 쓰인 표현이라면이제는 맥락을 짚어가며 본문을 다시 한번 살펴보자사실 각주에서 인용한 본문은 전체 답변이 아니다주로 철학은 신학의 시녀다.”라는 명제를 언급할 때 저 부분이 발췌되고는 하지만그것은 신학대전을 오용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전문은 다음과 같다.

 

거룩한 가르침은 철학적 학문들에서 어떤 것을 받을 수 있다그러나 그것은 어떤 필연성에서 철학적 학문들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거룩한 가르침이 전달하는 것들을 더 명백하게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거룩한 가르침은 다른 학문들을 자기보다 더 위의 것으로 하여 그것들에서 자기 원리들을 받는 것이 아니라 다른 학문들을 더 아래 것으로또 하녀로서 사용하는 것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교에서 일컫는 계시 진리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기본적으로 그리스도교의 신학은 계시 진리즉 인간 이성으로는 알아낼 수 없으나 신이 직접(혹은 섭리를 통해알려준 진리에 기초를 두고 있다따라서 인간 스스로 알아낸 진리보다 신이 알려준 진리가 더 상위의 것일 수밖에 없으며그 자체로 원리가 된다이처럼 하녀라는 표현은 신학의 절대적 위치에 따른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여기에서 신학(계시 진리)은 사람들에게 풀이될 필요가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토마스 아퀴나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더 명백하게 드러내야 하는 것이다논리적 오류를 피하며 명확하게 풀이하기 위해 신학은 철학을 요구하고 있다따라서 이 부분은 철학이 신학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고유의 위치에서 도움을 주는 것이라고 해석해야 옳다애초에 이 둘이 구분되고 있음은 제1부 1문제 1절의 본문에 해당하는 답변(Corpus Articuli), 즉 첫머리에서부터 다음과 같이 드러나 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해인간 이성으로 탐구되는 철학적 여러 학문분야 외에 신의 계시를 따라 이뤄지는 어떤 가르침이 있을 필요가 있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다른 저서인 대이교도대전 Summa Contra Gentiles (1260-1264)에서 철학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저자 스스로 신학과 철학을 구별하고 있음이 더욱 명확해진다. 따라서 우리는 토미즘이 상대적 독립성을 지니면서도 신학과는 확연히 구분되고 있었음을 전제하여 논의를 이어 나가야 한다.

 

2. 일반 교육에서의 토미즘 활용

 

그렇다면 어떤 요소들을 일반(세속교육에 활용할 수 있는가가톨릭 교육 바깥에서 가톨릭에 편향된 내용을 가르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교회는 언제나 신앙이 자유로운 동의를 전제해야 한다고 가르치는데지성으로 탐구할 수 있는 영역도 아닐뿐더러 신앙 밖에서 받아들여지기 어렵기까지 한 형이상학적 명제를 가르치는 것을 허용하겠는가따라서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은 토미즘의 방법론즉 어떻게 명제를 탐구하고 참과 거짓을 가려내는지 등과 같은 것들이다이는 신학대전의 구조에 명확히 드러나 있다.

먼저 신학대전의 구조를 살펴보면중세 대학에서 이루어졌던 정기 토론에 그 기반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총 이틀에 걸쳐 이루어졌는데첫날에는 학생들이 주어진 질문을 긍정하는 근거들과 부정하는 근거들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가져와 토론을 진행하였다이어서 이튿날에는 교수가 질문에 대한 결정문과 함께결정문과 반대되는 내용이나 질문들에 대해서도 답변하였다대학에서 이틀에 걸쳐 이루어지는 이 과정을 토마스 아퀴나스는 총 512의 문제를 두고 행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과정에 유의하며 신학대전에서 문제(Quæstio)가 어떻게 제시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문제들은 전부 예 아니오(Sic et Non)로 대답할 수 있는 세부 질문들즉 절(Articulus)들로 구성되어 있다이후 이에 관하여 논박하는 이론들(Objectio)과 이에 대한 반론(Sed Contra)이 제시되는데후자는 주로 성경 본문이나 철학자들과 교부들의 주장 등 소위 권위 있는’ 출처로부터 인용하였다.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권위를 지닌 가르침들이 서로 충돌하게 될 수밖에 없다이렇게 모든 권위를 상대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합리적 탐구를 통해 진리를 도출하고자 하는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있어서 옳은 일이었다이는 합리적이기를 바라는 모든 사람이 보았을 때도 옳은 일이다따라서 우리는 여기에서 한 가지 요소를 도출해낼 수 있다.

