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북한의 지명에 관한 조사 하다가 심영이 월북한 후에 행적이 궁금해서 알아봤다 걍 대한민국이랑 미군정 욕하는 기사 많다 뭐라고 하는지 알아보자


북조선 실록 제25권 1948. 11. 25.- 12.31. 510~ 518쪽


연극인 심영이 수기를 발표하였다.

 

우리 조국의 남북, 심영*

 

*심영은 서울 출신의 연극영화인으로 뒷날 조선영화인동맹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로동신문」 1961. 3.18.).

 

앞부분 생략

 

미제국주의자들은 자기들의 충견 리승만 도당들과 결탁해서 남조선의 문화예술을 어떻게 탄압했는가를 나는 내가 관계한 연극 부문만 들어서 그 죄상의 일단을 폭로하려 한다.


해방 후 남조선의 전체 연극인들은 옳은 력사의 방향에 따라 일찌기 자기들의 조직을 결성하였으며 또한 이 조직에 굳게 집결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절대다수의 연극인들은 자기들에게 부과된 력사적 임무인 민족연극 수립의 찬란한 기치를 들고 총궐 기하였다. 일제잔재 청소, 봉건유제 소탕, 국수주의 배격 등의 행동 강령을 내걸고 민전 산하에 가맹한 1945년 12월의 조선연극동맹 결성은 아직도 감격이 새롭다. 그러나 우리들이 민전 대렬에 참가하자 그날부터 미제국주의자와 그 주구들의 온갖 박해에 부닥치게 되었다. 놈들에게서 '빨갱이 배우'라는 칭호를 받고 우리들은 끊임없이 놈들의 테로 구금 협박의 탁류와 폭풍 속에서 싸우게 되었다.


??? ?: 야, 골수 빨갱이 맞잖아?


연극동맹은 실로 해방의 기쁨이 새롭던 1946년 5월부터 놈들의 야수적 탄압을 받게 되었다. 동맹 산하 극단 서울예술극장은 전남 순천 공연 중 상영 각본의 내용이 불온하다는 리유로 불법 탄압을 받았으며, 중요한 배우들은 모두 월여나 구금당하였던 것이다. 놈들이 말하는 불온한 내용의 각본이란 일제시대의 우리 애국투사들의 반일투쟁을 테마로 한 것이었다. 즉 "조국의 독립과 해방을 위하여 왜놈들과 싸운 것이 어째서 나쁘냐"고 놈들에게 물었을 때 이 파렴치한 야견의 수령 조병옥이란 놈은 "나오는 사람들이 모두 공산주의자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네 사람의 배우들은 '미군 정치안 문란죄'라는 명목으로 구류에 처하고 극단은 공연 중지를 당하였다.


여기에 M자 탈모 조병옥 나오네


다시 1947년 1월에 조선문화단체총련맹 주최로 거행된 종합예술제에서는 놈들은 더한층 그 독아를 나타냈던 것이니 이 예술제는 련맹 산하 각 동맹이 총동원되어 시 음악 무용 연극 영화로써 도시의 근로인민을 위하여 개최된 것인데 시민의 절대한 환호와 열광 속에서 진행되었었다. 이러한 반면 놈들의 탄압도 극악하여서 개막 초일 부터 우리는 온갖 박해와 싸우지 않으면 아니 되게 되었다.


우선 함세덕동무의 희곡 「하곡」은 그것이 일제시대의 강제공출을 주제로 한 내용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역시 미군정 하의 치안을 교란할 우려가 있다 하여 처처에 상처를 내어 그 연극에 성과를 삭감하였으며, 그 연극 진행 중 객석에 잠입한 테로단 놈들은 두번이나 폭탄을 던지었으나 우리들의 의기와 관객의 압력으로 연극 진행을 끝까지 볼수 있었다. 또한 종합예술제에서 조국의 통일과 민주와 해방을 위치는 내용의 림화동무의 시를 랑독한 문예봉동무와 붉은 옷을 입고 춤을 춘 무용가 박용호동무 와 애국가를 지휘한 김순남동무들이 계속적으로 검속되었고 공연 중의 화장실을 무장 경관들과 동반한 대한민청의 테로단이 포위하고 출연자를 협박 공갈하였다.


