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죽봉대로

 국도 1호선의 농성광장에서 동운고가까지의 짧은 구간으로, 1순환로의 서쪽을 담당한다. 금남로 기준에선 서쪽이 맞긴 하나, 개발 방향이 서쪽으로 치우친 광주 시가지 전체에서 보면 어느덧 광주 교통망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서쪽으로 뻗는 북문대로, 하남대로, 무진대로, 상무대로가 모두 2km 남짓의 짧은 죽봉대로에 접해 실로 엄청난 교통량이 집중된다. 특히 무진대로와 교차하는 광천사거리의 위엄은 실로 무지막지하다.

 도로의 이름은 이 지역의 의병장인 죽봉 김태원을 기리는 것으로, 김태원의 동상이 농성광장 도로변에 서있다.


 죽봉 김태원은 구한말 나주출신의 의병장이다. 의병활동 이전에는 동학운동에 잠깐 함께했지만 계속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는 일본군에 대항해 동생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고 선봉장으로 활약한다.

 대표적인 성과가 동복에서 일본 기병부대를 상대로 싸워 적장 요시다의 수급을 취한 것인데, 이 때는 바로 이전에 설명한 이기손, 조경환 등과 함께 이뤄낸 의병들의 연대의 성과였다.

-농성광장의 죽봉 김태원 의병장상

 광주 도시철도 1호선은 역마다 테마를 가진 경우가 많다. 농성역의 경우 호남학을 담당한다고 하는데, 호남의 저항을 테마로 잡은 듯 하다. 호남의 바다를 지킨 이순신 장군이 언급되기도 하고, 실제 5•18 당시에는 농성광장이 저항의 장이기도 했다.

 


22. 필문대로

 서방사거리에서 남광주교차로까지 1순환로의 동쪽을 담당한다. 순환도로 중 시내와 가장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데, 문화전당(구도청)을 기준으로 가장 가까운 대로로 시내와 관련된 많은 교통량을 분담한다.

 대수요처인 전남대와 조선대의 캠퍼스를 도로 양쪽 끝에서 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교대, 동강학원의 학교군을 비롯한 수많은 목적지로 향하는 학생들로 가득한 길이기도 하다.

 순환도로중 유일하게 전구간이 도시철도 2호선 본선 경로로 포함되는, 광주 전체에게나 동구 주민들에게나 필수불가결한 길.


 필문 이선제는 현재의 남구에서 태어난 인물이다. 세종대의 문인으로 집현전 학자들이 으레 그렇듯이 장장 20여년동안 주로 실록, 고려사 편찬 등의 역사와 관련된 업무를 했다.

 이후 10년동안은 문종의 섭정을 도와 정치적으로 활발한 움직임을 보인다. 주요 관직에 발탁되고 여러 상소를 올려 자신의 견해를 아낌없이 왕에게 올렸으니 조정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으리라. 그런데 실록에는 그의 사망이 언급되지 않는다고 한다.

 광주에서 처음 향약을 펼쳐 지역사회의 질서를 잡고, 지역의 인재발굴을 위해 힘썼다고 하니 이선제는 지금까지 소개한 많은 인물들의 태동이 되어준 것이 아닌가 싶다.


-남구 대촌동의 괘고정수
 이름의 뜻은 '북을 걸어놓은 나무'라는 뜻이다. 필문의 가문에서 장원이 나올 때마다 나무에 북을 걸어 쳤다고 한다. 이선제 이후 대를 이어 무려 6번이나 울렸다고...



23. 서암대로

 동운고가에서 서방사거리까지 순환도로의 북쪽을 담당한다. 전구간이 북구인 도로로, 우연찮게도 서방에서 운암까지 이어주는 길 이름이 또 서암이다.

 각각 1, 22, 29번 국도의 일부인 다른 도로와 다르게 서암대로는 국도에 포함되어있지 않다. 역할또한 평행하게 뻗는 무등로와 비슷한데, 철길에 가로막히지 않은, 챔피언스필드나 광주역이 있고 시내에 보다 가까운 무등로에 비해 서암대로가 갖는 특징은 도로가 더 넓다는것 뿐일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넓은 도로라는것은 큰 장점이 되어 동운고가와 서방사거리라는 두 결절지(그리고 그 사이의 전대사거리)를 빠르고 쾌적하게 이어주는 길이 되어준다.