 

① 어떤 상황에서 결론을 도출할 때권위가 아닌 합리적 탐구가 우선한다.

 

이어서 토마스 아퀴나스가 문제에 어떤 방식으로 답하는지를 살펴보자질문을 논박하는 이론들과 반론 이후에는 본문에 해당하는 답변(Corpus Articuli)과 논박한 이론들을 바로잡는 해답(ad)이 이어지고 있다이 과정이 전술하였던 합리적 탐구를 통해 진리를 도출하는 과정이다권위 자체로 근거가 되던 것들이 답변에 이르러서는 합리와 정합의 체에 의해 솎아진다혼자서 이 작업을 한 토마스 아퀴나스와 정기 토론 때마다 밤새 결정문과 답변을 작성한 중세 대학의 교수들을 상기하면여기에서도 한 가지 요소를 도출할 수 있다.

 

② 교사는 깊이 있는 논리력과 합리성전문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

 

우리는 이렇게 도출된 두 가지 요소가 일반 교육에서 이미 중요시되고 있음을 알고 있다또한 소위 암흑기라고 일컬어지는 중세의 철학과 교육 방식 안에 그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었음이 위와 같이 증명되었다도대체 누가 이걸 근대철학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그 기초가 되는 합리성은 이미 토마스 아퀴나스가 마련하였다심지어 그저 신학 서적으로밖에 생각되지 않는 신학대전에서 말이다.

 

맺음말합리에 기반한 토미즘과 교육에서의 필요성

 

전술하였듯이 토미즘은 우리 시대가 요구하고 있는합리에 기반한 교육 지침들을 이미 포함하고 있다또한 이는 이론상으로나마 일반 교육에 적용되고 있다토마스 아퀴나스가 교육을 중점으로 한 저서를 남기지 않았음에도 이런 결과가 나왔음은 특기할 만하며아직도 만연한 중세가 암흑기라는 인식을 타파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데도 필자는 왜 토미즘에 더욱 집중하고자 하는가그 까닭은 모든 것이 개인이 생각하기 나름이라는현대에 만연한 일련의 풍조에 대응하기 위해서이다본인이 소중한 만큼 타인도 동등하게 소중한 것은 객관이다인간 종()의 어느 발달 단계든 그것이 인간 종이므로 불가침적이라는 것은 객관이다인간 존재인 우리가 다른 인간 존재를 인식함으로써 같은 인간임을 인식하기 때문에 객관인 것이다.

또한 파악할 수 없는 존재를 없다고 치부하는 풍조에 대응하기 위해서이다파악할 수 없다는 것은 인간 지성으로 알 수 없다는 뜻이지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항상 열린 가능성이 중요시되는 현대 사회에서 이 문제에 대해서만 유독 확정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이성적인 것과 초()이성적인 것을 비()이성으로 묶어 배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이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검토하여일선 교육에 적용해야 한다.

근대철학은 종교의 때가 묻었다는 이유로 토미즘을 내던졌다개신교는 성경만으로 충분하다는 이유로 토미즘을 거부했다그러나 아직도 토미즘은 살아있으며생기를 잃지 않은 채 항상 있던 자리에 머물러 있다필자가 살펴본 구조적·방법론적 부분 외에도 일반 교육에 활용될 수 있거나이미 적용된 부분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더욱 철저히 연구된다면 교육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토마스 아퀴나스가 지푸라기라고 일컬은 방대한 저서를 양분으로 삼은 토미즘이교육이라는 광활한 바다의 소금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