무뇌봉이 나옴


놈들이 야수적 박해와 폭압을 우리에게 가하였으나 우리는 이 예술제를 끝까지 수행하였다. 그것은 오로지 우리들의 뒤에 인민들의 열광적인 지지와 거대한 성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일 이것이 없었던들 우리는 우리의 맡은 역할을 끝까지 완수하지 못했을 것이다.


인민의 절대적인 지지와 성원!


이것이 항상 우리들에게 무한한 투지와 용기를 북돋아주는 위대한 힘이었다. 이러한 인민의 위력이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 사업을 실천함에 있어서 얼마나 귀중한 원동력으로 되는가함은 작년 3.1기념 공연이나 문화공작대에서 더 많이 느끼었다. 


동맹 산하 8개 극단이 동원되어 2주에 걸쳐 10만의 관객을 동원시킨 작년 3.1 기념 공연은 남조선 연극운동의 커다란 성과였다. 그러나 이 공연에도 이루 형언키 어려운 반동배의 폭압이 가하여졌다. 강도일제의 죄상을 그린 함세덕 작 「태백산맥」 과 탐관오리를 배격한 테마를 가진 사극 조영출 작 「위대한 사랑」 이 두 작품은 살인마 장택상의 비위를 거슬리어 수없는 상처를 입고야 말았다. 놈들이 일제를 욕함을 이처럼 두려워하고 꺼려하는 것은 놈들 자신이 바로 일제의 주구였다는 사실과 놈들 자신의 정책이 그대로 일제와 똑같기 때문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왜놈을 욕하는 것은 곧 자기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고 한 민족의 원쑤 장택상의 말은 그대로 놈들이 놈들 자신의 정체를 자백한 말이다. 해방된 조선에서 조선 인민이 자기들의 천추만대의 원쑤 왜놈을 욕하는 연극의 상연을 금하는 미제국주의자들과 그의 주구 리승만 도당들은 일제나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 인민의 영원한 적이라는 것을 이 한가지 사실로도 력력히 알수 있는 것이다.


장택상 나옴

 

나는 이들 영원히 저주받아야 할 도당들의 죄상을 좀 더 상세히 기록하기 위하여 나의 예술생활에 있어 길이 잊지 못할 문화공작대 이야기를 하여야 할 것이다.


조선문화단체총련맹 주최로 련맹 산하 전 단체가 동원하고 이에 남조선 전체 예술가 과학자가 총궐기하여 조직한 문화공작대사업은 시 음악 무용 영화 연극 그밖에 이동사진미술전람회, 강연회 등 다채한 프로그램으로 진정한 문화예술로부터 유리된 지방 인민에게 건전한 민주문화예술을 제공하여 그들의 정치적 각성을 높임에 이바지 하고자 단원 300여 명을 4대로 편성하여 제1대는 경남지방, 제2대는 충남북, 제3대는 강원도 일원, 제4대는 경북지대로 각각 파견되었었다. 이 획기적 사업은 역시 처음부터 인민대중의 열광적인 환영과 절대적인 지지 속에서 진행된 만큼 이와 정비례하여 놈들의 행패 또한 극악 극심하였던 것이다.


우선 그중 한 례를 들면 제1대의 부산 공연 중 테로단놈들은 이 공연을 파괴하기 위하여 갖은 협박을 다한 끝에 상연 중의 무대에 폭발탄을 던져 무대 한복판에 직경 약10여 인치의 구멍을 내고 그 결과 출연자와 관객에게 수많은 사상자를 내인 것을 비롯하여 각 지방에 파견되었던 우리들의 공작대에 대한 박해는 일일이 들어서 말할 수 없다. 이에 대하여 소위 미군정 경찰놈들은 수수방관한 것은 물론 공공연하게 테로단과 야합하여 가지가지 만행을 하였다. 다시 제2대는 공연 중 중요 간부들이 검속을 당하여 공연에 지장을 받았고 제3대는 춘천 공연 중 투석사건, 강릉 테로사건 등으로 대원이 부상을 당하고 피검당하는 등 사건이 속출되었다.


제1대 폭탄사건의 발생 이후 우리들 전체 대원들은 참으로 비장한 각오를 하고서 목적지로 향하였었다. 우리는 모두 흡사히 진지로 나가는 병사처럼 앞으로 닥쳐올 새로운 경험에 긴장하였고 엄숙하였다.