 이 길이 꿰뚫고 지나가는 중흥동은 서암 양진여가 평생을 산 곳이다. 그의 50여년의 인생 중 대부분을 우리가 알 수는 없지만, 그의 마지막은 의병장이었다. 사람을 모아 대장으로 추대되고, 꽤 대단한 성과를 쌓는다. 그를 잡기위해 일본군 광주수비대장이 별도로 움직여야 할 정도였으니 성가시게 구는데 성공한 모양이다.

 무기도 훈련도 시원찮은 의병으로는 정말 화려한 전적을 자랑하는 그였지만, 마모되어가는 전력과 심한 부상이 그의 발목을 잡는다. 대토벌이 시작되고 헌병대의 기습으로 끝내 체포되어 사형에 이르는 순간까지도 그는 전투의지를 불사르던 위인이었다.

-서암 양진여(좌)와 설죽 양상기(우)

 부자 의병장으로 활약한 양진여와 양상기의 초상이다. 비단 이 둘 뿐만 아니라 양진여의 동생 양동골, 부인 박순덕 역시 항일활동을 하다다 형을 받거나 고문을 당하는 등, 온가족이 뜻에 따라 행동한 위인들이었다.



24. 설죽로

 설죽로가 순환도로는 아니지만, 서암의 길을 설명하며 어찌 그의 아들을 따로 생각할 수가 있을까. 설죽로의 이름은 양진여의 아들 양상기를 기리는 의미로, 두 도로가 신안동에서 만나는 것은 마치 두 사람의 인연을 상징하는 것 같다.

  서암대로에서 일곡동을 향해 뻗는 두 길중 서쪽이다. 꽤나 길이 불규칙한 것이 복개도로라고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이 길 밑에 있는 용봉천은 광주도시철도 2호선이 설죽로 지하에 생기면 어떻게 되는걸까.


 양상기에게는 대한제국군으로 근무하다 강제해산, 광주경찰서 순사로 근무하다 태만으로 파면이라는 독특한 이력이 있다. 애초에 일본군 동향을 파악하고자 경찰서에 들어갔다고 하니 일을 제대로 했다고 기대하기는 어려워보이고, 결정적으로 파면 결정에는 의병장으로 일대를 호령하던 아버지의 영향이 분명히 있었다.

 이렇게 된 차에 그도 의병이 되어 아버지를 따라가더니만, 전직 군인과 경찰이라는 준비된 이 인물은 바로 의병장으로 추대된다. 역시 의병장인 아버지와 함께 싸우다 양진여가 처형당한지 몇달 뒤에 그 역시 처형당한다.



25. 대남대로

 순환도로의 남쪽, 농성교차로에서 백운교차로를 지나 남광주교차로로 이어지는 길이다. 위 교차로들이 광주 교통망에서 어떤 위상을 차지하는지 감안해보면 대남대로는 광주의 남부 그 자체를 담당한다고 봐도 좋을 듯 하다. 특히 남구에서는 이 도로를 제외하면 이동을 진심으로 걱정해야 할 판이다. 백운교차로의 고가도로 철거소식만큼이나 우회도로에 대한 소식에 눈과 귀가 집중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대남이 사람이름은 아니고, 도시이름이다. 타이완의 타이난시를 한국식으로 읽었을 뿐이다. 1968년 처음 대남로로 지어진 꽤 유서깊은 이름이기도 하다.

 과거에 존재했던 우호도시들을 딴 도로명, 예컨데 광저우로, 메단로, 센다이로 등이 하나둘 사라져가도 그 자리에서 50년 넘게 이름을 지키고 있다. 아마 타이난로가 아닌 대남로라는 보다 친숙한 읽는 방법과 오랜 역사의 결과물이 아닌가 싶다.


 안타까운 사실 하나, 광주에 있는 중화인민공화국 총영사관이 대남대로를 주소로 하고 있다. 단순히 우연이 아니라, 과거에는 도로이름이 대남대로인 만큼 광주와 타이난의 우호도시 인연으로 하여금 중화민국에서 설치한 건물이었다고 하는데... 중공이 하나의 원칙을 들먹이며 국기를 바꿔달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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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남대로, 이 시리즈 이름이 인물열전이 아니라 인문학사인 이유가 드디어 밝혀졌다. 인물들이 생각보다 많다!

조사하다보니 양림동에 또 인물들이 유난히 많다!

다음은 그거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