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적인 범위의 사프미(라플란드) 지방

사미인들의 상징기


  사프미(Sápmi)지방의 거주민인 사미인들은 스칸디나비아 반도 북부에 주로 거주하며, 이 지역은 라플란드(Lapland)라고도 함. 사실 '핀(Finn)'이라는 명칭과 '라프(Lapp)'라는 치환가능하지만, '라프'는 칭임. 그러니 적어도 민족과 언어명은 사미인, 사미어라고 하자.

    면적은 400,000km2, 인구는 약 200만 명임. 거의 절반이 러시아인이며, 나머지는 노르웨이인, 스웨덴, 핀란드인이고 사미인들은 8~10만명 정도임. 

노르웨이에 4-6만명, 스웨덴에 1.5-3.5만명, 핀란드에 9000명, 러시아에 2000명이 삼.


  • 사미어

  (사미어 분포. FS1이 서부, FS2가 중부, FS3이 동부 사미어)

   사미인들은 사미어를 쓰는데, 우랄어족 핀우그리아어파로 핀란드어, 헝가리어, 에스토니아어와 같은 분류에 속함. 사미어군은 크게 세가지, 작게는 9가지로 나뉘는데 사프미 서부, 중부 노르웨이와 중서부 스웨덴의 서부 사미어, 북부 노르웨이와 북동부 스웨덴 그리고 북부 핀란드의 중부 사미어, 러시아 콜라반도의 동부 사미어로 나뉨.


  • 사미인의 역사

    중부~상부 볼가강에 살던 사미인의 시조는 기원전1500년 즈음 북서쪽으로 이동함. 이때 카렐리아나 라도가에서 멈춘 계열은 핀족이 되고, 현재의 핀란드에 진입한 계열은 사미인이 됨. 스칸디나비아의 청동기시대에 이르러, 사미인 계열은 노르웨이 북부의 핀마르크나 러시아의 콜라반도까지 북상하고 핀란드 남부에 남은 사미인은 핀란드에 동화됨. 


      철기 시대, 사미 문화는 노르웨이계의 압박에 직면하는데, 그 둘이 우호적이었는가에 대한 논쟁이 있지만 노르웨이 서부 해안의 사미인들은 노르웨이의 영향을 크게 받음. 중세에는 노르웨이가 핀마르크까지 영향력을 확대하고, 세금을 받음. 


     16세기부터 덴마크-노르웨이 연합왕국, 스웨덴, 러시아의 세금 압박이 심해짐. 특히 스웨덴은 덴마크-노르웨이에 대서양으로의 진출이 막혀 있었고, 모스크바 공국이 콜라 반도에 진출한 상황이었기에 대서양 항구를 원했음. 이에 스웨덴은 모든 사미인에 대한 세금 징수권을 주장하며 보트니아 만의 최북단에 세금 징수원을 파견함. 러시아는 핀마르크의 할슈타드에, 노르웨이는 콜라 반도 내부까지 세금 징수원을 보냄. 세금 압박에 사미인들은 순록 개체수가 줄자 해안 피오르드에 거주하며 목축, 어업과 사냥을 병행함. 이 시기부터 대규모 순록 목축이 확립된 것으로 추정됨.


스웨덴 왕국 라플란드(그중 서부가 Lappmarken)

    스웨덴은 이 지역에 강한 관심을 보이는데, 구스타프 1세는 1751년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수계에 따라 국경을 확정하고 '통일'을 이룸. 이때 국경 조약과 함께 'Lapp Codicil of 1751'이라는 위 조약의 부록 조약이 체결되는데, 사미 순록 유목민들의 자유로운 국경 통과를 보장함. 현재 스웨덴 북부, 스웨덴 왕국이 정복했던 사미인 거주지역을Lappmarken (Lappmark Regulations)이라 부르는데, 사미인들은 은 광산에 끌려가거나 강제노동당하는 등 탄압을 받음. 사미인들은 스웨덴에 세금을 내느라 가난해졌고, 스웨덴은 비 사미인들을 이주시키는데 이들이 사미인들의 땅을 빼앗음. 이 시기에 라플란드가 설립됨. 


     이 시기에 노르웨이 사프미 지역에선 비교적 온건한 통치가 이루어지는데, 이 지역 사미인들은 노르웨이인들보다 경제적으로 크게 뒤떨어지지도 않았고 자유 무역을 허용받음. 다만 루터교 개종 압박이 강했는데, 기존의 북 같은 샤머니즘 용품들은 불태워짐. 그러나 해안가에 퍼져 있는 노르웨이인 거주지는 압방과 갈등을 심화시킴. 이 시기, 러시아는 콜라 반도와 노르웨이 국경에 정교회 선교사를 보내고 성당을 지음. 적어도 이때까지는 노르웨이의 사미인들은 북부의 노르웨이인들이 싼 수산물 가격에 가난한 반면 다양한 산물을 얻으며 경제적으로 독립적인 덕분에 자치적인 삶을 누림.