'죽을 런지도 모른다!' 이러한 생각을 한 것이 어찌 비단 나 한 사람만이었으랴? 제4대의 대장이란 중대한 책임을 지고 출발하기 전날 밤 나는 참으로 내 생애에서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장엄하고 엄숙한 순간을 체험할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제 나의 싸움터로 나간다. 나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여기에서 나는 1946년 3월 12일 밤 9시 연극을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서울 종로 대로상에서 살인 괴수 김두한(대한민청)도당들의 권총에 하복부를 관통당하여 월여 동안 사선의 병상에서 신음하며 생각했던 가지가지 당시의 내 심경을 회상 한다. 이제 문화공작대 제4대의 장도에 오르려 하는 나는 그때 병상에서의 내 결의, '내 예술로 나는 원쑤와 싸워서 이겨야 한다'는 굳은 결의를 다시 한번 견고하게 품었다. 일행 50여 명의 동무들과 깍지를 끼고 일로 목적지를 향하여 떠날 때에 나는 정녕 '문화의 전사'로써 일찌기 느끼지 못했던 높은 긍지를 전신에 느끼었으며, 우리 일행을 환영하기 위하여 인산인해를 이룬 대구 역두에서도 수 없이 그러한 감격에 잠겼던 것이다.



김두한: 공산당 할 거 안 할 거야?


흉악무도한 테로배들은 나의 전투 구역에 없을리 없었던 것이다. 역시 우리의 사업을 방해하려는 대구 경찰당국의 부당한 공연 중지를 항의하기 위하여 경찰서를 다녀 나오던 내가 바로 그 경찰서 문전에서 테로배의 불의의 습격을 받아 중상을 입었을 때 소위 치안을 유지한다는 무장경찰은 지척에 있으면서도 이를 방관하였다. 이것은 오늘 남조선의 경관배들이란 테로단과 이신동체이라는 것을 뚜렷이 증명하고도 남을 사실이다.


중략


50여 일에 걸쳐 200여 회에 달한 30여 지방의 '문화공작대'사업은 우리 문화예술사 에 길이 빛날 가지가지 성과를 거두고 끝났던 것이다. 그리하여 결의도 새롭게 우리들 은 다시 연극동맹의 지시로 8·15해방 2주년 기념 공연 준비에 착수했을 때 단 하루 에 2,000여 명의 민주진영 애국자들을 검속하는 반동배의 야만적 폭행에 46명의 연극인이 피검되어 기념 제전을 중지함에 이르렀다. 이렇게 해서 놈들은 우리들의 예술 운동의 자유를 박탈하려는 것이었다. 8·15를 앞두기 사흘 전 우리들은 동맹회관에서 놈들의 총검에 찔려가며 끌려갔다. 그래도 우리들은 서로서로 격려하며 태연하였다.


나는 놈들에 대한 극도의 중오감을 억제할수 없어 마냥 대로에서 무대처럼 놈들에 대한 노호를 폭발시키고만 싶은 충동을 어찌할수 없었다.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것이 '죄'가 되어, 조국이 미제국주의의 예속화됨을 반대하는 것이 '죄'가 되어, 우리의 민주주의 민족문화건설운동이 또한 '죄'가 되어 수많은 시인과 음악가와 배우들이 해방 된 조국에서 또다시 고랑을 차고 쇠사슬에 매여져 철창 속으로 끌려가야 함이 얼마나 통분한 일이냐?


중략


조국의 통일과 해방을 위하여 외세의 노예 됨을 반대하고 놈들의 단독선거를 반대 배격했다고 우리 애국동포들을 무참히 살륙하고 줄줄이 목을 매어 달아놓은 놈들이 누구냐?


두말할 것 없이 이것은 모두 미제국주의자들이며, 그들의 충실한 졸도들의 소행인 것이다. 로동신문 1948. 12. 24.

 

바로 1948년 4월 나는 탈옥수처럼 험준한 38선을 비밀히 넘었다. 위대한 쏘련군의 고귀한 피의 대가로 해방되었고 우리 민족의 절세의 애국자이시며 민족적 영웅이신 김일성 -생략- 로동신문 1948. 12. 25.



???: 그러게 왜 공산당인가 뭔가 해서 이 모양이냐?

 

제25권(1948. 11. 25.~12.31.) 510- 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