    19세기, 사미인들은 큰 탄압을 받게 되는데, 일단 사프미 지역 내에서 국경이 확정됨. 노르웨이와 스웨덴은 이전에 국경이 확정되었지만 핀란드와 러시아는 아니었다고 언급했는데, 1809년 핀란드가 러시아에 넘어가고 1826년 노르웨이와 러시아가 국경을 확정지음. 이 말은 겨울에는 핀란드 라피지역에, 여름엔 노르웨이 핀마르크 해안을 오가던 순록 목축이 불가능해짐을 뜻함. 다만 1940년까지는 스웨덴과 노르웨이 국경을 목축하는 사미인들이 지날 수 있었음.(1751년 조약에 따라) 그러나 나치 독일이 노르웨이를 점령하며 중단되었고, 종전 이후에도 국경 통과는 불허됨. 노르웨이 해안 도시들이 수산물 수출로 경제발전을 시작하자, 구시대적 방법을 가진 사미인 어업은 밀려남. 1840년대, 스웨덴은 Laestadius 운동이라는 강한 루터교 개종을 밀어붙이고, 이는 국경을 넘나드는 각성을 일으킴. 1852년 Kautokeino에서 일어난 봉기로 장관이 구타당하고 지역 상인들이 살해됨. 이 사건의 주동자들이 처형되거나 감옥에 간 뒤로 이 개종 운동은 입지를 얻고, 사미 지도자들은 협조적으로 변함. 노르웨이에선 1860년대부터 노르웨이 민족주의가 발흥하고, 1900년대 심화됨에 따라 사미어가 학교와 교회에서 금지당함.


     20세기, 사미인들은 큰 피해를 입는데, 노르웨이에서는 노르웨이 이름을 가지고 노르웨이어를 할 수 있어야 토지를 소유하거나 구매할 수 있었으며, 사미인 자녀들은 강제로 다른 지역에서 위탁교육을 받아야만 했음. 1950년대 제도적으로 '사미인'을 정신이상자로 분류하기도 했음. 스웨덴에서는 키루나 등 북부 광산이 개발되며 사미인들은 땅을 잃었고, 스웨덴 인종생물학 연구소가 설립되며 사미인의 '열등함'을 입증하기 위해 무덤이 파헤쳐지기도 함. (이때 위 연구소에 의한 제도적 우생학적 불임이 스웨덴에서 자행되는데, 사미인들에 대해서도 일어났는지는 언급이 없음) 러시아에서는 콜호스가 설치되고 순록 유목이 집산화되는 동시에 타 시베리아계 민족 및 러시아인이 이주되며 주민족 지위가 위태로워짐. 

1940콜라반도 민족분포. 초록 사미, 주황 러시아, 노랑 카렐리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겨울전쟁, 노르웨이 전역, 계속전쟁, 라플란드 전쟁을 거치며 사프미는 크게 파괴됨. 노르웨이의 나치 괴뢰 크비슬링 정권은 노르딕 아리아인의 우월성을 강조하며 사미인을 '청소'하고자 했음. 광산 및 철도 건설 강제노동은 물론, 강제이주와 강제 불임은 드문 일이 아니었음. 핀란드 북부 전역에선 나라가 갈린 사미인들이 서로 싸우게 됨. 그래도 핀란드의 사미인들은 설원 작전능력의 우월함을 인정받아 대우받았지만, 노르웨이에서 강제징용된 사미인의 군수물품을 지원받으며 소련의 사미인과 싸웠다는 슬픈 역사가 있음. 핀란드 점령지의 사미인들은 핀란드가 피난을 도왔지만, 그렇지 못한 사미인들은 소련의 '집중 캠프'나 감옥에 갖힘. 추축국의 패색이 짙어진 이후 핀란드가 독일과의 제휴를 끊자, 나치는 핀란드의 라피와 노르웨이의 핀마르크에서 철수하며 불타는 폐허로 만드는데, 가옥들이 파괴되고 거주민들이 강간당했으며, 피해자들은 트라우마 속에 자살하기도 함.


     전후에도 노르딕 국가들과 사미인들은 발전소 건설, 사미 공동체 문제 등으로 갈등을 빚는 동시에 1946년 노르웨이에서 사미어 라디오 시작, 사미어 교육 허가 등이 이루어지기도 함. 반면 산업화, 도시화 등으로 정체성은 크게 상실됨. 러시아에서 독립했던 핀란드는 사미에 친화적이었는데, 1973년 사미 자치의회를 설립함. 노르웨이는 1989, 스웨덴은 1993, 러시아는 2010년 설립함. 1992년, 사미인들은 2월 6일이라는 그들의 국가적 날을 정하게 됨.

  

   북유럽 국가들의 사프미 개척사는 근대 식민지 개발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느낌을 받음. 사미인들은 정복과 전쟁의 피해자였기도 하고. 다음번엔 소말릴란드 독립사로 찾아오겠습니다.